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마는 내가 보낸 쇼핑 목록에 만족스러워 했다. 카마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던 나는 상점을 돌아다
니며 눈에 띄는 물건들을 다 주문했다. 카드로 긁은 금액이 대충 따져도 2,000 달러가 넘었다.
[몇 가지 필요 없는 물건도 있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 물건이 도착하거든 포장을 뜯지 말고 그대로 놔
둬. 찾으러 보낼테니. 그리고 정각 열두 시에 예약을 해 놨으니까 열 한시 반까지 내 홈페이지로 와.]
카마와의 게임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나 카마의 말을 거역할 힘은 없었다. 시간에 맞춰 찾아
간 카마의 홈페이지에서는 지난 번과 같은 요란한 환영 행사는 없었다. 지도가 펼쳐진 페이지가 바로 나
를 맞 았다. 지난 번에 갔던 마을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강 가에 엄지손톱만한 크기로 별장처럼 지어
진 집이 보였다. 자주색으로 칠해진 목조 건물인 그 별장만이 지도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카마의 목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 나왔다.
[괜찮은 별장이지? 좀 유럽풍이긴 하지만. 난 이런 별장이 좋아.]
어머니도 한탄강 부근에 콘크리트로 지은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강변에서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
었는데, 울창한 나무들 로 둘러싸여 있어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강으로 향한 창은 모두 푸른
빛이 감도는 통유리로 되어 있다는 것 빼고는 별 볼 게 없는 별장이었다.
[오늘 네가 만날 여자는 킴이야. 오 진택으로 예약해 두었어. 먼저 킴과 즐겨. 하지만 흥분해선 안돼.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내 남편이 킴의 단골이거든. 킴을 만나러 샌프란시스코에 몇 번 갔다왔을 정도
야. 테오 장이라면 알 거야. 내 남편이 어떤지 알 아봐.] [어떤지라니... 너무 막연합니다.]
[정말 어떻게 하는 걸 좋아하는지, 어떤 여자들과 어울리는지 알아보란 말야. 킴은 순순히 말해 주지 않
을 거야.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 알겠어?]
나는 별장 문 앞에서 예약을 확인 받고서야 별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가 약속 10분 전이었다. 거
실처럼 꾸며진 화면이 내 앞에 펼쳐졌다. 화면 정면에 걸려 있던 초대형 벽걸이 텔레비전이 환해지면서
기계음에 가까운 목소 리가 흘러나왔다.
[하이, 미스터 오? 약속 시간까지 지루함을 달래드릴 수잔이에요. 그렇게 뻣뻣하게 서 있지만 말고 소파
에 앉으세요. 아, 좋아 요. 이제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세요. 한결 낫죠?]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어 보이는 붉은 머리의 수잔은 스튜디어스 복장이었다. 보통 스튜디어서와 달리 치
마가 엄청나게 짧고, 플 레이보이 모델처럼 예쁘고 쫙 빠졌다. 녹화에 문제가 있는지 전송에 문제가 있
는지 화면이 약간 부자연스럽기는 했지만 눈요기에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저는요, 가끔 당신이 제 엉덩이를 찰싹 소리나게 때려주는 꿈을 꾼답니다. 제 엉덩이가 어때요?]
수잔은 단단하고 아름다운 엉덩이를 내 쪽으로 향한 채 제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그렇게 가만히 있
으면 제가 부끄러워요. 어서 손을 뻗어 제 예쁜 엉덩이를 만져 보세요.]
당신도 알겠지만 그 엉덩이는 실제로 만져볼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차가운 화면이나 만지게 될 뿐이었
다. 수잔은 머리에 쓰고 있던 앙징맞은 캡을 벗으면서 애교를 떨었다. [제가 예쁘지 않아요? 저를 가지
고 싶지 않으세요?]
수잔은 꽉 조이는 느낌을 주는 검은 상의 단추를 풀며 말했다.
[전 스튜어디스지만 당신이 시키는 일이라면 다 하죠. 어때요? 제 가슴.]
수잔은 하얗게 드러난 젖가슴을 두 손으로 받치고는 어루만졌다. 그러면서 고개를 야하게 흔들며 말했
다.
[전 아직 열 아홉밖에 안 됐어요. 섹스를 해 본 적도 없어요. 보세요, 제 젖꼭지가 얼마나 예쁜지. 전
당신이 벨을 울리기만 기 다려 왔어요.]
수잔은 한 손을 천천히 길고 가느다란 배꼽 아래로 밀어 내렸다. 긴 손가락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내
시선은 따라갔다. 수잔의 손가락은 금방 치마 속으로 사라졌다. 수잔은 다른 손으로 목과 턱을 어루만지
며 콧소리를 냈다.
[아, 아아흐... 당신은 정말 대단할 거에요. 절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전 당신을 원해요. 보세요. 제 몸
이 얼마나 뜨겁게 달아 올랐는지. 어서요. 어서 와요. 내 사랑.]
내 성기는 어느 정도 부풀어 올라 있었지만 솔직히 나는 별로 흥분되지 않았다. 수잔이 시간 떼우기용
비디오에 불과하다는 걸 나는 너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수잔이 타이트 스커트를 벗어 던지고 바닥에
주저 앉아 다리를 쫙 벌린 채 크리토리스를 제 손으로 애무하는 모습을 보고도 내 몸은 별 반응을 보이
지 않았다. 점점 커지고 있는 수잔의 교성이 도리어 신경에 거슬렸다. 내 시계로는 12시가 다 되어 있었
다.
[어서요. 날 좀 어떻게 해 줘요. 제발. 더 이상 못 참겠어요. 네? 으하아...]
수잔은 분홍빛으로 빛나는 질을 손가락으로 벌리며 나를 유혹했다. 수잔의 음부로 앵글이 맞춰지면서 화
면에 붉고 검은 빛이 가 득해졌다. 스피커에서는 계속 수잔의 흐느끼는 듯한 신음 소리뿐이었다.
[오래 기다렸죠? 킴이에요. 어서 오세요.]
차분하게 깔리면서도 섹시하게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베이지색 가죽으로 덮힌 소파에
약간 기댄 금발을 짧게 자른 회색 눈의 킴의 전신이 화면 가득 나타났다. 킴은 윤기가 도는 정장 스타일
의 검은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커다란 링 모양의 은제 목걸이와 산호색 반지가 내 눈길을 끌었다 . 빨
간 루즈를 얇게 바르고 작은 금테 안경까지 쓴 채 다리를 꼬고 있는 폼이 꼭 샤론 스톤의 도도함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시간은 돈이죠. 뭘 원하시죠?]
킴은 나를 무시하는 듯 약간 깔아보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불행하게도 나는 킴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킴의 별장도 여느 별장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꾸며져 있었다 . 그러나 한 가지 잇
점이 있다면 킴이 내 얼굴을 전혀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내 컴퓨
터에 카메라가 붙어 있다고 해도 내 모습을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마이크도 연결하지 않고 자판을
두드리는 쪽을 택했다. [당신은 남자를 지배하는 스타일입니까?]
킴은 긴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되물었다.
[최소한 당신은 매조키스트가 아니군요. 그렇다고 새디스트도 아닌 것 같은데... 정확하게 뭘 원하죠?]
낯선 식당에 들어섰는데 메뉴판도 보여주지 않고 주문을 재촉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태도였다. 킴처
럼 고자세인 여자는 인터 넷에서 처음이었다. 나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자판을 두드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운을 떼어놓고 포스트 잇에 적어놓은 카마의 남편 이름을 확인했다.
[내 친구 테오 장처럼 하길 원합니다. 테오를 잘 알죠?]
[처음 듣는 이름인데...]
킴은 철저하게 고객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 손가락은 유연하게 움직였다.
[당신이 모른다니 이상하군요. 테오가 당신을 만나러 몇 번이나 샌프란스시코까지 갔었다던데...]
킴은 약간 망설이는 듯 하더니 금방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아하, 그 한국인 미스터 장? 하지만 꽤 돈이 많이 들텐데요?] [그 정도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자, 시
작해 볼까요?]
나는 어떤 말로 편지를 시작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킴과 했던 일을 글로 옮긴다는 게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다.
[저... 그러니까 테오는 관음증이 심한 새디스트였습니다.]
이렇게 첫 줄을 쓰고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킴은 저를 지하 감옥처럼 생긴 음침한 방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고문실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킴 은 로프에 꽁꽁 묶인 채 천정에 매달린 동양 여자를 남겨두고 사라졌습니다.
완전히 벌거벗은 그 동양 여자의 입에는 재갈이 물 려져 있었습니다. 매달려 있기 힘든지 계속 신음 소
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킴은 광택이 나는 검은 가죽 콜셋을 입고 나타났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부츠의 뒷굽은 10센
티미터가 훨씬 넘어 보 였다.
[킴은 벽에 걸린 채찍 중 승마할 때 쓰는 가죽 채찍을 골랐습니다. 그리고는 동양 여자의 엉덩이를 사정
없이 때리기 시작했습니 다. 동양 여자의 얼굴은 금방 시뻘개졌고 괴상한 신음 소리가 났습니다. 킴은
채찍질을 멈추더니 다시 신음 소리를 내면 정해진 횟수보다 두 배로 더 채찍질을 하겠다고 앙칼지게 소
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동양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동양 여자의 얼굴을 더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라도 나처럼 외면하고 싶
었을 것이다. 내가 망설 이고 있는 사이에 킴은 30대도 넘게 채찍질을 했다. 스폿 라이트를 받고 있던
동양 여자의 엉덩이는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러나 동양 여자는 용케 잘 참아내고 있었다.
[당신이 특별히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요. 요구의 종류에 따라 가격이 틀리다는 거 알겠죠?]
[난 이대로도 만족합니다.]
[좋아요. 계속 할테니 마음이 바뀌면 말해요. 이번에는 좀 더 자극적인 걸로 바꾸겠어요.]
[킴은 가죽 벨트를 골라 동양 여자의 등을 후려쳤습니다. 킴이 말했죠. 동양 여자가 벨트를 이겨내는 한
계는 스물 다섯대라구요 . 스물 다섯대를 때리고 난 후에 킴은 두 대를 더 때렸습니다. 한계를 연장시키
기 위해서라더군요. 그 다음으로는 밤송이처럼 생 긴 빗을 가져와서 동양 여자의 젖꼭지를 때리기 시작
했습니다. 그 조그만 젖꼭지가 퉁퉁 부어오르도록 사정없이 빗을 세워 때렸 습니다.]
나는 그때 내가 그만두는 게 그 동양 여자를 위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 그만해요.]
그러자 킴은 나를 향해 알듯말듯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역시 당신은 이쪽 사람이 아니군요. 몇 년 전 테오가 나를 처음 찾아왔을 때는 꼭 당신 같았죠. 그렇게
겁먹지 말고 이렇게 생 각해 봐요. 당신 마음대로 여자를 모욕주고 때리고 있다고요. 당신의 머리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섹슈얼한 환상이 현실이 되 는 순간이에요. 긴장을 풀고 즐겨요.]
나는 도리질을 하며 자판을 두드렸다.
[제발 그만...]
[당신이 정말 이 동양 계집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다면 이 계집이 황홀경에 빠지도록 계속 맞게 내버려
둬야 해요. 쾌락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이 계집이 불쌍하지도 않나요?]
킴은 동양 여자의 머리채를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내 말이 틀려?]
그러자 동양 여자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새디즘이나 매조키즘 포르노를 통해 이런 장
면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와는 딴판이었다. 실제로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하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가슴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킴은 내 마음을 읽고 있는 듯 했습니다. 서커스
맹수조련사가 들고 다니는 길다란 채찍을 가져와 동양 여자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채찍이 볼
에 닿을 때마다 검은 피멍이 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더 이상은 볼 수 없어 그냥 컴퓨터를 꺼버렸습니
다. 그게 제게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유일한 방법? 내숭 떨지마.]
카마는 인터넷 메일을 보자마자 전화를 걸었는지 좀 흥분해 있었다.
[너희 남자들은 다 새디스트야. 특히 한국 남자들 말야!]
나는 카마의 목소리에 눌려 찍 소리도 하지 못했다.
[채찍질 당하는 것만 고통스러운 게 아냐. 여자를 노예처럼 생각하는 남자들의 그 못된 사고방식이 더
고통을 주지, 안 그래!]
[전 그런 남자가 아닙니다.]
[흥! 웃기고 있네. 중간에 빠져나왔다는 게 핑계가 될 줄 알아? 그런 걸 싫어했다면 처음 채찍질을 할
때 나왔어야지. 너도 즐 긴 거야. 그렇지?]
[당신 남편이 거기서 뭘했나 알아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젠 말대꾸까지!]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쩌다 이런 일에 휘말려 들었는지, 내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카마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달래듯 말했다.
[넌 나한테 항상 솔직해야 해. 내 말 알겠어? 그러니까 속마음을 털어놔. 정말 어땠는지 말야.]
이왕 내친 걸음이다 싶었다.
[좋습니다. 처음엔 포르노 테이프를 본다는 정도로 생각되서 별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일이
나를 위해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묘한 쾌감같은 게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그게
좋다는 쪽의 감정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 [그러니까?]
[저는 그때의 제 감정을 아직도 제대로 모릅니다. 왜 해선 안되는 일을 할 때의 아슬아슬한 감정 있잖습
니까?]
[그리고?]
카마는 집요하게 추궁해 왔다. 그렇다고 내가 달라질 건 없었다.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침묵을 고수 했다.
[내가 물을 땐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안 돼. 알겠어? 아직 넌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모르는 것 같
아. 혹시 나를 곽 재원 정도도 안되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곽 재원과 카마를 비교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질적으로 틀린 상대를 같은 저울로 잴 수 없는 일 아닌가? 카마는 내 침묵이 무
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네게 곽 재원의 본 모습을 보여주겠어. 그걸 보고 나면 네 생각이 엄청 달라질 걸? 네 컴플렉스도 해소
되겠지. 나한테 감사해 야 할 거야.]
[네?]
내가 카마의 그 말 뜻을 알게 되기까지 많은 노력이 뒤따랐다. 바로 그날 카마는 사람을 보내 내 여권을
가져갔다. 그리고 다음날 뉴욕 행 왕복 비행기표와 함께 여권을 되돌려 주었다. 카마는 전화로 말했다.
[뉴욕에 도착하면 누군가 널 마중나와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해. 이번 여행에서 돌아오면
나에 대한 네 태도가 엄청나게 변할 거야. 날 숭배하게 되겠지. 내 인생을 가로막고 있는 곽 재원을 완
전히 제거해 줄테니까. 호호호.]
뉴욕에서 나를 기다린 건 썬팅이 된 흰 리무진과 라틴계로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짙은
눈썹, 크고 맑은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 여자의 이름은 비니였다. 비니는 자극적인 노란 미니 원피스를
입은 채 내 옆에서 계속 말을 시켜서 창 밖을 내다볼 틈도 없었다. 비니는 도심에 있는 최고급 호텔에
방을 얻어 두었다.
[피곤하면 한잠 자 둬요.]
비니는 간이 바에서 가져온 크리스탈 잔에 담긴 위스키를 건네 주며 말했다. 나는 단숨에 위스키를 비웠
다.
[그렇게 긴장할 거까진 없어요. 제가 옆에 있잖아요.]
카마는 뉴욕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지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비니도 내게 닥쳐올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 물고 있었다. 기다리면 모든 걸 알게 될 거란 식이었다. 위스키를 거푸 세 잔을
마시고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귀를 간지럽히는 야릇한 느낌 때문에 눈을 뜨니 비니가 내 귀
를 핥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자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비니는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트인 파란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큼직한 자수정 목
걸이와 귀고리가 눈을 시 리게 했다.
[당신 옷은 저기 있어요.]
비니가 가리키는 옷걸이에 턱시도가 걸려 있었다. 어디 파티라도 갈 모양이었다. 비니는 시녀처럼 공손
하게 내 옷을 벗기고 턱 시도를 입혀 주었다.
[이제 파티를 즐기러 가요.]
호화스러운 집이 줄지어 선 동네로 리무진은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솔직히 말해 턱시도를 입고 가야 하
는 파티는 내게 처음이라 좀 긴장이 되었다. 리무진은 넓은 잔디밭 사이로 난 아스팔트를 지나 대리석과
목조로 지어진 고풍스런 저택 앞에 도착했다. 촌놈처럼 눈만 껌벅이고 있는 내 손을 비니가 다정하게 잡
아 당겼다. 리무진이 스르르 시야에서 사라지자 비니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다 왔어요. 여기가 바로 바닐라 클럽이에요. 짖굳은 이름이죠?]
[짖굳다?]
그때 나는 비니가 왜 바닐라 클럽이란 이름을 짖굳다고 했는지 몰랐다.
[이 클럽에서 벌어질 일을 잘 모르신다면서요? 체인징 파트너란 거 들어 봤어요? 그거에요.]
가끔 천리안 성인 클럽 게시판에 가면 30-40대 부부를 찾는다는 사람이 있었다. 생활에 활력을 주기 위
해 성적인 만족을 교환할 부부가 있으면 연락하라는, 한마디로 웃긴 광고였다. 비니는 내 팔에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이제부터 당신과 나는 애인 사이에요. 당신 이름은 헨리 강. 잊지 말아요. 그리고 내 옆에서 절대로 떨
어지면 안되요. 다른 여 자가 말을 붙여와도 무시해 버려야 해요.]
비니는 내게 선글라스를 끼워주었다.
[당신한테는 이 편이 훨씬 편할 거에요.]
자주 왔던 곳인지 비니는 거침없이 정문으로 향한 계단으로 올라갔다.
[여긴 헨리 강. 내 새 애인이야.]
[왜 이렇게 늦었어? 벌써들 시작했는데...]
눈 가에 잔주름이 진 갈색 머리의 여자가 나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그러면서 연방 끈적끈적한 미소를 던
졌다.
[여긴 산드라. 이 집 주인이야.]
비니는 정말 애인인 것처럼 내게 몸을 기대며 아양을 떨면서도 연신 홀 안을 살펴 보았다.
[낸시는?]
몇 십명이 한꺼번에 무도회를 열어도 충분할 그 홀 중앙에 무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무대 위에는 지붕이
없는 집이 지어져 있었 는데 커다란 창문과 목조 문은 열린 채였다. 그 무대를 빙 둘러 원탁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온갖 종류의 술병으로 가득한 바가 있었다. 잘 차려입은 남녀 가 무대 가까
운 원탁에 듬성듬성 앉아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보다는 썰렁하게 느껴졌다. 그쪽보다는
무대 옆에는 대형 멀티비젼으로 눈길이 쏠렸다. 멀티비젼에는 여러 쌍의 남녀가 난교를 벌이는 화면이
비춰지고 있 었다.
화면 위쪽에 네비게이터의 메뉴바가 있는 걸로 봐서 인터넷 티브에서 방영되는 포르노인 모양이었다. 산
드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옮겨가던 비니가 내 팔을 살짝 잡아 끌었다. 나는 산드라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비니를 따라갔다. 비니는 무대 바로 아래, 그러니까 무대 위의 집 창문 너머
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면서 그 집 안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자 리에 나를 앉혔다.
[창문 안을 살펴 봐요.]
나는 비니가 시키는 대로 약간 고개를 빼고 시선을 고정했다.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언지 알
게 된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때까지 웃음 소리에 섞여 있어서 정체가 분명하지
않던 묘한 신음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려왔다. 무대 위의 집 안에서는 발가벗은 여자 둘과 남자 하나가
뒤엉킨 채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건장한 백인 남자는 침대에 누운 채 검은 머리 여자의 젖가슴을 하
고 있었고, 금발 여자는 요란스러운 고개짓을 하며 남자의 성기를 빨고 있었다.
[잘 봐요. 저 검은 머리가 바로 당신이 찾는 낸시에요.]
머리를 숙인 채 젖가슴을 빠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신음하고 있던 검은 머리 여자가 못참겠다는 듯 머리
를 흔들며 고개를 하늘로 치켜 들었다. 목까지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눈동자가 반쯤
가려진 그 여자의 게슴츠레한 눈과 내 눈이 스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몸을 젖
혔다. 그 러자 비니가 내 팔을 붙잡았다 .
[뭐가 잘못 됐어요?]
목까지 말이 차 올랐지만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목이 경직되어 버렸다.
낸시라고 불린 그 여자 는 다름아닌 곽 재원이었다. 비니는 나를 진정시키려고 그랬는지 바짝 내 옆에
붙어 앉았다.
[낸시는 양성애자에요. 이 사교 클럽에선 유명하죠. 저기 바에 앉아 있는 갈색 머리 보이죠?]
어깨가 딱 벌어진 백인 남자가 여유만만하게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낸시와 5년째 동거하고 있는 지미에요. 공인회계사지요. 저 사람도 양성애자에요. 여기 모인 여자 대부
분이 양성애자지만 난 안 그래요. 난 레즈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룹으로는 안하고 남자와 일대일로만
해요.]
비니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비니의 말을 한 귀로 흘려보내고 곽 재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새
곽 재원은 남자의 가슴에 올라타고 앉아 그 가슴에 엉덩이를 마구 비벼대고 있었다.
[이런 건 물어보지 말랬는데요...]
비니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내 시선은 곽 재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당신처럼 순진해 보이는 사람이 왜 낸시 같은 여자를 찾는지 모르겠어요. 말해 줄래요?]
나는 엉덩이를 남자의 얼굴 쪽으로 옮기는 곽 재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미안해요. 당신이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저기 가서 낸시와 어울릴 수도 있어요. 낸시 아래에 있는 샘은
양성애자는 아니지만 당 신이 샘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뭐라고 하진 않을 거에요.]
곽 재원의 신음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사람은 겉으로 봐서 모르는 거야. 어때? 이제 곽 재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지?]
카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지 왜 그런 걸 보게 했냐고 따져야 할지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
나 그런 두 생각이 묘하 게 섞여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세상에는 닮은 여자도 많지 않습니까?]
솔직히 나는 낸시라는 여자가 곽 재원이란 걸 믿으려 들지 않았다. 곽 재원이 그런 여자여서는 내 꼴이
불쌍하게 되는 거였다.
[그럼, 내일 곽 재원에게 전화해 봐. 오늘 밤에 도착하거든. 다른 말은 할 필요도 없어. 그냥 낸시 블레
어를 아느냐고만 물어봐 .]
[낸시 블레어 하고 무슨 사입니까?]
망설이느라 오전을 다 보내고 점심 시간이 끝날 무렵이 되서야 곽 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곽 재원은
금방 내 목소리를 알아 차렸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에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곽 재원는 목소리를 낮춰 애원조로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또박또박하게 물었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습니까?]
[사진까지 보내놓고 그건 왜 물어요? 내 입으로 꼭 말을 해야 하나요?]
[사진이라니?]
곽 재원은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원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날 곤란하게 만들진 말아요. 그러지 말고 당장 만나요. 어디가 좋
겠어요?]
[다시 연락하지.]
곽 재원과 낸시가 동일 인물이란 확신이 서자 내 말투도 바뀌어 버렸다. 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네가 원한다면 곽 재원을 회사에서 쫓겨나게 만들 수도 있어. 이제 내 힘을 알겠어?] 나는 카마에게 꼼
짝없이 고양이 앞의 쥐 신세였다. 나는 어눌하게 물었다.
[저어... 그러니까... 어떻게... 곽 재원...의 비밀을...]
[알아냈느냐? 돈이 모든 걸 해결해 줘. 이번 일에 만 달러 들었어. 내게 빚진 거야. 잊지마.]
내가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카마가 빠르게 말했다.
[요즘 네 어머니 뒤를 캐고 있거든.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네 집안 미래가 달렸어. 내 말뜻, 알겠니?]
목이 잠겨 겨우 대답했다.
[네.]
카마는 통쾌하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카마는 목소리를 다정하게 바꿔 말했다.
[이번에 네가 할 일을 알려줄게. 곽 재원을 만나. 그리고 복수를 해. 네 컴플렉스를 완전히 떨쳐 버리란
말야. 네가 어떻게 해 도 아뭇 소리 못하고 따를 거야. 좋은 기회지?]
카마와 통화가 끝나자마자 여느 때처럼 자동응답기 녹음장치의 정지버튼을 누른 후 소형 녹음 테이프를
꺼냈다. 테이프 라벨에 날자를 적은 후 플라스틱 케이스에 넣었다. 그걸 오른쪽 책상 서랍 속에 날자 별
로 정리되어 있는 테이프 케이스들 옆에 세워 놓았다. 아직 쓰지 않은 녹음 테이프 하나를 꺼낸 후 서랍
을 닫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