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 꼭 떡볶이 해 줄 거지?"
초등 학교 일 학년인 승혜의 가방 매는 것을 도와주고 있을 때였다.
승혜는 가방 끈에 팔을 집어넣다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순간 어제 저녁에 승혜에게 내일 떡볶이를 해주마 라고 약속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럼, 내일 학교 같다 오면 엄마가 떡볶이 맛있게 해 줄게."
텔레비전을 그만 보라는 말끝에 빈 말 비슷하게 한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딸이
기특하기도 하여 오늘은 꼭 약속을 지켜야 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야? 보람이 데리고 와도 돼?"
"보람이......."
보람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보람이 얼굴보다는 김현세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현숙씨를 보면은 난 세상을 멋지게 살아야 할 이유가 생깁니다. ]
언제 였던가 보람이네 집에 놀러 간 승혜를 데리러 갔을 때, 그가 한 말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때 왜 그와 커피 잔을 사이에 두고 식탁에
앉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식탁 건너편으로 손을 뻗어서 커피 잔을 감싸고 있는 손을 양손으로
덮어 올 때 왜 거부하지 않고 빨개진 얼굴로 눈썹을 내려 깔았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내성적인 성격의 남편으로부터는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말이었기에. 김현세의 말이
너무나 가슴 떨리는 속삭임으로 와 닿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이......아래층에 사는 내 친구 보람이 있잖아?"
현숙이 창백한 얼굴로 말꼬리를 흐리고 있을 때 승혜가 앞치마를 잡아당기며
응석을 부렸다.
그때서야 현숙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김현세의 얼굴을 지워 버리려고
애써 웃어 보였다.
"엄마, 승혜도 보람이네 집에서 떡볶이 먹었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보람이도 불러서 같이 먹어야지. 그치?"
현숙의 가슴 떨림을 알리 없는 승혜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현숙의 팔목을 잡아당기며 흔들었다.
"그.....그래."
현숙은 넋이 나간 얼굴로 간신히 대답을 하고 승혜의 손을 잡았다.
아래층까지 배웅을 해주기 위해서 였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혹시나 김현세가
밖에 나와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느라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다행이었다. 지하층에 살고 있는 김현세도
보람이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학교 같다 오면 떡볶이 해 주는 거지?"
승혜가 일층의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다 다시 돌아서서 검고 초롱 하게 빛나는 눈을
반짝거렸다.
"그래. 우리 예쁜 승혜하고 보람이한테 떡볶이 해 줄 태니까 학교 갈 때 차 조심해야 한다.
신호등을 건널 때는 무슨 불이 켜질 때 건넌다고 했지?"
승혜는 지하에서 올라오는 계단 쪽에 신경을 집중시키면서 건성으로 물었다.
그러면서 이토록 사랑하는 딸의 진심을 외면하고 김현세라는 서른 한 살의
무협 소설 작가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미워졌다.
"피, 그건 유치원 다닐 때 배웠다. 파란 불이 켜졌을 때 오른 손을 들고 건너는 거야."
"그래. 우리 승혜는 똑똑해서 친구들 도 많을 꺼야."
금방이라도 김현세와 얼굴이 마주 칠 것 같아서 얼른 승혜의 어깨를
골목 쪽으로 돌려 세웠다. 승혜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는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금방이라도 김현세가 나타날 것 같아서였다.
승혜가 현관 밑으로 내려서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이상하게도 김현세의 얼굴이 안 보이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서운하게 느껴졌다.
"어머!"
현숙이 이상야릇한 감정으로 돌아설 때 였다. 마침 보람이와 김현세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현숙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한 기분 속에 얼른 시선을 돌렸다.
"보람아 울 엄마가 떡볶이 해 준다고 했다. 짜파케티도 해 준다고 했어.
너도 같이 먹어도 된다고 했어. 맞지 엄마?"
승혜가 다시 현관 안으로 들어와서 보람이에게 자랑을 했다.
현숙은 김현세가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귀밑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어느 곳에 둘지 몰라 허둥거렸다.
"안녕 하십니까? 승혜도 안녕!"
김현세는 그런 현숙에게 밝게 웃어 보이고 나서, 시선을 승혜에게 돌렸다.
승혜에게 가까이 가서 승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아.....안녕 하셨어요."
현숙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깔고 김현세의 시선을 피하며 보람이만 쳐다보았다.
"아줌마, 나도 오늘 떡볶이 해 줄꺼예요?"
보람이가 현숙을 올려다보며 까만 두 눈을 깜박거렸다.
"그럼 보람이하고 같이 먹어야지. 보람이 오늘 예쁜 옷 입었네. 아빠가 사 주었니?"
현숙은 김현세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피한 체 처음 보는 옷을 입은 보람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요즘 보기 힘듭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구요."
김현세가 붉게 충혈 된 눈에 꺼칠한 수염을 문지르며 승혜 뒤에 서 있다가
현숙에게 귓속말로 빠르게 속삭였다. 현숙은 얼굴이 더욱 빨게 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