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하고 있는 내게로 마쵸맨이 찾아왔다. 나는 얼른 성기를 가리며 마쵸맨을 노려 보았다.
[나가!]
그러나 마쵸맨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분이 좀 풀렸냐?]
[뭐가?]
나는 황급하게 수건을 아랫도리에 둘렀다.
[네가 겪은 일들과 손 여사와 맞바꾼 거 말이다.]
그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 어떤 일이건 내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일이 어찌 되었거나 손 정윤
에게는 죄책감 같은 게 있었다.
[많이 아프다든?]
마쵸맨은 같잖다는 듯이 웃었다.
[몸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마음이지. 몇 년 동안 남편한테 모욕당한 걸 갚겠다고 일을 벌이긴 했지만
그게 어디 여자로서 할 짓이냐?]
나는 마쵸맨을 스쳐 지나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도대체 너하고 손 정윤씨하고 무슨 사이길래 이러냐?]
마쵸맨은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걸 꼭 알고 싶으냐?]
마쵸맨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눈이 젖어 있는 듯도 했다.
[뭐 꼭이라기 보다...]
나는 팔을 뿌리치며 욕실을 빠져 나왔다. 등 뒤에서 마쵸맨이 담담하게 말했다.
[손 정윤은 하나밖에 없는 내 누이 동생이다.]
그 목소리는 욕실에서 울려 분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 말을 귀에 담지 않으려고 거부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발을 멈칫 했다가 다시 걸었다. 가벼운 복장으로 마쵸맨과 나는 식탁에 앉았
다. 냉동 피자 한 판과 버드와이저 맥주 한 병씩이 저녁 식사의 전부였다. 배가 고 파 피자를 들기는 했
지만 차마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맥주 뚜껑을 비틀어 따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맥주 맛이 입에 썼다.
거의 한 병을 다 비우자 속이 뜨뜻해졌다.
[담배 있냐?]
마쵸맨은 연미복 안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마쵸맨의 표정이 굳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 연기를 푸하고 내뿜고 나니 좀 여유가 생기는 듯도
했다.
[아까 욕실에서 말인데...]
마쵸맨은 눈만 살짝 치켜뜨면서 나를 보았다.
[농담이었지?]
마쵸맨은 소리나게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나를 꼬나보면서 말했다.
[아니.]
나는 약간 몸을 뒤로 젖히며 되물었다.
[성이 틀린데...?]
[성이 왜 틀려, 임마!]
나는 어눌하게 대답했다.
[넌 마 동식, 그쪽은 손 정윤...]
마쵸맨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야 임마, 네가 언제 나한테 신경이라도 써 봤냐? 내 별명이 마쵸맨이라고 애들이 장난으로 마 동식, 마
동식이라고 부르다가 그게 굳어 버린 거다, 알아?]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 진짜 이름이... 손... 동식이란... 말야?]
[그래, 이 자식아.]
[아깐 손 정윤씨도 널 마 동식이라고 부르던데?]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너한테 내가 마 동식이든 손 동식이든 무슨 상관이냐, 임마.]
나는 담배를 부벼 끄며 말했다.
[끝까지 말하지 말지... 왜 말해가지고...]
마쵸맨은 병 뚜껑을 따며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다. 왜 말해 버렸는지...]
마쵸맨은 처량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밤새 나는 내가 상상한 적도 없는 과격한 포르노를 손 정윤과 몇
편 더 찍었다. 그러나 그동안 내 속에는 욕망이 전혀 없었다. 복수를 위해 철저히 스스로를 파괴하는 손
정윤을 지켜보는 동안 두려움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손 정윤에게서 숭고을 느 꼈다. 물론 손 정윤
이 택한 방법이 옳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손 정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나는 혼자서 손 정윤과의 마지막 이야기를 찍기 위해 꼬불꼬불한 솔 숲길을 지나 섬
의 왼쪽 가장자리에 자 리잡은 벼랑으로 향했다. 그 마지막 이야기만 끝나면 나나 우리 가족에게서 완전
히 손을 뗄 거라는 손 정윤의 약속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곧 나는 자유의 몸이 될 것이지만 엄청
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될 손 정윤을 생각하면 마음이 홀가분해지지 않았다. 내게도
우 강호와 해결해야 될 문제가 남은 셈이지만 손 정윤에 비하면 내가 더 유리했다. 그리고 내게 어떤 일
이 닥친다 해도 지난 이틀 동안 겪은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마지막 이야기
는 각본도 없었다. 마쵸맨의 말로는 손 정윤이 하라는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
기를 지금 까지 이야기 중에서 가장 간단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거라고 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난 밤부터 이 새벽까지 삶에 대해 많은 걸 배우고 깨우쳤다. 이
겨내기 힘든 고통의 터널 을 통과하면서 용케 나는 희망이란 걸 붙잡았다. 삶이란 자기 의지만으로 이루
진 게 아니라는 것, 보잘 것 없는 순간의 선택이 삶을 송두리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삶은
견디는 자에게만 기회를 준다는 것, 그리고 그 기회는 폐허가 된 삶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낼 힘까지
준다는 것... 그러나 내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사람과의 관계가 삶을 지탱하게도 해주고 삶을 파괴하
게도 해 준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살 아오면서 진정으로 나 아닌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나 깊이 반
성을 해 보기도 했다.
나는 사실 한 번도 남을 제대로 이해하 려 들지 않았다. 내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었다. 나는 벼랑 끝으
로 가서 손 정윤을 만나 헝클어지고 뒤틀린 관계를 잘 끝맺을 작정이었다. 손 정윤을 용서한다는 건 쉽
지 않았으 나 더는 서로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되겠다 싶었다. 누구라도 먼저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만이 서로의 불행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길 같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희뿌연 여명이 남아 있었
지만 솔 숲길이 끝나자 시야가 확 트였다. 20여미터 정도 떨어진 벼랑까지는 잔디 가 깔려 있었다. 벼랑
끝에는 커다란 포구나무가 가지를 쫙 벌리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하얀 색으로 칠해진 나무 벤취가 있었
다
. 손 정윤은 거기에 새하얀 양산과 새하얀 모자를 쓴 채 바다를 향해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잔디밭 사
이로 난 길은 강처럼 휘어져 흐르며 벤취까지 이어졌다. 나는 밤색 양복 상의를 추스리며 길로 접어 들
었다. 바닷 바 람이 살랑이며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른 때였으면 절로 휘파람이 나올만한 분위기
였다. 손 정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벤취에 거의 다다르자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손 정윤이 기다렸다는 듯 이 스르르 일어섰다. 바람이 양산 끝에 달린 레이스를 가볍게 흔들었다.
손 정윤은 벤취 앞으로 한 발자욱 걸어나갔다. 벤취에서 벼랑 끝까지는 2미터도 여유가 없었다. 내 머리
에 어렴풋이 손 정윤, 아니 카마가 한 벼랑 얘기가 떠올라 바짝 긴장이 되었다.
[저...]
나는 손 정윤이 놀라지 않게 조그만 소리를 냈다. 그러자 손 정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전체적으로
희게 바른 화장과 의상 때문에 인형 같아 보였다.
[설마 자살하려는 건 아니죠?]
손 정윤은 새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빨간 입술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새침하게 말했
다.
[자살은 아무나 하나요?]
그러나 그 말이 내 귀에 그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손 정윤은 포구나무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
[앉으세요.]
나는 벤취에 엉덩이만 걸쳤다.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이 시간이 저는 제일 좋아요.]
나는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손 정윤의 옆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이 시간은 갈등이 없어요. 세상의 모든 밝음과 어둠이 화해하는 시간이에요. 어서요. 귀 기울여 보세
요.]
바다 위에는 해무가 엷게 깔려 있었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손 정윤은 나에게 다가
와서는 몸을 낮춰 얼굴과 얼굴이 마주 보이게 했다. 그리고는 내 목을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제발 날 용서하세요.]
나는 눈을 내리 깔았다.
[이제 와 용서란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당신을 저주하며 살진 않겠다
는 겁니다. 당신을 조 금씩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손 정윤은 가볍게 내 입에 입술을 맞추었다. 다른 때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손 정윤의 입술로
전해지는 감정의 물결 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일어나세요. 그리고 저랑 걸어요.]
그러면서 내미는 손 정윤의 손을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나는 손 정윤의 손끝을 잡고 일어났다. 손 정윤
은 나를 데리고 벼랑 끝 으로 걸어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손
정윤은 벼랑을 등지고 돌아섰다.
[전 삶에 대해 아무런 얘기나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이렇게 서 있다가 돌이 되어 버렸으면 좋
겠어요.]
그 말은 내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 마치 내가 손 정윤에게 그런 절망을 안겨준 거 같아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당신은 내 첫 남자에요. 날 사랑하진 않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처럼 내게 키스를 해 줄 수 있나요?]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초롱초롱한 손 정윤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거짓 사랑으로 보다는 남자와 여자로서 키스를 하는 건 어떨까요? 처음부터 사랑하는 사이로 시작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후...]
손 정윤은 행복에 겨운 듯 눈을 반쯤 감으며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내 마음을 떨리게 만들었다.
[그래요. 이 키스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길 바랄 게요.]
손 정윤은 눈을 꼭 감으면서 턱을 약간 위로 들었다. 나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려고 했다.
[탕!]
총소리와 함께 닥쳐온 엄청난 고통이 내 몸을 뒤틀며 손 정윤에게로 쓰러지게 했다. 손 정윤은 기다렸다
는 듯이 나를 감싸 안고 는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면서 자기 입술을 내 입술에 포갰다.
[날 용서해요.]
그 소리는 내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 그러더니 메아리로 변해갔다. 벼랑 아래 바위에 떨어지기까지 나는
참 오랜 시간을 살았다.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그동안 내 귀에는 손 정윤의 목소리
가 울려 퍼졌고, 내 눈에는 손 정윤의 얼굴이 가득했으며, 내 몸으로는 손 정윤의 체온이 전 해졌다. 추
락하는 동안 나는 손 정윤과 다른 세상에서 다른 모습으로 만나 한평생을 사랑하며 산 것만 같았다. 어
쩌면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루살이처럼 손 정윤과 만나는 그 하루를 위해 내가 태어나고 살아온
건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같이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함께 죽는 사람이 곁에 있기에 마음 속에 후회나
억울함이 없었다. 나는 죽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절대 내게 늦은 사랑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