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년◀ 제13화 (다까하끼 요오꼬...)
오랜만에 이규석으로 부터 오르가즘을 느꼈다. 언젠가부
터 느끼지 못하는 그와의 잠자리로 인해 서서히 그를 떼어내려던 참 이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나른한 전신으로 짜릿한 쾌감이 여기저기서 찔끔찔끔 느껴졌다.
[ 아! 자기야...]
서음희의 배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이규석이 후희를
시작하자, 서음희는 탄복하듯 마지막 신음을 토해내며 그를끌어 안았다.
그의 술냄새 마저도 서음희는 달콤했다. 눈을 감은 채 이규석의 두툼한 혓바닥을 연신 삼키고 있었다.
피로가 몰려왔다. 모든게 귀찮았다. 출근하는 이규석을대문까지 배웅했다.
[ 미안해요, 아침도 못해주고.]
[ 쓸데없는 걱정말고 잠 좀 자둬. 그나저나 학교 안나가
도 괜찮은거냐? ]
[ 오늘은 빠져도 별 지장 없어요. ]
[ 무서우면 또 119 쳐라. 알았지? ]
[ 가세요, 어서...]
이규석의 승용차가 골목을 빠져나가자 서음희는 기지개를
쭈욱 피며 눈물이 나도록 하품을 해댔다. 그리고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다 옆집에 시선을 멈췄다.
처음엔 몰랐으나 보면 볼 수록, 한번 쯤 들어가보고 싶은
충동을 일게 하는 호화스런 집이란 생각을 했다.
대문은 오늘도 굳게 닫혀있었다.
( 여긴 대체 누가 사는거야...? )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와 옆집 정원을 넘겨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람이 한줄기 상큼하게 불어왔다. 새벽녁의 흥분을 떠올리며 서음희는 양팔을 벌리곤 환하게 웃었다.
[ 아, 시원해라...]
안방으로 들어온 서음희는 지난 밤 부족했던 수면을 걱정
하며 침대위로 다시 누웠다. 그러나 방금전 까지 몰려왔던
졸음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눈이 감겨지질 않았다.
생각이 많은 탓 같았다. 어젯밤 발견한 노트가 자꾸만 궁굼했다.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벽장문을 열었다.
작은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누렇게 바랜 겉 표지에
'일본년' 이란 글짜가 눈에 들어왔다.
30년 전, 이 집을 일본 사람이 지었다는 중개업자의 말을
떠올렸다.
무언가 서음희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집에 대한
의문들 이었다. 반값도 안되는 집값, 음흉스런 구조, 사라
진 중개업자, 노트 속에 집에 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폐이지를 넘겼다. 맨 윗줄을 읽으며 서음희의 시선이
노트 앞으로 바짝 붙었다. 그리고 읽어 내려갔다.
다까하끼 요오꼬... 저주를 받고 말 년, 끝없이 채워도
채워지지 않을 성에 굶주린 악마의 딸로 태어난 년, 신의
심판을 받을것이다.
1971년 태양이 유난히 이글거리던 7월의 어느날, 일자리
를 부탁한 친구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철로를 녹
일듯 작열하는 태양은 아침부터 짜증을 주었지만 취직이 될
수 있다는 기대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두어군데 친구를 따
라 면접을 보았으나 오른쪽 뺨으로 길게 그어진 칼자국으로
인해 말한마디 못해보고 뒤돌아서야만 했다.
몹시 미안해 하는 친구를 오히려 위로하고 집으로 가기위해 서울역에 도착했다.
대합실에서 시간을 기다리던 나는 바닥에 딩구는 신문을주워 보게되었다. 관심은 광고난 이었다.
급하게 운전기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곤 혹시나 하는 마
음에 전화를 했고 일단 보자는 상대의 말에 따라 귀향을 포기하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
고급스런 가정집이었고 혼자 사는 사십 초반의 여자였다.
혀 짧은 발음으로 그녀는 친절하게 나를 맞았다. 나중에야
그녀가 일본여자란 것을 알았다.
그녀는 두툼한 봉투를 내밀며 선불이라고 말했다. 나를받겠다는 뜻이었다.
그때의 기쁨이, 처절하게 나를 죽여가는 시발점 이었다는걸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긴장하며 읽어가던 서음희는 멀리서 전화벨소리가 울리고있다는 걸 알았다. 거실이었다.
노트를 든채 거실로 뛰어나갔다.
[ 여보세요? ]
[ 모, 하고 있었구나? ]
얼마전 결혼한 과동기였다.
[ 애진이? ]
[ 벌써 목소리도 잊었냐? ]
[ 아침부터 왠일이야? ]
[ 넌 학교 안가고 왠일이냐? 혹시나 해서 걸었는데...]
[ 아파서... 빠질려구.]
[ 네가 다 아퍼? 아휴, 목소리가 무지 아픈사람 같네. 너
또 꾀병이지? ]
[ 후훗. 무슨일인데? ]
[ 그렇게 바쁘냐? 끊어줄까? ]
[ 기집애도... 신혼 재미는 어때? ]
[ 신세좀 지려고 전화걸었다. ]
[ 무슨일인데...]
[ 나 그새끼 한테 속았어.]
[ 그새끼라니...? ]
[ 그새끼가 누군 누구냐, 나쁜 새끼지.]
[ 무슨 말이야? ]
[ 사기꾼 한테 속아서 결혼했어, 나 일단 별거했다.]
[ 무슨일인데? ]
[ 나 가도 되, 가지말어. 그거나 대답해.]
[ 그래 와...]
[ 나 짐 싸들고 나왔어, 아주 나온거야. 언제까지 있을지
도 아직 몰라. 괜찮아? ]
[ 응, 그래 와...]
전화를 끊은 서음희는 당황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워
야 할지 정신이 없었다. 우선은 공간으로 내려가는 출입문
부터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노트를 접어 벽장안 상자에 넣고는 다락으로 올라갔다.
한쪽에 놓여있던 두개의 박스를 밀어 출입구를 막았다.
그제서야 안심이 된듯 가늘게 숨을 몰아쉬며 다락을 빠져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