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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4 14:10

바닐라 클럽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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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게 참 구차하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영어인데도 몹시 낯익은 목소리였다. 나는 울음을 멈추고 침대에 엎드린 그대로 
귀를 쫑긋 세웠다. 따뜻한 손길이 내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 손길은 척추를 따라 위로 올라가더
니 어깨에서 멈추었다. 
[나도 너랑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부드러운 실크가 내 허벅지를 스치는가 싶더니 누군가 내 엉덩이에 앉았다. 그러면서 내 뒤덜미를 아주 
천천히 주물렀다. 
[시간이 모든 걸 다 해결해 줄 거야. 긴장을 풀어.]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그 손길에 나를 맡겨 버렸다. 낯선 방이고 낯선 상황이었지만 더 비참한 일이 생
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마음을 정하고서 눈을 감아 버렸다. 
[내가 널 오해했어. 너를 막대한 거... 미안해. 이해해 줘.] 
내 등을 타고 앉은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곽 재원이었다. 그러나 잠깐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라면 곽 재원 아니라 누구라도 좋았다. 나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 
곽 재원이 대답해 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나? 이유를 꼭 말해야 하니?] 
곽 재원이 뭐라고 대답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싫음 관두고...] 
[아냐. 얘기해 줄게.] 
그러면서 곽 재원은 손을 멈추었다. 
[난 너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너하곤 안 어울리는 곳이거든.] 
나는 등으로 고개를 약간 돌리다가 그만 두었다. 그러자 곽 재원이 몸을 숙여 내 볼에 얼굴을 갖다댔다. 
복숭아 냄새가 났다.
[넌 이 세계를 몰라. 여기 사람들은 특별해.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거물들도 많지.] 
나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이를테면 우 강호나 손 정윤같은?] 
[우 회장 부인?] 
곽 재원이 푸푸 웃는 바람에 볼이 간지러웠다. 
[그 여잔 바닐라야.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지. 그래. 너처럼.] 
[무슨 소리야? 나를 여기로 불러 들인 게 바로 손 정윤이야.]
[호호호. 미쳤니? 그 여자가 뭘 안다고? 우 회장이 부인 이름으로 널 속였나 보다.] 
나는 고개를 획 돌렸다. 그 바람에 입술이 곽 재원의 입술과 부딪혔다. 곽 재원은 내 입술을 지그시 누
르면서 말했다. 
[왜 그렇게 놀래? 나도 왜 너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넌 선택된 사람이야.] 
내가 몸을 돌리자 곽 재원은 살짝 엉덩이를 들어 주었다. 곽 재원은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로 은빛 슬립 
한 장을 걸치고 있었다. 나는 살푼 미소를 짓고 있는 곽 재원을 올려다보며 잠깐 머뭇거렸다. 
[선택? 그래서 온 몸에 문신을 새겨 넣었다든?] 
[후후. 걱정마. 내일 눈을 뜨면 얼굴 문신은 깨끗이 지워질테니까.] 
[정말?] 
곽 재원은 몸을 일으키려는 내 어깨를 지긋이 눌렀다. 
[그럼. 나도 바닐라 클럽에 들어올 때 그랬어. 그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오고 온 몸에 긴장이 쫙 풀려 나른함이 밀려왔다. 
[그건 이 세계로 들어오는 절차일 뿐이야.] 
곽 재원의 목소리는 귀에서 기분좋게 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내 머리 속에서 베커 부인의 시커먼 
엉덩이가 툭 튀어 나와 헛구역질을 했다. 
[왜 그래?] 
나는 곽 재원의 가슴을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나를 농락하고 능멸한 것도 다 통과 절차냐? 내가 얼마나 모욕감을 느꼈는지...] 곽 재원은 내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 여기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겪은 일이니까. 넌 여기 오기 전까지 이 
세계를 맛보지 못했지? 경험이 없었던 너한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런만큼 
더 짜릿했을텐데...] 
나는 곽 재원의 손을 치우며 언성을 높였다. 
[짜릿! 내가 너처럼 변탠지 알아?] 
곽 재원은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너 지금 나한테 변태라고 했니?] 
[그랬다, 왜?] 
[정말 꽉 막혔구나. 넌 섹스를 왜 하니?] 
[왜 하긴? 사랑하는 여자와...]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왜 섹스를 하는지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잘 들어. 섹스는 자기가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하는 거야, 알겠니?]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섹스를 해야만 아이가 생기는 게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섹스하는 것도 아니지. 안 그래?] 
맞기는 한 말이었다. 
[넌 섹스를 하기 위해 결혼을 할 거니? 섹스, 결혼, 사랑 이 중에서 어떤 게 먼저겠니? 이 셋 중에서 강
제성이 없는 건 섹스밖에 없어. 생각해 봐. 누구나가 결혼하는 건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지. 하지만 섹스는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왠 지 알아? 몸이 그걸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야.] 
나는 겨우 반박할 구실을 찾아냈다. 
[섹스를 하지 않고 사람들도 많아. 그리고 때리고 모욕을 주는 게 무슨 섹스냐?]
의외로 곽 재원은 순순히 수긍을 했다.
[네 말이 맞아.] 
그러면서 곽 재원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말이야, 섹스가 사랑이나 결혼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에게 타성에 젖은 섹스는 네가 느낀 굴욕보
다 더 굴욕적이야. 그런 섹스는 짐승들도 다 하는 거야. 기계적이고 규격화된 섹스는 섹스가 아니야. 그
건 자학이야.] 
나는 그 말에 신경이 몹시 그슬렸다. 
[같잖은 섹스 강의는 집어 치워.] 
[그럴까? 좋아. 그럼, 네가 원하는 섹스를 해 봐. 내가 파트너가 되어줄게.] 
내 성기로 한꺼번에 피가 쏠리는 게 느껴졌다. 그때까지도 곽 재원에 대한 환상의 불씨가 내 의식 밑바
닥에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네가 당한 모욕을 내게 되돌려 주어도 좋아.] 
곽 재원은 천천히 일어나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서더니 슬립 끈을 어깨 아래로 밀
어내렸다. 스타킹처럼 얇고 탄력있는 천으로 만들어진 옷이 깍아 놓은 듯한 곽 재원의 몸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곽 재원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건 가슴이 터질 정도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아서 곽 재원을 쳐다 보았다. 그런 곽 재원의 눈이 마주칠 때면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숨이 차 오르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런데 정작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거짓말이다. 나는 그새 벌써 머리 속으로 내가 하고픈 일들을 몇 가
지나 떠올리고 있었다. 곽 재원에게 잘 입고 다니던 투피스를 입힌 다음 쫙쫙 찢으며 강간하듯 섹스를 
하고 싶었다. 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 몸을 샅샅이 혀로 핥게 하고 심지어는 내 항문을 핥게 하고 싶
었다. 위협을 하거나 때리면서 내 성기를 빨게 하고 싶었고, 개처럼 엎드리게 한 다음 사정없이 성기를 
쑤셔대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세상에서 제일 간드러지는 신음 소리나 나를 찬양
하는 소리를 하도록 하고 싶었다. 만약 말을 듣지 않는다면 손바닥이나 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리거나 발
로 차고 싶었고, 내게 완전히 복종시키기 위해 내 오줌을 마시게 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똥도 먹이고 
싶었다. 그렇게 섹스가 끝나면 엉덩이나 배에 내 이름을 문신으로 새겨 놓아 언제까지든 나를 잊지 못하
게 만들고 싶었다.
곽 재원을 침대에 눕히고 키스를 하고 가슴을 어루만지다가 다리를 들어 성기를 밀어넣고 엉덩이를 움직
이다가 사정을 해 버리는 건 너무 밋밋했다. 만약 곽 재원이 아니라 결혼할, 혹은 결혼한 여자라면 그렇
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뭘 망설여?]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곁눈질로 분홍빛 젖꼭지와 음모가 보일 듯 말 듯 가려진 곽 재원의 몸을 훑어 보
았다. 마음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덤벼 들고 싶은데, 그렇게 된다면 곽 재원의 말에 동의하는 셈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내가 너하고 왜 하냐?] 
그렇게 말을 하긴 했으나 내 속은 새카맣게 타고 있었다. 
[내가 거북하지? 다른 여자라면 괜찮을 거 같아?] 
[너보다 나은 여자라면...] 
입 안에서 그 말이 맴돌았다. 
[거 봐. 넌 상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중적인 인간이야. 너같은 인간이 바로 변태인 거야. 
왜 우리 클럽 이름이 바닐라 클럽인지 모르지? 우리가 보기엔 너같은 인간이 바닐라지만 따지고보면 너
같은 인간이 진짜 변태니까 우리가 바닐라인 게 맞잖아. 내 말이 틀리니?]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할 말이 튀어오르지 않았다. 
[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아. 각자 원하는 걸 얻는 거야. 남을 지배하면서 
자기 만족을 얻는 사람도 있고, 지배 당하면서 만족을 얻는 사람도 있어. 지배 당하는 사람은 일방적으
로 당하기만 하는 것 같지? 천만에. 그 사람들은 있지 자기 고통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아. 고통의 한
계를 넘어서려고 노력은 하지만 그건 그 사람들이 원할 때만 가능한 거야 . 그 사람들이 지배하려는 사
람들을 지배하는 거야. 내 말 알겠니?]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넌 어느 편이지?] 
[나? 지배 당하는 쪽이야.] 
[회사에서 안 그랬잖아?] 
곽 재원은 슬립을 입으며 말했다.
[그건 섹스가 아니잖니. 그리고 지배해 봐야 지배 당하는 기분을 짐작하지, 안 그렇겠어?]
곽 재원의 몸이 가려지자 내 성기가 다시 불끈 솟아 올랐다. 곽 재원의 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넌 기회를 잃었어.] 
곽 재원은 내게 윙크를 하며 뒤돌아섰다. 나는 팔을 뻗다가 슬그머니 내렸다. 곽 재원은 고개를 돌려 나
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있지, 너희들을 이해 못하겠어. 왜 섹스에 대해서만은 그렇게 꽉 막힌 건지... 서로 원하기만 한다
면 어떤 행위도 상관없는 거 아니니? 누가 자기 침실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놓은 줄 아는 모양이야. 
길에서 돈을 주고 여자를 사려고만 들어. 여자라도 살 수 있음 다행이지. 성기만 빌려 자위 행위하는 거
랑 무슨 차이가 있겠니? 섹스를 너무 몰라. 정말 불행한 일이야.] 
자위 행위로 지낸 숱한 밤들이 일제히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 밤마다 나는 수백, 아니 수천의 여자와 
그만큼이나 많은 체위로 섹스를 했다. 그렇게 내 청춘은 소모되고 있었다. 마쵸맨에게 당하지 않았거나 
정말로 마음에 드는 여자를 한 명만 만났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뻗어나갔
다. 나는 곽 재원에게서 등을 돌려 버렸다.
[참, 내가 잊은 게 있는데, 오늘 네 모습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생방송됐어.] 
나는 고개를 획 돌렸다. 
[너도 뉴욕 바닐라 클럽에서 멀티비전 본 적 있지? 너무 걱정마. 바닐라 클럽 회원들만 볼 수 있었으니
까. 네 인터넷 메일 주소도 다 알고 있으니까 누군가는 너한테 접근을 할 거야. 그 중에는 네 마음에 드
는 사람이 분명 있겠지. 아무튼 우리 회원이 된 거 환영해.] 
너무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곽 재원은 사뿐사뿐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야! 거기 서!]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곽 재원에게로 뛰어갔다. 그러나 곽 재원은 태연하게 팔짱을 끼면서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제야 나는 발가벗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얼른 몸을 틀며 성기를 손으로 가
렸다. 
[왜? 아직 나한테 볼 일이 남았니?] 문신과 채찍 자국으로 얼룩진 내 몸은 나를 주눅들게 만들기에 충분
했다. 곽 재원이 쿡쿡 웃는 소리가 나를 더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다. [넌 그렇게 질질 끌려다니다가 말 
운명이야. 평생을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다 죽겠지.] 
그 말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곽 재원을 사납게 노려 보았다. 
[너만 그렇다는 건 아니야. 대개들 너처럼 살지. 인정하기 싫겠지만 내 말은 사실이야, 안 그래?] 
나는 이를 앙다문 채 말했다. 
[갈보같은 년...] 
[갈보? 호호호.]
곽 재원은 가소롭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내 볼을 톡 쳤다. 
[그러는 넌? 네 눈에는 여자들이 모두 갈보같이 보이겠지. 왠 줄 알아? 네 머리 속에 더러운 생각들만 
가득차 있거든. 내 말 틀렸니? 네가 그렇다는 건 여기에 있는 사람 모두가 다 알아. 어제 너에 대한 보
고서가 인터넷에 올려졌거든...] 
그 순간 내 눈이 확 뒤집혀 버렸다. 그런 곽 재원은 내 눈을 보지 못했다. 
[그 중에 내 얘기도 들어 있어서 너에 대한 오해를 풀었지. 나에 대한 너의 욕망이 그렇게 강한 줄 몰랐
어. 진작 말했더라면 널 더 잘 대해 줄 수도 있었을텐데...] 
나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날 어쩌려는 거야! 지금도 나를 촬영하고 있다면 잘 들어, 이 변태 새끼들아! 난 너희들처럼 되
고 싶지 않을뿐더러 너희같은 년놈들을 찢어죽이고 싶을 정도로 경멸해! 알겠어!] 
갑작스런 내 행동에 곽 재원도 놀랐는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어디가 이년!] 
나는 곽 재원의 팔을 잡아 당겼다. 곽 재원은 뒤로 몸을 빼며 버텼지만 내가 재빨리 몸을 날려 제 목을 
팔로 감싸 죄는 걸 막진 못했다. 
[어서 나와!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누구야! 안 그러면 이년을 죽여 버리겠어!] 
곽 재원은 내 팔을 잡아떼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소리쳤다. 
[미쳤어! 왜 이래? 여긴 우리 둘 뿐이야!] 
[웃기지 마!] 
[다들 보고 있잖아!] 
[캑캑. 놔! 숨막혀 죽겠어.] 
곽 재원은 온 몸을 버둥거리며 저항을 했다. 곽 재원의 긴 손톱이 내 팔뚝을 파고 들어 피가 주르르 흘
러나왔다. 그러나 나는 팔에 힘을 더 주었다. 나는 눈을 번뜩이며 카메라가 숨겨졌을만한 곳들을 찾으며 
고함을 질러댔다. 
[야이 들아, 어서 안 나와! 이년이 죽어야 나오겠냐!] 
내가 곽 재원을 죽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 팽팽한 침묵만이 방 안에 가득했다. 그 침묵은 나는 섬뜩하
게 했다. 나는 곽 재원을 획 밀쳐 버렸다. 바닥으로 쓰러진 곽 재원은 목을 감싸쥐며 캑캑거렸다. 나는 
곽 재원에게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어서 말해! 모두 어디 있어! 다 죽여 버리고 말 거야.] 
곽 재원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 하나도 어쩌지 못하는 주제에 누굴 오라고 난리야? 넌, 아무 것도 아닌 놈이야.]
나는 곽 재원의 허벅지를 힘껏 걷어찼다. 
[뭐? 내가 어떻다고? 한 번 더 말해 보시지?] 
곽 재원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닌 놈이라구.] 
나는 발 뒷꿈치로 곽 재원의 등을 내리찍으며 소리쳤다. 
[아악!] 
[뭐라고? 뭐라는지 내 귀엔 안 들려.] 
곽 재원은 아예 얼굴을 바닥에 대고 헉헉거렸다. 나는 다시 곽 재원의 등을 내리찍었다. [살려달라고 소
리질러 봐! 어서!] 
그러나 곽 재원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도 머리를 흔들어댔다.
[이년이 죽을려고 환장을 했나?] 
나는 발로 곽 재원의 잘룩한 허리를 짓밟아 버렸다. 
[악!] 
[이제 내가 어떤 놈인지 알겠지? 난 대단한 놈이야!] 
[헉헉... 미친 놈...] 
나는 바르르 떨리는 곽 재원의 머리를 짓밟으며 말했다. 
[뭐? 다시 말해 봐. 어서!] 
[으으... 미친 놈!] 
곽 재원의 날카롭고 높은 고함 소리는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곧 나는 다리에 힘을 주어 곽 재
원의 머리를 짓밟았다. 
[누구야! 누가 날 이렇게 만든 거야! 손 정윤이야? 우 강호야? 아님 마 동식이야? 그것도 아니면 너야? 
말 안하면 널 진짜 죽여 버리고 말겠어.] 
내 발바닥으로 곽 재원의 볼이 씰룩거리는 게 느껴졌다. 
[후후...]
곽 재원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죽여봐.] 
[죽여 봐? 좋아. 널 죽여주지.] 
나는 곽 재원의 엉덩이 위로 타고 올라가 슬립을 찢어 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얇은 옷을 와락 뜯
어냈다. 곽 재원의 희뽀얀 살결이 그래도 드러났다. 나는 팔을 곽 재원의 허리 아래로 넣어 들어 올렸
다. 곽 재원의 탱탱한 엉덩이가 내 가슴에 와 닿았 다. 내가 오른손으로 엉덩이에 걸쳐져 있는 천 조각
을 걷어내자 진한 갈색의 음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맞으면서도 쾌감을 느낀 건지 곽 재원의 질구는 촉촉
히 젖어 있었다. 나는 바짝 선 성기를 움켜쥔 채 곽 재원에게로 돌진했다. 그러나 내 성기가 가서 박힌 
곳은 질구가 아니라 연분홍빛 항문이었다. 
[으윽!] 
곽 재원은 머리를 쳐들며 비명을 삼켰다. 단번에 조그만 항문으로 내 큰 성기가 들어간다는 건 무리였
다. 바로 그 점이 내가 원한 거였다. 온 몸이 찢어지는 고통이 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항문에 대고 성기를 문질러댔다. 곽 재원도 고통을 참지 못해 날카로운 비명을 울렸다. 내 귀두가 
항문을 뚫고 들어갈 때 곽 재원은 고막이 찢어질 듯 크게 비명을 질렀다. 나는 곽 재원의 허리를 두 손
으로 꽉 쥐며 엉덩이에 더 힘을 주었다. 말라 있던 항문의 뻑뻑한 느낌이 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곽 
재원의 몸 속으로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갈수록 뻑뻑함도 줄어 들었다. 그러나 곽 재원의 비명은 여전히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완전히 성기를 집어넣은 후 나는 소리를 질렀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냐? 이 개같은 년아!]
그러면서 엉덩이를 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곽 재원은 울음을 터뜨렸다. 애처럼 엉엉 울면서 
머리를 있는대로 흔들어대는 곽 재원을 내려다보며 나는 야릇한 승리감에 사로잡혔다. 그때 문득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던 마쵸맨의 의기양양한 얼굴이 내 눈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는 걸 멈추
지 않았다. 도리어 더 세게 엉덩이를 움직였다. 곽 재원의 울음 섞인 비명 소리는 내게 힘이 되었다. 
[복수다!] 
나는 목을 뒤로 젖힌 채 있는 힘껏 엉덩이를 움직였다. 그러자 항문에서 미끈거리는 뭐가 흘러나왔다. 
피였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항문이 완전히 벌어지자 성기가 자유롭게 움직이게 된 대신 뻑뻑한 
느낌이 없어졌다. 사정을 하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으나 욕망은 거기서 나를 멈추게 하지 않았다. 나는 
얼른 피에 묻은 성기를 꺼내 곽 재원의 질에다 쑤셔 넣었다. 잔뜩 긴장해 있던 질은 내 성기에 저항했지
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질을 뚫고 들어갔다. 곽 재원의 울음 소리는 잦아들었으나 질
벽을 두드릴 때마다 비명은 더욱 날카로와졌다. 그 소리가 내 본능을 마구 꼬집어 대는 바람에 온 몸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으으으윽...] 
내 몸이 폭발하려는지 잔뜩 움추려 들었다. 나는 더욱 세차게 엉덩이를 움직였다. [컷!] 또 그 놈의 소
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나는 맥없이 곽 재원에게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면서 알리
사와 사만타가 내게로 달려 들었다. 둘 중 하나가 내 등에 전기 충격기를 갖다 댔다. 나는 몸을 비틀며 
곽 재원에게서 떨어졌다. 
[으흐흐... 아하하하!] 
옆으로 쓰러진 채 나는 정말 미친 놈처럼 웃기 시작했다. 사만타가 내 배에 발길질을 해댔지만 내 웃음 
소리는 멈춰지지 않았다. 
[와하하하!] 
술을 많이 마신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지난 밤의 일들이 현실이었다는 걸 
인정하기가 싫었다. 
[악몽이었을거야...] 
그러나 그건 너무나 생생한 악몽이었다. 그 일들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그때의 고통과 모멸감이 함께 
밀려왔다. 그걸 견뎌내기 보다 차라리 현실을 인정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감싸쥔 채 눈
을 떴다. 침대가 물컹했다. 아직 새벽인지 방은 여명에 둘러싸여 있었다. 커튼이 드리운 커다란 창 너머
가 희뿌연 걸로 봐서 아침이 머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알리사가 내 팔뚝에 주사를 놓을 때도 웃
고만 있던 기억을 마지막으로 지난 밤은 사실상 끝이 났다. 스르르 감기는 내 눈에 곽재원을 들쳐 업은 
사만타의 화난 얼굴이 마지막으로 각인되었다. 
내가 왼쪽으로 몸을 돌리자 침대가 꿈틀거렸다. 낯선 방이었다. 벽 쪽에 화장대가 있었고, 그 화장대의 
둥근 거울 속에 희미하게 내 얼굴이 보였다. 나는 얼른 시트를 치우고 내 몸을 살펴 보았다. 천박한 문
신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몸을 일으키는데 침대가 출렁거려서 중심을 잃었
다. 그것도 짜증이 났다. 나는 침대 오른쪽 작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가운을 걸치고 침대를 빠져나왔
다. 그리고는 창으로 걸어갔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걸 젖히자 한꺼번
에 햇살이 내 눈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이런!]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뒷걸음질을 치던 나는 방문이 끼이익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잘 잤냐?] 
마쵸맨의 목소리였다. 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 실눈을 떴다. 검은 연미복을 입은 마쵸맨이 옷을 든 채 뚜
벅뚜벅 내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어젠 정말 잘했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이 쳐 졌다. 그러자 마쵸맨의 발걸음 소리도 멎었다. 
[짜식... 널 위해 근사한 점심을 준비했다. 넌 그만한 대접 받을 자격이 충분해. 어서 옷 입어라. 나가
게.]
마쵸맨은 침대 위에 들고온 옷가지를 내려놓았다. 햇빛에는 눈이 익었지만 일그러진 표정은 펴지지 않았
다. 
[내가 입혀주랴?] 
나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웃기지 말고 나가기나 해!]
그러나 마쵸맨은 빙그시 웃으며 창으로 향했다.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며 마쵸맨이 말했다.
[정말 죽이는 날씨잖냐? 역시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 너도 좀 봐라. 저 장미숲과 
잘 다듬어진 잔디밭, 그리고 꾸며진 정원, 그리고 에메랄드빛 바다를... 나도 이런 저택을 갖는 게 꿈이
었다.] 
나는 마쵸맨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나가라니까!]
마쵸맨은 고개를 획 돌리며 사납게 나를 노려 보았다. 
[가만 있으니까 내가 만만해 보이냐? 어디다가 소릴 질러, 임마!] 
떡 벌어진 마쵸맨의 가슴팍에 나는 압도 당하고 말았다. 
[어서 세수하고 옷이나 입어! 안 그럼, 발가벗겨서 데리고 나갈테니까!] 
달려들어 흠씬 패주고 싶었지만 마쵸맨을 이길 힘이 없었다. 그건 벌써 대학 시절에 터득했다. 나는 얼
른 옷을 들고 마쵸맨이 가리키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대충 세수를 하고 머리에 무스를 잔뜩 발라 뒤로 
젖혀 넘겼다. 다행히 얼굴 문신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별 거 
아닌 놈으로 보이기가 싫어서였다. 그리고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실크로 된 흰 팬티와 같은 색 같은 소
재의 런닝, 팬티가 다 비칠 정도로 얇은 아이보리색 마 바지와 분홍색 와이셔츠를 차례로 입고 하늘색 
멜빵을 맸다. 내가 욕실에서 나오자 마쵸맨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발은 침대 옆에 있다.] 
굽이 없는 흰 신발이 있었다. 양말을 신지 않았는데도 신발을 신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부드
럽고 가벼웠다. 
[됐어. 날 따라와.] 
나는 슬쩍 거울 속에 있는 내 모습을 훑어보고 마쵸맨을 따라 나섰다. 내가 잔 방은 2층이었다. 복도를 
걸으며 창문 너머로 정원을 내려다 보았다. 마쵸맨의 말대로 정원은 프랑스 정원처럼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다. 온갖 색깔의 장미와 꽃들이 잔디밭 사이사이에 피어 있었고, 잘 다듬어진 짙푸른 나무들이 기막
힌 조화를 이루 며 배치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등나무로 만들어진 통로가 건너편 숲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햇살을 잘게 부수며 넘실대는 짙은 쪽빛 바다가 숲 건너로 보였다. 
[어때? 대단하지?] 
경치에 눈이 팔려 있던 나는 마쵸맨이 내 옆에 온 것도 몰랐다. 나는 엉겹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 회장 할아버지가 일제 시대 때 지은 저택이야. 요즘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런 저택을 함부로 짓지 
못할 걸? 하지만 이 저택, 우씨 집안과의 인연도 끝날 날도 머지 않았다. 우씨들한테는 안된 일이지...] 
마쵸맨은 알 듯 말 듯한 말을 남기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마쵸맨을 따라 들어간 방은 어제 내가 처음 
들어갔던 1층 오른쪽 끝방과는 정반대 쪽에 있었다. 이삼십 명은 족히 앉을만큼 큰 직사각형 검은색 식
탁이 방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높은 천정에는 샹젤리에가 줄줄이 걸려 있었고, 모네풍의 대형 유화
가 긴 벽을 밝게 채웠다. 마쵸맨은 식탁의 맨 끝으로 데리고 가 나를 앉혔다. 거기에 앉으니까 햇살이 
쏟아지는 창문 너머의 먼 풍경들이 정면으로 한 눈에 들어왔다. 식탁 위에는 벌써 포크와 나이프, 유리
잔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마쵸맨은 내 왼쪽으로 난 문을 열고 사라졌다.
멀리 들리는 새 소리를 제외하면 버려진 느낌이 들 정도로 조용했다.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흐르고 있었
다. 아주 멀리서 발 자욱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창문 옆 문이 열렸다. 연보라색 니트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우아하게 걸어 들어와서는 마주보이는 식탁 끝 자리에 앉았다. 나는 한 눈에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 차렸다. 그렇게 내 애를 태우던 카마, 아니 손 정윤이었다. 강렬한 햇빛을 등지고 앉는 바람에 손 
정윤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각인된 손 정윤의 해맑은 모습은 쉽게 떠올
랐다. 
[이번이 두 번째인가요?] 
아주 큰 방인데도 공명장치가 잘 되어 있는지 손 정윤의 낮은 목소리가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잘 들렸
다. 그러나 그 말 뜻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마라에서 본 여자, 기억나지 않으세요?]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던 그 여자의 옆 얼굴이 눈 앞을 스치고 지났다. 
[아...] 
[이렇게 얼굴을 마주 대하고 앉으니까 좀 쑥스럽네요.] 
나는 다소곳이 말하는 손 정윤과 카마가 하나로 보이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목소리는 분명 카마의 목소
리였으나 말투가 너무 다르게 들렸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예.] 
내 옆 문이 열리더니 마쵸맨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마쵸맨은 붉은 빛이 감도는 야채 스프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제가 직접 만든 거에요.] 
그 사이 마쵸맨은 손 정윤 앞에 오렌지 쥬스를 내려 놓았다. 그러나 손 정윤은 마쵸맨에게는 눈길도 주
지 않고 나만 뚫어지게 지켜 보았다. 그때쯤 내 눈은 햇빛에 익어 손 정윤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식욕
은 없었지만 코 끝을 간지르는 매콤한 냄새가 스푼을 들게 만들었다. 아주 천천히 한 숟갈 입 안으로 떠 
넣고는 손 정윤을 바라 보았다. 새콤달콤하면서 매운 끝맛이 내 얼굴을 풀어주었다. 
[맛있습니다.] 
그건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었다. 손 정윤의 입 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고마워요.] 
내가 스프를 비워내자 내 옆에 와 있던 마쵸맨은 빈 접시를 들고 사라졌다. 
[어제 일은 유감이에요.] 
손 정윤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손 정윤이 나를 그곳까지 불러들이긴 했지만 내게 고통을 준 
장본인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전 당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어요.] 
손 정윤은 담담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여전히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전화로 나를 휘어잡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전 남편이 당신 집안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정확하게는 당신 아버지 때문에 제 남편의 아버
지가 돌아가신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당신은 아세요? 당신 아버지가 왜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는지?] 
그건 뇌물 탓이었다. 그리고 그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일차적인 잘못은 당신 아버지한테 있지만 그걸 폭로한 건 제 시아버지였어요. 복수를 하신 셈이죠.] 
내 귀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일이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어요. 당신 아버지의 부하 직원들이 바로 우주 건설을 수백억대의 
탈세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어요. 우주 건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지요. 당신도 그 사건을 기억하는지 모
르겠어요. 비록 몇 개월 아니지만 시아버지는 실 형을 살았죠. 심장 질환이 있던 그분은 출옥 후에 심장
마비로 돌아가셨어요. 심장병, 그건 시댁의 내력이지요.] 
기억이 나는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 [그러니까 나를 어떻게 할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말입니까?] 
손 정윤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잖아요.] 
[그런데 왜 날 여기까지 불러들여 비참하게 만드는 겁니까?] 
[그러지 않으면 당신이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지 몰라서요.] 
[네?] 
그때 마쵸맨이 카터를 밀고 나타났다. 마쵸맨은 내 앞에 넓직한 쟁반을 내려놓았다. 스테이크 종류로 보
였다. 마쵸맨은 옆에 있던 카터에서 포도주를 꺼내 능숙하게 마개를 빼냈다. 그리고는 빈 유리잔에 포도
주를 부었다. 적포도주였다. 
[프랑스식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에요. 제가 만들었죠.] 
나는 갈색 소스가 뿌려진 스테이크를 내려다 보았지만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일단 포도주로 입을 
헹구었다. 마쵸맨은 내 뒤에 차렷 자세로 버티고 섰다.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당신 친구 마 동식씨가 수고를 많이 했어요. 사실 저 사람이 아니었으면 당신이 누군지 알지도 못했을 
거에요.] 
나는 마쵸맨이 내 친구가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저 사람은 두 달 전까지 남편의 오른팔이었어요. 정확히 말해서 남편에게 여자들을 소개시켜 주었어요. 
뭘 밉보였는지 해고 당했죠. 하지만 그런 건 제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전 남편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저 
사람이 필요했어요.] 
손 정윤은 아주 천천히 오렌지 쥬스를 한 모금 마셨다. 약간 젖힌 목에는 큼직한 에메랄드 목걸이가 반
짝거리고 있었다. 
[마 동식씨, 잠깐 나가 있겠어요?] 
[네.] 
마쵸맨이 문 뒤로 사라지자 손 정윤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마 동식씨에게 당신의 모든 걸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시켰죠. 당신도 알겠지만 저 사람은 그런 일이 전
문이에요. 미안해요.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진 않았지만 현재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
각되요.] 
나는 포도주 잔을 꽉 쥐면서 말했다. 
[나를 괴롭히는 게 최선이라구요?] 
[그렇게 괴로웠어요? 당신은 마음 속으로 그런 일을 바라고 있었잖아요. 당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 마 동
식씨가 당신 방과 컴퓨터를 샅샅이 뒤진 건 모를 거에요. 당신의 흔적들은 당신이 말을 하지 않아도 당
신이 누구인지, 당신의 욕망이 무언지 말해 주지 요.] [...]
[물론 당신이 원해서 그렇게 했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았겠지요. 그러나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만 되는 
건 아니에요. 당신의 욕망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대신 제 문제를 당신을 빌어 해결하고 싶은 거에요. 공
평한 거래 아닌가요?] 
[공평하다구요?] 
나는 잠깐 뜸을 들였다. 손 정윤의 얼굴에서 추악한 음모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손 정윤은 너무나 순결
하고 여려 보였다. 나는 숨을 들이 마시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를 협박했잖습니까? 비디오를 찍어가고 어머니 뒷조사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지 않았습니까?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 협박에 못 이겨서지 제 발로 걸어온 게 아니잖습니까?] 
손 정윤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나는 포도주를 한 번에 다 비우고 말했다. 
[이건 납치와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납치가 아니란 걸 당신도 잘 알잖아요. 아주 급했다면 납치라도 했을지 몰라요. 그렇게 했더라면 당신
은 제가 누군지 몰라도 되고, 저는 당신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 거에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모질지 못해요. 당신 스스로 저를 도와주길 바랬어요. 당신이 강 두태란 사람을 끌어들이지만 않았어도 
당신과 제가 이렇게 멀리 앉지 않았을거에요.]
고개가 푹 숙여졌다. 하지만 내 경우가 되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는 포도주를 잔에 따
르며 말했다. 
[저에게 원하는 게 뭡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손 정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 가로 갔다. 창 너머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서둘지 말아요. 어차피 당신은 나를 도와주게 되어 있어요.]
나는 포도주를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내가 못 도와주겠다면요?] 
[제가 몇 번이나 말했죠. 제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걸 지키지 않았어요. 당신이 
왜 이 먼 곳까지 비행기가 아니라 자동차로 와야 했는지 알아요? 당신 방에 있던 제 흔적들을 찾을 시간
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어요. 당신이 숨겨둔 것들 을 마 동식씨가 모두 찾아왔어요. 생각해 봐요. 제 말을 
듣지 않는 당신을 어떻게 제가 믿을 수 있겠어요? 저를 도와주지 않으면 그만한 대가는 분명히 치루게 
될 거에요. 그게 뭔지는 당신이 저보다 잘 알겠지요.] 
내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포도주 탓이 아니었다. 손 정윤의 말은 내 상상에 확신을 보태 
주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포도주 병으로 뻗치던 내 손이 덜덜 떨렸다. 겨우 포도주를 잔에 따
라 놓고는 손 정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손 정윤은 창문에 기대 선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제 말을 따라주기만 한다면 당신에게는 아무 일이 생기지 않을 거에요. 이곳에는 이제 당신과 저, 그
리고 마 동식씨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오늘 아침에 모두 떠났어요. 지금쯤이면 비행기를 타고 뿔뿔
이 흩어지고 있겠군요.] 
손 정윤은 혼자 피식 웃었다.
[그 여자들... 남편이 보내준 비디오에 나온 여자들이었지요. 그 여자들은 남편이 당신을 바닐라 클럽 
회원으로 추천한 걸로 알고 있어요. 남편이 돈을 대서 어제 행사를 벌인 줄 알아요. 후후. 그걸 본 남편
이 난리가 났어요. 스케쥴을 취소하고 모레 한국 으로 돌아온다더군요. 자기도 모르게 자기 저택에서 자
기가 아끼는 여자들과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즐기는 걸 봤으니까 심장이 가만 있질 않을 거에요. 아
마 심장약을 한 웅큼이나 입 안에 털어 넣었겠죠.]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제가 즐기다니요?] 
[ 당신 입장으로는 당한 거지만 남편이 보기엔 안 그렇거든요. 남편이 감히 해 볼 엄두를 못낸 일들을 
당신이 모두 해 냈어요. 한가지만 빼고요.] 
[네?] 
손 정윤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한 가지만 제대로 해내면 당신은 자유에요. 당신이 원한다면 저하고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구요. 
당신이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킨다는 확신만 준다면요.] 
[도대체 그 일이 뭡니까?] 
손 정윤은 대답 대신 천천히 문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 정윤을 불렀다. 
[저기요?] 
손 정윤은 약간 계면쩍은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마 동식씨가 알려줄테니 먼저 식사부터 하세요.]
그리고는 나가 버렸다. 나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제야 손 정윤과 마쵸맨, 결국 그 둘의 각본에 따라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그때 문이 열리고 마쵸맨이 들어왔
다. 나는 마쵸맨을 보자마자 따지듯 물었다.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냐? 왜 하필이면 나냐?] 
[그 이유는 손 여사께서 말씀하셨을텐데? 난 그냥 조언을 했을 뿐이다. 굳이 다른 이유를 대라면 네가 
보고 싶어서였다.] 
[보고 싶어? 미친 놈.]
마쵸맨은 내 옆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놈이 바로 너라고 한 거 거짓말이 아니다. 그땐 내가 잘 몰라서 그렇게밖에 
사랑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진정한 사랑이 뭔지를 가르쳐줄 수 있단 말이다.] 
나는 포크를 집어들며 소리쳤다. 
[말같잖은 소리 집어치워!] 
그러나 마쵸맨은 눈도 꿈쩍 하지 않았다.
[네가 날 사랑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거라는 걸 안다. 그때까지 난 기다려줄 수 있다.]
너무 기가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이 일부터 끝내자. 넌 내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된다. 알겠냐?] 
[뭘 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거부한다면?] 
[이건 내가 시키는 게 아니라 손 여사께서 시키는 일이다. 그러길 바라지는 않지만 만약 네가 거부한다
면 그만한 대가를 치루게 될 거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포크로 식탁을 찍었다. 식탁에 찍힌 포크가 바르르 떨렸다. 
[그래, 대체 내가 해야 한다는 일이 뭐냐?] 
마쵸맨은 오후 내내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일러주고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앵무새처럼 마쵸맨의 말
을 따라하거나 행동을 취해 보여야 했다. 내가 실수라도 할라치면 마쵸맨의 주먹이 내게로 날아들었다. 
석양 무렵에야 마쵸맨의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 다.
[내가 가르쳐 준 걸 절대 잊어버리면 안된다. 하나라도 틀리면 넌 이 세상 구경은 다한 줄 알아라.]
[만약에 손 정윤씨가 싫어하거나 다른 걸 요구하면 어떡하냐?] 
그 말에 대한 대답으로 주먹이 명치를 파고 드는 거였다. 
[우욱!] 
배를 감싸쥐고 털썩 주저 앉은 내 정수리에 대고 마쵸맨은 씩씩대며 말했다. 
[이 새끼.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손 여사는 섹스란 걸 해 본 적이 없는 여자야. 네가 만났던 잡년들
처럼 생각하지마! 네가 좋아서 손 여사께서 이런 일을 하는 줄 알면 착각이야. 단지 널 잠깐 이용할 뿐
이란 걸 명심해!]
그걸로도 분이 안 풀렸는지 마쵸맨은 내 팔죽지를 걷어찼다. 
[여자가 이런 결심을 했을 땐 얼마나 독이 올랐겠나 생각해 보란 말이다. 네 목숨은 손 여사 손에 달렸
다. 절대 손 여사를 당황하거나 화나게 만들지마. 내 손으로 널 어쩌기는 정말 싫다. 알겠냐!] 
마쵸맨은 내 뒤덜미를 잡아 끌었다. 나는 반항할 생각도 못하고 마쵸맨이 끄는대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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