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각색

원죄

조회 10703 추천 0 댓글 2 작성 14.04.14

   원 죄 (原罪)

** 나오는 사람들 **

김병달(20) K대 경영학부 2학년
김유성(54) 유성산업 사장. 병달의 아빠. 상문동에 살고 있음
최수진(26) 유성산업 총무부에 근무. 김사장의 전비서 출신. 강서동에 살고 있음
윤봉미(23) 유성산업 비서실에 근무. 김병달과 결혼
촌로(70)   평전리 과수원 주인. 봉미의 아빠
김병우(37) 유성산업 총무부장. 병달의 사촌 형
문정희(48) 김사장 부인(병달의 엄마).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일신병원에
           누워 있음
김경수(0)  병달과 봉미의 아들
조민수(55) 유성산업의 전신인 수성산업 창업주. 김사장 친구. 이미 사망.
           평전리 만석지기 가문의 4대 독자
조광호(60) 조광병원 원장. 조민수의 먼 친척 아저씨(11촌숙)

   * (  )속의 나이는 얘기 시작 당시 나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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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 1 부 -
<><><><> Fore-play dance (전희) <><><><>
(1) 의 누나
(2) 첫 만남
(3) 결혼 날의 해프닝
(4) 신혼 여행
(5) 꿈속의 파티
(6) 덫
(7) 밤하늘 세레나아데
(8) 폭탄 선언
(9) 진상
(10) 빌미

- 2부 -
<><><><> Intercourse (진입) <><><><>
(11) 봉미의 친정 나들이
(12) 멸문 폐가
(13) 방황
(14) 유령의 집
(15) 집착
(16) 강변 가든
(17) 꿈속의 열락
(18) 은애의 샘
(19) 악마의 늪
(20) 설야

- 3부 -
<><><><> Ejaculation (방사) <><><><>
(21) 불타는 설원
(22) 엄마라는 환상
(23) 공명심에 불타는 여자
(24) 적개심에 불붙이는 나약한 남자
(25) 돌아온 적진
(26) 적과의 동침
(27) 반란을 준비하며...
(28) 회한의 눈물

- 4부 -
<><><><> After-play (후희) <><><><>
(29) 복수혈전
(30) 아(我) 진지 구축
(31) 무주공산(無主空山)
(32) 고해성사는 성당에 가 하시라...
(33) 복수의 신파극
(34) 허탈한 역사
(35) 엄마 왜 날 낳으셨나요...
(36) 꿈인가? 생시인가?
(37) 환생! 그 진실...
(38) 멍에
(39) 원죄(原罪)
(40) 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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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原罪)  - 1부 : Fore-play dance (전희) -
                                                  Written by Ddam-dd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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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 누나

병달은 스무 살 어린 나이에 결혼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대학 2학년생으로 그의 의지와는 거의 무관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돌발적인 결혼이었
다.
병달이 다니던 대학은 지방 명문대학이던 K대 경영학부로 그건 순전히 이 지방 최고의 재력가이
던 그의 아빠의 힘에 의해 들어간 학교였었다.
그가 맞이한 신부는 그의 아빠 회사의 비서실 출신으로 그 보다 세 살이나 위인 연상의 신부였
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그와 학부는 틀렸지만 그와 같은 대학 출신으로 그에게 3학번이나 빠른 선배
였다.
그녀는 재학 당시 재학생이라면 거의 알만큼 유명했는데 'K대 미스 퀸'으로 뽑혔을 만큼 뛰어난
외모를 지녔었다.
그런 그녀가 졸업 후 첫 직장으로 들어 간 곳이 병달의 아빠가 경영하는 '유성산업'이였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른 병달으로썬 가끔씩 그의 아빠 회사에 들릴 적마다 사장실 앞에 앉아서 깎
듯이 인사하는 아가씨를 '제법 예쁘게 생긴 아가씨'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런 그녀가 그의 관심권 안으로 들어온 건 그해 초 유성산업의 정기인사가 발표되고 새로 짜여
진 중역진을 모두 집으로 초대한 가든파티 때였다.
병달은 마침 춘기방학중이라 집에 있었다.
그의 엄마는 그가 중학생일 때 아빠와 둘이 휴가를 다녀오다 차 사고로 벌써 5년째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신세였다.
때문에 집안 일은 거의 식모 아줌마가 도맡아 하고 있었으나 그런 일이 있는 날은 으레  아빠
회사의 비서실 아가씨들이 와서 돕곤 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침부터 그녀를 포함한 두 아가씨가 집에와 시장을 봐 오고 아줌마의
음식 일을 돕느라 분주했다.
그중 한 아가씨는 그녀 이전에 비서실에 있다가 그녀와 교대하고 총무부로 내려간 아가씨였다.
병달도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들리다시피 했으니까.

"병달씨! 안녕?"
2층 베란다를 서성이는 그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응! 누나 왔어!?"
그는 옛날부터 그녀를 누나라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병달아 안녕!' 그렇게 했다.
"병달씨! 그간 많이 컸어!!"
"왠 -씨..??"
그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이 만큼이나 컸으니까 -씨라 해줘야지!"
그와 키를 재어 보이며 말했다.
정말 그녀는 이제 그의 눈 아래에 머물렀다.
그때 그 분위기를 깬 건 지금 아내가 된 그녀였다.
"언니! 회사에서 들어오래요"
"벌써...?"
"언니만요!"
"아니 나만...?"
누나는 조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총무과에 급한 일이 생겼나봐요. 김부장이 전화했어요"
김부장은 총무부장이었다.
그는 병달의 사촌형으로 병달과 친했다.
"누나! 내가 형에게 전화해 줄까요?"
시무룩해진 누나는 손을 내 저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병달도 시무룩해져 베란다 난간에 손을 짚고 서서 대문 밖으로 나서는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었다.
졸지에 엄마가 병석에 눕고 형이나 누나가 없는 그에겐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던 유일한 사람이
그 누나였었다.
어두운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를 대하는 그녀의 눈빛은 늘 온화했고 그의 청도 곧잘 들
어주었다.
고2 학기말 시험에서 그의 성적이 반에서 무려 20등 아래로 떨어져서 학부형 호출을 받았는데
그녀가 그 일을 멋지게 넘기게 해준 일도 있었다.
나중에 그녀가 그 과정을 소상히 일러준 얘기로는 병달의 고민을 들은 그녀는 다음날 무작정 학
교로 찾아가서 그의 담임을 만나 병달 엄마는 병원에 누워 있고 아빠는 바빠서 못 오고 대신 자
기가 왔는데 자기는 병달의 친누나라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책임지고 병달의 성적을 올리겠노라고 약속한 뒤 돌아왔다고 했다.
그후 정말 그녀는 일과 후 그의 집으로 와서 그를 가르쳤다.
나중에 들려준 얘기로는 그 후부터 병달의 담임은 그의 성적을 비롯한 모든 문제를 그녀와 상담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를 못 보게 된 건 비서실에 다른 아가씨가 들어오고 그녀가 총무부로 내려간 뒤부터였
다.
그녀가 총무부로 간 건 회사의 일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집에까지 발길을 끊은 건 내막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회사로 찾아가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아빠께 무슨 연유라도 있는 건지 여쭤 볼 수
는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집안에서 거의 말이 없는 분이기도 했지만 병달이 하는 일은 늘 못마땅해하던 아빠였기 때문이
다.
그런 그녀를 오늘 모처럼 만났는데 그간의 안부도 한마디 못 물어본 채 떠나 버렸으니 병달의
마음이 오죽 허전했으랴...

 

(2) 첫 만남

"여기서 내려다보니 전망이 너무 너무 좋네요...!!"
병달이 베란다 난간을 짚고 구부리고 선 옆으로 다가오며 그녀가 말했다.
병달은 그녀가 여태 서 있는 줄 몰랐는지 짐짓 놀라며 돌아보았다.
"수진 언니를 몹시 좋아했나 보죠...?"
4년여간 알고는 지냈지만 그 누나의 이름이 '수진'인 줄은 모르고 지났다.
그냥 '최양' 또는 '미스최'라 불리는 소리는 더러 들었지만...
그는 속으로 '최수진!'' 최수진!'을 몇 번이나 되 내었다.
최수진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결정적일 만큼의 관계는 아니었다 여겨지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러했다.
"언니는 참 좋은 사람예요..."
그녀의 말에 병달이 아무런 대꾸가 없자 그녀가 그냥 해본 말이었다.
"예! 누나는 좋은 사람예요!"
병달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윤봉미라 해요!"
그는 어색하게 손을 잡았다.
"전 김병달이라고 불러요..."
"댁 이름이나 내 이름이나 둘 다 촌스럽긴 마찬가지네요. 호호호...!!"
그녀가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에겐 어쩐지 수진누나의 자리를 뺏은 장본인이라는 생각에 가까워
지긴 좀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 앞섰다.
그건 봉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싫으나 좋으나 자기가 모시는 사장의 외아들로 어쩜 사장보다도 더 극진히 대해야 할 상대였지
만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조금전의 수진과 병달 관계처럼 되긴 힘들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병달씨라 했나요? 아직 학생인 모양이던데 어느 학교 다녀요?"
그 말은 초면에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달리 할말도 없고 서로 서먹서먹해 하
기 때문에 그녀가 던진 말이었다.
"K대요...!"
순간 봉미는 짐짓 놀랐다.
"무슨 과예요?"
"경영학부..."
봉미는 자신도 K대 정보통신학부 출신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리고 시침을 떼며 부러워하는 눈짓마저 보이며 말했다.
"참 좋은 대학 다니시네요..."
그 말에 병달의 마음이 좀 누그러진 것인지 수진과의 첫 대면 때처럼 "집안 구경이나 시켜 드릴
까요!" 하면서 앞서 걸었다.
1층은 이미 보았을 테니 생략하고 2층의 자신의 방, 아빠 서재, 그리고 5년이나 주인이 드나든
적 없는 엄마의 드레스 실...
옥상에 올라 넓은 잔디정원의 중앙에 자리한 풀장에 햇빛이 반사되어 아른거리는 물보라를 내려
다보며 깔깔거리기도 했다.
결코 우스울 아무런 이유도 없음에도 말이다.
조금전의 그 예감이 얼마나 빗나가고 있는지 그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하긴 수진 누나와의 첫 대면시도 그렇지 않았던가...
졸지에 엄마의 보살핌이 사라진지 1년여... 그의 마음과 심성이 급격히 내리막길을 향하고 있던
당시... 돌연 나타난 수진을 처음 얼마나 경계하고 이유 없이 미워도 했다.
그때도 오늘과 같은 계기와 비슷한 과정으로 친해져서 그후 근 4년 여 동안 친누나처럼 어떨 땐
엄마처럼 엄마의 빈자리를 메워오지 않았던가.
병달은 봉미와 옥상 난간을 한바퀴 빙 돌면서 뒤쪽 유실수들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서는 저 나
무는 배나무, 저 나무는 사과나무, 저 나무는 대추나무인데 작년에 한말이나 땄다는 둥 자랑을
늘어놓았다.
3천 평이 넘는 과수원집 딸인 봉미로썬 저 아래 나무들이 무슨 나무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끝마다 탄성을 지어 보이며 친해지려 애썼다.
그래서일까
옥상에서 내려올 적 봉미가 병달의 손을 슬쩍 잡았을 때 병달은 뿌리치지 않았다.

봉미는 그날 종일을 머무르며 아줌마를 도와 음식 준비를 하면서 짬짬이 병달과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저녁이 가까워 오자 둘은 창고에서 파티용 벤취를 꺼내와 정원 곳곳에 설치하고 시간에 맞춰 음
식을 날랐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할 즘 부부 동반의 손님들이 하나 둘 들이닥쳤다.
아빠가 돌아오지 않아 단연 이 집의 주인격인 병달은 봉미와 함께 현관에 나란히 서서 그들을
맞았다.
손님의 반 이상은 병달도 아는 사람이라 그리 낯설은 영접은 아니었다.
그건 봉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 파티를 베푸는 김유성 사장의 개인 비서이고 오는 이 또한 그녀를 모를 리 없었기 때
문이다.
병달과 봉미 둘은 그새 가까워진 걸 과시라도 하려는 듯이 마치 오누이처럼, 부부처럼 나란히
서서 공손히 절을 하며 맞았다.
뒤늦게 온 그의 아빠는 평소답지 않게 인자한 얼굴로 병달의 등을 툭툭 치면서 "오늘 네가 수고
했구나!"면서 그를 위로했다.
파티는 시작되어 사적으로 병달의 사촌형인 총무부장의 경과 보고가 있고 김사장의 간단한 인사
말이 있은 후 김사장이 잔을 치켜들며 "위하여!"라 외치자 모두들 따라 "위하여!"를 외치며 파
티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파티가 시작되자 그들은 정작 할 일이 없어져서 주방을 서성이다가 슬그머니 병달의 방으로 올
라왔다.
창 밖 베란다 아래에선 환한 불빛 속에 적당히 취해 가는 궁상들의 시끄러운 잡담들이 들려왔
다.
병달은 그녀와 같이 할만한 놀이가 없어서 컴퓨터를 켜서 그 속의 게임을 한번 해 보라고 시켰
다.
처음엔 좀 서툴던 봉미는 금방 익숙해져 병달은 한번도 넘어보지 못한 3,000점을 순식간에 돌파
해 버렸다.
"와!! 봉미씬 맨날 게임만 했어요!?!?"
"호호호...!!"
벌써 5,000점을 넘고 있었다.
"혹시 게임과 졸업했어요??"
병달은 반은 경탄조로, 또 반은 농담조로 물었다.
"그것 비슷해요..!!"
"그럼 기술정보고(컴퓨터정보통신전문 고등학교) 출신...??"
당시 병달으로썬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회사에 취직한 여고 출신 정도로만 생각
했다.
그리고 나이도 그와 같던가 한 살 정도 아래로 생각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건 비밀... 호호호...!!!"
병달은 이 학교 저 학교 들이대며 캐물었지만 그녀는 재밌다는 듯 연신 고개만 흔들었다.
참다못한 병달이 그녀를 간질러대면서까지 알아내려 했으나 그럴수록 더욱 깔깔거리기만 할뿐
끝내 가르쳐주지 않았다.
'용용 약 오르지'라는 식으로 "비밀?" "비밀!" 이 말만 되풀이했다.
사실 그게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는데 병달은 그녀와 같이 숨어들 통로라도 발견한 것처럼 떼를
써가며 파고들었고, 봉미는 봉미대로 그와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도 잡은 양 그
를 적당히 당겼다 풀었다 수위를 조절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던 누구의 의도가 강했는지는 몰라도 그날 밤 둘은 서로 몸을 간질러대며 장난 칠 정
도로 친해진 건 사실이었다.

 

(3) 결혼날의 해프닝

호텔 특실에서 치뤄진 그들의 결혼식은 이 지방 제일의 재력가인 김유성 사장의 외아들답게 호
화롭게 치러졌다.
결혼 하객으로는 양가 친인척 및 유성산업 임직원들은 물론 이 지방의 시장을 비롯한 내노라 하
는 유지들은 모두 모였다.
그리고 신랑신부 양측 우인들을 비롯한 K대 교수들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신랑은 아직 스무 살 어린 나이로 홍안의 얼굴이었지만 작은 키의 배불룩이인 제 아비와는 달리
늘씬한 키에 걸친 까만 턱시도는 호화로운 호텔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신부 또한 빼어난 미모를 한껏 뽐낸 화사한 화장과 고풍적으로 땋아 올린 머리에 씌운 면사포는
이 지방 제일의 갑부 며느리로써 한 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둘의 표정은 결혼식 내내 굳어 있었고, 특히 신랑인 병달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못
마땅해하는 표정이 엿보였다.
으레 그렇듯이 관혼상제의 중요한 의식일수록 당사자나 하객들 모두 어색하고 따분한 격식에 한
번쯤 '왜 이런 무의미한 의식을 치러야 하는 걸까?' 하고 반문하게 되지 않는가...
그건 병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신랑 김병달은 신부 윤봉미를 맞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까만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
랑 할 거뇨??"
"..."
"다시 묻겠소! 신랑 김병달은 평생을 다할 때까지 신부 윤봉미만을 사랑 할 거뇨??"
"..."
그래도 아무 말이 없자 장내는 갑자기 폭소가 터졌다.
잔뜩 긴장한 나머지 주례사의 소리를 못 듣고 있던 병달은 장내의 폭소와 웅성대는 소리에 고개
를 돌려 옆을 보자 혼주석에 앉아 있는 아빠의 얼굴이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뭔가 잘못 됐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또다시 주례사의 되물음이 이어졌다.
"신랑 김병달은 까만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신부 윤봉미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할 수 있느
뇨?"
병달은 이제 말뜻은 알아들었으나 이번에는 그 물음에 '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해야 할 것인지
에 대해 고민에 빠졌다.
"...."
이번에도 신랑의 대답이 없자 장내는 이곳 저곳에서 요상한 말까지 흘러나오면서 술렁대기 시작
했다.
"혹시 신랑이 벙어리 아냐..??"
"인물이 아깝다..."
"어쩐지 아빠 인물과 너무 다르다 했더니..."
"저런 부잣집에도 외아들 귀 하나 못 뚫어주나 보다..."
"신부가 너무 불쌍하다..." 등등등...
김사장은 혼주석에 앉아 그 소리들을 들으며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자리가 자리이니 만큼 회사
나 집에서처럼 큰소리 치거나 요절을 낼 수도 없고 뒷골이 뜨끈뜨끈 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사태는 다분히 병달의 아비에 대한 반항 내지는 준비된 반격이라는 생각이 점점
짙어져 갔다.
그런 확신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김사장은 더욱 화가 치밀어 당장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그의 뺨
을 걷어올리고 싶었지만 그간 유성산업을 경영해오며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 기업가답게 그
노여움을 속으로 삭이며 덤덤히 앉아 있었다.
"예~!"
조금 쉰 듯한 목소리였다.
갑자기 앞쪽에서 흘러나온 그 소리에 다시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난감한 순간을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소리로 장내가 다시 조용해지긴 했으나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그것도 신랑의 아비였다면 몰라도 그 소리를 직접 들어야 할 신부의 아비가 그 대답을 대신 했
으니...
그러했다.
정말 그 소리는 견디다 못한 반대측 혼주석의 촌로(장인)가 대신해준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걸 아는 사람은 주례를 비롯한 앞쪽 몇몇 뿐이었다.
순간 앞쪽 두 혼주들 간엔 의미 있는 눈길이 오갔다.
신부측 아비는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소리에 대한 사죄의 송구스런 눈빛을, 신랑측 아비는 이
난감한 순간을 재치 있게 넘기게 해준 감사의 눈빛을...
그리고 주례는 양측 혼주들간의 양해가 오갔음을 확인 후 다음 차례를 이어갔다.
"이제 신부에게 묻겠습니다. 신부 윤봉미는 ....."

 

(4) 신혼 여행

그들의 신혼 여행은 하와이 3박4일로 정해져 있었다.
여행지의 거리에 비해 너무 짧은 일정이었지만 병달이 학생이란 신분을 고려해 짧게 잡았다는
아빠의 말에 별다른 불만 없이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하기야 여행지와 일정까지 죄다 정해진 티켓을 들고 와서 '어떻냐'고 묻는 데야 '싫다'하면 부
자간에 싸움밖에 더 날 일인가...
식장 안에서의 긴박했던 순간과 줄곧 이어진 긴장감속에서 벗어나 비행기 트랩을 오를 때의 그
의 기분은 많이 풀려져 있었다.
여행이라는 고유의 기대감이 주는 즐거움과 호기심이 그의 마음을 부풀게 했다.
"봉미씬 이런 여행 많이 해 봤어요?"
"아뇨 첨예요. 자기는?"
"아주 어릴 적, 아마 대 엿 살쯤 될 때 엄마와 아빠 그렇게 셋이서 비행길 탔던 기억이 있는데
혹시 이 길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어요..."
"참! 어머닌 언제부터 그렇게 되셨어요?"
그 말에 병달이는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모든 예식을 마친 그들이 공항에 오기 전 그의 엄마가 누워 있는 병원에 잠시 둘러 왔다.
벌써 수 년째 식물인간이 된 그의 엄마가 오늘이라 해서 별다른 모습을 보일 리 있었겠는가?
그들은 아무런 표정도 말도 없는 그녀의 병상 앞에 자리를 깔고 큰절을 올렸다.
병달은 종일 억눌러 왔던 울분을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로 토해냈었다.
"으흐흐흑~~ 엄마!!"
그는 같이 따라간 주위 가족들의 만류와 봉미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그 곳을 빠져 나왔었다.

"내가 고1이던 여름이었어요.
두 분이서 주말여행으로 춘천엘 다녀온다고 나가셨어요. 그전 몇 달간 두 분의 사이가 별로 안
좋았어요. 원래부터 썩 좋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당시 나는 원래 부부라는 관계는 그런가보다고
만 여겼어요. 그러나 그 몇 달간은 유별나게 관계가 악화되어 걸핏하면 싸우곤 했어요. 나중엔
엄마가 이혼해달라고 떼를 썼고 아빠는 죽어도 그렇게는 못한다고 했어요. 자신의 호적에 이혼
이란 단어는 절대로 올릴 수 없다면서...
그런 중에 두 분이 여행을 간다며 나란히 나서길래 화해를 했나보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다음날 저녁 병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교통사고가 났다면서...
난 허겁지겁 달려갔어요.
벌써 회사 직원들이 찾아와 사고를 수습하느라 우왕좌왕 난리였어요.
엄마는 머리를 크게 다쳐 뇌수술에 들어갔고 다행히 아빠는 얼굴 타박상과 팔에 골절상만 입어
벌써 기부스를 마치고 병상에 누워 있었어요.
내가 아빠 병상 옆으로 다가갔을 때 아빠의 입에선 심한 술내가 풍겼어요.
난 그때 이미 알았죠. 아빠가 계획적으로 엄마를 그렇게 만든 거라는 걸..."
그의 두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설마 그랬을 리야 있겠어요!"
"아뇨! 사실일 거예요.
분명히..."
"그래서 평소 사장님을 그렇게 미워하는 거예요?"
"나는 미워하는 게 아니라 그를 증오해요!!!"
그의 불끈 쥔 두 주먹이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그 분은 병달씨의 아빠잖아요"
"내가 증오하는 건 내 아빠가 아니라 엄마를 그렇게 만든 그 사람이에요!!"
"병달씨의 기분을 모른 바는 아니지만 이미 오래 전에 지난 과거잖아요. 사장님도 그 일로 하여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이제 용서해 드리는 게 자식의 도리가 아니겠어요?"
"지난 일이라고요? 과거의 일이라고요? 천만의 말씀! 지금도 진행중인 현재요 미래라고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뭔지는 모르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하여튼 아직도 아빠의 엄마에 대한 가해는 계속되
고 있다고요!!"
아빠에 대한 아들의 무모한 확신으로 가득한 증오의 얼굴을 보는 봉미로썬 섬뜩했다.
"...."
"그건 단순한 가해 정도가 아니라 보복 내지는 복수 같은 것인지도 몰라요..??"
갈수록 태산같은 말이었다.
무서운 공포영화라도 보는 듯한, 아니 그 주인공인 듯한 표정...
터부시되는 그 어떤 미스테리를 벗기려 파고드는, 그런 피빛서린 눈빛을 하고서...
봉미는 겁이 났다.
"이제 그 얘긴 그만 하세요. 저! 무섭단 말예요!!"
봉미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비행기는 창 밖 비단 같은 구름 위를 나르고 있었다.

그들이 거의 반나절을 날아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그러나 휘황찬란한 불빛에 밤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몇 시나 됐을까하고 병달은 시계를 내려다 봤다.
밤 11시라 시차를 계산하면 새벽 4시쯤 된 듯 했다.
정말 저쪽 끝 까마득한 수평선너머로 뿌연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같은 비행기로 간 다른 여행객들은 밤이면 어떠랴, 또 새벽이면 어떠랴, 마냥 즐겁기만한 표정
들이었지만 그들은 비행기안에서 반 이상을 잠만 잤음에도 피곤하기만 했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방을 배치 받자 말자 그는 침대 위에 쓰러졌다.
얼마나 잤을까?
봉미가 그의 몸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병달씨! 씻고 자세요??"
병달의 생각으로는 아마 한시간은 잔 듯 했다.
창문 밖이 훤히 밝아 있었다.
"자기! 이제 좀 일어나라구요!!"
연한 보라색의 나이트 가운 차림으로 곁에 와 그를 흔드는 그녀의 몸에서 감칠 듯이 매혹적인
향수 내음이 그의 코를 유혹하고 있었다.
병달은 정신없이 봉미를 끌어안고 뒹굴었다.
그리고 그는 봉미를 침대 위에 쓰러뜨리고 거칠게 그녀의 옷을 벗겼다.
"병달씨! 옷 찢어져요!!??"
봉미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엷은 잠옷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그녀의 뽀얀 속살이 드러나자 그는 더욱 거칠어졌다.
그는 고무풍선처럼 뭉실 부풀어 오른 그녀의 젖통을 이빨을 들이대며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아아~악!!"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는 그를 더욱 자극시켰다.
그는 조급한 몸짓으로 자신의 허리끈을 풀고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둘둘 말아 아래로 끌어 내
렸다.
그리고는 냅다 그의 심벌을 그녀의 절구통속으로 찔러 넣었다.
그녀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채 준비되지 않은 그녀의 속살이 찢기면서 비수처럼 날카로운 아픔이 그녀의 전신을 긴장시켰
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쯤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심벌 어느 한쪽이 터지는 듯한 쓰라림을 그도 느끼고 있었다.
병달은 그녀가 이미 숫처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그 비명소리 또한 처녀막이 찢기면
서 터져 나온 소리가 아님을 모를 리 없었다.
그 자신마저도 당시의 상황이 자의였던지 타의였던지 명확하진 않지만 이미 그는 이날 이전에
그녀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왔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그 사건이 화근이 되어 오늘 이 자리까지 꼼짝없이 끌려오게 되지
않았던가...
"아아~악~~ 아파요~~ 좀 살살~~"
봉미는 연신 비명소리를 내 질렀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병달의 행동은 더욱 거칠어졌다.
마치 성난 짐승같이... 굶주린 야수같이... 찢어 먹을 듯이... 그녀의 몸을 갈기갈기 유린했다.
신혼 첫날을 그는 그렇게 자신의 신부를 철저히 짓밟고 있었다.
봉미는 그랬음에도 그가 자신의 몸 위에서 떨어져 벌렁 나뒹굴어지자 나이든 누나답게 마치 엄
마처럼 언제 준비해둔 건지 물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
첫날밤 신부답지 않게 말이다.
봉미의 손길이 그의 심벌을 닦을 때는 쓰라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잔여물을 닦아낸 물수건을 병달의 얼굴 앞으로 내 밀었다.
연적색 피빛이 묻어 있는 흔적을...

'가소로운 짓...!!'
그날은 그 흔적을 확인치는 못했지만 그들은 이미 이전에 몸을 섞어 서로간에 동정과 처녀의 순
결성을 맞바꾸지 않았던가...
우발적이었던, 어느 한쪽의 의도가 짙은 계획적인 사건이었던 간에 어쨌든 그들은 이미 그 사태
로 인하여 기구한 인연의 끈을 맞 꼬아놓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새삼 이 자리에서 자신의 순결성을 확인시키려는 그녀의 의도는 무얼까?
병달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의기양양해진 그녀는 한술 더 떠는 말을 내 뱉었다.
"나 오늘 맨스 아냐!!"
정말 구역질나는 말이었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도 상대방이 훤히 꿰뚫어 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 속보이는 아양을 떠는 걸
까?
"아~~ 피곤해!!!"
그는 돌아누워 버렸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말에 더는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 날 버리면 안돼...!!"

 

(5) 꿈속의 파티

앞서의 '우발적인 사고'의 전말은 이러했다.
그들이 결혼하기 4달쯤 전의 일이었다.
병달의 집에서 유성산업 새 임원들 초청파티가 있었던 불과 며칠 후였다.
그날은 김사장의 54번째 생일이어서 또 한번의 가든파티가 열렸다.
그날도 회사의 세 명의 아가씨들이 찾아와 파티 준비를 했는데 봉미도 끼여 있었다.
그런데 수진누나는 없었다.
봉미에게 물어보자 월차휴가를 냈다는 것이었다.
병달은 허전했지만 꿩 대신 닭이라 했던가 봉미와 노닥대며 하루해를 보냈다.
밤이 되자 손님들이 하나 둘 몰려들었고 그날도 그들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었으므로 병달의 방
으로 올라갔다.
뒤따라 올라온 봉미의 손에는 캔맥 2개가 들려 있었다.
목이 컬컬했던 병달은 건네준 캔을 한입에 후루룩 마셔 버렸다.
뭔가 부족했다.
이번에는 병달이가 1층으로 내려가서 캔맥 2개와 양주 한 병을 들고 올라 왔다.
그러나 컵과 안주를 안 들고 오자 봉미가 호들갑을 떨며 다시 내려가더니 컵과 과일, 나이프와
쟁반까지를 바구니에 담아 올라 왔다.
그녀는 다소곳이 앉아 능숙한 솜씨로 과일을 깎았다.
그리고는 쟁반 위에 가지런히 빚어 놓았다.
그녀가 과수원 댁 딸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던들 병달이 그렇게 감복하진 않았을 텐데...
'저 여자는 분명 나무꾼에게 옷을 뺏긴 선녀일 게야...'
병달은 그 큰 컵에다 양주를 따뤄 연거푸 몇 잔이나 마셨는지 모른다.
병달은 또 한잔을 그녀에게 보란 듯이 마셨다.
그리고 꼬여드는 혀로 말했다.
"보~봉미씨~인 선녀~~ 예요~~ 나무꾼한테~~ 옷을 모두~ 빼~앗~~긴 서~언~녀~~ 말이유~~~"
누군가가 말했던가.
연애는 철저하게 유치해야 한다고...
그녀는 과일 한 조각을 그의 입안에 쏙 들이밀며 말했다.
"그럼 나무꾼은 누구 게~~??"
"그야~ 두~ 말~ 허면~ 잔소리~~  나쬡~~ 나~~~!!!"
병달은 흐느적거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봉미는 귀여워 죽겠다는 몸짓으로 그의 볼에다 살짝 키스를 했다.
순간 그의 코끝을 간지럽히는 그녀의 체취에 눈이 핑 돌았다.
그러나 눈만 도는 게 아니었다.
천장이 돌고 바닥이 돌고 마주 앉은 그녀도 돌고 있었다.
그는 침대위로 푹 쓰러졌다.
총 맞은 꿩 새끼처럼 일어서려 몇 번 파닥대다가 발랑 꼬꾸라지고 말았다.

얼마나 지난 걸까?
타는 속을 거머쥐고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는데 촉감이 이상했다.
누군가 옆에 누워 있었다.
병달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찌 된 걸까?
혹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우려했던 데로 그녀는 봉미였다.
창문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희미한 달빛이 그녀의 얼굴 위에 머물러 있었다.
분명히 그 얼굴은 봉미의 얼굴이었다.
이 여자가 왜 같이 누워 있을까...?
그래 그녀와 여기서 같이 술을 마셨지...
그러나 그 이후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떤 일들이 벌어진 걸까...?
아무리 뒤져봐도 그의 머릿속에선 더 이상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
궁금했다.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봉미씨!! 일어나 봐요!?!? 도대체 어찌된 거예요???"
봉미의 몸을 흔들었다.
그때 그녀의 몸에 아무 것도 걸쳐져 있지 않는 걸 보고 더욱 놀랐다.
설마...??
그의 몸에도 아무런 것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
황당했다.
필시 내가...
.... 이런 빌어먹을...
"병달씨! 이제 정신이 들어요??"
봉미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아아~~!! 일어났어요!?!?"
병달이 당황하며 말했다.
"병달씨가 그렇게 놀라면 어떡해요?"
너가 그래놓고 놀란척하면 어떡하냐는 투였으나 말꼬리는 약간 아양 투였다.
"우~우선 물부터 좀 먹읍시다? 아~아니 내~내가 가져 와야지..."
병달은 그러면서 침대 아래로 내려 왔다.
침대 아래 방바닥에는 그들의 옷가지들이 어지러이 늘려 있었다.
깜짝 놀란 그는 앞을 가리며 후닥닥 다시 침대 위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호호호..! 그럴 줄 알고 미리 내가 갖다 뒀지요!!"
봉미는 침대 머리맡에서 물이 든 컵을 병달 앞으로 내 밀었다.
병달은 그걸 단숨에 들이켰다.
"좀 더 드릴까요?"
"됐어요! 이제..."
그 위엔 주전자 채로 놓여 있었다.
'철저한 여자구먼... 허긴 저 정도 되니까 까다로운 아빠의 비서를 할 수 있겠지...'
"그렇다고 너무 부담가지면 전 싫어요...!"
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면서 그녀가 하는 말이었다.
"이때껏처럼 그렇게 친구처럼 얘기도 하고... 가끔 우울할 땐 같이 술도 마시고... 그러면 좋잖
아요"
"....."
그는 아무런 할말이 없었다.
금방 그녀를 깨울 때의 마음처럼 그녀를 부여잡고 어찌된 일이냐고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속으로 뇌였다.
'그녀는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는 마력을 지닌 것 같애... 선녀야 선녀... 천상에서 온...'
순간 그 어떤 행복감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었다.
그런 감정은 정말 오랜만의 충만감이었다.
졸지에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엄마로 인해...
하루아침에 낙천인지 뭔지 하여 발길을 끊은 수진누나로 인해...
그는 늘 정에 굶주려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들의 정이 모성애적인 포근한 정이었다 하면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분명 그것과는 다
른 종류의 것이었다.
다음날 봉미는 날이 밝자마자 집을 빠져나갔고 그날 아침 식탁에서 그녀의 행방을 묻는 아빠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비서실의 봉미씨 말이죠? 파티가 시작되자 살짝 빠져나가던데요...!"
"그 애가 내게 인사도 않고 갔구먼...! 얘, 병달아! 그만 식사하자!"
전날의 파티가 만족스러웠던지 인자한 말투였다.

 

(6) 덫

그로부터 며칠 후 병달은 개학이 되어 바쁜 학사생활로 돌아갔다.
특히 그는 동아리장을 맡으면서 눈코뜰새 없어서 그의 아빠 회사도 거의 들르지 못했으므로 봉
미와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동아리 발표회 준비로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는데 1학년 한 녀석이 헐레벌떡 뛰어
왔다.
그 녀석은 마침 같은 동아리 후배여서 얼굴을 알고 있었다.
"병달형! 빨리 교문으로 나가 보세요!"
"왜 그래 임마?"
"어떤 이쁜 아가씨가 형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쁜 아가씨?? 누구라던데...??"
병달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건 모르고요... 우리 학교 학생은 아닌 것 같던데요. 정말 이~쁜 아가씨던데, 그렇게 이~쁜
아가씨는 우리 학교엔 없잖아요..."
유독 '이~쁜'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는 교문으로 허겁지겁 뛰어 가면서도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교문밖에 기다리고 선 그녀는 뜻밖에도 봉미였다.
"아니! 봉미씨!! 여기까지 왠 일이세요?"
"왜 전 여기 오면 안 돼나요?!?!"
그녀는 퉁명하게 쏘아붙였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 아빠가 심부름이라도..??"
그의 마음속에 뭔가 켕기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날 밤 자의든 타의든 그녀를 범한 게 사실일진데 그간 한번도 만나주지 않았으니...
물론 그녀가 만나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었지만...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을 보자 벌컥 겁이 났다.
그녀가 그의 아빠께 그 사실을 고하기라도 한다면
'이 돼먹지 못한 놈이 그래 감히 아비의 비서를 범해!?!?
이놈 당장 나가라!!
니 놈은 내 아들놈도 아냐!! 웬수 같은 놈...!!'
끊임없이 쏟아부울 아빠의 욕찌꺼리가 귀에 맴돌았다.
"그래요! 사장님이 보내서 왔어요!!"
"아빠가 왜???"
"하나 있는 아늘놈이란 게 코빼기도 안 비친다면서..."
"늘 아침마다 보는데..."
그 말에 봉미는 홱 토라져 따닥따닥 하이힐 소리를 요란스레 내며 걸었다.
병달은 그 뒤를 말없이 따라 걸었다.
"그럼 병달씨는 내 얼굴은 안 볼 거예요??"
"그간 학교 동아리 일로 좀 바빠서..."
그 말은 사실이었지만 변명인 것처럼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깟 동아리! 누구는 안 해본 줄 알아요...!!"
처음 접하는 앙칼진 목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제가 뭐 병달씨더러 책임지랬어요?? 그냥 친구처럼 부담 없이 지내자 했지...!!"
그냥 친구처럼...?
그녀의 말투는 '그냥 친구처럼'의 말투가 아니었다.
난 모진 덫에 걸린 거야...
병달은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이 난감한 순간을 벗어 날수 있을까?
도무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7) 밤하늘 세레나아데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산모롱이를 두 개나 지나 좁다란 자갈밭이 길게 늘어진 해변가에 와 있었다.
그곳은 병달이 마음이 우울할 적마다 오곤 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어디쯤에 큰돌이 있고, 또 어디쯤에 산에서 솟아 나온 물길이 흐르는지도 알고 있
었다.
어느 곳이 낚시꾼이 많이 앉는 자리이고, 또 어느 곳이 밤낚시를 즐기는 자리라는 것도 알고 있
었다.
그러나 그날은 밤낚시 하는 등불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병달은 더 나아갈 길 없는 모래톱 위에 멈추어 섰다.
발아래 파도가 깎아낸 벼랑 아래로 바닷물이 달빛에 일렁이고 있었다.
저 아래로 떨어져 버릴까?
그러면 저 여자가 날 용서해 준다고 할까...?
그러나 실상은 1미터도 채 안 되는 모래 벼랑이었다.
그녀가 그의 어깨 아래로 기대여 왔다.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그 분위기에 휩싸인 때문이었는지 그의 생각과는 상반되게 자신에게 기대
여 오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장부인 이상 봉미씰 하룻밤 풋사랑으로 여기진 않아요!! 나도 봉미씰 사랑한다구요!! 절
대로 버리지 않을 거예요!!"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그 말이 그의 귀로 되돌아 왔을 때 그 자신도 놀랐다.
누가 말했던가?
잡은 고기에게 미끼를 던지지 않는다...
그는 지금 잡아둔 고기에게 미끼를 주고 있는 걸까...?
고기도 고기 나름이지 우리 속에 든 호랑이가 되려 주인을 잡아먹으려 하기 때문일까...?
아무튼 병달은 자신의 속마음과는 상반되게 이번에는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포개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 뒹굴었다.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그대로 몇 바퀴를 돌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브라우스를 젖히고 탐스런 젖무덤을 움켜쥐자 그녀는 벌써 신음소리를 토해냈
다.
"아흑~~!!"
그 소리에 더욱 자극 받은 병달은 그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그녀의 젖무덤을 입에다 물었
다.
"쪽~ 쪽~~ 쪼옥~~~"
그녀의 신음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아~ 아아~~ 아흑~~ 아아아~~~!!"
하지만 정작 병달이가 그녀의 치마를 걷어올리자 봉미는 그를 떠밀어내며 일어서려는 것이었다.
"병달씨! 이제 그만 해요!! 제발...!!"
"봉미씨! 왜 그래요??"
잔뜩 흥분되어 있는 그로선 참기 힘든 저항이었다.
그는 우격다짐으로 그녀를 넘어뜨리고 다시 치마를 걷어 올렸다.
봉미는 병달의 가슴을 쿵쿵 때리며 말했다.
"병달씨! 정말 이럴 거예요? 이러면 다시는 병달씨 안 볼 거예요..."
또다시 앙칼진 목소리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치마 자락을 놓으며 애걸하듯 말했다.
"우린 서로 사랑하잖아요!?!?"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이미 그는 그녀의 기세에 짓눌려 있었다.

눈치 빠른 그녀가 그걸 모를 리 있겠는가?
역전된 기세를 그녀는 백분 발휘하여 그를 다독거리기 시작했다.
"아이 자기! 너무 토라지지마!!"
하면서 벌렁 누워 있는 그의 가슴을 마치 엄마처럼 쓰다듬었다.
"그러는 봉미씬 내 마음을 알아요?"
그의 말투는 잔뜩 퉁명스러워져 있었다.
"내가 왜 자기의 마음을 모를까!! 자긴 참을 때는 참을 줄도 알아야지!!"
이번에도 마치 엄마처럼 채근하는 투로 말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놓인 그녀의 손을 퉁겨 내며 말했다.
"뭐? 참는다고...?? 봉미씬 남자가 아니니까 몰라...!!"
이쯤 되자 그녀는 난처했다.
하지만 어쩌랴 한번 거부한 몸을 다시 내다 바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도망치자니 이때
까지의 명분이 안 서고...
그래 서로의 체면과 명분을 살리는 길이 무얼까...??
"그래요 병달씨! 자기의 소원을 들어 드릴 게요..!!"
병달은 갑자기 태도가 바뀐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단, 병달씨는 제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야 해요!!"
병달은 그녀의 '제가 하는 대로'란 말이 몹시 궁금했지만 엄마 앞의 어린 꼬마처럼 다소곳이 고
개를 끄떡였다.
"병달씨! 눈감아요!!"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다가와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녀의 손아래 감긴 눈 안으로 뭔가 모를 새로운 황홀과 미지의 환희가 보였다.
그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손이 거두어져 아래로 내려가면서 그의 가슴을 파고들고 또 하나의 보드라운 손길이 그
의 허리끈을 풀고 있었다.
그는 살며시 눈을 떴다.
"눈뜨면 그만 둘 거야...!!"
눕혀둔 아기를 다루듯이 위에서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깜짝 놀라 눈을 꽉 다물었다.
그의 허리끈이 풀리고 쟈크가 내려가고 팬티 속으로 싸늘한 바닷바람이 스며들자 그의 목젖 너
머로 꿀꺽하고 마른침이 넘어 갔다.
한편 그의 가슴으로 파고 든 그녀의 손길은 가슴팍에 깔린 털들을 쓰다듬다가 뽕나무밭의 미숙
아 오디처럼 콩알만한 그의 젖꼭지를 어루고 있었다.
그 손길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찔끔찔끔 오줌을 쌀 정도로 짜릿했다.
그 짜릿함 속에 배 밑 더 아래쪽으로 허한 바람이 한번 지나가고 그의 심벌을 감싸쥐는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순간 그도 모르게 "아아!"하고 외마디 신음을 토해냈다.
그 소리가 도화선이 된 걸까? 그의 심벌을 감싸 쥔 손길이 점점 뜨거워 졌다.
그의 꽉 다문 입 밖으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으~~ 아아학~~~!!"
그는 속으로만 번쩍이는 별빛을 걷어내며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다.
다행히 조금전의 그 빤히 내려다보며 감시하던 그녀의 얼굴은 없었다.
대신 빼곡이 머리를 내밀고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을 깜박이면서 '얼레리~ 꼴레리~' 놀리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부러움에 못 겨워 질투의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듯도 했다.
그런 감정 속에 아래춤의 뜨거운 불길이 서서히 용트림 쳐 오름을 느끼고 아래를 내려다 봤다.
그는 깜짝 놀랐다.
그의 열려진 바지춤에는 그녀의 얼굴이 쳐 박고 있었고 그녀는 입에다 그의 심벌을 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자신이 늘쌍 해 왔던 자위 때처럼 그녀가 손으로 그의 심벌을 주무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그래서 그토록 뜨겁게 느껴졌을까?
하지만 멈춘다거나 말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더 독촉하고 있었다.
"아아~~ 더 깊이~~ 더 깊이~~"
병달은 이제 한쪽 팔을 받치고 반쯤 일어나 앉으면서 다른 한쪽 팔로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자신의 불기둥을 향해 처벅처벅 떡치는 소리를 내게 했다.
처벅~~ 처벅~~
오뉴월 장마 속에 논길 밟는 소리..
처벅~ 처벅~~~
또 한번 모진 장마비가 내리고...
낙뢰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으으으으~~ 하악~~!!"
더 이상 참지 못한 그의 불 뿌리가 땅을 뚫고 솟구치고 있었다.
만춘 양지바른 무덤 옆에 한 송이 할미꽃을 피운 햇볕만큼이나 따스하면서도...
이 밤하늘 영롱한 이슬을 모두 머금은 듯이 습습하고...
초롱초롱 저 하늘 가득히 수놓은 별만큼이나 왁자지껄 찬란하고...
발아래 술렁대는 해수만큼이나 스산한 그곳...
그곳에다가.. 따스하면서도 습습하고, 왁자지껄 찬란하면서도 스산한 그곳에다가 그는 불 뿌리
를 풀어놓고 연거푸 몇 번이나 용암을 분출했다.

 

(8) 폭탄 선언

그날로부터 병달의 생활 리듬은 엉망으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불쑥 학교로 찾아와 그를 끌고 나가는가 하면, 휴일 날은 아침부터 집으로 찾아와 종일 같이 지
내려 했다.
그녀가 나타나는 날이면 그의 개인 스케쥴은 철저히 무시된 채 뒤엉키기 일쑤였다.
그런 생활이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그날도 그의 마지막 수업에 맞춰 찾아온 봉미의 치밀함에 꼼짝없이 끌려나와 그들은 음침한 지
하 찻집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청천벽력 같은 사실과 그녀의 무서운 결심을 들어야 했다.
찻잔이 배달되고 티스푼으로 찻잔 속을 빙빙 돌려대던 그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 병달씨에게 이런 얘기를 하긴 싫지만... 그래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씀 드리는 건
데..."
그녀는 말꼬리를 감추며 말을 빙빙 돌렸다.
답답해진 병달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자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사실은 저 임신했어요!!"
그는 그의 귀를 의심했다.
"뭐? 뭐라고...?"
"저! 병달씨의 아기를 가졌단 말예요!!"
그녀는 또박또박 되뇌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게 무슨 마른날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래서 이 나이에 어쩌자는 거예요??"
그는 두 손과 함께 탁자 위에 머리를 쥐어박았다.
"자기더러 어쩌라고 이러는 건 아네요?"
"그럼 뭐냐구...??"
"저는 자기의 아기를 낳아 기르고 싶단 말예요!!"
"그건 안돼!! 절대로 안돼!!"
"자기더러 책임이라도 지랬어요? 누가 뭐라든 나 혼자 키운다고요!!"
'워메 쥑일 년!!'
그런 상소리라도 내뱉고 싶었다.
허나 기분대로 마구 내뱉을 사건이 아니지 않은가?
좋던 싫던 자신의 아기를 가졌다는 데에
...그놈의 자식 후레 놈의 자식이니 당장 떼어 버려...!!
...니년이 뭔 덕 볼려고 일부러 가진 애니께 당장 떼어 내...!!
...난 일찍이 자네 몸에 애기씨를 넣지 않았네...!!
...그리고 자넬 사랑도 않았네...!!'
등의 막말은 할 수만도 없잖은가?
그래 달래야지 살살 달래는 거야...
"저~ 봉미씨! 우리 차분하게 생각해 봅시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구요!!"
그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후루룩 마시고 다시 내려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내리깔고 찻잔을 만지작대며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봉미씨! 우린 나이 겨우 스물예요. 그리고 나는 아직 학생이구요. 이 나이에 애 엄마 아빠가
되어 어쩌겠다는 거예요?"
"자기는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는 거잖아요? 관심이 없으니 내 나이가 얼만 지도 모르고...!"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녀의 나이가 얼마인지 알지도 알려고도 노력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니까.
그보다 더 확실한 사실은 그가 그녀에게 마냥 끌려 다니면서도 그녀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본 일
이 한번도 없었다면 그녀에 대한 너무 심한 모욕이 될까?
그녀가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내 입장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어요? 여자에게 애 한번 떼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기나
해요? 애 셋 낳는 것보다 더 상한다고요!"
"그렇다고 현실을 어찌 무시한단 말예요? 결혼도 안한 우리가 애가 생기는 것부터 이상하고, 또
당장 애가 생기면 누군가가 애를 보아야 하고 한 사람은 벌이를 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가 그게
가능한가요? 어느 영화에선가처럼 내가 애 업고 학교 가는 꼴을 보고 싶어 그러세요?"
"언제 자기더러 애 보랬어요? 자기는 자기 일 하구, 아기는 나 혼자 키운다니까요...!!"
아무리 얼러고 달래봐도 그녀의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독한 년! 니 맘대로 해!!
그는 좀처럼 피지 않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또 한번 숨을 가다듬으며 그녀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봉미씨! 도마뱀이 왜 자기 꼬리를 손수 자르고 도망가는지 알아요? 더 큰 몸집을 살리기 위해
서잖아요!! 봉미씨는 그 더 큰 몸집이 어느 것인지 진정 모르는 거예요?"
"그럼 자기는 지금 자기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왜 그렇게 빨리 사라지는지 알아요? 모르죠? 정
말 모를 거예요? 그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라구요!! 남자들처럼 한번 즐기고 내 뱉으면
다시는 보려 하지 않으니까요..."
뼈있는 말이었다.
더 다퉈봤자 승산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병달의 제의에 따라 서로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고 내일 다시 만나 결론을 내리기로
하고 일단 헤어지기로 했다.

 

(9) 진상

다음날 병달은 수업이 없는 아침나절을 이용하여 아빠의 회사 앞 다방에서 수진 누나를 몰래 만
났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접해야만 했다.
병달이 수진을 찾아 간 것은 그간 안부도 궁금했거니와 봉미에 대한 정보를 얻어들으려 간 것이
었는데...
"병달씨가 웬 일이야? 늙은 날 다 찾구...!!"
누나마저 토라진 걸까?
"누낫!! 병달씨- 병달씨- 그 씨-자 좀 빼면 안돼??"
"그래! 니가 웬 일이니..?"
"누나 얼굴도 보구 싶고... 오늘 시간도 좀 남고... 겸사겸사 해서..."
서로 안부가 오가자 수진은 차부터 시켰다.
"저! 아가씨 여기 커피 한잔에 홍차 하나요!!"
커피는 병달의 것이요 홍차는 수진의 몫이다.
"누나는 아직 홍차네!?"
"응 그래. 그런데 너 혹시 다른 거 시킬까??"
"아 아니 됐어. 누나!"
그만큼 그들은 서로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너무 오래토록 만나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그런데 수진이 뚱딴지같은 말을 해 왔다.
"너희들 잘 돼 가는 모양이더라?"
"누나! 너희들이라니...?"
"왜 그래 새삼...?"
병달은 뭔가 감이 잡혔다. 그러나 시침을 떼고 되물었다.
"누나 얘기 해봐? 뜬소문이라면 내가 해명 할께..!!"
"봉미와 너 연애중이라며?"
"으 그거? 집에서 몇 번 만났어! 그건 누나도 알잖아?"
"그리고 애까지 생겼다며...??"
"뭐?? 그런 소문까지..."
병달은 사람잡는다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수진은 너 그래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야! 하는 표정으로 또 한마디 새로운 사실을 내
뱉었다.
"그래! 같은 학교 선배와 사귀어보니 어떠니? 그래서 잘 통하니?"
"누나! 선배라니?"
그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모르니? 봉미가 니네 학교 3년 선배라는 사실을..?"
금시초문이었다.
봉미가 동문이라니?
특히 선배라니?
그렇다면 연상이었단 말인데...
그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수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네가 1학년 때, 봉미는 4학년이었는데 왜 그걸 몰랐을까? 더구나 봉민 'K대 미스 퀸
'이라 해서 온 대학이 떠들썩할 정도였다던데..."
그랬구나.
그녀를 처음 볼 때 어디서 많이 본 듯 싶다 했더니...
'미스 퀸' 바로 그녀였구나...
이거 기뻐해야 할 일인가? 슬퍼해야 할 일인가?
수진의 말에 그가 어찌 할 바를 몰라하자 그녀는 고소해 하는 듯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애는 놓을 거니..? 누가 키울 거니..? 그리고 언제 결혼 할 거니..?"
그 물음에 병달은
"그건 모두 뜬소문이야!!" 라고 외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왔다.
봉미에 대한 당황스런 사실과 이미 퍼져 버린 소문보다 더욱 그를 비참하게 만든 것은 영원히
자기편이라 여기고 있었던 수진 누나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10) 빌미

그날 밤 약속했던 그 지하 다방에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봉미가 밤늦게 학교까지 찾아갔지만 남아 있던 한 학생에게 그날 등교하지 않았다는 말만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음날도 그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
집에다 전화를 걸어봐도 며칠째 못 보았다는 식모 아줌마의 말만 들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줌마로부터 '그가 집에 와 자고 있노라'고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못들은 채하고 찾아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의 군기를 잡고 있는 걸까? 이번 참에 그의 기를 완전히 꺾어 두자는 걸까?
그런데 일은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1주일 여 지방출장을 다녀온 그의 아빠가 어찌 알았는지 회사에서 떠도는 소문을 빌미 삼아 그
를 몰아 세우고 있었다.
"니 놈의 자식은 되관절 어느 놈의 피를 이어 받았길래 못된 짓만 골라가며 하는 거야?? 그녀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니 놈이... 산너머 평전리 과수원 댁 딸인 줄이나 알고 그 짓을 한 거냐? 빌
어먹을 놈의 자슥아..."
병달이 그의 호된 질책에도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꿈쩍 않고 있자 더욱 화가 치민 건지 병달의
뒤통수를 한데 올려붙이고는 버럭버럭 악을 썼다.
"그래 어쩔 거야?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남의 집 귀한 딸 망쳐 놓고 어쩔 건데?
그래 니 놈의 말이나 한번 들어보자...??"
그러면서 그의 머리를 쿡쿡 쥐어박았다.
"잘못 했어요! 제가 잘못 했어요!!"
늘 그랬듯이 그는 그 말밖에 더 할말이 없었다.
"잘못 했다면 다냐? 새끼까지 갖게 해 놓고 잘못 했다하면 다 끝난 거야? 끝이 나..!! 지성인이
라 자처하며 대학까지 다니는 놈이 그래 잘못했다 한마디로 죄다 끝낼 수 있는 일이야...??"
병달은 이제 바닥에 넙죽 엎드린 채 아빠가 쥐어박으면 박는 대로 떠밀면 밀리는 대로 부복하고
있을 도리밖에 없었다.
그건 그의 아빠의 분이 풀려야 끝나는... 결국 두어 시간쯤의 시간이 흘러야 해결될 일이라는
사실을 오랜 경험으로 체득해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날은 출장의 여독 탓인지 아니면 이제 늙은 건지 쉬이 그를 해방 시켜줬다.
"두 말 더 하기 싫으니까 내일 당장 그녀의 아비를 모시고 와!!"
단호한 그 한마디로 병달은 풀려났다.

병달은 다음날 좋으나 싫으나 무조건 그녀를 만나야 했다.
병달에게 있어서 그의 아빠 말은 염라대왕 말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으니까...
봉미도 미리 지시를 받은 듯 그들은 둘 다 아무 말 없이 회사에서 내어준 차를 타고 그녀의 집
으로 향했다.
봉미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아빠는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왜 이리 빨리 온 기야?"
"아빠 인사부터 해요! 우리 회사 사장님 아드님이셔!"
그는 촌로답게 병달 앞에 머리를 90도나 숙였다.
민망해진 그도 더불어 머리를 깊숙이 조아리고 일어서자 그 촌로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귀하신 자제분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다 찾아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시다! 그래 어쩐 일이
신가요? 혹여 우리 봉미가 잘못 한 일이라도..."
조금은 겁먹은 듯한 말투였다.
"아아 아닙니다! 그런 일이 아니고..."
그때 봉미가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아빠! 우리 사장님께서 그냥 좀 모시고 오랬어요!!"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재차 물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응! 그래 작년 가을에 우리 집에서 갖다준 과일 잘 먹었다고..."
봉미가 그냥 대충 둘러댄 말을 눈치채고 그녀를 끌고 구석으로 가서까지 다그쳤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조금은 안심한 듯 했으나 그래도 내내 석연치만은 않은 눈치였다.
승용차의 뒷자석에 촌로를 가운데로 하여 나란히 앉은 그들은 병달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말이 없었다.
단지 그의 손을 부여잡은 촌로가 그를 보며 한마디 내뱉은 말뿐이었다.
"귀하신 자제분이라 그런지 어찌 이리도 잘 생겼을까!! ...하기사 내 딸도 인물이라면 안 빠지
지만서도..."

집에 도착하자 그의 아빠는 벌써 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고 어르신 이런 데까지 다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딸년을 맡겨두고 한번 찾아 뵙지도 못하여 송구하구먼요!"
"지난해 보내주신 과일들은 정말 잘 먹었습니다!"
"뭘 그런 걸 갖고 다 그러십니껴?  별루 많이 못 보내드려 송구스럽구먼요!"
아줌마가 찻잔을 날라 왔다.
찻잔에 담긴 수정과를 한 모금씩 마시자 김사장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실은 다름이 아니오라 어르신을 예까지 오시라 한 건 얘네들 혼사 문제를 의논드리고 싶어서랍
니다"
병달은 병달대로 봉미와 촌로는 또 그들대로 그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랐다.
봉미와 촌로는 잔뜩 놀란 표정이었지만 은근히 반기는 듯 했고, 반대로 병달의 얼굴은 몹시 일
그러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촌로는 도저히 못 미더워 다시 한번 확인을 요하는 말을 해 주길 바라는 표정이었다.
"이 두 자식들을 두고 어르신과 제가 사돈을 맺으면 어떠실까 여쭙는 것입니다"
"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마는 아직 어리고 별로 살림을 가르치지도 못해놔서서리..."
"허허!! 그야 내 아들놈이 더 하답니다. 아직 학생이고 혼자 자라서 버릇도 좀 없지요. 허허
허!!"
김사장은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촌로도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따라 웃었다.
허나 병달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흘러가는 그들의 대화에 제동을 걸 묘안을 못 찾아
안달이 났으나 그럴수록 더욱 무력감만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빠가 계속 뱉어대는 자신에 대한 흠담에 곤혹스러워 그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
한편 봉미는 그런 병달의 태도를 곁눈질로 살피며 마음속 깊이서부터 터져 나오는 미소를 애써
감추려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자식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는 하지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 봉미는 어릴 적부터 부모 속
한번 안 태우고 자랐죠. 집안 일도 잘 거들고 공부도 잘 했고 대학 다닐 땐 '미스퀸'인가 뭔가
가 되기도 했죠..!!"
"아이구 그걸 제가 왜 몰랐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학교 졸업하자마자 끌고 와 제 옆자리에 두고
봐 왔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이날을 위해서 말입니다. 하하하!!!"
한 사람은 자기 딸 자랑에 침을 튀기고, 또 한 사람은 그 말에 맞장구를 치고 죽이 척척 맞았
다.
"참! 좀 전에 이 아드님이 아직 학생이라 했지요? 그럼 대학원에 다니는 게비유?"
김사장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이제 대학 2학년이라오!"
"옳아! 그럼 그간 군에 다녀 온 게로구먼!!"
난처한 표정을 짓던 김사장은 사실대로 말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실은 얘가 나이가 어립니다. 올해 스물 인 걸요!"
별일이 다 있네... 우리 애보다 세 살이나 어리잖아...
허나 촌로는 그런 감정을 애써 감추었다.
"요즘 애들은 나이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군요! 그리고 연상의 여자와 사는 애들이 더 잘 산데
요. 서로 잘 싸우지도 않고..."
촌로는 김사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옛날 우리 때는 다 그랬잖아유!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게비유..."
"어르신께서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제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실은 얘 엄마가 오래 전에 사고
가 나서 병원 신세랍니다. 그러니 나는 물론 얘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해 줬죠!! 불편한 게 한
두 가지라야 말이죠..."
"그 얘긴 우리 딸년을 통해 전해 들었구먼요! 사장님의 고초가 오죽 했겠습니까??"
어느 정도 의견 합치를 본 김사장은 촌로를 일으켜 세웠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 약주라도 한잔 나누죠?"
김사장과 촌로는 어느새 백년지기가 된 듯 서로 손을 맞잡으며 방안으로 들어갔고 중간중간 호
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기 방으로 올라온 병달은 울분에 뭔가 일을 저질러야 속이 터일 것 같았다.
뒤 따라 올라온 봉미는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가슴을 졸이며 저만치 침대 귀퉁이에 걸터앉아
있었다.
"당신이 바란 게 이런 거였어요? 이런 걸 바라고 내게 접근하여 여태 연극해 왔어요? 이제 뜻한
걸 얻었으니 속이 후련하겠군요? 연극이 모두 끝났으니 이제 탈을 벗어 보지요!!"
병달은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병달씨! 아니에요? 그건 오해예요? 전 병달씨 사랑한 죄밖에 없어요? 제발 믿어 주세요!!"
봉미는 울음을 터뜨렸다.
"흥! 믿어..? 뭐? 사랑한다고...? 웃기고 자빠졌네!! 이미 연극은 끝났어!! 아직도 더할 대사가
남은 거야? 혼자 많이 연습하라구! 흥!!"
병달은 윗도리를 집어들고 찬바람을 쌩쌩 일으키며 방을 박차고 나가면서 외쳤다.
"썅! 더 할 대사가 남았거든 2부에서나 하라구! 1부는 끝났어! 쌍년아...!!"

-- 1부 끝 --

    -. Ddamddee의 허락 없이 타 BBS에 배포. 복사를 금합니다.

 

 


 


-작가님에게 정성어린 격려의 메일을 보냅시다-
-야설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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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의 문 게시판 886 번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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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ddamddee 글쓴 때 2000-01-14 오후 08: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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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리바이벌] Ddamddee秘談 제3화 원죄(原罪) -2부-
[애정/리바이벌] Ddamddee秘談 제3화 원죄(原罪) -2부-


이 글은 지난 8월 이곳에 공개했던 글입니다.
아직도 이 글을 못 읽으신 분들을 위해 다시 올립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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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原罪)  - 2부 : Intercourse (진입) -
                                                  Written by Ddam-dd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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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봉미의 친정 나들이

"이놈이 누굴 닮은 거야? 지 애미도 아니고... 지 아비도 아니고... 가만있자! 지 할비를 닮았
나...? 그래 요놈이 지 아비보다 할비를 더 닮았네.. 씨는 한 대씩 뛰어 넘는다더니 얘가 그런
모양이네..."
모처럼 찾아간 봉미의 친정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봉미의 엄마가 외손자 녀석을 어르며 하는 소리였다.
"얘 경수야! 크면서는 네 아비를 닮아라!! 그래야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큰일도 하지!!"
옆에 있던 영감이 핀잔을 늘어놓았다.
"이 할망구가 어린애를 두고 못하는 말이 없구료!! 삼신애기 어려도 다 듣고 있는 줄 모르오?!"
"니 외할비가 별 소릴 다 하는구나! 그지? 경수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바깥사돈이 어째서? 키가 좀 작다지만 야무지고 그렇게 큰 회사도 잘만
이끌고 있잖수! 그리고 인물도 그만하면 됐지!  뭐? 인물 팔아 탈렌뚜(탈렌트) 될 일 있수? 그
렇잖으냐 요놈아??"
"흥! 그것도 인물이래? 니 외할비는 술만 사주면 그저 좋데..!! 그지 경수야? 까르르 까꿍..."
"이 할망구가 보자보자 하니 못하는 말이 없네 그려...!!"
보다못한 봉미가 나섰다.
"왜들 그러세요? 안 그래도 얘 땜에 김서방이 걸핏하면 신경질인데..."
그 말에 할망구가 봉미 옆으로 바짝 다가앉으면서 캐물었다.
"왜 김서방이 아무 것도 모르는 애를 두고 신경질이랴??"
"아직 그인 학생이잖아요!!"
"그건 그랴! 그런데 넌 고것도 조종 못하고 뭐 했냐?"
하면서 할망구가 봉미를 핀잔하자 듣고 있던 영감이 뛰어 들었다.
"또 별소릴 다 지껄이네 그려! 그럼! 젊은것들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놓아야지, 지들 인생 산다
고 귀한 생명 없애면 천벌 받는 겨...!!"
"그 말은 니 아비 말이 맞다! 젊은 사람 애 지우는 건 벌받을 일이야..."
"그나저나 또 비가 오려나? 늦가을 비는 하나도 이로운 게 없는디.. 찌찌찌!!!"
이미 과일 수확은 끝난 터라 걱정이 없으련만 촌로는 쑤시는 허리를 매만지며 밖으로 나갔다.

영감이 나가자 그들은 아기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워 모처럼 모녀간의 정담을 나누었다.
"김서방이 네게 잘 해주니?"
"그럼!!"
봉미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속은 안 썩이니?"
"그러엄!!"
이번에도 거침없이 대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떨떠름했다.
"김서방은 바람 같은 건 안 필 것은 같다만 제 아비를 닮았다면 그건 아직 모를 일이지...??"
"엄만 우리 사장님이 뭐 그리 못마땅하니?"
봉미는 좀은 역정스런 말투로 쏘아붙였다.
"못마땅한 게 아니라 나이가 그쯤 들었으면 얼굴에 죄다 나타나는 거여..!!"
"도대체 어떻게 씌어 있는데...???"
"네 시아버지이지만.. 니 서방은 아니니까 하는 말인데 그의 얼굴을 보면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것이 탐욕에 차 있고, 바람께나 피게 생겼잖아...!!"
아무리 친정 엄마이지만 자식의 시아버지를 그렇게 원색적으로 욕하다니...
"엄마 정말 왜 그래...??"
봉미는 울고 싶었다.
그런데 때마침 경수가 앵앵대며 대신 울어주고 있었다.
"앵에~ 앵에~~"
"외할미가 할배 욕하니 너도 신경질 나지 그래? 이 엄마도 그렇단다!!"
봉미는 경수의 배냇저고리를 걷어올리고 기저귀를 만져 보았다.
"얘가 또 쌌네 그래! 자주 싸더라도 빨리만 커 다오 내 아가야 뾰!!"
딸이 제 자식의 기저귀 갈아 끼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할망구가 한마디 던졌다.
"고놈도 XX김씨 자손이 맞는가 보네 그려!!"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유?"
"응 그건 말야 XX김씨는 불알 밑에 크다란 점이 있다 했거든."
"그럼 엄마는 내가 씨도둑이라도 해 온 줄 알았수?"
봉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경수가 또 앵하고 울어제꼈다.
"저놈의 할망구 노망난 게 분명혀!! 이제 딸년하고도 싸움질이니..."
벌써 마실을 한바퀴 돌고 돌아오던 영감이 한마디 내뱉은 말이었다.

 

(12) 멸문 폐가

그날 저녁 차를 끌고 그들을 데리러 온 병달은 저녁 식사가 끝나자 건넛방에서 장인과 소담을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올해에도 많은 과일을 보내 주셔서 두루 나누어 맛있게 먹었다고 감사의 말을 전하
랬어요!"
"사돈은 뭐 그런걸 가지시고 매번 인사를 한담! 그나저나 자네 졸업이 내년이던가?"
"아뇨! 아직 내후년 봄까지 다녀야 합니다"
"우리 애도 애지만 자네가 고상이 많네 그려!!"
"고생은 무슨...
...참! 장인어른 한가지 물어봐도 되죠?"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러자 영감은 늙은 촌로에 불과한 자신에게 뭔가 도움을 청하는 사위가 너무 고마워 그의 손을
넙죽 잡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뭔디 그랴..??"
"혹시 이 마을 사셨다는 '조민수'라는 분 아세요?"
"알지! 알다마다..."
영감은 방문을 활짝 열어 제키고 캄캄한 밤이라 아무 것도 안 보이는 허공 한 켠을 가리키면서
"저어 쪽! 저쪽에 있었지!! 전대부터 만석지기 어마어마한 부자였었지!! 그런데 당대에 와서,
그러니까 민수가 장안에서 사업을 시작하고서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지!! 물려받은 재산 모
두 날리고 결국 자살했다지 아마... 벌써 스무 해는 지난 것 같네 그려... 들리는 소문으로는
친구 꾀임에 빠져 회사도 그 친구에게 다 넘어 갔다던가? 뭐 그런 소문들이 떠돌더군 그래...
그런데 자네는 그 사람 이름을 어찌 알았지?"
"아 아니 그냥 길거리 같은데서 얻어들었어요..."
"그 사람 정말 불운한 사람이었어...
있는 집에 태어났으면서도 생전 있는 티 안내고...
겸손하고... 법 없이도 살 친구였는데...
인물은 또 얼마나 잘 생겼다고...
그 친구 어릴 적에는 달덩이라고 할 정도였지...
그 친구 사업 아니었어도 높은 자리 한 자리쯤은 능히 할 인물이었는디...
정말 아까운 젊은이였어... 찌찌찌!!!"
"후손들은 남아 있어요?"
"후손은 무슨...
그 친구가 사대 독자였는 디 그가 자살했으니 씨가 마른 거지...
한순간에 멸문지화의 길을 걸은 겨...
그네 친족들이 그의 시체마저 화장을 시켰으니 흔적도 없어진 겨...
... 찌찌찌!!!"
"그럼 그의 집은 어찌 되었어요?"
"허허 집..?
10년을 흉가로 버티다가 태풍 때 쓰러져 지금은 잡초만 무성할 걸...
그 터는 몇 백년 발걸음으로 다져진 땅이라 곡식도 안 된다고 혀!!"
슬픈 사연이었다.

병달은 그날 밤을 그곳에서 보내기로 하고 날이 밝자마자 그 폐가를 찾았다.
족히 500평은 넘음직한 집터를 빙 둘러싼 와담은 한때 우아함을 한껏 뽐냈음직 한데 세월무상이
랄까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고, 그 무너진 틈 안으로 들어선 폐가의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더 흉
물스런 모습으로 그를 맞았다.
듬성듬성 들어선 잡목과 어지러이 깔린 담쟁이덩굴을 젖히며 좀더 안으로 들어서자 지붕이 내려
앉으면서 깨진 기왓장들이 구석구석 박혀 있었는데 노란 이끼들이 덮여 있는 모습으로 보아 수
백년을 버텨온 세도가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모진 세월로 인해 다 썩어 내린 기둥 밑에 자리한 주춧돌은 한때의 영화를 상징하는 듯
이 서너 아름은 넘어 보였다.
병달은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주대 위에 올라 앞을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 광활히 펼쳐진 대평원이 한눈에 들어 왔다.
풍수지리에 전혀 문외한인 그로서도 그곳이 얼마나 명당자리인지 알 수 있었다.
만석지기라 했던가?
만석? 저 대평원의 반 이상을 지배했단 말인데...!
이곳에 앉아 저 대평원을 지배했을 것을 생각하니 마치 대형 스팩타클 화면 속으로 들어간 기분
같았다.
그런데 그 화려하고 웅대했던 영화는 다 어디 갔단 말인가?
썩어 가는 서까래와 깨어진 기와조각... 그리고 무성한 잡초만이 주인 없이 자라고 있어서 그
무상함을 더 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누려왔던 영화가 한 어리석은 자손의 실수와 탐욕스런 한 사기꾼의 농간에
의해 어찌 이처럼 무참히 무너질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영화는 진정 모래성이었단 말인가...?
병달의 감정은 연민을 넘어서 울화로 발전해 갔다.
그는 어젯밤 이미 그의 장인으로부터 이 가문의 멸문비화를 듣는 순간 자신이 그 가해자와 무관
하지 않다는 직감을 가졌으며, 또 그 한을 풀어줄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무거운 사명감을
느꼈었다.
그래서 날이 밝기가 무섭게 찾아 나선 것이었고, 담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줄곧 속죄의 마음으로
그 폐허의 현장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는 발길을 돌렸다.
그가 처음 들어온 곳은 무너진 옆담이었기 때문에 나갈 때는 대문을 거쳐 나가고 싶었다.
담쟁이와 칡덩굴로 옭아 싼 형태로 보아 저곳이 대문이구나 생각하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커다란 연못 같은 것이 그의 앞을 막았다.
빙 둘러 돌들이 심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인위적으로 분재된 나무들이 더 이상 손길을 잃어
제멋대로 뻗어 있었다.
안쪽은 주위 객토가 흘러들어 높낮이를 분간하기 힘들었고 이미 물이 마른 지 오래 되어 잡초만
이 범람해 있었다.
분명 그 안쪽에 노닐었을 비단잉어며 장수의 상징으로 키웠음직한 자라나 거북 같은 것들은 끝
내 찾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다 흙과 함께 묻혔을까... 모진 장마 비에 쓸려 어디론가 뿔뿔
이 흩어져 갔을까...?
대문에 다다르자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잡초 덩굴 속에 감추어진 그 높이와 위용에 놀랐다.
필시 이곳에 키 큰 거인들만 살지 만은 않았을 진데 열 척이나 됨직한 높이에 승용차 두 대가
동시에 들어 올 수 있을 정도의 너비였다.
그러나 대문의 지붕은 허물어져 기와는 간데온데없고 짧은 서까레가 모두 드러나 썩고 있었다
대문의 한 켠은 온전히 서 있기는 했으나 옻칠이 다 벗겨져 흉물스런 모습에다 나무 속을 파 들
어간 날 개미들이 기어다니고 있었고, 나머지 한 켠은 앞으로 넘어져 썩어 내린 나무판 사이로
풀 포기가 올라와 있었다.
그 쓰러진 대문을 밟고 나서며 뒤를 돌아보는데 온전히 선 반대쪽 대문에 붙여진 글귀를 발견했
다.
양철 판에다 흰 페인트를 칠하고 그 위에다 쓴 붉은 글씨였는데 붙인 지 제법 세월이 흐른 듯
페인트도 벗겨지고 양철판도 구석구석 녹슬어 있었다.
내용인즉 '이 곳은 소송중인 곳이므로 훼손 또는 무단 점유하거나 일체 거래행위를 금한다'는
경고문이었다.
누군가가 이 땅을 또 한번 죽이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13) 방황

집으로 돌아온 병달의 마음은 착잡했다.
권력찬탈을 위해 선대조의 더러운 야합과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전해들은 사도세자의 마음
이 이랬을까?
무모한 효와 숙명으로 다가드는 정의 사이에서 그는 며칠 밤을 갈등했다.
효를 택한다면 지금껏 그가 살아온 것처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더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 년까지 누리자꾸나

그렇게 살면 될 것이고,
정의를 택한다면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성을 간다는 각오까지 해야하지 않는가...

그날이후 병달은 거의 말을 잊었다.
식탁에서 어쩌다 김사장과 합석하여 뭔가 물으면 머리를 내젓던가 끄덕이는 정도의 고개짓만 할
뿐 말문을 영 닫아 버렸다.
병달이 그러는 게 전혀 생소하지 않은 김사장은 또 놈의 불만이 잔뜩 쌓였나보다 생각하고 그대
로 버려 두었다.
제일 불편한 건 단연 봉미였다.
잘 때도.. 식사 때도.. 그가 집을 나갈 때도.. 다시 돌아 올 때도 그는 단 한마디 말도 없었다.
정말 숨이 턱턱 막혔다.
봉미는 어린 아들까지 앞세워 가며 아무리 아양을 떨어봐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녀가 짐작이 안 되는 바는 아니었다.
억지로운 사랑작전과 폭탄처럼 터뜨린 임신선언...
번갯불에 콩 볶듯 해치운 결혼...
그리고 얼마 후 이어진 원하지 않았던 출산...
불과 1년만에 벌어진 일이라곤 상상이 안될 일이었으니...
그나마 그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 잠시 시름이 걷히나 했는데 또다시 엉키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녀 자신이 택한 길이요, 스스로 판 무덤인데 어디 가서 하소연하랴?
저녁거리로 사온 콩나물을 갈리며 흐르는 눈물을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아이 아씨! 또 왜 그러세요?"
측은하게 쳐다보는 식모 아줌마의 눈빛에 그녀는 앞치마에다 눈물을 훔쳤다.
"요즘 우리 도련님께서 많이 속상하게 하나 보죠? 그냥 참고 지나세요! 누구나 신혼 때는 다 그
렇게 흐렸다 개였다 변덕이 심하죠... 지나다보면 미운 정도 들고 고운 정도 들고... ...그러다
남자는 나이와 더불어 철도 드는 거라오!!"
그러나 그녀의 눈물은 멈추어 지질 않았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그녀는 자기 방으로 올라와 어린 아들을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한바탕 울고 나자 속이 좀 뚫리는 듯 했다.
그러나 다시 미어져오는 설움이 이제 창자를 꼬아대는 아픔으로 변해 버렸다.
"아줌마! 나 죽어요...!!"
그녀는 1층 계단을 향해 고통스런 구조를 요청했다.
"아씨! 왜 그러세요??"
후닥닥 뛰어 올라온 아줌마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자 부둥켜안으면서 혹시 약이라도 먹었
나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 갑자기 배가...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아요... 아아아~~!!!"
"차를 부를 게요... 아니 119!? 119를 부르는 게 났겠다!!"
아줌마는 허겁지겁 전화기를 눌러댔다.

엠브란스에 실려 병원으로 온 봉미는 응급실 의자에 눕자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고통에 당황하며
의사를 올려다봤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는 청진기를 손에 들고 그녀의 배를 걷어올리면서 상냥한 말소리로 "아가
씨! 어디가 아프세요?" 하면서 어디에다 대 드릴까를 물어보고 있었다.
날 아가씨라네? 그녀는 답했다.
"저! 괜찮아요!!"
"네??"
"괜찮다니까요!"
"아니 아줌마! 누구 놀리는 거예요?"
금방 아줌마로 바뀌었네.
그 의사는 이런 젠장! 미친년이 아니냐? 하는 표정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봉미는
"저 사실은 유성산업 며느린데요.. 집에서 몹시 아파 앰브란스를 불렀는데 여기 눕자마자 씻은
듯이 사라졌어요..."
순간 태도가 180도로 바뀐 의사는 정중히 말했다.
"아 그러세요 사모님! 갑자기 긴장하거나 하면 그럴 수가 있죠! 신경성급성경련을 일으킨 모양
이신데 그리 우려할 만한 건 아니니까 걱정 마시고 영양제나 한 대 맞고 가시죠?"
이렇게 간사할 수가..
생각 같아서는 영양제고 뭐고 다 뿌리치고 나가고 싶었으나 위기를 넘기려고 저도 모르게 내뱉
은 신분의 체면 때문에 고개를 끄떡였다.
"이봐 안선생! 이 환자분 병실로 옮기고 영양제 한 대 놓아 드려!"
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 사모님! 우리 간호사가 잘 간호해 드릴 겁니다. 편안히 쉬시다 가도록 하십시오!"
그 의사는 고개를 90도나 꾸벅한 후 총총 사라졌다.

뜻하지 않게 영양제까지 얻어맞은 봉미는 해가 저물 쯤 병원 문을 나섰다.
갑자기 터진 소란에 자신도 우스꽝스러워 허탈한 미소를 흘리며 걷다가 발길을 멈춘 곳은 뜻밖
에도 유성산업 사옥이었다.
그곳은 1년 전 그녀가 발이 닳도록 드나들던 곳이기도 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그녀를 알아본 경비가 앞까지 달려 나와 그녀를 맞았다.
"아이고 사모님! 정말 오랜만에 오시네요?"
경비가 아양떠느라 붙인 호칭이었지만 그녀는 병원에서와는 달리 거북스럽게 들렸다.
9층 사장실로 올라가자 그녀가 앉았던 자리엔 낯선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왠지 서운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가씨의 짤막한 물음에 봉미가 "사장님 계세요?" 하며 되물었다.
"계시기는 하지만...?"
아가씨는 말꼬리를 흐리며 거듭 누군 지를 밝혀 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막 사장실에서 나오던 총무부장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아이고 재수씨가 예까지 왠 일이세요?"
순간 아가씨는 입을 막으며 깜짝 놀라와했다.
"가까운 곳에 볼일 보러 나왔다 잠시 들렸습니다. 아주버니 댁에는 다 편안하신지요? 그리고 형
님께서도 잘 계시는지요?"
"예! 덕분에 다들 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우께서는 요즘 통 안 들리는 걸 보면 학교 생활
이 바쁜 모양이죠?"
"예! 좀 그런가 봐요."
"재수씨!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안에 계시니까요"
봉미는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14) 유령의 집

봉미가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거의 9시가 가까워서였다.
나갈 적 엠브란스에 실려 나갔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생기 발랄한 모습으로 돌아오자 아줌마는
몹시 놀라와했다.
"아니 아씨! 어떻게 된 거요?"
"아버님을 뵙고 오느라 좀 늦었어요!"
"그야 사장님이 전화 주셔서 알고 있었지만... 병원에선 뭐랬어요?"
아직도 안심이 안된 아줌마는 근심스레 물었다.
봉미는 병원에서의 생각이 떠올라 웃음부터 나왔다.
"호호호 글쎄 의사가 아무 것도 아니래요. 그냥 영양제 한 병만 주더라고요. 깔깔깔!!"
"햐! 그 영양제 참 신기한 거네요!"
"그런가 봐요. 호호호!!"
그제야 생각났는지 정색하며 아기를 찾았다.
"참 우리 아긴...?"
"우유 먹고 잠들었어요"
"그이는요?"
"돌아 오셔서 식사 끝내고 조금 전에 2층으로 올라 가셨는데요. 그런데 아씨 식사는요?"
"아버님께 얻어먹고 들어 왔어요"
"그럼 사장님도 식사 하셨겠네요?"
"네 그래요!"
그 말에 아줌마는 주방으로 들어가 식탁에 차려둔 접시들을 하나 하나 치우기 시작했다.
봉미는 2층으로 올라가려다 계단에 멈춰선 채 주방을 향해 말했다.
"아줌마 그거 내가 치울 테니 이제 돌아가세요!"
"아직 사장님께서 안 들어 오셨잖아요?"
"오늘 손님 만나느라 좀 늦을 거래요!"
"그럼 이것만 치워놓고 갈게요"
"그러세요! 오늘 너무 너무 수고 많았는데 빨리 돌아가 주무세요"
봉미는 다시 계단을 밟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그녀의 방으로 올라온 봉미는 방안에 홀로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아가의 볼을 한번 쓰다듬
어 준 뒤 옷을 갈아입었다.
그 방은 원래가 병원에 누워 있는 병달 엄마의 드레스 실이었으나 그들이 결혼하면서 단장을 새
로 하여 봉미가 사용해온 방이었다.
그 방의 옛 주인의 짐들은 모두 박스로 봉해진 뒤 지하 창고로 들어갔다.
이 집안에서 그 짐들이 다시 원상복귀 된다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봉미로썬 그만큼 이집 안주인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힌 셈이었다.
한편 그녀는 모처럼 바깥바람을 쏘인 탓인지 외출했던 옷을 벗고는 그대로 거울 앞에 서서 한참
동안이나 자신의 나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자신의 볼도 이쪽 저쪽 만져 보고...
아기를 낳고 부쩍 커져버린 젖가슴도 손으로 받쳐 보고...
허리 곡선도 옆으로 돌아가며 비춰 보기도 했다.
이윽고 옷걸이에 걸린 긴 원피스로 갈아입은 그녀는 다시 한번 아가에게로 다가가 잠든 얼굴에
다 뽀뽀를 해준 뒤 문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한 비장한 표정으로 병달의 방
으로 향했다.
그녀의 마음은 조금전과는 달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가볍게 떨고 있었다.
결혼 후 줄곧 지속되어 온 둘간의 간격이 잠시 좁혀지는 듯 하다가 더욱 벌어져버린 요즘 봉미
는 말 한마디 붙이기도 겁이 나는 게 사실이었다.
더구나 뜻하지 않은 사고가 핑계가 되어 밤늦게 들어온 그녀로선 더욱 두려웠다.
그러나 이런 관계가 더 이상 지속되다간 그녀 스스로가 숨이 막혀 못 살 것 같은 절박감에 용기
를 내긴 했으나...
더구나 오늘 그녀의 시아버지인 김사장으로부터 모종의 격려가 있어서 더더욱 용기 백배하긴 했
으나 그녀의 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의 방문 앞에 다다라 살짝 열린 안쪽을 보니 책상 위 스탠드 불은 켜져 있고 의자는 비어 있
었다.
봉미는 그가 침대에 누워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후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줌마! 그이가 없어요? 그이가 없어졌어요!!"
그러나 밑에서도 덩그러니 현관 등만 켜져 있을 뿐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줌마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갑자기 유령의 집이 된 것 같았다.
봉미의 몸은 오싹해졌다.
부들부들 떨렸다.
다시 2층으로 올라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쇳덩이를 달아 놓은 것처럼 천근만근 무거웠다.
어서 빨리 경수에게로 가야 해...!
아기 경수가 염려스러워서가 아니라 경수라도 옆에 있다면 그녀의 두려움이 좀 덜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뒤에서 귀신이라도 따라붙는 듯한 환상 속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 온 그녀의 몸은 식은땀으로 흠
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 경수를 덥석 들쳐 안고 침대 구석으로 가 쪼그리고 앉았다.
누가 그 모습을 봤다면 마치 정신병자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그래도 못 미더웠던지 자는 아기를 깨웠다.
"얘! 아가야 일어나! 경수야 좀 일어나렴! 엄마가 무서워 죽겠어! 경수야 제발 좀 일어나
봐...!"
곧이어 잠자던 아기가 "앵에~ 앵에~" 울음을 토하며 소리를 높여 갔다.
그녀는 아기가 너무 심하게 울자 젖을 물렸다가 울음을 그치면 다시 젖을 떼어 일부러 울렸다가
다시 젖을 물리고...
그런 행동을 반복했다.
그때 갑자기 문을 열리며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들어섰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아악!!"
"나야 나!  도대체 왜 그래??"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 앞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은 병달이었다.
그녀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자기! 어디 갔다 온 거야? 나 혼자 얼마나 무서웠다고...!"
그러나 그는 퉁명하게 내 뱉었다.
"온 집안에 불이 훤한데 무섭긴 뭐가 무서워!!"
그녀는 침대 아래로 엉금엉금 기어 내려와 금새라도 그의 품에 안길 것처럼 다가서면서 말했다.
"자기 방에도 자기가 없었잖아?"
"낮에 병원 갔다더니 너 혹시 정신병자 된 거 아냐?"
라며 툭 쏘아붙이고는 나가 버렸다.
그가 사라진 후 그녀는 경수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15) 집착

병달은 벌써 여러 날을 한가지에 집착해 있었다.
집에 있으면 있는 대로 학교에 가면 학교대로 길거리를 걸을 때나 차를 탈 때나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병원을 드나드는가 하면 학교 도서관에 파묻히기도 하고 법원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 동안 주워 들은 얘기들과 그가 수집한 정보와 알고 있는 상식까지도 총 동원 하면서
마치 퍼즐을 풀어 나가듯이 한 단어 한 단어 맞추어 나가고 있었다.
그 밑그림이 언제 완성되어 그의 고집스런 집착에 종지부를 찍을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
이었다.
그의 그런 집착을 봉미가 눈치챈 건 그로부터 반 달여 후인 어느 밤이었다.
2주전에 있었던 유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저녁식사 준비가 끝난 봉미가 그를 부르러 2층으로 올라갔는데 그의 방문은 열려 있고 병달은
보이지 않았다.
봉미는 그가 종종 바람 쇠러 올라가는 옥상에 있을 거라 여기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곳에도 병달은 없었다.
옥상 난간을 따라 빙 돌면서 아래쪽 풀장 주위와 정원, 뒤뜰을 살펴봤으나 어디에도 그는 보이
지 않았다.
봉미는 얼마전의 악몽이 되살아나 종종걸음으로 내려 왔다.
내려오는 중에 빈 서재에 불이 켜진 것 같아 문을 열었는데 뜻밖에도 그 안에 병달이 서 있었
다.
병달이 깜짝 놀라며 돌아섰다.
"아니 병달씨! 여기서 뭐 해?"
"그그~그냥..."
토끼 눈처럼 눈만 멀뚱히 떤 그는 말을 더듬거렸다.
"밥 다 식겠어! 빨리 내려가 식사해요!"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했던 간에 그곳은 이 집 최고 어른의 개인 서재이니 함부로 들어 갈 수도
들어가서도 안 되는 곳이었다.
특히 김유성이 누구인가?
이 지방 최고의 재력가에다 제일의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는 성격이 까다롭고 치밀하여 회사의 중요 서류들은 회사에 두지 않고 꼭 집으로 가져와 보관
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의 서재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 아무도 못 들어가게 했다.
며느리가 된 봉미도 그 방안의 책상 한번 닦아 보지 못했던 터다.
때문에 병달이 왜 그다지도 놀라는지 또 말을 더듬거리는지 그녀는 이해하고도 남았다.
봉미는 그의 등을 밀면서 황급히 서재를 빠져 나왔다.
만약 이 사실을 김사장이 보거나 전해 듣는다면 온 집안은 거친 태풍에 휩싸일게 뻔하기 때문이
다.
봉미라하여 그 태풍권의 밖에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사실이 자명한 상황에서 이제 봤어도 못 본 척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봉미는 그를 밀다시피 하여 아래층으로 데려가 식탁 앞에 앉히고 따지듯이 물었다.
"병달씨! 요즘 너무 심하지 않아?"
수저를 들던 병달이 대답했다.
"미안해!"
"병달씨는 정말로 미안해하는 거야? 정말로 미안해한다면 이렇게 하진 않을 거야! 또 이렇게 할
수도 없을 거고!"
"...."
그는 고개를 내리 깔고 기계적으로 밥술만 뜨고 있었다.
"난 아기가 태어나면 좀 나아 질줄 알았어!
내가 아무리 미워도 명색이 부부인데 아침저녁으로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야 하잖아?
남이더라도 이러진 않을 거야! 남이더라도 이렇게 살순 없을 거야!
인사를 해도 답이 없고 물어도 대답 없고 정말 숨이 턱턱 막힌다고!!"
"앞으로 노력해 볼께!"
봉미의 잔소리가 계속되자 그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올라가려 했다.
그러자 봉미는 그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밥도 안 먹고 가긴 어딜 가! 이제 식은 밥 먹는 것도 질렸어! 이밥 다 먹고 가!!"
봉미는 앙탈을 부리며 그를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그러자 눈을 치뜨면서 다시 일어선 그는 그녀의 어깨를 툭 밀어 제키며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녀는 사라지는 그의 등에다 대고 외쳤다.
"아버님의 방은 왜 뒤져? 온 집안에 짚불 지르려고 그래? 내게 그러는 것도 모자라서 아버님까
지 끌어들이려고 그래?"
봉미는 자신에 대한 그의 무관심을 악 발린 소리로 계속 퍼부어 댔지만 그가 눈  앞에서 사라지
자 의외로 그녀의 마음은 관대해졌다.
대신 요즘 뭔가 냄새가 나는 듯한 그의 태도가 궁금했다.
병달은 그녀뿐만이 아니라 온 가족들과도 통 말하려고도 않고 눈빛조차 피하면서 무슨 궁리를
하고 있는 걸까?
학교 수업은 들어가는 건지 마는 건지 새벽에 나가는가 하면 한낮에 일어나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얼굴은 늘 굳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 병달은 그의 아빠 서재에 왜 들어 간 걸까?
거기서 뭘 한 걸까?
무슨 귀한 것이라도 찾는 걸까?
언뜻 언뜻 스치는 눈빛으로 보아 그는 분명 무언가 비밀스런 것을 찾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게
무얼까?
연기가 나는 건 분명한데 도무지 감도 안 잡히고 통 알 수가 없으니 좀더 지켜볼 수밖에...

한편 병달은 벌써 3번째인 오늘의 수색에도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했다.
길다란 방안에 세 줄이나 되는 책꽂이에 좌우로 빼곡이 꽂힌 서류더미 속에서 그가 바라는 뭔가
를 찾아낸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그가 그 방으로 처음 들어갔을 적 어마어마한 서류덩치에 그는 아연했다.
마치 고서들처럼 낡고 빛 바랜 색에다 10년도 넘은 듯이 뿌옇게 먼지를 뒤집어 쓴 것들도 많았
다.
그가 그걸 처음 본 순간 그 놀라움만큼이나 기대도 컸었다.
그러나 늘 누가 불쑥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속에서 더구나 그 어떤 형상이나 내용을 알지
도 못하는 상황에서 무작정 뒤진다 하여 뭔가 손에 잡힐 리도 없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인 셈이었다.
오늘 간신히 그의 가슴속에 감춰 나온 것은 뜻밖에도 중요한 열쇠가 될 듯 했다.
'XX지방법원'이란 직인이 찍혀 있었고 날자는 벌써 20년도 더 지난 것이었다.
표지에 '공증서'라 적혀 있고 내용은 양자 합의에 의해 앞으로 수성산업의 모든 권한 및 책임은
조민수로부터 김유성에게 인계하기로 합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병달 자신도 충분히 추측해온 일이라 별다를 건 없었으나 유성산업의 전신이 수성산업이
었다는 사실과 그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조민수와 자신의 아빠 김유성은 그의 예감과는 달리 서
로 합의하에 회사가 넘겨 왔다는 사실을 알아낸 셈이었다.
아쉽게도 그 인수인계 조건과 연유를 알만한 첨부서류가 없어서 그렇게 된 배경 따위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서류의 발견으로 그의 아빠에 대한 막연한 미움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으나 썩 개운치는 않았
다.

 

(16) 강변 가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병달이가 학교를 파하고 막 교문을 나오는데 누군가 앞을 가로막고 섰다.
뜻밖에도 수진이었다.
"아니! 누나??"
너무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여 그는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았다.
너무나 반가워하는 그를 그녀는 자신의 빨간 승용차에 태웠다.
"아니 누나! 어디로 가는데...??"
"그냥 가만있어! 멋진 데로 갈 테니까...!!"
그녀는 차를 몰고 복잡한 시내를 조심조심 빠져 나오더니 도심을 벗어나자 보란 듯이 쌩쌩 달렸
다.
"역시 누나는 내 누나야!"
"왜?"
"이제껏 줄곧 우울했거든..."
"그랬니? 그럼 다행이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 갈 듯한 그의 기분과는 달리 그녀는 왠지 무거워 보였다.
"누나! 혹시 회사에서 안 좋은 일 있었어?"
"아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기분은 몹시 우울한 듯 했다.
그는 화제를 돌렸다.
"누나 이 차 언제 뽑았어?"
"한 달쯤 됐어"
"차 좋은데!?"
"그래? 너가 한번 몰아 볼래?"
"아니! 난 면허도 아직 못 냈어"
수진은 이제 좀 기분이 풀렸는지...
"아휴 꽁생원! 장가가더니 마누라 치마 속에 푹 빠졌나보군!!"
하고는 혀를 찼다.
"에이 그 반대야! 못 믿겠거든 우리 집에 와봐?"
"거짓말! 니 눈에 거짓말이라고 쓰여 있어!"
그는 룸 밀러를 내려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 봐 웃음이 줄줄 흐르지?"
"누나가 찾아와 줘서 너무 반가워 그래!"
그녀는 너 그래봤자 나 안 믿는다는 투로 피씩 웃었다.
그런 이야기들 속에 어느 호젓한 강변의 한 가든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전에도 와 본듯이 그를 2층으로 끌고 올라갔다.
열려진 창문 밑으로 노을지는 저녁 하늘을 잔뜩 머금은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그곳에서 피어난
솔솔한 강바람이 열린 창문을 타고 올라와 그들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정말 상쾌한 강바람이었다.
한껏 고조된 분위기를 의식한 듯 그녀는 자못 격양된 어조로 물었다.
"이곳 좋지 그쟈...?"
"응...!
그런데 누난 이런 곳을 어떻게 알았어?"
"우리 친구들 종종 만나는 곳이야"
"누나 친구들 거의 시집 안 갔어?"
"나만 요러고 있지 뭐!!"
그녀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때 마침 아줌마가 올라와 뭐 할거냐고 물었기 때문에 잠시 대화가 끊어 졌다.
수진은 그에게 묻지도 않고 오리백숙을 시켰다.
"누나 친구들 만나면 무슨 얘기들 주로 하는데..?"
궁금해서라기보다 그냥 물어본 말이었다.
"게네들 새끼 얘기나 저거 서방 얘기들 하지 뭐!"
"그럼 누나는...?"
"나? 나도 마찬가지야!!"
"뭐? 누나는 시집도 안 갔으면서...?"
"회사 상사들 얘기도 하고 신입 사원들 얘기도 하고 그리고 니네 아빠 얘기도 종종 하지!"
그리고 수진은 그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그 말에 궁금증이 솟구친 병달이 그녀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아빠 얘기는 어떤 것들인데.?"
"뭐 욕하는 얘기지 뭐! 안주거리 같은 거 있잖아! 술 맛나게 하게 위해서..."
수진은 좀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 괜찮아! 나 아빠에 대한 존경심 사라진지 오래야! 증오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지 뭐...!"
병달의 뜻하지 않은 말에 계면쩍어진 수진은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그녀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
다.
"네 학교 얘기나 좀 해!  미팅 같은 거 했던 얘기?  너 장가간 후에도 다른 애들을 만났다거나
총각인줄 알고 따라 다니는 애가 있다던가 하는 그런 얘기들 말야..."
'누나는?!  모처럼 마음에 뒀던 얘기를 속 시원히 내 뱉고 있는데... 그런 재미도 없는 얘기나
하라니...'
그는 퉁명하게 대답했다.
"그런 얘긴 없어..."
"얘! 별 의미 없이 꺼낸 말을 갖고 왜 그러니?  불알을 찬 사내녀석이..."
수진은 그 말을 내 뱉어놓고 또 한번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불알을 찬...'
때마침 아줌마가 찌개다시를 들고 올라 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줌마가 들고 온 그릇들을 모두 내려놓았을 때 수진은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하고 술을 시켰다.
병달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누나!  웬 술..??"
"왜 넌 술 먹을 줄 모르니?"
"그건 아니지만...??!!"
틀림없이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나...
더구나 날 끌고 와 술을 하자는 걸 보면 아빠와 무슨 일이 있은 게 틀림없어...
심한 꾸중이라도 들은 걸까...?
혹시 사표라도 내고 나온 건 아닐까...?
그의 뇌리엔 별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그녀의 푸념을 들어주고 같이 수다도 떨면서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게 가
장 현명하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껏 그를 끔찍이도 아끼고 그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서 해결해주던 옛정을 생각한다면 그만
한 일은 별것도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야! 한잔 받아!"
수진은 올라온 소주병의 마개를 따고 먼저 병달의 잔에 술을 따랐다.
병달도 그녀에게서 병을 뺏어 그녀의 잔을 채웠다.
"우리 '위하여' 한번 하자!
뭘로 할까?"
수진이 잔을 들고 물었다.
"누나 이럴 땐 '개나발'이야! '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개나발 그거 좋네! 자! 개나발~!"
"개나발~ 원쌉!"
수진도 병달도 그대로 들이켰다.
수진은 술을 꾀나 먹어본 듯 다음 잔을 따라주자마자 다시 꼴깍 삼켜 버렸다.
"누나 무슨 양주 마시는 듯 하네! 안주도 나오기 전에 취해 버리겠다. 천천히 좀 마셔...!"
"술이야 원래 취하라고 마시는 거 아니니?"
또 한잔 꼴깍하고는 벌써 취한 건지 그윽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병달은 안되겠다 싶어 더 이상 그녀의 잔을 채우지 않고 술병을 가랑이 사이에다 틀어쥐고 앉았
다.
"병달아 나 괜찮아! 고깟 술 몇 잔 갖고 그러니... 나 이래뵈도 기본이 두 병이야! 좀 징그럽겠
지만..."
"주량 두 병이 그래 벌써 혀가 꼬이나..?"
"혀? 그래 난 술만 들어가면 혀가 꼬이지... 그래야 술맛도 나는 거거던..."
별 괘변이 다 있네...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는 오리백숙이 날라져 왔다.
병달은 시장하던 터라 그녀가 찢어준 한쪽다리를 들고 정신없이 뜯었다.
연거푸 몇 잔의 술을 비웠던 수진은 자신의 말처럼 아직 안 취했다는 걸 보이기라도 하려는 듯
이 그가 먹기 좋게 고기를 뜯어 병달 앞에다 쌓아 놓았다.
"누나도 좀 먹어!"
그의 말에 "응 그래!" 하며 수진도 따라 먹기 시작했으나 그녀의 눈에 뭣이 밟힌 건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병달이 그걸 본 건 한참 만이었다.
"아니 누나 왜 그래?"
"별거 아냐!  옛날이 생각나서 그래! 내가 니네 집에 처음 갔을 때가 갑자기 생각나서..."
병달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중3이었다.
그의 엄마가 졸지에 식물인간이 되어 병상에 누운 지 4개월 여, 누구하나 그를 보듬어줄 사람
없어 정에 굶주려 있던 그를 수진이 닭백숙을 사들고 찾아갔었다.
처음엔 낯선 사람이라 잔뜩 경계하던 그가 마음을 연 건 그녀의 한마디였다.
"내가 니 엄마를 대신한 누이가 될 것이니 없는 누나하나 생겼다고 생각해 주겠니!"
첫 대면치고는 자못 당돌한 언행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들고 온 것을 풀어놓았다.
그녀는 그중 한쪽 다리를 뜯어 병달 앞으로 내밀었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고 있었다.
그 냄새가 병달의 코를 간지럽히며 허기를 부채질했다.
한동안 망설이던 병달은 허기에 못 이겨 그걸 덥석 베어 들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측은해서인지 자신의 청을 들어줘서 고마워서인지 그윽한 미소
를 머금고는 그가 먹기 좋도록 갈기갈기 찢어 놓았었다.
"그때 넌 겨우 열 여섯이었고 난 지금 네 나이만 했지... 그런데 너와 나의 나이 차만큼 세월이
흐른 지금, 지난 세월을 생각해 보면 넌 어른 같은 애였고, 난 애 같은 어른이었던 것 같애...
그래서 지금 넌 애 아비가 되어 있고 난 아직 철없는 노처녀로 늙고 있는 것 같애..."
수진은 빈 술잔을 내 밀었다.
병달이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술잔을 가득 채워 줬다.
그녀는 그걸 반쯤 마시고 내려놓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너가 봉미와 눈이 맞았다는 소문 나돌 때 나는 설마 했지... 그리고 얼마 안 지나 봉미가 아기
뱄다는 소문이 나돌자 난 화가 무진 났어... 그런데 곧이어 결혼 발표가 나자 이외로 담담해 지
더군... 그리고 식장에 나란히 선 너희들을 보자 속을 다 비운 듯 가뿐해 지는 것 있지..."
수진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누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오늘 그녀가 불쑥 찾아온 것부터가 의외인데다 여기까지 끌고 와 그녀가 하는 말 한 마디
몸짓 하나 하나가 뜻밖의 것이 많아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도 이제 취기에 약간 닳아 올라 담배까지 꼬나물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오늘은 그녀의 푸념을 맘껏 들어주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녀의 말을 막을 이유는 없었다.
술은 벌써 다 비워져 또 한 병이 시켜져 왔다.
"그런데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이 들리고... 아기 아빠는 별로 인데 할아비는 싱글벙글 화색이
만개했다느니 어쩌고... 그건 아기가 지네 아비보다 할아비를 더 많이 닮아 그랬다느니 어쩌
고... 그 일로 하여 부부간에 사이가 안 좋아졌니 어쩌고... 별에 별 소리가 다 들리더군... 그
말들 다 맞는 말들 맞니??"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다 틀린 말들이란 말이니?"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는 채워둔 술잔을 홀딱 마시고는 다시 내 밀었다.
그는 그녀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그가 잔을 비우자 그녀가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얄밉게도 나는 그 말들이 사실이길 바랬어! 넌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 믿었는
데... 여자도 사귀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못하는 게 없잖아...!
넌 정말 다 할 수 있는 거 맞아??"
수진은 곧 울 듯한 목소리였다.
"누나 안 되겠어!  너무 취한 거 같애!  그만 가자!"
병달은 안 일어나려는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뒤 밖으로 끌고 나왔다.

 

(17) 꿈속의 열락

"나 안 취했어...!
난 멀쩡해...!
나 지금 술 주정하는 줄 아니...?"
그런 말들은 시내로 들어오는 택시 속에서 수진이 몇 번이나 되 내이던 말이었다.
병달은 흐느적대는 그녀가 혹시 달리는 택시 밖으로 뛰어 내리기라도 할까봐 그녀를 꼭 붙들고
있었다.
좀 전만 해도 그녀가 가든 밖으로 나오자마자 강으로 뛰어 들려는 걸 간신히 잡은 적이 있었다.
수진은 갑자기 속으로 찬바람이 들어가자 급하게 먹은 술이 곤두박질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는 강을 보고 무작정 뛴 건데 병달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깜짝 놀란 것이었다.
병달은 그녀를 강둑에다 쭈그려 앉게 하고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술을 토하게 했다.
'이기지도 못할 술을 왜 그리도 용감하게 먹었담...'
그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몇 번이나 토해내고 반시간 여나 강둑에 쪼그리고 있던 그녀가 일어섰다.
조금 나은 듯 그러나 아직 꼬인 혀로 말했다.
"미안해 병달아 이렇게 추한 꼴 보여서..."
"술하고 원수진 것도 아닐텐데 왜 그렇게 이판사판 마셨어?"
"넌 내 맘 모른다.  그럼 모르고 말고..."
그러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택시 속에서 그의 품에 안긴 채 아직도 훌쩍이고 있었다.
혹자는 여자가 술 먹고 우는 꼴이 가장 추하더라고 했다.
또 혹자는 술 먹고 우는 여자가 가장 가련해 보인다고도 했다.
그의 품에 안겨 훌쩍이는 그녀를 병달은 어찌 생각했는지 알 수 없다.
한참을 달리던 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어디로 갈까를 물었다.
병달은 그녀에게 물었다.
"누나 집이 어디야?"
몇 번이나 되물은 후에야 답했다.
"강서동 버스종점."
이윽고 어느 한곳에 택시가 섰다.
병달은 그녀를 부축하여 택시에서 내렸다.
늘 다니던 길이라서 그런지 그녀는 비틀대면서도 곧잘 걸었다.
산중턱까지 따닥따닥 붙은 집들 사이로 골목길을 돌고 또 돌아 계단을 얼마나 올랐는지 병달의
다리가 후들거릴 즘 그녀는 어느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병달아 나 이런 곳에 살아...!"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그녀는 베니어판으로 된 나무대문을 밀고 들어서며 다시 물었다.
"누나가 이런 곳에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지?"
그녀의 술도 어지간히 깬 모양이었다.
병달은 처음 그녀를 집 입구까지만 데려다 주고 그 택시로 바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비틀대는 그녀를 그냥 보낼 수 없어서 다시 집까지만 바래다주리라 마음을 고쳐먹은 것
인데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방안에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래 이미 이렇게 된 거 발이나 좀 녹이고 가지 뭐 하고 재차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녀의 방은 누추한 바깥과는 달리 처녀의 방답게 깔끔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수진은 좀 누워 있으라며 폭신한 담요하나를 깔아 두고는 나간 뒤 10분이 지나도 안 오고 20분
이 지나도 안 돌아 왔다.
어딜 간 걸까?  머리가 아파 약 사러 간 걸까?
그는 담요 속에 들어간 다리가 따스해지면서 긴장이 풀리자 뒤늦게 취기가 오르고 있었고 그 취
기는 잠을 부추겼다.

얼마나 잔 걸까?
야릇한 꿈속에서 따스한 체온이 다가서고 있었다.
"얘야! 난 니 엄마다! 이리 온 불쌍한 내 아들!"
"엄마! 엄만 이제 다 나은 거야? 이제 같이 살수 있는 거야?"
그는 엄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엄! 이제 널 떠나지 않을 거야! 너도 내 곁을 떠나지 말거라!"
엄마는 그를 포근히 껴안아 주었다.
"네! 엄마! 꼭 붙어 있을 거예요! 이제 다신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거예
요!"
엄마의 품은 몹시 따스했다.
그는 마치 병아리가 어미 품으로 파고 들 듯이 엄마 품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까마득한 유년시절 그가 베개삼아 장난감 삼아 갖고 놀았던 곳.. 그리고 탯줄을 대신하여 생명
을 풍성케 했던 동산에 올랐다.
아직도 그곳은 따스한 햇볕이 드는 양지의 땅이었다.
아직도 그곳은 마른 목을 적셔주는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그는 그곳에 옛날처럼 얼굴도 비비고 목도 축이며 행복에 겨워했다.
엄마의 손은 그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잃었던 새끼를 찾아 냄새를 맡아보며 제 새끼인지 확인하는 뭇 짐승들의 어미들처럼...
그녀의 손은 그의 얼굴에서부터 조금 조금씩 확인하여 목과 어깨를 거쳐 가슴으로 내려가고..
배를 둥그렇게 맴돌며 배꼽에 잠시 머물다 점점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 시절 그가 쉬를 할 적마다 꼭 쥐고 조준하여 주던 그 손길...
쉬를 끝마치면 톡톡 털어 주던 그 손길이 느껴졌다.
아 쉬하고 싶다.
그는 몸을 비틀었다.
어느새 그를 조준하여 주던 그 손길이 다가와 그를 부여잡고 요로 속으로 안내했다.
그 속은 약간 습습하면서도 안온했다.
빼곡이 늘어선 융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의 입성에 환호하며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또 그것들은 여왕개미의 배란을 돕는 일개미의 바쁜 몸놀림같이 그의 배료를 돕느라 우왕좌왕
분주했다.
그곳은 졸지에 시골장터처럼 변하여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며 왁자지껄 소란했다.
그의 귓볼 아래로 성스러운 배료를 숙원하며 환희의 축가를 불러대는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려오
고 있었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면서 가까워져 늦가을 갈대소리 만큼이나 거칠어져 갔다.
"아아~~ 으으흑~ 흑흑~~"
"어~엄마! 나~~ 쌀 것 같애~~"
"으응~ 그대로~ 그곳에 싸아~~"
그는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살 떨림을 잠시 경직시키고 힘을 한곳으로 모았다.
"아아~ 으음마~~!!"
온몸을 감전시킬 듯한 짜릿한 전율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의 환희의 배료는 몇 번이고 이어졌다.
울컥~ 울컥~ 크으~ 짜리리리...
그를 감싸고 있던 융기들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려 안감 힘을 쓰다가 이제 지친 듯 그를 놓
아주며 그가 빠져나가자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옆으로 쓰러졌다.
열락이 점점 사거라들고 곤한 잠 나라로 빠져 들 무렵
그 시절 그의 젖은 기저귀를 갈아주던 그 손길은 어김없이 다가와 그의 젖은 사타구니를 닦아주
고 있었다.
그 손길은 그의 잠을 더욱 달콤하게 했다.

"병달아 일어나! 학교 늦겠다!"
분명 엄마의 목소리였다.
얼마 만에 들어보던 목소리인가...
그는 벌떡 눈을 떴다.
그윽한 미소를 띈 엄마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음마!"
그는 그녀의 목을 털어 쥐고 몸을 일으켰다.
"야아~ 늦겠다!"
순간 그의 엄마는 사라지고 앞에 앉아 있는 이는 수진이었다.
"아니 누나! 어찌 된 거야?"
"어찌 되긴? 저 밑 편의점에서 약하고 마실 거 좀 사왔더니 잠들었더군"
"그래서?"
"그래서 나도 잤지 뭐!"
"그리고 또?"
"또는 뭔 또 야? 그대로 잤다니까 그러네"
그래도 못 미더운 듯 빤히 쳐다보고 있자 그의 등을 잡아 일으켜서는 밖으로 밀어냈다.
"빨리 세수나 하고 와! 그래야 밥 먹고 약도 먹지!"
밖으로 나오자 세수 대야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이런 것도 행복감이랄까?
별로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감정임은 분명했다.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서자 진수성찬이 마련되어 있었다.
기껏 가자미 국에다 희멀건 무우 김치와 마늘장아찌 한쪽 그리고 창란젓 한 종기와 콩이 듬성듬
성 섞인 밥이 전부였는데도 그는 징수성찬으로 여겨졌다.
"찬이 아무 것도 없어서 미안해!"
"미안하긴! 이렇게 맛있는 거 많은데 뭘..."
그는 숟갈에 밥을 가득 떠 입에다 넣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은 밥을 맛있게 먹어주는 그가 고마워 이거 저것 집어다 그의 입에 넣어 주고
는 흐뭇해했다.
"누나도 좀 먹어!"
"난 너가 밥 먹는 거만 봐도 배부른 걸 뭐!"
그러면서 수진도 숟갈을 들었다.
식사가 끝나고 그녀는 상을 들고 나가 설거지를 하느라 달그락대고 있고 그는 이제 갈 준비를
하느라 일어서서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거울 귀퉁이에 꽂힌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와 그가 수영복 차림으로 그의 집 풀장에서 찍은 것이었다.
그건 그가 고1 무렵 집안 정원의 일부를 파내어 풀장을 만든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었는데 그는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런데 그 한 장이 여기 남아 있다니 너무나 반가웠다.
"누나! 이 사진 여태 가지고 있었네!"
"그럼! 너와 찍은 유일한 사진인데... 넌 벌써 없애 버렸니?"
"아 아니 나도 갖고 있어..."
대답하는 그의 마음은 왠지 켕겼다.

수진과 같이 택시를 타고 오는 병달의 마음은 내내 혼란스러웠다.
지난밤 어찌 된 걸까?
꿈이라고 생각기엔 너무 또렷한 기억에다 아직도 가시지 않은 듯한 열락의 짜릿함...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전율감은 다시 되살아나 그를 흥분케 하고 있었다.
그 한편에는 자신을 배반한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죄의식이 그를 괴롭혔다.
하필이면 그 상대가 엄마였다니...
엄마임을 알면서도 왜 그리도 흥분한 걸까?
엄마이어서 그리도 짜릿한 열락에 취했는지도 모르지...
그의 그런 꿈은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막 사춘기에 접어들고 몽정을 하기 시작하던 열 서 너 살 무렵 그는 매일 밤 꿈에서 엄마
를 만났다.
당시 집안에 여자라곤 엄마뿐이었고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어 지낸 관계로 몽정 상대로는 엄마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엄마가 그의 볼을 한번 쓰다듬어 줘도 그는 쉬이 몽정했고, 엄마의 손이 그의 엉덩이
를 한번 토닥거려 주는데도 그는 쉬이 몽정해 버렸다.
그러나 어젯밤은 달랐다.
유사하고 희미한 것이 아니라 확실하고 또렷한 감각으로 엄마의 성(城)에 진입하여 엄마의 성
(性)을 느끼고 엄마의 성(聖)에 희열했던 것이다.
금제의 성(城)!
감히 침범 할 수도 침범해서도 안 되는 땅!
그곳은 고귀하고 성스러워 감히 넘보지 못하는 금단의 열매와 같은 것이지 않던가.
그는 지난밤 그런 금단의 열매를 따먹지 않았던가...
아무리 꿈이었다지만 그는 금제의 땅을 취한 게 분명함에도 또다시 그 열락을 꿈꾸며 흥분하고
있다니...
그는 심한 자책감과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택시가 유성산업 앞에 이르자 그녀는 그의 볼에 살짝 뽀뽀를 해준 뒤 내리고 그만이 남겨 두었
다.
택시는 다시 그의 학교를 향해 달렸다.
그녀와는 아무 일도 없었을까?
아무 일도 없었을 테지!
그를 끔찍할 만큼이나 아껴주던 그녀였는데, 친누이 이상으로 어쩜 누운 엄마보다도 더 그를 아
끼던 그녀였는데 어찌 그럴 리가...

 

(18) 은애의 샘

그날 집으로 돌아온 병달은 봉미의 잔소리를 예상하고 미리 배수진을 쳤다.
"넌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그래 궁금하지도 않았어?"
그의 선공에 기가 죽은 건지 봉미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그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뜻밖에도 그의 장인이 와 있었다.
"장인어른 오셨습니까?"
TV를 보고 있던 장인은 일어서며 반갑게 그의 손을 잡았다.
"그래 공부하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냐?  김서방 여기와 앉게!"
장인은 병달을 끌어다 옆에 앉혔다.
그로선 더할 나위 없이 감쪽같이 넘어갈 원군을 만난 셈이었다.
"장인어른 언제 오셨습니까?"
그 물음에 장인은 그의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왔어!"
병달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걸 눈치챈 건지...
"여긴 심심해서 못 견디겠더구먼... 이제 김서방 얼굴도 봤으니 곧 가야지"라 했다.
그때 봉미가 쥬스 잔을 들고 왔다.
"여보! 아버지는?"
여보라니.. 생전 처음 뱉어본 말이었다.
"어제부터 지방 출장 갔어요. 오늘도 못 오신댔어요"
"응 그래..."
그는 또 한번 속을 쓸어 내렸다.
그녀가 주방으로 사라지자 장인이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말했다.
"이봐 김서방! 학교에 일이 아무리 많더라도 집으로 전화는 한번씩 해 주게! 그래야 집에서 걱
정을 않지..."
"예 알았습니다. 다음부턴 꼭 그러도록 할게요!"
겸연쩍어 하는 그를 위로하려는 말인지 몰라도
"사실 난 집에 할망구하고 싸우고 이리로 온 거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 할망구가 잔소리가 얼마
나 심하니.. 거기에다 요샌 노망기도 있고.. 너거 댁은 아직 몰라.. 내가 말해주지 않았거던."
라고 말한 장인은 허탈한 웃음을 껄껄걸 웃었다.
사위에 대한 실망의 웃음일까?
그 소리를 듣는 병달의 마음은 씁쓸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병달은 장인과 TV속의 코메디 프로에 빠져 있는 동안 봉미는 아줌마와 뭔가
속삭이고 있었다.
"아줌마 오늘 하루만 더 여기서 자도록 하세요?"
"벌써 이틀 짼디..."
"제가 전화해 드릴 테니까..?"
아줌마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는 것 같았다.
그 말들을 엿듣고 있던 그에게도 그건 다행스런 일이었다.
이 너른 집에 둘만 남으면 싸움밖에 더 하겠는가...
그녀는 그걸 미리 방지하려는 듯 했다.
이윽고 코메디 프로가 끝나자 장인은 일어섰다.
봉미는 대문에서 작별 인사를 했고 병달은 장인을 택시 타는 곳까지 배웅 나왔다.
노란 택시 하나가 그들 앞에서 섰고 장인은 그의 손을 다시 한번 쥐어 본 뒤 택시에 올랐고 곧
떠나갔다.
그는 발길을 돌리려다 때마침 멈춰선 택시에 몸을 싣고 말았다.
우발적이었다.
전혀 뜻밖의 행동에 자신도 놀랐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룸 밀러 속으로 뒤를 쳐다보며 묻는 기사의 말에 "강서동 버스종점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택시 속에서의 그의 마음은 들떠 있다거나 기대감에 부푼 그런 마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 해야 할 것이다.
좀은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또는 애라 모르겠다는 식의 자포자기한 듯한 마음 등이 뒤죽박죽
된 혼란한 심정이었다.
드디어 버스종점에 택시가 서자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문을 열고 내렸다.
그러나 동화 속의 미로만 같은 꼬불꼬불 골목길을 단 한번도 다른 길로 들지 않고 신기에 가깝
도록 잘 찾아올라 갔다.
크다란 베니어판으로 된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저쪽 구석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그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느라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마음을 추스렸다.
'...내가 지금 잘못 온 건 아닐까?
...오지 말아야 할 곳을 온 건 아닐까?
...나도 알 수가 없어...
...나도 어쩔 수 없는 걸...
...이왕 왔으니 보고는 가야지!
...누나도 날 이해해 줄 거야!'
병달은 방문을 왈칵 열었다.
"아니! 병달아??"
그녀는 깜짝 놀라 입을 벌리고 다물 줄 몰랐다.
그가 방안으로 들어가 그녀 옆에 나란히 앉자 그의 실체를 확인한 그녀가 물었다.
"너 분명 어제의 일로 봉미하고 싸웠구나? 그래서 이리로 도망 온 거구나! 그렇지?"
그녀의 다그치며 묻는 말에 그는 고개를 흔들며 그녀를 와락 안았다.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냐?  네 얼굴에 씌어 있는데..."
그를 밀어내며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아 눈 속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아니야! 정말 아니란 말야. 나도 모르겠어! 여기 왜 왔는지? 종일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
어. 아무 일도 못했다구!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걸 어떡해! 집에 가도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거야. 그저 여기 생각뿐... 그래서 온 거야! 그래서 단숨에 달려온 거라고..."
그는 입에 거품을 물며 숨넘어갈 듯이 말했다.
수진은 그를 꼭 껴안았다.
"그래 잘 했어! 잘 한 거야 우리 착한 병달이! 이렇게 가만히 있어! 아무 말도 하지마! 아무 생
각도 안 하는 거야! 잠이 오면 이대로 잠이나 한숨 자! 그러면 좀 나아질 거야!"
그녀는 그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병달이 그녀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잠잠해지고 거칠던 숨소리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그를 그녀
의 무릎 위에 누이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병달은 그녀의 포근한 체온과 폭신한 감촉에 몸도 마음도 모두 녹아 내렸다.

갑자기 얼굴을 스치는 찬바람에 병달은 눈을 떴다.
누군가 머리에 하얀 꽃을 가득 꽂은 채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너 깼구나! 밖에 첫눈이 내리고 있어"
좀은 들뜬 듯한 수진의 목소리였다.
병달은 잠시 잠든 모양이었다. 하기야 어젯밤 술과 얄궂은 꿈으로 인하여 한숨의 잠도 못 이룬
것 같은 밤이었으니 오죽 참았으랴..
"너 오늘 집에 가긴 힘들겠어. 내려갔다 왔는데 차들이 모두 끊겼어. 눈이 이토록 오니 이 꼭대
기까지 택시가 올라 올 리도 없고..."
"누나 몇 시나 된 거지?"
수진이 펴 준 듯한 포근한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
수진은 대답대신 문을 열어 밖의 펑펑 눈이 쏟아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가 이곳에 들어 올적만 해도 말끔하던 마당에 그새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솜 방울 만한 눈들이 계속 쌓이고 있었다.
"하여튼 오늘은 힘들어!"
답답해진 병달이 방안을 둘러보자 벽에 걸린 시계가 1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화라도 해줘야 할텐데..'
그러나 전화기는 보이지 않았다.
"누나 전화 없어?"
"왠 전화? 집에 할려구?"
병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고 내가 저 아래에 내려가 금방 하구 왔잖아!"
수진은 비니루에 싸 들고 온 배를 깎기 시작했다.
집에다 전화했다면 봉미와 통화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병달은 수진이 뭐라고 둘러댔는지 묻지를 않았다.
수진은 그걸 접시에다 쭉쭉 쓸어놓고는 그중 하나를 이쑤시개로 쿡 찔러 그에게 내밀며 불쑥 내
뱉었다.
"너네 아빠 돌아온 모양이더라. 신설공장 현장에 간 걸로 아는데 일기예보를 듣고 철수한 모양
이야"
그 말에 병달이 화들짝 놀라자 다시 덧붙였다.
"그러나 안심해! 학교 동아리일 때문에 밤샘해야 한다며 집에 와서 저녁 먹고 학교로 다시 갔다
고 봉미가 둘러댔다고 하더라. 그리고 너도 그렇게 입을 맞추라고 하더구나"
그 말을 한 수진은 부러워서인지 질투 때문인지 배를 찔러 와싹와싹 씹었다.
"또 다른 말은 없었어?"
수진은 '너가 왜 여기 와 있는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언제부터 들락거렸는지.. 따위 말이
지?' 하고 되묻고 싶었으나 참았다.
"눈이 많이 오니 몹시 걱정했다고 했어"
수진은 다음 말은 뭔가 찔리는지 더듬거렸다.
"그리고 그리고 있지.. 어어.. 어제도 여기 있었냐고 물었어.. 병달이 너가?"
"그래서?"
"아아..아니라고 발뺌했어!"
병달은 휴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거 같애!"
병달은 다시 놀라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나 수진은 정색을 하며 다시 말했다.
"바른 대로 말했어야 했어! 어젯밤 너와 같이 있었다고... 그러는 게 서로의 앞날을 위해 더 현
명한 일이었어.. 언젠가는 다 알게 될 것이고, 또 알아야 할 일이니까.."
"누나! 정말 큰일날 소리하고 있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한 일이잖아  그건 누나도 잘
알잖아!"
"그래 잘 아니까 그러지... 상처는 더 곪기 전에 터트려야 더 곪지 않는 거야!"
"누나! 상처라니?"
병달은 따지듯이 물었다.
"그럼 너희들의 그 짓거리가 상처투성이가 아니고 뭐니? 서로 원하지 않은 사랑에다, 원하지 않
은 결혼, 자식까지도 그렇고 지금의 너희 둘이 꾸리고 있는 부부생활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니?"
수진은 또박또박 반문했다.
수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자신의 사생활에 끼여드는 것에 병달은 버럭 화를 냈다.
"누나는 결혼도 안 했으면서 어쩜 그리 잘 알아?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 들어와 보기나 했어?"
"난 그제까지만 해도 그냥 보아 넘기려 했어. 그러나 어제부터 마음을 바꿨어. 이제부터는 너희
들의 그 무의미한 소모전을 구경만은 않을 거야! 결국 제3자로 밀릴지도 모르지만 방관자로는
남지 않겠어!"
"누나의 그 말뜻이 뭘 의미하는데?"
"넌 바보같이 고 여우같은 봉미의 덫에 걸린 거야! 넌 그걸 모르겠니?"
수진의 그 당당한 말에 병달은 수긍했다.
"내가 바보니! 그걸 모르게.. 그러나..."
"그러나 뭐지? 니네 아빠의 성화 때문이라고.. 니네 아빠도 같은 족속이라고! 20년 이상 그 밑
에서 학대받아 왔으면서도 모르겠니? 난 5년간이나 줄곧 네 편이었지만 니네 아빠가 널 한번이
라도 아들로써 따뜻하게 대한 적 있었니 생각해봐? 단 한번이라도 네 편이 된 적이 있었니? 어
쩜 봉미와 너네 아빠는 같은 일당인지도 몰라.."

 

(19) 악마의 늪

같은 일당...?
그 말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병달에게 그만큼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현재 병달의 주위에서 병달네 집안 사정을 수진만큼 잘 아는 이는 없었다.
집안의 며느리인 봉미도 수진이 아는 극히 일부분만 알뿐이었다.
수진은 봉미와는 달리 여고 출신으로 입사하여 총무부에 1년여 근무하다가 비서실로 발탁된 관
계로 회사의 동산이나 재정관리에도 많은 정보를 주워 듣고 있었고 당시 때마침 병달의 엄마가
눕게되자 집안 일에도 깊숙이 관여해 왔다.
그러나 봉미의 출현으로 된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병달의 아빠 김유성이 K대 축제에 귀빈으로 참석하던 날 같이 동행했던 수진은 자신의 종말을
예감했다.
퀸의 화관을 쓴 봉미를 향한 김유성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예감은 적중했다.
다음해 초 수진은 총무부로 원상복귀 했고 그 자리엔 봉미가 앉았다.
한편 봉미와 아빠가 같은 일당일지 모른다는 수진의 말에 병달은 멍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수진은 다음 말을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얘기할 수 없었던지 부엌으로 나가 술을 들고 들어 왔
다.
"이왕 이렇게 되었는데 술이나 한잔하자!"
목이 기다란 양주였는데 벌써 1/3은 비워져 있었다.
수진은 그걸 두 잔에 채우고 잔 하나를 그에게 밀었다.
"넌 아직 모르는 게 하나 있어! 난 이 말을 내 입으로는 절대로 발설하지 않으려 했는데 오늘
날 찾아온 널 보니 도저히 더 이상 못 참겠어. 앞으로 할 내 말에 너무 놀라지 마라!"
독한 양주를 연신 두 잔이나 들이키며 잔뜩 뜸을 들이는 그녀의 행동에 병달은 잔뜩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너의 엄마는 이미 너의 아빠의 아내가 아냐!"
병달은 깜짝 놀랐다.
그 말은 그에겐 거의 핵 폭탄과도 같은 소리였다.
"아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너의 엄마는 네 아빠의 아내의 자격을 박탈당했어! 이미 법적으로 완벽하게 이혼 당했다구!"
"아니 언제..?"
병달은 거의 울 듯한 목소리였다.
"벌써 1년이 지났어!"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벌써 이혼이 된지 1년이 지나도록 그가 몰랐다니...
그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리쳤다.
"그렇게 너무 흥분하지마! 내 이럴 줄 알고 결코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아니 누나도 그렇지, 그런걸 이제 얘길 해!"
병달은 벌떡 일어서선 뛰쳐나갈 듯이 흥분했다.
수진은 그를 붙잡아 앉힌 뒤 진정할 것을 거듭 애원했다.
병달은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리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난처해진 수진은 병달을 품에 안고 그의 등을 두드려 주는 것 외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들썩대던 그의 어깨가 잠잠해졌다.
그러나 그가 잠든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병달은 그녀의 무릎에서 벗어나며 술잔을 들었다.
"누나! 좀 찬찬히 설명해 줘?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그래! 언젠가는 너도 알아야 할 일이니까 말해주지!"
수진도 술잔을 들었다.
"너의 아빤 너가 결혼하기 몇 달 전에 너의 엄마와의 이혼수속을 몰래 밟았어. 그로부터 반 년
여 후 법원은 이유 있다며 이혼을 승인했어. 너가 봉미와 결혼한 서 너 달 후쯤이었을 거야. 나
도 그때에야 알았어"
병달은 또다시 술잔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으흐흐흐.. 우리 엄마가 무슨 죄가 있어서..."
"그래 맞아! 너도 너의 엄마도 악마의 늪에 빠진 거야!"
악마의 늪... 그래 아빠와 아내가 일당이라면 분명 그들은 악마일 것이고 나와 엄마는 그들의
늪에 빠진 게 분명할 거야... 흐흐흐...
병달의 입에선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난 네 아빠와 같이 너가 다니는 K대 축제에 간 일이 있었지... 귀빈 자격으로 말이다.
그 축제에서 최종 퀸으로 당선되어 영광의 화환을 쓴 아가씨가 있었지..
그런데 너의 아빠는 그 아가씨에게 첫눈에 반한 눈치였어...
행사시간 내내 줄곧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어...
난 너네 아빠가 그러는 모습은 처음 봤어...
행사가 끝나고 저녁 무렵 축하연이 열릴 때 행사를 주최한 학장이 그녀를 데리고 와 니네 아빠
를 소개하며 그 옆에다 앉혔어...
그 아가씨는 연신 미소를 띄고 간들어지는 교태를 부렸어...
나는 그때 이미 나의 종말을 짐작했어...
저런 여우가 나타났는데 내가 설자리가 어디 또 있을 라고...
그 예감은 맞았어...
그녀는 입사했고 내 자리를 뺐어 갔어...
그녀는 다름 아닌 지금 너의 아내인 봉미야!"
병달은 수진의 말 흐름으로 이미 눈치를 챘지만 말뜻을 되씹을수록 정말 역겨운 소리였다.
병달은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켰다.
"그런데 얼마 후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어...
니네 아빠와 그녀가 아닌 너와 그녀가 어쩌고저쩌고, 염문설이 나 돌았어...
내가 확인한 바로도 그건 사실이었지... 그지?"
"흐흐흐..."
병달은 너털웃음을 내 깔겼다. 당시 사실이 그랬으니까..
"또 금방 너의 애를 뱄다는 소문이 나돌고...?"
"흐흐흐..."
병달은 또 한번 너털웃음을 내 깔겼다. 그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결혼설이 나돌고... 너와 봉미는 결혼했지..."
병달은 술이 떨어지자 손수 부엌으로 나가 쇠주 하나를 찾아 들고 들어 왔다.
수진은 술이 오르는지 적당히 발개진 얼굴에다 말소리도 자못 흥분한 어조로 계속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내 예상이 빗나간 줄 알았어... 그런데 어느 날 회사로 날아든 법원 서류를
보고 깜짝 놀랐어... 너네 엄마와의 이혼 결정 통보서이었거던...
그러나 그땐 이미 너와 봉미가 결혼한 후였으므로 내 상상은 별로 무뎠지...
그런데 며칠 전 뜻밖의 서류 하나가 날아왔어...
'국립과학연구소'에서 날아온 거였는데 '유전자감식결과서'였어...
'US106'과 'KS213'의 유전인자가 일치하는 걸로 감식된다는 내용이었어...
영문으로 된 비명(秘名)을 쓰고 있었는데 넌 감이 안 잡히니?"
"글쎄...??"
"잘 생각해봐!
뒤에 붙은 아라비아숫자는 연구소에서 임의로 붙인 일련번호일 테이고, 영문이니셜 'US', 'KS'
는 '미국규격','한국규격'을 나타내는 뜻이 아니고,
'US'는 너의 아빠인 '김유성'의 이니셜이고 'KS'는 너의 아들인 '김경수'의 이니셜이라고 생각
되지 않니..."
그 말에 병달은 동공이 노래지며 퍽 하고 쓰러졌다.
경수가 병달의 자식이 아니라 아빠 김유성의 자식이라면 어찌되는가?
그의 여자라 여긴 아내 봉미는 무어고, 그의 아빠는 그에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결혼은 무엇이고 이때껏 뜸뜸이 이어온 부부생활은 또 무엇이었단 말인가?
꼬인 실타래가 또 한번 흙탕물에 뒹군 것 이상으로 그의 머리 속은 온통 뒤죽박죽 혼란스러웠
다.
병달은 엎어져 펑펑 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수진이 그를 진정시키려 등을 두드려주거나 하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실컷 울도록 버려 두었다. 그래야만 나아질지도 모른다.
수진은 아직 그에게 들려줄 얘기가 더 있는 듯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 봤으나 얘기 대신 술잔을
기울였다.
더 이상 얘길 더 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고문과도 같은 것일 테니까..

 

(20) 설야

방바닥에 엎드려 펑펑 울어대던 병달은 반은 술에 취하고 반은 노여움에 지쳐 잠들어 버렸다.
수진도 반쯤 취한 몸으로 술잔을 치우느라 밖을 나가보니 눈이 문 앞까지 가득 쌓여 있었고 아
직도 내리고 있었다.
'이 정도로 온다면 내일 출근도 힘들텐데...'
하면서 방안으로 들어섰을 때 방바닥에 흥건하게 물이 고여 있었다.
수진은 처음 그것이 그가 술을 엎지른 걸로 생각했는데 그건 그가 바지 속에서 싼 오줌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머리까지 올라오는 취기로 흐느적대면서 먼저 바닥에 고인 것부터 걸레로 닦아냈
다.
다음은 그의 바지를 벗겨 내느라 끙끙댔다.
그런데 왠지 모를 웃음이 목까지 차 올라와 혼자 너털너털 웃었다.
"후..후..후..후... 호..호..호..호..."
그 소리는 좁은 방안을 공허하게 메아리 쳤다.
그러면서 병달의 웃옷이 벗겨져 나가고 위아래 내의도 벗겨져 나갔다.
마지막 팬티마저 벗겨져 나가자 벌거숭이가 된 두 다리사이로 그의 심벌이 축 늘어져 내렸다.
수진은 고개를 흔들흔들 하면서 그 모습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곧 "휴우---" 한숨을 뱉으며 그 위에 이불을 덮어주고는 벗긴 옷가지들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수진은 찬물에 손 시린 줄도 모르고 그의 옷들을 빨아 부엌 연탄 아궁이 위에다 나란히 늘었다.
수건 하나를 탄 위에 얹어둔 따스한 물에다 적신 뒤 그걸 갖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젖은 아랫도리를 꼼꼼히 닦아냈다.
병달은 세상 모르고 코를 드르릉 드르릉 곯아댔다.
다시 한번 더운물에 수건을 짜들고 온 그녀의 손이 그의 심벌주위를 닦자 축 늘어져 있던 그것
이 서서히 꿈틀대며 일어섰다.
"아아! 불쌍한 내 사랑!"
수진은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이제는 수건을 치우고 그녀의 혀가 그의 심벌을 닦아냈다.
"아아! 가여운 내 아기!"
그 말을 들은 걸까? 아니면 꿈속에서 누굴 만나는 걸까? 병달의 입에서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어어.. 어어.. 어엄마! 엄마!"
병달의 손은 허공 속을 잡으려 휘휘 내저었다.
오늘 수진에게서 엄마가 이혼 당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그래! 난 네 마음을 다 안단다.. 내 사랑! 얼마나 충격이 컸겠니..?"
수진은 그의 심벌을 입안 가득히 머금으며 꼭 보듬었다.
병달의 손은 아직도 허공 속의 누군가를 잡으려 몸부림쳤다.
수진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입고 있던 옷들을 한 꺼풀 한 꺼풀 벗었다.

유리알처럼 해맑은 백열등아래 뽀얀 속살을 모두 드러낸 수진은 아무도 봐 주는 이 없는 육신을
스스로 한번 내려다보고는 백열등 스위치를 돌렸다.
딸깍~
수진의 귀에 그 소리가 그리 자세히 들린 적은 일찍이 없었다.
방안의 빛들이 모두 밖으로 도망쳐간 듯 문살 밖의 환한 광채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병달 옆으로 살짝 수진의 알몸이 파고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부둥
켜안았다. 꿈의 연속인지 취중에 정신이 든 건지 수진은 분간할 수도 분간하려고도 않았지만...
그의 체온은 몹시 따스했다.
그리고 그 체온은 서서히 그녀에게로 나누어져 왔다.
사각~ 사각~
아직도 문살 밖으로 눈이 내리는 소리는 수진의 귓전에와 차곡차곡 쌓였다.

'아 백옥 천사여! 계속 내려라..
이 밤, 낮보다 빛나는 설야여! 영원하여라..
나를 떠나지 마라..
나를 버리지 말거라..'

수진은 그가 입을 쪽쪽 다시자 그의 입에다 그녀의 젖무덤을 물렸다.
병달은 마치 어린애처럼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쪽쪽 빨았다.
그녀의 젖꼭지에서 뭣이 나오는지 뭣이 나온다고 믿는 건지 병달은 연신 목 너머로 꼴깍꼴깍 뭔
가 넘기고 있었다.
수진은 그가 자신의 젖무덤을 빨아대는 자극이 유선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고 있
음을 느꼈다.
"아아..!"
그녀의 입에서 외마디 신음이 터졌다.
"아아아..!"
또 한번의 신음이 이번에는 하복부에서부터 터져 올라 왔다.
그 소리가 도화선이 되어 스스로 온몸을 저리게 했다.
수진은 손을 밑으로 뻗어 그의 심벌을 움켜잡았다.
그것은 이미 오줌이 찬 아이의 것 마냥 탱탱 불어 있었다.
그게 수진의 손안으로 들어오자 벌떡벌떡 도리질을 해댔다.
"귀여운 내 사랑! 오 마이 베이비..."
수진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귀여운 그것을 가볍게 거머쥐고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아아!"
병달의 입에서도 가벼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아.. 으음마..!!"
'엄마'라 불러대며 자신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그에게 수진은 '난 니 엄마가 아니라 수진이야,
수진..' 이라면서 그의 꿈에서 깨우고 싶진 않았다.
비록 꿈속이라 지만 자신을 '엄마'라 부르는 것은 그에게 엄마가 그만큼 그리워서이기도 하겠지
만 그녀가 그만큼 미덥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잔뜩 흥분된 그 상황에서 그런 생각까지야 했겠냐마는 어찌 되었던 처절할 정도로 자극
적인 이 밤, 그에게 자신을 몽땅 태우고자 하는 수진으로선 '엄마'라는 호칭은 굉장한 자극제였
다.
수진은 질퍽하게 젖어오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느끼며 병달의 몸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심벌을 자신의 가랑이 속으로 서서히 집어넣었다.
그의 심벌은 그녀의 속살 깊숙이 파고든 후에도 도리질을 계속해댔다.
"아아~ 아아아~~"
"아아~ 어~엄마~~"
"오 내사랑.. 오 베이비! 오 베이비~~"
수진은 그의 심벌로부터 빠져 나온 격정이 그녀의 동굴 안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는걸 만끽
하며 허리와 히프를 흔들어댔다.
수진에게 사각사각 눈 쌓이던 소리도 그 눈부신 백야의 광채도 이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자신의 몸 안에서 축포처럼 터지는 희열의 소리만이 들리고, 엄마를 찾는 아기의 몸짓과도 같은
병달의 간절한 손짓만이 보였다.
푸직~푸직~
"아아~ 아흑~ 아아아~~
내사랑~ 오오오~~ 아아아~~"
수진은 연신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와 희열을 어찌할 수 없어 몸을 부르르 떨다가 다시 히프를
현란하게 돌리곤 했다.
이윽고 그의 심벌 끝에서 뜨거운 용암이 터져 나와 그녀의 동굴을 몇 번이나 때리고 동굴 안을
가득 채웠던 그의 심벌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걸 느끼며 "퓨우-"하고 마지막 신음을 내뱉었다.
한때 부러질 것처럼 경직되었던 온몸이 풀리고 정신없이 몰아치던 열락의 꼬리가 보이자 수진은
그의 몸 위에서 내려와 옆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자 수많은 별들이 유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고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십리 달음질을 한 것 같이 숨이 목까지 차있고 온 삭신이 노골노골 했다.
이제 손끝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이때 옆에 누운 그가 자신의 연인이라면 늘 이렇게 그녀를 따뜻이 안아 줄텐데.. 하는 마음이
들자 눈물이 핑 돌았다.
병달은 그녀가 안아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이나 하려는지..
수진은 자신도 모르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끼며 잠 나라로 빠져 갔다.
간절하기에 그만큼 불안했던 설야의 축제..
다시는 해가 뜨지 않을 것 같은 북해의 백야를 슬퍼하면서..

-- 2부 끝 --

    -. Ddamddee의 허락 없이 타 BBS에 배포. 복사를 금합니다.

 

 

 

 


-작가님에게 정성어린 격려의 메일을 보냅시다-
-야설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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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ddamddee 글쓴 때 2000-01-14 오후 08: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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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리바이벌] Ddamddee秘談 제3화 원죄(原罪) -3부-
[애정/리바이벌] Ddamddee秘談 제3화 원죄(原罪) -3부-


이 글은 지난 8월 이곳에 공개했던 글입니다.
아직도 이 글을 못 읽으신 분들을 위해 다시 올립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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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原罪)  - 3부 : Ejaculation (방사) -
                                                  Written by Ddam-dd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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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불타는 설원

"누나 일어나! 일어나 봐 누나!"
수진은 몸을 흔드는 병달의 손길에 잠이 깼다.
밖은 훤히 밝아 있었다.
"아니 왜?"
하고 벌떡 일어나려다 깜짝 놀랐다.
어젯밤 벌거벗은 그대로 잠들었던 것이다.
그건 병달이도 마찬가지였다.
"누나 어찌 된 거야? 그리고 내 옷들은 모두 어디 갔어?"
아무 것도 모르는 양 다그치는 그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호호호! 도련님! 혹시 선녀 탕에 목욕 갔던 거 아니에요? 나무꾼! 선녀에게나 물어봐야죠?"
그러면서 이불로 앞을 가리며 일어나 앉는 수진의 모습에 심상찮았는지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
다.
"혹시 내가 실수라도..?"
"실수는 실수지! 옷에다 쉬를 했으니까.."
병달은 얼굴이 발개지며 고개를 내리 깔았다.
수진은 이불 속에서 옷을 하나하나 껴입으면서 계속 놀려댔다.
"그러나 걱정 마! 나밖에 안 봤으니까.. 호호호.."
옷을 다 입은 수진은 병달의 가슴을 쿡 치면서 또 한번 깔깔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병달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지난밤 수진에게서 엄마가 이혼 당했다는 소리와 아빠가 축제에 갔다가 봉미에게 첫눈에 반하는
모습을 봤다는 것까지 기억났다.
그 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
꿈속에서 엄마를 본 듯도 했다.
그러나 그건 그저께의 꿈과 마찬가지로 얼굴 화끈거리는 기억이었다.
기억을 더듬을수록 엄마와의 그 기억만이 생생해 질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수진이 그의 옷들을 들고 들어 왔다.
병달이 그걸 받아 이불 속에서 끙끙거리며 껴입는 모습을 본 수진은 또 한번 짓궂게 놀려댔다.
"얘! 어젯밤 이미 볼 거 못 볼 거 다 봤는데 뭘 그리 숨기니. 호호호..."
병달은 그가 옷에다 쉬를 했다는 말이 영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병달은 정색하며 물었다.
"진짜 내가 옷에다 쉬를 했단 말야?"
"그럼 내가 네 옷에다 쉬를 했겠니? 호호호.."
"그런데 혹시..?"
"혹시 뭐?"
"아냐 아무것도.."
"하하하 호호호.."
수진은 재밌다는 표정으로 깔깔대면서 부엌으로 나가 아침상을 준비했다.
그러나 병달은 도저히 궁금해서 못 견디겠던지 부엌을 향해 불쑥 내뱉었다.
"그런데.. 누나는 왜 벗고 있었니?"
"아 그거! 너 혼자 벗고 자면 미안할 거 같아서 나도 벗었지 뭐. 호호호.."
수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와 미치겠네 이거!"
화를 내는 건지 투정을 부리는 건지 모호한 음색으로 소리쳤다.
조금 후 수진이 밥상을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
"얘! 눈은 그쳤지만.. 너나 나나 출근하긴 틀린 것 같애!"

그들은 아침을 먹고 갑갑한 방을 뛰쳐나왔다.
온 천지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적어도 50센티 이상은 쌓인 듯 했다.
좁은 마당에 쌓인 눈만 해도 그들의 정강이까지 차 올라 왔다.
마당을 벗어나자 저 아래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이 윤곽만 구분될 뿐 완전히 눈에 덮여 있었다.
생각 같아선 이 위에서 구르면 단번에 저 아래까지 굴러 내려갈 것 같았다.
그 사이사이로 마치 잠망경처럼 불쑥불쑥 튀어 올라 있는 굴뚝들에서 실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
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날이면 이곳은 도심 속의 산간벽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경사진 도로는 바로 눈썰매장이라 차들은 끊기고, 무허가 판자촌에 전화가 있을 리 없으니 외부
와 철저히 고립되는 곳이었다.
"올해 첫눈인데 너무 많이 내린 것 같애!"
병달의 그 말에 무엇이 생각난 건지 수진은 그의 옷을 끌며 집 뒤쪽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이 비탈 마을에 더는 없을 듯한 공터가 있었는데 벌써 대여섯의 꼬마들이 나와 눈사람을
만드느라 신이 나 있었다.
병달과 수진도 마냥 어린 시절로 돌아가 큼지막한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눈을 굴려 몸통을 만들고 그 위에 머리를 올리고 나무 조각으로 눈을 만들고 코를 만들었다.
또 입도 만들고 귀까지 만들자 눈사람은 완성되었다.
그런데 수진은 뭔가 부족했던지 조그만 나무 조각 하나를 더 주워와서 몸통의 아래쪽에다 붙였
다.
"그건 뭔데...?  아! 배꼽이로구나.."
병달의 그 말에 수진은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이건 말이야.. 병달이란 도련님이 어젯밤 옷 속에다 쉬하던 그거란다! 호호호..."
수진을 배를 쥐고 깔깔대며 도망쳤다. 병달은 그녀를 잡으려 쫓아갔다.
그로부터 쫓고 쫓기는 눈싸움이 벌어졌다.
꼬마들도 그 모습이 재밌던지 그네들도 눈을 뭉쳐 던지며 뛰어 다녔다.
그들이 뛰어 다니는 등살에 예쁘게 만들어 세웠던 눈사람은 넘어지고 몸통은 몸통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굴러 다녔다.
정강이까지 파묻히는 눈 속을 마치 강아지처럼 뛰어 다닌다는 것은 그들을 금방 지치게 했다.
누가 먼저랄 거 없이 그들은 눈 위에 쓰러졌다.
병달은 서쪽을 향해 수진은 동쪽으로 머리를 하고서..
그들의 귀에는 러브스토리중의 경쾌한 '눈싸움' 경음악이 들려 왔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지났을까?
얼굴 위에 또다시 눈이 내리는 걸 느끼고 그들은 일어섰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둘 모두 눈과 땀으로 옷들이 몽땅 젖어 있었다.
병달이 따스한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자니 옷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수진은 부엌에서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들어와 그에게도 바꿔 입으라면서 그녀의 츄리닝을 던져
주었다.
발목이 쏙 나오는 것이 좀 작긴 했으나 젖은 옷에 비하면 한결 산뜻했다.
수진은 그의 옷들을 모두 들고 나가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자기의 놀림에 막무가내로 달아오르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호호호..."
그의 옷을 빨면서 바지 앞섶이 유난히도 반질(머시매들의 옷은 원래 그렇지만..)거리는 모습에
참았던 웃음이 또 한번 터졌다.
"히히- 아하하하.."
그러나 방안에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수진이 빨래를 모두 마치고 어제 밤처럼 부엌에다 길다랗게 늘어두고 방으로 들어 왔을 때 병달
은 두 팔을 베고 구들목에 발을 묻은 채 잠들어 있었다.
수진은 싸늘해진 손을 구들목으로 집어넣어 녹였다.
수진의 손에 대인 그의 발목은 매우 따스했다.
어젯밤의 일이 생각났다.
철모르고 잠든 그의 알몸뚱이를 껴안았던 기억을...
수진은 병달의 발목을 두 손으로 꼭 껴안았다.
'아 따스해..
너! 나의 영원한 구들목이 되어주면 안되겠니?
나? 그래, 난 무척 외로워.. 이제 더는 못 견딜 것 같애.. 너무 춥고 시려..
너가 필요해..'
자신도 모르게 수진의 손은 점점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손이 거의 허벅지에 다다랐을 때 수진은 깜짝 놀라 손을 거두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가녀린 손은 병달의 손아귀에 잡혔다.
어느새 깼는지..
"누나! 소원이라면 나를 가져!"
수진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에게 잡힌 손은 바들바들 떨렸다.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읽고 있는 서로 간이지만 이 무슨 창피란 말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불가사의한 상태에서 특히 병달은 전혀 무의식한 상태에서 가진 정사라
추억으로만 새겨질 일이었지만, 지금은 말짱한 맨 정신으로 '누나 누나' 하며 따르는 동생이 잠
든 틈을 이용해 금제의 선을 넘으려 했으니 다시 그의 얼굴을 어찌 마주 본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어색함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그와 맞부딪치는 것만이 유일하다는 걸 그녀도 알았
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병달은 수진의 손을 잡아다 그의 심벌 위에다 묶어 놓고
말했다.
"이제 누나가 날 안 가지면 내가 누나를 가질 거야!"
그러면서 수진의 입술을 그의 입술이 덮쳐왔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수진은 와락 그를 껴안으며 갈증의 몸부림을 쳤다.
"아~~"
수진의 입 속으로 그의 혀가 파고들어 한바탕 씨름판을 벌이다가 그녀의 혀를 통째로 꿰차고 나
갔다.
"아아~~"
병달의 손이 그녀의 브라우스를 벗겨내고 있었다.
그의 또 한 손은 수진의 손을 잡아 그의 츄리닝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가 수진의 브라우스와 브래지어까지 벗겨내자 그녀의 뽀얀 젖가슴이 불거져 나왔다.
그가 뭉실 드러난 수진의 젖가슴을 움켜쥐자 그녀도 격정의 몸짓으로 병달의 심벌을 와락 움켜
잡았다.
"아아아~~"
"오오오~~"
그 소리가 기폭제였던가..
둘은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서로의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둘은 이불로 모든 걸 가리기라도 할 듯이 그 속에서 서로의 몸을 탐닉해 나
갔다.
처음엔 서로의 얼굴과 가슴을 비벼대던 그들은 점차 밑으로 내려가 서로 상대방의 비원에 얼굴
을 묻고 있었다.
"아아~ 아아~ 아학~"
"오오~ 오오~ 흐흑~"
수진의 입 속을 가득 매운 이 강인한 살덩이는 어젯밤 그 귀여운 장난감이 아니었다.
쪼옥~ 쪽~ 쪼옥~
지난밤 앓는 듯 "엄마! 엄마!" 하며 뱉아대던 소리는 이미 거친 숨소리로 바뀌었다.
"아흑~ 아흑~"
수진의 속살 안으로 병달의 혀가 파고들면서 그의 까끌까끌한 턱수염이 예민한 그녀의 첨단을
콕콕 찔러댔다.
수진은 자신의 깊은 동굴 속에서 움찔움찔 음수가 뿜어져 나옴을 느꼈다.
그는 그걸 쉴새없이 퍼 마셨다.
"아아~ 이제.. 이제 나를 채워 줘.. 채워 줘.. 가득 채워 줘-!!"
그 말에 병달은 수진의 몸 위로 올라오면서 덮고 있던 이불을 벗겨 버렸다.
이제부터는 그녀의 몸매와 모든 표정과 가는 떨림까지도 모조리 감상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의 바딱 선 심벌이 수진의 음부 깊숙이 파고들자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아~~"
그건 결코 아파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지른 소리도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동굴 속으로 처음(?) 찾아드는 손님에 대한 경의의 소리랄까.. 감탄의 소
리랄까...
그러나 병달은 그녀가 아파서 내는 소리로 착각하고 순간적으로 몸을 후퇴시키며 그의 심벌을
뺐는데...
"아아~ 안돼! 다시 채워 줘--"
그녀 스스로 다리를 벌려 세우고 그의 엉덩이를 잡아당기면서 그의 심벌을 쭉 물고 들어갔다.
'쭉- 물고 들어갔다'
그의 느낌을 그 정도의 표현으로 적당할런지?
여하튼 봉미와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런 경험이었다.
"아아아~ 누나--"
"그래 내 사랑! 난 이미 오래 전부터 네 것이었으니 마음껏 가지렴.."
흑~흑~흑~~

치꺽~ 치꺽~ 치꺽~~
병달의 격렬한 몸놀림이 시작됐다.
정말 남들은 도저히 이해 못할.. 부부로써의 권리를 제대로 말 한번 못하며 언제나 굶주린 아랫
배의 노기를 홀로 해결하는 데에 익숙해왔던 그가 그간의 허기를 한꺼번에 만회하려는지 수진의
육신 속으로 무섭게 돌진해 왔다.
여기서 잠시 병달과 봉미와의 그간의 부부생활에 대해 한마디 서술하는 게 도움이 될듯하다.
앞에서 그들이 결혼하기까지의 일에 대해선 자세히 기술한 바 있으니 생략하고 결혼 후부터 서
술하면..
결혼 후 신혼여행시를 제외하고 병달과 봉미는 몸을 섞은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의아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봉미는 경수를 놓기 전에는 애가 떨어진다면서 병달을 거부했고 애를 놓고 난 후엔 배가 아프다
면서 거부했다.
어느 날은 병달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녀 앞에다 그의 바지를 까집으며 달려들자 그녀는
하는 수 없었던지 그녀의 손과 입으로 그의 노기를 잠재웠다.
그렇게라도 봉사한 것은 여태 서 너 번쯤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애가 나오기 두어 달 전쯤이었는데 그가 자꾸 치근되자 봉미는 '애가 이만큼
컸는데 꼭 애에게 아비의 그것을 보이고 싶냐'면서 그녀의 배를 까 보였다.
임신부들이 그렇듯 정말 그녀의 배는 남산만 한 게 정이 뚝 떨어졌다.
그래서 그의 방으로 건너가 손으로 욕정을 해결하고 그때부터 아예 그녀의 방에는 발길을 끊었
다.
애가 태어나고 한 달쯤 지나 이젠 좀 나아지려니 한번 접근했지만 전보다 더 매몰차게 나오는
통에 영영 정나미가 떨어지고 말았다.

병달의 허기 찬 데쉬 속에 수진 또한 그를 위하여 자신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바칠 것처럼 날
뛰었다.
"오! 마이 베이비! 오 마이 베이비~~"
"누나! 누나! 누나~ 아아아아~"
격렬했던 만큼 끝도 빨랐다.
그의 심벌은 풍선이 터질 때의 모습처럼 2배만큼은 부풀었다가 푸욱- 하고 터졌다.
순간 그의 육봉에선 뜨거운 용암을 바람에 담아 그녀의 천장을 향해 세차게 쏘아댔다.
그리고 곧 또 한번 그의 육봉이 경직되면서 용암이 터지고..
또 한번 터지고.. 또 한번.. 또..
"으으흑~~ 으흑~~ 흑~~ 흑흑흑..."
그와 동시에 그녀도 말미잘같이 동굴 속의 촉수들을 격하게 부풀렸다 수축시켰다를 반복하며 그
의 육봉에서 쏟아지는 용수를 흡수하려 안간힘을 썼다.
"아아아~~ 아아~~ 아~~ 아..아..아..."
아직도 여진은 계속 이어지고 그의 용수에 극치를 맛보며 파들파들 떨던 그녀의 동굴 안 촉수들
도 넘쳐흐르는 용출액에 이제 지친 듯 움직임이 점차 느려지고...
병달은 땀으로 범벅이 된 수진의 배 위에 푹 쓰러졌다.
수진은 땀투성이인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난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오랜 세월을 짝사랑해온 내 사랑이.. 비로써 내 속으로 자리
한 오늘을 결코 못 잊을 거야.. 이제 다시 너가 나를 떠난다해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무슨 말이야 누나! 난 비로써 참사랑을 찾은 것 같애.. 아니, 못된 요물로 인해 뺏겼던 것을
이제야 되찾은 것 같다고.. 난 누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이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아, 그 악마
의 성안으로는.."
"그건 안돼! 그건 안 된다고.. 왜냐하면.."
시들해 있던 그의 심벌이 어느새 되살아나 그녀의 음부 속을 다시 꼼지락 꼼지락 비벼대자 수진
은 다음 말을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누나! 더 이상 말하지마! 이제 사랑한다는 말 이외엔 아무 말도.."
하면서 병달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또 한바탕의 설원이 뜨겁게 불타기 시작했다.
좁은 방안을 몇 바퀴 뒹굴며 엎치락뒤치락 수진이 위에 올랐다 병달이 위에 올랐다를 거듭하다
가 병달을 깔고 올라선 수진이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 실은 널 잃고 싶진 않아! 하지만.. 하지만.."
수진은 허리를 병 모가지처럼 빼 올리며 맷돌처럼 엉덩이를 돌려댔다.
"난 누나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들리지 않아.. 날.. 날 사랑한다는 말밖에 안 들린다고.."
이제는 병달이 그녀를 깔고 올라서며 말했다.
"자! 말해봐! 이제 말해 보라구! 날 사랑한다고.. 날 미칠 듯이 사랑한다고.."
병달은 질퍽질퍽 나는 소리를 들으며 더욱 피치를 올렸다.
퍽~ 퍽~ 퍽~ 퍽퍽퍽퍽~~~
"아아~ 사랑해~ 사랑해 널~ 아아아아~~ 널 미칠 듯이 사랑해~~~"
"자! 이제 내가 누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직접 만져봐! 내 사랑이 얼마나 뜨겁게 누날 원하는지
를 손으로 직접 느껴봐.."
수진의 손은 그의 손에 이끌려 속살이 서로 맞대어 있는 아랫도리를 더듬었다.
손끝으로 자신의 음부 속을 거칠게 들락대는 그의 육봉을 느껴졌다.
"아아~ 느껴져! 너의 사랑이.."
그녀의 손이 좀더 아래로 내려가 그의 육봉이 내려꽂힐 적마다 그녀의 회음부를 털썩털썩 때려
대는 그의 음낭을 움켜잡았다.
"아아아~ 잡았어! 내 사랑을.."
"그래 그거야! 그 모두는 누나 거야! 이제 모든 건 누나에게 줄 거야..  남김없이 줄 거야..
흑~흑~흑~~"
"아아~ 고마워.. 아아학~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흑~ 흑~ 흑~~ 자! 이제 날 느껴봐~~ 흑~ 흑~ 흑~ 나를~ 느껴 줘~~ 흑흑~~ 뜨겁게~ 느껴 줘~~
흑~ 흑~ 흑~ 흑~~ 뜨~겁~게~~ 흑흑흑흑~~~~"
병달은 또다시 용암을 쏴대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줄기가 그녀의 벽을 때리자 수진도 사지를 비
틀면서 음수를 뿜어냈다.
"아아~~ 자기 멋져! 아아아~~ 멋져~ 너무~ 멋져~~"
아까보다 더 강열한 그의 분출에 수진은 황홀한 열락의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병달은 마라톤의 최종점을 막 도착한 사람처럼 목까지 차 오르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그녀의 몸
에서 굴러 옆으로 푹 쓰러졌다.

 

(22) 엄마라는 환상

수진은 뜨거운 막대기가 막 빠져나간 동굴 속으로 휙 하고 차가운 바람이 쓰며 들었지만 아직도
그녀의 음부는 팽창과 수축을 거듭하면서 환희의 여운이 계속 이어졌다.
"누나! 이제 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애?"
병달이 그녀를 살짝 껴안으면서 물었다.
수진은 대답대신 그의 입술에다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그 입술을 그대로 가지고 내려가 육봉
주위를 말끔히 핥았다.
이제 분출은 멈췄으나 비릿한 그의 정액과 자신의 음수가 육봉 아래 솔밭에까지 범벅이 되어 있
었다.
그녀의 혀가 솔밭을 이리저리 누비다 음낭에 이르자 병달은 전날의 꿈을 상기했다.
그 감촉이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아아~ 엄마아~~"
실같이 가는 그의 독백이었다.
그녀가 그런 그의 독백을 들은 걸까?
수진은 다소곳이 병달 옆에 누우면서 그를 꼭 껴안았다.
"내가 널 첨 보던 날 내가 한 말 기억 하니?"
병달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그때 난 너에게 니 엄마를 대신 하겠다 했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니 엄마를 대신한 누
이가 되 마고 했지.."
수진은 잠자코 그녀의 품에 안겨 자신의 얘기를 듣고 있는 그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계속했다.
"그런데 사실 그때 나는 네 누이 역과 엄마 역을 모두 하고 싶었어. 아니, -역이 아니라 바로
너의 누이와 엄마가 되고 싶었어. 그중 하나를 택하라면 너의 엄마가 더욱 되고 싶었던 거야.
실제로 말이야.."
눈을 감고 잠자코 듣고만 있는 그가 못마땅했는지..
"실제로 내가 너의 엄마가 되고 싶었다 하는데 왜 넌 가만 듣고만 있니? 뭐라 묻거나 따져봐?"
병달은 눈을 뜨고 그녀의 눈을 멀뚱히 쳐다봤다.
"이 말은 네게 뭔가 속죄하려고 하는 말은 분명히 아냐. 처음엔 네게 죄짓는다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점차 너와 친해지고 내 마음속에 너라는 존재가 연정의 대상으로 속앓이를 하게
되면서부터 그 마음은 점차 사라지게 된 거야.."
병달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종잡히지 않아 그녀의 입을 멍청이 쳐다보며 그의 팔에 닿
아 있는 수진의 젖가슴을 실실 문질렀다.
"난 내게 고백할 게 하나 있어!"
그 말에 그는 바짝 긴장하며 그녀의 눈을 올려다봤다.
"사실 난 네게 내 처녀를 못 바쳤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말하지마! 오히려 유부남인 내가 더 미안하지 뭐! 우리에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
병달은 이제 수진의 젖꼭지를 손에 쥐고 살살 조물락댔다.
"고마워! 하지만 이 얘긴 해야겠어! 그래야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질 거 같
애.."
그 말은 갑자기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을 멈추게 했다.
"사실 난.. 나는.. 니네 아빠에게 내 처녀를 뺏겼어.."
병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럴 수가.......?"
어안이 벙벙해지며 저절로 부드득 이가 갈렸다.
"비서실에 간지 1주일도 안 된 어느 날이었어.
출장 나갔던 니네 아빠가 곧 들어온다면서 할 일이 많으니 좀 늦더라도 남아있으랬어.
그로부터 1시간 여 후 회사엔 모두 퇴근하고 나만 혼자 남은 그 곳에 그는 나타났어.
어디서 마신 건지 술도 약간 취해 있었어. 그는 내게 한 뭉치의 서류를 던져 줬어. 계약서류였
는데 그건 다음날 아침 회계부와 설계부로 넘겨야 할 것이라 하기에 아래층에 내려가 복사를 하
여 들고 올라 왔지.
그런데 내 자리가 있는 비서실에 불이 꺼져 있어서 섬뜩한 기분이 들었으나 스위치를 다시 올리
고 들어서는데 안에서 "미스최!"하고 날 부르는 거였어.
당시 나는 총무부에서 올라 온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사장님'의 말소리만 들려도 부동자세를
취할 정도로 얼어 있던 시기였어.
내가 사장실로 들어가자 그 서류를 가져오라고 해서는 그걸 책상 위에 쭉 펴는 거였어. 그리곤
그 중에서 원본은 원본대로 복사본은 복사본 대로 챙기라는 거야. 내일 해도 될 인인데도 말이
야.........."
병달은 처음 그녀가 그의 아빠에게 처녀성을 뺏겼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치밀
어 오르는 울분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던 것이 그녀의 소상한 자초지경을 경청하면서 남의 일
인 양 점차 호기심만 커져 가는 것에 놀랐다.
"누나 그래서?"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지. 감히 누구의 명령인데..
두려움과 조급함으로 서류의 순서가 뒤죽박죽 막 엉키는 거야.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가 혀를 찌찌 차면서 다가오더니 순서를 바로 한답시고 내 손을 성큼
잡는 거야.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차마 손을 뿌리치진 못했어. 너무 겁이 나서......"
그녀의 젖꼭지를 만지던 병달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계곡에 이르자 수진은 그 손을
제지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는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뜻이리라..
"그는 꼼짝 못하는 나를 그대로 바닥에 쓰러뜨렸어.
난 카페트 바닥에 쿵하고 엉덩이를 찧고야 정신을 차렸지만 내 서커트는 올라가고 팬티는 그의
손에 단번에 찢겨져 나갔어.
난 그를 밀치며 소리를 지르고 반항했지만 어찌 굶주린 야수를 당하겠니?
내 다리가 벌어지고.. 그의 더러운 손이 들어오고..
죽자 사자 발버둥쳤으나 그럴수록 그의 욕정만 키우고 그에게 재미만 더하게 한 결과가 됐지.
순식간에 내 속살을 뭉개며 들어온 그는 내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에 위 브라우스마저 벗겨
내고 브레지어도 찢어 버렸어.
나는 이제 한 올 방어물조차 안 남은 현실에 망연자실하며 차가운 바닥에 누워 그가 끄집는 대
로 끄집겨 다녔어.
정말 끔직한 순간이었어. 하아-----!!"
수진은 긴 한숨을 내 쉬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조금 후 심호흡을 한번 들이킨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실컷 허기를 채운 맹수처럼 내 몸에서 일어선 그는 내게 보란 듯이 그 추잡한 살덩이를 툭툭
털어 내며 말했지.
-넌 정말 좋은 몸을 가졌어! 내 아내의 자리를 준다면 그걸 영원히 내게 맡길 수 있겠니?-
정말 추잡한 흥정이었어.
난 욕 한마디 못한 채 눈물만 펑펑 쏟으며 엉금엉금 밖으로 기어 나왔어. 찢어진 옷가지들을 줏
으며 말이다...."
수진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녀의 고백은 진실하다.. 그녀의 고백은 거룩하다.. 진실은 거룩한 거니까'
병달이는 그렇게 되내이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잔뜩 부풀어올라 벌떡벌떡 춤을 추는 그의
살덩이가 혹시나 그녀의 몸에 대일라 엉덩이를 뒤로 뺐다.
"난 그때 말이다.. 내 찢겨진 몸도 거둬 갖고 나온 줄 알았어.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천박한 주둥이가 핥아대던 가슴과 더럽게 도륙 당한 아랫도리를
박박 문질렀어.
그의 더러운 냄새와 흔적을 모두 벗겨내기 위하여..
그런데 그로부터 1주일 여 후,
내가 그 자식 앞에서 미소를 흘리며 깔깔대고 있다는 데에 깜짝 놀랐어.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어.
........................!
내일이라도 당장 상을 치룰 것 같았던 네 엄마는 1년을 넘기고 2년을 넘기고..
내 마음속에 저주라는 귀신이 들어와 있다는 걸 느끼는데 3년이나 걸렸어.
너와 점점 친해지면서 내 마음속에 엉뚱한 정이 싹트고 있었어.
난 그게 너에 대한 연민이라고만 생각했어.
그러나 그건 점점 농도가 짙어져 연정의 속앓이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내가 얼마나 무모한 환상
에 젖어 있었던가를 느끼기 시작했어.
얼마 후 봉미가 내 자리를 대신하면서부터 더욱 확연해졌어.
그게 얼마나 저주스런 환상이었고 내 머리에 맞지 않는 화관이었다는 걸..
그러나 그것도 잠시.., 봉미는 내 허황된 환상만이 가져간 게 아니라 내 사랑 너까지도 가로채
가버린 거였어!"
수진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드디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 내렸다.
병달은 손으로 그걸 닦아주었다.
속절없이 그토록 벌떡대던 살덩이도 잠잠해져 있었다.
수진은 글썽이는 눈으로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가 오늘 자기에게 고백하는 것은..
내가 네 아빠께 순결을 잃었다는 게 아니라.. 그의 더러운 흥정에 유혹되어 너의 엄마가 되리라
는 환상에 젖어 너를 기만한 거란다.
그리고 그런 흥정이 봉미와도 이루어졌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야.
그 증거가 어젯밤 네게 얘기했던 그 사실들로 입증되잖아"

 

(23) 공명심에 불타는 여자

점차 진지해져 가는 표정에다 비장한 살기 같은 것까지 느껴지는 수진의 얼굴 모습에 숙연해졌
던 병달이는 '어젯밤.. 그 사실'이란 말에 의아해 했다.
"어젯밤.. 그 사실이라니?"
"네 아들 경수 얘기 말이다"
그러나 병달은 영 기억나지 않았다.
"경수가 왜 어째서..?"
"넌 그 얘기 듣고 분해서 엉엉 울었잖아. 너네 아빠와 경수의 유전자 조직이 일치한다는 거 말
야"
"조부손자간이니까 그럴 수 있지 뭐.."
"참 답답하네 그래! 그런 줄 몰라서 니네 아빠가 유전자 감식을 '과학기술연구소'에까지 의뢰했
겠니?"
"과학기술연구소..?"
병달은 점점 미스테리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좀 전에 얘기해 줬듯이 너네 아빠와 봉미간에도 분명히 흥정이 있었을 거야. 서둘러 니네들을
결혼시킨 것도 그렇고 6개월만에 애가 태어난 것도 그렇고.."
"그야 내가 좀 오바했으니 그렇지. 3개월 정도.. 9개월만에 애가 나오는 건 흔히 있는 일이라면
서..?"
"그야 그렇지만 일부러 유전자 감식까지 의뢰한 것은 뭔가 흑막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아?"
"그건 그래.."
돌이켜 보면 봉미에 대한 미스테리는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아빠의 능력과 힘이라면 꼭 그가 결혼까지 갔어야 했던가부터, 그 가당찮은 결혼에 이르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던 임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던지 조차 기억할 수 없는 것도 그렇고, 그후의 부부
생활도 미심쩍은 구석이 한 두 곳이 아니었다.
'흥정..? 그리고 흑막..?
그런 모든 미스테리가 가증스럽게도 시아버지와 며느리란 탈을 쓴 꾸며진 가극이었다니? 허허
허..'
그러나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난 정말 불행스럽게도 봉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어. 이런 걸 보면 난 나 스스로에 대하여
너무 무책임한 놈인 것 같애. 내가 봐도 내가 불쌍해. 연민이 느껴져..."
"너무 자학하지마! 널 그렇게 만든 건 네 아빠야! 내가 봐도 기이한 악연이야! 언젠가는 그 악
연을 끊어야 할 때가 올 것이야. 서서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거야"
이미 수진은 병달의 미래에 대하여 뭔가 천기를 읽고나 있는 건지, 또 그런 능력이라도 지닌 듯
이 병달의 손을 꼭 쥐고 그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넌 아직 젊고 승부는 이제부터야. 넌 아무 능력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내가 보기
엔 너만이 모든 능력을 가졌어. 젊음이 그중 하나이고 여태 그들의 전횡에도 말 한마디 없이 참
아 왔다는 것이 또 하나야.
넌 맨손이라 여기는 손안에 손잡이가 쥐어져 있고, 모든 걸 다 쥐고 있다고 여기는 그들의 손안
엔 칼날이 쥐어져 있는 거야
앞으로 두고 봐. 너와 내가 제3자인 구경꾼의 입장으로 돌아간다 해도 재밌을 거야. 이미 연극
은 중반으로 접어들었으니 이제 서서히 하나씩 튀어나올 테니까..
그들 일당은 간악한 죄상을 감추려 또 다른 죄를 모의할 것이고, 그러다 서로간의 이해를 다투
다 돌발적인 볼거리가 터질 테니까..
그리고 너가 조심해야 할 것은 대의를 위해선 작은 일은 덮어두고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작은
것에 연연하여 일을 망칠 수가 있거던. 되도록 모든 베일이 벗겨질 때까지 그 일당들이 눈치채
게 해선 안 될 거야..."
"누나는 어제부터 '일당''일당' 하면서 그 수괴를 아빠로 지명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아빠가 누
나에게 아까 그 얘기 이외에도 또 어떤 죄를 지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당사자니까 어쩔 수
없다해도 누나는 얼마든지 조용히 비켜갈 수도 있는 일이잖아.
굳이 나서서 공명심을 불태울 이유가 뭐 있어?
그리고 아빠 '김유성' 그렇게 쉽게 볼 사람 아니란 걸 잘 알면서도 어느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
렇게 호언장담하는지 궁금해?"
"그래 잘 봤어.
난 원래 위험한 공명심에 불타는 여자야!
너의 이것만 달아 줬어도 벌써 이름난 법관이 되어 '정의의 용사 다간'처럼 악한들을 모두 쳐
부셨을 거야!"
그러면서 수진은 병달의 심벌을 툭 건드리며 일어섰다.

그들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을 때 눈은 거쳐 있었고 화사한 햇볕이 눈을 녹이며 온 천지
를 찬연하게 빛나게 하고 있었다.
수진과 병달은 집 앞 길 난간에 나란히 서서 저 아래 꼭대기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는 지붕
들을 내려다보았다.
바닷가 양식장의 말목처럼 우뚝우뚝 솟은 굴뚝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실연기는 이제 강열한
햇볕에 묻힌 듯 보이지 않았다.
저만치 까마득한 아래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도로에는 차들이 엉금엉금 기어가는 모습이 보이고
눈 덮인 보도에도 행인들이 하나 둘 나타나고 있었다.
한때 백색 고요를 가져 왔던 대지는 서서히 일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병달의 마음은 수진의 얘기들로 하여 못내 무거웠지만 몸은 이 대지들처럼 새로운 희망의 빛을
받으며 생기를 얻고 있었다.
그 빛을 주는 것이 수진이라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수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수진도 그의 새로운 행동에 가만히 있었다.
이때껏 장난이외에는 어깨는 물론 손도 한번 안 잡은 병달이었다.
그런데 이제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는 걸 보면 오랜 누나와 의 동생이라는 관계가
파기되는 시점인 듯하여 기뻤다.
수진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병달은 눈을 찡긋하며 싱긋이 웃었다.
그때 씽하고 바람이 불어 왔다.
산에서 내려오는 눈바람이 살을 에었다.
비수처럼 싸늘한 찬 기운이 속으로 파고들었다.
둘 다 겉옷만 걸치고 나왔으므로 그건 내장까지 파고드는 듯 느껴졌다.
병달의 한쪽 손을 꼭 쥐고 있던 수진은 그 찬바람에 못 견디겠다는 듯이 은근히 손을 끌며 방으
로 되돌아 왔다.

부엌으로 들어서면서 병달이 그녀의 입술을 찾자 수진은 그의 목에 매달리며 다급한 몸부림을
쳤다.
그가 그러는 그녀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수진은 선 채로 병달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웃옷이 벗겨지자 수진은 털이 듬성듬성 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닥치는 대로 핥았다.
그리고 손을 밑으로 내려 허겁지겁 바지도 벗겼다.
쭈르르 바지가 흘러내리고 성난 버섯이 퉁겨 나오자 얼굴을 옮겨와선 그걸 단번에 베어 물었다.
병달은 저쪽 거울 속으로 벌거숭이가 된 채 우뚝 서 있는 자신과 그 앞에 엉거주춤 무릎을 꿇은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 더욱 흥분이 되었다.
병달은 그녀를 잠시 멈추게 하고 그녀의 옷을 벗겼다.
겉옷밖에 안 입었으므로 쉽게 알몸이 드러났다.
밑에 바지가 잘 안 내려가자 이미 달뜬 얼굴이 된 수진이 황급히 그걸 벗겨 냈다.
병달은 자신의 심벌을 빨고 있는 그녀를 거울 속으로 보고 싶었으므로 자신의 위치를 조금 돌려
선 뒤 빨다만 심벌을 내 밀었다.
그가 거울 속으로 보고 있음을 눈치챈 수진은 더욱 흥분되어 그걸 게걸스럽게 빨아댔다.
병달은 거울이 그토록 자극적인 소도구가 되리라곤 일찍이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불과 한 시간 여 앞에 그들은 이미 질펀한 정사를 치렀음에도 오뉴월 생 장작이 타듯 무섭게 타
오르고 있었다.
병달은 그녀를 거울을 마주보며 쭈그려 엎드리게 하고 그 뒤에 앉아 그녀의 등에서부터 핥아 내
려갔다.
히프를 빙글빙글 돌던 혀끝이 항문과 회음부에 다다르자 수진은 몸을 마구 비틀어댔다.
"아아~~ 아아아~~~"
그녀의 다리 밑으로 얼굴을 쑤셔 박으며 음순의 날개를 이빨로 씹어대다가 질 속으로 혀를 디밀
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아아~ 아아~ 엄마아~~~ "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달아 오른 그녀를 거울 앞으로 끌고 가 거울을 짚고 서게 한 뒤
뒤에서 박아 넣기 시작했다.
"자 누나! 이제 들어간다고.. 뜨거운 나를 느껴봐!"
"응응~ 그래~ 느껴져! 더 깊게 박아 줘..."
벌린 입을 다물 줄 모르며 헐떡여대는 그녀를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며, 또한 가쁜 숨을 몰아쉬
며 그녀의 엉덩이가 부셔져라 박아대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쳐다보면서 열락의 장작에 계속하여
기름을 부었다.
하지만 아침에 이미 두 번이나 독을 비운 탓인지 좀처럼 끝이 다가오지 않았다.
수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손에다, 입에다, 아니 화끈거리는 아궁이 속에다 마지막 화염을 토하며 동시에 그녀도
뜨거운 종착점을 맞이하게 해줄 듯 하다가 멈추곤 했다.
그런 그의 행위는 좀 아쉽기는 했지만 감질나는 열락을 지속적으로 이어지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녀에게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그런 행위가 반복되자 이상히 여긴 수진이 고개를 들어 거울 속을 보자 병달은 땀을 뻘뻘 흘리
며 독기 서린 얼굴로 그녀의 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아냐 조금 늦어질 뿐이야! 괜찮아 흑~ 흑~ 흑~~"
그가 다시 피치를 가했지만 그 간단한 대화로 둘 다 몸이 식고 말았다.

안 되겠다 여긴 수진이 먼저 몸을 뺐다.
"아니! 누나 왜 그래?"
수진은 깔린 이불을 들치고 안으로 파고들어 가서는 그도 안으로 들어 오라 시늉하며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오늘만 날이니? 넌 그렇게 못 참으면서 봉미와는 여태 어떻게 참았어?"
"그 얘긴 하지마! 적어도 우리 둘만 있을 때는..."
병달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그 속으로 몸을 넣으며 한마디 더 던졌다.
"누나는 내가 아빠와의 잠자리가 어땠냐고 물으면 좋겠어?"
"미안해! 그냥 해본 소리였어.
하지만 나는 니가 원하면 니네 아빠와의 이야기도 해줄 수가 있어. 다만 받아들이는 네가 기분
나쁘게 생각지만 않는다면..."
병달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진은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와는 다른 면이 분명 있었다.
어쩜 그건 영화에서 가끔씩 나오는 부부로 위장한 스파이들이 벌이는 계획된 정사 같은 그런 것
이라고나 할까...
꼭 그렇다고 꼬집을 수는 없지만 그런 비슷한 냄새가 나는 건 분명했다.
그녀에 대해서라면 다 알고 있다고 여겼던 자신이 갑자기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냐고 반문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아는 게 무엇인가 더듬을수록 그녀를 가린 베일만 짙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점차 전혀 모르는 남인 듯한 감정으로 변해갔다.
갑자기 무서워 졌다.
누굴까?
무엇을 바라고 내게 접근해온 걸까?
정신이 혼란해졌다.
그때 그녀의 손이 그의 심벌을 쥐었으므로 그녀를 쳐다봤다.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악마의 얼굴이었다.
"기껏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벌써 이렇게 시들어 버렸네..."
'기껏 다른 방법'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 말에 정말 화난 모양이구나! 다시는 그런 말 않을 테니까 용서 해 주이...?"
하면서 그녀가 병달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왔으므로 팔로 안았다.
"누나! 우리 너무 무리하며 관계를 이끌어 가는 것 아닐까?"
좀 전 떠올린 생각들이 반영된 말이었다.
"아냐! 이제 시작인데 뭐! 아침에도 말했지만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아! 그 일들을 하자면
사소한 감정 따위는 버릴 줄도 알아야지..."
그녀의 그 말에 그는 더 섬뜩함을 느꼈다.
뭔가 모를 적개심에 이를 갈며 그를 위한 공명심에 몸을 던지는 여자!
이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24) 적개심에 불붙이는 나약한 남자

병달이 수진의 방에서 물러 나왔을 때에는 오후 서 너 시가 넘어서였다.
그가 방을 나서기 전 또 한번 벌인 정사에서 이번에는 만족한 서로를 확인하고 다소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눈은 많이 녹았으나 길은 여전히 미끄러워 비탈진 골목길을 내려오는 것이 그리 쉬운 건 아니었
다.
몇 번을 엉덩방아를 찧으며 버스 정류장까지 내려오긴 했으나 버스는 길이 미끄러워 아직 못 다
닌다고 했다.
30여명은 족히 넘을 듯한 택시 기다리는 줄에 그도 꽁무니에 붙었다.
4∼50분 기다린 끝에 그는 겨우 택시에 올랐다.
"어디로 모실까요 손님?"
기사는 줄지어선 손님들에 즐거운 모양이었다.
"상문동요!"
택시는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대면서도 곧잘 달렸다.
시내로 들어오자 길은 많이 녹아 있었다.
차창 밖으로 눈을 뒤집어 쓴 가로수들이 팽팽 스치며 그를 지나쳐갔다.
아직도 그의 하복부에 감각이 남아 있는 듯한 그녀와의 스패셜 게임에 대하여 떠 올렸다.
그녀가 차려온 점심을 먹고 상을 내치자마자 달려드는 그녀의 요구에 좀 전 떨떠름한 중도하차
를 만회하려 연장을 거대하게 세우고 정면으로 들어섰다.
수진은 필요 이상으로 다리를 치켜들고 그를 맞이하더니 몇 번 쥐어박기도 전에 손으로 그의 것
을 잡아 빼고는 뒤쪽 아궁이에다 그 끝을 맞추는 것이었다.
그것이 흔히 친구들이 말하던 '뒤치기' 또는 '아날'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조금 전 그녀가 말하던 '기껏 생각해낸 다른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처음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일단 들어가자 앞쪽 아궁이보다는 죄는 맛이 강한 것이 훨씬 자극적
이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정말 좀 전의 찝찔한 중도하차를 단번에 만회하는 놀라운 희열을 서로 맛보았다.
그때의 땀과 감각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듯한 하복부를 은근히 움켜쥐며 밖을 쳐다보았다.
가로수에서 채 떨어지지 못한 낙엽이 눈옷을 반쯤 덮어쓰곤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돌아오는 패잔병에게 흔드는 위로의 손짓인지, 승자에게 보내는 갈채의 손짓인지....?

집 앞이 가까워오자 병달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돌연한 외박으로 인한 것이겠지만 공연히 집이 싫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언젠가는 마주쳐야 할 이들, 아니 모든 게 밝혀지기까지는 당연히 부대껴야 할 이들이건만, 그
리고 언젠가는 따져봐야 할 일들이 그의 마음속에 산적해 있건만....
"아저씨 미안하지만 이대로 일신병원으로 가 주실래요!"
언뜻 생각해낸 것이 엄마가 누워 있는 병원을 은신처로 떠올린 것이었다.
그곳이라면 모두가 납득할만한 충분한 은신처임이 분명했다.
병원 도착할 때까지 병달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들어가고 싶지 않은 집구석에 안 들어가게 된 것이 다행스럽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의 엄마가 누워 있는 병원에 도착하자 병달의 눈에는 눈물부터 맺혔다.
병실을 향해 계단을 오르면서 줄줄이 떨어지는 눈물을 그는 막을 수가 없었다.
병실에 들어서면서 그 눈물은 끝내 오열로 바뀌었다.
"으흐흐흑 엄마! 이 못난 자식이 왔어요! 으흐흐흑..."
병달은 눈만 껌벅이며 송장처럼 누워 있는 엄마의 손을 부여잡으며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으흐흐흑 어머니! 오늘은 하늘이 쪼개지는 소식을 들고 왔어요!"
차마 그 말은 성큼 못 읊조리겠는지 가슴을 뜯으며 울고만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으흐흐흑.. 이 못난 자식의 입으로 이런 말을 전하는 저를 용서하세요!
으흐흐흑.. 글쎄 엄마가 이제 아빠의 아내가 아니랍니다. 벌써 1년 전에 이미 그 자격을 박탈해
갔데요! 아빠가 우리 집 호적에서 파내었데요! 으흐흐흑...
자식인 내가 그 사실을 여태 모르고 있었다니..
엄마의 그 자리를 어느 년에게 주려는지? 이건 분명 엄청난 음모가 숨어 있는 것 같아요! 아빠
가 저주받을 음모를 꾸민 것 같아요. 이 자리에서 엄마께 맹세할게요! 반드시 이 아들이 그 음
모를 파헤칠 거예요! "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엄마! 저번에 제 자식이라고 안고 와서 보여 드렸던 경수가 제 자식이 아니라 김유성!
그 놈 자식이래요! 으흐흐흑...
어찌 하늘 아래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요? 그 놈은 이제 제 아비가 아니라 원수라고요!
두고 보라고요 모조리 갚고야 말 테니..."
그러나 그의 엄마는 듣고 있는 건지 못 듣는 건지 눈만 껌벅껌벅 할뿐 아무런 행동도 말도 없었
다.
언제나 이곳에만 오면 느끼는 일이지만 그 답답함이 더욱 울분을 솟구치게 했다.
그는 두 주먹으로 바닥을 쥐어박다가 지쳐 창가로 가 밖을 내다 봤다.
목화밭 같은 설경 속에서 사물들이 제 모습을 찾아가는 속에 어둠이 다가서고 있었다.
그 어둠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정녕 누구를 위한 안식인지? 그저 여유로운 시골 풍경처럼 한가
롭기만 했다.
아직도 할 말이 남은 건지 그는 다시 침상으로 다가서며 이번에는 침상 위에 걸터앉아 엄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엄마! 또 하나 엄마께 말씀 드릴 게 있어요!
저는 이제 그 충격적인 소식들을 내게 알려준 한 여자와 함께 하고자합니다. 내가 평소 누나라
고 따르던 여자이기도 해요. 나는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답니다. 그녀도 이미 날 사랑하고요.
조금 전 그녀와 같이 있다가 오는 길이에요. 엄마께도 곧 보여 드릴게요! 약속해요..."
잠시 숨을 모아 쉬었다.
"우리는 앞으로 많은 일들을 함께 할 것 같습니다. 엄마의 한도 풀고 제 가슴속의 응어리도 풀
어낼 거예요. 반드시...
기필코, 빠짐없이, 모조리 파헤칠 테니까 그때까지 살아만 계셔 주세요. 그날이 오면 제가 엄마
를 집에서 편안히 모실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으세요.
이말 알아들으신다면 이 자식을 위해 단 한마디의 말이라도 하여 주세요!"

병원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좀은 무게를 덜은 듯 했으나 편안한 걸음걸이는 아니었다.
어둠이 깔리면서 낮에 녹았던 눈들이 모두 얼음판으로 바뀌어 길거리는 몹시 미끄러웠다.
낮에 잠잠하던 바람도 날이 기울자 득세하여 웅크린 사물들이 몹시 재밌기라도 하다는 듯이 사
람이며 가로수며 닥치는 대로 할퀴며 지나갔다.
그런 길을 그는 정처 없이 걸었다.
방금 전 그의 엄마 앞에서 맹세한 다짐이 무색할 만큼 축 처진 어깨와 웅크린 마음을 부여안고
서 걷고 있었다.
그 맹세들이 모두 부질없는 적개심이요 타오르지 못할 불꽃이어서 타다만 장작처럼 연기만 피우
다 사그라질 운명일지는 그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그의 걸음걸이와 풀려있는 손아귀에도
새파랗게 질려있는 입술 속에서도 그 맹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눈바람이 비수처럼 눈을 찌르자 그는 한 움큼의 눈물을 쏟아 냈다.
그것이 신호였다.
엄마 앞에서 죄다 비운 줄 알았던 눈물이 또다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닭똥 같은 눈물이 발 아래에 떨어지며 그의 발길을 막아섰다.
그 눈물이 불붙는 맹세로 다짐하던 그의 앞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를 나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걸음걸이로 터덜터덜 가로등이 꺼져 캄캄한 어둠으로 변한 도로로 접어드는데 저 앞에서
안개처럼 자욱한 어둠을 가르며 번쩍이는 빛을 하고서 한 대의 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밤길에 애 찾는 어미의 발걸음처럼 허겁지겁 다가서고 있었다.
헤드라이트의 빛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으나 그 차는 정열적인 빨간 색이었다.
그리고 운전석엔 역시 빨간 옷을 걸친 한 여자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를 발견했는지 그 앞에서 끼익! 하고 멈춰 섰다.
차창이 내려가고 그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수진이었다.
그는 너무나 반가워 안길 듯이 달려갔다.
"누나! 너무 무서웠어! 누나가 없인 난 못살아! 누나 없이는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별 미친놈을 다 보네! 퇴퇴퇴..."
그녀는 창을 올리고 휑하니 떠나가 버렸다.
환상이었다.
병달은 사라지는 환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누나 떠나지 마! 정말 누나 없이는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애! 누나 없이는 아무런 것
도 이루지 못 할 거 같애! 제발 가지마 누나! 제발.. 으흐흐흑..."
그는 허공을 보고 손을 내 저었다.

 

(25) 돌아온 적진

집으로 돌아온 그는 몹시 지쳐 있었다.
흐느적대며 거실로 들어서자 봉미가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술도 안 마신 것 같은데 어디서 이렇게 초죽음이 되었어요?"
저쪽 소파에 앉아 있던 김사장이 "으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래 어젯밤엔 학교가 춥지 않던가요? 눈까지 내렸는데..."
병달은 그녀의 연극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으나 애써 참으며 2층으로 올라 왔다.
"그래도 아버님께는 인사하고 올라 왔어야지..."
졸졸 뒤따라 온 봉미의 핀잔 섞인 말이었다.
"좀 내버려두쇼!"
봉미는 침대에 걸터앉은 그의 양말을 벗겨내며 또 한마디 던졌다.
"병달씨! 그래도 되는 거예요? 자기가 직접 말하면 내가 뭐랄까 봐 그래요? 언니더러 전화를 하
게 하고.. 내가 그렇게 옹졸해 보여요? 병달씨가 정말 그럴 줄 몰랐어요..."
병달은 그녀의 배때기를 콱 차버리고 싶었으나 참았다.
큰일을 위해서라면 작은 건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수진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까지도 내내 그곳에 있었어요?"
"아니! 병원 갔었어"
병달의 퉁명스런 대답에 봉미는 별나게도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눈도 오고 몹시 추우실 텐데 내일 어머님께 담뇨라도 갖다 드려야겠
네..."
"관둬! 내일 내가 갖다 줄 테니까..."
그때 문밖으로 경수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으므로 봉미는 그의 양말을 들고 나가 버렸다.
"어휴! 저년을 어떻게 때려죽이나...."

저녁을 차려 놨다는 봉미의 말에 마지못해 밑으로 내려오자 김사장의 품에 안긴 경수가 깔깔대
고 있었다.
수진의 말을 들은 뒤라 그런지 그 둘의 모습은 정말 판박이 같았다.
'저런 우라질 놈들!'
그런 심정에 밥이 제대로 넘어 갈 리가 없었다.
밥상은 유별나게 화려하여 그가 평소 좋아하던 생선회에다가 가자미가 들어간 미역국, 소고기
찜에다 갖가지가 차려 있었으나 뒤적뒤적 몇 술 들다 말고 자리를 박차고 올라와 버렸다.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김사장이 내 갈겼다.
"저런 빌어먹을 놈의 자식! 이제 아비도 눈에 안보이나 보네..."
"그만두세요 아버님! 오늘 어머님께 다녀오신 모양예요"
"거긴 왜? 지깟 놈이..."
병달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하지만 어쩌랴 여긴 온통 적들이 우글대는 적진인 걸...
냉정을 찾자, 냉정을 찾자, 자신을 다독거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봉미가 커피 잔을 들고 들어
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잔을 병달 앞으로 내 밀며 물었다.
"어머님은 어떠시던가요?"
정말 알고파서 물은 건지 그냥 물어본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어머님'이라 말 붙이는 것조차 그
에겐 역겨웠다.
병달은 커피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신 후 퉁명하게 내 뱉었다.
"괜찮아!"
퉁명스런 그의 말에 뭔가 확인하고 싶어서일까,
"어떻게요?"
병달은 더 이상 감정을 참지 못하고 와락 화를 냈다.
"곧 퇴원할 수 있을 만치 좋아졌다고!! 펄펄 나른다고!!"
커피 잔에 침이 튀었다. 그는 그대로 잔을 내려놓았다.
수진은 그의 화난 모습에 움찔했다.
그리고 설마하니?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건 뜻밖에도 그였다.
"그리고 제발 내 주머니에 돈 좀 많이 넣어 둬! 돈이 떨어져 병원에서 여기까지 걸어 왔다
고..."
병달의 짜증 섞인 말에 봉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언제는 하나도 필요 없다면서 카드도 모두 팽개쳐 놓구선..."
"그래 그 카드 갖다 줘! 모두 갖다 달라고!"
봉미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선 금방 몇 개의 카드를 들고 쪼르르 나타났다.
"자! 어기 있어요! 이게 모두 자기 거예요!"
모두 네 개였다.
언제 그가 이만큼 만들었단 말인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제 일을 벌이자면 돈이 필요할
거고 그 돈을 수진에게 의지하거나 손수 벌어서 충당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니던가...
"앞으로 내가 이 카드들로 얼마를 쓰던 당신이 모두 메꿔 넣어야 해! 그리고 아버지께는 절대
알려선 안돼! 만약 그러는 날에는 당신 죽고 나 죽고야!"
'당신' 그 말을 봉미에게 붙여 본 적이 있던가? 병달은 못내 역겨웠지만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의 위력 때문이었던지 봉미는 쉬이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래층에서 김사장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얘 아가야! 이제 경수 재우렴!"
그 소리에 봉미는 그가 먹다만 커피 잔을 들고 총총히 사라졌다.

앞으로 해야 할 일!
그 일들이 무엇이란 말인가?
권선징악을 타파하는 홍길동, 임꺽정, 암행어사 박문수까지 그런 이들이 우리 역사에도 수없이
등장하여 하나같이 악과 싸우다 장열한 최후를 맞지만 달라진 건 하나도 없질 않던가?
특히 병달의 적은 그들과는 달리 내부에 있는 적들이지 아니 한가...
징악을 하자면 적어도 철저한 냉혈인까지는 못 되어도 어리석을 만치 착한 그 심성은 버려야지
않겠는가?
지금도 그는 그 한계를 보는 듯하여 힘이 쭉 빠졌다.
"누나! 나 좀 도와줘!"
병달은 은영중에 그 말을 웅얼거렸다.
모를 때는 몰랐는데...
모를 때는 오히려 편했는데, 알고 나니 이곳이 두려웠다.
마치 호랑이 굴속에 들어와 있는 양 불안했다.
마치 무인도에 혼자 버려진 듯 외로웠다.
그가 도망칠 구멍은 이미 무거운 돌로 막혀 있고, 그를 구해 줄 배는 저 멀리 손이 안 닿는 곳
에 떠돌고 있다
"누나 제발 나를 구해 달라고! 날더러 같이 사냥하자 해 놓고, 곧 데려 올 듯이 이곳에 보내 놓
구서... 왜 안 와? 왜 도와주지 않냐고..."

 

(26) 적과의 동침

병달은 책상 앞에 앉았으나 책 볼 기분이 들지 않고, 침대 위에 벌렁 누워봐도 잠은 오지 않고,
창 밖으로 바깥을 내다봐도 어둠 속에서 온통 눈을 뒤집어 쓴 웬 낯선 수목들만 가득할 뿐이었
다.
불을 꺼봐도 낯설고 불을 켜도 낯설고 안절부절못하고 누워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섰다.
"누 누구요?"
"저예요!"
하며 대뜸 문을 열고 봉미가 들어 왔다.
"아니 어디 아프세요?"
"아 아니..."
그는 더듬거리며 엉거주춤 대답했다.
병달의 그런 행동에 뭔가 낌새를 차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혹시 어젯밤 수진 언니하고 무슨 일 있었던 게 아뇨? 그래서 다릴 후들거리는 게 아뇨?"
언제는 자기가 옹졸한 여자가 아니라며 호들갑을 떨더니 또 이젠 질투심이 줄줄 흐르는 눈으로
그를 다그치고 있으니 그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자라 생각되었다.
"그 그런 게 아니고..."
말꼬리를 흐리는 그에게 그녀는 다가앉으며 마치 흥정이라도 하자는 식의 말을 꺼냈다.
"병달씨! 이 시점에서 자기에게 다짐 받아둘 게 하나 있어요!"
병달은 대꾸대신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병달씨가 수진 언니를 만나는 건 말리지 않아요. 나보다 먼저 만났고, 그 동안 자기가 친누나
처럼 따랐던 그 언니한테 당장 물러나라고는 할 수도 없구요. 그리고 설사 병달씨가 그 언니하
고 몸을 섞었다 하더라도 전 탓하지 않아요. 다 내가 못난 탓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사실들이
아버님 귀에 들어가거나 회사에 알려져 웃음거리가 되겐 하지 말아요! 그리고 그녀와의 애까지
낳아 가지고 이 집안으로 들여오진 말아요. 그건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니까요. 알았죠?"
뭐 낀 놈이 화낸다고 아니 이렇게 간교하고 뻔뻔스러울 수가...
하지만 병달은 그녀의 무섭고 당찬 요구에 주눅이 들어 고개를 끄떡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봉미는 구미호처럼 갑자기 얼굴을 바꾸었다.
"자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병달이 고개를 흔들자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아양을 떨었다.
"오늘이 자기 생일이잖아?"
아! 그랬던가? 그래서 저녁상이 그렇게 화려했던가?
하지만 이런 마당에 생일이면 뭐하나? 모든 게 그를 역겹게 하는 것들 뿐 인데...
"그랬어!"
자갈을 씹는 듯이 툭 내 뱉는 그의 말에 아랑곳 않는 양 봉미는 난데없이 그의 목에 매달렸다.
"자기 너무 그러지 마! 무섭다구! 오늘은 우리 서방님 기 빠진 특별한 날이니까 내가 특별 선물
해 줄 거야!"
뱀 껍질이 지나가는 것처럼 징그러운 그녀의 손이 그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우리의 병달이는 왜 뿌리치지 못하는 걸까?
병달이의 정의의 손은 왜 그녀의 손길을 막지 못하는 걸까?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그녀의 속셈을 알면서도 왜 야합하고 있는지.......?
병달은 스스로에게 반문하고 있었다.

봉미는 북한에서 김일성 생일에나 한번씩 맛본다는 고깃국처럼 십 년에 한번 오 년에 한번 그렇
게 그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오늘이 그 먹이를 주는 날이었다.
굶주려, 굶주림에 지쳐 우리 밖을 뛰쳐나간 그가 잠시 자유의 공기를 콧구멍에 넣고 돌아오자
다그치고 어루며 능숙하게 요리하여 재차 우리 속으로 집어넣으려 하고 있었다.
그가 집을 나갈 때도 그녀는 병달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수진의 집에서 그간 굶주렸던 배(정욕)를 잔뜩 채우고 왔다는 것도 직감으로 알아
차렸을 것이다.
그런데 왜 또 먹이를 주려는 걸까?
그 이유를 병달은 간파하고 있었다.
속성상 그녀의 손길을 마다하지 못하는 그의 엉거주춤한 마음을 홀려서 그를 꼼짝 못하게 하리
라는 속셈을 알고 있었다.
그의 옷이 모조리 벗겨져 나가자 그 속셈이 얼마나 간교하게 이루어지는 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봉미의 혀가 그의 발끝에서부터 살을 비틀며 올라가 가랑이에서 멈추고, 다시 위 귓볼에서부터
타고 내려와 배꼽을 몇 바퀴 돌면서 그의 말초감각을 유혹했다.
말 그대로 특별 서비스였다.
그런데 병달은 그런 봉미의 서비스(?)속에서 수진의 얼굴을 보았다.
봉미의 얼굴 위에 오버랩 되는 그런 얼굴이 아니라 봉미 뒤에서 내려다보며 그를 조종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건 병달의 간절한 바램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얼굴은 표정 없이 내려다보며 그에게 계명을 내리고 있었다.

  절대로 감정을 오버하지 마라!
  속 감정을 드러내지 마라!
  대의를 위하여 순간적인 역겨움은 참으라!
  그녀가 접근해 오면 기꺼이 접대하라!
  희열을 안기면 사양치 말고 희열하라!
  그러는 얼굴을 보이라!
  영원을 위해 짧은 순간은 버려라!
  이건 고행이 아니다. 일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병달은 봉미가 이끄는 대로 나무에 올라가라면 올라가고, 그 가지를 흔들면 흔들리며 그녀의 북
소리에 장단을 맞추었다.
봉미는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치 무당이 작두 춤을 위해 혀로서 작두 날을 벼루
는 것처럼 그의 칼날을 벼루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 칼날이 자신을 난자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한 채...
칼날이 날카롭게 서자 무당이 작두 위에 오르는 것처럼 봉미의 다리가 병달의 배 위로 기어올라
오고 그의 장검이 그녀의 굴속으로 예리하게 꼽힐 적 그는 아찔한 신음을 토해 냈다.
"아아......!"
아침부터 벌써 몇 번이나 전쟁을 치른 무뎌진 칼날이지만 봉미의 교활한 도전에 그는 기꺼이 응
수하며 언젠가는 그녀의 목을 베고 살을 난자하여 그녀의 수장 앞에다 걸어 보이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며 칼날을 세웠다.
"아아아......!"
그녀가 벌써 그의 칼날에 살이 베였는지 비명을 질러댔다.
병달은 눈앞에 늘어져 어지러이 출렁대는 그녀의 젖통을 쥐어 잡았다.
'이 젖통이 그들의 음침한 거래로 생겨난 한 부산물을 먹여 살리는 밥줄이란 말이지!'
그는 양손으로 그것들을 잡고 비틀어 버리려다 간신히 참았다.
"아아아악....!!"
하지만 그녀는 아파 죽겠다는 시늉을 했다.
그 시늉이 화근이었을까?
병달은 그녀의 젖통을 그대로 잡아 당겨 입에다 물고 자근자근 씹었다.
"으으으윽......!!"
그녀는 입을 악물면서도 좋아 날뛰었다.
"오오 멋져!! 아아아학!!!!"
그 소리는 그에게 엉뚱한 가능성을 안긴 비명소리였다.
가학에 즐거워하는 그녀를 한번에 때려잡을 비책이 보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의 돌연한 자극에 몸이 단 봉미는 그 화답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화구 속에서 꿈틀대는
그의 장검을 죄어 물고는 마치 떡 주무르듯이 주물러댔다.
끝이 가까워지자 봉미는 히프와 허리, 그리고 가슴을 교묘한 박자로 흔들어 대며 그의 입에다
젖을 짜내기 시작했다.
그건 분명 경수의 몫이었지만 그는 꿀꺽꿀꺽 모두 집어 삼켰다.
아래 그녀의 아궁이에서도 진한 화염과 함께 음수가 비오듯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궁이 속이 비좁은 듯 그의 절구에 묻어 삐져 나오고 있었다.
"학학학~ 헉헉헉헉~ 흑흑흑~~~~~"
마지막 급피치를 올리던 그녀의 현란한 박자 아래로 허연 게거품이 보이고, 끊어질 듯 목까지
차 오른 숨이 갑자기 긴 한숨으로 토해지는 순간,
"퓨우---팅류류우우......."
봉미는 그의 가슴위로 푹 쓰러졌다.
그녀의 특별 서비스는 그렇게 끝이 났다.

 

(27) 반란을 준비하며...

다음날 오전 이른 시간에 병달은 수진을 만났다.
"오늘도 학교 안 갈 거니?"
자리에 앉으며 수진이 물었다.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이야!"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라 두 시간의 수업이 있었는데 아예 모두 빼먹을 작정을 한 병달이었다.
"대학생이란 그래서 좋구나!"
핀잔인지 칭찬인지 내 뱉는 그녀의 말에 대꾸대신 뭔가 내밀었다.
"자! 누나 이거 가져!"
어제 밤 봉미에게서 돌려 받은 신용카드였다.
"모두 세 장인데 골드는 아니지만 장당 월 200 정도는 될 거야!"
"이걸 모두 내게 주면 너는..?"
"나 여기 또 하나 있어! 난 이거면 충분해.."
"그건 그렇다 치고 나중에 넌 어떻게 갚을 건데?"
"그런 걱정은 마! 내가 봉미와 흥정했어. 뒷감당은 모두 봉미가 하기로..."
"봉미인들 무슨 돈이 있어? 그리고 내가 쓰는 줄 알면서도 갚아 줄까?"
"그러진 않겠지! 하지만 안 갚고는 못 베길 거야.
그리고 봉미 돈 많아. 저번에 우연히 그녀의 통장을 슬쩍 봤는데 나도 놀랐어! 아마 억 단위는
되는 것 같았어.
누나! 은행에 아는 친구 있지? 한번 알아봐. 구린내가 좀 나..."
"그야 어렵지 않지만 이 사실을 니네 아빠가 알기라도 한다면...?"
"그것도 걱정 마! 이 사실을 아빠께 알리는 날엔 죽여버리겠다고까지 협박해 놨으니까...
그리고 그걸로 쓰고 남는걸 차곡차곡 모아 줘.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한 해만 하면
5,000정도는 될 거야!"
수진은 병달의 주도면밀함에 새삼 놀라는 눈치였다.
"너가 이렇게 꼼꼼하고 치밀함에 놀랐다. 예전의 병달이 아닌 것 같애!"
"아냐! 잠시 그렇게 보일 뿐이야. 나는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멍청하고 무기력하게 길러져 왔
어! 늘 누구에겐가 눌려 있고 말 한마디 못하며 커 왔어. 그러다 보니 요즘에도 내가 왜 이렇게
바보스럽고 무기력한가하고 자학하기 일쑤야..."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봐! 아침부터 네게 그런 얘기하라고 한 말이 아닌데..."
계면쩍어하는 수진에게 또 하나의 봉투를 내 밀었다.
"이건 또 뭐니?"
"핸드폰이야. 누나의 집에서 전화할려면 그 아래까지 내려와야 하잖아. 그리고 내가 전화하려
해도 할 수가 없잖아. 그래서 오늘 하나 샀어. 나는 삐삐를 늘 차고 있을 테니 이 번호 적어
가!"
병달은 번호가 켜진 삐삐를 내 밀었다.
"고마워!! 정말 너무나 고마워! 손님들만 없다면 꼭 껴안아 주고 싶다, 자기!!!"
여러(카드와 핸드폰 두 가지 뿐만은 아닌) 선물들을 한꺼번에 받은 수진은 감복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러는 그녀를 회사로 돌려보내고 병달은 어디론가 급히 가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에선 좀 외진 전자상가를 훑고 있었다.
그곳은 아무런 곳에서나 잘 구할 수 없는 희귀한 물품이나 물 건너온 밀수품들이 주로 거래되는
곳이었다.
"뭘 찾으세요? 뭐든 말해 보세요! 구멍 안 난 아가씨 말고는 다 취급합니다"
그를 졸졸 따라오며 슬쩍 끄는 그의 말이 재밌어서 병달은 멈춰 섰다.
"몰래카메라 있어요?"
그는 충분히 구해 드릴 수 있다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비디오 말예요? 씨디 말예요?"
"그런 게 아니고 그런 걸 찍는 카메라 말예요! 소형이면 소형일수록 좋아요"
"옳아! CCTV 말하는구먼! 알았오. 따라오쇼!"
그는 병달을 끌고 안으로 들어가 병달 앞에다 주르르 늘어놓았다.
병달은 그 중에서 천장이나 커텐 뒤 등에 설치할 수 있고 화질도 뛰어난 러시아산 제품으로 결
정하여 한꺼번에 두 대를 샀다.
그 제품은 고급 첩보용으로 쓰이던 것으로 암시장 등에서만 엄밀히 거래된다고 했다.
값도 생각보다 저렴한 편이었고 특히 무선인 점과 리모콘으로 렌즈를 돌려가며 찍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오는 길에 열쇠 뭉치도 하나 쌌다.
아예 그의 방 열쇠를 통째로 갈아버릴 심산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봉미가 아래층에 있는 틈을 이용해 그의 방 열쇠부터 갈아 치웠다.
그리고 방안에 카메라를 가 설치하여 성능을 시험해 본 결과 그 상인의 말처럼 모든 기능은 완
벽했고 화질 또한 만족했다.
그러나 그걸 설치할 틈이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28) 회한의 눈물

그날부터 병달은 봉미 옆으로 바짝 다가서기 시작했다.
물론 의도적인 접근이었다.
그가 흥정하여 그녀가 카드의 뒤처리를 모두 해 주기로 했다지만 실상 그녀가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파기할 수 있는 약속이었다.
'너 죽고, 나 죽고' 라는 협박이 순간적으로 통했는지 몰라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통할 리가 없
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게 뭣이 있겠는가?
김사장에게 그녀의 입지를 확고히 해준다던지 하는 따위도 있겠지만 그건 그의 입장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임은 모두가 알 테이고, 또 뭣이 있는가?
흔히 말하는 몸으로 떼우는 것뿐이 아니던가...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의 생일이라던 날 밤,
그녀는 중요한 변화의 몸짓을 보여줬다.
결혼 후든, 전이든 거의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갖가지 이유와 변명으로 허락치 않던 그녀가
생일 선물이라는 이유로 접근한 것부터가 이상했고, 분풀이라도 하는 듯이 달려들던 그 모습도
이상한 변화였다.
그 모르게 불만족한 구석이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병달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사흘 후, 그날 따라 두견인지 부엉인지 모를 구슬픈 새 울음소리가 초저녁부터 들려 오고 있었
다.
12시는 족히 넘었을 밤늦은 시간, 봉미는 병달의 방을 노크하고 있었다.
병달이 문을 열자 안으로 들어오려 했으나 막고는 그가 밖으로 나갔다.
"왜 그래?"
"나 당신하고 얘기 좀 하고 싶어요!"
"그럼 당신 방으로 가서 하지!"
그녀의 방으로 들어서자 아직 잠들지 않은 경수가 방긋거리며 혼자 놀고 있었다.
병달을 보고도 방긋 웃었다.
이런 애가 그 더러운 흥정의 부산물로 태어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처음 병원에서 핏덩이를 그의 품에다 안겨 줄 때만 해도 그는 이 애에게 모든 꿈을 실었다.
봉미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이 애에게 위안 받으려 했다.
그리고 이제는 봉미와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 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 모두는 하나하나 물거품이 되어갔다.
그 모든 것이 더러운 연극이었음을 알아버린 지금 경수를 바라보는 병달의 마음은 그때 그 마음
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저주의 마음도 아니었다.
불쌍하고 가련한 마음이라 해야 맞을까...?
봉미는 경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병달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를 느낀 병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얘기 해 봐요? 할 말이 뭔지..."
"병달씨! 술 한 잔 할래요?"
봉미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방을 나갔다.
한참 만에야 올라온 그녀는 절구통 같은 병에 담긴 양주를 들고 올라 왔다.
김사장이 즐겨 마시는 꼬냑이었다.
"아버지는 주무셔?"
"오늘 출장 갔잖아!"
병달은 요즘 김사장과 일부러 마주치지 않으려고도 했고, 마주친다 해도 인사조차 않으며 지냈
다.
무언의 시위며 앞날에 대한 예고이기도 했다.
"아무리 뒤져도 술이 없어서 아버님 방에서 슬쩍해 왔어! 내일 아줌마께 시켜 보충해 놓으면
돼!"
봉미는 병을 따서 먼저 그에게 따라주고 자신의 잔을 채운 뒤 곧바로 홀짝 마셔 버렸다.
김사장이 없다, 그러면 작은 서방인 병달과 자보리라는 속셈이 뻔한 게 아닌가...
병달인들 그 속셈을 모를까?
그도 잔을 들어 원샷 했다.
따끔한 맛이 목젖을 녹일 듯 확 달아올랐으나 혀 밑을 감치는 그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따라주는 잔을 연거푸 마셨으나 그 맛은 영영 느낄 수 없었다.
비수처럼 식도를 쑤시는 알콜 맛만이 속을 얼얼하게 할 뿐...
그녀는 너 댓 잔만에 벌써 맛이 간 얼굴로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할 얘기가 뭔데... 더 취하기전에 해 봐!"
봉미는 입을 삐쭉대며 뭔가 말을 할 듯 할 듯 하다 말았다.
"글쎄 말해 보라니까!"
"나 사실 할 말이 없어!"
혀 꼬인 소리로 꽁무니를 빼 버렸다.
한 잔을 더 따라 마신 그녀는 취기인지 그걸 가장하는 건지 모를 애매한 몸놀림으로 그에게 쓰
러지면서 울부짖었다.
"날 좀 안아줘! 그저께처럼 뜨겁게 안아줘! 난 외로워! 너무 외로워! 그래서 괴로워! 그래서 슬
퍼져! 그래서 죽고 싶다고..."
병달은 엉거주춤 그녀를 안았다.
"그 이유가 뭔데?"
"그건 당신이 잘 알잖아! 당신이 날 버리고 수진에게로 갔잖아!"
이런 개 같은 년이 다 있나?
눈 가리고 아옹도 유분수지 남 주기는 아깝다는 뜻이 아닌가?
썩을 년! 망할 년! 때려죽일 년!
"그때는 병달씨가 얼마나 멋진지 몰랐어!
그때는 내 눈에 뭣이 씌었나봐!
그때는 내가 병신이었어!"
"왜? 왜? 왜?"
참고 참았던 병달의 입에서 고함이 튀어 나왔다.
버럭 지른 고함에 경수가 까무라치며 울기 시작했다.
봉미도 경수를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다.
"둘이 실컷 울어! 밤새도록 울어! 이 집이 날아가라 울어 보라구! 땅이 꺼져라 울어 보라
구........"
병달은 문을 쾅 닫고는 그의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얼마나 흐른 걸까?
그들의 방에도 울음이 멈추고 초저녁부터 울어대던 새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슥한 시간, 그
는 잠을 못 이뤄 몇 번이나 뒤척이고 있는데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병달은 잠든 채 가만히 있자 재차 "똑똑" 하고 들려 왔다.
"누구요? 당신이요?"
"네! 맞아요!"
"또 왠 일이요?"
"글쎄 문이나 좀 따 주고 얘기해요!"
"가서 자요! 내일 얘기해요! 날 밝으면 얘기해도 되잖소!"
타이르는 듯한 그의 말에 그녀는 재차 문을 두드리며 애원하듯 말했다.
"내일엔 얘기할 수 없어요! 내일이면 늦다구요!"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든 병달은 그 때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문안으로 그녀를 들이지 않은 채 그가 밖으로 나갔다.
"도대체 당신 왜 그러셔? 남의 잠도 못 자게 하고서..."
"미안해요! 그러나 오늘 이 말을 않고선 더는 못 살 것 같아 그래요!"
"그게 대체 뭔 말인데 그래?"
"당신께 고백할 게 있어서 그래요!"
고백?
봉미가 할 고백이 뭔지 병달도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 시점에 그 고백을 새삼 들어서 어쩌자는 건가?
그녀는 맘이 홀가분해 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봉미가 병달의 진중으로 전향하여 그의 편이 될 수는 있으되 그게 무슨 힘이 되랴?
그녀에게 면죄부만 쥐어주는 꼴이 될 것이고, 포로로서의 가치조차 없어질 뿐이지 않겠는가....
"고백?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왜 필요해? 고백! 그런 거 할 시간 있으면 잠이나 자!"
그러면서 그녀를 밀치고 방안으로 들어 가려하자 봉미는 후닥닥 무릎을 꿇으며 그의 다리를 붙
잡고 늘어 졌다.
"병달씨! 제발 내 말 좀 들어줘! 꼭 한번만 내 고백을 들어줘요! 그리고 뭐든 시키는 일은 다
할테니 날 용서 해줘! 그러면 평생 죄인처럼 병달씨만을 위해 살께요! 맹세해요! 그리고 이렇게
빌께요!"
봉미는 손을 싹싹 비벼댔다.
"정 그렇다면 그 고백은 다음에 듣는 걸로 하고 어떻게 평생 죄인처럼 살 것인지 보여줘!"
"아아! 고마워요 병달씨! 고마워요 여보!"
봉미는 그의 발가락에다 키스세례를 퍼부어 댔다.

-- 3부 끝 --

    -. Ddamddee의 허락 없이 타 BBS에 배포. 복사를 금합니다.

 

 

 

 


-작가님에게 정성어린 격려의 메일을 보냅시다-
-야설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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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ddamddee 글쓴 때 2000-01-14 오후 08:02:38
I P 운영자만 보임 조회 71

[애정/리바이벌] Ddamddee秘談 제3화 원죄(原罪) -완결-
[애정/리바이벌] Ddamddee秘談 제3화 원죄(原罪) -4부-


이 글은 지난 8월 이곳에 공개했던 글입니다.
아직도 이 글을 못 읽으신 분들을 위해 다시 올립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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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原罪)  - 4부 : After-play (후희) -
                                                  Written by Ddam-dd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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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복수혈전

"모두 벗어!"
평생 죄인이라고 다짐한 그녀에게 내린 최초의 명령이었다.
그녀는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흐느적대는 몸으로 옷을 몽땅 벗어 던졌다.
"그리고 니 방으로 기어 가!"
봉미는 병달이 그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지나 않을까 뒤돌아보면서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그녀 방으로 들어서자 저 귀퉁이 아기 침대 위에서 경수가 코를 쌔근거리며 잠 들어 있었다.
병달이 그녀 침대에 걸터앉자 봉미는 그의 발 아래에 부복하여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하
인처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조금 전 먹다만 술잔에 잔을 채우고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에게도 한잔 따뤄주자 단번에 마셔 버렸다.
또 한잔, 또 한잔.....
이윽고 그는 일어섰다.
술기운과 더불어 그가 가진 모든 용기를 발휘했다.
그는 잔뜩 성난 얼굴로 벌떡 일어나서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돌발적인 그의 행동에 겁이 나 눈이 휘둥그래진 그녀 앞에 병달은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오늘 너의 죄를 묻고 그 죄 값을 보여 주겠어!
넌 날 함정 속으로 빠뜨려 연애한다 소문 퍼트리고 결혼에 이르게 한, 날 기만한 죄 인정하지?
넌 날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나를 패인의 길로 이끌려 한, 날 능욕한 죄 그것도 인정
하지?
그리고 엊그제까지만 해도 넌 날 우리 속에 가두려 했으니 이제 너가 그 우리 속에 갇혀보라고!
너가 만든 우리니까 기분이 좋을 거야! 스스로 만든 우리 속에 갇힌 기분을 느껴 보라고! 좋을
거야! 째질 거야!
그리고 그 속에서 좀은 낯설겠지만 이 서방님의 포악함을 맛보라고! 새로운 서방님 모습을 느껴
보라고!
늘 주는 특식이 아니니 유감없이 맛보라고! 아마 다시는 맛보기 힘들 로얄 스페샬에 취하여 째
져 보라고! 쭉쭉 찢어져 보라고!!"
병달은 그녀를 발로 툭 차 바닥에 쓰러뜨리고 그녀의 가랑이를 쭉 찢어 벌렸다.
하늘을 향해 쭉 찢어진 다리 사이로 멋모르고 헤 벌린 밑잎의 주둥이에다 대고 술을 벌컥벌컥
부었다.
봉미는 그 속이 이상해지는지 몸을 움찔거렸다.
술이 넘쳐흐르며 그녀의 히프를 타고 내리며 바닥을 적셨다.
병달은 쪼그리고 앉아 그걸 쭉쭉 빨아 마셨다.
술과 함께 비릿한 살 내음이 같이 빨려 들어 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예민한 고깔 때기를 턱수염으로 비벼대다가 이빨로 꺽 물자 그녀는 소스라
치게 놀라며 일어나려 했다.
"가만있어 이년아! 아직 내 잎맛도 안 봤잖아! 곧 뵈줄 테니까 기다리라고..."
체념하는 건지 기대하는 건지 그녀는 다시 누웠다.
병달은 화장대로 가 화장용 크림을 하나 들고 와 옆에다 놓고 바지를 벗었다.
봉미는 그 크린싱 크림을 왜 가져 왔는지 궁금하여 그를 쳐다봤다.
드러난 살덩이를 그녀 앞으로 밀면서 병달이 말했다.
"자 이거나 빨아먹어!"
봉미는 시키는 대로 그걸 덥석 입 속으로 물고 들어갔다.
그리고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그는 크림 뚜껑을 연 뒤 그걸 찍어다 그녀의 밑잎구멍 안팎으로 듬뿍 발랐다.
봉미는 그의 살덩이를 쪽쪽 빨아대면서도 자신의 하복부에 느껴지는 감촉에 바짝 긴장했다.
병달은 크림 범벅이 된 그녀의 밑잎 속에다 처음 손가락 두 개를 집어넣고 빙빙 돌리다가 순식
간에 푹하고 주먹을 찔러 넣었다.
"아악........!"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들을 사람은 이 방안 그들뿐이었으리라....
얼마나 아팠던지 벌떡 일어나려다 쿡 쥐어박는 그의 제지에 다시 누웠다.
순간적인 그 아픔을 대변하듯 그녀의 눈에는 피 빛이 서려 있었다.
크림이 짓이겨진 그의 손등으로 선혈이 비치는 걸 보면 그녀의 속살이 찢어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순간적인 고통에 엉덩이를 비틀어대던 그녀의 몸부림도 잠깐, 그 몸부림은 이내 격정의
몸부림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는 그 안에서 주먹을 박았다 뺏다 하기도 하고, 빙글 돌리기도 하면서 그녀를 농락했다.
"아아~ 더 굵게~ 더 깊이~~ 넣어 주세요! 아아아아!!"
그녀의 자궁 속에 숨겨둔 또 하나의 잎만 같은 돌기가 그의 손에 잡혔다.
그건 그 끝에 구멍까지 나 있어서 영락없이 그것과 닮아 있었다.
"망할 년! 넌 이 속에까지 남자를 숨겨 뒀구나? 찢어 쥑일 년!!"
그는 그걸 털어 쥐고 힘껏 비틀었다.
"아아아악!!!"
또 한번의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병달의 그런 패설 적인 언어와 가학적인 고문에도 두려워하거나 몸을 떨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는 더 흥분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병달은 봉미의 가랭이 속에서 손을 빼내고 잠시 숨을 돌리며 또 한잔을 따뤄 마셨다.
나머지 병에 남은 것들은 아직도 자신의 잎을 물고 있는 그녀의 주둥이 틈에다 부어 버렸다.
봉미는 그걸 턱 아래로 질질 흘리며 핥아먹었다.

취기에다 독기까지 발동한 그는 이번에는 그녀를 무릎을 꿇고 엎드리게 하고 손바닥으로 그녀의
히프를 내리쳤다.
"처얼썩!"
"아악!"
그 소리에 아앙~ 하고 경수가 깨 버렸다.
그러나 금새 울음을 멈추고 팔다리를 우쭐거리며 혼자 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까 다음 또 한번 내려쳤을 때 그녀는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처얼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그녀는 이미 가학에 길들여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부터 서서히 길들어져 가는 것인지 이젠
다문 입을 반쯤 벌리고 비명이 아니라 신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철썩!"
"아아~~"
"철썩!"
"아아아 학~~"
그도 그걸 즐겼다.
손바닥을 내리 칠적마다 철썩! 소리와 함께 그녀의 히프 위에는 벌건 손자국이 남고 이쪽 저쪽
성한 구석이 없어 보였다.
그때, 얼굴까지 벌개진 그녀가 뒤돌아보며 간절히 말했다.
"여보! 이제 좀 넣어 주세요! 제발..."
"안돼! 아직..."
"그럼 더 때려 주세요! 여보!"
"이제부터 날 여보라 하지 마!"
"그럼 뭐라 할까요?"
"아버님이라 해!"
봉미는 순간 움찔 했다.
눈에 눈물까지 고이는 듯 했다.
"그건 안돼요! 여보?"
병달은 그녀의 머리채를 거머쥐었다.
"할거야? 말 거야?"
"제발 여보...."
그는 그녀의 머리채를 흔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린 뒤 소리쳤다.
"내려가서 술 한 병 더 가져와! 오늘 밤 끝장을 보자고..."
"잘못 했어요! 잘못 했어요! 뭐든 다 할게요.. 다 할게요... 여보!"
"여보가 아니라니까, 썅!!"
"네, 아버님!!"
"빌어 봐! 싹싹 빌어 봐!!"
"잘못 했어요! 잘못 했어요 아버님!"
병달은 눈물을 질질 흘리며 싹싹 빌어대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경수가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끌고 갔다.
그들의 발광(?)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수는 생글거리며 그들을 올려다봤다.
"자! 이제 경수가 지켜보는 앞에서 하는 거야! 멋지게 하라고! 소리도 팍팍 지르라고! 알았어?
몰랐어?"
"아 네! 알았어요 여보! 아니, 아버님!"
병달은 그녀를 그 침대를 가장자리에서 구부리게 하여 경수가 지켜보게 한 뒤 그 뒤쪽에서 검을
쑤셔 박았다.
경수야 아직도 돐도 안 지난 애라 뭣을 알겠냐 마는 그녀에게 모욕을 주려는 병달의 심통이 극
에 달해 있었다.
봉미는 그런 그의 마음을 어찌 눈치채지 못하랴 마는 자신의 몸 속 깊숙이 솟구쳐 오르는 더러
운 본능을 이길 수가 없었다.

검이 박히기가 무섭게 그녀는 엉덩이를 비틀어댔다.
그래! 잘도 한다 이년아! 더 멋지고 짜릿한 걸 가르쳐 주지.....
"경수에게 키스해!"
봉미는 약간은 충혈된 눈으로 '이런 시점에 애에게 뽀뽀하라니?'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그
를 올려다봤다.
"하라면 해! 이년아!"
그의 부라린 눈에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서서히 속도를 내는 그의 몸놀림에 흥분해서인지 몰라도
시키는 대로 멀뚱히 쳐다보는 애의 볼에다 뽀뽀를 했다.
"아니 거기 말고 입에다 해! 그리고 뽀뽀가 아니라 키스를 하라고! 썅!!"
그녀의 엉덩짝을 한방 올렸다.
그녀는 경수의 입에다 입을 맞추었다.
경수는 뭐 대단한 먹을 것이라도 들어오는 양 그녀의 입술을 쪽쪽 빨고 있었다.
병달이 손을 내려 그녀의 젖가슴을 털어 쥐고 비벼대자 봉미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닌 듯 했다.
경수의 입술을 빨아대던 그녀의 입술은 그 애의 볼이며 눈이며 마구 빨아댔다.
경수는 귀찮은 듯 칭얼거렸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가 깐 새끼니까 네가 먹어 버려! 홀딱 빨아 먹어버리라고...'
차마 그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녀의 가슴에서 젖이 줄줄 흐르는 걸 느끼며 그 젖 묻은 손으로 찰싹하고 엉덩이를 또 한번 갈
겼다.
뒤돌아보는 그녀의 눈빛은 뽕 맞은 사람의 눈처럼 이제 완전히 맛이 가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빨리 해줘! 팍팍 해줘! 구석구석 찔러 줘! 찢어지게 박아 줘! 몽땅그리 자근
자근 부서 줘!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병달이 엉덩이를 뒤로 빼며 몸을 빼내려 하자 그녀는 밑잎 살에다 힘을 주며 안달을 했다.
"아아 안돼!!"
"걱정 마! 더 기똥찬 걸 먹여 줄 테니..."
병달은 그녀의 싶물로 범벅이 된 자신의 연장을 잡고 뒤쪽에다가 천천히 돌렸다.
벌써 눈치를 챈 그녀는 허리를 좌우로 흔들어대며 괄약근을 심하게 움찔거렸다.
"자! 멍멍 짖어봐!"
그 소리에 그녀는 정말 개처럼 짖어 댔다.
"멈멍! 멈멍멍!"
'야이 개년아! 잘도 짖네! 있다가 똥도 줄 테니 그것도 빨아 먹어봐, 이 개년아!'
그는 서서히 배에 힘을 주며 밀어 넣었다.
"아아~ 아아아~~ 학학~~~"
좋아서 일까? 아파서일까?
그의 긴 장검이 모두 들어갈 때까지 그녀는 그런 비명을 질러 댔다.
"그래 이년아! 이제 니년 창자 속으로 서방님이 들어갔으니 어디 한번 소리도 지르고 춤도 추어
봐! 질펀하게 놀아 보라고!!"
그 소리가 나오기가 무섭게 그녀의 엉덩이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그녀의 괄약근은 힘이 대단하여 그는 뿌리까지 뽑히는 기분을 느꼈다.
"이랴!!"
그는 또 엉덩이를 후려쳤다.
"이랴! 이번에는 경수네 아랫마실 밭 갈러 가자!"
병달은 말놀이하는 마부처럼 그녀의 상체를 경수의 아랫도리 쪽으로 밀고 갔다.
벌써 눈치를 긁었는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고 애원했다.
"제발 여보! 살려줘, 여보!"
"썅! 여보라니?"
"아-아버님! 살려줘요? 다른 건 다..."
"입 닥쳐! 진짜 죽고 싶지 않으면..."
"........"
그러나 그게 어쩐 일인가?
망설이지 않는다면 그녀는 인간도 아닐 것이다.
참다못한 병달이 경수의 아랫도리와 기저귀를 벗겨내고 그녀를 밀자 그녀는 엉엉 울었다.
그런다고 물러날 병달이었다면 비인륜적인 이런 게임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게임의 통쾌한 대미를 위해 마지막 급 피치를 올리며 그녀의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그녀는 갑자기 허리를 휩싸는 뜨거운 환희의 유혹에 빠져 가는 자신을 느꼈다.
그 뜨거운 유혹은 그가 털어 쥔 머리의 따가운 가학으로부터 시작하여 찢어진 속살의 쓰린 마찰
로 인하여 한층 뜨겁게 달궜다.
"아아~ 아학~~ 학학~~ 학학학~~~"
그가 털어 쥔 머리채를 끌고 경수의 벗겨진 아랫도리위로 꾹 누르자 얼굴을 홱 돌렸다.
다시 누르자 또 돌리고, 또 누르고 돌리고....
마침내 체념한 그녀의 입 속으로 경수의 조그만 살 뿌리가 들어가고...
그는 통쾌하게 소리쳤다.
"네년이 날 아버님이라 불렀으니 네년은 내 며느리잖아! 그리고 경수는 내 아들이니...
내 며느리인 니년 주둥이 속에 내 아들놈의 잎이 들어갔다 하여 욕할 놈은 아무도 없잖아!
설사 그것이 니년의 아랫도리 속으로 들어간들 누가 말리랴? 안 그래?? 이 개년아.... 하하하
하.............."

 

(30) 아(我) 진지 구축

다음날 병달이 잠을 깼을 때 시계는 벌써 10시를 넘어서고 있었고, 머리가 터져 나가는 듯이 흔
들렸다.
그가 머리를 감싸쥐고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아줌마가 컵에 물을 따뤄 건네며 말했다.
"아씨는 친정에 갔어요! 사장님이 돌아오시면 온 댔어요"
"그게 언제인데요?"
"아마 내일쯤이 될 것이랬어요"
그는 터덜터덜 이층으로 올라 왔다.
봉미의 방으로 들어가자 어젯밤 어질러진 그대로 있었다.
빈 술병과 잔이 나뒹굴고 있고, 그녀의 아랫도리로 흘러 내렸던 술도 방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
었다.
병달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엊 밤 그토록 통쾌한 일격을 가했건만 어찌 이리도 마음이 허탈하단 말인가?
그는 학교 갈 엄두도 못 내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지난 밤 내내 너무 심하게 칼을 휘두른 탓인지 아직도 아랫도리가 얼얼했다.
그때 아줌마가 올라와 똑똑 노크를 했다.
"왜요?"
"도련님! 상 차려 놨으니 아침 드세요. 그리고 저는 시장 좀 다녀 올 테니 나가실려면 대문을
걸어두고 나가세요"
"알았어요!"
아침 생각은 영 없었다.
그러나 조금 후 슬며시 내려 왔다.
아줌마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
그는 잽싸게 다시 올라가 저번에 사다둔 무선 카메라 하나를 들고 내려 와서 김사장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곳 저곳 두리번대다 환풍 구멍이 있는 모서리에다 의자를 놓고 환풍망을 풀어냈다.
그리고 그 안에다 카메라 렌즈세트를 설치하고 환풍망을 도로 끼웠다.
누군가 의심하고 뜯어보지 않는 이상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완벽했다. 그리고 간단했다.
다시 이층으로 올라 온 그는 봉미의 방에도 나머지 하나를 설치했다.
두 대를 모두 설치한 그는 그의 방에 놓여진 CCTV 모니터를 틀어 보고는 만족한 쾌재의 함성을
질렀다.
"야호!!"
렌즈를 좌우상하로 움직이는 죠우틀 기능도 완벽했다.
이제 사냥을 위한 덫은 충분히 놓아둔 셈이었다.
그들이 언제 그 덫 속으로 걸려 드느냐만 남은 상황이다.
되도록 김사장이 집에 머무는 시간을 이용하여 스위치를 넣어둘 계획이었다.
화질은 조금 흐려질진 몰라도 최저속의 속도로 녹화하면 하나의 테잎에 하루는 녹화할 수 있다
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두 대에 모두 테잎을 끼워 두었다.

그때에야 식욕이 없던 배가 꼬르륵대기 시작하여 아래로 내려 와 덥석덥석 밥을 먹고 학교로 갔
다.
수업이 모두 끝난 후 공중전화로 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누나! 난데..."
"아! 병달이구나! 마침 네게 삐삐치려 했는데 텔레파시가 통했네!"
"왜?"
"한가지 알려줄게 생겼어! 그런데 너는?"
"그냥 보고 싶어서..."
"거기 어딘데?"
"학교!"
"알았어. 정문에서 기다려!"
딸깍..
병달은 해가 떨어지자 서서히 불기 시작한 바람에 손발을 비비며 수진을 기다렸다.
때 이르게 찾아온 동장군에 교문 앞은 거의 학생들의 발길이 끊긴지 꽤 시간이 흘렀다.
군밤을 팔던 아줌마도 그 옆자리에서 고구마를 굽던 아저씨도 자리를 털고 떠났다.
한 시간쯤 지나서야 빨간 그녀의 차가 병달 앞에 멈추었다.
"아 미안해! 도로가 너무 막히네! 춥지 빨리 타!"
기다리다 지친 병달은 그녀가 오면 필히 면박을 주리라 벼뤘던 마음이 수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사르르 녹아 내리며 오히려 호들갑을 떨었다.
"아! 따뜻해! 역시 누나 속이 최고야!"
"농이 좀 뜨겁긴 해도 기분이 좋네 그래! 호호... 그런데 도련님! 어디로 모실까요?"
"그대가 가던 곳으로 계속 가게나! 어험..."
"아니! 너 발목잡혀 일 망치려고 그러니?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걱정 마! 표현은 맞지 않지만 거의 무정부 상태라고 할까, 무주공산이라고 할까? 지금 집엔 아
무도 없어. 있다면 아마 도둑이 주인 되어 있을 거야."
"김사장은 출장간 걸 내가 알지만 봉미는 어디 갔는데?"
"친정 갔데나, 어쩠데나? 자고 일어나니 없더라고..."
눈치 빠른 수진이 캐물었다.
"너 봉미하고 무슨 일 있었구나?"
"일은 무슨 일! 그저 좀 잘 지내려고 했지 뭐! 명색이 그래도 엄연한 부부인데..."
"수상하다 너?? 잘못하면 다 되어 가는 밥에 코 빠뜨릴 수 있다는 걸 알아 둬?"
"그런데 누나는 내게 알려줄 거라는 게 뭔데?"
"집에 가서 말해주지...."

차는 강서동 종점을 향하여 경사길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가 늘 버스나 택시를 타고 내렸던 버스종점을 지나 그녀는 그가 모르는 다른 골목길로 굽이치
며 올라갔다.
그 좁은 골목길을 아슬아슬 몰고 올라 와 그녀가 멈춘 곳은 조그만 공터였다.
"여기가 어디야?"
"모르겠니 정말?"
그러고 보니 그곳은 언젠가 그들이 눈싸움하던 그곳 같았다.
"아 여기는 우리가 눈싸움하던 그곳이구나?"
수진은 빙그레 웃었다.
"이곳에서 우리가 눈싸움까지 했단 말인가?"
벌써 차 한 대가 대어져 있었고 그녀의 차를 대자 이제 한 대 정도의 자리뿐 남지 않았다.
이렇게 좁은 자리가 그토록 넓게 보였을까?
병달은 수진을 따라 그녀의 집으로 내려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방에 들어서자 좁은 방안에 새 TV와 미니 콤프넌트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TV는 VTR을 겸한 것이었다.
병달이 그걸 유심히 보고 있자 수진이 뭔가 켕기는지 입을 열었다.
"너와 상의 없이 샀어. 나 혼자 있을 땐 필요가 없었는데 너가 가끔 들리니까 이방이 너무 삭막
해 보일 것 같아서..."
"누나 잘 했어. 나는 그런 생각까지는 못했어. 내가 사다 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미안해 누나!
그리고 이 TV는 정말 잘 했어. 곧 이 VTR이 필요 할 것 같애!"
"너가 그렇게까지 말해주니 내가 더 할말이 없네!"
"누나가 자꾸 그런 말하면 카드를 맡긴 내가 부담되잖아? 어차피 우린 한배를 탄 몸이니까 그런
생각들은 이제 버렸으면 해!"
"좋아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요즘 들어 부쩍 너가 커버린 느낌이 들어! 정말 변했어. 이제는 옛
날의 너가 아냐!"
"누나의 그 말을 좋은 칭찬으로 받아 들일께! 이제 아까 누나가 하려던 말 해봐?"
그가 갑치자 수진은 비키니 옷장에서 포장지에 싸여진 뭔가를 꺼내 그 앞으로 던지며 말했다.
"그보다 먼저 이 옷으로 갈아입고 앉아 있어! 배부터 채워야 할 거 아냐!"
그녀도 또 하나의 포장물을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걸 펴보자 뜻밖에도 감색 바탕에 금색의 귀여운 거북 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나이트 가운이었
다.
그걸 입어보자 감촉이 부드럽고 따스한 게 몸에 딱 맞았다.
수진의 뛰어난 감수성과 주도면밀한 한 면을 보는 것 같았다.
병달은 그녀가 저녁상을 준비중인 부엌을 향해 물었다.
"이 옷 어디서 샀어?"
"그저께 백화점에 가서 특별히 산 거야! 잘 맞니?"
"응! 아주..."
그는 그걸 입고 몹시 흡족한 표정으로 앉아 TV를 보았다.
근래 들어 이렇게 평온하고 만족스런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한끼의 배를 채우기 위해 이렇게 기다린다는 것조차 이토록 행복할 지는 일찍이 몰랐던
일이었다.
그런 생각에까지 마음이 미치자 살아 있다는 것부터 이곳으로 찾아와 이 방안에서 숨쉬고 있다
는 것까지 얼마나 행복한 건지 누군지 모를 이에게 감사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도저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부엌으로 후닥닥 뛰어나가 상을 차리고 있는 그녀의 볼
에 뽀뽀를 했다.
수진은 "아이 귀찮게시리..." 하며 그를 밀쳤지만 표정은 전혀 그런 기색이 아니었다.
어쩜 그보다도 더 많은 행복감에 젖어 있는지도 모른다.
수진은 그가 다시 방으로 들어간 뒤에도 콧노래까지 흥얼대며 뭘 그리 만드는지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는 밥상이 들어오고 시장하던 병달은 이것저것 허겁지겁 집어먹기
시작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병달이 더없이 고마웠다.
수진도 숟갈을 들며 병달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산지 벌써 5년이 지났는데 이제 다른 곳으로 이사갔으면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니?"
"나는 반대야! 왜냐하면 여기가 훨씬 평화롭고 정감 있는 곳이라서 좋아!"
"그 생각은 너무 감상적인 생각이 아닐까? 여유 있는 환경에서 줄곧 커온 네게 너무 갑갑하지
않겠니?"
"괜찮아! 좋기만 한데 뭐!"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
"그리고 이제 다른 살림을 불리지는 않을 거야! 불편해도 좀 참아 줘! 그때까지만...?"
병달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그녀가 '살림'이란 말을 거리낌없이 하는 걸 보면 그녀는 이제 그와의 생활을 기정사실
화하고 있었다.
그도 그 말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처음 도피성 외도에서 비롯된 관계가 이렇게까지 발전해 버릴 줄은 그는 꿈에서도 상상 못한 일
이었다.
그의 말처럼 무주공산이던 병달의 마음속에 언젠가부터 온통 수진의 것들로 꽉꽉 메꿔지고 있는
셈이었다.
병달이 단숨에 밥 한 그릇을 비우자 수진의 그릇에서 반이나 들어주었다.
그것까지 비우고 나자 포만감이 그를 휩쌌다.
그 행복한 포만감은 곧바로 하복부로 전달되어 벌써 팬티를 찢을 듯이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밥상을 치우고 들어오는 그녀의 앞모습을 보고 그때서야 그녀도 그와 똑같은 가운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누나도 나와 똑같은 거네?"
"아이 둔하기도 해라! 이제 봤어? 그리고 자세히 봐? 서로 달라! 너의 것은 거북이고 내 것은
토끼잖아?"
정말 옷 형태가 바탕색은 같았으나 수놓은 무늬가 달랐다.
어린이 동화 속에 나오는 '토끼와 느림보 거북이'를 주제로 한 기발한 아이디어 상품이었다.
무늬는 서로 달랐지만 한 쌍의 커플다운 이미지를 충분히 내보이게 하는 상큼한 가운이었다.
그 옷은 그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벌써 잠자기 위해서는 아니겠지만 걸레를 갖고 들어와 엎드려서 방을 닦는 수진의 허리를 나꿔
챘다.
"왜 그러니...?"
병달은 막무가내로 그녀의 가운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다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원 급하기는....!!!"
수진은 그녀의 다리 밑으로 들어온 손을 질질 끄집으며 방을 모두 닦고서야 멈추었다.
그러자 그의 손은 점점 위를 더듬으며 올라갔다.
"오늘내일 헤어질 일도 아닌데 뭐 그리 급할까? 찌찌찌..."
핀잔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그 소리에 그가 손을 슬며시 놓자 그녀는 잽싸게 몸을 빼어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달가닥 달가닥... 퍼드득 퍼드득...
또 뭘 하는 걸까?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는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가 알리 있으랴?
그릇 치우는 소리..
설거지하는 소리..
걸레인지 빨래인지 뭔가 물에 빠는 소리..
치카치카 이빨 닦는 소리..
얼굴에 물 껴 얹으며 세수하는 소리..
그래도 아직 뭔가 남았는지 그녀는 들어 오려하지 않으며 반대로 그를 불러내는 소리가 들려 왔
다.
"자기야! 이빨 닦어! 빨리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귀찮아!"
"그럼 자기에게 뽀뽀 안 해줄 거야?"
그때에야 그는 쪼르르 나갔다.
그래서 남자들은 모두 어린애라 했던가...

 

(31) 무주공산(無主空山)

한바탕의 태풍이 휩쓸고 간 방안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수진은 그의 품에 안기여 땀 범벅이 된 가슴에 난 털들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네가 알아 보라 한 거 있잖아?"
"봉미 통장 말이지?"
"응! 친구를 통해 알아 봤더니 정말 엄청난 숫자가 들어 있다더라! 그 친구 은행에만 5억이 넘
는데... 다른 은행들까지 합하면 몇 십억은 될 거야!"
"우와! 그렇게나 많이...?"
"잘 조회를 해 보라 했더니 너가 결혼하고 3억, 한 달쯤 전에 10억이 한꺼번에 들어 왔다가 타
은행으로 분산되었다 하더군. 그것만해도 13억이잖아! 그리고 그 출처는 모두가 너네 아빠 김유
성이고..."
"예상대로군!"
"한달 전이라면 내가 말한 '국립과학연구소'의 유전자 감식결과가 나온 후쯤이 맞잖아? 그런데
그 많은 돈이 빠져나갔는데 내가 모르는 걸 보면 김사장이 상당한 비자금을 조성해 둔 거 같애!
분명히 회사 돈일 텐데 말야? 하기야 그 사람 그 방면에는 빠꾸미 이니까 오죽할까..."
그러나 병달은 더 이상 관심이 없는지 수진의 젖꼭지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건 아닌데 봉미네 친정 동네인 평전리에다가 대규모 위락단지
를 지으려나봐. 그런데 그 땅이 우리회사 전신이었던 수성산업 창업주의 땅이라고 하지 아
마..."
그 말에 병달의 눈이 번쩍 뜨이면서 만지작거리던 그녀의 젖꼭지를 놓았다.
"그 얘기 자세히 좀 말해 줄래?"
"너도 수성산업을 알아?"
"그 사람이 조민수씨 아냐?"
"잘 아네! 어떻게?"
"그보다 자세한 얘기부터 해 봐?"
"회사에서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회사연혁에서도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빼버렸거
든. 아주 오래된 문서를 찾아봐야 알 수 있을 정도야.
그 일에 내가 관련돼 있어서 좀 알아. 내가 비서실에 올라간 초에 사장실의 문서파기를 내가 했
거든. 그러나 그땐 몰랐지. 시키는 일만 했으니까.
나중에 관심을 두면서 알아낸 정보로는 조민수와 김유성은 처음 동업하여 수성산업을 세웠다고
해.
수성산업의 '수성'은 조민수의 끝자 '수'와 김유성의 끝자 '성'을 합하여 만든 상호라는 거야.
조민수의 재력과 김유성의 능력이 의기 투합한 결과였지.
불과 3,4년만에 우리 나라의 유통산업을 휘어잡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고
해. 재력도 재력이지만 김유성의 수완이 그만큼 뛰어났다고 해야겠지.
회사가 점점 팽창해 가면서 조민수의 모든 재산은 회사에 투자되거나 담보로 제공되게 되고 대
신 김유성은 단 한푼의 돈도 투자하지 않은 채 주식의 반을 거머쥐었지. 그때만 해도 둘 사이는
좋았다고 해.
조민수는 회사가 그렇게 컸으니 투자한 돈은 그대로 남아 있는 걸로 여겼지.
그런데 오일쇼크가 오면서 전반적인 공황으로 사세가 서서히 기울고 그때에야 속을 들여다 본
조민수는 깜짝 놀랐어. 온통 빚더미에 앉아 있는 사상누각 같은 재정에다 자신의 모든 재산들은
몽땅 은행에 저당 잡혀 있는 거였어. 그러니 기절초풍 할 수밖에...
김유성에게 따졌지만 그는 오리발을 내 밀었겠지.
다음해 그는 주주총회에서 야금야금 주식을 빼 돌려온 김유성이 대표이사가 되고 그는 빚더미만
않은 채 자리에서 물러났어.
회사 경영을 정상화시킨다는 명분아래 이것저것 정리하는 과정에서 은행에 저당 잡혀 있던 조민
수의 재산들은 모두 공매처분 되던지 회사로 흡수되어 버렸지.
조민수는 법에 호소하고 권력에 호소하러 돌아 다녔지만 모두 김유성의 편들뿐이었지.
그해 그는 자살하고 말았어.
그후 한때까지는 창업주였던 그의 동상이 사옥 앞에 세워져 있었다고 해.
언제 파 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한편의 사기 드라마구만..."
병달은 마치 남의 일인 양 내 뱉었다.
"너네 아빠다운 수법이지 뭐!
그런데 그 조민수의 땅에 위락단지를 조성한다는 거야. 그 땅은 벌써 6년간이나 소유권 문제로
법정 싸움 중에 있었는데 올 여름에 최종 결정이 났거든."
"회사가, 아니 김유성이 이긴 모양이구나?"
그녀는 고개를 끄떡였다.
"누구와 싸웠는데?"
"조민수씨 문중이지 뭐!"
"문중? 그렇겠지! 후손이 없으니까..."
그리고 혼잣말처럼 또 한마디 내 뱉었다.
"누군가 또 김유성에게 엄청난 뇌물을 받았겠구먼..."
문중의 대표로 나선 누군가가 판결에서 져 주는 대가로 엄청난 액수를 챙기지 않았겠느냐는 병
달의 생각이었다.
딱 이 사람이다 하는 주인이 없는 땅이니까 능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름하여 바로 그곳이 무주공산이니까...

그 이야기를 들은 병달은 허탈했다.
한때 그 전말을 캐려 모진 집념을 불태웠으나 아무런 것도 못 얻고 흐지부지 된 적이 있었다.
기껏 얻은 것이 둘간의 법적인 공증서였는데 증빙할만한 첨부서류 하나 없어서 그리 개운치가
않았는데 수진의 얘기는 그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사건의 전후 내막을 비교적 소상히 알려 줬다.
언젠가 그가 그 현지에 들러 한 가문의 멸문의 흔적을 보고 눈물까지 흘리고 온 적이 있어서 그
허탈감은 더욱 진했다.
수 백년을 이어 왔다는 한 가문의 영화를 한순간에 찬탈한 것도 모자라 이제 그 가문의 마지막
남은 흔적마저 뭉개어 그 자리에 동물원을 짓고 청룡열차나 세우고 배때기 나온 작자들이 묵을
호텔이나 지어 더러운 돈을 긁어 보겠다는 심보가 아닌가?
김유성의 비정함을 또 한번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내가 그 얘기 괜히 했나봐! 너무 흥분하지마!"
"흥분하는 게 아니라 허탈해서 그래! 내 자신이 뭔가 싶고, 또 한번 거대한 바위덩이를 보는 것
같아 허탈해져!"
"그렇게 기죽을 필요 까진 없어! 그리고 넌 이기고 있는 거야. 부자간의 혈연을 넘어 섰다는 게
벌써 승리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러면서 병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다음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왔을 때 봉미는 돌아와 있었다.
단 하루만에 병달이 주었던 충격을 해소한 건지 생각보다는 밝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심벌 마크라 할만했던 치렁치렁 길렀던 머리는 짧은 단발머리로 변신해 있고 때
아니게 빨간 루즈까지 바르고 있었다.
딴에는 힘들었겠지?
"밥 좀 줘!!"
민망해진 병달이 툭 던진 첫마디였다.
"조금만 앉아 기다려요!"
태연한 척 미소까지 흘리며 대답하는 봉미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어디서 저런 야한 옷을 사 입었담?'
병달은 봉미가 입고 있는 원피스의 뒷모습을 유심히 쳐다봤다.
보일러를 틀어서 그리 춥지 않은 실내라지만 여름도 아닌 이 한겨울에 뒷목이 반 틈이나 파여진
데다 볼록한 히프라인이 온통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다니....
보이지 않는 비장한 마음을 숨긴 채 뭔가 단단한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그때 마침 시장바구니를 든 아줌마가 들어오며 병달에게 슬쩍 윙크를 했다.
병달은 그 뜻을 알아 차렸다.
어젯밤 그가 외박했다는 걸 봉미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아이구 아씨! 아씨도 저기가 앉으세요. 제가 할 테니..."
그러나 봉미는 몇 번을 사양하다 아줌마의 힘에 이끌려 병달의 맞은편에 겨우 앉았다.
그러나 끝끝내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건 병달도 마찬가지였다.
병달은 평소 잘 보지도 않던 신문을 펴들고 이쪽 저쪽 뒤지며 억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음식이 날라져 오고 수저를 들긴 했으나 둘 다 한 마디도 없었다.
그들의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깨려고 아줌마가 일부러 한마디 던졌다.
"저기 사장님은요, 오늘도 못 오신댔어요!"
"분명히 오후에 오신댔는데...?"
"일정이 바뀌었다고 그러랬어요."
순간 봉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병달은 숟갈을 놓고 위로 올라 왔다.
주인이 없는 이 집안!
병달은 일찍부터 그 권한에서 멀어져 있었고, 한때는 적어도 이 집안 권한의 1/2∼1/3쯤은 자기
차지라고 여겼던 봉미도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꿈이었던가를 느끼고 있는 시점이라 둘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이 집안의 주인이라 여기지는 못했다.
때문에 오늘밤 또다시 이 집안엔 서로 껄끄러운 객들만 머무는 집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 감정을 더욱 뼈저리게 느낄 이는 봉미인 것만도 분명한 일이다.

 

(32) 고해성사는 성당에 가 하시라...

그래서일까?
아줌마가 물러가고 경수까지 잠들자 두려움에 떨던 봉미는 먼저 백기를 들고 병달의 방문을 노
크하고 있었다.
똑똑똑
"누구요?"
"여보!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나 좀 살려줘요!"
"뭘 말이요?"
"문부터 좀..."
"고해성사를 할려면 성당에 가 하쇼!"
똑똑똑... 탕탕탕...
"여보! 제발... 으흐흐흑.... 엉엉엉...."
그가 문을 끝내 안 열어주자 퍼질고 앉아 우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가려니 생각했던 그녀는 좀체 갈 생각은 않고 갈수록 더욱 처량스레 울고 있었다.
참다못한 병달이 문을 열자 봉미는 그의 바지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당신 참 웃기는 작자야? 당신과 나 사이에 뭔 말 할 게 있다고 퍼질러 울고불고 난리야?"
"전 죽일 년이니까 어떡해도 좋아요! 그러나 내 맘에 있는 말은 들어주고 그러세요?"
"재차 말하건데 우리사이에 뭔 할 말이 있다고 지랄이야? 이 바지 놓지 못해!!"
병달이 그녀의 배때기를 집어 차자 저쯤 구석에 가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봉미는 다시 엉금엉금 기어와 그의 바지를 쥐어 잡았다.
이번에는 그녀의 가슴팍을 거머쥐고 내동댕이쳤다.
그녀는 또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 엉금엉금 기어 왔다.
병달은 또다시 면상을 갈겨버릴까 하다 참았다.
착하디 착한 그에게 그녀는 스스로 폭행을 당하며 그를 점점 폭군으로 만들고 있는 인상마저 들
었다.
다시 다가서는 그녀의 머리채를 나꿔채며 그녀의 방 쪽으로 질질 끌고 가면서 외쳤다.
"도대체 너 왜 그래? 지근지근 밟아줄까? 바싹바싹 씹어줄까?"
"그래줘요 제발!!"
"아니 이년이..."
그녀의 방에다 쳐 박아 넣으려던 생각을 바꾸어 계단을 질질 끌며 내려가 김사장의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녀를 바닥에다 내동댕이치고 침대에 걸터앉은 병달은 조용히 그러나 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년아! 어디를 지근지근 밟아 줄까? 또 어디를 바싹바싹 씹어 줄까?"
"자기 좋을대로..."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그렇게 내뱉는 봉미를 보자 병달은 버럭 겁이 났다.
"아니! 뭐 이런 년이 다 있어?"
그렇게 말은 했지만 내심 겁먹은 소리였다.
약싹 빠른 봉미가 벌써 그걸 눈치채고 벌떡 일어서더니 옷을 훌러덩 벗어 버렸다.
"나 자기 없인 못 살아! 제발 날 버리지 말아 줘!"
'뭐 이런 년이 다 있어?' 그 말 할 새도 없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그의 옷을 벗겨내는 봉미에게 단지
"아니 이년이..."
이 한마디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드러난 그의 뿌리를 입에 문 봉미는 마치 개가 제 밥그릇 핥듯이, 그 속의 뼈다귀를 핥아대듯이
그의 변질된 살덩이를 게걸스럽게 빨아댔다.
"아아...!"
그의 입에서 그런 무기력한 소리가 새어 나올 줄이야...
허나 이미 입 밖으로 튀어 나간 그 소리를 어찌 거두랴?
병달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봉미를 떼어내고 저쪽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찬장 속에서 양주 한 병을
꺼내 들었다.
벌컥벌컥 두어 모금 마시자 목이 타 들어가듯 화끈거렸다.
봉미도 어느새 쪼르르 그의 곁에 와 그가 술병을 입에서 떼자 뺏어 마셨다.
다시 또 한 모금씩을 마시고 그걸 들고 다시 제 자리로 왔다.
이제 술이 들어갔으니 취한 척이라도 하며 그녀를 휘어잡아야 했다.
"어이! 이리 와서 내 발바닥이나 빨아! 이 쌍년아!"
봉미는 시키는 대로 그의 발가락부터 핥아대기 시작했다.
병달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연거푸 몇 모금을 더 마셨다.
그녀도 한 모금을 더 달라고 위를 올려다봤다.
병달은 그러는 그녀의 얼굴을 발로 쿡 밀어버리자 그녀는 벌러덩 까집어졌다.
그리고 까집어진 그녀의 몸 위에다 술을 뿌렸다.
"이년아! 술이 그만큼 쳐 먹고 싶으면 니 몸에 묻은 걸 핥아먹어! 개처럼 핥아먹어라!"
봉미는 그의 말대로 손으로 그걸 적셔다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날 밤 그녀 스스로 앞으로 종처럼 죄인처럼 살겠다고 한 약속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쌍스
럽고 굴욕적인 그의 학대에도 전혀 거부치 않고 기꺼이 응한다는 것이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기꺼이 응할 정도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 적극적으로 데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병달이 점점 더 패설적인 언어폭력과 신체적 학대를 가할수록 봉미는 더욱 달아오르며 적극성을
띄어가고 있는 것이다.
봉미는 그런 피학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외국 포르노에서나 보던 S.M이라는 성 피학증에 그녀도 젖어든 것일까?
병달이도 은연중에 새로운 쾌락의 도전을 쉬임 없이 받으며 봉미의 게임에 말려들고 있었다.
처음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어 여태껏 그를 기만한 죄를 복수하려 시작한 게임이 점점 엉뚱한 방
향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병달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취기에 몸을 흐느적대며 술로 범벅이 된 그녀의 젖통을 툭툭 걷어차
자 그녀는 움찔움찔하다가 그녀의 발목을 잡고 그 발바닥에 묻은 술까지 핥아먹었다.
"역시 넌 개년이야! 훌륭한 개싶이야! 빛나는 개밑잎라고...
자! 짖어봐! 멋진 개 밑잎답게 멍멍멍...?"
"멍멍! 멍멍멍....!!"
"야이 개싶아! 짖지만 말고 개답게 기어 다녀!"
그녀는 두 팔과 무릎을 짚고 엉금엉금 방안을 기어 다녔다. 멍멍거리면서....
그걸 쳐다보며 그는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이제 목이 따끔대거나 속이 화끈거리지도 않았다.
봉미는 아직도 멍멍대면서 방안을 돌고 있었다. 재밌다는 표정을 짓고서...
병달은 그 개를 몰고 가는 주인처럼 따라 걸으며 몇 모금의 술을 더 마셨다.
마지막 한 모금이나 남은 술을 그녀를 툭 건드려 올려다보는 그녀의 입에다 부어 주자 쾡쾡 거
리면서도 입술에 묻은 것까지 핥아먹었다.
그녀의 엉덩이를 툭 차자 그녀는 "멍멍멍!" 짖으면서 다시 기어가기 시작했다.
마침 오줌이 마려워진 그는 대단한 생각을 한 끝에 그녀의 엉덩이를 내려다보며 뒤에서 내려 갈
기기 시작했다.
흠칫 놀란 봉미가 뒤를 돌아보며 몸을 빼기는커녕 자신의 엉덩이를 쳐들며 두 손으로 골짜기를
벌리고 그 오줌줄기가 그 속으로 들어오도록 조준하며 엎드려 있었다.
병달 또한 그의 줄기를 거머쥐고 그녀의 아래위 두 구멍을 차례대로 쏘아댔다.
금새 바닥은 그녀의 몸을 타고 내린 술과 오줌으로 한강이 되었다.
"이게 고해성사보다 훨씬 좋지?"
그녀는 대답대신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반쯤 지워진 빨간 루즈 아래로 침이 흘렀다.
미친년처럼, 개처럼...

 

(33) 복수의 신파극

술에 취한 그녀가 바닥에 나 뒹구는 모습을 보며 먼저 자기의 방으로 올라온 병달은 아직도 녹
화중인 모니터 속을 들여다봤다.
벌렁 까집어 누운 봉미의 손엔 어느새 가져온 건지 새 술병이 쥐어져 있었다.
몇 모금을 마시던 그녀는 그걸 가랭이 속에다 끼우고 벌컥벌컥 부었다.
그리고 그대로 한동안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병달은 전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야 병달이!"
"응 알아! 너 말곤 이 전화 걸 사람 아무도 없잖아!"
"지금 뭐해?"
"뭐 하긴? 잠자던 중이지... 너 술 취했구나?"
"응 조금... 누나 여기 좀 올 수 있어?"
"아니 이 밤중에? 뭔 일이 생겼니?"
"그건 아닌데... 너무 보고 싶어서??"
"참어! 곧 내일인데 내일 만나면 되잖아?"
"안돼! 지금 와 줘?"
"김사장은 아직 출장 중이라지만 봉미가 있잖아?"
"술에 곯아 떨어졌어! 제발 와 줘??"
"아이참! 꼭 어린애 같긴... 그래 내가 니네 집 앞에서 삐삐 칠 테니 데리러 나와!"
"알았어!"

아직도 모니터 속에는 가랑이 속에다 병을 끼운 봉미가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아마 그대로 잠든 모양 같았다.
병달은 아래층으로 성큼성큼 내려 왔다.
취기로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아직까지는 견딜 만했다.
봉미의 가랑이 밑에서 병을 빼내자 와르르 술이 쏟아져 나왔다.
순간 뭔가 허전했던지 눈을 게슴츠레 뜬 그녀가 병달을 올려다보며 혀 꼬인 소리로 뇌까렸다.
"아이 사장님! 그냥 빼내면 어떡해요? 이년도 여자라고요! 더 해줘요? 더 깊이 팍팍해 달란 말
예요! 예? 사장님...???"
"그래 이년아! 올라가서 니 아들놈하고나 해라! 이 개년아..."
"아! 우리 서방님이구나?! 서방님! 날 안아줘요? 날 좀 안아 달라고요..."
그녀는 완전히 맛이 가 있었다.
병달이 그리로 내려 갈 때는 최소한의 양심을 발휘하여 그녀를 끌고 올라와 그녀 방에다 재우려
고 내려 간 건데 그 마음은 싹 달아나 버렸다.
병달은 달려 붙는 봉미를 떼어 바닥에다 내동댕이치고 다시 올라와 버렸다.
그녀는 모니터 속에서 방바닥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조금 있자 삐삐가 뻬뻬 울었다.
허겁지겁 뛰어나간 그가 문을 열자 웅크린 수진이 서 있었다.
"고마워 누나! 금방 오네?"
"도로가 텅 비었으니까... 그나저나 너 한밤중에 이 무슨 난리이니?"
"미안해! 그냥 보고 싶어서라니까..."
그들이 현관을 들어와 이층 계단을 막 밟고 올라서는데 김사장의 방에서 꽥꽥 질러대는 봉미의
소리가 들려 왔다.
"야! 이 새꺄! 더러운 잎대가리 하나 가졌다고 유세치 마라! 야! 야~..."
"저거 봉미 소리 아냐?"
"게의치 마!"
병달은 수진의 팔을 끌고 그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코트를 벗어 걸던 수진이 조그마한 모니터에 나타난 화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거 CCTV잖아?"
"맞아! 이번에 내가 사다 단 거야."
"너 보기 보단 무서운 애구나!"
"생각보다 쓰릴 만점이라고!"
"만약 들키기라도 한다면 어쩌려고 그래?"
"그땐 이 집에서 나가야지 뭐!"
"그래도?"
"만약을 위해 내가 없을 땐 침대 밑에다 넣어둔다고! 그리고 이 방엔 아무도 못 들어와"
수진은 화면 속에서 소리를 꽥꽥 지르며 흐느적대고 있는 봉미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너도 술이 취한 걸 보니 제 혼자 저렇게 되진 않은 것 같은데?"
"그건 나중에 보면 알 테고... 이제 가지 뭐!"
"가긴 어딜 가?"
"어디긴? 우리 집이지! 여긴 그네들 집이잖아..."
병달은 주섬주섬 옷을 껴입으며 테잎을 빼내고 다시 새 테잎을 꽂은 후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
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수진은 도저히 궁금하여 못 견디겠던지 병달의 팔을 끌고 김사장의 방을 살
며시 열었다.
순간적으로 독한 술내와 오줌 냄새, 그리고 메스꺼운 속내까지 뒤엉켜 코를 찔렀다.
봉미는 그대로 잠든 건지 정신을 잃은 건지 홀딱 벗은 채로 엎어져 있고 입 언저리 근처에 토해
낸 음식 찌꺼기들이 너지러져 있었다.
"얘! 저대로 두면 얼어죽는 거 아냐?"
"냅둬! 뒤질려면 뒤쥐라지 뭐!"
"그래도?"
"괜찮아! 저번에도 멀쩡하더라고..."
수진은 못 참겠던지 까치발로 들어가 침대 위의 봉미 옷으로 그녀를 덮어 주고 나왔다.

대문밖에 대어 놓았던 수진의 차에 오른 둘은 텅빈 도로를 마치 한적한 시골길처럼 달려 금방
수진이네 골목을 돌아올라 갔다.
수진의 방으로 들어 온 그들은 가져온 테잎부터 꽂았다.
테잎을 되감는 동안 잠시 웃옷을 벗고 잠자리를 깔던 수진은 화면이 나오자 마치 대단한 볼거리
라도 생긴 양 잔뜩 호기심어린 눈으로 화면을 주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군들 남의 음밀한 침실 모습을 본다는 건 엄청 자극적인 일일 수밖에 없지 않
은가.
병달의 기분도 그와 비슷했다.
비록 자신은 그 장본인중 한 사람이지만 자신과 다른 여자와의 성 장면을 수진에게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그를 흥분케 했다.
화면에 사람의 얼굴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퀵 스피드로 돌렸음에도 화면의 중앙을 자리 잡은 방바닥과 침대 모습만 덩그러니 계속 보여질
뿐이었다.
5분 여나 지났을까?
그제야 사람의 모습이 비쳐 퀵 스위치를 원상으로 회복시키자 봉미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병달이
나타났다.
처음부터 나타난 그의 충격적인 행동에 수진은 바짝 긴장했다.
마치 죄인을 다루듯이 그의 무릎 앞에 봉미를 내동댕이치자 터프한 그의 행동에 탄복하는 빛이
역력했다.
또 다음 말에 수진은 감동하고 말았다.
"이년아! 어디를 지근지근 밟아 줄까? 또 어디를 바싹바싹 씹어 줄까?"
수진은 넋 나간 사람 마냥 화면 속에 취해 있는 동안 병달은 따스한 구들목에 발을 묻고 누워
있다가 온몸으로 파고드는 취기를 느끼며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
병달은 벌써 코까지 가늘게 곯았지만 수진은 화면 속에 깊이 빠져 그도 옆에 보고 있는 걸로 착
각하고 있었다.

"어이! 이리 와서 내 발바닥이나 빨아! 이 쌍년아!"

"이년아! 술이 그만큼 쳐 먹고 싶으면 니 몸에 묻은 걸 핥아먹어! 개처럼 핥아먹어라!"

"역시 넌 개년이야! 훌륭한 개싶이야! 빛나는 개밑잎라고... 자! 짖어봐! 멋진 개 밑잎답게 멍
멍멍...?"

"야이 개싶아! 짖지만 말고 개답게 기어 다녀!"

수진은 계속 이어지는 그런 쌍욕들이 그의 입에서 나온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의 그의 행동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외화 더빙하듯이 그는 입에 맞추어 누군가가 저질의 욕설로 목소리를 변조시킨 게 아닐까 의심
할 정도였다.
"어쩜 저럴 수가....?"
그가 봉미의 뒤꽁무니에다 대고 오줌을 갈겨대는 장면에 이르자 수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진짜 저게 너라면 넌 사람이 아냐? 사람의 탈을 쓴 악마라고..."
그러나 병달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약간은 장난기 서린 저 얼굴이 어찌 악마란 말인가?
어찌 저 얼굴로 그런 쌍스런 언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저 얼굴 모습처럼 잠시 장난을 친 걸 거야?

"이게 고해성사보다 훨씬 좋지?"

병달의 그 말은 수진에게 많은 의문점을 안겼다.
고해성사라니? 그러면 봉미가 그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단 말인가?
그래서 봉미가 꼼짝 못하는 걸까?

그리고 병달이 사라지고 혼자 남은 봉미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새 술병을 들고 오고, 병마개를
따내고 꾸역꾸역 마시다가 자신의 사타구니 속에다 그걸 집어넣는 모습에 수진은 아연하게 놀랐
다.
"아니 어쩜 저럴 수가...??"
술에 취하여 제 정신이 아니라 치더라도 술집 작부도 아닌, 회사에 같이 있을 적 그토록 품위
찾고 얌전을 떨며 도도하던 그녀가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계속 이어진 화면 속의 다음 말에 할말을 잊었다.

"아이 사장님! 그냥 빼내면 어떡해요? 이년도 여자라고요! 더 해줘요? 더 깊이 팍팍해 달란 말
예요! 예? 사장님...???"
"그래 이년아! 올라가서 니 아들놈하고나 해라! 이 개년아..."
"아! 우리 서방님이구나?! 서방님! 날 안아줘요? 날 좀 안아 달라구요..."

병달이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냅다 내동댕이치고 그것도 모자라 발로 배를 걷어차는 모습에
수진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조소와 연민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분명 자신이 부채질한 일이건만 이렇게도 무자비하게 전개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한 일이었
다.
'이건 아니야...? 분명 이런 것은 아니었어.....'
그러나 이미 복수의 신파극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고 있는 걸.........

 

(34) 허탈한 역사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역사는 밤에 이뤄지고, 그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가녀린 여자의 입술에서부터 시작되어 어리석
은 남자의 팔목에서 무자비하게 펼쳐진다.
우리의 병달이도 수진의 입술에서 옮겨 붙은 바람을 이 겨울 냉한처럼 차디찬 비수로 만들어 그
들의 가슴을 도륙 하려는가....

그런 저런 잡다한 사건들로 하여 두 달여가 후딱 지났다.
그 동안의 사건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먼저 수진이 애를 가졌다는 소식이 가장 최근의 사건이었다.
병달이는 이번 수진의 임신에 대하여 의심한다거나 전혀 꺼림찍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꽃다발을 한 달이나 넘게 그녀의 방으로 매일 배달시키고 있었다.
또 하나의 사건은 봉미를 앞세워 '개발동의서'를 받으러 평전리에 들어간 직원들이 개망신을 당
하고 돌아 왔다는 소식이었다.
산수경관 수려하고 먹고사는데 아무런 부러울 거 없이 살기 좋은 그곳에 놀자 판을 벌이자는 그
들의 속셈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병달의 장인을 앞세워 김사장이 직접 나섰지만 이번에는 조씨 문중패들까지 가세하여 죽사발이
되어 돌아왔다.
마지막 사건으로 그중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 병달의 엄마 문정희가 병원에서 사라져
버린 사건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그 전모가 밝혀졌는데 일신병원에서는 더 치료할 방법도 의지도 없는 것 같
아 서울 근교의 소 병원에서 자원하여 데려 갔다는 것이었다.
병원 이름은 조광병원으로 그쪽 원장이 직접 찾아와 데려 갔다고 했다.
병달은 그 말을 듣자마자 당장 조광병원을 찾아 나섰다.
거의 시골이나 다름없는 곳에 위치한 그 병원은 3층 짜리 건물에 1층은 진료실, 2층은 환자 병
실, 3층은 원장가족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의 엄마는 2층 맨 구석방에 누워 있었는데 아담한 방이 그리 얼씨년스러워 뵈진 않았다.
병달이 원장실에 들렀을 때 백발의 나이 지긋한 원장은 먼저 사과의 말부터 꺼냈다.
"자제분이라 했습니까? 먼저 사전 상의도 없이 모친을 모시고 와서 송구스럽다는 말부터 해야겠
군요! 나는 이 병원 원장으로 조광호라 합니다!"
원장은 병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모친을 전부터 좀 아는 관계로 늘 주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댁의 부친 김사장으로부터
병원비 지급이 정지되고 병원에서도 난감해 하는 것 같아 부득이 내가 모셔 왔답니다. 사전에
알리지 못한 이유에 대해선 새삼 말씀 안 드려도 알 테니까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노 원장의 점잖은 말투에 병달은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댁의 부친께서 버린 사람이라고 하여 신경 쓰지 않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마는 내가 자원하
여 환자를 모셔 왔으니 내 정성껏 돌볼 테니 청년께선 아직 공부하는 학생이라 하니 하던 공부
나 열심히 하길 바라오! 그리고 병원비 따위는 생각지 마시구려!"
원장의 그 말에 병달은 눈시울을 적시며 물러 나왔다.
더 자세한 사연 추궁이나 항변 따위는 그분의 귀한 어투에 반하는 일이라 감히 꺼낼 수도 없었
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러니까 그의 엄마가 사라진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토
요일 오후,
병달의 거물에 대어가 낚여 있었다.
학교를 파하고 온 그는 습관처럼 녹화된 두 CCTV 화면을 돌려보다 얼핏 아래층 김사장의 방에서
봉미와 다투는 모습이 잡히자 대뜸 대어라고 예감했다.
그는 그걸 무조건 책가방에 쑤셔 넣고 손살같이 나왔다.
어딜 가냐고 묻는 봉미의 물음에 대답대신 그녀의 히프를 툭 치고 나오자 영문도 모르는 그녀는
자신과의 오해가 모두 풀린 걸로 착각하는 건지 피식 웃었다.
병달은 택시를 잡아타고 무슨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그 책가방을 보듬어 안고 있자 기사가 "
금방이라도 턴 거유?" 하고 농을 던졌다.
오늘따라 그 길이 왜 이리도 먼지?
그의 속타는 마음 한 구석에 방금 그가 봉미의 히프를 왜 건드렸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
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이 나왔다.
대어를 낚아 기분은 그랬을지 몰라도 마음은 전혀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그보다 착각하는 봉미의 표정이 간지럽다는 생각까지 들자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들을 털어 내려
애썼다.
차가 강서동 고개를 올라서자 그는 급히 손을 들어 차를 세웠다. 마치 달려오는 빈 택시를 세우
듯이...
물론 수진이 다니는 길로 끝까지 올라 갈 수도 있었지만 급한 마음에 밑에서 내렸다.
그리고 허겁지겁 뛰어 올라갔다.
병달이 수진의 집 가까이에 이르자 수진이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어디 가려던 참이야?"
수진은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그의 가방을 받아 쥐며 말했다.
"자기 귀 먹었나 봐? 내가 저 아래 골목 입구에서 얼마나 불렀는데..."
"왜?"
"왜는? 택시에서 내리는 자기를 발견하고 급히 차를 세우고 내렸으나 자기가 얼마나 빨리 뛰는
지 금방 사라져 버리더라고. 그래서 먼저 올라와서 기다리던 중이잖아!"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수진의 방에 다다르자 방 앞에 놓여 있는 꽃다발이 그들을 반겼다.
"고마워 자기! 너무 행복해!"
병달의 목에 매달리는 수진의 입술을 한동안 빨다가 그녀를 번쩍 들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도 시든 꽃부터 아직 생생한 꽃까지 빙 둘러 걸려 있었다.
미쳐 걸리지 못한 꽃다발은 TV 위에도 놓여 있고 이불 위에도 놓여 있었다.
그 꽃다발들을 받고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수진은 잠시 누워 있으라며 이불을 내리며 그 위에 있던 꽃을 벽에다 걸면서 한마디했다.
"이제 이 꽃은 여기 걸어도 되겠다!"
"왜? 그 꽃은 버림받은 꽃이야?"
"아니 그 반대지! 여태 안고 잤으니까... 오늘밤은 얠 안 안고 자도 되겠지?"
하며 그를 쳐다봤다.
무슨 뜻인지 병달이도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
그걸 확인한 수진은 즐거운 표정으로 저녁을 지으러 나갔다.

병달의 마음은 조급했지만 저녁을 먹고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 갈 때까지 참았다.
잠자리를 깔아 둔 수진이 세수를 한다며 나간 사이 수진의 핸드폰을 들었다.
0번을 길게 누르자 삐하고 신호음이 갔다.
"여보세요?"
다행히도 봉미의 목소리였다.
"나 오늘 못 들어 갈 것 같은데 알아서 해?"
"응 알았어요! 즐겁게 지내고 오세요!"
두말없이 뚜껑을 닫았다.
집에서 나오며 히프를 건드린 결과가 이런 거란 말인가?
'즐겁게 지내고 오세요!'
느끼한 그 목소리.. 그 뜻이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너가 간 데를 내가 아노라, 이제 어차
피 나눠 먹기 아니냐?' 이런 식이 아니란 말인가....
불쾌했다.
하지만 같이 있을 동안이나마 그의 가리개가 되어주며 가끔씩 쌓인 울분을 털어 내는 맷방석 역
할만 해도 그에겐 충분하지 않은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 올린 수진이 들어와 손거울을 앞에 놓고 앉아 허연 크림을 찍어 바르며
연신 그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오늘밤 또 한번 멋들어지게 굿판을 벌여 보자는 신호겠지?
병달은 테잎을 꽂고 돌렸다.
지난번 것과 마찬가지로 앞부분은 텅빈 방안 모습만 지루하게 이어졌다.
화면 속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난 건 오후 4시를 넘은 시간이었다.
김사장의 모습이 먼저 비치고 곧 뒤따라 봉미가 나타났다.
"출장 결과는 좋았어요?"
"그래! 그간 별일은 없었지?"
"이틀사이에 별일은 무슨..."
봉미는 가방에서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꺼내어 씻을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여 놓았다.
그리고 때맞추어 들어오는 아줌마에게 구분해 낸 옷가지들을 쥐어주며 말했다.
"이거 세탁기에 넣어두고 이제 가셔도 되겠네요!"
"네 알았어요! 아씨 그럼..."
아줌마가 옷가지들을 들고 나가자 김사장이 봉미의 손을 은근히 끌며 침대에 앉혔다.
"무슨 고민거리라도 생겼어?"
"고민은 무슨 고민..."
"네 얼굴에 그렇다고 씌여 있는데 뭐?"
김사장은 봉미를 품에 안았다.
"그일 때문이라면 너무 상심하지 마! 너나 어르신 잘못은 아니잖아?"
'개발동의서' 문제로 평전리에서 망신당한 그 사건에 대한 얘기 같아 보였다.
하지만 봉미의 얼굴에 씌어진 그림자는 그것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봉미가 정색하며 말했다.
"사장님!"
그들만 있을 때는 그렇게 부르는 모양 같았다.
김사장이 봉미를 떼어놓으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들의 관계를 더 이상 지속시킨다는 것은 힘들어서 못 견디겠어요! 이제
그만 절 놓아 주셨으면 해요?"
그러나 김사장은 매정하게 끊었다.
"안돼 그건!!"
봉미가 김사장 앞에 무릎을 꿇으며 빌 듯이 말했다.
"제발 사장님! 제 마음을 좀 헤아려 주세요!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내가 그 동안 섭섭하게 한 거라도 있어? 여태 너의 요구는 다 들어 줬잖아!"
"그래서가 아니라.."
김사장이 그녀의 말을 막으며 소리쳤다.
"그럼 뭐야? 늙은 내가 이제 싫어졌단 말이야? 어디 젊은 놈이라도 생긴 거야?"
봉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으흐흐흑!!"
김사장은 다시 그녀를 품에 당겨 안으며 등을 토닥거리며 살살 달래었다.
"그래 조금만 참아봐! 병달 어미와 법적으로 이혼은 했다지만 너와 내가 새삼 공식관계가 된다
는 건 힘들다는 걸 너도 알잖아? 그러니 그건 이제 미련을 버리고... 대신 평전리 위락단지를
내 기필코 추진할 테니 그게 끝나면 호텔 하나 정도는 네게 줄 수 있으니 그간만 참아봐?"
그때 화면을 보고 있던 수진이 입을 딱 벌리고 다물 줄을 몰랐다.
그걸 쳐다 본 병달이가 화면을 멈추었다.
"자기도 호텔이 부러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김사장다운 발상이잖아? 얼마나 기발하냐? 그래서 벌린 입이 안 다물어
지네! 호호호..."
"야! 정말 여자들은 알다가도 모를 동물이야? 자기까지 그럴 줄이야..."
병달의 비아냥 섞인 그 말에 입술을 삐죽이던 수진은 병달이 쥐고 있던 리모콘을 뺏으며 말했
다.
"괜한 질투야! 비디오나 계속 보자 왜? 첩보물보다 재밌네 뭐!"
화면은 다시 돌아가고...

"... 대신 평전리 위락단지를 내 기필코 추진할 테니 그게 끝나면 호텔 하나 정도는 네게 줄 수
있으니 그간만 참아봐?"
봉미는 그 말에도 별로 신통찮은지 계속 훌쩍이고 있다가 갑자기 그의 품을 벗어나며 소리쳤다.
"제발 이제 우리 그런 거래는 그만해요! 지긋지긋해요! 신물이 난다고요??"
큰소리로 외쳐대는 돌연한 그녀의 태도에 당황한 김사장은 머뭇머뭇 말했다.
"그것도 맘에 안 든다는 뜻이야? 아니면 내가 약속을 안 지킬 것 같아 그러는 거야?"
봉미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아휴 지긋지긋해! 징그러워! 내가 더러운 덫에 걸린 거야?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야, 악
마! 더럽고 매스꺼운 악마라고...!!!"
"아니 뭐라고? 보자보자 하니 이년이 못 하는 말이 없네! 기껏 돈 대주고 귀여워 해줬더니 감히
어디를 기어올라!!"
철썩!
그의 손이 봉미의 볼을 강타하자 단번에 그녀의 몸이 침대 위를 나뒹굴었다.
"응응응응....!"
봉미는 그대로 엎어져 펑펑 울기 시작하고 분을 참지 못한 김사장은 아직도 씩씩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내 자식을 놓아준 너라지만 정 그렇게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병달 애미와 같은 길을 걷지 않으려면 확실히 행동해! 나 그렇게 인정 많은 사람이 못돼!
그리고 그 년이 왜 그렇게 된지는 너도 이제 알 테지만 너처럼 내게 쌍소리 한번 안한 그 년도
그렇게 만들었던 나라는 걸 확실히 알아둬!
충고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시는 용서 못해! 알았어??"
그는 양복을 주워 들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봉미는 실성한 사람처럼 침대를 쥐어뜯으며 처량하게 울부짖었다.
그걸 바라보는 수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긴 봉미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미루어 보건데 사회 풋내기에 불과하던 어느 날 갑자기 김사장에게 몸을 뺏기고, 그것이 미끼가
되어 꼬인 현실의 미련을 과감히 버리지 못하여 계속 악수를 두어온 실수로 여기에 이르렀고,
김사장의 장단에 도깨비춤을 춘 결과가 아닐까?
엄밀히 따지면 그녀도 병달과 다름없는 피해자라 할 것이다.
봉미는 계속 구슬피 울고 있고 수진도 연민의 눈물로 가슴을 저몄다.
"자기! 이제 끝났나봐? 자자..."
그러나 병달은 멍한 얼굴로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병달은 평소 자신이 짐작해왔던 것들이 하나하나 진실로 밝혀지면서 분노나 복수심보다는 허탈
감이 앞서고 있는 것에 스스로를 미워하고 있었다.

 

(35) 엄마 왜 날 낳으셨나요...

다음날 아침 병달이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집에는 봉미뿐이었다.
대문을 따러 일부러 나온 그녀는 아침부터 요란한 화장을 한 얼굴로 때 아니게 아양을 떨었다.
"어젯밤 혼자 있는데 얼마나 무서웠다고...!!"
병달이 비웃음을 띄며 내려다보자 변명처럼 늘어놓았다.
"아줌마는 일찍 가버렸지, 아버님은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지, 경수는 초저녁부터 잠만 자
지....."
"그래서??"
"아니 그랬다고..."
앞서 현관을 들어서던 병달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멈춰 서며 뒤따라오던 봉미의 멱살을
움켜잡더니 그대로 끌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봉미는 이유도 모른 채 벌써 사색이 되어 있었다.
"너 바른 대로 말해? 모른 채 하거나 발뺌하면 죽는 줄 알아?"
그녀는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떡였다.
"나 잠시 화장실 다녀 올 때까지 꼼짝 말고 있어? 알았어?"
병달이 눈을 부아리자 고개를 다시 끄떡거렸다.
밖으로 나간 그는 화장실 대신 그의 방에 들러서 밤새 끼워 두었던 테잎을 바꾸어 놓고 돌아왔
다.
"너 우리 엄마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지?"
"몰라! 아무 것도 몰라..."
병달은 주먹으로 다음엔 때리겠다는 시늉을 하고 다시 물었다.
"우리 엄마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넌 알잖아?"
"난 몰라! 제발 난 모른다고...."
"이년이!?"
그의 주먹대신 발길이 배를 걷어차자 푹 쓰러지며 벌벌 떨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는데 살고 싶으면 말해? 내가 아니면 다른 놈이 널 가만 두지 않을 거잖아? 나냐 그
놈이냐 확실히 선택해!"
그러나 벌벌 떨기만 할뿐 입을 열지 않았다.
"이년아! 너는 불쌍하게도 길이 하나 뿐이야! 미안하지만 너를 이제껏 이용했던 그 놈은 너의
수명을 읽고 있어! 이용가치가 다한 거란 말이야! 이제 선택의 기회는 한 번 뿐이야! 마지막이
라고...."
병달의 나직한 그 말에 봉미는 그의 바지를 움켜잡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엉엉엉~ 내가 잘못 했어요! 잘못 했어요! 죽을죄를 지었어요! 당신을 속이고..."
병달은 그녀의 입을 막으며 짜증스럽게 외쳤다.
"그거 말고 우리 엄마 얘기나 해 이년아!"
나직한 저음이었다.
"엉엉엉~ 병달씨의 엄마는 사장님이 일부러 사고를 내서 그렇게 만든 거라고 했어요! 더는 몰라
요! 정말이에요! 으흐흐흑...."
"그래 됐어! 그만 해!"
병달은 그게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흐느끼는 봉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응응응응...."
그러자 더욱 매달리며 엉엉 울어대는 그녀를 안아 세웠다.
"자! 그만 울고 옷이나 벗어!"
봉미는 그 말뜻을 못 알아듣고 울다가 "예?" 하고 반문했다.
"몽땅 벗어라고! 내가 안아 줄 테니까...."
왜 일까?
그녀의 발설에 대한 보답의 뜻일까?
아니면 가련한 그녀에 대한 연민에서 일까?
이것저것도 아니라면 갑자기 욕정이 솟구친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김사장에 대한 분노의 행동일까?
아무래도 맨 마지막 가정이 그의 심경에 가까우리라 여겨진다.
얼굴은 온통 환칠 해 놓은 듯이 눈물과 지워져 내린 화장으로 범벅이 된 모습에다 근래에 들어
부쩍 여윈 몸에는 앙상한 갈비뼈가 불거져 있고 그 위로 애가 밤낮으로 빨아대는 젖은 빈 자루
마냥 축 쳐져 있었다.
가렴주구(苛斂誅求)라 했던가?
가혹한 세금과 재물을 강탈당해 뼈만 앙상히 남은 뭇 백성의 모습..!
그녀의 모습이 그와 같았다.
하지만 그런 봉미의 몸을 부둥켜안은 병달의 손에는 그런 것들이 감각에 와 대이지 않았다.
봉미가 서러움에 복받치는 몸짓으로 그녀의 입술을 그의 입술에다 포개려 하자 벌컥 화를 내며
그녀를 밀쳐 침대에 뒤로 넘어뜨린 후 후닥닥 자신의 바지를 풀고 그녀의 다리를 치켜올리며 그
사이에다 꽂아 넣었다.
그건 통상 말하던 살덩이라거나 몽둥이라거나 음경 또는 옥경 따위는 아니었다.
또한 평범한 검도 아니었다.
예리한 비수였다.
그녀의 마음을 절절히 도륙하는 비수였다.
그는 그 비수를 채 준비되지 않은 봉미의 가랑이 속으로 거칠게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녀는 제대로 신음소리 한번 내어 볼 새도 없이 일을 끝내고는 나가 버렸다.
병달이 사라지자 봉미는 서러운 울음을 또다시 시작했다.
"으흐흐흑~ 엄마 왜 날 낳아셨나요? 엉엉엉엉........"

딩동~ 딩동~ 딩동~
딩동딩동딩동~~~
계속되는 초인종소리에 병달은 밑으로 내려갔다.
현관의 모니터 속에 아줌마의 얼굴이 비쳤다.
'오늘은 일요일인데 왜 왔을까?'
삐~ 대문 스위치를 누르고 다시 위로 올라 왔다.
봉미의 방을 지나치면서 귀를 기울여 보니 울음소리는 그쳐 있었다.
대신 경수가 칭얼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방으로 들어온 병달은 침대에 벌렁 누워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상념에 잠겼다.
뭘 하려 하고 있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리라는 상상을 했다.
그의 뜻대로 라면 인간 김유성이 그간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면서
쌓아 올렸던 부와 명성이 하루아침에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며, 그것은 곧 이 이 집안이 쑥대
밭으로 변한다는 뜻이고, 자신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치명타를 입을 건 뻔한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무모한 이 게임을 계속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병달은 확신도 거부도 할 수 없는 묘한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딜레마는 더욱 그를 혼란케 했다.
그는 머리 속을 몇 번씩이나 흔들어 재 정돈하는 과정에서 겨우 결론을 도출해 낸 것이라는 게
기껏 '케 세라 세라' 될 대로 되라는 체념이었다.
그런 혼란스런 머리를 흔들며 시원한 물을 찾으러 밑으로 내려 왔을 때 그곳에선 고추장을 만드
느라 법석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초퀘한 모습으로 서럽게 울던 봉미는 어느새 옷갈이 한 칠면조처럼 진한 화
장에다 화려한 옷차림까지 하고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병달이 주방 입구에서 그 모습을 멍히 쳐다보고 서 있는데 그걸 본 봉미가 고추장을 버무리던
고무장갑을 벗고 쪼르르 달려 나왔다.
"커피라도 한잔 타 드릴까요?"
"아니 시원한 물 한 컵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봉미는 쪼르르 달려가 냉장고 문을 열고 얼음 통을 꺼내어 컵 속에
두어 개를 넣은 후 주전자에 든 물을 컵 속에다 따루었다.
안쪽으로부터 매캐한 고추 냄새와 후덥지근하면서도 달콤한 물엿냄새가 어우러져 벌써 고추장맛
이 혀끝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병달이가 부리나케 들고 온 컵을 받아 쥐자 그녀는 아주 바쁜 듯이 다시 뛰어가서 고무장갑을
끼고 부산을 떨었다.
봉미가 왜 그토록 별나게도 부산을 떨어대는지 그는 충분히 알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녀는 더없이 정신을 쏟을 일이 필요하고, 외로움을 싹일 일이 필요하고, 서러움을 잊을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자로는 유일하게 병달만이 가능하다는 것도 그녀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집에 있는 동안은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병달이 컵 속의 물을 다 마시고 얼음덩이만 남기자 다시 쪼르르 달려온 봉미가 물었다.
"한 컵 더 드릴까요?"
가타부타 대꾸도 없이 뒤돌아선 병달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 버렸다.
봉미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컵을 들고 서 있었다.
다시 그녀의 얼굴엔 어두운 절망감으로 휩싸이고 있었다.
아직도 어딘가엔 남아 있을 듯한 희망의 빛을 향하여 스스로를 위장하려 빨간 루즈도 바르고 겨
울답지 않은 화려한 옷도 걸쳤건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때 2시를 알리는 괘종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둥~~~ 둥~~~
그 종소리는 교회 종소리처럼 긴 여운을 남기며 그녀의 귓전을 쉬임 없이 맴돌았다.
이 메마른 가슴속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엄마........ 어머니......................!!!!

 

(36) 꿈인가? 생시인가?

며칠 후 병달은 한밤중에 계속 이어지는 삐삐소리에 잠을 깼다.
삐삐삐삐삐삐삐삐~~~~
삐삐 메시지는 '828282828282' 였다.
그는 이불 속에서 전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눌렀다.
삐리리~
"여보세요? 난데 빨리 나와?"
"왜?"
"글쎄 긴말 할 시간 없으니 빨리 나와! 자기 집 앞에 다 와가니까 어서 챙겨입고 나오라고! 알
았지?"
뚜뚜뚜뚜~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거 원..."
병달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옷을 껴입었다.
시계는 두 시 반이 가까워 있었다.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막 수진의 차가 도착하고 있었다.
병달이 차에 오르며 웬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차는 휑하니 달려나갔다.
수진이 그렇게 속도를 내며 차를 모는 걸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텅 빈 거리라지만 쌩쌩 달리는 속도감에 제대로 말 붙일 새도 없었다.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차를 올린 뒤에야 말을 붙였다.
"대체 무슨 일이야?"
"아직 말을 안 해 줬던가? 사실 나도 정신이 없어서..."
"...........?"
"놀라지 마? 어머님이 정신을 차렸데!"
"뭐라고? 엄마가??"
"급히 자기를 찾는다고 금방 이 핸드폰으로 연락 왔어!"
"뭐라고? 뭐라고! 와!! 엄마가... 진짜일까? 진짜겠지? 제발 진짜여야 할텐데..."
병달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데 핸드폰 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건 내가 저번에 갔을 때 연락처로 그 번호를 가르쳐 줬거든.."
"그랬구나! 그리고 고속도로 빠질 때까지는 알겠는데 뒤에는 자기가 길을 가리켜 줘야 해?"
"알았어! 그건.. 그보다 좀 더 달릴 수 없을까? 여기가 어디쯤이지? 얼마나 남았을까? 다른 말
은 없었어? 누가 전화했데?"
병달은 야간 운전이라 바짝 긴장하고 있는 수진에게 흥분한 목소리로 쉬임 없이 물어댔다.

그들이 조광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4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직 한밤중임에도 2층 입원실은 훤히 밝혀져 있었다.
그 앞에 차를 대자마자 병달이 먼저 단번에 뛰어 올라 갔다.
병실 앞에서 백발의 노 원장이 그를 맞았다.
"오셨구먼 청년! 모친께선 오랜 잠에서 깨어나 아직 정상이라 볼 수 없으니 눈물을 보인다거나
자극적인 행동이나 말은 당분간 삼가 주게나!"
병달은 벌써부터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자 그럼 6년만의 조우이시니 만나 보시게!"
병달은 머리를 깊이 숙여 감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조심스런 모습의 간호사가 기쁜 듯이 그를 맞았고 거짓말처럼 그의 엄마가 병상에 앉아
있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병달이 그 앞으로 다가서자 대충 알아보는 듯 하면서도 간호사를 쳐다봤다.
"아주머니! 이 분이 아주머니 아드님이세요!"
그의 엄마 문정희는 고개를 끄떡였다.
병달은 더 앞으로 다가서며 엄마의 손을 잡았다.
6년여 식물처럼 누워 있었던 생각과는 달리 손은 따스했다.
뒤이어 들어온 수진이 병달 옆으로 다가섰다.
문정희는 또다시 간호사를 쳐다봤다.
"이분은 아주머니의 며느님이세요!"
간호사는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하듯이 병달을 쳐다봤다.
병달은 그 대답을 바로 그의 엄마에게 했다.
"네 맞아요, 엄마! 엄마의 며느리예요!"
수진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였다.
그 화답으로 문정희는 고개를 끄떡였다.
수진은 문정희의 손을 잡고 있는 병달의 손위에 자신의 손도 함께 포개었다.
그때 원장이 다가와 조용히 그들의 등을 두드렸다.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그들은 살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원장을 따라 원장실로 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청년의 모친께서는 참으로 특이한 변화라 할 수 있네! 이렇게 6년간이나 잠겨져 있던 머리가
깨어나는 경우는 드문 일이네! 그러나 오늘 하루는 지켜봐야 할 걸세! 만약 그 변화가 잠깐 잠
시의 것이 된다면 더 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네!"
병달은 그 말에 놀라 원장을 쳐다봤다.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될 확률도 있다는 거네! 자네 모친의 운명은 여태껏 그래 왔
듯이 하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게 아니겠나? 앞에 한 말은 내가 노파심에서 한 말이니까
너무 상심 말게나! 그리고 재차 부탁 드리지만 환자에게 충격적인 말은 삼가 해 주게나!"
"엄마가 정신을 차린 지 얼마나 됐습니까?"
"그걸 확인하자마자 전화했으니까 아마 3시간쯤 됐나 보네!"
"혹시 다른 말을 한 거라든지 그런 건 없었어요?"
"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병달이.. 병달이..' 그 말뿐이었다네!"
"그러세요..."
"3층에 올라가면 빈방이 하나 있네! 그리로 가서 잠시 눈을 붙이게나?"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이제 원장 선생님께서 올라가 주무세요"
"나도 그래야겠네! 언제든지 잠이 오면 위로 올라오게나?"
함께 원장실에서 나와 다시 병실로 들렀을 때 그의 엄마는 잠들어 있었다.
원장은 그들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려 주고 올라갔다.
하품을 해대던 간호사도 별일이 생기면 간호사실로 알려달라고 하고선 가버렸다.
혹시 다시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속에 침상 앞에 나란히 앉아 지키던 그들은 누가 먼저였
는지는 몰라도 서로 기대어 함께 잠들어 버렸다.

얼마나 잔 걸까?
달달달달~
닝겔과 주사바늘을 잔뜩 실은 구르마를 끄는 소리에 깜짝 놀라 둘은 동시에 잠이 깼다.
벌써 7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밖엔 출근하는 차들로 법썩이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간호사는 침상 위에 걸린 닝겔 호스에다 주사 바늘을 꽂아 닝겔 속으로 주사액을 투여하고 돌아
갔다.
조금 지나자 또 달달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밥이 날라져 왔다.
그 방엔 환자가 그의 엄마뿐이건만 두 상의 조반이 들어 왔다.
보아하니 그들을 위해 특별히 내린 조반인 듯 했다.
그러나 그도 그녀도 별 생각이 없어서 그대로 두었다.
회진하러 들린 원장이 그걸 보자 조용히 타일렀다.
"아니 두 분 보게나! 내가 특별히 두 분을 위해 드린 조반인데 이러면 쓰겠나? 별 차린 건 없다
지만 내 성의를 봐서라도 기꺼이 잡숴주면 고맙겠네! 그것이 누워 계신 분의 뜻일 거야! 그리고
너무 조급하게 기다리지 말게! 푹 주무시고 곧 깨어나실 거네!"
원장이 나가자 그들은 억지로라도 숟갈을 들어야 했다.
둘은 꼭 같은 심정으로 밥을 꾸역꾸역 집어넣은 후 수진이 빈 식기를 들고 나간 사이 병달은 그
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병달아! 병달아..."
"엄마! 저 여기 있어요!"
병달이 그녀의 손을 잡자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를 쳐다보는 엄마의 시선은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보였다.
"엄마! 엄마의 아들 병달이 여기 있어요!"
엄마는 고개를 천천히 끄떡였다.
그때 수진이 들어와 이를 지켜보고 눈물을 흘렸다.
"엄마! 엄마의 며느리도 여기와 있어요!"
수진이 손을 잡자 다시 또 고개를 끄떡였다.
"엄마! 다른 사람은 만나고 싶은 사람 없어요?"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미국간 외삼촌과 이모께 연락할까요?"
그의 목소리는 자못 흥분해 있었지만 그의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병달의 진심은 아니었지만 그 말도 했다.
"아빠께 연락할까요?"
또다시 분명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간호사로부터 연락을 받은 원장이 뛰어 왔다.
원장은 손수 맥박과 혈압을 체크하고는 괜찮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떡였다.
조금 있자 간호사가 특별히 마련한 듯한 죽을 들고 들어 왔다.
그리고 그의 엄마를 일으켜 앉히고 수진더러 조금씩 떠 먹이라고 했다.
그의 엄마는 생각보다 식사를 잘 했다.
하긴 여태까지 식사는 꾸준히 잘 해온 그녀였었다.
다만 흐트러진 동공에다 닫아버린 말문으로 인하여 6년의 세월을 넘어 띄었다 할 것이다.
담아다 준 식사를 모두 마치고도 모자라는지 입맛을 다셨지만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37) 환생! 그 진실...

죽 그릇이 물러나고 원장도 다소 안심한 모습으로 나가고 그들만 남자 조급해진 병달이 그의 엄
마에게 말을 하게 해 보려 안간힘을 썼다.
"엄마! 내 이름 다시 한번 불러봐?"
"......"
"엄마! 하고 싶은 말없어?"
"......."
"제발 말 좀 해봐?"
"......."
흥분한 병달이 다그치듯 조급하게 굴자 지켜보던 수진이 그를 말렸다.
"자기 너무 서두르지 마! 이제까지 참아 왔으면서 왜 그래?"
제 분에 못 이겨 눈이 벌개진 병달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머니! 제가 누군지 아시죠?"
진짜 알아서 일까? 어쨌든 고개를 끄떡였다.
"저는 병달씨 아빠 회사에 다녀요. 한때는 병달씨 아빠의 비서였어요. 그러나 지금은 총무부에
있어요. 그 동안 회사는 무진 커졌어요. 직원이 모두 천명이 넘어요. 그러나 병달씨는 아빠에게
아직도 유일한 자식으로써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요. 그것이 몹시 안타깝고 아직도 그 일로 서로
싸우고 있어요"
무표정하던 문정희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엔 한 방울, 또 한 방울 흐르던 눈물이 봇물이 터지듯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허공을 내 저으며 "병달아! 병달아.." 하면서 그를 찾았다.
수진은 황급히 그를 불러 왔다.
"엄마! 저 여기 있어요! 병달이가 여기 있다고요!"
"으~ 너~ 너가 병달이~ 맞니?"
약간 더듬었으나 또렷한 말이었다.
"그래요 엄마! 분명히 병달이가 맞아요! 으흐흐흑..."
병달은 엄마의 품에 안기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지켜보던 수진도 함께 훌쩍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원장과 간호사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병달을 떼어내고 닝겔 호스에다 다시 주사
바늘을 꽂았다.
"자네들 제발 좀 진정 하라니까? 이러면 환자를 더 빨리 잃게 할 뿐이야! 진정제를 놓았으니까
당분간 잠이 들 거야! 다시 깨어나더라도 제발 안정시켜 드려야 해!"
원장과 간호사는 나갔다.
삶과 죽음과의 줄다리기도 아니고 말(言)과의 줄다리기도 아니고 이 무슨 안타까운 줄다리기란
말인가?
병달은 가슴을 치며 혹여 엄마가 입이라도 뗄까봐 바짝 당겨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엄마가 숨을 쉴 때마다 입술을 삐쭉거리는 모습이 마치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 환상 속
의 말을 듣기도 했다.
"병달아! 너네 아빠가 나를 죽이려 했어! 그 원수를 꼭 갚아다오! 원수를 갚아다오! 갚아다오!
갚아다오! 갚아다오...."
환상의 언어를 듣고 번쩍 정신을 차리면 앞에 보이는 모습은 평온히 잠든 모습뿐이고.....
되풀이되는 악몽 같은 그런 환상 속에 희미한 생시의 음성이 들려 왔다.
"병달이 어딨니? 병달아? 병달아~~"
"여깅어요 어머니!"
수진이 대신 대답했다.
"나는 아무런 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너가 정말 병달이 맞니?"
"네! 녜! 맞아요! 엄마! 병달이 맞아요!"
그때 그녀의 손을 만져보던 수진이 황급히 뛰어 나갔다.
"그래 한번만 보고 싶구나! 내 아들을..."
그녀는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건지 떨리는 손으로 병달의 얼굴을 만졌다.
다시 후닥닥 달려온 원장이 그녀의 맥박을 짚어 보고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들을
옆으로 불러 나직이 말했다.
"조용히 마지막 말씀들을 나누시게! 그리 많이 남은 것 같지 않네 그래!"
원장은 간호사가 들고 왔던 주사기를 그대로 들려 보냈다.
그때에야 병달은 그의 엄마의 체온이 점점 식어가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어엄마~ 이럴려고 6년이나 입 닫고 계셨어? 이럴 거면서 그만큼 애태웠어? 으흐흐흑....."
"자기가 그러면 떠나는 어머니가 얼마나 한이 맺히겠어? 제발 진정해? 좀 냉정해 지라고?"
"얘야! 엄마를 용서 해다오! 엄마는 너무 많은 죄를 지어 이토록 기구하게 살다 가나 보다"
그의 엄마의 몸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으나 그 음성은 사고 전처럼 또렷하게 들려 왔다.
"먼저 간 네 외 할아비와 외할미가 날 데리러 와 저기 서 있구나.. 너의 아빠도 저기 왔구나..
날 부르고 있다.. 저 건너서 나를 부르네..."
"엄마! 아빠? 아빠라니?"
"그래! 네 아빠도 왔어.. 네 아빤 늙지도 않았구나.. 옛날 그대로네.. 민수씨 내 손좀.. 내~
손~...."
그 소리에 원장은 고개를 푹 숙였고 병달은 오열을 토했다.
그의 엄마 문정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았다.
맥박도 뛰지 않았다.
병달이 그 사실을 안건 간호사가 가져온 흰 천으로 얼굴을 덮었을 때였다.
울부짖으며 매달리는 그를 수진은 간신히 떼어냈지만 그녀 또한 함께 울어야 할 운명임을 뒤늦
게야 깨닫고 같이 쓰러져 울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들은 그곳에 머물렀다.
조광병원도 그날부터 연 사흘을 문을 닫았다.
모든 장례 준비나 절차는 조광병원 원장이 주제하고 집행했다.
둘 다 그 이유를 몰랐으나 너무 갑작스레 당한 일이고 마땅히 부탁할 곳도 여의치 않은 관계로
시키는 대로 따랐다.
장례는 3일장으로 화장을 했다.
조문객이라야 조원장이 청한 낯선 이들뿐이었다.
그들에겐 실로 서먹서먹한 장례가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 화장식이 끝나고 병원으로 돌아오던 날 그 이유가 밝혀졌다.
화장막에서 도자기에다 받아온 유골을 병달에게 건네주며 조원장이 말했다.
"이건 자네 모친의 유언이 아니라 먼저 간 자네 부친의 유언에 따라 함께 화장한 거라네. 자네
의 성은 자네 모친이 마지막 유언으로 증명해 줬듯이 김씨가 아니라 조씨라네!"
병달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의 엄마가 마지막으로 하던 그 말을 음미했다.

그래! 네 아빠도 왔어.. 네 아빤 늙지도 않았구나.. 옛날 그대로네.. 민수씨 내 손좀.. 내~
손~....

"자네는 유성산업 김유성의 아들이 아니라 수성산업을 창업하고 먼저 간 조민수의 아들이란다.
나는 일찍이 자네 선친의 유언으로 그 사실을 알았지만 오늘을 위해 숨겨 온 거네. 그리고 나는
네 선친과는 11촌숙, 자네와는 12촌 할아버지  뻘이지만 자네에겐 가장 가까운 촌수의 친척이란
다"
병달과 수진은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함께 있는 다른 어른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자네가 오늘은 이 할아비에게 큰절을 했지만 다음은 그러지 말게나. 자네는 우리 가문에서 영
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종손이고 여기는 또 그 종손부이니 앞으로는 가문의 전통대로 자네들이
우리 가문의 제일 어른임을 자긍하여라. 그런 얘기를 들어 봤는지는 몰라도 우리 조씨 가문은
평전리에 자네 선친 명의로 된 엄청난 논밭과 산 그리고 집터까지 몽땅 뺐긴 것이 있단다. 그걸
이제 자네가 가문의 명예를 걸고 찾아야 한단다."
그때 자리했던 사람들간에 서로 삿대질이 오가는 등 방안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다시 분위기가 진정되자 조원장은 말을 계속했다.
"그걸 찾지 못하면 자네 선친의 명예를 회복할 수 없으니 꼭 명심하게나. 그러나 보복은 말았으
면 하는 것이 내 바램이네. 그러면 계속 악연만 이어질 뿐이니까. 자네 모친은 우리 가문의 씨
를 잉태한 채 김씨 가문에 들어가 자네를 낳아 자네를 그 성씨로 여태 살아오게 했지만 그 집안
의 은덕을 입은 건 사실이잖나? 그런데 자네의 두 양친이 당한 그 업을 보복으로 갚는다면 그
짐승만도 못한 김씨가문이나 뭐가 다르겠나? 이말 명심하거라!"
조원장은 그 외에도 수많은 훈시와 가문에 대한 얘기를 했다.
다음날 그곳을 떠나올 때 두 개의 항아리를 주었다.
하나는 벌써 20년이 넘은 아버지 조민수의 유골을, 하나는 어머니 문정희의 유골이었다.
그리고 평전리 땅을 찾는 날 그 유골들을 문중 산에 함께 묻으라고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유언이었다고.....

 

(38) 멍에

가져온 유골은 자신의 집에 보관하겠노라는 수진의 요청이 있었지만 병달은 은행 금고에다 보관
했다.
당분간은 그녀 혼자 자야할 때가 많은 그녀의 방에 유골을 둔다는 것은 썩 맘에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병달은 그새 냉냉해져 있는 집안 분위기를 단번에 예감했다.
봉미가 친정에 갔다는 아줌마의 말이 어딘지 모르게 냄새가 났다.
그리고 김사장은 출장 갔다 했지만 그 말도 냄새가 났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며 느낀 분위기도 그러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붙어 있던 액자가 보이지 않았고 그 아래 화분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내려가서 아줌마를 잡아놓고 캐물어 보려다가 마음을 바꾸어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올라왔
다.
녹화된 테잎을 틀다보면 뭔가 잡히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테잎 모두 잠자는 모습이나 통상적인 일상의 모습뿐 특이한 부분은 하나도 잡혀 있지
않았다.
실망한 병달은 하는 수 없이 밑으로 내려와 아줌마를 다그쳤다.
"아줌마! 진짜 그 사람 친정간 게 맞아요?"
"지도 가는 건 못 봤어요. 어제 아침에 오니까 사장님이 그러더라고요. 친정에 갔으니 당분간
못 올지도 모른다고..."
"사장님은 언제 나갔는데요?"
"출장가신다면서 어제 저녁에 나갔어요."
"그런데 2층 계단에 걸렸던 액자와 화분은 다른 데로 치웠어요?"
"그건 지가 버렸어요. 떨어져서 다 깨졌더라고요."
"혹시 다른 건?"
아줌마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애라 모르겠다하는 식으로 그간 보았던 것을 털어놨다.
"내가 이런 말을 한 걸 사장님께 허시면 안 되유?"
병달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러니까 그 그저께 밤, 아씨와 사장님이 싸웠나봐요! 그제 아침에 오니까 2층 계단과 거실이
엉망이었어요. 아씨는 눈이 퉁퉁 부어 아씨방에 누워 있었어요. 그리고 종일 도련님만 찾았어
요."
아줌마는 봉미의 모습이 정말 안스러웠다는 듯이 눈물을 글썽였다.
"경수는 젖 달라고 종일 칭얼댔지만 젖도 제대로 안 나오는 모양이었어요. 애는 그날 따라 우유
도 먹었다하면 토해 내버리더라고요. 아휴! 딱해서 차마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다음날인 어
제 아침에 오니까 둘 다 없었어요. 그게 다예요."
그녀의 말에 뭔가 불길한 예감이 병달의 온몸을 감쌌다.

병달은 무작정 수진에게 전화를 걸어 쉬고 있는 그녀를 불러 낸 후 집을 나섰다.
약속한 장소로 나갔을 때 아직 수진은 도착하지 않았다.
늦겨울다운 매서운 바람이 기성을 부리는 날씨였다.
그는 코트 깃을 세우고 양지 녘에 서서 모처럼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내뿜는 담배 연기가 바람에 실려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연 사흘동안 잠자리에 든 시간외는 거의 서 있었던 관계로 다리에서부터 서서히 피곤이 덮쳐오
고 있었다.
담배를 다 필 동안에도 수진이 오지 않자 괜히 그녀를 불러냈다는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수진도 병달 못지 않게 피곤할 것이고 또 임신중이라 더 피곤할 것이라는 생각을 왜 일찍이 못
했을까 하고 가슴을 쳤다.
그래서 공중전화로 들어가 막 전화를 돌리려는데 그녀의 차가 도착하고 있었다.
"괜히 불러냈나 봐! 나 혼자 가도 돼는 일인데..."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평전리에 잠시 다녀올려고..."
"문중땅 때문에...?"
"아니, 봉미 집에 다녀올려고...."
"그럼 타! 금방 다녀올 수 있잖아."
"정 피곤하면 나 택시 타고 갔다 올께!?"
"왜 그래? 나보다 자기가 더 피곤할 텐데...!"
병달은 수진의 차에 올라 평전리로 향했다.
고개를 넘어 평전리 입구로 들어서자 개발을 반대한다는 붉은 현수막들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길바닥이고 담벼락이고 가릴 것 없이 글을 쓸 수 있는 곳이면 그 어떤 곳이든 가
리지 않고 붉은 페인트 글이 씌어져 있었다.
'터무니없는 보상가 누굴 죽이려느냐'부터 '개발반대 결사항쟁, 김유성은 공산당 수괴다'까지
다양한 내용의 과격한 용어들이 총동원되고 있었다.
마치 교전중인 전쟁터 같은 그 속으로 진입하여 큰 마을을 지나서 봉미의 친정 집이 있는 산비
탈 동네로 들어서는데 난감한 일이 생겼다.
봉미네 친정 집으로 올라가는 길을 누군가가 파 놓았던 것이다.
차는 물론 사람도 밭 두렁을 빙 둘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깊이 파 놓았다.
보아하니 개발을 반대하는 과격분자들이 '개발동의서'를 받으러 다니던 봉미의 아버지에게 앙심
을 품고 의도적으로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지나다니던 길을 파 버렸을 것으로 추정이 되었다.
부득이 차는 그 앞에서 멈추어야 했다.
수진은 차에 그대로 남아 있고 병달 혼자서 논두렁을 타 넘으며 봉미의 집으로 올라갔다.
그를 보자 촌로가 버선발로 뛰어 나왔다.
"아니 이게 누고? 김서방이 웬 일이고?"
"안녕 하셨습니까? 주위에 왔다 잠시 들렀습니다."
"자자! 이리로 들어 와 날도 추운디..."
촌로는 방에 들어 갈 것을 권했으나 그는 금방 가야 된다면서 극구 사양했다.
"누가 이 앞을 저렇게 파 놓았습니까?"
"신경 쓸 거 없네! 돌아가시더래도 아버지께 이쪽은 전혀 신경쓰지 말라고 전하게나!"
"지나다니시는데 애로가 이만저만 아니겠는데요?"
"그보다 어제인가 그저깨인가 봉미에게 전화가 왔던디 별일은 없갔지?"
그럼 여기에 안 왔단 말인가?
"그럼요! 그때 뭐라 걱정하실 말이라도 하던가요?"
"혹시 자네가 여기 안 왔냐고 묻디만!"
"또 다른 말은...?"
"왜? 무슨 일이 생겼남?"0
"아뇨! 전혀... 오늘은 공사장 한번 둘러보고 오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오는 길에 잠시 들
렀을 뿐이에요! 회사 직원이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그럼 이만 가봐야겠어요!"
병달은 꾸벅 인사하고 도망치듯이 황급히 빠져 나왔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그녀의 옷자락만 봐도 치가 떨리고 분노가 치밀던 병달이었건만 돌아 나오는 그의 가슴이 왜 이
리도 연민의 아픔으로 저미는지....

"봉미 만났어?"
"아니..."
"그럼 어디 갔지?"
"그냥 가!"
병달의 힘 빠진 그 말에 수진은 차를 돌려 아래로 향했다.
다시 큰 마을로 들어서자 수진이 그에게 물었다.
"자기! 문중 땅이 어디인지 혹시 알아?"
그는 말 대신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우리 거기 한번 가보고 가자! 여기 자주 올 수도 없잖아?"
그는 다시 힘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마을을 벗어나 갈림길에 이르러 차를 멈추자 병달은 손짓으로 좌측 길을 가리켰다.
얼마 안 가서 조씨 문중의 폐가로 향하는 길이 나왔으나 그곳도 깊은 구덩이를 파 놓아 더 이상
올라 갈 수가 없었다.
그제야 병달은 차 밖으로 나와 무너진 성 같은 담벼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 폐가가 나의 아버지가 머물던 집이래. 그리고 그 뒷산이 아마 문중 산일 거야. 한창때는 이
평원의 절반이 아버지 땅이었데. 저 위로 올라가 보면 저 집터가 얼마나 명당자리였는지 한눈에
느낄 수가 있어. 집 자리만 해도 500평은 될 거야.  수 백년을 그 집에서 이 너른 대평원을 다
스렸다고 해."
수진은 입을 딱 벌리고 다물 줄을 몰랐다.
"자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우리 저 위로 올라가 보자?"
"온통 눈 무덤과 얼음판인데 그리로 올라가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오늘은 좀 피곤하기
도 하고 그러니 다음에 와 보기로 하고 그냥 가지?"
수진은 못내 아쉬워했지만 병달은 그녀의 어깨를 보듬어 뒤 돌리며 차에 태웠다.
이미 김유성의 수중으로 넘어가 위락단지를 건설하니 마니 하는 마당에 좋아한들 뭐하랴?
그럼에도 수진은 마치 그들의 소유로 뺏어 온 듯이 가슴 벅차하고 있었다.
그 감정은 집으로 돌아 올 때까지도 계속되어 조잘조잘 수다를 떨었다.
수진의 집으로 도착한 병달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핸드폰으로 집에다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도련님이세요?"
"혹시 그 사람에게 무슨 연락이라도...?"
"없었어요!"
"알았어요."
딸깍~
병달은 방안으로 들어가 그간 녹화하여 이곳에 갖다 놓았던 테잎들을 모두 들고 나와 돌로 치고
발로 지근지근 밟았다..
그리고 마당 모퉁이에 불을 지피고 그걸 태우기 시작했다.
돌발적인 그의 행동에 당황하던 수진도 시커먼 연기 속에 까만 수은덩이처럼 변해 가는 테잎 속
물을 쳐다보며 그의 등에 기대어 있었다.
서산으로는 해가 기울면서 바알간 노을을 피우며 그들 주위에도 서서히 황혼이 찾아들고 있었
다.

 

(39) 원죄(原罪)

밤이 되면서 두 번이나 집에다 전화를 했지만 그 누구도 전화를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
다.
아줌마더러 그곳에서 주무시라고 하자 이미 사장님이 출장을 떠나면서 그러라 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밤 그곳에서 잔 병달은 다음날 아침 TV 뉴스를 보다가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야 했
다.
한밤중에 유성산업 김유성사장이 구덩이에 차가 쳐 박히는 바람에 차에 불이 붙으면서 중화상을
입고 급히 일신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중태라는 뉴스였다.
사고 현장은 평전리라하여 자세히 보니 어제 그들이 들렀던 폐가입구의 그 구덩이였고 차가 불
타는 모습을 계속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병달과 수진은 그 즉시로 집을 나서 병원으로 달렸다.
연이어 벌어지는 이 충격적인 사건들은 분명 그의 뜻과는 무관하게 벌어진 사건이었지만 그는
자신을 질책하고 있었다.
병원에 들어서자 분주하게 오가는 경찰들과 연락 받고 모여든 회사 직원들이 우르르 모여 있었
다.
그가 차에서 내리자 그를 알아 본 회사 직원 한 사람이 그를 맞으며 응급실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그의 집에 자주오던 중역들과 총무부장 김병우도 와 있었다.
그를 본 김병우가 병달에게 다가서며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했다.
"어젯밤 출장을 다녀오던 삼촌께서 한밤중에 평전리 공사 예정지에 들른 모양이야. 구덩이가 있
는지도 모르고 차를 몰다 그만 차가 구덩이 속으로 쳐 박혔는데 불행하게도 불이 붙고 말았던
것 같애. 마침 그걸 본 마을 주민이 119에 신고하여 급히 달려가 구해내긴 했으나 화상이 워낙
심해 밤새도록 수술하고 금방 여기로 옮겼어. 아직 의식을 못 찾은 상태란다. 보더라도 너무 놀
라지 말고 가서 보게나!"
병달이 안으로 들어서자 늘어서 있던 중역들이 한결같이 굽씬 허리를 굽히며 길을 비켜줬다.
침상 위에는 김사장이 산소 마스크 호스를 끼운 목구멍을 제외한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가
래가 끓는 듯한 숨소리를 힘겹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짙은 약품냄새 속으로 살갗의 탄내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 냄새는 어이없게도 불판 위의 바베큐 같은 고소한 냄새 같기도 했고 구역질을 일으킬 것 같
기도 했다.

조금 있자 흰 가운을 걸친 젊은 의사 한 사람이 들어오더니 그를 찾았다.
"환자의 보호자이시죠?"
"예! 아들입니다"
"잠시 저를 따라 오시겠습니까?"
그 의사는 병달을 원장실로 안내했다.
언젠가 본 듯한 그 원장은 그를 소파에 앉히고 맞은 편에 앉았다.
"닥터김은 그만 일보게!"
그 말에 그를 데려왔던 젊은 의사는 머리를 꾸벅하고 밖으로 나갔다.
"일찍 만나 뵈어야 하는데 이런 자리에서 보게 되어 정말 송구합니다."
병달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 하자 다시 말을 이였다.
"사실 귀하의 모친의 일은 제가 송구하여 뵈올 낯이 없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려 노
력했지만 끝이 좋지 않아 미안할 뿐입니다."
"그 일은 저도 별 유감이 없습니다. 너무 오랜 기간을 끌어온 일이라 오히려 아들 된 저로선 감
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서울 조원장의 연락을 받고 경황 중에 다녀오긴 했으나 같은 의료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
을 통감합니다"
그제야 발의하던 날 언뜻 보았던 기억을 찾아내고 일어나 꾸벅 인사를 올렸다.
"그날 찾아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별말씀을.. 제가 평소에 귀하의 어르신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에 비하면 부끄러울 따름입니
다."
병달은 더 읖조릴 말이 없었다.
"모친을 잃고 나서 며칠 되지 않아 부친마저 이렇게 되어 뭐라 위로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
습니다만... 사실은 밤새 제가 직접 부친의 수술을 집도했습니다. 그러나 화상이 너무 심하
여... 조금 더 기다려봐야 알겠지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두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이런 말
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저가 거듭 부끄럽습니다."
병달은 간호사차림의 아가씨가 가져온 커피로 마음을 잠시 다독거리고 원장실을 나왔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병우가 그를 쳐다보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저만치에 수진도 서 있었다.
응급실로 내려오자 회사의 전임 변호사까지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병달이 다시 그 속으로 들어서자 미쳐 인사 못한 다른 임원들이 줄줄이 와 인사를 건네고 그 변
호사도 넙죽 인사를 했다.
김유성이 성할 적만 하드라도 그 앞에 그렇게 넙죽거리던 사람은 별로 없었다.
김유성은 카리스마가 강해서 평소 그와 대적할만한 적수를 키우지도 않았고 그런 걸 봐 넘기지
도 못했다.
때문에 지금처럼 유고 시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유일한 대책이라면 그의 법적 아들인 병달이 후계를 이어받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그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의의를 달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방금 나타난 현상이었다.
권력의 속성이란 그런 것이던가?
권력이 평정을 이루고 있을 땐 납작 엎드려 부복하고 있던 이들이 지금처럼 무주공산의 공백기
가 된다거나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게 되면 길길이 일어나 공치사를 떠 벌이며 아부하고 넙죽되
기 마련이지 않던가?
변호사는 그런 와중에도 혹시 김유성이 무슨 말이라도 할까 봐 귀를 곤두세우며 철저한 직업의
식을 보였다.
그때 회사 직원인 듯한 한 젊은이가 김병우에게 뭐라 귀엣말로 소곤대고 가자 김병우는 다시 모
인 임원들 중 제일 높은 직인 강전무에게 소곤대고 강전무는 다시 병달의 귀에다 소곤댔다.
"영식님! 아침이 준비되었다 하니 허기부터 떼우시고 이 자리를 지키죠?"
'영식님'은 대통령의 아들에게나 붙이는 존칭이 아니던가?
"저는 괜찮습니다! 다른 분들과 함께 다녀오시죠?"
병달의 그 말에 강전무는 가벼운 목례를 하고 반쯤의 인원을 끌고 우르르 나갔다.
김병우도 그들과 함께 나갔다.
그제야 수진은 그의 곁에 다가서며 귀속에다 대고 속삭였다.
"자기! 이제부터 잘 해야 해!"
병달은 그녀의 말뜻을 충분히 알아 차렸지만 그의 마음에 썩 편한 말은 아니었다.
그 인원들이 다시 우르르 몰려오고 나머지 인원들이 우르르 빠져나갔으나 그는 끝끝내 아침을
거부했다.

오전 11시가 가까워 온 시간,
김유성은 끝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그의 입 속에 끼워져 있던 산소 호스를 빼내었다.
오후에 입관을 위하여 김유성의 손에 감긴 붕대를 풀자 꽉 쥔 손안엔 한 움큼의 재를 움켜쥐고
있었다.
20년 이상 부와 명예를 위해 뜨겁게 욕망을 불태웠던 그가 결국 가져간 것은 자신의 육신이 탄
그 한줌의 재뿐이었다.

 

(40) 대미

김유성의 장례는 회사 주관아래 회사장으로 치러졌다.
병달은 끝끝내 한 움큼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김유성이 비록 그의 친부가 아님을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더 흘릴 눈물이 남아 있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의 시신은 평소 유언과는 달리 화장되어 이름 모를 강에 반쯤 뿌려지고 나머지 반은 그의 유
언대로 김씨 문중산 한 귀퉁이에 묻혔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이 도시에서 '김유성'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그의 초라한 무덤을 찾는 이도
없다.
언젠가 어느 여인네와 어린이가 그 무덤을 찾았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그 모습을 직접 봤다는 이
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오늘도 조병달은 최수진과 어린 조영남, 조영웅, 조영심, 조영호 4남매의 배웅을 받으며 대문을
나선다.
최수진의 배속에는 또 하나의 자식이 들어 있는 듯 남산만 해 보인다.
그들에게 일일이 뽀뽀해 준 조병달은 이제 거의 습관화된 동작으로 저 아래 펼쳐진 대평원을 굽
어보며 오늘도 빈다.
"조상님들의 은덕을 오늘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굽어살피소서!"
때 맞춰 나온 검은 세단의 문이 열리고 기사가 정중히 인사를 한다.
"회장님! 타시죠?"

세단이 도심으로 접어든지 20분 여만에 '민수그룹'이란 간판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정문에서부터 90도 인사를 받으며 9층 회장실에 들어가자 비서실장이 들어와 금일 스케쥴을 설
명했다.
그 설명이 끝나자 조병달이 비서실장에게 명령했다.
"조사실장 들어 오라 해요!"
"예! 밖에서 벌써 대기중입니다"
별로 신통찮은 면상을 한 조사실장이 들어오자 조병달이 물었다.
"어제도 성과가 없었오?"
"예! 죄송합니다."
"됐어! 오늘도 알아봐요!"
"날마다 백방으로 알아보고는 있으나... 그게..."
"당신 하는 일이 뭐요? 그 일 하라고 내가 당신을 쓰잖소? 만약 내일이라도 찾기만 한다면 약속
대로 평생 먹고 살 돈을 드린 댔잖소!"
"그렇지만 벌써 10년째 안 가본 곳이 없는데도..."
"그래서 싫단 말요?"
"아~아닙니다! 회장님!"
"그럼 오늘도 찾아보쇼! 나가봐요!"

조사실장이 사라지자 조병달은 담배를 꺼내 물고 뒤쪽 창가로 가서 창 아래를 내려다 봤다.
잘 가꿔진 잔디밭에다 한껏 초록을 뽐내는 수목들이 오목조목 박혀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그리고 그 한켠에 보이는 양어장이 마치 실내 풀장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 적마다 물보라가 햇빛에 반사되어 은빛종이를 뿌려 놓은 것 같았다.
빤짝~ 반짝~ 반짝~

"여기서 내려다보니 전망이 너무 너무 좋네요...!!"

그 소리에 놀라 뒤돌아보자 아무도 없었다.
대신 비서실 어느 아가씨가 갖다두고 간 건지 커피 잔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늘도 그 잔 속의 커피 빛처럼 애태움으로 시작할 일과가 저기 보였다.
"삐--- 회장님! 사장단 회의 준비 됐습니다!"


1998.  09.  01

>< >< >< >< >< >< >< >< >>> 끝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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