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캠코더 설명서를 한 손에 든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컴퓨터와 캠코더를 연결했다. 디지털 캠코더를
처음 다루는 건 아니었 지만 내 손으로 설치하기는 처음이었다. 은빛 캠코더를 컴퓨터 모니터 위에 올려
놓고 리모콘을 누르자 컴퓨터 화면에 내 얼굴이 나타났다. 방송국 카메라 수준의 선명도 를 자랑한다는
광고가 거짓이 아니었다. 아직 이마에 맺혀 있는 땀방울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오후의 진한 햇살이 내 왼쪽 얼굴을 밝게 만들고, 눈부시게 빛나는 귀고리와 발갛게 상기된 귓볼은 대조
를 이루고 있었다. 벌써 2시간도 넘게 귀고리를 달고 있어서 귀가 얼얼했으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왼쪽 눈을 찡그리며 왼손을 귀고리에 갖다댔다. 그리고는 살짝 당겨보았다.
[아야!]
고통이 영영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내 희망 사항은 헛되었다. 그러나 손 정윤이 원한다면 더한 고통도
참아낼 것만 같았다.
[고통은 꼭 나쁘지만은 않아. 필요할 때도 있는 거야. 그런데 네가 고통스러워 하지 않아 좀 실망했어.
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 한 모양이야. 그리고 왜 저녁이 다 되어서야 보내는 거니? 내가 일찍 나가라고
했지?]
저녁도 먹지 않고 편지를 기다리고 있던 내게 카마는 그렇게 맥빠지는 말부터 했다. 나는 캠코더를 사러
다니면서도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미행하는 놈에게 보란 듯이 말이다. 그걸 모를 카마가 아니었다.
[하지만 귀고리가 잘 어울려. 괜찮아 보였어.]
단지 그 한 마디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했다. 나는 눈동자를 다음 말로 옮겼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있지? 내 실수야. 널 탓하진 않아. 나라도 궁금해서 그랬을테니까.]
나는 양미간을 좁히며 마침표에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카마가 손 정윤이라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짜릿함도 잠 시였다. 곧이어 공포가 나를 덮쳤다. 손 정윤의 전화번호를 알아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아침 나절에도 낑낑댔지만 소득이 없었다. 대기업 회장집 전화번호를 알아 내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허탈했다. 그래서 몇 군데 전화를 넣어 알아봐달라고 해 두었는데... 내가 핸
드폰을 가진 걸 어떻게 알고 그것마저 도청을 했는지...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렇게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내 뒤를 노려서 그랬는지도... 아니야. 그랬다면 치밀한 계획을 세웠겠지...] [그건 오햅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계획을 좀 바꿨어. 계획보다 서둘러 널 만나기로 했어. 모레 정오에 누가 널 데리러 갈 거야. 그 사람
을 따라 와.]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재떨이에 담배를 던져두고 얼굴을 화면 가까이로 갖다댔다. 카마는 한 행을
띄우고 다시 말을 이었다.
[모레까지 나와 관련된 모든 흔적을 깨끗이 지워. 심지어 네 기억까지도 지워. 이건 명령이야. 네가 집
을 나선 다음 누군가가 네 집을 방문할 거야. 그때 네가 내 말을 어긴 게 탄로난다면 널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물론 네 부모까지도. 내 말 알겠지?]
또 협박조였다. 그렇다고 내가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모니터 위에서 디지털 캠코더가 나를 노
려보며 계속 돌아가고 있 었다. 계속 내 모습을 촬영하라는 카마의 명령 때문에 50분 단위로 캠코더로
촬영한 동영상을 카마에게 전송하고 있었다. 전송하는 데 걸리는 10분을 빼고는 카마의 시선을 피할 길
이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게 시간 당 10분의 여유가 있다는 뜻도 되 었다. 나는 곁눈질로
시간을 확인하였다. 6시 34분. 정확하게 16분 후부터 10분 동안은 카마의 눈을 피하게 된다. 나는 태연
한 얼굴을 지은 채 카마의 홈페이지로 찾아갔다. 카마의 홈페이지는, 뜻밖에 썰렁했다. 검은 바탕에 오
렌지색 글씨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카마의 편지를 읽기 전, 그러니까 한 20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가 않았다.
[이제 여길 찾아올 필요 없어. 넌 날 만날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돼. 이제
네 북마크도 지워 버려. 네스케이프 캐시 디렉토리에 있는 파일들도 모조리 지워. 그리고 내가 준 신용
카드... 태워 버려. 넌 모레까지 집밖으로도 나 가지 못할테니까. 쓸 일도 없잖니?]
모레 만날 때 되돌려 받을 수도 있는 신용 카드를 없애라는 부분에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캠코더 앞에
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었다. 컴퓨터 옆에 있던 지갑에서 신용 카드를 꺼내 캠코더에 가까이
비친 후 라이터와 재떨이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신용 카드에 불을 붙였다. 신용 카드는 지직거리며 잘
도 타 들어갔다. 완전히 신용 카드를 태운 후에 자판을 두드리며 캠코더에 대고 말했다.
[이제부터 북마크도 지우고 캐시된 파일들을 지웁니다.] 그러나 나는 캠코더의 위치를 옮기지 않았다.
북마크를 지우고 인터넷을 빠져나와 파일 관리자로 가서 네스케이프의 캐시 디렉 토리에 있던 파일들을
지우는 대신 윈도우의 서버 디렉토리로 모조리 옮겨 버렸다. 그리고는 메일 디렉토리에 있던 카마의 편
지 파일들을 글로 일단 옮겨 놓았다. 시간이 나는대로 그 파일들의 확장자를 엉뚱하게 바꿔 버릴 작정
이었다. 이를테면 ini나 hwp로 말이다. 쥐죽은 듯 이틀을 지냈다. 카마가 보기에 내가 구석에 몰려 잔뜩
웅크린 생쥐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내게 허락된 10분 동안 카마 의 흔적들을 숨기느라 발이 보이지 않게
뛰어 다녔다. 그럴 때 귀고리가 부딪쳐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내게는 채찍소리처럼 들렸 다. 그 덕분에
카마의 메모에서부터 카드 영수증, 카마의 비디오 테잎, 카마의 음성이 녹음된 전화녹음 테잎, 카마의
인터넷 편지를 저장한 파일이 담긴 디스켓까지 꼭꼭 숨겨 놓을 수 있었다.
그중 부피가 제일 큰 비디오 테잎은 침대 시트를 찢어 넣어 두었고, 전화녹음 테잎들은 방수처리된 비닐
봉지에 넣어 변기 속에 집어넣어 두었다. 메모나 카드 영수증같이 종이로 된 건 랩에 싸서 몇 달동안 냉
장고에 얼려둔 채로 있던 쇠고기 덩어리를 녹여 그 속에 집어넣어 두었다. 디스켓은 컴퓨터 본체를 열어
그 속에 집어넣어 두었다.
11시 55분, 마지막으로 카마에게 동영상을 전송하는 동안 나는 집안을 휘둘러 보았다. 이틀 동안 머리를
굴려가며 이렇게 숨겨 보고 저렇게 숨겨 보느라 정신없던 시간들이 내 눈 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해도 빠져나올 구멍은 마련해 둔 셈이었다. 나는 뒤돌아 서서 거울을 쳐다보며 내게 물었
다.
[이만하면 카마를 만날 준비는 끝난 거지?]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