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헉!"
어느 순간 김현세도 푹 무너지는 가 했더니 부르르 떨었다. 아....안돼! 현숙은 김현세가
자기 안에 사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밀어내려고 팔을 들다가
스르르 내리고 말았다. 생각 같아서는 그를 밀어내고 싶지만 수만 마리의 나비 때가
날아다니고 다니는 듯한 나른한 쾌감에 젖어 버려서였다.
"미안합니다.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현숙은 눈을 감고 있었다. 나른하게 젖어 오고 있던 쾌감이
슬며시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때었다.
김현세가 목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잘못이지.....
현숙은 김현세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은 자신이 허점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 언젠가 커피 잔을 사이에 두고 그가
뜨거운 눈짓을 보내며 손을 잡아 올 때부터 거부를 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실수였기
때문이다.
"가겠어요."
현숙은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 속에 일어나 앉았다. 벽 앞에 내팽개쳐
져있는 팬티가 시야에 사로잡히는 순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며시 팬티를 끌어다 돌아앉아서 껴입었다.
이런. 팬티를 위로 끌어올리는 순간이었다. 팬티를 촉촉하게 적시는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꽃잎 부분을 문질러 보았다. 김현세의 정액으로 느껴지는 물컹한
그 무엇을 느끼는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잠깐만요."
김현세는 그때까지 바지를 벗고 있는 상태였다. 현숙을 그토록 혼란스럽게 만들던
심벌도 이성을 되찾았는지 축 늘어진 자세로 가랑이 사이에서 얌전히 누워 있었다.
그런 자세로 김현세가 벌떡 일어서며 현숙의 어깨를 끌어 당겼다.
"다음에 이야기해요."
현숙은 욕망의 잔재가 물러난 다음이어서 그런지 냉정을 되찾은 뒤였다.
그래서 인지 목소리가 비교적 차분하게 흘러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가 아직도 김현세가 바지를 입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얼른 고개를 되돌렸다.
"지금 이야기해야 됩니다. "
김현세가 상체를 현숙 앞으로 옮기면서 그녀의 얼굴을 돌렸다. 현숙은 무방비 상태에서
자기도 모르게 김현세의 코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김현세가 입술을 덮쳐 왔다.
"헙!"
현숙은 처음처럼 거칠게 반항을 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의 어깨에 손을 얹는 것에
불과한 상태에서 김현세의 혀를 받았다. 김현세는 언제 내가 축 늘어졌었나 하는 듯이
열광적으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아!.......
현숙은 또 다시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을 알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이번에 또 다시 김현세에게 빠져들면, 영영 빠져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에게 몸을 내 맡겼던 경험 때문인지 의식과 다르게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자.....자꾸 이러지 마세요."
현숙은 숨이 차도록 키스를 한 김현세가 입술을 떼는 순간 고개를 꺾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이대로 보내면 영원히 못 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김현세가 현숙의 상체를 끌어 당겼다. 현숙은 덩치만 컸지 힘없는 아이처럼 그의
품안에 안겨 들었다.
김현세는 더 이상 키스를 하려 들지 않았다.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젖가슴을 만지려 들지도 않았다. 늦가을 홀로 자작나무 숲을 거닐고 있는 것처럼
고독한 가 하면, 밤바다를 보고 있는 듯한 절망스러운 모습으로 현숙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현숙은 고개를 숙였다. 김현세는 길게 한숨을 내 쉬며 현숙을 끌어안았다.
김현세의 팔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현숙은 몸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품안에서 빠져 나오려고 몸을 꿈틀 거렸다.
"잠깐만 이대로 있어 줘요."
현숙은 김현세의 말에 꿈틀거리기를 멈추고 고개를 숙이고 눈썹을 내려 깔았다.
그때 였다.
김현세가 현숙의 손을 끌어당기는 가 했더니 자신의 심벌을 쥐게 했다.
안돼!
현숙은 깜짝 놀라며 무심코 심벌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이내 심벌을
부여잡고 말았다.
김현세가 팔을 끌어다 다시 심벌을 쥐게 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심벌을 쥐는 순간,
그것은 바람을 넣는 고무풍선처럼 무서운 속도로 팽창되기 시작했다.
아......안돼.
현숙은 심벌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석에 늘어붙은 쇠붙이처럼
도저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김현세의 팔에 힘이 들어가면서 옆으로 눕고 말았다.
"자꾸 이러면 고.......곤란해져요."
현숙은 김현세의 품안에 안겨 있다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건 단순한 몸짓에 불과 하고 말았다. 김현세가 스커트를 끌어올리는
가 했더니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이......이를 어째.
꽃잎은 정액과 애액에 범벅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무엇 보다 얇은 면 팬티가
물걸레처럼 젖어 있다는 것을 떠올리는 순간 너무 부끄러워서 입이 떨어져 주질 않았다.
"우리 앞으로 자주 만날 수 있는 거죠?"
김현세의 목소리는 푹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현숙에게는 천둥우뢰와 같은 목소리로 들려 왔다.
김현세와 그 일이 있고 부터 현숙은 하루하루가 허공을 걷는 듯한 기분의 연속이었다.
민섭은 그런 아내를 보고, 몸이 안 좋으면 친정에 가서 며칠 쉬었다 오라며 비상금까지
꺼내 주었다.
"괜찮아요. 환절기 탓 일거예요. 자기 갈치 좋아하지. 오늘 일찍 퇴근해야 돼, 시장 가서
물 좋은 갈치 몇 마리 사 와서 노릿노릿하게 구워 놓을 테니까. 알았죠?"
"허허, 이 여자가 갈 때가 됐나.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난 갈치 안 먹어도 되니까,
제발 그 얼굴이나 피고 살아. 도대체 지금 자기 얼굴이 어떤 줄 알고나 있어.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가 억지 웃음을 짓고 있는 거 같다구."
민섭은 그렇지 않아도 다음 달에 있을 정기 승진 때 누락될까 봐, 기분이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아내가 우울해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는
없어서 퇴근하면 가능한 명랑하게 지내려고 했다.
"피! 언제부터 내 얼굴에 그렇게 관심이 많아졌어. 언젠 아이 셋 낳은 사십 대 아줌마
같다고 잘도 놀려대더니......"
현숙은 남편으로부터 걱정 어린 핀잔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러면서 가능한 남편이 집에 있을 때는 명랑하게 지내리라고 다짐을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그릇은 마구 굴려도 잘 깨지지 않으나, 새 그릇은
긴장하면 긴장할수록 잘 깨질 때와 같았다. 무엇보다 그녀를 미치도록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 할 때였다. 남편은 언제나 정상위를 원했고,
그녀 역시 다른 부부들은 몰라도 자기와 남편은 그 방법밖에 없는 것으로 여기고
섹스를 했다.
"아......자.....자기! 나 미칠 거 같아."
남편하고 섹스를 할 때 예전처럼 만족을 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짓으로 교성을
지르는 등, 어느 때는 남편 보다 적극적으로 몰입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섹스
후에는 김현세와의 섹스가 생각났다.
"자기, 요즘 더 강해 진 거 같아."
그러다 남편이 이상하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또 거짓말을 했다. 첫 단추가
잘 못 꿰어지면, 마지막 단추까지 잘못 꿰어진다고 했던가. 거짓말이 거짓말을
잉태하는 나날들이 계속 될수록 그녀는 여의어만 갔다. 그러다 승혜의 여덟 번째
생일날이 돌아왔다. 며칠 전부터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 온 승혜는 출근 전의 민섭을
붙잡고 게임기를 사 달라고 졸랐다. 게임기를 사 달라는 나름대로의 이유도 있었다.
아래층의 보람이도 그것을 가지고 있고, 종점 슈퍼의 영이는 물론 이 골목에서 게임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자기 혼자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승혜 안경 쓰고 싶어. 텔레비 앞에서 게임 많이 하면 눈이 나빠져서 안경을 쓸지도 몰라.
아빠는 예쁜 승혜가 안경을 쓰는 거 보면 가슴이 아플 꺼야."
민섭은 승혜의 생일 선물로 인형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 고개를 흔들며
점잖게 반대했다.
"피, 보람이도 게임기가 있는데 안경을 안 썼잖아. 나 게임기 있으면 하루에 한 시간씩
밖에 안 할 꺼야. 그러니까 게임기 사줘 응?"
"보람이하고 너하고, 같니 보람이는 엄마가 안 계시잖아."
현숙은 다른 날과 다르게 신경질 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이내 어린 승혜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는 것을 깨 닫았으나, 이미 승혜의 두 눈에는 의아심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 뒤에 그녀의 머릿속에는 텁수룩한 수염에 밤에 글을 쓰느라
늘 붉게 충혈 되어 있는 김현세의 얼굴이 떠올랐다.
"피! 엄마는......언제는 그런 말하면 안된다고 해 놓고, 엄마가 먼저 그런 말하면 어떡케."
아이들은 영리했다. 그 중에서 비교치의 기억력에 관해서는 어른들 보다 훨씬 능가하다.
현숙은 염려하고 있던 말이 승혜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 쥐구멍이라도 숨을 수 있
다면 숨어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엄마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보람이네는........"
현숙은 얼른 말을 잇지 못했다. 또 김현세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편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민섭은 빙긋이 웃는 얼굴로 승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엄마한테 물어 봐. 엄마가 허락하면 사 줄게."
민섭은 이럴 때는 아내에게 미루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내는 자기와
다르게 승혜의 생각을 바꾸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싫어. 엄마는 돈 없잖어."
"엄마가 왜 돈이 없니?"
"엄만 돈 안 벌고, 아빠가 회사에 나가서 돈 벌어 오잖아."
현숙은 저 작은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까 하는 생각으로 기가 막혀서 민섭을
쳐다보았다. 민섭도 비슷한 생각으로 현숙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좋아. 돈은 승혜 말대로 아빠가 벌어 오는 거야. 하지만 아빠가 아파서 회사에
나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지금도 아빠 몸이 아파서 약 드시는 중이잖아."
현숙은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약 중에서 세 봉을 꺼냈다. 그 중 한 봉은 지금 먹을 수
있도록 봉지를 열어서 남편에게 건네주고 나머지 두 봉은 그의 서류 가방에 넣어 두었다.
"그래도 오늘은 내 생일 이잖어."
승혜는 현숙의 말에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반박했다.
"아무튼 게임기는 안돼. 오락이 정하고 싶으면 보람이네 집에 가서 조금씩 하고 와.
그 대신 이번 주 일요일날 육삼 빌딩 데려가 줄게. 됐지?"
민섭이 약 봉지를 입안에 털어놓고, 물을 한 모금 마신 후에 단정적으로 말했다.
"보람이네 집에 가면 안돼? 알았지."
현숙이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다짐을 받으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나서 얼른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편은 물 컵을 싱크대 위에 같다 놓기 위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
휴! 남 모르게 한숨을 내 쉬고 있으려니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내가 왜 이렇게 가슴
조이면서 살아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엄마 오늘 참 이상하다. 왜 보람이네 집에 못 가게 하는 거야. 그리고 육삼 빌딩은
유치원 다닐 때 두 번이나 같다 왔는 걸. 하지만 게임기는 지금까지 한 개도 없었잖아.
그러니까 생일 선물로 게임기 사줘야 해."
"또, 저 고집 나온다, 자 그만 나가자. 너 자꾸 아픈 아빠 아침부터 피곤하게 만들면,
점심 때 피자 안 사 줄 거야. 네 친구들도 초대 못하게 할거구."
현숙은 억지로 타협안을 제시했다. 진땀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띰이 나면 큰일이었다.
단번에 남편의 시야에 사로잡힐 것이고, 그렇게 되면 왜 그러냐고 묻는 것으로
시작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잉태하여 하기 때문이었다.
"엄만 순 거짓말쟁이. 학교 같다 와서, 친구들 초대하면 피자하고 치킨하고,
콜라 사준다고 승혜하고 약속했잖아. 하지만 게임기는 처음 말하는 거잖어. 그치 아빠?"
승혜는 되는 것 보다, 안되는 것이 더 많은 엄마 보다 아빠 쪽이 편하다는 생각에 민섭을
쳐다보았다.
"좋아. 우리 공주님이 그렇게 원하신 다면 퇴근할 때 게임기 사 올게. 됐지?"
"아빠 사랑해요. 엄마는 미워? 쩌번에도 아빠 월급 타면 게임기 사 준다고 해 놓고선....."
승혜는 민섭의 다리를 껴 않으며 팔짝팔짝 뛰다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현숙을 흘겨보았다.
"게임기 가격이 얼만줄 이나 알아요. 못 줘도 십만 원 한 장은 줘야 할걸. 그렇다고 오랫동
안 좋아 할 것 같아요. 며칠 안 가서 장난감 박스 안에 쳐 박히고 말걸. 그러니 그러지 말고
동화책이나 한 질 사주는 게 어때요?"
승혜가 민섭에게 재롱 부리는 모습을 쳐다보던 현숙은 문득 자기는 이 가정의 구성원
이 아니고, 제 삼자 가 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됐지? 갑자기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차분한 음성으로 민섭에게 말했다.
"김선생 딸이 오락하는 걸 보면 저도 얼마나 하고 싶겠어. 그러니 이 참에 한 개 사주지 뭐.
그리고 게임 종류가 많으니까, 친구들끼리 게임 프로를 교환도 해 가며 즐기면 되잖아."
민섭은 아내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일을 핑계되어 조르는 승혜의 부탁을
거절 할 수 없었다. 오늘은 다른 날 보다 일찍 퇴근하여 백화점에 들려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류 가방을 들었다.
"마음대로 해요........"
현숙은 열외자가 되어 버린 기분으로 억지 웃음을 지으며 결국은 승낙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장난감
같은 것은 사주지 않는 게 그녀의 성격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못했다.
사랑하는 딸과 남편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승혜까지 학교에 간 후에
현숙은 한참 동안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비가 오려는 지 하늘이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오늘 오후부터 소나기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휴!
다른 때 같았으면 어김없이 승혜 손에 우산을 들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현세와
그 일이 있고 부터는 겉돌기만 하는 자신이 싫어서 우울한 얼굴로 텅 빈 집안에서
마음놓고 한숨을 내 쉬었다.
우리 앞으로 자주 만날 수 있는 거죠?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또 김현세의 말이 생각났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정액과 애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팬티를 껴입으려고 할 때,
그가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러지......아......안돼!
현숙은 잊으려 애를 쓸수록 김현세에게 다가서고 있는 의식이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김현세의 생각을 지워 버리려면 바쁘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집안 청소부터 하리라고 막 일서 서려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그 사람인가?
현숙은 무서웠다. 전화를 받게 되면 약간은 탁한 김현세의 목소리가 들려 올 것 같았고,
그렇게 되면 그가 살고 있는 지하층을 노크하고 말 것 만 같아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제발!
전화 벨 소리를 무시하면, 무시하려 할수록 더 요란스럽게 울어 돼는 법이다.
현숙은 걸레를 떨어트리고 눈을 질끈 감은 체 두 귀를 감았다.
현숙씨를 사랑합니다. 아!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요. 이 젖꼭지하며, 이 계곡은.........싫어!
눈을 질끈 감은 체 귀를 막고 있으려니까 전화 벨 소리는 들려 오지 않았다. 그 대신 기억
의 여신이 김현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었다. 현숙은 히스테리칼 하게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흔들었다.
안돼!
마침내 현숙은 무릎을 끓고 울었다. 텅 빈 집안에서 소리내어 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울면서 제발 김현세를 잊게 해 달라고 신께 기원을 했다.
신이 기도를 들어준 탓인가, 천둥소리처럼 울어 되던 전화 벨 소리가 뚝 끊어지면서
괴괴할 정도의 무서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이를 사랑해. 승혜도 버릴 수가 없어.
현숙은 마치 남편과 딸로부터 버림이나 받은 것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한 손에
걸레를 든 체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물도 삼층 짜리 다세대
건물 인 탓에 방안으로 햇볕이 들지 않았다. 그 대신 붉은 벽돌 벽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 앞으로 검은 비닐 봉지 하나가 포르르 날라 들었다가
살랑살랑 바람을 타고 내려 않는 게 보였다. 비가 올 징조 였다. 비닐 봉지가 창문틀
밑으로 사라지면서 다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는 뿌연 먼지를 안고
차가운 골목을 황량스럽게 훑어 갔다.
"좋아. 너도 어린애가 아니니까. 더 이상 말리지는 않겠어. 하지만 네가 만약 그 놈하고 결
혼을 한 다면 더 이상 이 집에 발 들여놓을 생각은 하지 말아라. 난 이십 삼 년 동안 남부
럽지 않게 키워 온 딸을 가진 거 라곤 부랄 두쪽 밖에 없는 놈한테 시집 보내긴 싫으니까."
남편과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던 아버지가 최후의 통첩을 하던 때도 이처럼 초여름이었다.
그러나 장소는 틀렸다. 거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정원에로 잘 다듬어진 향나무가 보였고,
꽃이 지고 잎새만 무성한 목련 나무와, 담장에는 손톱 만한 꽃망울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넝쿨 장미가 늘어져 있었다.
"엄마!"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아버지의 말에 대답을 못하고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난생 처음 으로 어머니에게 거리감을 느꼈다.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아버지처럼
찬바람이 불고 있지 않았으나, 철저한 방관자의 얼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좋아요. 보란 듯이 살아 주겠어요.
어머니가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을 원하는 스물 세 살의 딸을 위해 아버지에게
단 한마디라도 변호를 했었다면, 입술을 깨물며 그렇게 까지 독한 마음을
먹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 이었다. 아무리 가정에서 경제권이 없다지만 아버지의 독선과
횡포에 잘 길들여진 어머니라지 만, 딸의 미래가 걸려 있는 그렇게 중요한 순간에도
방관자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김현세의 집 식탁에서 커피를 마실 때까지 만 해도 부모님들이 보란 듯이
열심히 살려고 최선을 다해 왔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역할을 충실히 했고,
딸을 기르는 어머니로서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랬다. 김현세의 식탁에서
커피를 마실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열심히 살아 왔었다.
정말 잘 살아 왔었는데......
현숙은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지 콧잔등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며 왜 김현세에게
빠져들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 날, 커피 잔을 사이에 두고 김현세가 손을 잡으면서, 현숙씨를 보면은 난 세상을
멋지게 살아야 할 이유가 생깁니다. 라는 말을 듣기 전 만 해도 모든게 순조로웠다.
그러던 것이 손을 잡히고,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받았다는
설레임 때문인지 몰라도, 키스에서 페팅으로, 급기야는 그의 몸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만나면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