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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7 19:10

촉수드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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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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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본능(本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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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다. 전신을 감싼 마치 칠흑과도 같은 어두움. 

“.....”

‘일’을 끝내고 나면 한 번씩 꼬박꼬박 나를 찾아오는 이 어두움이 이제는 지겹다 못해 
반가울 정도다. 폐소 공포증의 단계는 이미 몇 십 년 전에 지나갔다. 답답함을 상회하는
무엇인가가 내 생명력 자체에 위해를 가하는 기분이다.
70년 동안이나 쳇바퀴마냥 끝없이 반복되는 저열한 고통을, 그대는 겪어본 적이 있는가?

-쿠르릉.

나를 가둔 케이지(Cage)가 문득, 심하게 좌우로 흔들린다.

“멍청한 새끼야, 가장자리를 잡아!”

벌써 일주일이 지났나? 분주하게 떠드는 인간들의 소리를 들으니... 168시간가량
나와 함께한 눈앞의 어두움이 슬슬 걷혀질 때가 온 것 같다. 나의 ‘일’은 보통
일주일이나 이 주일에 한 번 꼴로 생긴다.

“저번처럼 바닥에 떨어뜨리는 실수를 하면 죽여 버릴 줄 알아!” 

뭔가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강제로 이동되는 나의 공간. 아무것도 보이는 것은
없지만 케이지 자체가 심하게 흔들렸기 때문에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지금 나는
어떠한 넓은 홀로 이동을‘당하고’있는 것이다.

-쿵.

잠시 동안 흔들리며 이동한 케이지는 곧 성의 없이 바닥에 내려졌다. 언제나 그렇지만
땅에 부딪히는 충격을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야 한다. 혹시 이 충격으로 나를 가두어 
놓은 케이지가 박살나진 않을까 기대했는데, 70년 동안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육장은 어떠한 특수한 힘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마법의 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후의 일이다.-
난 미간을 찡그리며 귀로서는 밖의 정황을 살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카밀 서커스 쇼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굉장히 크고 즐거운 듯한 소음이 드려온다. 

“말이 필요 업습니다. 150년 전통을 자랑하는 저희 쇼의 이름을 건 오프닝 무대! 
그 기묘한 무대를 바로 갖도록 하겠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신사 숙녀 여러분!“

저 패턴의 소음이 들리고 난 후엔 항상 나를 가두던 어둠이 사라지곤 했다. 아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펄럭.

예상했던 대로, 나를 가두던 어두움이 순간적으로 사라진다. 인간의 수컷이 내 케이지를
덮고 있던 검은색 천막을 치운 것이다.

“휘장 안에 감춰졌던 생물이 공개 되는 순간입니다!”

눈이 부시다. 간만에 만나는 빛은 나의 시야를 사정없이 공격하는 듯 했다. 찡그린 채로
앞을 보니, 역시나 수많은 인간들이 나를 둘러싼 채로 비잉 둘러앉아 있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프닝 무대의 주인공을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십시오!” 

그들이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는 구경거리가 뭐겠는가, 바로 나였다. 호기심 띈 시선으로
새하얀 나의 전신을 훑어 내리는 인간들을 어금니를 악물고 노려보았다.

“요, 용이잖아?”

인간들이 쳐다보는 게 나의 몸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은 20년 전이요, 그들이 나를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겨우 10년 전이다. 의지와 자아가 발달되는 
최근의 30년 동안, 내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그야말로 막대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께서 보시고 계시는 철창 안에 갇혀 있는 이 괴물은 바로 
드래곤입니다!”

콧수염을 길게 기르고 기다란 모자를 쓴 수컷의 언어가 끝나자, 장내가 순간적으로 
정적에 휩싸인다. 뭐라고 떠드는지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나를 소개하는 
문구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 조용한 정적을 깨는 것은 주로 굵직한 수컷들의 목소리였다.

“저거 진짜야?”

“씨벌거, 말도 안돼! 가짜 아니야?”

역시나 수컷들이 크게 외쳐대기 시작한다. 이 빌어먹을 쇼에 출연한지도 벌써 70년.
회수로는 몇 백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반응은 똑같을 뿐이다. 인간들의
뇌구조란 그렇게 획일적인 것인가?
콧수염이 입가에‘씨익’잔인한 미소를 머금는다.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관객 여러분. 물론 진짜입니다! 게다가 이 녀석의 몸에는
여느 드래곤들과는 크게 다른 구석이 있습죠.”

다음에 나를 반길 상황은 생각하기도 끔찍했다. 콧수염이 손가락을 가리키며 외친다.

“조련사, 녀석을 뒤집어!”

콧수염을 기른 녀석이 뭐라고 외치자, 인간 중에서도 특히 거대한 수컷이 윗몸을 
온통 드러낸 채 나를 향한다. 수컷의 손엔 보기에도 위화감 넘치는 기다란 철봉이 
들려있다. 그것으로 나에게 고통을 주리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퍼억.

인간이 휘두른 철봉에, 후두부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머리가 핑 돌며 정신이 없어진다. 
기력이 없어 반항도 못하는 나의 몸을, 인간 수컷은 역시 철봉을 사용해 힘겹게 뒤집기 
시작한다. 나름대로 반항을 해보지만... 머리를 맞아서 그런지 균형 감각이 제로다.

“자아, 보시지요!”

이 순간만큼은 정말 죽을 정도로 수치스럽다. 

“...!”

벌러덩 뒤집혀 치부를 낱낱이 공개 당했다. 인간들의 놀라움과 경악이 피부로 느껴진다. 
아마 그들은 내 다리 사이에 있는‘그것...’용의 성기 대신에 붙어있는 3가닥의 촉수를 
확인했을 것이다. 
몇 차례나 일어나려 시도했지만 철봉은 집요하게도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덕분에
난 참으로 비참하게 버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의 사회에서도 버려진 불쌍한 녀석입니다! 기형(畸形)이라는 커다란 신벌은 
지구상에서 가장 완전한 생명체라는 드래곤에게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야 마는
실로 역사 적인 순간!“

비참함과 굴욕. 어쩌면 이미 익숙해져버린 감각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이 
구경거리 노릇을 오늘로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명한 화가가 저 드래곤을 모델로 해 그린 그림을 단돈 10실버에 팔고 있습니다!”

목뼈 뒤쪽부터 척추 아랫부분까지의 느낌이 심상치가 않다. 최근 몇 주일동안 등이 아프고
가려운 것이... 드래곤의 어떠한 신체적인 변이를 알리는 신호가 주기적으로 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느낌에 불안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한다.
아파, 아프다!

“이 진귀한 모습을 담은 그림을 구입하실 분은 안계십니까?”

그리고 등의 고통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최고조에 올랐다.

-촤아악!

허리가 꺾어지며 몸 안의 뭔가가 등으로부터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다. 등이 실제로 찢어질 듯 아팠지만... 왜인지 모르게 굉장히 후련한 기분이다. 

“아니!?”

그렇다. 그들이 놀라는 이유는 바로 새롭게 자라난 나의 날개 때문일 것이다. 
날개를 얻자마자 밀려오는 아득한 파괴본능과 힘. 뜻 모를 욕지기가 입에서 맴돈다. 정신은
극도로 흥분상태가 됐으며, 나의 하얗고 작던 육체는 분명 일정한 크기로 성장했다.

-콰지직!

날개를 좌우로 힘껏 움직여, 지금까지 70년 동안이나 나를 가둔 지긋지긋한 케이지를 
부숴버렸다. 

“꺄악!”

케이지는 단박에 박살나며 철근과 쇠창살, 합판의 조각들로 변했다. 강력한 물리력에
의해 부서졌기 때문에 엄청난 기세로 튀는 파편들에 맞아 피를 쏟으며 나자빠지는 
인간들의 모습도 보인다.

“조련사! 저, 저 괴물을 막아!”

나보다 훨씬 거대한 몸짓을 지닌 인간 수컷이 철봉을 들고 내게 달려온다. 하지만 
나를 가둬 놓았던 우리는 진작 박살나고 없는 것이다. 10년 동안이나 나를 두들겨 
패온 인간 수컷.
뛰어올라 철봉을 피하며 수컷의 머리통을 물었다. 

“크엑!”

지금 깨달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목이란 너무도 연약했다. 난 잘라낸 수컷의 머리를 
어금니로 으깨며 씹어 넘겼다. 신선한 피와 살, 혹은 뇌수가 입안 가득히 머금어지는 
기분은 내게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선사했다.

“꺄아아아악!”

“이런 미친...!”

이제 그들의 쇼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인간들끼리 서로 엉키며 갖가지 비명을 질러댄다. 
오늘따라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 인간들이다. 인간 하나의 머리를 먹었지만 아직 배가 
고프다. 오랜 기간에 걸친 음식물 섭취 부족현상은 나에게 더 많은 먹잇감을 요구하고 
있는 듯 했다.
난 시선을 주욱 돌리며 가장 맛있어 보이는 인간을 찾아보았다. 

“...!” 

시선이 멈춘 곳에는 어느 인간의 암컷이 있었다. 살이 연해보이고 피가 맑을 것 같은
느낌에 고른 것이다. 

“으아아... 으아...!”

자신에게 곧 닥쳐올 사태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받았는지, 인간 암컷이 자신의 작은 
전신을 덜덜 떨기 시작한다. 물론 나에게는 그저 식욕을 돋우는 춤 정도로 보인다.

입을 쩌억 벌려서 암컷의 머리를 씹어 으깨려는데... 갑자기 하반신에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간지러움이 느껴진다. 생각지도 못한 간지러움에 깜짝 놀라 아래를 보니,
성기 대신에 달린 저주받을 3개의 촉수가 마구 요동치며 길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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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본능(本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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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요동을 치는 거뭇거뭇한 촉수들.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다. 통제 불능. 바로 그것이다. 비록 나의 신체에 달려있긴 했지만 
70년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던‘그것들’의 갑작스러운 폭주는 매우 경이로운 
현상이었다.

“꺄아아악!”

인간 암컷은 이 경이로운 모습을 보고 감탄을 하기는커녕, 째질 듯한 비명을
질러댈 뿐이었다. 헌데 그런 암컷을 보고 있으려니, 내 안에서 뭔가 알 수 없는... 
식욕과는 다른 어떠한 생소한 욕구가 강렬하게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처음으로 
느껴지는 이 맹렬한 순환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강도를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3가닥의 촉수는 이제 인간의 다리와 비슷해질 정도로 길어지고 있었다.

“안돼!”

암컷이 비명을 지르며 거센 몸부림을 친다. 하반신에 그 저주받은 뿌리를 내린 
촉수들이 나도 모르게 암컷의 육체를 휘감기 시작한 것이다. 특정한 목적이 있는 듯한
아주 왕성한 움직임이었다. 촉수의 표면에 생기는 혈관들이 터질 듯 팽창한다.
이쯤 되니, 스스로 아직 어리다고 인식하던 나였지만 욕구의 정체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이거 놔, 이 괴물!”

암컷은 자신이 들고 있던 가방으로 촉수를 때렸지만 간지럽지도 않다. 게다가
그런 암컷의 반항을 보니, 나의 흥분지수는 더더욱 높아져만 가는 것이 아닌가?
촉수는 스스로 움직여 암컷의 가방을 쳐냈다.

“꺄아악!”

나를 자극하는 날카로운 비명! 뇌가 타버릴 정도의 강렬한 성욕을 느낀 나는 
한쪽 팔로 암컷의 허리를 움켜쥐고 날개를 펄럭였다.

-촤악.

과연 내가 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단 한번의 날개 짓은 놀랍게도
지면으로부터 3m정도씩이나 나를 띄울 수 있었다. 처음 해보는 비행이지만 어지럼증이나
균형을 잡지 못하는 일은 없다. 마치 원래 날아다니는 녀석인 것 마냥 자연스러웠다.
발밑이 허전한 기분보다는 오히려 머리 위를 오르고 싶은 도전의식이 팽배해진다.

“.....”

인간의 암컷은 고개를 푹 숙인 게 첫 날개 짓 때에 이미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실내의 천장 바로 밑까지 몸을 날려 바닥을 내려다보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나에게 
자신의 머리를 식사로 제공한 수컷의 잘려나간 목에서는 아직도 피분수가 흐르고 있다.

“씨팔! 저리 비켜!”

“이거 놔, 이 새끼야!”

그 시체를 중심으로 이리 엉키고 저리 엉키며 탈출을 시도하는 인간들... 그 비참한 
군상들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재미있기도 하고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게 했다. 
그러고 보면 조금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우스꽝스런 내 모습을 보며 야유를 퍼붓던 
놈들이 아니던가.

문득, 콧수염을 기른 인간 수컷이 생각났다. 그놈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어떻게든 찾아서 죽여야만 한다.
녀석을 찾아 시선을 돌렸지만... 그 수컷은 서커스장 안의 어디에도 없었다. 고도로
발달한 시력과 후각은, 콧수염 수컷이 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외친다. 잠시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말았다.
타오르는 분노와 성욕의 양 갈래에서 갈등하던 나는, 결국 촉수의 재촉을 이기지 못했다.

-콰지직.

천장을 뚫고 그대로 상승한다. 마치 변태를 한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 
음식물 섭취만 원활했다면, 10년 전에 벌써 몸에 변화가 생기며 날개가 나왔을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느끼는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 빛나는 태양이 비늘에 닿으니 그간 쌓였던
곰팡이마저 사라지는 것 같다.
70년 동안의 고통은, 마치 이 순간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펄럭.

날개 짓 한번으로 방향 전환을 했다. 수많은 인간의 집과 논밭이 아래로 펼쳐진다.
공중이지만 인간의 마을 한 가운데로 날았다. 백색의 내 몸은 햇빛에 반사 되어서 아마 
인간들의 눈엔 잘 보이지 않으리라.
암컷을 안은 채로 얼마나 날개 짓을 했을까? 한참을 비행하던 내 몸이 멈춘 곳은 
어느 깊은 숲 속이었다.

-우지직. 

비행중의 착지는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수업료로 나무 몇 그루를 부수며 바닥에
처박힌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본능인지, 인간 암컷의 몸은 다치지 않게 보호했다. 
단단한 비늘 덕분인지, 나 역시도 상처는 별로 없었다.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보니 마침 적당한 크기의 동굴이 보인다. 촉수들은 벌써
눈이 아플 정도로 움직이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나는 인간의 암컷을 안은 채, 어두컴컴한 동굴 안으로 향했다.






                                    -To Be Continued-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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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본능(本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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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엔 다행히도 별다른 몬스터나 짐승의 흔적 따위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곰 
같은 짐승들이 겨울을 보낼 때의 용도로 만들어둔 동굴로 추측이 된다. 
아무런 경험도 없고, 다른 존재에게 뭔가를 배운 적도 없지만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70년이라는 세월동안 내 머릿속의 무언가가 주기적으로 지식을 흘러
들어오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 드래곤이라는 종족의 특성으로 여겨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세한 정보와 지식들은 끊임없이 머리로 들어와 저장되고 있다. 하지만
그 방대한 양에도 불구하고, 내 하반신에 달린 촉수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난 거칠게 인간 암컷의 옷을 찢었다. 암컷의 얇은 살갗이 날카로운 손톱에 
긁혀 피가 흘렀지만 오히려 보기가 좋다. 게다가 3가닥의 촉수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암컷의 옷 속을 파고드는 중이었다.

“!”

짜릿한... 촉수로부터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쾌감이 밀려온다. 아까 
수컷의 뇌수를 맛봤을 때에도 좋긴 했지만, 이런 말도 안돼는 쾌감 까지는 
아니었다. 

아니, 쾌감도 쾌감이지만... 촉수가 만지는 어떠한 사물의 감촉이 내게도 
느껴지는 것이 더욱 신기했다. 70년을 살아왔지만 지금까지는 촉수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던 것이다.
나완 전혀 상관없는 돌덩어리를 달고 살아온 느낌이랄까? 

게다가 촉수들은 이제 나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촉수를 
컨트롤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으... 음.”

부드러운 촉수가 자신의 전신을 휘감으며 돌자, 인간의 암컷은 희미하게나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종족이 다르고 배운 적도 없지만, 나에게는 묘하게도 
암컷의 성감대(性感帶)가 자리한 위치가 전부 보였다.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일단 한쪽 촉수를 움직여 암컷의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젖가슴을 조이며 감았다. 촉수 끝부분으로는 연분홍빛 유두를 쉴 새 없이 비비며 
자극한다. 이것 역시 본능이라면 본능일까? 난 지금 분명, 혼자만 쾌감을 느끼기
보다는 암컷 역시 즐겁게 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촉수를 자세히 보니, 어디에 쓰는 용도인지 알 것 같은 미세한 
돌기가 촘촘히 박혀있었다.
이것을 암컷의 음부(陰部)에 부드럽게 비비며 넣는다. 처음엔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여러 번 시도를 한 끝에 요령을 깨달아서 인지, 아니면 암컷의 몸에서 미끄러운 
체액이 분비 되서 인지, 촉수는 살짝 벌어진 음부 속으로 별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일단 들어간 촉수는 그때부터 일정한 리듬을 타며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 하악.”

반쯤 넋을 잃은 채로 겁탈을 당하는 암컷의 표정은 의외로 괴롭거나 일그러져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 또한 나처럼 쾌감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반 쯤 벌어져서
타액을 흘리는 암컷의 입에 마지막 남은 촉수를 울컥 쑤셔 넣었다. 

“읍...!”

몸서리쳐지는 쾌감이 밀려온다. 신체는 가만히 앉아서 3가닥의 촉수만을 움직여 이런 
쾌감을 얻을 수 있다니! 오히려 나를 이런 기형의 모습으로 만들어준 신에게 생전처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가지 들 정도였다.

암컷의 음부와 나의 촉수에서 나온 체액들이 현란하게 뒤섞인다. 그렇게 얼마간을 
움직였을까?

“하, 하아아악...!”

인간의 암컷이 갑자기 눈을 뒤집어 까며 정신을 잃는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벌써
촉수로 막힌 입을 제외하고... 눈, 코, 귀. 육공(六孔)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즉사한 것 같다. 암컷의 생명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촉수를 거두었다. 비록 절정에 오르진 못했지만, 암컷이 죽어버렸는데도 계속 
할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화이트 드래곤인 나는 냉기 섞인 숨결을 내쉬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가만히 앉아서 죽은 암컷의 시체를 먹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데, 촉수에 묻어있던 
인간 암컷의 체액이 나의 시커먼 촉수 안으로 빨려들 듯 흡수되는 것이 아닌가?

“...!”

그와 동시에 그동안 잃었던 체력과 피로가 갑자기 회복되는 걸 느꼈다. 게다가 어떤
작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약간이나마 또 성장을 했다. 날개가 넓어지고
얇았던 뒷다리가 두꺼워졌으며, 앞발에는 더욱 강인하고 날카로운 손톱이 자라난다.

“.....”

좋다면 충분히 좋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난 순간적으로 어떠한 비극적인 
운명을 느꼈다. 이것만이 바로 내가 강해질 수 있는 방도인 것이다. 분명히 나는
여타의 드래곤들과는 전혀 다르다. 보석을 먹거나 음식을 먹어서가 아닌, 암컷의
체액을 촉수에 머금어야만 할 것이다. 대체 나의 부모는 누구인가? 이 대륙의
모든 화이트 드래곤들을 찾아다니며 확인을 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다시금 원래 크기로 작아진 촉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아르케, 뭐가 있긴 있어?”

“재촉하지 말고 내가 확인할 때까지 조금 기다려줬으면 좋겠군요.” 

인간들의 목소리가 조용한 동굴 안을 울린 것이다. 게다가 그 음성 중에는 반갑게도
암컷의 것이 존재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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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버전입니다. 잇힝...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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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본능(本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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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암컷이 끼어있다지만, 갑작스런 인간들의 출현은 나를 긴장케 했다. 일단은
끝이 막힌 동굴이라서 만약의 경우 탈출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고작’인간 두 명의 기척...
지금까지의 판단 결과로 이 대륙을 거의 장악하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의 신체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약했다. 아무리 내가 어리고 미약한 헤츨링이라지만 오우거 같은
몬스터도 아니고... 인간들에게 당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나저나 이 동굴은 너무 어둡군. 내 발등이 안 보일 정도인데?”

“그건 어두움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신 안구의 성능이 썩은 구울의 눈알만도 못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는데요.“

어둠 한가운데에서 내가 듣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인간의
언어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호오, 과연... 음욕시인(淫慾詩人)이라는 별호(別號)를 가진 사람과 잘 어울리는 
도발이군. 하지만 아르케, 너도 네 발등은 보이지 않을 텐데?“

“그건 왜죠? 듣기 전에 미리 말해두지만, 그 이유가 시덥잖은 농담이라면 당신의 
이미 썩어 구더기가 들끓고 있는 명예에 향수를 뿌리는 행위라는 걸 명심해둬요.“

암컷의 음성은 별다른 굴곡 없이 매우 차분했다. 하지만 그 음성에서는 뭔가 이질적인 
색정(色情)이 함께 묻어나온다.

“결코 농담 같은 건 아니야. 하지만 아르케, 너도 젖통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발등이 
잘 안 보일 것 같은데?”

“.....”

-퍼억.

작지만 날카로운 타격 음이 동굴 안을 울린다. 곧이어 들리는 수컷 쪽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 지금 한명의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공격한 것이다. 동행이 아니었나? 왜 
한쪽을 공격한거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언어를 몰라 그 내용까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차분하고 살기 없는 대화를 
나누던 둘이었는데... 어째서?

“크으... 이봐. 그렇다고 물건을 걷어찰 필요까지는 없...”

“...쉬잇, 조용.”

갑자기 암컷의 음성이 작아진다. 이정도 거리라면 인간의 청역(聽域)에서는 결코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지만, 드래곤인 나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무언가를 경계하는
신중한 태도. 그리고 그 경계대상이 나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암컷이 수컷에게 다시금 뭐라 말한다.

“저쪽에서 혈향(血香)이 풍기는 군요, 카이런.”  

“그리고 산뜻한 정액의 냄새도 나는데?”

속삭이며 어떠한 정보를 주고받는 그들. 역시 나에 대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피 냄새라도 맡은 건가. 의외로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능숙한 인간들인지도 모르겠다. 흥분과 동시에 약간의 긴장이 밀려온다.

가만히 발톱에 힘을 주었다. 그래봐야 상대는 인간. 먼저 물어뜯거나 할퀴기만
한다면 연약한 육신은 종잇장처럼 찢어질 게 뻔하다.

“내가 앞장서지. 아르케는 뒤에서 따라와.”

“그러시던지.”

들리는 수컷의 음성으로 봐서는 이제 지척이다. 나는 조용히 코너 쪽으로 가서 발톱을
휘두를 준비를 했다. 한층 날카로움과 강도가 더해진 나의 무기를 보니, 어느 정도는 
마음이 안정된다.

“.....”

곧 어두움 속에서 희끗하게 보이는 살색의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냈으며, 난 튕겨져 
나가듯 앞발을 휘둘렀다.

-푹!

“...으엑.”

성공이다. 거의 아무런 방비도 안하고 모습을 드러낸 수컷의 몸에 나의 발톱이
적중한 것이다. 하지만... 뭔가 제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내 발톱이 인간 따위의 얇은 몸통쯤은 가볍게 양 갈래로 찢어놓을 줄 알았다.
하지만 수컷의 가슴에 반쯤 박힌 발톱은 뭔가에 막힌 듯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무방비로 공격을 당한 후 수컷의 대응이었다.

“아프잖아, 씨팔!”

몸통이 찢어지기는커녕,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주먹을 
휘두르는 인간의 수컷. 순간적으로‘저걸 맞으면 위험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회피를 하거나 막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 속도였다.

-콰직.

“캬악...!”

상상할 수 없는 힘으로 목덜미를 가격당한 나는 맞은편의 벽에 엄청난 기세로 처박히고 
말았다. 척추가 끝장이 나는 통증과 함께 전신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벽에 충돌한 여파로 인해 동굴 천장에 쌓인 흙먼지와 파편들은 우수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으... 썅. 너무 방심을 했나? 한대 맞았네.”

전신에 바르르 떨리는 경련이 온다. 바닥에 널브러진 내 흐릿한 시야에는 어처구니
없게도, 나 자신의 옆구리가 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목뼈가 부러져서 휜 것 같다.
인간이 휘두른... 단 한 번의 주먹에 내 목이, 아니 전신의 중요한 뼈들이 부러진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혼란스럽다...!

“당한 가슴보다는 때린 주먹의 상태가 더 심각하군요.”

“으응? 그게 무슨... 악, 씨팔! 이거 손가락이 부러졌잖아?”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피거품이 나온다. 호흡이 점차 곤란해지며, 시야도 계속
흐려진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틀림없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70년 동안 갖은 수모를 받고... 탈출해 이제야 빛을 보는가 했는데, 운명의 신은
이미 나의 최후를 이렇게 비참한 형식으로 정해놓았었구나.

“가만, 점잖게 좀 있어요, 카이런. 이거... 의외로 흥미로운 샘플이군요.”

“쓰으읍. 젠장, 그 괴물 놈 정체가 대체 뭔데? 내 손가락이 부러질 정도면... 
풀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골렘 쯤 되나?”

수컷은 연신 투덜거릴 뿐이다. 목숨을 위협했던 상대를 단 한방으로 거의 죽여 놓은
주제에 뭐가 그리 불만인 거지? 아니, 놈에게 나는‘상대’정도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가소로운 벌레와 같은 존재라는 건가...

“골렘? 흥. 당신이 그리는 저열한 상상보다 수 백 배는 유니크 해요.” 

인간 암컷이 한쪽 무릎을 꿇고 거의 죽어가는 나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약간 특이한 구석이 있는... ‘화이트 드래곤’이군요.”

“뭐야?”

암컷의 매우 짙은... 거의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로 진한 보라색의 눈동자는
분명히 아주 독특한 이채(異彩)를 띄고 있었다. 

“오호라. 이거, 앞으로 마음에 들 것 같은데...?”

암컷의 마지막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을 들은 것을 끝으로, 나는 결국 의식의 
끈을 놓치고야 말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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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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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본능(本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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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볼수록 신기하군.”

정신이 혼미하다.

“역시 그렇죠, 영감님? 저도 제가 명색이 드래곤이라는 녀석을 한방에 초죽음 
시켜놓을 줄은 몰랐다니까요. 으하핫.“

“당신이라는 인간은 세 살 바기 어린아이에게 결투를 신청해놓고서도 이겼다고
좋아할 종자가 분명하군요.”

내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인가?

“그만들 싸우게. 왕실 직속 기구의 일원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계속 그래야 하겠나?”

“뭐, 이러면서 프렌드 쉽이 싹트는 거 아니겠습니까?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영감님. 아르케도 사실 속으로는 저를 흠모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핫.”

뭐가 그리도 좋은지 수컷의 호탕한 웃음이 들려왔다.

“8써클에 도달한 마법사에게 감히‘영감님’따위의 칭호를 붙일 수 있는 그대의
두뇌 설계상의 구조가 참 미스테리할 뿐...“

왁자지껄한 인간들의 언어가 의식을 잃었던 나의 정신을 깨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주위를 보았다. 

“...오, 보게. 그가 깨어난 것 같구만.”

새하얀 백발과 수염을 기른 늙은 수컷이 하나. 동굴에서 마주친 젊은 수컷과 암컷이 
하나씩, 인간 세 명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다. 머리가 무척이나 아팠다.
대체 이곳은...? 아니, 대체 내가 어떻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거지?

“귀여운 아이야. 이제 정신이 좀 드니?”

“어떻게 저 기분 나쁘게 생긴 촉수를 보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비유가
억세게도 좋은 여자야.”

조심스럽게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놀랍게도, 크게 부러졌던 목이 부드럽게 돌아간다.
아니... 분명히 전체적으로 엉망이 됐던 몸인데 지금 보니 작은 상처가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야 당신의 보잘 것 없는 물건보다는 훠얼씬 훌륭한 용도로 쓸 수 있으니까.”

“.....”

암컷의 언어를 듣고 크게 질린 듯한 표정을 짓는 거대한 수컷. 그는 아예 자신의 입을 
다물었다. 

내 몸은 어떤 가느다랗고 투명한 대롱 같은 것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목에 하나. 가슴에
하나. 손과 발에 각각 하나씩.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을 움직여보았지만, 역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 얇은 대롱에는 아무래도 알 수 없는 특별한 힘이 깃들어진 것 같다.

“아르케 양은 아주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군. 단 한마디로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을 
얌전하게 만들다니 말이야. 허허헛.“

망가진 내 몸을 이들이 고치기라도 한건가? 절대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 정도의
데미지였는데... 그들에게는 내가 모르는 희한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나이를 많이 먹어
경험이 풍부한 인간의 수컷에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지도. 

“어이, 네 발톱 꽤나 쓸만하던데?”

엄청난 거구의 수컷이 갈색 눈을 빛내며 나에게 뭐라고 말을 건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마음속으로부터 순간적으로 공포가 밀려온다. 나를 한 번 죽였던 무서운 수컷. 나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호오, 이놈 상대의 힘을 알아보긴 하는 것 같은데요? 마치 흰색 강아지 같은 모습이네. 
으하핫.”

“나이가 어려서 그렇지, 그래도 그는 드래곤일세. 500년 후면 아마 자네 같은 
무투가(武鬪家)들이 한 다스가 덤벼도 눈 하나 깜박 안 할 듯하네만...”

인간에게서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공포를 느낀 건 드래곤으로서 무척이나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난 아직 드래곤이라 칭하기도 민망한 어린 헤츨링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날개와 함께 약간의 힘을 얻었다고 자만하던 상태에서 이런 강력한 인간들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운 없는 일이겠지.

“헌데 이 아이는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것 같군요.”

“그럴 가능성이 크군. 이 기형적인 촉수와 그가 발견된 곳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면
아마 어미로부터 버림받았을 확률이 높은 것 같네.”

“어쨌든 리델씨, 이 녀석. 저한테 넘기기로 하셨죠?”

“...으음. 이 늙은이의 죽기 전 마지막 유희거리를 꼭 그렇게 앗아가야만 직성이 
풀리겠는가?”

폭발적인 몸의 곡선을 지닌 암컷과 겉보기엔 비리비리해 다 죽어가는 수컷이 어떠한
대화를 나눈다.

“그런 말씀 해봐야 소용없어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후훗. 제 연구가 끝나면
그때 넘겨드리도록 하지요.”

“아쉽구먼. 하필이면 이렇게 대단한 샘플이라니...”

늙은 수컷은‘끄으응’하는 신음과 함께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뭔가가 
굉장히 안타까운 얼굴이다. 왜 날 보며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그럼 8써클의 위대한 마법사와, 인간인지 마운틴 고릴라인지 분간이 잘 안되는
남정네 두 분께서는 자리를 좀 비켜주실까요? 단 일초라도 빨리 저의 연구를
시작하고 싶군요.”

“한 경지를 이룬 네크로맨서가 나가라는데 이 늙은이가 할말이 있겠나. 뜻하는 대로 
하시게.”

“왜요, 좀 더 구경을...!”

“우리는 이만 일어서는 게 좋을 듯싶네, 카이런.”

늙은 수컷은 자신보다 머리 두개는 더 큰 근육질의 수컷의 입을 틀어막더니, 그를
데리고 방을 나선다.

-기이잉.

수컷들이 나가면서 문을 닫자, 커다란 고리가 자동으로 돌아가며 잠금장치를 한다.
이것도 저것도 하나같이 생소하고 신기한 모습이었다. 
문이 완전히 잠기는 모습을 확인한 암컷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너, 몇 살이니?”

어감으로 봐서는 내게 뭔가를 묻는 듯 했다. 

“키에엥...!”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하찮은 암컷아! 라고 외칠 생각이었지만 내 입에서는‘키에엥’
하는 강아지의 그것과 비슷한 소리가 나올 뿐이었다. 

“아, 정말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것 같구나.”

“캬릉.”

“혹시 알아들을 수는 있는 거니?”

내 눈을 보며 나에게 말을 거는 존재는 태어나서 처음이다. 때문에 어떻게든 대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예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불가능한 일일 뿐이었다.
너무나 답답하다.

“일단은 말을 가르쳐야 진도가 나가겠네.”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하는 인간의 암컷. 창백한 피부에 짙은 보라색의 머리카락은
드래곤인 내가 척 보기에도 어떠한 분위기가 느껴지게 했다.
문득, 그녀가 자신의 한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수다쟁이’가 좋겠군.”

암컷은 길게 뻗은 풍성한 직모(直母를 뒤로 쓸어 넘기며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는 대기에 흡사 어떠한 문양을 그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言’

그림인지 문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허공에는 회색으로‘言’의 모양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言’이 나타나자마자 양손으로 어떠한 수인(手刃)을 맺는 암컷.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뭔가가 스르륵하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읍...]

인간의 머리통만한 크기의‘그것’은 마치 내가 케이지에 갇혀서 살 때에 가끔 먹었던
주먹밥을 확대시켜놓은 모양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신에 먹을 칠한 듯 온통 
검은색을 띄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하긴, 주먹밥에는 두 눈과 입이 없지.

[하이고야, 마스터. 한참 인간 여자 하나를 꼬셔서 일이 잘 돌아가려는 타이밍에
소환을 하시는구만요. 아쉽기 그지없사옵니다. 헌데 이 소인을 간만에 불러주신
이유는...?]

검은색의 공(?) 녀석이 푸른 눈알을 굴리며 빠른 속도로 인간의 언어를 쏟아낸다.

“이번엔 장기간 소환이야. 정 뭣하면 가서 하던 일 마저 보고 다시 올래? 수다쟁이야.”

[무슨 천만의 말씀을! 어떤 인간 세상의 여자가 우리 마스터보다 아름답겠습니까?
한줌 가치도 없는 여자에게 쾌락을 주느니, 마스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편이
백배는 낫지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저를 수다쟁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정식 이름인
‘블랙 헤드’라 칭해주시는 건 어떨까요? 마스터께 이름을 불리울 수만 있다면 
소인은 평생 마스터의 발을 핥으며 살겠나이다.]

생전 처음 듣는 굉장한 속도로 말을 내뱉는 녀석이었다. 인간의 언어란 이렇게까지
빠를 수가 있구나.
이놈을 불러낸 암컷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훗. 네 이름을 불러서 계약을 했다가는 나보단 네가 더 큰일일걸?”

[하긴... 그것도 그렇겠군요. 마스터에게 ‘음욕시인’이라는 칭호가 붙어있다는
사실을 이 미천한 것이 잠시 잊었었나 봅니다.]

“어쨌든 수다쟁이야, 네가 이번에 일주일 동안 할 일은 따로 있단다.”

[마스터와 함께라면 일주일이 아니라 일천년이라도 좋사옵니다.]

“...기대를 충족 못시켜줘서 미안하네. 나와 함께하는 건 아니라서 말이야. 일단 
너와 일주일간 동고동락할 아이를 소개하도록 할게. 이름은 아직 모르지만...”

[그게 무슨...?]

작고 시커먼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인간의 암컷을 올려다본다.

“영광으로 생각해. 드래곤에게 말을 가르친 패밀리어(familiar)는 아마도 네가 이
대륙에서 최초가 될 테니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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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네크로맨서의 설정을 어디선가 차용하려 했으나... 자료 구하기가 예상 외로
힘들어 결국 제 미약한 상상력을 동원해봤습니다. 어떤 설정인지는 앞으로 쭉욱 보시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죠?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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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연구(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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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나와 검은 공 녀석의 합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간의 암컷이 뭐라고 
지시를 내렸는지, 녀석은 항상 내 곁에서 인간의 언어로 쉴 새 없이 지껄여댔다.
처음에는 놈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서 얼떨떨했지만... 곧 그것이 나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치려는 기특한 행동임을 알게 되었다.
요는, 보라색 머리카락의 암컷이 나의 의사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얼떨결이었지만, 분명 나에게도 이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검은 공 녀석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학습이란 생각보다 어려워서, 이틀 동안은 아예 인간 언어의 
기본 체계조차 잡히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심 70년 동안을 서커스단에서 굴러먹었으니 
단순한 단어는 금방 이해하겠지 하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검은 공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들은 그 음(音)마저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 엄청난 바보가 되기라도 한 것 마냥...  

어쩌면 나에게 있어 ‘인간이 쓰는’ 언어라는 것은 일종의 증오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억지로 두뇌를 닫고 있던 거라고 여기면 아귀가 적당히
맞아떨어진다. 
때문에 난 어쩔 수없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생전 처음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해야만
했다.

끝이 안보일 것 같던 인간의 언어 학습은, 검은 공 녀석이 워낙 필사적인데다가 나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자 금방 그 진도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어쨌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종족이라 추앙받는 드래곤인 것이다. 

이따금씩 보라색의 암컷이 가져다주는 신선한 고기를 먹으며, 검은 공 녀석에게는 머리가 
아플 때까지 인간의 언어를 배운다. 그러다가 지치면 바로 카펫에 쓰러져 수면을 취했다. 
물론 숙면(熟面)까지는 무리다. 피곤함이 겨우 가실 정도가 되면 검은 공 녀석이 나의 코를
간질여서 바로 잠을 깨우는 것이다.
녀석의 수업은 정신이 듦과 동시에 시작된다.

[그만 일어나라, 이 변태 드래곤아. 드래곤이면 드래곤 답게 한달씩은 멀쩡하게 
깨어있을 줄도 알아야지. 엉? 마스터께서 나에게 할애한 시간은 고작 일주일이란 
말이다. 일어나! 그리고 내 말을 알아들었으면 그에 대한 답변을 해주길 바란다.
설마 알아듣지 못한 건 아니겠지?]

바로 이런 식이다. 솔개가 병아리를 채가듯, 검은 공 녀석의 말 속도는 하루가
다르게 빨라져만 갔다. 한 숨에 두 단어를 말하던 녀석이 이제는 한 숨에 여서 일곱
단어를 토해내니,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못 듣기 십상이다.

“난... 아직. 그러니까 헤츨링이다. 그런 이유로 최소한의 잠을 못 이루면 성장에 
차질이 생긴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나? 검은 꼬맹아.”

[말투가 좀 딱딱하긴 하지만 그 정도면 일단 합격선이군. 하지만 꼬맹이라니! 
이래 뵈도 내가 너보다 두 배는 더 살았을 거다.]

“그런 식으로 치면 너가... 아니, 내가. 내가 맞지? 내가 앞으로 너보다 50배는 더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게다가 이제는 말이 제법 술술 나오는 편이다. 나이를 더 먹으면 구태여 말을 배울 
필요가 없이 ‘용언(龍言)’을 사용하면 되겠지만, 그러기엔 남은 세월이 만만치가 
않으니까 어쩔 수 없다.
대화를 함에 있어서 자신이 약간 불리해지자, 선생이라는 녀석의 눈빛이 진지해진다.

[자자, 쓸데없는 논쟁은 그만 치우고 수업이나 어서 시작하지.] 

“...약삭빠른 놈.”

검은 공... 자칭‘블랙 헤드’라는 녀석과 보낸 일주일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 일주일동안 나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인간의 언어를 빨아들일 수 있었다. 이제는 
아무리 난해한 농담이나 어려운 속담들을 들어도 전부 나름대로의 대응이 가능할
정도니... 가히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나올만하다.

칠일의 마지막 날. 블랙 헤드는 아르케의 발등에 입을 맞추며 작별인사를 했다.

[마스터. 저를 소환하느라 생긴 일주일간의 마나 소모에 얼마나 피곤하셨습니까?
제 능력을 인정하시는 마음은 알지만, 부디 다음에는 마스터의 건강을 위해 하급의 
패밀리어를 소환하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그 부리기 쉬운 ‘하급의 마족’이 바로 너라고. 너.” 

[하핫, 여전히 마스터께서는 농담을 잘하시는군요. 그럼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옥체
보존 하시옵소서, 마스터.]

블랙 헤드의 쬐그마한 체구가 흐릿하게 변하더니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녀석이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암컷... 아니,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았다.

“자, 일주일이 지났으니 이름 정도는 스스로 지어놨겠지?”

“내 이름은... 레이지(Rage). 그걸로 정했다.”

나에게 처음으로‘대화’의 욕구를 갖게 한 장본인. 그녀에게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유쾌한 일이었다.

“흠. 좋은 어감이네. 맘에 들어.”

“네 이름은 아르케... 그렇지?” 

다른 인간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지만, 이 암컷의 이름은 알고 있다.

“눈치가 빠르구나. 아마 이따금씩 리델씨나 카이런이 부르는 걸 들은 거겠지?
풀 네임은‘페르버시온 아르케니아’야.”

“거기까진 별로 관심 없어. 내가 궁금한 건 오직 너희 인간들이 힘들게 내 목숨을 
살려가면서까지 이곳에 데려온 이유. 그것뿐이다.”

서커스단의 인간들은 나의 비참한 모습을 팔아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곳의 인간들은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이 풍족해 보인다. 실제로 나 역시 이곳으로 오게 된 뒤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싱싱한 사슴 고기를 매일같이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결코 돈 때문은 아닌 듯 했다. 

“간단한 질문이네. 대답을 하자면 내 호기심을 레이지, 네가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아서야.‘리델’씨의 손을 거치면 못쓰게 될 게 분명하니까 먼저 선수를 친 셈이지.
강력한 마법사들은 의외로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거든.”

“그 노인의 손에 내 육신이 분해되기 전에 네가 먼저 사용을 하겠다, 이 뜻인가?”

“말을 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상태일 줄 알았는데, 이해가 빠르고 
정신연령도 꽤나 높구나.”

아르케는 약간은 아쉬운 기색을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별로 인간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군.”

“듣기 싫어도 앞으론 자주 듣게 될 거야. 어쨌든 레이지, 넌 내 연구의 소중한 
샘플이니까.”

“흥.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지?”  

그녀의 입에서 버릇처럼 나오는 그 ‘샘플 ’이라는 단어. 듣기가 그리 유쾌한 호칭은 
아니었기에 양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내 물음을 들은 아르케가 붉은 혀끝을 돌려 자신의 입술을 천천히 축인다. 반쯤 감은
깊은 눈을 한 그녀는 약간의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가장 완전한 생명체인 드래곤을 내 패밀리어로 만드는 것...”

이 정도는 대강이나마 짐작을 하고 있었다. 다 자란 성룡(聖龍)은 도저히 무리니까,
아직 어린 나로서 대리만족이라도 하겠다는 셈인가? 약간은 치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군. 
나는 하얀 이를 보이며 반박을 하려 했지만, 그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과 더불어,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의 충족이랄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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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람들아 맆흘좀 달아라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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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연구(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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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욕구?”

“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도통 모를 말만 늘어놓는군. 나로서는 저 암컷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파악하기가 도저히 불가능이다. 
어쨌든 아르케는 자신의 널찍한 개인 실험실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약간은
특이한 미소였다. 양 볼따구니가 뜨겁게 상기되고 입술은 마치 피를 머금은 듯
붉게 물든다.

“그럼 지금부터 서로에 관한 신뢰와 친밀도를 올려보도록 할까?”

“...?”

-철컥.

그녀가 눈길을 한번 줬을 뿐인데, 나의 육체를 제어하고 있던 투명한 대롱 형상의 
족쇄가 전부 풀리고 만다.

“아아.”

족쇄가 풀리자 바로 주인에게 돌아오기 시작하는 신체적인 자유로움과 힘. 전신에
생명력이 가득하게 채워지는 기분이다.

물론 갑작스럽게 다가온 이 뜻밖의 상황은 나를 잠시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엔 틀림이 없지만, 단순한 육체적 능력에서는 평범한 인간 암컷에 
불과한 것이다. 하물며... 아직 어리다고는 하지만 드래곤인 나를 지척에 두고 이게 
무슨 배짱이란 말인가?
순수한 호기심이 발동해 그녀에게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짓이지? 죽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난 건가?”

“응.”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잠시의 지체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였다. 짙은 바이올렛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고 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을 하는 아르케를 보니 당황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뭐?” 

“해봐. 레이지, 일전에 동굴에서 네가 했던 짓을 나한테도 해.” 

게다가 그녀의 대답이란 더욱 충격적인 것이어서 난 잠시 할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입술이 벌어지며 달뜬 숨을 연신 뱉는 아르케. 실험실 안의 온도가 전체적으로 상승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지금 그 잔혹한 행위를 자신에게 하길 바라는 건가?
  
“이건 내 개인적인 심경 고백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너를 처음 보는 순간... 심장이 터져
버리는 줄만 알았어. 옛날부터 내가 꿈꾸어오던 그 알 수 없는 이미지에 대한 뭔가를 
드디어 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 난 보통의 인간 남자로는 만족을 할 수 없는 여자야. 
하지만... 너라면 가능할 것 같아.”

여기까지 말한 아르케는 상의의 앞쪽에 달린 지퍼를 주욱 내렸다. 검은색 의복의 앞설이
벌어지며 새하얀 유방이 튕겨지듯 모습을 드러낸다. 가슴 중앙에 보기 좋게 달린 분홍색의 
유두는 그 작은 형태를 벌써부터 단단하게 세우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는 눈으로 척 봐도 ‘이 여자가 지금 무척이나 흥분 했구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자, 어서 나를 죽여줘.”

어떠한 의문점이나 거부의 의사를 밝힐 여유도 없었다. 그녀가 풍만한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 나의 두 번째 촉수를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기 때문이다.
  “...음.”

촉수로부터 분명한 감촉이 온다. 지독한 간지러움과도 흡사한 치가 떨리는 쾌감이. 
아르케는 자신의 나긋나긋한 손가락을 묘하게 움직이며 촉수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엄청나게 색정적인 모습이어서,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그녀의 가느다란 목 줄기를
물어뜯을 뻔 했다.

“.....”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극도로 흥분한 나의 뇌에서는 분명 이 여자를 품으라고 외쳐대는 
중이었지만, 정작 애무를 받고 있는 촉수 자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암컷의 여자를 가까이서 보기만 했는데도 발광을 하던 그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게다가 조금 전부터는 알 수 없는 불안한 기분까지 들고 있다. 갑자기 몸 전체로 확산되는
두려움에, 일단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기로 했다.

“잠깐. 뭔가 이상해.”

“...입으로 해줄까?”

약간의 오해를 한 듯한 그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숙인다. 미치겠군...
난 아르케의 붉은 입술이 촉수에 닿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니, 그래도 소용없을 걸. 내 생각에는 이 촉수 자체가 널 거부하는 것 같다.”

지금 안 사실이지만, 전신을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듯한 불안한 느낌의 근원지는 바로 
나의 촉수였던 것이다.
아르케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한 얼굴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뭐라고?”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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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사상 최초의 발기부전 드래곤 등장?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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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연구(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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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의 카펫에 털썩 주저앉고야 마는 아르케.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온통 역력하다. 

“...그, 그게 무슨 소리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 몸에 달린 이 촉수가 너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

뇌신경은 촉수를 발동시키려 끊임없이 분비물을 내보냈지만 촉수는 약간의 경련만
일으켰을 뿐 발기(勃起)까지는 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아르케의 손짓에 약간의
공포심과 불안함을 느낄 정도였으니... 분명 그녀를 대할 때 촉수의 반응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말도 안돼...” 

“동굴에서 나에게 죽임을 당한 여자를 대할 때와 너를 대할 때의 느낌이 전혀 다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인 것 같군.”

나는 딱딱한 얼굴을 한 채, 거의 넋을 잃은 그녀에게 말했다. 사실 가장 영문을 몰라서
답답함은 느끼는 장본인은 바로 내가 아니던가. 이제 막 컨트롤에 성공했다고 기뻐하는
와중에 이런 불상사(?)가 생기다니... 비록 내 신체에 달린 물건이지만 이건 도통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혹시 그게... 대상을 가린다는 뜻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그녀의 힘없는 물음에는 의외로 날카로운 추리가 섞여있었다. 대상을 가린다라... 이 
촉수에게도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과 인지력이 존재한단 말인가? 개인적으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긴 하다.

“.....”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하는데, 아르케가 반쯤 벗었던 상의를 다시
입으며 일어선다. 뭔가 해답을 찾기라도 한 듯 그녀의 눈동자는 다시금 기운을 되찾아
빛나고 있었다.

“확인을 해봐야겠어, 레이지.”

“무슨 수로?”

이제 막 아픔을 딛고 제기하려는 사람에게 찬물을 끼얹긴 싫지만, 대체 무슨 수로 확인을
한다는 말인가. 난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로 이런 수로.”

아르케는 자신의 손가락을 가볍게 들어보였다. 그리고는 빠른 속도로 허공에 곡선과 
직선을 죽죽 긋기 시작한다. 아, 일주일 전 블랙 헤드를 소환할 때 보았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뭔가를 소환하려는 생각인가보군.

-不死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곧 ‘不死’라는 문양이 허공에 녹색의 섬광을 발하며 완성되었다.
블랙 헤드를 소환할 때는 회색이었는데, 문양의 컬러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거지?
그 눈부신 빛에 나의 시야가 잠시 동안 가려진다.

“나를 불렀다, 마스터. 때문에 나는 소환에 응했다.”

녹색 섬광이 사라지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놀랍게도 신장이 3m에 달하는 엄청난 신장의
소유자였다. 그냥 가만히 서있을 뿐인데도 머리가 거의 천장에 닿는 것 같다.
푸르죽죽한 피부에 흉악해 뵈는 근육과 얼굴. 게다가 식사 도중에 끌려왔는지, 입가에는
정체불명의 피가 채 마르지도 않고 묻어있었다. 이 정도로 커다란 생명체를 처음 보는지라
... 뭐랄까. 무섭다기보다는 약간의 충격 비슷한 것을 느꼈다.

“오랜만이구나, 사라. 못 본 동안 트롤 주제에 꽤나 예뻐졌는걸?”

“난 원래부터 미인이었다, 마스터.”

뜬금없이 트롤을 소환하다니... 대체 이 여자는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 거지? 자신의
욕구를 못 채우자,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나를 공격해 죽이기라도 하려는 건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전신의 근육에 긴장감을 주는 도중 아르케가 트롤과 나를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자, 해봐 레이지.”

“윽.”

나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성이 나왔다. 결국 그런 거였나. 조금이나마 긴장하고 있던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별로 달갑지 않은 나의 반응을 본 아르케는 약간의 오해를 했는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장황한 부연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농담이 아니라, 트롤 중에서는 미인인 축에 드는 아이야. 수컷들한테 인기도 좋지.
매년 발정기가 되면 사라를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다 죽는 트롤의 수만 해도 
두 자리가 훌쩍 넘으니까 말이야. 어때?”

“...물론 아무런 감흥도 없다.”

솔직한 감정을 말했다. 대상이 너무 거대하거나 인간보다 추악하게 생겨서가 아니다.
어차피 트롤이든 인간이든 나의 관점에서는 고작 ‘수컷’과 ‘암컷’, 이 둘 중 하나로 
보일 뿐이니까. 다만 내 촉수는 트롤 암컷에게선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실험을 당하는 내 쪽이 흥미로울 정도다.

“흠. 그렇다면 트롤은 해당이 안 되네. 간만에 봐서 반가웠어, 사라. 하던 식사 마저 
하도록 해.”

“짧은 소환 시간이었지만 나, 마스터를 봐서 반가웠다.”

  매우 귀찮았을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사라’라는 트롤은 불평 한마디 없이 자리를
피해주었다. 패밀리어의 입장에서 주종(主從)관계란 어떤 것인지 참 대단한 노릇이긴
하군. 성향이 매우 포악하다고 알려진 트롤마저 저렇게 고분고분해지다니...
어쨌든 상황 자체를 놓고 본다면 꽤나 웃긴 상황이었기에 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뭐지? 오크라도 불러낼 건가? 크큭.”

“...나를 비웃는구나, 레이지. 하지만 이번 것을 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

섬세한 손가락을 또다시 움직여가는 아르케.  

-色情女.

역시 알아보기 힘든 문양이 허공에 나타난다. 이번의 것은 약간 흐릿한 계통의 
주황색이었다. 실험하는 내내 저 색이 의미하는 것이 뭔지를 맞춰보는 것도 
괜찮은 심심풀이가 될 것 같다.

[어머. 이번엔 현실 공간으로 직접 불러내주셨군요? 마스터.]

처음에는 웬 인간의 여자가 나타난 줄 알았다. 8등신으로 시원하게 빠진 몸매가 
눈길을 끌었으니까.

“간만에 너도 인간계의 공기를 맡아봐야 하지 않겠니?”

분명 완벽하긴 했지만 어딘가 이질적인 몸의 곡선이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표현을 해야 하나? 전체적으론 상당히 마른 체형인데도 불구하고 가슴과 힙 부분만은
가히 놀랄 정도로 튀어나와있었다.
게다가 저 극도로 노출이 심한 의복이란...

“과연 몽마(夢魔) 서큐버스(Succubus)에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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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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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연구(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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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나 다를까? 서큐버스의 계속 보고만 있기가 곤욕스러울 정도로 훌륭한 몸을 
확인한 나의 촉수가 이번에는 뭔가 다른 낌새를 보이는 것 같았다.
아랫도리가 움찔, 하는 게 전신의 피가 전부 촉수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크윽.”

참아보려 했지만 나의 미약한 절제력으로는 그야말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결국 촉수는 엄청난 기세로 커지더니만, 눈이 휘둥그레져있는 서큐버스에게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미친!]

그래도 보통은 넘는 순발력인지, 촉수를 보자마자 백스텝으로 피하는 서큐버스.
하지만 내가 직접 촉수의 방향을 컨트롤 하자 결국 촉수에 걸려서 넘어지고 만다. 
바닥엔 카펫이 깔려있어서 다칠 염려는 없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크읏.]

자신의 탱탱한 둔부를 허공으로 향한 채 엎어진 서큐버스의 한쪽 발목을 촉수로 
휘감아 들어올렸다. 
타의로 인해 공중에 뜨자 불안감으로 인한 비명을 지르는 서큐버스.

[꺄앗, 마, 마스터...!]

모르긴 몰라도 이 촉수가 견딜 수 있는 하중은 상당히 큰 것 같다. 약 53kg정도로 
보이는 서큐버스를 드는데 아무런 저항력도 느껴지질 않았으니까. 나와 엇비슷한
무게까지라면 거뜬히 들지 않을까?
발목부터 공중에 들려진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중력에 인하여 본인의 갸름한 턱에 닿고 
만다. 그 모습이 정말 섹시하게 느껴졌기에... 이 이상 촉수를 이성적으로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

더군다나 아르케의 별다른 제지가 없었기에, 난 재빨리 촉수를 움직여서 안 그래도
서큐버스의 중요한 부분만을 간신히 덮고 있던 천 조각을 떼어냈다.

[마스터, 제가 현실 세계에서는 아직 버진이란 걸 잘 아시잖아요!]

“.....”

서큐버스의 당혹스러운 비명이 실험실 안을 울린다. 꿈속에서는 창부의 대명사요. 
현실에서는 처녀라 이건가? 무척이나 아이러니하군. 사실 서큐버스가 순결한 처녀든, 
닳아 헤어진 요부든 나에겐 별 상관이 없다. 이제 완전한 알몸이 되어 몸부림치는 
그녀를 보며 난 더욱 커다란 흥분과 정복 욕구를 느낄 뿐이었다.

마악 서큐버스의 갈라진 질 입구에 촉수를 가져가려는 찰나였다.

“그, 그만. 소환 해제...!”

갑자기 아르케가 깜짝 놀라며 정신이 들었다는 투로 외치는 것이 아닌가?

[...고, 고마워요.]

서큐버스는 거꾸로 공중에 매달린 색정적인 자세 그대로 아르케에게 인사를 하더니, 
자신의 팽팽한 육체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원래 머무르던 곳, 몽마들의 세계로 
가버린 것이다. 서큐버스가 홀연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검은색의 천 조각들만 
쓸쓸히 남게 되었다. 

물론 한번 열이 오른 나의 흥분이 갑자기 팍 줄어들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릉 거리며 아르케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무슨 짓이냐!”

다 잡은 먹잇감을 놓치게 하다니! 욕망을 풀 대상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촉수는 거의
미칠 정도로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아르케는 그런 촉수의 모습을 황홀감에 차 거의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 김샜겠네. 빨리 말리는 편이 더 나았겠지?”

이게 촉수의 분노인지, 나의 뇌에서 외치는 분노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욕구를 풀지 못한
스트레스는 상당히 크게 다가왔다. 나는 아예 아르케를 욕구의 해소책으로 삼으려 생각도 
해봤지만, 그녀 생각을 하자 촉수는 작은 경련을 일으키더니만 역시 원래대로 줄어들고 
말았다.
아르케는 붉게 상기된 자신의 뺨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보는데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되서 말이야... 금방 멈출 수가 없었어. 미안해, 레이지. 
아무튼 그 촉수가 기능을 상실한 건 아니었구나. 다행이지?”

“너한텐 다행일지 모르지만, 나에게 있어 이것은 빌어먹을 신의 저주와도 같다. 
이것만큼은 알아뒀으면 좋겠군.”

그녀 앞에만 서면 무용지물이 되는 촉수를 보니 이제는 더 이상 화를 낼 기운도 나지 
않는다.

“...기억해둘게. 어쨌든 다음으로 넘어가자.” 

아르케는 그 뒤로도 페어리, 뱀파이어, 심지어는 리저드맨의 암컷까지 소환해가며
몇 차례의 실험을 했다.
소환된 생물이 촉수의 발기를 성공시킬 때마다 아르케는 자신의 소환물을 원래 세계로 
돌려보냈고, 나는 그때마다 이해는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했다. 딱 괴롭구만.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실험은 장장 5시간에 걸쳐서 끝이 나고 말았다.

“총 일곱 번의 실험이라...”

아르케 역시 마나의 소모가 극심했는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펜에 잉크를 찍어 
실험노트에 뭔가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트롤 실패. 서큐버스 성공. 페어리 성공. 리저드맨 실패. 인간 성공. 오크 실패.
뱀파이어 실패. 그리고 나 실패라...”

노트를 바라보며 잠시간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아르케. 저 음욕시인이라는
호칭이 붙은 여자의 머리에서는 도대체 어떤 결론이 나올까? 나로서도 궁금할
따름이다.
이 촉수의 선택에는 분명한 호불호(好不好)가 존재했다. 좋은 것, 싫은 것이 명확하게 
가려진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어떤 기준에서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윽고, 생각을 마친 아르케가 펜촉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실험 결과를 놓고 보면, 일단 미(美)의 기준은 인간의 그것과 동일한 것 같아.”

“촉수의 발기 기준이 인간과 같다고? 그건 왜지?”

나의 뇌에서 느끼는 미와 촉수가 느끼는 그것이 서로 다르다는 말인가?

“먼저 발기에 성공한 소환물을 봐. 페어리, 인간, 서큐버스지. 전부 인간형이고, 
인간의 관점에서 볼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종족들이지. 반면에 트롤이나 오크...
리저드맨 등은 실패했어. 모두 인간의 눈으로 그들의 미를 깨닫기엔 무리가 있는 
종족들이야.”
   
“그렇다면 너와 뱀파이어는? 인간형인대다, 충분히 아름다워. 둘 모두를 갖췄는데 
어째서 실패한 거지?”

“내가 미인이라는 건 인정하는구나. 기분 좋은데?”

눈을 가늘게 뜨며 배시시 웃는 아르케였다. 

“...딴소리 하지 마.” 

“흠흠. 거기에 대해서는 나도 아직 확실하진 않아. 하지만 한 가지 가설 정도라면 
세울 수 있었지. 흠.”

약간은 민망했던지, 그녀는 주먹을 입으로 가져가며 헛기침을 했다.

“어떤...?” 

난 기대감을 갖은 채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 촉수의 근본적인 
미스테리에 한걸음 더 다가설 수도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청자(聽煮)의 집중하는 자세가 훌륭하다고 느꼈는지, 아르케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실패한 실험 체 중에서 미적 가치가 높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려니 쑥스러운데?
후훗. 어쨌든 나와 뱀파이어는 페어리나 ‘현실에서의 서큐버스’랑은 다르게 너보다 
월등히 강해. 그건 본인도 인정하겠지?”

“...인정한다.”

확실히 아까의 뱀파이어나 눈앞에 서있는 가냘프게 보이는 아르케나... 이길 수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인정할 건 해야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받아들이는 자세가 좋구나. 더욱 성장할 가능성이 농후해. 그래서 내가 결론을 내려
봤는데...”

꿀꺽. 마른침이 저절로 삼켜진다. 

“결국 넌... 아니, 네 촉수는 본능적으로‘자신보다 확실히 약한 인간형 생물체’에게만
발기한다는 거지. 정말 똑똑하고 약삭빠른 녀석이라고 인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데?”

“.....”

그녀의 결론을 받아들이기에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아.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는 ‘확신’이 들 정도다. 내가 정말 빌어먹을 놈을 붙인 
채 살아가고 있구나.

“그래서 난 한 가지 목표를 즉석에서 세웠어. 들어볼래?”

“...뭐지?”

그녀가 왠지 활기가 돌아온 듯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았고, 난 그완 정 반대로 피로 가득한
눈으로 되물었다. 기력과 정신력 모두 평균치 이하가 됐다. 이젠 어떠한 생각을 갖기조차
귀찮아지는 것이다. 아직 어린 헤츨링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역시 그녀의 결론을 듣고 
정신적인 충격을 입은 것이 큰 요인이다.
하지만 다음순간 아르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동공을 확대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내 몸을 마음대로 능욕(陵辱)할 수 있도록, 앞으로 너를 나보다 월등히 강한 존재로 
만들 생각이야.”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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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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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연구(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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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너무나 피곤했기에, 그날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아르케와 함께 연구실 
바닥에 쓰러지듯 누워서 잠을 청했다. 

“...후우.”

70년 동안의 지렁이만도 못한 생활... 그에 비하면 지금은 마치 천국과도 같다.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수 있으며, 살아가는 이유라던가 의미를 느낄 여유도 생겼다.
단순히 먹는 행위에도 어떠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평범한 삶. 
공기를 마시고 햇볕을 쬐며 시간이 흐르는 데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때문에 자유를 얻은 뒤 처음 만난 인간들이란 나에게 커다란 활력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르케라던가 리델, 나를 거의 죽음에 이르게 만든 카이런 같은 인간들까지도. 애초부터 
나완 전혀 상관없는 존재들이 몇 가지의 상호 작용을 거치며 서로를 알게 된다.
이 지극히 단순한 인과관계가 나를 미치도록 즐겁게 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지 않는가?

“.....”

내 새하얀 꼬리에 기대 잠든 아르케의 실루엣은 드래곤인 나의 정서를 감히 약간이나마 
동하게 했다. 분명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특이한 인간이었다. 그것도 매우... 
나는 긴 유선형의 목을 들어 달빛에 비친 아르케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잠이 
들고 말았다.


“레이지, 그만 일어나.”

아르케의 음성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을 땐 벌써 해가 중천에 오른 후였다. 충분한
수면을 취했기에 눈꺼풀이 바로 떠진다. 곧 시야가 회복되고 아르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도 일어난 지는 얼마 안 된 듯, 손등으로 눈을 부비는 중이었다.

“잘 잤지?”

“그런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난 후 누군가가 옆에 있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하물며 그 대상이 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입장이니... 생소한 기분이란 더 설명할
것도 없으리라.
피곤에 지쳐 숙면을 취하고도 얼굴에 붓기 하나 없이 일어난 아르케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나를 바라본다.

“오늘 우리가 하기로 약속한 게 뭔지 기억나?”

“...우리가 뭔가 약속을 했었나?”

뜬금없는 질문이다. 갑자기 약속이라니...? 난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고, 그녀는
오히려 ‘호오, 감히?’ 하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본다.

“어쭈? 내 패밀리어가 되기로 했잖아.”

“그거에 대해서라면 특별히 약속을 한 기억은 없다.”

패밀리어 이야기였나. 특별한 반감도 없고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분명히 그녀와 서로 약속을 하진 않았다. 때문에 무덤덤한 음성으로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온 그녀의 반응은 정말로 예상 밖이었다.

“계속 그러면 나 삐질지도 몰라...”

“.....”

짐짓 어린아이처럼 볼을 부풀리는 그녀를 보며, 난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르케가 지금 하고있는 이 행동이 아마 애교... 라는 거겠지? 
분명 나에게 뭔가를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는다는 것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오케이. 좋아! 재료는 미리 구해 놓았으니까, 이제 의식만 치르면 되는 거야.”

자신의 새하얀 얼굴에 화색이 붉게 맺힐 정도로 기뻐하는 아르케. 저리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차마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거절은커녕, 오히려 괜스레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난 눈을 감고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될 대로 되라지.”

“그건 무지하게 강한 긍정의 표시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처음 그녀를 봤을 당시의 이미지란, 지독하게 냉정하고 쿨한 인간 암컷이었는데...
무엇이 사람을 이토록 바꾸어 놓았단 말인가? 마치 애인에게서 자그마한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사춘기 소녀와 같은 모습이다.

아르케는 자신의 슬림한 의복 주머니에서 작은 핀을 꺼내 머리를 틀어 올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길고 나긋나긋한 목덜미가 그 유려한 곡선을 뽐내기라도 하는 듯 눈길을
자극한다.

“아직 식사 생각은 없는데... 우리 지금 바로 시작하면 안 될까? 응?”

이젠 거의 자포자기상태다. 그녀의 한껏 높아진 기분을 스톱 시킬 재간이 없는 것이다.
난 그저 쓴웃음을 지은 채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 대륙에서 지금의 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긴 하나?”

“음... 날 능욕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진 레이지, 이 외엔 없어. 후후.”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이라면 충분히 성공적이야.”

“어머, 무슨 그런 심한 말을?”

입을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르케. 또 ‘애교’라는 것이 시작된 줄 알았다.
하지만 잠시 장난스러운 제스처를 보이던 그녀가 돌연, 내 양쪽 뺨을 손바닥으로 덮으며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 그녀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거리에서, 서로의 
눈동자가 마주친다.
당황한 내 눈을 보며 아르케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눈엔 이제 정말로 레이지밖에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뭐?”

뭔가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뭐?’하는 신음성으로 반문을 했다. 

“네가 좋다는 말이야.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떻게 해?”

“...넌 지금 세 살 바기 어린애한테 사랑 고백을 하는 셈인 걸 알고는 있나?” 

아무래도 이 아르케라는 인간 암컷의 머리가 살짝 돈 것 같다. 그게 아니면 어떻게,
만난지는 고작 일주일이요... 그 종족은 인간도, 엘프도, 뭣도 아닌 드래곤인 나에게 
이런 말을 대놓고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에게 극도의 혼란스러움을 안겨준 장본인인 아르케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마치 선언문을 읽듯 입을 열었다.

“여자의 직감과 느낌을 우습게보지 마. 내 통찰력이 스스로 외치고 있어. 
내 앞에 있는 이 드래곤은 단순한 실험용 샘플이 아니라, 바로 나의 남자라고.”

“.....”

말문이 막히고 쑥스럽기도 해서 고개를 돌렸다. 아마 내가 인간이었다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미쳤군.”

비록 말은 거칠게 했지만, 살짝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해야만 
했다. 고작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달콤한 말 몇 마디에, 난 벌써 어떠한 소속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넓은 세상에서도 나를 진정으로 원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그 
까무러칠 정도의 안도감. 갑자기 외톨이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고작 인간 암컷의 입에서 나온, 사실의 진위 여부도 불분명한 그 한마디에 말이다.

“흥, 이 누나가 잘 리드해줄 테니까 넌 그냥 따라오기만 하면 돼. 사실 나도 지금 
스스로가 무슨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중이지만 말이야. 
뭐 어때? 후후.”

“.....”

장난인지 진심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인위적인 감동으로 가슴은 뛰지만, 그걸
이 인간 암컷에게 들킨다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난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리가 복잡하군. 그냥 못들은 걸로 하겠다. 패밀리어의 의식인지 뭔지 그거나 했으면 
좋겠는데.”

“의외로 부끄러움이 많구나?”

“...시끄러워.” 

이대로는 정말 부끄러워질지도 모른다. 끈질기고 집요한 여자... 대체 나에게서
원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면 정말 자신의 성적 환상에 부합되는 이 촉수에 반해서 
미치기라도 한 걸까?

내가 이 난관을 어떻게 타계할까에 대해 생각하는 도중이었다.

-덜컥.

아르케의 실험실 현관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린 것이다. 그리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들어오는 누군가.

“이봐, 아르케! 왕명(王命)이 내려왔어.”

숙녀의 독실에 노크도 없이 무작정 들어온 무례한. 신장이 2m를 넘는 거구이기도 한 
그의 정체는 바로 카이런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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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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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토벌(討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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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이라니... 우리가 저번 임무를 끝낸 지가 언제라고, 벌써요?”

뭔가 했더니, 이 코르서스 대륙의 국왕이 그들에게 직접 명을 내린 모양이다. 아르케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양피지를 들고 있는 카이런에게 되물었다.

“게다가 이번엔 내용이 더 가관이야.”

“...?”

카이런이 황금색의 휘황찬란한 두루마리를 편다. 몸매만 보면 두터운 근육 때문에 거의 
몬스터 급의 체형이었지만... 결 좋은 갈색의 머리카락에 곧은 콧대, 거기에다 엷은 속 
쌍꺼풀까지 있어서 얼굴은 그런대로 볼만은 했다. 화려함을 강조해서인지 필요 이상으로 
큰 사이즈의 양피지가 그의 각진 잡힌 손에 들려있으려니 굉장히 작게만 보인다.
어쨌든 카이런은 그 양피지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코르서스 대륙 동부 산악지대의 오우거 부족 토벌! ...이라는군.”

성대가 굵어서 그런지 그의 목소리 역시도 굉장히 두꺼운 저음이다.

“왕이 늘그막에 딸을 하나 갖더니, 안 그래도 노쇠한 정신이 이젠 아예 뇌 밖으로 
외출이라도 나갔나 보군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자신이 모시는 국왕의 험담을 늘어놓는 아르케였다. 아마
누군가 듣기라도 한다면 바로 화형에 처해질만한 대사일 것이다.
짙은 회색의, 얇지만 그 섬유에 광택이 흘러 상당한 고급으로 보이는 평상복을 걸친 
카이런은 그제서야 내 모습을 발견한 듯 반가운 얼굴을 한다.

“그건 그렇고... 이봐, 흰둥이. 오랜만인데?”

“무례한 인간 놈.”

흰둥이라니... 누군가에게 애칭을 듣는 다는 기분은 원래 좋은 것일 테지만, 저놈에게
듣는 건 싫다. 
내 음성을 들은 그는 깜짝 놀란 듯 자신의 눈을 크게 치켜떴다.

“어라, 말을 하네?” 

“그는 우리의 언어를 단 일주일 만에 완벽히 마스터했어요. 대단하죠?”

“오호라. 과연... 아무리 젖병을 물고 있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란 건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때그때 바로 입으로 토해내는 실로 거침없는 
화법(話法)이다. 어쩌면 이 인간 수컷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자신에게 깊은 고찰을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카이런은 황금색 양피지를
원래대로 접었다.

“어쨌든 리델 영감님과 상의를 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하죠.”

거기까지 말한 아르케는 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레이지, 물론 너도 갈 생각이겠지?”

“이 강아지 녀석도 데리고 가려고?”

마침 실험실의 공기가 슬슬 지겨워질 타이밍이라서 내가 승낙의 의사로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카이런이 흥미롭다는 투로 끼어든다.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그려져 있기에 별로 기분 나쁠 건 없었지만... 아르케의 경우엔 다른 듯 했다.
그녀가 거의 사람을 죽일 듯한 눈빛으로 카이런을 노려보기 시작한 것이다.

“카이런. 그는 내 패밀리어가 될 존재니까... 입 조심해요.” 

“...음, 뭐 기분 나빴다면 내가 사과하지. 미안하군.”

의외로 진지한 태도로 사과를 하는 카이런. 역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하다.
기쁠 때는 크게 웃고, 슬플 때는 주저앉아 피눈물을 흘리는 스타일이랄까? 나름대로
매력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듯 보였다. 물론 그게 암컷들로부터 인기가 좋은 성격과는 좀 
별개의 것이긴 하지만...

“그럼 얼른 가자고. 영감님이 응접실에서 기다리니까.”

  나와 아르케, 그리고 카이런은 아르케의 실험실과 이어진 복도를 통해 걸었다. 이 복도를
지나다닐 사람이라고 해봐야 겨우 이들 셋이 전부일 텐데, 통로는 지나치게 깔끔하고 
고풍스러웠다. 여기저기에 대리석으로 만든 동상과 장식물들이며... 돈을 바른 흔적들이 
보이는 것이다.
이것으로 비추어보자면, 이들의 사회적 입지가 이 나라에서 얼마나 높은 것이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세 명의 개인 실이 삼각형 모양으로 퍼져있으며, 그 가운데에 응접실 겸 회의실로 적당한
사이즈의 방이 하나 있었다. 물론 이 방은 각자의 독실과도 바로 연결이 된다.

“.....”

케이지에 실려서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닌, 내 두 발로 걷는다는 느낌이 나를 감동케 했다.
아직은 걷는 것이 서투르고 균형이 잘 맞지 않아 오히려 날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바닥과 발톱으로 느껴지는 대리석 바닥의 느낌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통로 하나를 지나자 그들이 응접실이라고 부르는 방이 바로 나온다.

“어서들 오게. 그쪽의 드래곤도 오랜만에 보는구만. 잘 지냈나?”

“...나름대로 편하게 지냈다.”

리델이라는 늙은 인간의 마법사가 원탁에 앉아 담배를 맛있게도 태우고 있었다. 하얀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올라오는데, 왠지 마음에 드는 모습이다. 나도 다음엔 좀 빌려서
배워볼까나?
짧아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끈 리델이 자신의 수염을 매만지며 아르케를 보았다. 

“아르케양. 대략의 이야기는 카이런에게 들었을 테고... 어떤가, 지금 바로 가지
않겠나? 나이를 먹으니 귀찮은 일이면 일수록, 얼른 처리하고 싶구먼.”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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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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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토벌(討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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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니에요?”

“그냥 오우거 30마리 정도 두들겨 주고 오우거 킹의 목만 따오면 된다네. 이런 일에
별다른 준비가 필요한가?”

오우거라면 트롤보다 지능은 떨어지지만 몇 배는 흉폭하고 강한 힘을 휘두르는 몬스터다.
그런 것들을 세 마리도 아니고, 그 열배인 30마리를 때려잡겠다는 말인가?
게다가 그 오만한 문장이 어느 비쩍 꼴은 늙은이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신선한 쇼크를 줄 정도였다.

“그래도 지금처럼 지원군도 없는 상황에서, 그게 말씀처럼 하찮은 일은 아닐 텐데...”

아르케는 애꿎은 나를 생각해서인지, 평소의 성격과는 다르게 약간의 반론을 제시하며 
말끝을 흐렸다. 물론 그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카이런이 아니다.

“뭘 그렇게 겁먹은 척하는 거야? 어차피 정작 아르케 너는 후방에서 소환수들 불러갖고
조뺑이 치게 돌릴 거면서.”

“패밀리어들이 살해당한다면 아마 당신이 오우거의 곤봉에 잘게 다져진 저녁식사가 되는 
것보다 훨씬 슬플 것 같아서 그러지요.” 

매번 느끼는 건데, 정말 대단한 화법이다. 조용하고 차분한 음성만으로도 듣는 이의
뇌혈관을 팽창시킬 수 있는...

“...젠장, 내가 트롤이나 뱀파이어보다 못하다는 건가?”

다른 누군가가 들었다면 흥분해서 얼굴이라도 벌게질 상황이었겠지만, 정작 당사자인 
카이런은 별다른 내색도 하지 않고 넘어갔다. 이미 아르케의 독설에 익숙해진 건가?
아니면 그의 감각이 워낙에 무뎌서인 줄도 모르지.

“자... 그만들 싸우고. 해가 떨어지기 전에 끝내는 편이 보기에도 좋지 않겠나.
카이런 군은 어서 스트라이킹 피스트(Striking fist)나 챙겨 놓으시게.”

“이럴 줄 알고 미리 가져와 놓았습죠.” 

리델의 핀잔에, 카이런은 어깨에 짊어진 검은색의 가방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가방의 
버클을 풀고 덮개를 여는데... 그 안에서 갑자기 황금색의 눈부신 광채가 뻗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탄성이 튀어나올 정도였지만 간신히 참았다.

“안 그래도 주먹이 근질근질했는데, 간만에 오우거 놈들을 샌드백삼아서 몸 좀 풀겠네요.
으하핫.”

그가 가방에서 꺼내든 것은 꽤나 묵직해 뵈는 글러브(Gloves)였다. 
여느 평범한 글러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손가락부터 팔목까지를 가볍게 덮는 글러브 
전체가 어떠한 금속으로 이루어졌으며, 글러브 전체에서도 엄청난 황금색의 기운이 
쉬지 않고 맴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직접적으로 가격이 닿는 손가락 부분에는 두터운 십자가 문양의 철판이 덧대어져
있었다.

“이건 정말 죽이는 물건이라고.” 

글러브를 차례대로 양손에 착용한 카이런은 씨익 웃으며 그것들을 가볍게 맞부딪혔다.
그냥 보기에도 살기가 등등한 모습이다. 전형적으로 전투를 좋아하는 녀석인가.
카이런의 장비 점검이 끝나자 리델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좋아. 대충 준비는 끝난 것 같군. 드래곤, 자네도 갈 생각인가?”

“그렇다.”

“나쁘지 않은 선택일세. 그럼 다들 내 주변으로 모이게. 바로 출발하지.”

나의 짤막한 대답을 확인한 늙은 수컷이 곧바로 마법의 언어를 읊조리며 캐스팅에 
들어간다.

-우우웅.

그가 걸친 청색의 로브자락 아래로 둥그런 원형을 그리며 마법의 도형이 그려진다. 
리델은 우리를 보며 눈짓을 했고, 신호에 맞춰 두 인간과 한 드래곤은 마법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진 안에 모두가 들어가자 타이밍 좋게 완성되는 그의 마법.

“참고로 텔레포트(Teleport)가 처음이라면 약간 어지러울 수도 있다네.”

‘왜 그런 중요한 사항을 이제야 말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할 여지도 없이, 나의
넓은 시야는 온통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새하얀 빛의 기둥들에 의하여 휩싸이기 
시작했다. 

“.....”

마법이라... 나로서는 직접 마나의 기운을 느끼는 것이 처음이었지만 그리 낯설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왠지 정겨운 기분이다. 난 거세게 올라오는 빛의 기둥에 앞발을 가만히
가져가보았다. 빛을 만진다는 표현은 분명히 어폐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마나의 감촉을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긴 호흡 두 번 정도를 할 정도의 시간동안 용솟음치던 빛의 기둥이 서서히 사그라든다.
빛은 대기에 작은 반짝거림을 남기며 사라졌고, 내가 그 마법의 빛으로 의해 가려졌던 
시야가 복구된 걸 느꼈을 때에는 벌써 장소가 다른 곳으로 바뀌어버린 뒤였다.
난 텔레포트의 발동자인 리델을 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봐. 인간 노인.”

“음? 왜 그러나?”

“텔레포트가 처음인데 왜 전혀 어지러운 현상이 없는 거지?”

“...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나. 젊은 사람이 세상을 그리 팍팍하게 살지 말게.”

방금 전까지 잘 닦인 대리석 바닥을 밟고 있었는데, 지금 두 다리를 디디고 서있는 이곳은
어느 숲의 한 가운데인 듯 보였다.
울창한 나무들이 마치 하늘을 찌르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로 뻗어있다. 그 모습은 사뭇 
웅장하게 보이기도 했다. 황토색 흙과 녹색의 수풀들이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는
광경이다.
끝도 없는 대자연의 앞에 서 감상에 찬 나의 얼굴을 바라본 리델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좋아. 좌표상의 오차는 거의 없는 것 같구먼.”

“...그런데 왠지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느낌 들지 않아요?” 

아르케가 먼저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뒤쪽을 슬며시 돌아본다.

“크워억!”

아니나 다를까. 우리 일행의 바로 뒤엔 커다란 동굴이 자리했으며, 그 입구에는 
웬 거대한 상아색의 괴수(怪獸) 두 마리가 우악스럽게도 큰 곤봉을 든 채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 아마 보초를 서는 중이리라.

“이거, 오차가 너무 없어도 문제가 되는구먼. 허허...” 

고령(高齡)의 마법사는 자신에게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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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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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토벌(討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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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벌크(Bulk)를 자랑하는 근육의 소유자인 오우거들.
신장은 대략 3m50cm 정도로 보인다. 트롤이 약간 마른 체형의 근육질이라면,
저 녀석들은 아예 폭발할 것 같은 근육 위에 한 겹의 지방질 방패를 덮어씌운
느낌이었다. 

“크워억?”

두 마리의 오우거가 느닷없이 나타난 우리를 바라보고는 당황했는지, 들고 있던 
곤봉을 제대로 고쳐 잡는다. 그냥 보고 있기만 해도 피부로 와 닿는 아찔한 
위압감이다.

“뭐... 차라리 잘 됐수다, 영감님."

헌데 이 카이런이라는 인간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실실 웃으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서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죄다 박살내버리죠.”

“나도 사실은 내심 잘 됐다 생각하고 있었다네.”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비록 고급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런 방어적 능력도 없어 보이는 
회색의 평상복과 ‘스트라이킹 피스트’라는 이름의 전투용 글러브가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카이런이라는 인간의 얼굴에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그럼 먼저 칩니다!”

갑작스레 풀밭을 박차며 뛰쳐나가는 카이런. 그와 거의 동시에 리델은 약속이나 한 듯
입술을 움찔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마법의 언어를 내뱉기 시작했다. 마법을 캐스팅하려는 
모양이었다.

카이런의 맹수와도 같은 기세로 인해 뜯어진 풀과 흙더미가 허공에 날린다. 게다가 
얼마나 가속력이 좋은 지 흐릿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오직 그의 양 손에 장착된 황금색의 글러브가 긴 호선을 그리며 오우거에게로 돌진하는 
동선을 그릴 뿐...

혀를 내두를만한 속도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이 우측의 
오우거에게 왼 정권을 날리는 카이런.

-콰앙!

‘쾅’하는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카이런의 어깨와 오우거의 복부 사이에
황금빛 짧은 직선이 생겼다. 그런데 ‘콰앙’이라니... 무슨 대포를 쏜 것도 아닌데 저런
심각한 타격 음이 나올 수가 있나?

“쿠어억!”

세상에...! 오우거의 비명이 심상치가 않아 자세히 봤더니, 미처 대비를 못하고 선공을 
허용한 그의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난 것이었다. 그것도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몸통
둘레만한 구멍이! 
카이런은 거기에서 만족치 않고 바로 몸을 비틀며 오른 주먹으로는 왼쪽의 오우거를
공격했다.

“크아압!”

왼쪽의 오우거 녀석은 그나마 경황이 있었는지, 자신의 두껍디두꺼운 팔을 들어 카이런의
일권(一拳)을 막았다.  
아니, 막은 줄 알았다.

“...우워억!”

카이런이 내지른 평범한 주먹을 막은 오우거의 팔뚝이 사라졌다(!). 주먹질 단 한번에
통나무와 비슷한 지름의 피와 근육, 뼈가 날아간 셈이다.
게다가 카이런의 움직임이 얼마나 빠르고 정확했는지, 처음에 공격했던 오른쪽 오우거의 
크게 찢어진 복부로부터는 이제서야 각종 내장과 피들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쪽 팔이 사라진 오우거는 몸서리쳐지는 고통에 괴성을 지르며 잠시 자세를 낮추었다. 
그 모습을 본 카이런이 살짝 점프를 해 자신과 거의 비슷한 정도로 내려온 오우거의 
목덜미를 양손으로 감싸 안는다.

-우두두둑.

자신보다 몸무게가 10배는 더 나가는 생명체의 목을 너무도 간단하게 비틀어 돌려버리는
그였다. 물론 그에 의해서 목뼈가 부러진 오우거가 바로 즉사(卽死)했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섭리였다.
스피드는 그렇다 치더라도 정말 말도 안 나올 정도의 압도적인 힘과 기술이다. 대체 
근육의 용적량이 얼마나 되는 거지? 최소한 마운틴 고릴라급 이상으로 추측된다.

“.....”

설명은 길었지만, 이것이 그가 땅을 박차고 나서부터 고작 5~6초 동안에 벌어진 일이다.

-쿠웅.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이 걸레짝이 되어 목숨을 잃은 오우거 두 마리의 시체가 바닥에 
쓰러진다. 마치 거목이 넘어갈 때와 비슷한 광경과 느낌이었다. 물론 끈적한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후우.”

카이런은 그 둘의 육편들을 피하며 다시 일행의 곁으로 돌아왔다. 숨을 약간 크게
쉬는 것 말고는 전혀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이질 않는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터프한
녀석이군...
리델 영감은 여전히 눈을 감고 마법의 언어를 쏟아내고 있었다. 카이런은 그런 마법사의
얼굴에서 시선을 아르케에게로 옮겼다.

“이봐, 아르케! 보초들이 죽었으니 둥지 안에서 곧 본대(本隊)가 몰려나올 거야.
곤란하지 않으려면 지금 미리 소환수들을 불러내는 게 좋을 걸?”

“...나도 알아요.”

-쿵.

아르케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쿵’ ‘쿵’ 하며 대지를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쿵.

동시에 동굴 안에서부터는 자욱한 먼지구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기 자체를 진동시키는
이 묵직한 땅울림. 몸무게 2톤 이상의 엄청난 괴물들이 걸어 나오며 순수하게 일으키는 
대지진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압박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쿵.

땅울림에 맞추어 마법사의 수염이 가늘게 흔들린다. 그의 마른 입술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전혀 의연함을 잃지 않고 마법의 언어를 읊조리고 있었다. 평범한 마법 치고는 캐스팅 
시간이 아까부터 상당히 오래 걸리는데... 뭘 하려고 그러는 거지?

  옆을 보니 아르케가 역시 어떠한 문양을 그리며 패밀리어를 부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리델의 캐스팅이 전부 끝이 난 모양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던 입가의 수염이
멈춘 걸 보니.
리델은 주름진 눈을 떠 카이런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카이런 군이 활약을 했구먼. 캐스팅할 시간을 잘 벌어주었네.”

“하아, 하아... 뭘요. 그게 제 임무 아니겠습니까?”

녀석은 마치 재미있는 유희를 마친 얼굴이었다. 하긴... 나라도 그렇게 잘하는 뭔가가
있으면 즐거울 것 같긴 하다.
캐스팅을 끝낸 리델이 한걸음 앞으로 나선다.

“지금부터는 이 늙은이에게 맡기고 자네는 뒤로 물러나있게나.” 자신의 전용 지팡이를 들며, 늙은 마법사는 외쳤다.

“미티어 스웜(Meteor Swarm).”




                                    -To Be Continued-


-----------------------------------------------------------------------------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14.
-------------------------------------------------------------------------         
CHAPTER 3. 토벌(討伐).
-------------------------------------------------------------------------

맑기만 하던 하늘에 갑자기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물론 눈으로 직접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쩌저적’하고 금이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크워어억...!”

게다가 오우거들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이 압도적인 진동. 땅 뿐만이 아니고
대기와 구름마저 가볍게 흩어버릴 정도의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듯 했다. 당장에 나의
두 다리가 덜덜 떨려올 정도였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마법이길래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지?

-고오오.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 푸른 창공에 거대한 장방형의 원이 생겨난 것이다. 게다가 
언뜻 비춰지는 그 원 안의 어두운 풍경은 마치 밤의 하늘을 보는 것과 같았다. 동공이
최대한도로 확대된다.
저것이 혹시 우주인가?

기상과 대지의 불안정함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동굴에서 막 뛰쳐나온 오우거들은 
물론이요, 아군인 카이런과 아르케마저도 깜짝 놀라는 것이다.

“아니, 리델씨! 미티어 스웜이라면 9써클의 마법이잖아요?”

“사실 얼마 전부터 9써클에 발을 내딛었다네. 이젠 8써클의 마스터보다는 9써클의
입문자라고 불러주게나. 껄껄.”

평온하던 대기 중에 느닷없이 어느 우주를 불러다 놓은 리델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엔 
의기양양함이 가득했다.

“크웍!”

이제 벌어진 차원의 틈으로부터 거대한 불덩어리들이 하나 둘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슈아아아악...

대기를 집어삼키는 듯한 엄청난 파공음이다. 바람에게 피부가 있었다면 아마 한순간에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우워억...!”

이 공포스러울 정도의 장관을 확인한 오우거들이 혼비백산해서 흩어지지만 이미 마법의... 
아니, 운석의 사정거리가 그들을 전부 포함한 뒤였다.

-콰콰콰쾅.

우주로부터 마법사의 마나에 끌려 지구까지 비행을 해온 운석(隕石)들이 마침내 지면에
작렬하고야 말았다. 빠르게 이루어지는 총 여덟 번의 대 폭파. 

“우리도 좀 더 뒤로 물러나야 하겠네.”

무리도 아닌 것이, 거대한 고목 따위가 뿌리 채 뽑혀서 날아가는 건 물론이요, 집 채 만한
암석이 산산조각 나며 심각한 분진을 일으킨다. 자칫하다가는 재수 없게 파편에 맞아서 
비명횡사(非命橫死)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콰지직.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파공음에 안구가 흔들려서인지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 타오르는 열기란... 마치 지옥에라도 온 듯한 느낌을 받게 했다.

“...이건 정말 상상초월이군요.”

마구 흔들리는 지반 위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아르케가 입을 열었다. 분진을 잔뜩
마신 카이런은 기침을 하기 시작한다.

“켁, 콜록. 영감님. 새삼 느끼는 거지만 역시 성격이 좀 있으십니다.”

“나도 실전에서 사용하는 건 처음이라네. 시전 해놓고 보니 역시 함부로 막 쓸 마법은
아닌 듯싶구먼.”

-고오오오.

여덟 개의 운석을 모두 토해낸 하늘의 균열이 곧 자신의 입을 닫는다.  그야말로
스펙터클한 광경에 나 역시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굉장하군. 이 정도의 파괴력이라면
작은 시골 마을 정도는 지도상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겠는데?
흙먼지와 불꽃이 사라지고 마법에 강타당한 자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

신화에 나오는 거인이 발이라도 구른 듯, 동굴 앞은 거의 초토화가 된 상태였다.
운석의 순수한 타격과, 그에 휩싸인 화염... 이 둘이 합쳐지자 정말 말도 안 돼는
파괴력이 나온 것이다.

“크워어어어억!”

살아남은 오우거는 대략 5마리 남짓? 그나마도 마법이 몰고 온 여파에 중경상(重輕傷)을 
입은 듯 보인다. 물론 운석이 떨어지는 타점에 서있던 불쌍한 오우거들은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크우우우...“ 

생존한 오우거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존재가 있으니... 다른 오우거들보다 머리 두개는
더 보탠 것 같은 체구에, 짙은 푸른 컬러의 피부색을 갖고 있었다. 아마 이 괴이한 녀석의
정체가 바로 오우거 킹(Ogre king)이리라.
“.....”

자신의 부하들이 한순간에 전부 죽어버리자 그는 당황하면서도 무척이나 화가 오른 듯
싶었다.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되었으며 날카로운 어금니가 모든 적을 찢어 죽일 기세로
움직인다. 정말 무시무시한 모습이다.
내가 오우거 킹을 보고 침을 꿀꺽 삼키는데, 늙은 마법사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제 난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늙은이에 불과하네. 마나 소모가 너무나 극심하군.
단 한번 사용으로 거의 모든 마나를 소비해버리다니... 비효울적인 마법이야.”

말을 마친 리델 영감은 뒤로 물러나 한 나무에 기대어 앉기까지 했다. 그늘에 앉아서 
햇빛을 피하는 그 모습이란, 오랜만에 손주들과 피크닉을 나온 늙은이의 바로 그것이었다.

“이 늙은이가 걱정하지 않도록, 뒷일은 알아서 해주겠지?”

“물론이죠.”

대답과 동시에 아르케가 허공에 소환의 문자를 그린다. 

-血

아, 이 모양은 낯이 익다. 마법의 문양에서는 역시 내 생각처럼 주황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후우.”

그녀가 소환한 것은 바로 일전에 본적이 있는 뱀파이어의 암컷이었다. 나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느낌을 받아 발기에 실패를 한...
새카맣고 긴 머리카락이 무지하게 마른 그녀의 퇴폐적인 얼굴과 몸통을 휘감는 듯 보인다.
무척이나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요즘 꽤나 자주 부르는데?”

스르륵 나타난 뱀파이어에게, 아르케는 눈짓을 했다.

“경황 상 인사는 생략할게. 타겟(Target)은 저 오우거 킹의 목이야. 맘엔 안 들겠지만, 
이번에도 카이런과 보조를 맞추어서 싸워주길 바래.”

“켁, 나도 이런 목석같은 여자는 질색이라고.” 

“...알아 모시지, 마스터.”

그와 동시에, 카이런과 뱀파이어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생존한 오우거들의
나머지 숨통을 끊어놓으려 움직인 것이다.




                                    -To Be Continued-


-----------------------------------------------------------------------------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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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토벌(討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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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기만 하던 하늘에 갑자기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물론 눈으로 직접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쩌저적’하고 금이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크워어억...!”

게다가 오우거들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이 압도적인 진동. 땅 뿐만이 아니고
대기와 구름마저 가볍게 흩어버릴 정도의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듯 했다. 당장에 나의
두 다리가 덜덜 떨려올 정도였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마법이길래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지?

-고오오.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 푸른 창공에 거대한 장방형의 원이 생겨난 것이다. 게다가 
언뜻 비춰지는 그 원 안의 어두운 풍경은 마치 밤의 하늘을 보는 것과 같았다. 동공이
최대한도로 확대된다.
저것이 혹시 우주인가?

기상과 대지의 불안정함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동굴에서 막 뛰쳐나온 오우거들은 
물론이요, 아군인 카이런과 아르케마저도 깜짝 놀라는 것이다.

“아니, 리델씨! 미티어 스웜이라면 9써클의 마법이잖아요?”

“사실 얼마 전부터 9써클에 발을 내딛었다네. 이젠 8써클의 마스터보다는 9써클의
입문자라고 불러주게나. 껄껄.”

평온하던 대기 중에 느닷없이 어느 우주를 불러다 놓은 리델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엔 
의기양양함이 가득했다.

“크웍!”

이제 벌어진 차원의 틈으로부터 거대한 불덩어리들이 하나 둘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슈아아아악...

대기를 집어삼키는 듯한 엄청난 파공음이다. 바람에게 피부가 있었다면 아마 한순간에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우워억...!”

이 공포스러울 정도의 장관을 확인한 오우거들이 혼비백산해서 흩어지지만 이미 마법의... 
아니, 운석의 사정거리가 그들을 전부 포함한 뒤였다.

-콰콰콰쾅.

우주로부터 마법사의 마나에 끌려 지구까지 비행을 해온 운석(隕石)들이 마침내 지면에
작렬하고야 말았다. 빠르게 이루어지는 총 여덟 번의 대 폭파. 

“우리도 좀 더 뒤로 물러나야 하겠네.”

무리도 아닌 것이, 거대한 고목 따위가 뿌리 채 뽑혀서 날아가는 건 물론이요, 집 채 만한
암석이 산산조각 나며 심각한 분진을 일으킨다. 자칫하다가는 재수 없게 파편에 맞아서 
비명횡사(非命橫死)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콰지직.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파공음에 안구가 흔들려서인지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 타오르는 열기란... 마치 지옥에라도 온 듯한 느낌을 받게 했다.

“...이건 정말 상상초월이군요.”

마구 흔들리는 지반 위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아르케가 입을 열었다. 분진을 잔뜩
마신 카이런은 기침을 하기 시작한다.

“켁, 콜록. 영감님. 새삼 느끼는 거지만 역시 성격이 좀 있으십니다.”

“나도 실전에서 사용하는 건 처음이라네. 시전 해놓고 보니 역시 함부로 막 쓸 마법은
아닌 듯싶구먼.”

-고오오오.

여덟 개의 운석을 모두 토해낸 하늘의 균열이 곧 자신의 입을 닫는다.  그야말로
스펙터클한 광경에 나 역시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굉장하군. 이 정도의 파괴력이라면
작은 시골 마을 정도는 지도상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겠는데?
흙먼지와 불꽃이 사라지고 마법에 강타당한 자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

신화에 나오는 거인이 발이라도 구른 듯, 동굴 앞은 거의 초토화가 된 상태였다.
운석의 순수한 타격과, 그에 휩싸인 화염... 이 둘이 합쳐지자 정말 말도 안 돼는
파괴력이 나온 것이다.

“크워어어어억!”

살아남은 오우거는 대략 5마리 남짓? 그나마도 마법이 몰고 온 여파에 중경상(重輕傷)을 
입은 듯 보인다. 물론 운석이 떨어지는 타점에 서있던 불쌍한 오우거들은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크우우우...“ 

생존한 오우거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존재가 있으니... 다른 오우거들보다 머리 두개는
더 보탠 것 같은 체구에, 짙은 푸른 컬러의 피부색을 갖고 있었다. 아마 이 괴이한 녀석의
정체가 바로 오우거 킹(Ogre king)이리라.
“.....”

자신의 부하들이 한순간에 전부 죽어버리자 그는 당황하면서도 무척이나 화가 오른 듯
싶었다.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되었으며 날카로운 어금니가 모든 적을 찢어 죽일 기세로
움직인다. 정말 무시무시한 모습이다.
내가 오우거 킹을 보고 침을 꿀꺽 삼키는데, 늙은 마법사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제 난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늙은이에 불과하네. 마나 소모가 너무나 극심하군.
단 한번 사용으로 거의 모든 마나를 소비해버리다니... 비효울적인 마법이야.”

말을 마친 리델 영감은 뒤로 물러나 한 나무에 기대어 앉기까지 했다. 그늘에 앉아서 
햇빛을 피하는 그 모습이란, 오랜만에 손주들과 피크닉을 나온 늙은이의 바로 그것이었다.

“이 늙은이가 걱정하지 않도록, 뒷일은 알아서 해주겠지?”

“물론이죠.”

대답과 동시에 아르케가 허공에 소환의 문자를 그린다. 

-血

아, 이 모양은 낯이 익다. 마법의 문양에서는 역시 내 생각처럼 주황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후우.”

그녀가 소환한 것은 바로 일전에 본적이 있는 뱀파이어의 암컷이었다. 나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느낌을 받아 발기에 실패를 한...
새카맣고 긴 머리카락이 무지하게 마른 그녀의 퇴폐적인 얼굴과 몸통을 휘감는 듯 보인다.
무척이나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요즘 꽤나 자주 부르는데?”

스르륵 나타난 뱀파이어에게, 아르케는 눈짓을 했다.

“경황 상 인사는 생략할게. 타겟(Target)은 저 오우거 킹의 목이야. 맘엔 안 들겠지만, 
이번에도 카이런과 보조를 맞추어서 싸워주길 바래.”

“켁, 나도 이런 목석같은 여자는 질색이라고.” 

“...알아 모시지, 마스터.”

그와 동시에, 카이런과 뱀파이어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생존한 오우거들의
나머지 숨통을 끊어놓으려 움직인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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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15.
-------------------------------------------------------------------------         
CHAPTER 3. 토벌(討伐).
-------------------------------------------------------------------------

“차앗.”

창백한 안색의 뱀파이어가 기다란 검을 휘둘러 자신보다 몇 배는 거대한 오우거들을
도륙(屠戮)하는 장면이란, 보고 있기는 하지만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모습이었다.

-슈욱.

단 일검(一劍)에 오우거의 팔이며 다리가 팽그르르 날아간다. 잘려진 절단면에서
피가 화악 튀었지만 뱀파이어는 절대로 그것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입이 쩌억 벌어질 정도로 빠르고 정교한 스텝이다.

“으아아아!”

카이런은 괴성을 지르며 그 나름대로 신나게 오우거들을 두들겨대는 중이었다. 그의
주먹과 오우거의 두꺼운 방어 지방이 부딪힐 때마다 엄청난 폭음을 동반한 스파크가 
번쩍인다. 

“우웍...!”

담배를 꺼낸 리델이 불과 몇 모금 빨지도 못했는데, 벌써 오우거 5마리 중 킹을 제외한 
4마리가 그들의 주먹과 검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오우거에 비하면 정말 조그마한 인간 둘이서 이 정도의 참상을 빚어내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최후의 생존자는 얼마나 놀랐을까?

“망할... 인간놈들.”

홀로 남은 오우거 킹은 미약하게나마 공용어를 할줄 아는 듯 했다. 어설프지만 분명한
인간의 언어다.

“크아아악!”

오우거 킹이 괴성을 지르며 검은색의 강철로 된 곤봉을 카이런에게 휘두른다. 그 덩치에
비해서 너무도 빠른 공격이라고 할 만 했다. 방심한 카이런. 역시 크게 당황했는지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짧은 찰나에, 선택의 여지가 없던 그는 막는 쪽을 선택했다.

-콰아앙.

아마 근거리에서 발사한 대포알을 양 손으로 막았다고 생각하면 비슷할 듯싶다.

“크으윽!”

스트라이킹 피스트를 장착한 양 팔을 X자로 엇갈아 철로 된 곤봉를 받았다. 그와
동시에 카이런의 입에서는 끔찍한 신음성이 터져 나온다. 어쨌든 그 우악스러운
파괴력이 담긴 곤봉을 받아내긴 한 것이다.
헌데 카이런의 표정이 약간 이상하다.

“...어라?”

곤봉을 직접 받아낸 상체는 멀쩡했다. 그러나... 그의 무릎 아래쪽은 위에서부터 
순간적으로 덮쳐오는 엄청난 하중을 이기지 못한 채 그대로 박살이 난 것이다.

“제, 젠자앙...!”

피와 박살난 뼛조각들이 회색의 바지를 적신다. 게다가 육체의 지지대가 없어진 
카이런의 몸은 어쩔 수없이 뒤쪽으로 넘어가고야 말았다. 쓰러지는 모습을 보아하니 
무릎 아래가 아예 절단이 된 것 같다. 

“,..저런.”

오우거 킹의 일격을 정면으로 받고도 이 정도로 끝났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만 한건가?
그 길다면 긴 빈틈을, 뱀파이어가 놓칠 리가 없었다.

-슈칵.

뱀파이어의 칠흑 같은 긴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린다는 느낌이 들었고, 다음 순간
그녀는 스르륵 오우거 킹의 반대쪽으로 가 있었다.

“.....”

한쪽 팔로는 오우거 킹의 거대한 수급(首級)을 안아 든 채 말이다. 도대체 언제
검이 뽑혀나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는데... 정말 대단한 쾌검(快劍)이구나.

-푸학.

잘린 오우커 킹의 목에서 생체적인 압력으로 인한 피분수가 이제야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자신의 몸통만한 오우거의 머리를 품에 안고서도 발걸음에 전혀 차이를
보이지 않는 기다란 흑발의 그녀.
뱀파이어 사이에서도 보통은 넘게 보이는데?

“무겁군.”

똑바로 걸어온 뱀파이어가 오우거 킹의 머리통을 아르케에게 내밀었다.

“원래 이런 건 카이런 관할인데...”

아르케는 미간을 찌푸리며 피투성이가 된 수급을 받아들었다. 혀를 길게 빼물고 눈알이
심하게 충혈 된 오우거 킹의 모습은 꽤나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으으으...! 젠장, 아파서 뒤지겠다고! 계속 그따위 소리나 하고 있을 거야, 아르케?!”

예측치 못한 일격을 당해 졸지에 하반신 불수가 되어버린 카이런의 욕설 섞인 외침이었다.
아마 그녀의 불평을 들은 모양이다.
하긴, 인간이 저 지경이 되어버리면 느는 것은 눈치밖에 없다지.

“...미안.”

“시파알!”

자신의 잘려진 무릎 아래를 보게 된, 카이런의 고통에 찬 비명이 폐허가 된 숲을 뒤흔들 
뿐이었다.




                                    -To Be Continued-


-----------------------------------------------------------------------------
챕터3. 토벌 편 끝났습니다. 이제 슬슬 레이지가 살 맛 나는 시나리오가
나오겠지요?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16.
-------------------------------------------------------------------------         
CHAPTER 4. 승격(昇格).
-------------------------------------------------------------------------

거의 혼절하기 직전 상태인 카이런의 몸통과 절단된 두 다리는 내가 맡았다. 아르케는
오우거 킹의 수급을 책임지기로 했으며, 리델은 마지막 남은 마나를 짜내어 텔레포트를 
캐스팅할 수 있었다.

상급이라면 상급의 몬스터로 분류되어있는 오우거... 그런 오우거 40여 마리에다가 
보스 급까지 추가한 무리를 고작 차 한 잔이 식을 시간 만에 몰살시킨 것이다. 그야말로
괴물 같은 인간 놈들이란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온다.
게다가 나는 명색이 드래곤이라는 녀석이... 아무것도 한 일 없이 그냥 덜덜 떨며 구경만 
실컷 하다가 온 셈이다.

“크으... 아아악.”

오우거 무리 토벌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을 당시의 카이런은 거의 초죽음 상태였다.
사실 그 정도 수련이 되어있는 놈이니까 아직도 숨이 붙어있을 수 있는 거지, 어지간한 
인간이 그런 상처를 입었다가는 그 즉시 신경계통의 쇼크로 인해 목숨을 잃을 확률이 
크다. 아니, 거의 죽는다고 보면 된다.
그러는 동안 복도에서 인간의 발자국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온다.

“후아... 이건 심하군요.”

나는 미리 몸을 숨겼고, 호출을 받고 헐레벌떡 달려온 성직자들에게는 리델이 대신 
카이런의 몸통과 다리를 넘겼다. 평소 카이런의 이런 상처를 못 봐서인지 성직자들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오른다.

“그가 조금만 더 정신을 팔았다면, 두 다리 대신 상반신이 아예 날아가고 없어진 
상태를 봤을 걸세.”

만약 그랬다면 성직자들에게 치료도 받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었겠지. 고도의
경지까지 단련된 무사로서 얼마나 허무한 개죽음인가? 

“크우욱... 여, 영감님. 잔소리... 는 그, 그만...!”

그 ‘고도의 경지까지 단련된 무사’가 눈을 뒤집어 까며 연신 죽는 소리를 내뱉는다.
끔찍한 모습에 성직자들마저 질리는 표정을 지었다.

“카이런씨가 이렇게 큰 상처를 입은 모습은 처음 보는군요. 이 정도 상처라면 저희
측에서도 쉽사리 고칠 수는 없습니다. 치료에는 아무리 빨라도 4주일 정도는 너끈히 
소요될 듯 하군요.”

적어도 한 달간은 병상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어야 한다는 말이렸다. 그러면
답답해서 어떻게 살까... 하긴, 70년간을 꼬박 작은 케이지에 갇혀서 살아온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별게 아니긴 하구나.
성직자들의 말에, 리델은 한숨을 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완치에 100년이 걸린들 어쩌겠소. 스스로의 부주의함이 화를 부른 것인데.”

“...알겠습니다. 대금은 치료가 끝난 후, 한꺼번에 청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환자의 
상태가 위급하다보니 저희는 먼저 실례를...”

카이런를 들것으로 이동시킨 그들은 곧 어딘가의 사원이나 신전으로 텔레포트를 하는 
듯 보였다. 

-파앗.

섬광과 함께 사라진 성직자들은 아마 스크롤이나 마석의 힘을 빌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캐스팅이나 마나의 냄새 따위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성직자들이 모습을 감추자, 리델은 손가락 끝에 작은 불을 만들어서 담배로 가져갔다.
저 모습을 보니 마법이란 참 편리한 기술이라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마법도 그렇고
담배도 그렇고, 둘 다 한 번 쯤은 배워보고 싶다.

“.....”

늙은 마법사는 오우거 킹의 추악한 머리통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난 국왕에게 이 그다지 상쾌하지 못한 형상의 머리를 가져다주고 와야겠네.”

“그 다음엔 또 개인적인 사유로 모습을 감추실 생각이시겠죠?”

아루케의 반문으로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리델이라는 마법사는 아마 일을 끝내고 나면
항상 이 일행에서 잠시간 떠나있는 듯 했다. 그 이유야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리델이 폐 깊숙이 머금었던 담배 연기를 그윽하게 뿜어낸다.

“...후우우. 이 늙은이가 항상 할일 없이 바쁘다는 사실은 아르케양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한 두어 달 정도 쉬다 올 생각이라네.”

“정말 언제쯤이면 리델씨의 비밀을 알게 될까요? 십년 후? 아니면 이십년 후?”

대답을 듣는 것은 이미 포기한 기색이었다. 다만 자신의 깊은 곳을 공유하지 않는
나이 많은 동료에 대한 아쉬움이랄까? 아르케의 음성에서는 바로 그런 것이 묻어났다.

“그건 언젠가 내 ‘삶의 목표’가 달성되는 날 직접 알려주도록 하지. 허허.”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늙은 수컷의 눈에는 오히려 착잡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세상에
별 집착이나 미련이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뭔가 자포자기한 듯한 느낌이랄까?

“....”

나로서는 뭐...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긴 하다. 내가 발등으로 간지러운
콧잔등을 부비는데, 리델이 굉장히 미묘한 표정을 한 채로 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럼 드래곤... 이름이 레이지라고 했나? 어쨌든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하길 바라네.”

“고양이가 쥐 걱정을 하시는군.”

안색이 이상하게 미묘한 것이 좀 걸리긴 했지만, 리델은 그렇게 나와 아르케에게 자신의
지친 뒷모습을 보이며 응접실 문을 빠져나갔다. 기분이 갑자기 굉장히 이상해진다. 그의
눈빛이란... 분명 여러 가지 심정을 내게 토로하는 듯 했다.
이 느낌에 대해서 생각을 하려는데, 갑자기 아르케가 내 어깨를 툭하고 친다.

“우와. 큰일이야, 레이지.”

“또 뭐지?”

약간 불안해지는 게 사실이다. 스스로 이 여자에게 호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심정의 변화를 느끼게 될까봐 싫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두렵다. 어떻게 보면
나는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은 최악의 생명체가 아니던가. 그런 주제에 남에게 기대고
의지를 한다는 건 생각하기조차 괴로운 일이 될 게 뻔했다. 인위적인 달콤함이란... 
어떤 계기이든 그것이 깨어지는 순간 파멸을 낳을 뿐이니까.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르케는 빙글빙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젠 성 안에 우리 둘밖에 안 남았잖아.”

“그래서 나에게 당할까봐 큰일이라는 말인가?”

“...당하다니. 할 수 있을 것 같아? 꿈은 컸지만, 무척이나 허약한 지금의 너로서는 
내 가슴조차 만지지 못할 텐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신의 육감적인 가슴을 들이미는 아르케였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녀가 공언한대로 나의 촉수는 약간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

이 참새 심장만큼의 배짱도 없는 녀석아. 저 가냘프게만 보이는 여자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 다더냐? 촉수가 도대체 무슨 심보로 차려진 밥상(?)을 거부하는 건지 나로서는 어찌
알 도리가 없다.

“...내가 말한 큰일이란, 바로 너를 두고 얘기하는 거야.”

아르케가 이렇게 뜸을 들이며 대화를 이끌어갈 때는 나도 모르게 왠지 두려워지곤 한다.
이 인간 암컷의 매혹적인 구강에서는 무슨 단어가 튀어나올지 모르거든.
은색의 보석처럼 빛나는 나의 커다란 눈동자를 보며, 그녀가 입을 연다.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는 이상, 오늘부터 넌 나와 함께 특별 훈련에 들어갈 테니까.” 

...왠지 오늘따라 정말로 날 잡아먹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아르케의 입술이었다.




                                    -To Be Continued-


-----------------------------------------------------------------------------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17.
-------------------------------------------------------------------------         
CHAPTER 4. 승격(昇格).
-------------------------------------------------------------------------

바로 그때부터 수업을 빙자한 시련이 시작되었다. 아르케가 자신이 소환할 수
있는 생물체를 하나하나 소환해가며 다짜고짜 나에게 공격을 시킨 것이다. 
의도는 알겠지만 실전 경험이라는 측면이 무지하게 일천한 나로서는 상당히 두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예전 촉수를 발기시킬 때 희생양이 되었던 패밀리어들은, 이번에는 반대로 나를
희생양 삼아 폭력을 마구 휘두를 수 있었다. 그녀들의 눈빛은 상쾌한 복수로 인한 
희열로 생기마저 띄고 있었다.
마치 권력층이 한순간에 바뀌는 바람에, 줄을 잘못 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뭇매를 
맞는 어느 마을의 영주가 된 기분이다.

첫날은 그 작은 요정인 페어리에게까지 갖은 농락을 다 당하고야 말았다. 실전
경험이 너무 부족해서인지 어떻게 공격을 하기가 껄끄러웠다. 기습이나 학살이 아닌 
제대로 된 1:1을 한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

페어리에게 내가 입은 타격이라고 해봐야 눈 찌르기나 뒤통수 밟히기 정도의
간지러운 수준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굴욕적이었다. 자신의 
손바닥만한 생물에게 철저히 농락당한다고 생각해보면 내 기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답이 나올 것이다. 예전 나보다 약하다는 촉수의 판정과는 전혀 다르게,
페어리는 어떤 의미로는 나보다 훨씬 강했다.

나중에는 촉수까지 사용해서 페어리를 잡으려 했지만, 페어리는 작은 몸으로
요리조리 촉수의 마수를 잘도 피해냈다. 이건 나로 하여금 역시 아직은 너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다. 촉수의 능력이 아무리
좋으면 뭘 하나? 사용자인 내가 이렇게나 미숙한데... 평범한 인간의 암컷 말고는
정녕 잡을 수가 없단 말인가? 정말 비참한 현실이다.

물론 페어리와의 목숨을 건 사투(?)에서 얻은 점도 많다. 일단 공격의 대상을 제대로
노리는 법과, 비록 삽질을 하긴 했지만 할퀴기와 물기의 공격 속도 대폭 상승이다.
암컷의 체액을 흡수하지 못한다면 나에게 있어 성장이란 불가능 한 일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전투의 방식은 실전을 통해 익힐 수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의 끝없는 삽질을 본 아르케의 반응은 대략 이러했다. 

“나중엔 모기한테도 강간 당하겠다?”

“.....”

둘 째 날은 ‘사라’라는 이름을 가진 트롤에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얻어맞았다. 
물론 내 공격도 많은 성공을 했지만, 맞은 즉시 그 자리에서 바로 회복을 하는 트롤에게
위협을 줄 정도의 파워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이 날은 ‘맞는 법’과 공격 한 번 한 번에 체중을 실어서 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덤으로 포션을 바르거나 먹어 상처를 치료하는 법도 알았다.

셋 째 날은 미노타우르스에게 배틀 엑스로 허리가 잘려질 뻔 했으며, 넷 째 날은 고도로
훈련된 오크 두 마리에게 처절한 양동공격을 당해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 두들겨 
맞으며 실전을 거듭할수록 실력이 점점 느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는 있었다. 나에게도 
타격의 센스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 듯 하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전투에 있어서 어떠한 빛을 보긴 힘들겠지만...

그리고 바로 오늘. 다섯 번 째가 되는 날. 아르케는 자신의 비장의 카드 중 하나인 
뱀파이어 암컷을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보기만 해도 하반신이 덜덜 떨려오는 무서운 상대. 게다가 며칠 전에 직접 그 실력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안 그래도 뱀파이어로부터 풍겨오는 압박의 기운에 긴장을 하던 나에게. 아르케의 친절한
충고가 날아온다.

“아마 각오해두는 편이 좋을 거야.”

“.....”

자신의 무기인 길 다란 검도 빼들지 않은 그녀에게, 정말 하늘이 돌 정도로 얻어맞았다.
반짝거리는 비늘이 군데군데 깨졌으며 앞니까지 하나가 부러졌다. 눈꺼풀이 부어올라서
한쪽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다.
도대체가 뭐가 보여야 싸우든 말든 하지. 그냥 바람 소리가 들리는 순간 ‘퍽’ ‘퍽’
하며 공격을 당하니 무슨 허깨비와 싸우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두들겨 맞던 내 모습이 애처로웠는지, 아르케는 ‘센시아’라는
이름의 뱀파이어 암컷을 돌려보내었다.

“역시 무리였나?”

“젠장... 허억, 헉. 갑자기 내 자신에게 환멸이 느껴지는군. 하아...”

이쯤 되면 경험부족의 문제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나의 신체적 능력이 한계에 도달한
기분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분노. 이 분노가 순간적으로 뇌 속을 지배하는 듯 했다.
난 결국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기로 결심했다.

“...아르케.”

“응?”

“어디서 인간의 여자를 구해올 수 없을까? 나라마다 왜 사형수라든지 그런 거 있잖아.”

전신에 상처를 입은 채 가쁜 숨을 헐떡거린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부탁을 하는 나에게
아르케가 요상한 눈빛을 보내온다.

“패밀리어 대신 괴롭히면서 대리만족이라도 얻으려고?”

“...날 그렇게 싸구려 같은 놈으로 보지 마.”

내가 무슨 자폐증 걸린 드래곤도 아니고... 좀 너무한 생각이로군. 아무리 스스로의 
나약함을 깨달았다지만, 평범한 인간을 가지고서 장난을 칠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다.

“그럼 왜 인간 여자를 찾는 건데, 레이지?” 

그제서야 진지한 반응을 보이는 아르케였다. 그녀의 풍부한 속눈썹이 나에게로 향하며
자신의 의아함을 표출하는 듯 했다. 

“너에게 미처 말할 기회는 없었지만, 난 그냥 시간이 흐르는 데로 성장하는 평범한 
드래곤이 아니야.”

“그건 또 무슨 말이지?”

그녀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만... 언제까지나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입을 열었다.

“나의 육체가 장성하는 방법은 바로 이 촉수가 암컷 생명체의 체액을 흡수하는 것 
뿐이란 말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러려면 약한 인간 암컷의 그것이 필요해.”




                                    -To Be Continued-


-----------------------------------------------------------------------------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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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승격(昇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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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부터 수업을 빙자한 시련이 시작되었다. 아르케가 자신이 소환할 수
있는 생물체를 하나하나 소환해가며 다짜고짜 나에게 공격을 시킨 것이다. 
의도는 알겠지만 실전 경험이라는 측면이 무지하게 일천한 나로서는 상당히 두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예전 촉수를 발기시킬 때 희생양이 되었던 패밀리어들은, 이번에는 반대로 나를
희생양 삼아 폭력을 마구 휘두를 수 있었다. 그녀들의 눈빛은 상쾌한 복수로 인한 
희열로 생기마저 띄고 있었다.
마치 권력층이 한순간에 바뀌는 바람에, 줄을 잘못 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뭇매를 
맞는 어느 마을의 영주가 된 기분이다.

첫날은 그 작은 요정인 페어리에게까지 갖은 농락을 다 당하고야 말았다. 실전
경험이 너무 부족해서인지 어떻게 공격을 하기가 껄끄러웠다. 기습이나 학살이 아닌 
제대로 된 1:1을 한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

페어리에게 내가 입은 타격이라고 해봐야 눈 찌르기나 뒤통수 밟히기 정도의
간지러운 수준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굴욕적이었다. 자신의 
손바닥만한 생물에게 철저히 농락당한다고 생각해보면 내 기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답이 나올 것이다. 예전 나보다 약하다는 촉수의 판정과는 전혀 다르게,
페어리는 어떤 의미로는 나보다 훨씬 강했다.

나중에는 촉수까지 사용해서 페어리를 잡으려 했지만, 페어리는 작은 몸으로
요리조리 촉수의 마수를 잘도 피해냈다. 이건 나로 하여금 역시 아직은 너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다. 촉수의 능력이 아무리
좋으면 뭘 하나? 사용자인 내가 이렇게나 미숙한데... 평범한 인간의 암컷 말고는
정녕 잡을 수가 없단 말인가? 정말 비참한 현실이다.

물론 페어리와의 목숨을 건 사투(?)에서 얻은 점도 많다. 일단 공격의 대상을 제대로
노리는 법과, 비록 삽질을 하긴 했지만 할퀴기와 물기의 공격 속도 대폭 상승이다.
암컷의 체액을 흡수하지 못한다면 나에게 있어 성장이란 불가능 한 일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전투의 방식은 실전을 통해 익힐 수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의 끝없는 삽질을 본 아르케의 반응은 대략 이러했다. 

“나중엔 모기한테도 강간 당하겠다?”

“.....”

둘 째 날은 ‘사라’라는 이름을 가진 트롤에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얻어맞았다. 
물론 내 공격도 많은 성공을 했지만, 맞은 즉시 그 자리에서 바로 회복을 하는 트롤에게
위협을 줄 정도의 파워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이 날은 ‘맞는 법’과 공격 한 번 한 번에 체중을 실어서 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덤으로 포션을 바르거나 먹어 상처를 치료하는 법도 알았다.

셋 째 날은 미노타우르스에게 배틀 엑스로 허리가 잘려질 뻔 했으며, 넷 째 날은 고도로
훈련된 오크 두 마리에게 처절한 양동공격을 당해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 두들겨 
맞으며 실전을 거듭할수록 실력이 점점 느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는 있었다. 나에게도 
타격의 센스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 듯 하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전투에 있어서 어떠한 빛을 보긴 힘들겠지만...

그리고 바로 오늘. 다섯 번 째가 되는 날. 아르케는 자신의 비장의 카드 중 하나인 
뱀파이어 암컷을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보기만 해도 하반신이 덜덜 떨려오는 무서운 상대. 게다가 며칠 전에 직접 그 실력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안 그래도 뱀파이어로부터 풍겨오는 압박의 기운에 긴장을 하던 나에게. 아르케의 친절한
충고가 날아온다.

“아마 각오해두는 편이 좋을 거야.”

“.....”

자신의 무기인 길 다란 검도 빼들지 않은 그녀에게, 정말 하늘이 돌 정도로 얻어맞았다.
반짝거리는 비늘이 군데군데 깨졌으며 앞니까지 하나가 부러졌다. 눈꺼풀이 부어올라서
한쪽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다.
도대체가 뭐가 보여야 싸우든 말든 하지. 그냥 바람 소리가 들리는 순간 ‘퍽’ ‘퍽’
하며 공격을 당하니 무슨 허깨비와 싸우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두들겨 맞던 내 모습이 애처로웠는지, 아르케는 ‘센시아’라는
이름의 뱀파이어 암컷을 돌려보내었다.

“역시 무리였나?”

“젠장... 허억, 헉. 갑자기 내 자신에게 환멸이 느껴지는군. 하아...”

이쯤 되면 경험부족의 문제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나의 신체적 능력이 한계에 도달한
기분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분노. 이 분노가 순간적으로 뇌 속을 지배하는 듯 했다.
난 결국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기로 결심했다.

“...아르케.”

“응?”

“어디서 인간의 여자를 구해올 수 없을까? 나라마다 왜 사형수라든지 그런 거 있잖아.”

전신에 상처를 입은 채 가쁜 숨을 헐떡거린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부탁을 하는 나에게
아르케가 요상한 눈빛을 보내온다.

“패밀리어 대신 괴롭히면서 대리만족이라도 얻으려고?”

“...날 그렇게 싸구려 같은 놈으로 보지 마.”

내가 무슨 자폐증 걸린 드래곤도 아니고... 좀 너무한 생각이로군. 아무리 스스로의 
나약함을 깨달았다지만, 평범한 인간을 가지고서 장난을 칠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다.

“그럼 왜 인간 여자를 찾는 건데, 레이지?” 

그제서야 진지한 반응을 보이는 아르케였다. 그녀의 풍부한 속눈썹이 나에게로 향하며
자신의 의아함을 표출하는 듯 했다. 

“너에게 미처 말할 기회는 없었지만, 난 그냥 시간이 흐르는 데로 성장하는 평범한 
드래곤이 아니야.”

“그건 또 무슨 말이지?”

그녀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만... 언제까지나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입을 열었다.

“나의 육체가 장성하는 방법은 바로 이 촉수가 암컷 생명체의 체액을 흡수하는 것 
뿐이란 말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러려면 약한 인간 암컷의 그것이 필요해.”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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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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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승격(昇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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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부터 수업을 빙자한 시련이 시작되었다. 아르케가 자신이 소환할 수
있는 생물체를 하나하나 소환해가며 다짜고짜 나에게 공격을 시킨 것이다. 
의도는 알겠지만 실전 경험이라는 측면이 무지하게 일천한 나로서는 상당히 두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예전 촉수를 발기시킬 때 희생양이 되었던 패밀리어들은, 이번에는 반대로 나를
희생양 삼아 폭력을 마구 휘두를 수 있었다. 그녀들의 눈빛은 상쾌한 복수로 인한 
희열로 생기마저 띄고 있었다.
마치 권력층이 한순간에 바뀌는 바람에, 줄을 잘못 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뭇매를 
맞는 어느 마을의 영주가 된 기분이다.

첫날은 그 작은 요정인 페어리에게까지 갖은 농락을 다 당하고야 말았다. 실전
경험이 너무 부족해서인지 어떻게 공격을 하기가 껄끄러웠다. 기습이나 학살이 아닌 
제대로 된 1:1을 한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

페어리에게 내가 입은 타격이라고 해봐야 눈 찌르기나 뒤통수 밟히기 정도의
간지러운 수준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굴욕적이었다. 자신의 
손바닥만한 생물에게 철저히 농락당한다고 생각해보면 내 기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답이 나올 것이다. 예전 나보다 약하다는 촉수의 판정과는 전혀 다르게,
페어리는 어떤 의미로는 나보다 훨씬 강했다.

나중에는 촉수까지 사용해서 페어리를 잡으려 했지만, 페어리는 작은 몸으로
요리조리 촉수의 마수를 잘도 피해냈다. 이건 나로 하여금 역시 아직은 너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다. 촉수의 능력이 아무리
좋으면 뭘 하나? 사용자인 내가 이렇게나 미숙한데... 평범한 인간의 암컷 말고는
정녕 잡을 수가 없단 말인가? 정말 비참한 현실이다.

물론 페어리와의 목숨을 건 사투(?)에서 얻은 점도 많다. 일단 공격의 대상을 제대로
노리는 법과, 비록 삽질을 하긴 했지만 할퀴기와 물기의 공격 속도 대폭 상승이다.
암컷의 체액을 흡수하지 못한다면 나에게 있어 성장이란 불가능 한 일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전투의 방식은 실전을 통해 익힐 수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의 끝없는 삽질을 본 아르케의 반응은 대략 이러했다. 

“나중엔 모기한테도 강간 당하겠다?”

“.....”

둘 째 날은 ‘사라’라는 이름을 가진 트롤에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얻어맞았다. 
물론 내 공격도 많은 성공을 했지만, 맞은 즉시 그 자리에서 바로 회복을 하는 트롤에게
위협을 줄 정도의 파워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이 날은 ‘맞는 법’과 공격 한 번 한 번에 체중을 실어서 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덤으로 포션을 바르거나 먹어 상처를 치료하는 법도 알았다.

셋 째 날은 미노타우르스에게 배틀 엑스로 허리가 잘려질 뻔 했으며, 넷 째 날은 고도로
훈련된 오크 두 마리에게 처절한 양동공격을 당해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 두들겨 
맞으며 실전을 거듭할수록 실력이 점점 느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는 있었다. 나에게도 
타격의 센스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 듯 하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전투에 있어서 어떠한 빛을 보긴 힘들겠지만...

그리고 바로 오늘. 다섯 번 째가 되는 날. 아르케는 자신의 비장의 카드 중 하나인 
뱀파이어 암컷을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보기만 해도 하반신이 덜덜 떨려오는 무서운 상대. 게다가 며칠 전에 직접 그 실력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안 그래도 뱀파이어로부터 풍겨오는 압박의 기운에 긴장을 하던 나에게. 아르케의 친절한
충고가 날아온다.

“아마 각오해두는 편이 좋을 거야.”

“.....”

자신의 무기인 길 다란 검도 빼들지 않은 그녀에게, 정말 하늘이 돌 정도로 얻어맞았다.
반짝거리는 비늘이 군데군데 깨졌으며 앞니까지 하나가 부러졌다. 눈꺼풀이 부어올라서
한쪽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다.
도대체가 뭐가 보여야 싸우든 말든 하지. 그냥 바람 소리가 들리는 순간 ‘퍽’ ‘퍽’
하며 공격을 당하니 무슨 허깨비와 싸우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두들겨 맞던 내 모습이 애처로웠는지, 아르케는 ‘센시아’라는
이름의 뱀파이어 암컷을 돌려보내었다.

“역시 무리였나?”

“젠장... 허억, 헉. 갑자기 내 자신에게 환멸이 느껴지는군. 하아...”

이쯤 되면 경험부족의 문제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나의 신체적 능력이 한계에 도달한
기분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분노. 이 분노가 순간적으로 뇌 속을 지배하는 듯 했다.
난 결국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기로 결심했다.

“...아르케.”

“응?”

“어디서 인간의 여자를 구해올 수 없을까? 나라마다 왜 사형수라든지 그런 거 있잖아.”

전신에 상처를 입은 채 가쁜 숨을 헐떡거린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부탁을 하는 나에게
아르케가 요상한 눈빛을 보내온다.

“패밀리어 대신 괴롭히면서 대리만족이라도 얻으려고?”

“...날 그렇게 싸구려 같은 놈으로 보지 마.”

내가 무슨 자폐증 걸린 드래곤도 아니고... 좀 너무한 생각이로군. 아무리 스스로의 
나약함을 깨달았다지만, 평범한 인간을 가지고서 장난을 칠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다.

“그럼 왜 인간 여자를 찾는 건데, 레이지?” 

그제서야 진지한 반응을 보이는 아르케였다. 그녀의 풍부한 속눈썹이 나에게로 향하며
자신의 의아함을 표출하는 듯 했다. 

“너에게 미처 말할 기회는 없었지만, 난 그냥 시간이 흐르는 데로 성장하는 평범한 
드래곤이 아니야.”

“그건 또 무슨 말이지?”

그녀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만... 언제까지나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입을 열었다.

“나의 육체가 장성하는 방법은 바로 이 촉수가 암컷 생명체의 체액을 흡수하는 것 
뿐이란 말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러려면 약한 인간 암컷의 그것이 필요해.”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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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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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승격(昇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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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정말이야?”

그녀의 의구심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날 정도로 짙어진다.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말을 했나? 뭐, 따로 물어본 적도 없으니 미안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왠지 추궁을
당하는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다.

“비록 한 번뿐이었지만, 그날 동굴에서 있던 사건으로 보아선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군.”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그녀의 머리 속에도 그날의 광경이 떠올랐던지 ‘아, 맞아.’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채음보양을 하는 방중술(房中術)을 배운 것도 아니요, 단순히
촉수의 성교만으로 힘을 얻는다니... 평범한 인간의 사고로는 이해하기가 굉장히 힘든 
시스템이긴 하다.

“넌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생물이니?”

“아르케, 네가 좋아하는 물건을 가진 생물이지.”

“음... 그건 뭐라고 부정할 수가 없네. 예리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특이한 성적(性的) 취향을 소유한 그녀다. 이런 흉물스러운 촉수
따위에 성적 판타지를 갖다니... 누구 말마따나 비유가 억세게 좋은 듯싶다. 
난 며칠간 얻어터지면서 끊임없이 생각한 나의 결론을 그녀에게 늘어놓기로 했다.

“내 전투기술이 아무리 노련해져봐야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야. 기본적인
베이스가 되는 근력과 순발력, 체력이 뒷받침 되었을 때야 비로소 진정 강해졌음을
말할 수 있는 법! 실전 경험을 쌓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몸을 키우는 게 급선무인 듯
하다.”

어린아이에게 아무리 대단한 명검을 쥐어준다 한들, 그걸 마음껏 휘두르지 못하는 이상은
무겁기만 한 쇳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니까. 차라리 압도적으로 강한 성인이 작은 나무
꼬챙이를 휘두르는 편이 더 무섭다.
나의 결론을 들은 그녀는 쉽사리 대답을 못한 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질 뿐이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인간의 여자를 데려오라니...”

“너희들의 이 국가에서의 입지로 보아서 충분히 가능할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색이 좋지 않은 거지?" 

뭔가 굉장히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는 아르케였기에 왜 그러나 물어보았다. 평소와는
좀 다른 모습이다. 게다가 이건 내가 강해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데... 어떤 점에서
문제가 되는 거지?
내 물음에 그녀가 미간에 작은 주름을 만들며 입을 연다.

“제길. 네 말대로라면 나는 레이지가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 손가락만 빨면서 그 꼴을 
봐야 한다는 말이잖아.”

“...망설인 이유가 결국 그거였군.”

질투, 혹은 자신이 먹지 못할 빵은 남에게도 주기 싫어하는 성격. 둘 중에 하나인 듯
싶다. 음욕시인이고 어쩌고 하는 칭호가 붙어있긴 하지만 그 천성이 여자라는 건가.
새삼 놀랍기도 하군.

“당연하지. 자신의 장난감이나 화장품, 혹은 딜도를 남이 사용한다는데... 세상의
어떤 여자가 그걸 달가워하겠어? 물론 너를 딜도 따위와 비교하는 건 아니야.” 

그녀는 내친김에 여러 가지 예를 들어 보이며 자신의 좋지 않은 기분을 피력하려 
애썼다. 장난감이나 화장품은 그렇다 치지만 디, 딜도라니... 정말 무서운 인간 
암컷임이 분명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촉수의 모습을 한 번 본 뒤에 다시
아르케를 바라보았다. 

“...기분은 더럽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네 자위기구의 성능이 좋아진다면 충분히 
낙관적으로 생각할 사항이라고 본다.” 

“음, 너 의외로 여자를 구슬릴 줄 아는구나.” 

나의 진솔한(?) 설득에 못이긴 아르케는 결국 풀죽은 얼굴로 실험실을 나섰다. 아마
그녀의 성격 상 교도관을 구워삶아서라도 여죄수를 데려올 것이다. 

“.....”

왠지 입맛이 쓰다. 암컷을 강간하는 행위란,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는 다른 맹수들의 
‘사냥’과 비슷한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사자나 표범이 먹이를 사냥해 자신의 몸을 
키우듯, 나도 암컷을 사냥해서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이 사냥감 자체를 처음부터 다른 존재로부터 노력 없이 얻게 되다니... 기분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강해질 수가 없잖아.
단지 강해진다는 일념으로, 지금 당장 처한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적응력에 대한 훈련을 
하는 기분을 갖는 수밖에...

“.....”

아르케는 실험실을 나가고서 약 1시간 쯤 후에 돌아왔다. 실험실 도어를 열고 들어오는
그녀의 얼굴엔 일을 성공했다는 자부심이 빛나고 있었다. 기다란 보라색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서 그런지 작은 얼굴형과 갸름한 턱 선이 눈에 뜨게 부각된다. 정말 내가 인간이었다면
반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빨리도 왔군.”

그리고 포승줄에 묶인 채로 아르케에게 끌려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것에게서는 분명히 
약한 인간 암컷의 체취가 느껴진다. 그 미약한 내음... 단지 그것을 맡았을 뿐인데도 벌써
촉수가 ‘움찔’ 작은 경련을 일으키며 나를 놀라게 한다.

“자, 기다리시던 사형수 등장이요.”

“네가 이렇게 반갑게 느껴지는 건 처음인데.” 

“저한테 그렇게 재수 없는 말씀을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서방님.”

약간의 비속어를 사용하며 배시시 웃는 아르케. 분명히 그녀의 얼굴은 청순하다기보다는
섹시함이랄까 퇴폐적인 느낌이 강한 미인의 얼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속어를
사용하는 아르케에게서는 전혀 싸구려라는 인식이 생기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그녀와의 
대화는 역시 무척이나 재미가 있었다. 

“누가 네 서방이라는 거야? 인간인 주제에...”

말끝을 흐리며 사형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사냥감은 바로 눈앞에 있지만, 이것이
정말 기분 좋게 먹을 만한 사냥감인지 확인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사나운 백상아리가
그에 비하면 나약한 복어를 함부로 삼키지 않는 것처럼. 이것은 본능이자 직접 몸으로 
학습당한 수업의 대가이다.

“.....”

잠시 동안 탐색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 인간 암컷은 평균치 이상의 미모를 지녔으며,
신체엔 별다른 성병이라든지 질병도 없는 듯 했다. 게다가 마침 나이가 젊어서 그런지, 
음기(陰氣)와 같은 생명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듯 보였다.

“그럼 그 암컷은 거기 놔두고. 잠시 자리를 비워줘, 아르케.”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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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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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승격(昇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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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건 왜인데? 내가 있으면 발기가 안 되기라도 하나?”

“그건 아니지만... 남의 성생활을 엿보는 취미가 없는 이상 나가주는 게 당연한 도리가
아닐까.”

“뭐야! 싫어, 안돼, 그냥 있을 거야!”

“...마치 퇴행성 정신질환이라도 걸린 것 같군.”

아르케는 나와 그렇게 몇 분을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느린
걸음걸이로 실험실을 나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이 완전히 잠기는 모습까지 확인한
후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고집 하고는... 휴.”

보라색 머리의 네크로맨서를 쫓아내는데 성공한 나는 이번엔 사형수에게로 다가갔다.
회색의 꾀죄죄한 죄수복을 걸친 암컷. 양손과 다리를 강철수갑으로 포박당하고 있었으며, 
특히 다리 쪽의 수갑에는 주먹만한 쇠공이 부착되어 있어서 거동이 매우 불편해 보인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의 작은 암컷이 초점을 잃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모질은 고문도 끝났고, 이젠 괴물인가.”

스스로 괴물이란 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이 암컷의 눈에서는 공포의 신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냥 흐리멍텅하게 사물을 보는 눈동자. 인간이 삶을 완전하게 포기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인 듯싶다.

“괴물이 아니라 드래곤이다, 멍청아.”

심한 고문으로 정신까지 망가졌는지, 나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암컷은 그저 입 꼬리를
올리며 실없이 웃을 뿐이었다.

“괴물 주제에 말까지 하는군. 이 다음은 날 강간하기라도 할 거야? 이 괴물아. 크큭.”

사형 집행 날짜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이 인간 암컷의 간은 배 밖으로 튀어나와서
밖의 공기를 마시고 있는 듯 했다. 나를 앞에 둔 채로 저런 농담을 하다니 말이다. 

“강간이라...”

게다가 그녀의 입장에서는 분명 아무런 생각 없이 나를 비꼬는 의미였겠지만... 강간 
어쩌고 하며 내뱉은 말. 바로 그것이 근 미래의 현실이 될 거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눈치가 빠르군.”

“...엉?” 

암컷 사형수의 동공이 확대되는 순간, 강하게 촉수를 제어하던 그 힘을 풀었다. 대포의
안전장치를 해제한 것과 비슷한 의미였다.

-츠악.

내가 하반신에 힘을 빼자, 심한 압박으로 억눌려있던 촉수가 엄청난 반발력을 동반하며 
거의 튕겨져 나가듯 암컷에게로 뻗쳐나가기 시작한다. 마치 지금껏 오로지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한 광포한 기세였다.

“아, 학?”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는 갈색머리의 암컷. 아무리 삶에 의욕을 잃었다지만 역시 이런
과격한 퍼포먼스에 당황하는 건 어쩔 수가 없구나. 암컷은 황급히 회피를 하려 했지만,
포박당한 손과 발이 그녀의 행동을 극도로 제약하고 있었다. 몇 발자국을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서던 암컷은 결국 제 발에 걸려 기우뚱 쓰러지고 말았다.

“윽.”

물론 오랫동안 굶어온 촉수가 그 틈을 놓칠 리 만무했다. 피부가 허용하는 최대한도로 
길어진 촉수는 거의 나의 몸을 이끌다시피 하며, 바닥에 쓰러진 암컷에게 게걸스러운
모습으로 달려들었다.

“...꺄악!”

일단은 입을 봉하는 게 가장 처음의 순서다. 본능적인 선택은 가장 왼쪽의 촉수를 암컷의
구강에 억지로 우겨넣는 것이었다. 인간의 성기와 비슷한 흉물스러운 것이 자신의 얼굴 
부분으로 쇄도하자, 정말 기겁하며 놀라는 그녀. 

“힉!?”

반사적으로 온 힘을 다해 어금니를 꽉 무는 모양이다. 하지만 유선형으로 빠진 촉수의 끝
부분에서는 아까부터 미끌거리는 어느 액체가 분비되는 중이었다. 나의 단단한 촉수는 
우선은 빈틈없이 맞물린 암컷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갔다. 수분이 부족해 갈라지긴 했지만
도톰한 그녀의 입술이 나의 촉수 끝을 부드럽게 덮는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짜릿한 쾌감. 나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과도 비슷한 신음성이 
나왔다.

“음.”

입술을 통과한 후엔 바로 이빨을 넘을 차례다. 이 부분이 아마 사냥을 하는 순서 중에서
최고로 힘든 고비인 듯싶다. 입술을 여는 것은 쉽지만 꽉 다문 이빨을 여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으으읍!”

바야흐로, 먹으려는 자와 먹히지 않으려는 자의 치열한 사투가 시작된 것이다. 나의 입장
은 강한 힘과 쾌락을 얻으려는 것이요, 암컷의 입장에서는 다만 지금의 이 징그러운 촉수를
입에 담기 싫을 뿐이었다.

“.....”

인간의 무는 힘은 실로 강력하다. 그 작은 골격에서 어찌 그런 강한 턱이 나올 수가 있는
지 궁금할 정도니까. 하지만 그 강력한 힘을 계속 유지하려면 엄청난 집중력과 지구력이 
동시에 필요하다.
단기간이야 물론 쉽지만... 자라나 거북이 아닌 이상, 어금니를 장시간동안 악물고 있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이 암컷은 자신의 양손이 묶여있으니 촉수를 
치우려 해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다. 
암컷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촉수는 결국 그녀의 이빨을 헤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흡.”

촉수 끝이 거의 목젖에 닿을 정도의 깊이였다. 사냥감의 볼살이 툭 불거지도록 들어간
촉수를 보며, 난 어떠한 포만감과 정신적인 쾌감을 느꼈다. 

“아아.”

암컷의 입을 촉수로 틀어막는 행위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암컷이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하는 것과 암컷의 의식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 또 가장 근본적인 ‘쾌감’을 
위해서였다. 이것은 본능에 맡겨 몸을 움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들이다. 
난 암컷이 질식하지 않을 정도로만 신경 써서 촉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윽...”

그 뒤로는 일사천리. 날카로운 손톱으로 죄수복을 거칠게 찢어발기며 3가닥의 촉수로는 
암컷을 유린해 나가는 것이다.

“으음.”

암컷의 포박당한 양쪽 손목을 잡아서 들어 올렸다. 나와 비슷한 신장이었기에, 팔을
높이 들자 그녀의 발이 땅에서 10cm 정도 떨어진다. 입에 박힌 촉수에서는 벌써부터 암컷의
타액이 번들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뇌로 향하는 산소 공급량이 현저하게 줄어들자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다.
반쯤 감긴 매혹적인 눈과 크게 벌려져 촉수를 터질 듯 물고 있는 그녀의 입술은 나의
이성을 날아가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하악...”

사형수의 양 발목 역시 포박당해서 딱 붙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의 굳게 닫혀 진 음부에
돌기가 박힌 가운데 촉수를 넣는 일이 그리 수월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일단은 사냥감의
육체를 부드럽게 이완시켜놓는 게 자연스러운 순서다.

“우웁.”

오랜 시간 옥살이를 했는지, 꽤나 마른 체형을 가진 암컷의 육체에서는 의외로 팽팽한 
탄력이 느껴졌다. 지방질이 전혀 없다보니 젖가슴은 그리 크진 않았지만 거기에서는 
원초적인 섹시함이 묻어난다. 마치 운동을 좀 해본 여자의 적당한 탄탄함... 마치 그것과도
같았다.
난 침을 꿀꺽 삼키며 암컷의 뭉클한 젖가슴을 마구 희롱하며 주물렀다. 촉수가 닿는 육체 
이곳저곳에서 파르르 떨리는 작은 경련이 느껴진다.

“.....” 

봉긋한 유방을 따라서 내려오는 허리 라인은 확 좁아지고, 아랫배에서는 다시 매력적인 
약간의 복근이 나온다. 더욱 아래로 내려가자, 이번에는 길고 늘씬하게 쭉 뻗은 그녀의 
탄력 있는 허벅지가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허벅지 안쪽 깊숙한 곳에는 미세하게 잡힌
근육이 가히 육감적인 자태를 과시하고 있었다.

“하아아악.”

이쯤 되면 아르케에게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라도 전하고 싶은 심정이다. 사형수라고 
아무나 대충 골라올 줄 알았는데... 이런 고급의 암컷이라니!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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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아무리봐도 19~20편은 수위가 좀 높다ㅡㅡ;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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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승격(昇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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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으로 인간 암컷을 허공에 든 채 마구 촉수를 휘둘렀다. 사냥감의 두 다리가 
수갑으로 포박당해 붙어있건 말건... 그녀의 질에서 풍부하게 분비되어 흐르는 애액 
때문인지 이제는 촉수가 수월하게도 들어간다. 윤활유의 역할을 아주 제대로 하는군.

“하아아...!”

엄청난 공포와 그에 준하는 쾌감으로 인하여 반쯤 뒤집힌 그녀의 눈. 탄탄한 허벅지를 
타고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진득한 액체가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아마 둘 모두의
교집합일 것이다.

“크윽.”

그렇게 한참을 움직이다 보니 갑작스럽게 분출의 욕구가 느껴진다. 세 가닥의 촉수
전체에서 느껴지는 뇌신경이 타버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간지러움과 쾌감! 허벅지와
사타구니 부근의 근육에서는 간헐적인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악!”

암컷의 색정적인 신음성을 들으며, 촉수 끝으로부터 끊임없이 꿈틀거리던 뭔가가 드디어
폭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세 가닥의 촉수가 심한 경련을 일으킴과 동시에 소변과는 다른, 어느 우유 빛의 액체가 
튀어나온 것이다. 이 끈끈한 점액은 축 늘어진 암컷의 얼굴과 몸 곳곳을 순식간에 적시며
흘렀다. 그 양이 생각보다 엄청나서 그녀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지나 바닥의 카펫에까지 
떨어질 정도였다. 
이거... 나중에 아르케가 보기라도 하면 경을 칠지도 모르겠군.

“.....”

생애 최초의 사정(射精)을 마치자 신기하게도, 그토록 강하던 오르가즘이 단박에 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쾌락의 끝을 본 다음의 육체는 바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인가?
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들고 있던 암컷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쿨럭, 하... 아아악.”

그녀는 거의 실신하기 직전의 상태였다. 자유를 찾은 입과 음부에서는 이제야 나의 정액이 
한숨과 함께 쏟아지듯 바깥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상당히 너저분한 몰골이 되어버린
암컷이었지만, 어찌 보면 바닥에 함부로 나동그라진 자태가 섹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후우. 아직 살아있군.”

동굴에서의 암컷과는 달리, 이 사형 집행을 목전에 둔 여자는 나를 끝까지 만족시키고도
목숨이 붙어있다. 채 사정을 하기도 전에 칠공에서 검붉은 피를 흘리며 즉사한 지난번의 
암컷과는 전혀 다르단 말이다.

“.....”

그렇다면 이 암컷과 예전에 죽는 암컷과의 차이가 무엇이란 말인가? 똑같이 허약한
인간의 암컷일 뿐인데...
성적인 만족감의 여운을 만끽할 시간도 없이, 이제는 오히려 더 큰 혼란스러움과 의구심이 
밀려온다.

“...젠장. 뭐가 뭔지.”

하지만 이 촉수로도 사정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알 수 없는 커다란 안도감을 
주었다. 생물의 본능적인 종족번식의 욕구란, 드래곤에게 있어서도 역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니까. 과연 실제로 임신이 가능한지의 진위 여부를 떠나 단순히 정액을
분출할 수 있다는 자체가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하아.”

그러는 사이에 하반신의 촉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촉수 표면에 묻어있던 온갖
애액와 끈끈한 점액들이 다시금 흡수되는 모습이 보인다. 이 경이로운 흡수장면을 보는 
것은 이번이 바로 두 번째이다. 
촉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몸통에 묻는 분비물들을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흡수했다.

“!”

그 모습을 보는데,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든다. 이것은 나의 몸에 곧 닥쳐올... 어떠한
커다란 생체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듯싶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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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군에 기대한다 잇힝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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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승격(昇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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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뒤쪽부터 척추를 타고 일정한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꼬리뼈까지, 뭔가가 관통하는 
듯한 찌릿한 통증이 밀려온다.

“크윽.”

척추의 뼈마디가 미세하게나마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작은 성장임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활활 타오르는 일 억겁의 불로 전신을 지지는 듯한 
괴로움이다.
참을 수 없는 아픔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신체가 버티질 못한 채 앞으로 고꾸라지듯 
엎어진다. 

“...제, 젠장!”

난 바닥에 턱이 거의 닿을 정도로 엎드린 채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날카로운 어금니가
서로 부딪히며 듣기 거북한 마찰음을 낸다. 혓바닥에서 씁쓸한 피의 맛이 느껴지는 게
어금니에 긁혀 벌써부터 입가가 찢어진 것 같다.
수많은 혈관과 핏줄들이 울퉁불퉁 피부를 뚫고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일그러진다.

“크아아악...!”

전신에 촘촘히 박혀있는 비늘이 두꺼워지며 그 강도가 한층 더 단단해지는 느낌이다. 
앞발에 달린 4개의 손가락은 더욱 날렵한 모습으로 변했다. 발톱이나 이빨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는 완전한 흉기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건 처음으로 성장했던 정도보다 더 심하다! 비록 실제로 그렇진 않지만, 살갗이 온통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통증까지 느껴졌다.

“으으.”

얇은 피막으로 감싸여있던 두장의 날개에 살짝 각이 지며 등 뒤가 묵직해지는 기분이다.

-콰앙.

“레이지! 왜 이래?”

나의 고통에 찬 비명을 들은 아르케가 문을 부수다시피 하고 들어온 것 같다. 쓰러진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기는 했지만, 눈앞이 하얘질 정도의 통증이란 녀석은 그녀의 말에 대답할
기운조차 전부 앗아간 뒤였다.

“크으으...”

부들부들 떨며 고통을 참아낸다.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지만, 다행히 이 신체적인 변화는
그리 긴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변화가 완전히 멈춘 것이다. 
아르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괜찮은 거야?”

“크윽... 아, 아마도.”

전신을 바늘로 들쑤시는 듯한 통증이 점차 사그라진다. 겪을 당시의 고통은 엄청나지만
일단 고토의 시간이 지난 뒤의 후유증은 거의 없는 듯 했다. 비늘을 제외한 모든 부위에서
식은땀이 분비되는 느낌이다. 힘이 풀린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준다.
난 심하게 비틀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은 채로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도대체가 무슨... 아!?”

그제서야 전체적인 내 모습을 확인했는지, 아르케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레이지... 너 성장했구나!”

“덕분에. 하아, 하아.”

척추 뼈와 팔다리의 뼈들이 조금씩 늘어나니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신장도 커진 모양이다.
원래 아르케와 비슷한 눈높이였는데, 이제는 그녀의 머리 윗부분까지도 쉽게 보인다. 
갑자기 키가 크니 기분이 매우 이질적이고 생소하다.
아르케가 높아진 나의 턱을 올려다보며 어이가 없다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세상에, 그게 정말이었다니... 넌 대체 어떻게 되먹은 생물인 거야?”

“누차 말하지만, 네가 좋아하는 물건을 가진 드래곤일 뿐이다.”

“아무튼, 누가 연구 대상 1호 아니랄까봐...”

누군가가 지금의 나를 겉으로만 본다면 아마 300살 이상은 족히 넘겼다고 추측할 것이다.
그만큼, 난 고작 70년생의 화이트 드래곤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육체를 
소유하게 된 셈이다. 이 정도면 분명 동급의 레드보다도 클 것이다.
게다가 변한 것은 몸의 크기뿐만이 아니었다. 내 안에 용솟음치는 새롭고 신비한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분명 뭔가를 자연적으로 터득하게 된 것 같다. 난 입을 반쯤 벌린 채
아르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런 것도 할 줄 알게 된 것 같군.”

“뭐를?”

내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약간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것을 내가 못한다면 대체 누가 또 할 수 있단 말인가? 여유 있는 기분으로
시동어를 내뱉는다.

"폴리모프(Polymorph)."

“!”

나의 내면세계에 약간의 조작을 가하는 것과 동시에 짧은 용언(龍言)을 입에 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도 내 육체는 신비로운 빛에 둘러싸이며 어떠한 
변이(變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발톱과 비늘이 퇴화되고, 꼬리가 들어간다. 키는 아주 조금 작아졌으며 전체적인
몸통의 두께가 슬림해진다. 피부가 점점 부드러워지며 미세한 체모들이 자라났다.
게다가 얼굴의 골격이 뒤틀리며 변하기까지 한다.

“흠.”

설명은 길지만 실제로는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 나의 육신은 엄청난 고속으로 수 억 번 
이상의 변이를 끝낸 것이다. 처음 해보는 폴리모프여서 그런지 머리가 띵할 정도였다. 슬슬 
나를 감싸던 섬광이 사라지고... 확보된 시야에는 젊은 여성 네크로맨서의 어리둥절한 
모습이 들어왔다.

“...맙소사.”

넋이 나간 아르케의 탄성이 섞인 한마디는 마치 나의 완벽한 변신을 축하하는 훌륭한 
팡파레와도 같았다.

“성공인가?”

눈꺼풀을 살짝 찌르며 내려오는 결 좋은 은빛의 머리카락. 섬세한 그것들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넘기며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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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군 뭐하냐!!! 게리롱푸리롱~!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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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승격(昇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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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돼...”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면서 신장은 약간 줄어든 것 같다. 하긴, 드래곤은 인간에
비해서 목이 긴 편이지. 눈높이가 다시 아르케와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그녀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한 표정으로, 변화한 나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스스로도 어색하게 변한 구강과 혀를 움직여,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질문을 아르케에게 던진다.

“인간의 관점에서, 지금의 내 모습은 미형인 편인가? 되도록이면 직설적으로 답해줬으면
  좋겠군.”

실험실에 있는 거울을 보면 되겠지만 일단은 제 삼자의 입장에서 평가를 받아야 마음이
놓일 듯 하다. 아르케는 나의 질문에 그런 것은 물어볼 필요조차 없다는 제스쳐를 보였다.

“미형인 정도가 아니야. 이미 인간 수준에서 판단할 미모의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그렇다면 다행이군.”

지금까지의 생각들을 종합해본 결과, 드래곤의 모습으로 인간세상을 살아가는 건
도저히 불가능인 듯싶다. 역시 그들의 무리에 섞이려면 나 스스로가 인간의 모습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동류(同類)를 배척하는 일 따위란 거의 없는
인간들이니까.

“.....”

게다가 인간의 암컷들은 수컷의 외모에 혹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홍조를 띄고 있는 아르케를 보더라도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물론 아르케의 경우엔
먼저 나의 촉수에 반해버린 특이한 케이스긴 하지만... 외모가 출중하다는 것은 그만큼 
암컷을 사냥함에 있어서 ‘유혹하다’라는 기술을 보다 사용하기 수월하게 만들어준다.
그녀는 감동마저 어린 눈빛으로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귀엽다... 레이지. 마치 조각 같아.”

“지금의 나는 귀여운... 스타일인가? 난 좀 나이가 있는 청년의 모습을 원했는데.”

아무래도 유혹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으려면 어린 것보다는 나이가 약간 있는 쪽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게다가 상당수의 인간 암컷들은 자신보다 어린 수컷은 아예 수컷으로
취급을 하지도 않는다던데... 약간은 조바심이 든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온 아르케의 설명은 나로 하여금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게 아니라, 원래 여자들은 어느 정도의 수준 이상이면 귀엽다는 표현을 자주
써먹어. 실제로 지금의 네 모습은 소년과 청년의 중간 쯤 나이로 보이니까... 널 어린
아이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그건 그렇고 의외로 외모에 되게 신경을 쓰는 
구나?”

“그야 생업에 관련된 요소니까... 흠, 말이 이상하게 되는군.”

누가 들으면 암컷의 등을 처먹고 다니는 기생오라비 정도로 오해를 할지 모를 말이었다.
역시 인간의 언어란, 듣는 이로 하여금 오해를 사기 쉽게 만들어져 있구나.

“레이지는 드래곤의 모습도 귀엽지만 역시 지금의 모습이 훨씬 압도적이라... 눈길이
저절로 향할 정도야. 그런데 옷을 구현해내진 못하는 거니?”

아르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의복을 전혀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인지했다.
드래곤일 때는 물론 그냥 다니는 게 자연스럽지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려니 벌거벗은
몸이라는 게 왠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육체를 지키는 비늘이랄까... 털 같은 것이 별로
없어서인 듯 하다.

“아직은 애송이 수준이라서 그런지 의복을 만들 영역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촉수는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에서도 여전하네. 후훗.”

그녀의 말대로, 꽤나 거대하던 촉수는 인간의 신체에 알맞은 사이즈로 변형이 되어있었다.
달아놓고 보니 마치 인간의 성기와 비슷한 모습이다. 양쪽에 달린 촉수는 고환이요, 가운데
촉수는 음경(陰莖)이다. 지금은 얌전하지만 적당한 먹이감이 포착되면 길길이 날뛸 
이것들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골이 다 아파올 정도였다.

“어디, 요놈의 고추가 많이 컷나 볼까?”

“...그만.”

마치 어린아이를 성희롱하는 할머니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아르케 때문에라도 의복을
갖추어야할 필요성이 배가됨을 느꼈다.

“혹시 남는 옷 같은 건 없나?”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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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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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승격(昇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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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아르케가 자신의 옷장에서 하얀색의 바지와 상의를 꺼낸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평범하고 깔끔한 스타일이다. 하지만 역시 천의 재질은 무척이나
좋아 보인다. 저런 평상복마저 실크로 짜서 입다니... 이틀에 빵 한 쪼가리로 연명하던
과거를 생각하니 왠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다.

“이건 남녀 공용으로 입을 수 있는 건데, 내가 음욕시인이라는 별명이 생기기 전에 
즐겨 입던 옷이야. 보니까 사이즈도 적당할 것 같네.” 

“고맙군.”

그녀에게서 옷을 받아든 나는 주섬주섬 서툰 동작으로 그것들을 몸에 걸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입어보는 옷이라 그런지 무척이나 어색하다. 예전의 몸에 비해서 팔과 다리의 
비례가 길어진 것이 적응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아르케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어디 한두 군데는 크게 찢어졌으리라.
힘들게 입고 보니, 대충 소매나 다리의 기장이 살짝 모자란 듯싶으면서도 잘 맞아 
떨어지는 모양새다.

“역시 그림이 나온다. 나중에는 백의의 미소년이라고 불리워질지도 모르겠는 걸.”

순수한 감탄의 의미로서 나의 외모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 아르케였다. 비록 본래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의 칭찬 따위에 기분이 
좋다니 말세로군.

“당분간은 이 모습으로 지낼 생각이다. 그게 너희들과 함께하는데도 편하겠지?”

“오케이. 물론이야. 특히 나로서는 눈이 즐겁다 못해 날아갈 정도인데...”

아르케가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아 'OK' 사인을 해 보인다. 참으로 황송한 평가였다.
어떻게 생겼기에 이러는 거지? 나중에 거울이라도 찾아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인간 세계에 발을 들인 이상, 그들과 공존하려면 내가 변하는 수밖에 없겠어.”

거기에 인간의 손가락은 드래곤의 그것보다 훨씬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고 다리도 길으니
생활하기가 괜찮은 편이긴 하다. 

“다만 인간의 모습일 때는 아무래도 힘이 좀 떨어지는 것 같다. 호신용으로 쓸만한 
  무기 같은 것은 없나?”

“그런 건 카이런에게 구하는 게 좋을 거야. 병문안 겸, 신전으로 가보자.”

“좋아. 그런데 저 암컷은 있던 곳으로 다시 데려다 놓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데.”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 바닥에 쓰러진 채 미약한 신음을 흘리는 사형수. 아르케는 그녀의
코에서 흐르는 검붉은 혈액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참 질펀하게도 했구나. 놔두면 알아서 데려갈 거야. 교도관에게 미리 말해뒀거든.”

거기까지 대화한 우리는 곧바로 실험실을 나섰다. 몇 군데의 넓은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가니 어느 커다란 현관이 나온다.

“.....”

이상한 점이 있다면, 벌써 상당히 많은 통로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간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의 표정에서 드러난 의아함을 느꼈는지 아르케가 입을 열었다.

“사실 이 건물은 리델씨와 카이런, 그리고 나까지... 이렇게 세 명이 쓰는 곳이야.
  사용하는 인원에 비해서 호화로운 편이지?”

“지나칠 정도로군.”

“리델씨가 일전에 국왕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거든. 그 계기로 왕실 직속의 마법사가 
  됐고, 그런 리델씨가 평소에 안면을 트고 지내던 우리를 자기 밑으로 끌어갔다고 보는 
  게 정확해.”

그녀의 설명을 들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상상한 것 이상으로 부유한 
녀석들이었네. 원하는 건 뭐든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본적인 식사에 쓰이는 돈만
해도 일반 백성들의 일주일치 봉급은 되고도 남게 보이니까.
화려한 장식이 달린 현관문을 열고, 드디어 건물 밖으로 그 장대한 첫 번째 걸음을 
내딛는다. 인간의 모습으로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

거리는 무척이나 한산했다. 이 건물의 성격 상, 일반적인 저택들과는 거리를 두어서
얘기치 못할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인 듯싶었다. 이따금씩 눈에 띄는 인간의
아이들과 어른들. 조용한 음성으로 대화를 하며 걷는 그들의 몸에는 하나같이 값비싸 
보이는 옷과 장신구들이 달려있었다.

“이곳은 일반 백성들이 사는 곳과는 좀 거리가 있는 길이야. 이를 테면 왕족 바로 밑의
  귀족들이 주로 사는 지역이지. 신전이나 마법 무구점, 돈이 들어갈 만한 장소는 거의 
  이곳에 밀집되어있을 거야.”

“상류 사회인가.”

  저녁이라 그런지 날씨가 상당히 선선했다. 시기상으로 아직 추울 계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귓가에 스치는 바람은 차갑게 느껴진다. 올해는 추위가 좀 빨리 오려나. 

“좀 춥네. 팔 좀 잠시 빌릴게.”

“응?”

몸에 붙는 스타일의 얇은 옷만을 걸친 아르케가 추위를 느꼈는지, 내 옆에 바짝 붙어서
팔짱을 껴온다. 나긋나긋한 그녀의 가슴과 팔의 감촉이 순간적으로 내 감성을 붕 뜨게 
만들었다.
어색한 기분에 그녀의 보라색 동공을 살짝 내려다보며 입을 연다.

“춥다면 옷을 더 가져오지 그래?”

“...아니야, 지금은 이게 더 좋아.”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도 기분이 썩 괜찮은 것이 사실이다. 아르케의
팔을 뿌리치지 않고 그냥 걷기로 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채로 인간의 도로를 걷고 있는 나의 모습. 게다가 바로 옆에는 인간의
여성까지 낀 상태다. 가끔씩 보이는 인간들의 눈에서는 감탄의 기색이 어리기까지 했다.
좀 우습군.

“.....”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나를 멸시와 비웃음의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한다. 오히려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인간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내가 그들 자신보다 훨씬 나으니까! 저열하고 유치하지만 약간의 통쾌한 
기분마저 든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레이지?”

“...아니, 갑자기 어린 시절의 향수가 떠올라서.”

그러는 동안 우리는 온통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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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퀴들은 역시 욕을 안하면 리플을 안 달어.
ㅅㅂ ㅅㅂ ㅅㅂ 리플좀 달자 응?^^*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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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승격(昇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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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까지는 자유롭게 공개가 되어있는지, 신전의 정문을 들어서는데 
아무도 제지하거나 검문을 하는 이가 없었다. 마치 쾌적한 공원에 산책이라도 나온 느낌이
든다.

몇 걸음을 더 걸어 들어가자 작지만 묵직해 보이는 팻말이 나온다.

-부상자 치료소. 왼쪽으로 직진.

치료하는 공간과 신을 모시는 공간이 따로 분리가 된 모양이다. 신전 성직자들의
능력이 얼마나 좋으면 개별적으로 병원 건물을 건설해놓은 걸까? 역시 국교(國敎)는 
국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전쟁이나 결투에서 다친 기사나 귀족들이
주로 찾을 것이다. 치료에 드는 요금은 무시 못 할 수준일 것이 뻔하니까.

“이곳에 그 수컷이 있나?”

“응. 카이런은 아마 입원실에 있을 거야. 그런데, 레이지.”

아르케는 잠시 운을 떼며 내 이름을 불렀다.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그녀의 입을 
바라본다. 그녀의 표정엔 약간의 걱정스러움이 어려 있었다.

“네가 이제 여느 사람들과도 접촉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서 하는 말인데,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도 암컷이라던 지 수컷이란 단어를 쓰면 좀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라.”

“...유의해두지.”

아르케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다른 것들은 잘 되는데... 의외로 인간을 비하하거나 하는
용어가 잘 고쳐지질 않는다. 여자나 여성, 레이디, 그녀나 소녀 등의 대체어가 있다고 
몇 번이나 속으로 되새기곤 하지만 입버릇처럼 나오는 이 ‘암컷과 수컷’이라는 단어...
때문에 스스로 짜증이 날 때도 많다.

“후우.”

어느 정도를 더 걷자 ‘부상자 치료시설’이라고 커다랗게 써 붙인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역시 조금은 보안이 필요한 공간인 듯, 아르케가 현관에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고
사인을 한 다음에야 치료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치료소 현관으로 들어선 아르케는 바로 옆의 카운터로 시선을 돌렸다.

“왕실 경호대 소속인 ‘카이런 체스티드’는 몇 호에 입원 중이지요?”

“어디보자... 아, 여기 있네요. 107호에 입원중이시군요.”

  새하얀 가운을 걸친 젊은 암컷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카이런의 소제를 알려준다. 금발에
간호원 모자를 쓴, 새하얀 피부의 그녀는 충분한 성적 매력을 풍기는 미인이었다. 평소에
금욕적인 삶을 사는 여성은 아니었던지, 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빛이 약간 변한다. 그 속
마음이야 어쨌든, 외모라는 단적인 측면에서라면 나는 이 암컷에게서 충분한 호감을 받은
것이다.
일단은 마음이 놓이는 게 사실이었다. 

“.....”

이쯤 되면 촉수가 발광을 할 때도 됐지만, 의외로 바지 안의 촉수는 잠잠한 것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한 번 사정을 하고 나면 다음의 발기까지 충전의 시간이라도 필요한 건가... 그나마
다행이군.”

충전의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 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성적인 충동을 받으면 수시로 
발기하는 인간의 그것과는 달리, 나의 촉수는 정해진 시간에 따라 규칙적인 발기를 하는 듯
싶었다.
아르케가 나의 작은 음성을 들었는지 눈을 깜박인다.

“...뭐라고?”

“아니, 혼잣말이었다.”

은근슬쩍 내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붉은 입술의 암컷을 뒤로 한 채, 카이런의 병실로
향한다. 

-카이런 체스티드.

복도의 중간쯤, 깔끔한 글씨체로 써진 명패가 붙어있는 문을 찾았다. 주저 없이 문고리를 
돌린다. 병실의 문은 힘없는 환자를 배려해서인지 너무도 부드럽게 열렸다.

-끼익.

“.....” 

분명 환자 혼자서만 쓰는 독실이다. 그런 주제에 병실은 지독하게도 넓고 호화로웠다.
실내의 한가운데엔 역시 화려하고 커다란 침대에 적당히 누운 채 널브러진 카이런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사용하는 독실의 문이 노크도 없이 열리자 카이런은 조금은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오랜만이네요.”

녀석은 어처구니없게도, 커다란 술통에 과일주스를 가득 부어 거기에 빨대를 꽂고 빠는 
중이었다. 팔자가 늘어진 녀석이군. 두 다리를 고정하는 석고 깁스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태도였다. 한 번 다리가 잘려진 녀석 치고는 심하게 팔팔하다.

“어라, 아르케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병문안 차 왔지요.”

“이야~ 지루하던 차에 잘 됐네. 내일은 해가 두 조각이 나서 뜰지도 모르겠군.”

씨익 웃으며 거기까지 얘기한 카이런은 이번엔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나를 보며 손가락을
들었다.

“근데 이 기생오라비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분은 누구셔? 설마 나 몰래 만든 새 애인?”

“구태여 당신 몰래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침대를 고정하는 기둥에 가볍게 몸을 기댄 아르케는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으며, 나는 
카이런에게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나는 레이지다.”

“푸읍!”

주스를 빨대로 쭉쭉 빨던 카이런은 격한 숨결과 함께 입안에 가득 머금었던 액체들을 도로
뱉어냈다. 덕분에 술통 안의 주스는 어지간한 사람의 경우라면 먹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뭐라고?”

이해가 되지 않는 어정쩡한 얼굴로 아르케와 나를 번갈아 보는 카이런이었다. 아르케가
미소를 지으며 나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그는 벌써 폴리모프를 익혔어요. 보통의 드래곤들 보다 몇 배는 진도가 빠르죠.”

“켁, 그럼 지금 이 꽃 미남이 그 변태 화이트 드래곤이라는 말이야?”

“변태라니. 난 그저 내 상황을 인정하고 생존에 가장 특화된 방법을 사용하는 것 
뿐이다. 변태가 있다면, 그것은 나를 만든 신이겠지.”

스스로도 출생이 궁금할 뿐이다. 세상의 어느 업 많은 드래곤이 나와 같은 변종을
잉태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장 완벽한 유전자를 소유했다는
드래곤으로서, 이런 기형적인 형태인 나를 낳았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드래곤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봐도 이런 촉수를 달고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것이다.

“.....”

처음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는 카이런이었다. 

“젠장. 아주 멋들어지게 변했다, 짜샤? 나랑 별 상관은 없지만...”

헌데 말을 멈춘 카이런이 갑자기 술통에 턱을 집어넣어 아예 주둥이를 처박은 채로 
그 오염된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이 아닌가? 

“캬아, 시원하군.”

깎지 않아 덥수룩하게 자란 턱수염에 청량한 붉은색의 액체가 줄줄 흘러 떨어진다. 그 
모양새는 보는 이로 하여금 유쾌함과는 거리가 먼 감정에 빠지게 했다.

“...더러운 인간.” 

“역겹군요.”

나와 아르케의 입에서 동시에 나온 말이었다. 단어는 약간 달랐지만 그 뜻하는 내용에 
있어서는 완벽한 일치를 보였다. 설마 오크가 폴리모프한 인간이기라도 한 것인가. 
이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오크(?)는 마구 헝클어진 반곱슬의 머리칼을 흔들며 약간의
분노를 겉으로 표출했다. 

“젠장, 이것들이 환자를 떡으로 알고 문병을 왔나?”

“문병을 의미삼아 온 것은 아르케뿐이다.” 

분명히 나의 의사에는 ‘문병’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야생동물 같은 
인간에게 문병이라니... 정말 얼토당토 않는 말이군. 

“그렇다면 네놈은 나와 함께 이 주스라도 나눠마시려고 온 거냐?”

야생동물이 도무지 영문을 알 수없다는 투로  손가락을 이용해 주스를 가리킨다. 하지만
내가 미치지 않는 이상 저런 몸에도 안 좋아 보이는 극도로 변질된 액체를 마실 이유가 
없지 않은가. 미간을 찌푸리며 바로 손을 내저어 거부의 의사를 밝힌다. 그리고는 슬쩍 
아르케의 눈치를 살핀 뒤 입을 열었다.

“...물론 그 주스에는 관심이 없다. 단지 무기가 필요해서 널 찾았을 뿐. 이곳을 
방문함에 있어 그 외의 별다른 의미를 두는 건 힘들군.”

“.....”

너무나 솔직한 확답에, 카이런은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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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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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승격(昇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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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무기창고 정도로 보이기라도 하는 거냐?”

멍한 표정을 짓던 카이런이 정신을 차린 듯 눈을 험악하게 부라린다. 다만 입과 턱 
부근에서 주스를 질질 흘리는 모습이란... 엄청난 거구에서 나오는 위압감을 상당 부분 
말소시키고 있었다. 상대방에게 겁을 주기엔 아쉬운 부분이군.

“후훗. 대금은 내가 섭섭지 않게 치룰 테니까 그러지 말고 빌려주는 게 어때요?
레이지가 강해지면 우리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은데.”

“.....”

내가 봤을 때 카이런이라는 수컷을 가장 잘 다루는 인간이 바로 아르케였다. 그녀는 단지
말 몇 마디로 카이런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화술이라는 부분은
나에겐 무척이나 생소한데다 별 필요가 없을 거라 여기고 있긴 하지만... 저런 모습을 보면
아르케의 입심을 조금은 본받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인상을 찡그린 채 잠시 머리를 굴리던 카이런이 입을 연다.

“음욕시인이라는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빌려줘야 하겠지만... 도저히 기분 나빠서
안되겠어. 내 조건 하나를 달지.”

정당한 금전을 지불한다는데 거기에 추가로 조건까지 붙이겠다니... 참으로 욕심이 
많은 인간이다.

“조건이라고...?”

나의 반문을 들은 카이런이 갑자기 극도로 악랄해 뵈는 미소를 짓는다. 한쪽 입 꼬리가 
싸악 올라가는 그 악마와 같은 형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자칫 노약자를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카이런의 입을 바라보았다.

“이 주스를 다 마셔.” 

순간, 병실 내에 따사로운 정적이 감돌았다.

“.....”

이 정도의 인간이었나? 조금이나마 매력적인 구석이 있는 수컷이라고 판단했던 내가
무색할 정도의 발언이었다. 실내의 공기는 그로 말미암아 급속도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역시 말이란 쏟아 부은 물과 다를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카이런은 혀를
내두르며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시팔, 그렇게 쳐다볼 것까진 없잖아.”

“먼저 사람이 되요, 카이런.”

아르케 역시 미간에 손가락을 짚으며 머리가 아프다는 제스쳐를 취한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한 팀으로 생활을 했을지언정, 카이런의 성격을 이해하기란 역시 보통 일이
아닌 듯싶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베개에 얼굴을 묻은 그가 손짓을 한다.

“까짓 거, 내 방은 열려있으니까 들어가서 진열장 안의 아무거나 골라서 가져가라고.”

“고맙군. 그렇지만 이 주스는 정중히 거절하겠다.” 

“이봐, 원래는 나도 농담이었다고. 조크를 이해 못하는 족속들이란... 쯧쯧. 
그런데 너 혹시 검을 사용할 건가?”

“그럴 생각이다. 인간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무기이더군.”

사용 빈도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검이라는 무기의 성능과 효율이 입증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저런 무기들을 직접 테스트해볼 시간이 없는 나로서는 이미 입증이 된
무기를 사용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무턱대고 선택한 것이었다.
그제서야 베개에서 얼굴을 뗀 카이런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놀렸다.

“배워본 적은 당연히 없겠고... 그냥 네 꼴리는 대로 휘두를 생각이겠지?”

“.....”

어떠한 반론을 할 수가 없었다. 말이 없다는 것은 그에 대한 대책 역시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카이런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무기를 쓴다는데 차마 그 꼴은 못 보겠다, 임마.”

그는 오만 인상을 쓰며 바닥에 떨어진 빨대를 주워들었다. 빨대를 소매 자락에 벅벅 
문질러 닦는 폼이 왠지  예사롭지가 않다.
대충 빨대의 세척 작업을 끝낸 카이런은 그것을 대뜸 나에게 내밀었다.

“일단 이걸 들고 자세를 잡아봐. 마치 검을 쥐는 것처럼.”

“.....”

약간 머뭇거리던 나는 그에게서 빨대를 받아들었다. 빨대라는 대용품에서 우스꽝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기라는 것을 들어본 역사가 없기에 사뭇 어색함이 
느껴진다.

“흠.”

스스로 자세를 잡기에도 어색한데, 조예가 깊은 카이런의 눈으로 봤을 땐 오죽 할까. 
그는 곧바로 우거지상을 지으며 외쳤다.

“목덜미를 세우고 턱을 당겨! 어깨는 그게 뭐야, 지금 춤이라도 추려는 거냐?
양 어깨를 내리고 등줄기를 곧게 펴. 하복부를 세우고 단전에 약간 힘을 주는 게
좋다. 다리는 어깨넓이만큼 벌리고 중심을 약간 앞으로 쏠리게 해. 시선은 언제나
전체를 볼 수 있게 해라!” 

순식간에 지나간 카이런의 주문은 필요한 곳만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 같았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그의 말을 따르려고 노력하자, 어느 순간부터 그럴듯한 자세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속으로는 약간의 뿌듯함마저 느끼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렵군. 이제 됐나?”

“엉성하지만 애송이 치고는 괜찮군. 그 자세로 하루에 일 천 번씩만 내려치기를 
연습해라. 일주일 동안 꾸준히 하면 대강 기본의 틀은 나올 테니까.”

말을 마친 카이런은 자신의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푹신한 이불 속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가르침 고맙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빠른 쾌유를 빌어요, 카이런.”

  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기 직전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나는 카이런의 다리에 
두텁게 싸여있는 깁스를 손가락으로 눌러보았다.

-뽀각.

인간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이미 인간의 근력을 훨씬 초월한 나였다. 꽤나 튼튼해 뵈던
깁스에는 단박에 손가락만한 구멍이 생겼다.

“우악! 이 시키, 무슨 짓이야?”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인 것 같아서 말이다.”

길길이 날뛰는 카이런을 뒤로 한 채, 아르케와 함께 병실을 빠져나왔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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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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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승격(昇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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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케. 되도록이면 무난한 모습의 검으로 골라서 가져다주겠어?”

“오케이. 찾아볼게.”

실험실로 돌아온 그날부터 하루에 이 천 번씩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천 번도 힘들겠지만, 나의 경우라면 그 두 배는 해줘야 몸이 풀리는 것이다.
자세가 왠지 불안정하다고 느껴질 때에는 카이런의 지적을 떠올리며 그때그때 바로 
잡았다.
생전 쓰지 않던 부분의 근육을 쓰려니 첫날은 거의 죽을 맛이었다. 억지로 이 천 번을
채우기는 했지만 더 이상 팔뚝이 올라가지 않았다. 덕분에 덜덜 떨리는 팔뚝을 주무르며
억지로 잠을 청해야만 했다. 자고 일어나면 심하게 뭉칠 거라는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이 편리한 드래곤의 육체는 신체의 불합리를 용납지 않는 듯싶었다.

둘째 날부터는 비로소 아르케가 카이런의 방에서 가져다준 진검을 사용할 수 있었다.

“.....”

자루에 ‘氷龍’이라는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있는 이 검의 이름은 ‘빙룡’이라고
한단다. 뭔가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쨌든 내 소유의 무언가가
생긴 것은 처음이니까. 

자루에 달린 손잡이의 미세한 굴곡을 뺀다면 자루부터 검 끝까지 쭈욱 일자로 시원하게 
뻗는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게다가 검 집까지 온통 희디 흰 백색이다. 나와 잘 어울릴 
거라는 아르케의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자루를 포함해서 1m 30cm 정도 길이인 이 검에서는 가끔 가다 은근한 냉기(冷氣)가
흘러나와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분명히 평범한 검은 아닌 것 같았고... 어떠한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어져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식사와 잠을 빼면 오직 자세를 잡고 검을 휘두르는 일이 일과의 전부였다. 아르케는
그동안 책상에 앉아 개인적인 연구를 하거나, 혹은 마치 기계처럼 검을 휘두르는 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곤 했다.

“검은 마음에 들어?”

“굉장히. 후우, 딱 마음에...! 드는군. 하아.”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상상도 못할 만큼의 수련을 한 나는
신체에 약간의 근육이 붙은 것을 느꼈다. 게다가 이젠 어떤 자세에서든 검을 깨끗하게 
휘두르는 것만큼은 자신이 생겼다.

하루는 검을 휘두르다 지쳐 바닥에 쓰러지듯 누운 나에게 아르케가 은근한 태도로 말을 
걸어왔다.

“저기, 레이지.”

“하아... 응?”

동그란 안경을 쓰고 책상에 앉아 뭔가를 끄적이던 그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누운 나의 근처로 다가온다. 푹신한 카펫의 재질이 하이힐의 소음을 감소시켰다.

“내일이 일년에 한번 있는 왕실 무도회 날이거든.”

뜬금없이 운을 떼는 아르케였다. 왠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그녀의 등을 타고
스믈스믈 피어오르는 듯한 기분이다.
난 최대한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무도회라고? 인간들끼리 모여서 춤을 추는 그것 말인가?”

“응. 맞아.”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가볍게 대답을 하는 그녀. 속마음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아마 나를 끌고서 무도회장인지를 가려는 의도인 듯싶다. 제길, 이제 슬슬 검을 다루는
자세의 기본이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초를 치는군.

“인간들이란 쓸데없는 곳에 기력을 쏟아 붓는 걸 좋아하는군. 카이런 같은 수컷이라면
그런 곳을 좋아하겠지만...”

일부러 카이런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싫다는 내색을 보였다. 이 정도면 아주 적극적이지만
간접적이기도 한 거절 방법이다. 상대방의 기분을 최대한 배려한 화법이랄까.
하지만 아르케는 내 의사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자연스러운 얼굴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게... 네 이름도 명단에 올렸거든. 물론 나랑 카이런도 참석하는 거고.”

“...윽.” 
결국 이번에도 당했군. 도대체 그런 곳을 가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암컷과 수컷이 
대놓고서 서로 교미를 위한 목적으로 만나는 장소? 물론 나에게 함부로 거절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찌됐건 난 아직 그들의 ‘포획물’에 불과할 뿐이니까. 물론
아르케의 경우에는 나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지만 리델과 카이런도
역시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

답답함을 느낀 나는 바닥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무도회는 단순히 춤을 추러 가는 장소가 아니야. 인간관계를 넓히며 사교성을 키우는
의미가 크지. 레이지, 너 역시 인간 세상에서 살아갈 생각이라면 왕실의 높은 사람들을 
만나서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해. 게다가 이번에 너를 내 조수라고 소개하면 나중에
네 정체를 따로 의심받을 일도 없고 편하단 말이야.”

청산유수로 말을 줄줄 이어나가는 아르케의 모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사랑스럽고 
예뻤다. 언젠가부터 그녀에게 이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너무 길들여지면 곤란한데... 이러다가는 드래곤도 뭣도 아닌 어중간한 인격체가
되어버릴까 봐 두렵기도 하다.
난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으며 눈을 감았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될 대로 되라지.’ 이 말 하려고 한 거 맞지?”

이걸 총명하다고 해야 할지 영악하다고 해야 할지... 이제는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질
않는다.

“턱시도는 미리 주문해놨으니 따로 뭔가를 준비할 필요도 없어. 매력적인 당신은 그냥 
몸만 오면 되는 거예요. 후훗.”

아르케의 투명한 안경 너머로 비치는 눈동자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반짝이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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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4. 승격 편 끝났습니다.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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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대면(對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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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검이고 뭐고 도저히 손에 잡히질 않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을
청하기로 했다.

“.....”

무도회장이라... 장소의 취지 상 수많은 인간들과 몸을 부딪쳐야 할 상황이 
많다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절대로 익숙하지 않은 소제.
아직 인간들의 예의범절을 완벽히 마스터했다고 할 수 없는 나로서는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다. 최대한 말을 자제하고, 접촉을 피해야겠지.

그렇게 하룻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안 그래도 지친 육체가 수면까지 제대로
취하질 못하니 피곤함이 물밀 듯 밀려온다. 보통은 억지로 잠을 청하면 곯아
떨어지기 마련인데 오늘은 뭔가 다르다.

“어머. 레이지, 벌써 일어난 거야? 속으로는 꽤나 설레였던 모양인데?”

그녀 개인이 쓰는 숙소에서 돌아온 아르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예 한숨도 못 잤다.”

“흠. 뭐, 어쨌든 좋아. 이제 3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벌써 9시가 넘었단 
말이야. 나처럼 좀 꾸며야 할 필요를 조금은 느껴야 하지 않을까?”

아직은 살짝 흐릿한 눈을 비비고 그녀를 올려다보니, 과연 평소와는 뭔가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새하얗던 양 볼에 분을 발랐는지 약간을 불그스름한 기운이 맴돈다. 결 좋은 머리는 
틀어 올려져서 나긋나긋한 목덜미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검은색의 슬림한 드레스가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곡선을 잘 드러냈다.

“...호오.”

아르케의 기다란 속눈썹이 나의 시선을 잡아끄는 듯 했다. 짙은 쌍꺼풀은 약간의
몽환적인 분위기마저 형성하고 있었다.  
나의 시선을 느낀 아르케가 약간 쑥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볼을 매만진다.

“어때...?”

“그럭저럭 괜찮군.”

옅게 화장을 하긴 했지만 그녀의 뚜렷하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나의 시야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사실 굉장히 아름다움 모습이었지만, 왠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기가 
싫었을 뿐이다.
아르케는 시원찮은 나의 반응에 도톰한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뭔가가 들려있었다.

“칭찬에 인색한 남자였네. 흥, 어쨌든 이거나 입어봐. 내가 도와줄게.”

뭔가 하고 보니, 깨끗하게 다려진 검은색의 턱시도였다. 먼지 하나 없이 아르케의
팔에 걸쳐져있는 의복은 그냥 봐도 엄청나게 비싸고 좋은 재질임을 알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약속은 약속. 저걸 입고서 무도회장을 가야 하는 
것이다.

“.....”

흰색의 평상복을 벗고 검은색의 정장슈트로 갈아입는다. 상당히 슬림한 편이라, 아르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약 5분간을 함께 끙끙거리고 나서야 완벽하게 착용을 할 
수 있었다. 
일단 옷을 입혀놓은 아르케가 완성된 내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볼에 바람을 집어넣는다.
뭔가 불만이 그득한 기색이다.

“이번에는 나도 칭찬에 인색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게 안 되는 모습이네. 
잘나셨어. 흥...”

헐렁한 평상복을 입었을 때 보다는 확실히 몸에 각이 잡힌다고 표현을 해야 하나... 
적당한 부분에서 몸을 감싸주는 부드럽고 팽팽한 옷감에 기분마저 깔끔해지는 느낌이었다. 
저절로 눈과 목에 힘이 들어간다. 
아르케는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 하며 윙크를 해보였다. 

“얼른 가자고요, 젠틀맨씨. 자칫하면 늦겠어.”

“음. 그러지.”

난 아르케의 손에 이끌려 빠른 걸음으로 왕실을 향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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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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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대면(對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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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라던가 친목 도모를 위주로 하는 모임은 보통 저녁때에 그 자리를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국왕 직속의 파티는 뭔가 다른 부분이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침부터 시작해 점심을 넘기는 시점에서 파티의 끝을 맺는다고 한다.
의아함이 들기에 가는 도중 이유를 물었더니, 아르케의 대답은 이러했다.

“코르서스 3세는 나이가 많아. 때문에 정통성을 중시하지. 이 가문 저 가문의
피가 섞여서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없거든. 그래서 파티를 아예 낮 시간에 여는 
거야. 밤에 열었다가는 그날로 눈 맞은 귀족 커플들이 교미를 해서 아이를 만들 
테니까.”

“...그렇군.”

정확히 이해가 되는... 아주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다. 나는 주로 질문을, 아르케는 
그에 따른 답변을 하며 걷는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대리석이 깔린 넓은 복도가 점점 좁아지며 결국엔 한 점으로 모이는 웅장한 길이 
나온다. 대리석 길의 최종지점엔 전체를 황금으로 도금해놓은 현관문이 그 근엄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었다.

“호오.”

척 보기에도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거대한 연회실의 문. 그 앞을 지키고 있던 
한 근위기사가 아르케에게 경례를 붙인다.

“조금 늦으셨군요. 페르버시온 양.”

“이 조수 녀석이 말썽을 부려서... 미안해요.”

거기까진 그래도 좋았다. 

“이 웬수!”

괜히 너스레를 떨던 아르케가 갑자기 중지를 구부려 내 이마를 ‘따악’ 소리가
나도록 친 것이다.

“.....”

물론 아프진 않았지만 상당히 어이가 없다. 아르케는 나의 따사로운 눈초리를 애써 
피하며 근위기사에게 손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속으로는 자신의 오버스러운 액션에
대해서 후회를 하고 있겠지?
두터운 콧수염의 끝부분을 다듬어 제법 멋을 부린 티가 흐르는 근위기사가 이제
나라는 녀석의 존재를 확인한 듯싶었다. 헌데 창백한 나의 얼굴을 본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어색하게 변하는 게 아닌가?

“...!”

“제 새로운 조수랍니다.”

그 짧은 사이에 아르케는 잽싸게 나의 손을 낚아채 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인간들의
은근한 화장품이며 향수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난 그 와중에도 궁금증을 풀려 아르케의
어깨를 툭 쳤다.

“저 수컷이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본 이유는 뭐지?”

“쉿, 조용히... 그는 게이야.”

침을 꿀꺽 삼키며 걸음걸이에 속도를 가했다. 왠지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나에게 표적이 된 암컷들의 심정이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

연회장엔 벌써 수많은 인간들이 모여 있었다. 돈은 많은데 하는 일은 없고, 또 놀고는
싶은데 자리가 없어 자중하며 지내던 암컷과 수컷들이 총 출동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대로 내려오는 재물로 호위 호식하며 일생을 사는 것들의 천지로구나. 

“잠시 주목해주길 바라오.” 

실내는 상당히 넓은 직사각형의 형태를 띈 구조였다. 한쪽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과 
함께 높은 단상이 존재했다. 단상 위에는 국왕으로 보이는 노인과 그의 딸로 보이는 
소녀가 나란히 서있었다.
이 많은 인간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진 이유는 바로 국왕의 목소리 때문인 듯 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짐의 파티에 참석한 이 나라의 젊은 피들을 보니, 반갑기 한량
없는 바이오.” 

거의 모든 이가 자신을 주목한다고 느낀 늙은 국왕은 그제서야 나지막한 음성으로
장내의 분위기를 한 번 더 가라앉혔다. 적당히 진중한 음성과 말끄트머리에 남기는 
잔잔한 여운. 단 몇 마디의 문장으로 이 정도의 흡인력이 나온다는 게 대단하다.
역시 한 나라의 리더다운 뭔가 특별한 카리스마랄까... 그런 것이 드래곤인 나에게도 
느껴진다.

“이번에는 올해를 맞이해 18세가 되는 나의 보물... 나르피안 공주도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니... 귀빈들께서는 따뜻하게 맞아주길 바라오. 허허.”

국왕의 입에서 ‘나르피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연회에 참석한 수컷들의 얼굴이
대폭 밝아진다. 이것은 단지 공주라는 직책의 타이틀 때문일까? 아니면 공주 개인의
사람됨이 좋아서 그런 것일까. 물론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르피안. 가서 파티에 동참하도록 하여라.”

“알겠사옵니다, 아바마마.”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이가 적당한 남식이 있는 암컷이나 수컷이라면 어떻게든 
공주인 그녀를 자신의 아들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할 게 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 틈에 자리를 잡은 아르케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단상 위를 바라본다.

“저 아이가 벌써 18세가 되었네. 세월은 참 빠르기도 하구나.”

“공주를 알고 있나?”

“이 나라에서 나르피안 공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걸?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총명함과
미모로 전 국민적인 기대와 사랑을 독차지해왔으니까.”

“살아볼만한 인생이군.”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블론드를 허리까지 기른 나르피안 공주가 호위기사의 손등을
잡고 조심스럽게 단상 아래로 내려온다. 그 모습을 본 장내의 모든 인간 암수들은 
박수를 치며 그녀를 맞이했다.

“그럼, 파티를 즐깁시다!”

자신의 딸이 단상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코르서스 3세는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술잔을 높이 들며 건배를 했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의 빛이 크리스탈에 반사되자, 
신비한 오색의 섬광이 연회장 전부를 비추는 것 같았다.

“아, 그런데 레이지.”

“응?”

주위의 이목을 살핀 아르케가 아무래도 안 되겠던지, 나의 귀에 자신의 입을 가까이
가져온다.

“지금까지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말이야. 너... 그 촉수는 괜찮은 거야? 여긴 온통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 투성이잖아.”

“안 그래도 아까부터 경련이 오고 있는 중이다.”

“엑, 그래도 괜찮겠어?”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이 정도라면 어떻게든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내 
힘이 강해졌다는 뜻이 되겠지.”

이따금씩 근처에 있던 싱싱한 귀족가의 젊은 영애(令愛)가 옷깃을 스쳐올 때면 분명히 
막대한 성욕이 밀려온다. 촉수가 저절로 꿈틀거릴 정도니까. 하지만 이젠 녀석을 억제할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는 생긴 듯 했다.
절제력과도 흡사한... 어떠한 정신적인 힘이라는 것 말이다.

“여어~ 이게 누구야. 그 유명한 페르버시온 양이 아니신가?”

왁자지껄한 가운데, 누군가가 아르케의 성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 짧은 금발의 수컷이었다. 결코 못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필요 이상으로 짙은 쌍꺼풀 때문인지 그의 첫 이미지는 매우 느끼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매우 자신만만하며 유들유들한 태도로 아르케에게 다가왔다.

“여전히 매력적인 입술이구만...”

“...!”

도톰한 아르케의 입술에 대뜸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수컷이었다. 보는 내가
흠칫 놀랄 정도의 과감한 행동.

“.....”

이쯤 되면 상대방의 성기라도 걷어차 줄 아르케였건만, 의외로 그녀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이 손 치우시죠. 벨포드 공(公).”

분명히 얼굴색이 차갑게 변한 그녀였다. 그러나 느끼한 수컷의 어떤 사회적인 배경에
짓눌렸는지, 어투만큼은 공손했다.

“오호라, 그 동안 내숭이 많이 늘었군?”

안하무인이란 딱 이런 것이리라. 대놓고 아르케를 희롱하는 수컷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스스로가 아닌 다른 이의 괴로움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것은 벌써 마음속으로는 그녀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는 
의미일까?
나의 입은 거의 반사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더러운 앞발 치워라, 수컷.”




                                     -To Be Continued-


-----------------------------------------------------------------------------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28.
-------------------------------------------------------------------------         
CHAPTER 5. 대면(對面).
-------------------------------------------------------------------------

연회라던가 친목 도모를 위주로 하는 모임은 보통 저녁때에 그 자리를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국왕 직속의 파티는 뭔가 다른 부분이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침부터 시작해 점심을 넘기는 시점에서 파티의 끝을 맺는다고 한다.
의아함이 들기에 가는 도중 이유를 물었더니, 아르케의 대답은 이러했다.

“코르서스 3세는 나이가 많아. 때문에 정통성을 중시하지. 이 가문 저 가문의
피가 섞여서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없거든. 그래서 파티를 아예 낮 시간에 여는 
거야. 밤에 열었다가는 그날로 눈 맞은 귀족 커플들이 교미를 해서 아이를 만들 
테니까.”

“...그렇군.”

정확히 이해가 되는... 아주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다. 나는 주로 질문을, 아르케는 
그에 따른 답변을 하며 걷는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대리석이 깔린 넓은 복도가 점점 좁아지며 결국엔 한 점으로 모이는 웅장한 길이 
나온다. 대리석 길의 최종지점엔 전체를 황금으로 도금해놓은 현관문이 그 근엄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었다.

“호오.”

척 보기에도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거대한 연회실의 문. 그 앞을 지키고 있던 
한 근위기사가 아르케에게 경례를 붙인다.

“조금 늦으셨군요. 페르버시온 양.”

“이 조수 녀석이 말썽을 부려서... 미안해요.”

거기까진 그래도 좋았다. 

“이 웬수!”

괜히 너스레를 떨던 아르케가 갑자기 중지를 구부려 내 이마를 ‘따악’ 소리가
나도록 친 것이다.

“.....”

물론 아프진 않았지만 상당히 어이가 없다. 아르케는 나의 따사로운 눈초리를 애써 
피하며 근위기사에게 손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속으로는 자신의 오버스러운 액션에
대해서 후회를 하고 있겠지?
두터운 콧수염의 끝부분을 다듬어 제법 멋을 부린 티가 흐르는 근위기사가 이제
나라는 녀석의 존재를 확인한 듯싶었다. 헌데 창백한 나의 얼굴을 본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어색하게 변하는 게 아닌가?

“...!”

“제 새로운 조수랍니다.”

그 짧은 사이에 아르케는 잽싸게 나의 손을 낚아채 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인간들의
은근한 화장품이며 향수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난 그 와중에도 궁금증을 풀려 아르케의
어깨를 툭 쳤다.

“저 수컷이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본 이유는 뭐지?”

“쉿, 조용히... 그는 게이야.”

침을 꿀꺽 삼키며 걸음걸이에 속도를 가했다. 왠지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나에게 표적이 된 암컷들의 심정이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

연회장엔 벌써 수많은 인간들이 모여 있었다. 돈은 많은데 하는 일은 없고, 또 놀고는
싶은데 자리가 없어 자중하며 지내던 암컷과 수컷들이 총 출동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대로 내려오는 재물로 호위 호식하며 일생을 사는 것들의 천지로구나. 

“잠시 주목해주길 바라오.” 

실내는 상당히 넓은 직사각형의 형태를 띈 구조였다. 한쪽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과 
함께 높은 단상이 존재했다. 단상 위에는 국왕으로 보이는 노인과 그의 딸로 보이는 
소녀가 나란히 서있었다.
이 많은 인간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진 이유는 바로 국왕의 목소리 때문인 듯 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짐의 파티에 참석한 이 나라의 젊은 피들을 보니, 반갑기 한량
없는 바이오.” 

거의 모든 이가 자신을 주목한다고 느낀 늙은 국왕은 그제서야 나지막한 음성으로
장내의 분위기를 한 번 더 가라앉혔다. 적당히 진중한 음성과 말끄트머리에 남기는 
잔잔한 여운. 단 몇 마디의 문장으로 이 정도의 흡인력이 나온다는 게 대단하다.
역시 한 나라의 리더다운 뭔가 특별한 카리스마랄까... 그런 것이 드래곤인 나에게도 
느껴진다.

“이번에는 올해를 맞이해 18세가 되는 나의 보물... 나르피안 공주도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니... 귀빈들께서는 따뜻하게 맞아주길 바라오. 허허.”

국왕의 입에서 ‘나르피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연회에 참석한 수컷들의 얼굴이
대폭 밝아진다. 이것은 단지 공주라는 직책의 타이틀 때문일까? 아니면 공주 개인의
사람됨이 좋아서 그런 것일까. 물론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르피안. 가서 파티에 동참하도록 하여라.”

“알겠사옵니다, 아바마마.”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이가 적당한 남식이 있는 암컷이나 수컷이라면 어떻게든 
공주인 그녀를 자신의 아들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할 게 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 틈에 자리를 잡은 아르케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단상 위를 바라본다.

“저 아이가 벌써 18세가 되었네. 세월은 참 빠르기도 하구나.”

“공주를 알고 있나?”

“이 나라에서 나르피안 공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걸?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총명함과
미모로 전 국민적인 기대와 사랑을 독차지해왔으니까.”

“살아볼만한 인생이군.”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블론드를 허리까지 기른 나르피안 공주가 호위기사의 손등을
잡고 조심스럽게 단상 아래로 내려온다. 그 모습을 본 장내의 모든 인간 암수들은 
박수를 치며 그녀를 맞이했다.

“그럼, 파티를 즐깁시다!”

자신의 딸이 단상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코르서스 3세는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술잔을 높이 들며 건배를 했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의 빛이 크리스탈에 반사되자, 
신비한 오색의 섬광이 연회장 전부를 비추는 것 같았다.

“아, 그런데 레이지.”

“응?”

주위의 이목을 살핀 아르케가 아무래도 안 되겠던지, 나의 귀에 자신의 입을 가까이
가져온다.

“지금까지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말이야. 너... 그 촉수는 괜찮은 거야? 여긴 온통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 투성이잖아.”

“안 그래도 아까부터 경련이 오고 있는 중이다.”

“엑, 그래도 괜찮겠어?”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이 정도라면 어떻게든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내 
힘이 강해졌다는 뜻이 되겠지.”

이따금씩 근처에 있던 싱싱한 귀족가의 젊은 영애(令愛)가 옷깃을 스쳐올 때면 분명히 
막대한 성욕이 밀려온다. 촉수가 저절로 꿈틀거릴 정도니까. 하지만 이젠 녀석을 억제할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는 생긴 듯 했다.
절제력과도 흡사한... 어떠한 정신적인 힘이라는 것 말이다.

“여어~ 이게 누구야. 그 유명한 페르버시온 양이 아니신가?”

왁자지껄한 가운데, 누군가가 아르케의 성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 짧은 금발의 수컷이었다. 결코 못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필요 이상으로 짙은 쌍꺼풀 때문인지 그의 첫 이미지는 매우 느끼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매우 자신만만하며 유들유들한 태도로 아르케에게 다가왔다.

“여전히 매력적인 입술이구만...”

“...!”

도톰한 아르케의 입술에 대뜸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수컷이었다. 보는 내가
흠칫 놀랄 정도의 과감한 행동.

“.....”

이쯤 되면 상대방의 성기라도 걷어차 줄 아르케였건만, 의외로 그녀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이 손 치우시죠. 벨포드 공(公).”

분명히 얼굴색이 차갑게 변한 그녀였다. 그러나 느끼한 수컷의 어떤 사회적인 배경에
짓눌렸는지, 어투만큼은 공손했다.

“오호라, 그 동안 내숭이 많이 늘었군?”

안하무인이란 딱 이런 것이리라. 대놓고 아르케를 희롱하는 수컷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스스로가 아닌 다른 이의 괴로움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것은 벌써 마음속으로는 그녀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는 
의미일까?
나의 입은 거의 반사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더러운 앞발 치워라, 수컷.”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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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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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대면(對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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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라던가 친목 도모를 위주로 하는 모임은 보통 저녁때에 그 자리를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국왕 직속의 파티는 뭔가 다른 부분이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침부터 시작해 점심을 넘기는 시점에서 파티의 끝을 맺는다고 한다.
의아함이 들기에 가는 도중 이유를 물었더니, 아르케의 대답은 이러했다.

“코르서스 3세는 나이가 많아. 때문에 정통성을 중시하지. 이 가문 저 가문의
피가 섞여서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없거든. 그래서 파티를 아예 낮 시간에 여는 
거야. 밤에 열었다가는 그날로 눈 맞은 귀족 커플들이 교미를 해서 아이를 만들 
테니까.”

“...그렇군.”

정확히 이해가 되는... 아주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다. 나는 주로 질문을, 아르케는 
그에 따른 답변을 하며 걷는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대리석이 깔린 넓은 복도가 점점 좁아지며 결국엔 한 점으로 모이는 웅장한 길이 
나온다. 대리석 길의 최종지점엔 전체를 황금으로 도금해놓은 현관문이 그 근엄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었다.

“호오.”

척 보기에도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거대한 연회실의 문. 그 앞을 지키고 있던 
한 근위기사가 아르케에게 경례를 붙인다.

“조금 늦으셨군요. 페르버시온 양.”

“이 조수 녀석이 말썽을 부려서... 미안해요.”

거기까진 그래도 좋았다. 

“이 웬수!”

괜히 너스레를 떨던 아르케가 갑자기 중지를 구부려 내 이마를 ‘따악’ 소리가
나도록 친 것이다.

“.....”

물론 아프진 않았지만 상당히 어이가 없다. 아르케는 나의 따사로운 눈초리를 애써 
피하며 근위기사에게 손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속으로는 자신의 오버스러운 액션에
대해서 후회를 하고 있겠지?
두터운 콧수염의 끝부분을 다듬어 제법 멋을 부린 티가 흐르는 근위기사가 이제
나라는 녀석의 존재를 확인한 듯싶었다. 헌데 창백한 나의 얼굴을 본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어색하게 변하는 게 아닌가?

“...!”

“제 새로운 조수랍니다.”

그 짧은 사이에 아르케는 잽싸게 나의 손을 낚아채 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인간들의
은근한 화장품이며 향수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난 그 와중에도 궁금증을 풀려 아르케의
어깨를 툭 쳤다.

“저 수컷이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본 이유는 뭐지?”

“쉿, 조용히... 그는 게이야.”

침을 꿀꺽 삼키며 걸음걸이에 속도를 가했다. 왠지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나에게 표적이 된 암컷들의 심정이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

연회장엔 벌써 수많은 인간들이 모여 있었다. 돈은 많은데 하는 일은 없고, 또 놀고는
싶은데 자리가 없어 자중하며 지내던 암컷과 수컷들이 총 출동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대로 내려오는 재물로 호위 호식하며 일생을 사는 것들의 천지로구나. 

“잠시 주목해주길 바라오.” 

실내는 상당히 넓은 직사각형의 형태를 띈 구조였다. 한쪽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과 
함께 높은 단상이 존재했다. 단상 위에는 국왕으로 보이는 노인과 그의 딸로 보이는 
소녀가 나란히 서있었다.
이 많은 인간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진 이유는 바로 국왕의 목소리 때문인 듯 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짐의 파티에 참석한 이 나라의 젊은 피들을 보니, 반갑기 한량
없는 바이오.” 

거의 모든 이가 자신을 주목한다고 느낀 늙은 국왕은 그제서야 나지막한 음성으로
장내의 분위기를 한 번 더 가라앉혔다. 적당히 진중한 음성과 말끄트머리에 남기는 
잔잔한 여운. 단 몇 마디의 문장으로 이 정도의 흡인력이 나온다는 게 대단하다.
역시 한 나라의 리더다운 뭔가 특별한 카리스마랄까... 그런 것이 드래곤인 나에게도 
느껴진다.

“이번에는 올해를 맞이해 18세가 되는 나의 보물... 나르피안 공주도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니... 귀빈들께서는 따뜻하게 맞아주길 바라오. 허허.”

국왕의 입에서 ‘나르피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연회에 참석한 수컷들의 얼굴이
대폭 밝아진다. 이것은 단지 공주라는 직책의 타이틀 때문일까? 아니면 공주 개인의
사람됨이 좋아서 그런 것일까. 물론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르피안. 가서 파티에 동참하도록 하여라.”

“알겠사옵니다, 아바마마.”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이가 적당한 남식이 있는 암컷이나 수컷이라면 어떻게든 
공주인 그녀를 자신의 아들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할 게 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 틈에 자리를 잡은 아르케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단상 위를 바라본다.

“저 아이가 벌써 18세가 되었네. 세월은 참 빠르기도 하구나.”

“공주를 알고 있나?”

“이 나라에서 나르피안 공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걸?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총명함과
미모로 전 국민적인 기대와 사랑을 독차지해왔으니까.”

“살아볼만한 인생이군.”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블론드를 허리까지 기른 나르피안 공주가 호위기사의 손등을
잡고 조심스럽게 단상 아래로 내려온다. 그 모습을 본 장내의 모든 인간 암수들은 
박수를 치며 그녀를 맞이했다.

“그럼, 파티를 즐깁시다!”

자신의 딸이 단상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코르서스 3세는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술잔을 높이 들며 건배를 했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의 빛이 크리스탈에 반사되자, 
신비한 오색의 섬광이 연회장 전부를 비추는 것 같았다.

“아, 그런데 레이지.”

“응?”

주위의 이목을 살핀 아르케가 아무래도 안 되겠던지, 나의 귀에 자신의 입을 가까이
가져온다.

“지금까지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말이야. 너... 그 촉수는 괜찮은 거야? 여긴 온통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 투성이잖아.”

“안 그래도 아까부터 경련이 오고 있는 중이다.”

“엑, 그래도 괜찮겠어?”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이 정도라면 어떻게든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내 
힘이 강해졌다는 뜻이 되겠지.”

이따금씩 근처에 있던 싱싱한 귀족가의 젊은 영애(令愛)가 옷깃을 스쳐올 때면 분명히 
막대한 성욕이 밀려온다. 촉수가 저절로 꿈틀거릴 정도니까. 하지만 이젠 녀석을 억제할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는 생긴 듯 했다.
절제력과도 흡사한... 어떠한 정신적인 힘이라는 것 말이다.

“여어~ 이게 누구야. 그 유명한 페르버시온 양이 아니신가?”

왁자지껄한 가운데, 누군가가 아르케의 성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 짧은 금발의 수컷이었다. 결코 못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필요 이상으로 짙은 쌍꺼풀 때문인지 그의 첫 이미지는 매우 느끼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매우 자신만만하며 유들유들한 태도로 아르케에게 다가왔다.

“여전히 매력적인 입술이구만...”

“...!”

도톰한 아르케의 입술에 대뜸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수컷이었다. 보는 내가
흠칫 놀랄 정도의 과감한 행동.

“.....”

이쯤 되면 상대방의 성기라도 걷어차 줄 아르케였건만, 의외로 그녀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이 손 치우시죠. 벨포드 공(公).”

분명히 얼굴색이 차갑게 변한 그녀였다. 그러나 느끼한 수컷의 어떤 사회적인 배경에
짓눌렸는지, 어투만큼은 공손했다.

“오호라, 그 동안 내숭이 많이 늘었군?”

안하무인이란 딱 이런 것이리라. 대놓고 아르케를 희롱하는 수컷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스스로가 아닌 다른 이의 괴로움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것은 벌써 마음속으로는 그녀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는 
의미일까?
나의 입은 거의 반사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더러운 앞발 치워라, 수컷.”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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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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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대면(對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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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랭한 표정이었던 아르케의 표정이 180도 회전한다. 놀라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얼굴. 벨포드라 불리어진 수컷은 눈살을 찌푸리며 의혹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혹시... 방금 전의 그것은 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가?”

“평소에 손을 잘 씻고 다니는 수컷이라면 그런 말에 발이 저리지는 않겠지.”

느끼한 수컷의 얼굴은 멍한 눈초리로 나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하는 기색이다. 이런 작은 반발에도 적응을 잘 못하는 걸로 미루어 보아서는
녀석의 권세가 얼마나 기세등등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간이 부은 모양이군...?”

“네놈에게 비하면 작은 편이다.”  

이쯤 되니, 당황을 해서 허둥대는 쪽은 오히려 아르케였다. 그녀가 나에게 그만 
두라는 손짓을 했지만 나 역시도 이미 뚜껑이 열린 상태라... 도중에 멈출 수가 
없었다.
전체적으로 화기애애한 파티의 분위기와는 정 반대, 나와 수컷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동안 대치상태를 이루었다. 

“어, 어느 가문의 녀석이냐! 이름을 대라.”

자신에게 조금의 물러섬도 없는 나를 보며, 수컷은 한쪽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안면에 경련이 이는 모양이다.

“그게 왜 중요하지? 네가 속한 집안의 위세로서 나를 깔아뭉개기라도 할 생각인가?
그렇다면 매우 실망스럽군.”
  
“닥쳐라...! 그런 식의 모욕은 용납지 않는다.”

궁중악단의 음악소리는 다행히 우리의 격한 대화를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그가 격정으로 인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하얀색의 장갑 한쪽을 벗는다. 질 좋은 
실크 장갑이 미끄러지듯 수컷의 손에서 이탈했다. 어디서 본적은 있는지, 아마도
그는 결투의 의식을 감행하려는 듯 보였다.

“네놈에게 결투를 신청한...”

“어이쿠, 이게 누구야! 벨포트님 아니신가?” 

수컷이 벗어낸 장갑으로 마악 나의 뺨을 후려갈기려는 찰나, 어느 커다란 덩치가
내 앞을 가로 막는 게 아닌가? 마악 장갑을 피할 생각을 하고 있던 나로서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덩치의 정체를 확인한 벨포드의 인상이 일그러진다. 그와 반대로 아르케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윽... 체스티드 공?”

“혹시나 해서 와봤더니 정말 당신이었군! 그래, 어디 마음에 드는 레이디는 
찾았소이까?” 

카이런이었구나. 한 손에 커다란 와인 잔을 든 그는 짐짓 과장된 몸짓으로 벨포드에게
가벼운 포옹을 했다. 물론 결투 신청을 위해 장갑을 벗은 벨포드라는 수컷으로서는 그가 
달갑게 느껴질리 없는 노릇이다.
  
“지금 그런 한가한 말을 할 때가 아니오, 카이런! 저 근본도 없는 꼬마가 감히 날...”

“자자, 술이 있는 곳에 여자가 없으면 말이 안 되지. 우리 저쪽으로 가서 놉시다.
꽃다운 레이디들이 바글바글한 곳을 놔두고 이곳에서 무슨 풍월이요?”

벨포드가 반항을 하려 했지만, 지금 그에게 힘을 가하는 자가 누구인가. 120kg이 넘는 
거구를 지닌 카이런이 아닌가. 영락없이 독수리에게 덜미를 잡힌 새끼양의 모습이었다.

“으윽.”

수컷은 카이런의 강인한 팔뚝에 억지로 이끌려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카이런은
살짝 고개를 돌려 나와 아르케에게 윙크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느끼한 수컷이 시야에서 멀리 사라진 것을 확인한 아르케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지, 저놈은 후작가의 장남이란 말이야...! 너무 무모했어.”

“글쎄... 오히려 드래곤에게 무모하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서 내뱉을 수 있는 자신이 
무모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인간 세상에 발을 붙일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녀석이 한 행동치고는 분명 그녀의 말대로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가 너무 어렵다. 드래곤인 내가... 육체적인
강함도 아닌, 단순한 인간의 권력에 굴복해야 하다니!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바보.”

“.....”

성을 내는 듯싶더니만, 갑작스럽게 장난스러운 태도로 바뀌며 혀를 날름 내미는 아르케.
그녀의 변화무쌍한 얼굴에는 그만 할말을 잃고야 말았다.

“자신의 레이디인 나를 지켜주려는 그 의도만큼은 높이 사겠어요, 기사님. 후훗.”

“...놀리지 마.”

얼굴이 붉어졌음을 스스로 느꼈다. 젠장, 왠지 굉장히 낯이 뜨겁다. 나는 그녀에게
이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여러 가지로 곤란하게 만드는
여자로군.

“어머, 레이지. 공주가 이쪽으로 올 것 같은데?”

아르케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단상에서 내려온 공주 주변으로 사람들의 원이 
주르륵 생겨나는 신기한 광경이 들어온다. 인간들은 공주를 둘러싸며 자신의 안면을
각인시키려 노력하느라 정신이 없는 듯 했다.
녹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공주의 곁에는, 인간미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수컷이 동행하고 있었다. 아르케가 나의 귀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며
속삭여온다.

“나르피안 공주의 옆에 꼭 붙어있는 남자가 바로 그녀의 호위기사야. 본명은
모르겠고... 칼립소라는 가명을 쓰더라고.”

“알려줘서 고맙긴 한데... 귓가에 숨을 불어넣는 행위는 참아줬으면 좋겠군.”

아르케의 부연설명은 없었지만, 척 보기에도 그의 강함이 느껴진다. 수컷의 감정 없는 
두 눈이 향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나르피안 공주가 존재하고 있었다. 지켜야 할 대상의
위협에 대해 어느 상황에도 대처가 유연한 각도를 유지하며 걷는 듯 보인다.

“.....”

그들에게 약간의 호기심이 들긴 했지만 역시 나와는 상관없는 인간들이다. 공주고
뭐고 일단은 나와 이야기 한마디 나눌 인간들이 아니니까. 슬슬 이 장소에 대해서
갑갑함을 느낀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아르케를 바라보았다.

“이봐, 아르케. 적당히 얼굴을 익혀둘 사람이나 찍어줘. 네 조수라고 밝힌
뒤에 적당히 이곳을 떠나고 싶으니까.”

“.....”

나의 물음에 아르케는 묵묵부답(??不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그녀의 눈동자는 내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어이? 왜 말이 없...”

“공주님을 뵙습니다.”

아르케가 갑자기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며 뜬금없이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

“반가워요, 페르버시온 경. 그대는 여전히 아름답군요.”

그리고 뒤쪽에서 들려오는 또박또박하고 낭창한 음성. 나는 그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고개를 맞은편으로 돌릴 수 있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공주님이야말로 해가 다르게 그 미모에 꽃이 피는 듯 하옵니다.”

윽, 어느새 공주가 다가와서 아르케에게 인사를 건낸 것이다. 이건 절대로 예상치 못한
일이다. 게다가 일국의 공주를 대하는 것은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 할 수밖에 없었다. 
난 어정쩡한 표정으로 아르케를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러다가는 둘의 대화에
껴서 죽도 밥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르피안 공주의 시선이 아르케를 거쳐 나에게로 향하기 시작한다.

“옆의 신사 분은... 누구신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이번에 저의 조수로 들어온 청년이옵니다.”

지금 상황에서 나르피안 공주와 대화를 하는 이는 분명히 아르케였지만, 공주의 달빛 
눈동자는 아르케가 아닌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사람의 본성을 꿰뚫기라도
할 것처럼 깊은 눈빛이다. 고작 18살의 어린 소녀가 풍기는 분위기라 하기엔 너무나
신비로운 구석이 있었다.
아르케는 나의 등짝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신호를 보내왔다.

“레, 레이지라고 하옵니다.”

크게 당황한 나는 어색한 자세로 고개만을 숙여 목례를 했다. 

“처음 뵙는군요. 저는 나르피안이에요.”

공주의 화답으로 통성명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희디 흰 손등을 
갑작스럽게 나에게로 내미는 것이 아닌가!

“...아.”

이 모습을 본 주위의 모든 이들이 깜짝 놀라는 것이 느껴진다. 심지어는 마치 차가운 
석상과도 같은 이미지를 풍기던 칼립소라는 수컷마저도 눈가를 ‘움찔’하며 당황할 
정도였으니까. 아르케는 뭐 말할 것도 없이 눈이 휘둥그레진다.

“.....”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조심스럽게 공주의 손등에 입을 가져갔다. 주위에서는 질투와
시기, 혹은 순수한 감탄에서 나오는 탄성이 들려온다.

-두근.

그녀의 솜털 하나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손등이 눈앞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기분이다.

-두근.

입술에 거의 닿을 듯 가까워진 나르피안 공주의 손등. 가느다란 핏줄이 살짝 투영되는 
기가 막히게 고운 피부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순간적으로 어떤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

지금껏 잘 제어하고 있던 촉수가 갑작스럽게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아무도 눈치 채지는 못했지만, 소유자인 나로서는 촉수의 강렬한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커다란 경련을 동반하며 촉수로부터 물밀 듯 밀려오는 이 성적 욕구란...!

“...레이지?”

불안한 듯한 아르케의 음성. 그와 동시에, 지금 상황에서 더 이상 촉수를 제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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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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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대면(對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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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이 바짝 마르고 안구가 더럽게도 아프다. 지금까지 잘 참아왔는데, 이번에 닥쳐온
촉수의 반발력은 나의 모든 것을 날려버리기라도 할 듯 강력한 것이었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크윽.”

“레이지 경?”

나르피안 공주의 맑은 음성. 청아한의 대명사로 쓰일 정도의 목소리였지만, 나의 귀에는 
창부의 유혹보다 훨씬 색정적으로 들려온다. 정말 창부라면 다행이지... 그녀는 일국의
하나뿐인 고귀한 공주였다.

“.....”

안 그래도 나를 주시하던 칼립소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허리에 찬 검에
조용히 손을 가져가기에 이르렀다. 마치 여자의 그것과도 같은 섬세한 손가락이 살의를
품은 채 검의 가드를 만지작거린다. 물론 이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도 그것을 눈치 챈 
사람은 나나 아르케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다가는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실례를...”

여성에 대한... 정확히는 나르피안 공주의 육체에 대한, 끔찍할 정도의 목마름에 
치를 떨며 한 단어를 뱉어낸다. 

“...?”

그리고는 공주의 반응을 보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렸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심이었다. 이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보고 체취를 맡고 있다가는
참지 못하고 덮칠 게 뻔하니까.

“레이지 경?”

욕정의 구덩이에 이성이 먹혀버리기 직전, 나는 이리저리 사람들을 밀치며 냅다
연회장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얏, 조심해요.”

뛰는 도중 실수로 어느 젊은 암컷의 드레스를 밟은 것 같다. 그렇게 교태롭고 내숭 
섞인 음성을 내지 마라, 암컷아. 공주의 대용품으로 네년을 끔찍할 정도로 유린해버리고 
싶어지니까. 
미약하게만 느껴지던 암컷들의 사향(麝香)이 촉수의 제어가 풀리자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깊게 들이마셔진다. 그러는 도중에 다른 암컷의 드러난 어깨를 실수로 건드리고 말았다.

“무례한...!”

그렇게 인간들과 두어 번을 더 부딪치고 나서야 연회장을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크윽.”

일단 무사히 한 고비는 넘겼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작금의 사태가 완전히 끝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르피안이라는 여체에 성욕을 느끼고 흥분을 시작한 촉수가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젠장!”

마치 흡혈의 욕구와도 비슷한 암컷의 육체에 대한 갈망! 이를 악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몸부림치는 촉수를 제어하랴, 사방을 둘러보랴...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

“!”

히번뜩 거리며 사냥감을 찾던 나의 시야에 어느 암컷이 포착되었다. 복도의 구석에 위치한
화단에 물을 주고 있는 궁정 하녀의 모습이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높은 것들의 취향에 
맞춘 건지, 그 암컷은 매우 짧아서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검은색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난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된 채로 메이드(Maid)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

인기척을 느낀 암컷이 화단에 물을 뿌리다 말고 나를 돌아본다. 깔끔한 정장 차림을
확인한 암컷의 얼굴에 접대용의 미소가 떠오른다.

“따로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 지요?”

“암컷.”

“...예?”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재빠르게 암컷의 입을 짓누른다. 일단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는데 성공을 거둔 나는 그녀의 몸을 뒤쪽에서 껴안았다. 
카이런 정도라면 모를까, 나약한 인간의 육체로는 절대로 풀지 못한다.

“으읍!”

하녀의 통통한 육체가 전신으로 느껴지는 기분이다. 크게 놀라서 눈동자만을 이리저리
굴리는 암컷을 품에 안고서 벽 쪽으로 몸을 날렸다. 벽에 충돌하기 직전, 다리를 움직여 
박차를 밟는다. 5m 높이의 매끄러운 벽면을 순식간에 달려서 올라온 것이다.
벽의 최 상단에는 횃불을 올려놓는 적당한 크기의 받침대가 있었다. 

“...음.”

난 주저 없이 몸을 회전하며 그곳으로 방향을 돌렸다. ‘터억’ 하는 발 디딤 소리와
함께 약간의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린다. 받침대가 좁긴 했지만 인간 두 명이 딱 붙어서
앉아있을 만큼의 자리는 있었다.

“.....”

뒤쪽에서부터 하녀의 입을 봉한 채로 방금 전까지 서있던 복도를 내려다보았다. 누군가가 
있었나를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아마 나에게 붙들린 이 암컷 역시 복도를 내려다보며 
자신을 구출할 누군가를 찾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는 도중, 암컷의 몸이 갑작스럽게 요동을 친다. 자신의 입을 틀어
막은 나의 손아귀를 찢어져라 물기도 했다.

“읍!”

왜 이러나 했더니, 아까의 근위기사가 연회장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를 보고 이렇게 날뛰는 거구나. 어떻게든 소리를 발생시켜 자신의 위치를 알리려고...
나로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에게 들켰을 테니까.

“으으읍...!”

느긋한 근위기사의 모습에, 하녀는 두 번째의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악을 써봐야 드래곤인 나를 벗어날 수는 없다.

“.....”

오늘 정오에, 자신의 바로 위에서 절실한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는 암컷이 있었다는 사실은
꿈에서도 모를 것이다. 그렇게 복도의 구석구석을 확인 한 후... 근위기사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나 아닌 누군가를 배려할 기분이 아니다.”

연회장의 거대한 문이 닫히고,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녀의 치마를 뒤쪽에서 
올려붙였다. 공포로 인해 파르르 떨리는 통통한 허벅지와 흰 보름달 같은 엉덩이가 눈에
가득 들어온다. 자유로운 왼쪽 손을 움직여서 암컷의 얇은 하얀색 속옷을 바로 찢어냈다.

“읍읍!”

자신의 은밀한 곳이 공기 중에 노출되자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버린 그녀였다. 암컷의 
수치심이 거의 나에게도 전해져올 지경이다. 왠지 어릴 적, 케이지 안에서 비참하게
버둥거리던 나의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크읏.”

턱시도의 바지 후크를 대충 끌러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미는 세 가닥의
촉수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촉수가 바지를 찢고서 튀어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뜨겁게 달아오른 촉수를 그녀의 뒤쪽에서 질구에 그대로 우겨 
넣었다. 

“학!”

안타깝게도, 지금은 상대방을 배려할 여유 따윈 없었다. 하복부가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몸서리를 치는 그녀. 인간의 힘을 초월한 강인한 손아귀가 입을 막고 있어서
차마 비명을 내지르지는 못한다. 단지 고통을 안으로 갈무리할 뿐...
이따금씩 아래의 복도로 지나다니는 인간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이 참상을 눈치 채는
자가 없었다. 

“크으으.”

한 명은 즐겁고, 다른 한 명은 죽어간다. 공통점이 있다면... 눈이 향하는 장소랄까?
각기 다른 의도였지만, 두 명이 복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똑같았던 것이다.

“.....”

그렇게 과격한 페이스로 얼마간을 움직였을까, 몸 안의 뭔가가 폭발할 듯한 느낌이 든다.
격렬한 유린 끝에 드디어 사정의 시기가 온 것이다. 하녀의 통통한 육체는 이미 축 늘어져
있었다. 얼굴이 안보이니 생사의 유무까지는 알 수가 없다.

“크으윽.”

암컷의 몸 안에 그대로 분출해버렸다. 엉덩이를 하늘로 들고 바닥에 엎드린 그녀의
허리에 기대어 잠시 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녀는 일을 치루는 도중에 이미 
절명(絶命)한 것 같았다.
검붉은 피가 암컷의 안면으로부터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변화는... 없나.”

촉수가 암컷의 체액을 흡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몸의 변화가 없다. 분명히
기분이 상쾌해지거나 피곤이 가시는 듯한 느낌은 있는데... 눈에 띄는 신체의 변화까지는
없는 것이다. 중간에 암컷이 죽어서 그러나? 촉수를 견딜 수 있는 인간과 견딜 수 없는
인간의 차이인 듯 보였다.
아마 보통의 나약한 암컷으로는 더 이상 강해지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끌었군.”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나는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하녀의 몸뚱아리를 그대로 방치해놓고
조용히 복도 바닥에 착지했다. 시신이 썩어서 문드러지기 전에는 궁정 청소부 따위가 
알아서 발견을 하겠지... 지금 중요한 건 홀로 남겨진 아르케가 나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

후각을 자극하는 옅은 혈향을 느끼며, 다시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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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퀴들 붕가 나올 타이밍은 기가 막히게 캐치하는구나 낄낄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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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대면(對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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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내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을 때, 내심 걱정을 했던 아르케는 다행히 아무런 일도
없는 듯싶었다. 그녀는 여느 귀족들과 와인을 즐기며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나에 대한 이런 저런 최소한의 핑계를 대느라 고생했을 그녀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군.
주로 젊은 암컷들을 상대로 가벼운 미소를 띤 채 대화를 나누는 그녀에게로 향했다.

“...여어.”

“아, 왔구나.”

군데군데 모양새가 흐트러진 나의 정장을 보고 대략적인 정황을 파악했는지, 그녀는 
어색한 웃음으로 나를 반겼다. 인간의 옷이란 역시 불편하다. 바람과 비를 막아준다거나
치부를 가리는 용도 이상으로 쓰이는 인간의 의복... 아직은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대충 옷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낸다.

“흐음.”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수많은 암컷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향했다. 아르케는
그 호기심 넘치는 시선들에 동조라도 해주듯, 암컷들 앞으로 나를 떠밀었다.

“소개시켜드리죠. 이번에 제 수석 조수가 된 레이지라고 합니다.”

알코올이 들어가긴 했군. 아르케의 행동에서 약간의 과장됨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술은 인간의 조심성을 낮추는구나.
암컷중의 하나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머, 이렇게 수려한 외모를 가지신 분이 겨우 조수예요?”

“네크로맨서의 능력은 외모 순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니까요. 후훗.”

뭐가 그리도 좋은지 별거 아닌 농담에 까르르 웃는 그녀들이었다. 괜히 나까지 웃음을
보여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
곱상하게 생긴 암컷들의 뺨에는 하나같이 술기운이 돌아 발그레한 홍조를 그리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지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우리는 언제나 미남을 환영하지요. 호홋.”

어찌 보면 귀족의 입에서 나오는 것 치고는 다분히 천박한 게 아니냐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화려한 외모 때문인지, 아니면 이 연회장이라는 장소가 
형성하는 분위기 때문인지 그다지 어색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알코올이겠지.

“...그대는 정말 잘생겼군요.”

난 예닐곱 명이나 되는 암컷들의 손등에 일일이 입을 맞추어야만 했다. 다들 아까의
광경을 보기라도 했는지, 자신의 손등을 나에게 들이민 것이다. 이것들이 전부 공주
증후군에라도 걸린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영광입니다, 레이디.”

다섯 명 째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데, 묘하게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기분이 든다.
누군가가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는 
나르피안 공주가 역시 수많은 인파 속에 둘러싸인 채로 나를 힐끗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별 상관이 없지만, 문제는 공주 바로 뒤에 서서 역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칼립소라는 녀석에게 있다.

“...아아.”

나와 눈이 마주친 것을 확인한 나르피안 공주가 눈매를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짓는다.
분명히 아름다웠고,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도발적인 매력을 느낀 나는 그녀로부터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사실은 칼립소라는 수컷이 마음에 걸려서이기도 하다.

“레이지 공, 나이는 어떻게 되지요?”

눈치 없는 여섯 번째 암컷의 질문. 그때에는 이미 거기에 대답할 마음의 여유조차 사라진 
뒤였다. 뒤통수로부터는 계속 따끔 따끔한 시선을 느끼며, 아르케에게 입 모양만으로 
질문을 한다.

‘아르케, 공주가 지금 뭘 하고 있지?’

‘...아무래도 슬슬 네 쪽으로 오는 중인 거 같아.’

아르케의 입 모양은 나에게 한 층 강한 긴박감을 안겨다 주었다. 망할 암컷, 공주!
초면인 네크로맨서의 조수에게 무슨 관심이 그리도 많은 건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방법이 없다. 딱 보니 아직까지도 순결을 간직한 처녀인 것 같은데... 어째서 이런
나에게 관심을 표명하는 것인가?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공주의 인기척은 바로 뒤까지 오기에 이르렀다.

“저...”

“레이지. 너 가서 빨래해야지.”

조심스러운 공주의 음성을 끊으며, 아르케가 뜬금없이 내게 던진 말이었다. 그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내용이야 어쨌든 그녀로서는 나를 도와주려는 의도인 게 분명했다. 

“...아, 맞아.”

이제껏 깜박 잊고 있던 것이 지금 막 생각났다는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귀족가의 
레이디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뒤쪽에서는 공주의 머뭇거림이 그대로 느껴진다. 자신의 말이 끊겼다는
당혹스러움과 함께 다시 한 번 말을 걸어볼까 하는 갈등이 말이다. 
공주는 생각 외로 용감했다.

“레이지 경?”

“그럼 소인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밀린 빨래가 많아서...”

무슨 말을 대충 주워섬기는지 스스로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난 공주의 부름을 듣지 
못한 척 연기를 하며 도망치듯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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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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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대면(對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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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장을 중간에 빠져나오니 해는 아직도 중천에 떠있는 중이었다. 이 벌건 대낮에 
저 거대한 홀 안에서는 일반인들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노는데 시간이 무슨 상관이 있겠냐마는, 나라의 민초(民草)들은
한참 땀 흘리며 밭을 갈 때에 귀족들이 신나게 즐기는 광경이란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긴 성도를 지나 성문으로 향한다.

“아. 벌써 가십니까?”

“할 일이 있어서... 실례하겠소.”

아침에 따로 인사를 해서인지,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은 내가 아르케의 조수란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난 그들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성문을 빠져나왔다. 인간 사회에서
인맥이 무시 못 할 요소라는데... 그 말이 조금은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

쾌적한 대로변을 혼자서 자유롭게 걷고 있으려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내가
지금 몸을 담고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보호자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나.”

지극히 어렴풋하게 드는 생각이었지만 일부러 입을 열어 내뱉는다. 마치 자신이 아닌 남을
보며 하는 말인 것 마냥.
하지만 뇌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이 너무도 쉽게 내려진다. 사실... 그들이 나를
구속하는 것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무료 숙식은 기본이요, 강해지도록 
단련까지 시켜주니... 이런 호사를 포기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르케라는 암컷을 배신한다는 것도 달갑지 않고 말이지.

‘나는 의외로 무른 녀석이었군.’

숙소로 돌아온 뒤 푹신한 쇼파에 앉아 빈둥거리며 아르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것 말고는 딱히 할일이 없었으니까. 따로 누군가의 지시가 있는 것도 아니요, 
스스로 뭔가를 이루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으니까. 마치 생각이라는 것을 상실한
잉어가 된 기분이었다.

“.....”

검을 휘두르는 건 저녁에 할 생각이다. 잠을 별로 못 잔 대다가 기분도 영 그렇고... 
여러모로 피곤한 하루였다.
아르케는 해가 채 지기도 전에 실험실로 돌아왔다. 이제 슬슬 하늘에 불그스름한 노을이 
지려고 하는데 잔치판을 깨다니 말이야. 자제력이 무지하게 강한 인간들이라고 칭찬할 만
했다. 아니, 국왕의 권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말도 되겠군.

“아아, 먼저 가길 잘했어 레이지.”

술기운이 도는지 약간 비틀거리는 모습이다. 완전히 맛이 간 정도는 아니고, 적당히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아보였다.

“공주가 뭐라고 하던가?”

“공주는 그렇다 치고... 칼립소의 표정이 좋지 않았어. 아마 네가 그 자리에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에게 암살을 당했을지도 몰라.”

아르케는 드레스의 쓸데없이 화려한 장식들과 자신의 틀어 올린 머리를 원래대로 풀었다.
구두를 벗고 편하게 카펫에 앉으며 드러나는 그녀의 매끈한 다리가 내 눈을 유혹한다. 

“.....” 

유혹에 이끌리는 것도 잠시, 칼립소라는 수컷을 뇌리에 떠올리니 왠지 전신에 오한이 오는
기분이 든다. 평범한 인간들과는 뭔가 굉장히 이질적인 분위기. 카이런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인간을 초월한 녀석이 아닐까 한다. 
아르케가 돌아오고 긴장이 풀리니, 곧바로 피로감이 밀려온다. 난 눈가를 비비며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졸립군. 잠시 잠을 청하도록 하겠다.”

“엇쭈, 지금 누가 그대의 휴식을 허락한 거지?”

마치 ‘어딜 감히!’라고 외치는 듯한 표정의 아르케였다. 평소 같았으면 웃음이 
나왔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네 장난을 받아주기엔 너무 피곤한 상태다.”

“나야말로! 오늘은 어영부영 넘어갈 생각일랑 하지도 않는 게 좋을 거야.”

아르케가 긴 머리를 귀찮다는 듯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휘청거리며 내게로
다가오는 그녀.
나는 쇼파에 앉은 상태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영부영 넘어가지 말라는 건 무슨 뜻이지?”

“그건, 훗. 이 누님이 오늘은 술을 좀 마셨거든.”

반쯤 풀린 눈으로 다짜고짜 입을 맞춰오는 아르케였다. 입과 입이 맞닿는 느낌은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아르케는 그렇게 잠깐 동안 입술을 부비다가 자신의 혀를 내밀었다. 그녀의 말랑말랑하고
축축한 혀가 타액을 머금은 채 입안으로 들어온다.

“으음.”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별다른 반항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깊은 키스로 
화답을 해주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키스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어서 할 줄도 모르거니와, 그다지 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취했군.”

난 바짝 붙은 상태인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이럴 때는 상당히 곤혹스럽단
말씀이야.

“지금 취한 거랑 무슨 상관이야? 레이지, 너 말이야. 그 사형수를 레이프(rape)하고나서
꽤나 강해진 것 같은데... 맞지? 게다가 나는 지금 술기운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란 말이야. 이 정도 핸디캡이면 충분히 촉수가 힘을 쓸 거라고 생각해. 
네 생각은 어때?”

“.....”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형수를 범한 후에 큰 성장이
있었던 건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녀의 정신과 행동이 술로 인해 흔들리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수에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뭐야 대체! 왜 말이 없어? 대답할 가치도 없다 이거야? 아니면 내가 그렇게 성적 매력이
부족한 여자로 보이는 건가?”

“...미안. 아까 쌌어.”

순간 실험실 안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듯 했다. 별거 아닌 걸로 한참이나 열을 내며
외치던 아르케는 허탈한 표정으로 내 가슴에 풀썩 엎어졌다. 가벼운 그녀의 체중이
느껴진다. 덕분에 내 몸은 푹신한 쇼파의 쿠션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가슴팍이 간지러운 게, 아르케가 뭔가 말을 하려 입술을 움직이는 모양이다. 

“진작 말을 하지.”

실의에 빠진 그녀는 나름대로 피곤했던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나의 뺨을 간질거리며 흘러내린다. 

“.....”

나 역시도 심신의 피로를 느끼고 있었기에 조용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을 청했다. 초저녁의 쌀쌀한 기운에 감기라도 걸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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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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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대면(對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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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참 빠르다. 내가 그들에게 포획된 시점으로부터 어느덧 한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은 나를 놀라게 했다. 서커스단에서 탈출한지도 바로 엊그제처럼
가깝게 느껴지는데 말이야. 

“.....”

서커스단에서 노리개로 살았던 때를 생각하면, 이 한 달간은 정말 70년간의 모든 생애와
맞바꿀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배운 것, 느낀 것, 노력한 것, 이룬 것. 
이 모든 행위가 고작 한 달 동안 엄청난 속도의 싸이클로 내 삶 자체를 바꾸어버린 것이다. 
좁은 새장 안에 갇혀서 평생을 살아가는 앵무새들은 이런 상쾌한 기분을 모르겠지?
나의 유쾌한 기분에 화답이라도 하듯,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어이, 대련을 하러 나온 주제에 무슨 잡생각이 그렇게 많은 거야?” 

주먹을 만지작거리며 퉁명스럽게 묻는 카이런. 오늘은 특별히 그에게 직접 검을 배우기로
했다. 배운다고 하기엔 좀 껄끄러운 표현이고... 지도를 받기보다는 대련을 한다는 표현이 
좀 더 올바를 것이다.
바람 때문에 마구 휘날리며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잡생각이라도 안 하다 보면 너처럼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서 그런다.”

“...엿 먹어.”

카이런은 자신의 그 굵은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저 산만한
덩치가 저런 제스쳐를 하니 귀엽게 보일 정도였다. 나의 허기짐을 채워주려는 듯한 그의 
호의(?)에 역시 씨익 웃어보였다.

“엿이라... 고맙군.”

지금 카이런과 내가 서있는 이곳은 건물의 옥상이었다. 리델이 이곳저곳에 얼마나 신경을 
써놨는지 옥상에는 적당한 넓이의 대련 시설마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건물에 입주한지도 한달이 다 되가는데... 아직도 대략적인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군. 충분히 반성할만한 일이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있는 목검을 집어 들었다. 헌데 카이런이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린다.

“그런 장난감은 치워둬. 뒈지기 싫으면 처음부터 진검으로 와라.”

“...원한다면.”

스피드나 파워, 센스 면에서 아무리 인간을 초월했다지만 그의 몸은 어쨌건 간에
인간의 몸이다. 진검에 맞으면 잘리는 것은 당연지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진검을 쓰라는 걸 보면 어지간히 자신감이 있는 모양이다.  
목검은 다시 바닥에 떨구어 놓고 이번에는 허리춤의 검 집에서 빙룡을 꺼낸다. 

-스르릉.

부드럽게 뽑혀 나오는 하얀색의 유려한 검신. 검이 검집에서 뽑혀져 나오는 순간
차디찬 냉기가 느껴졌다. 난 검신에 서린 냉기를 털어내기라도 하듯 허공에 빙룡을 
크게 한 번 휘둘렀다. 검이 지나가며 닿는 부분의 공기가 얼어붙는 느낌이다. 여태 
혼자서 휘두르기만 했지, 이걸 누군가에게 사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겠군.
카이런은 자신의 이마를 긁적이며 손가락으로 빙룡을 가리켰다.

“그 빙룡검이라고 하는 물건은 내가 리델 영감과 동방으로 여행을 갔을 때 거의 죽을 
고생을 하며 얻은 거다. 만약 함부로 다룬다면 빼앗아서 네놈 후장에 처넣어 줄 의향이 
있지.”

“평소에 방 청소를 입으로 하기라도 하는 건가? 인간의 언어를 마스터했다고 생각했지만
네놈의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단어들의 이어짐이란 참으로 신기하구나.”
  
“시끄러워..."

이번에는 자신의 옆구리를 매만지며, 카이런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건 그렇고, 리델 영감의 원래 직업이 연금술사라는 건 모르지?”

“아르케에게 지나가는 투로 들은 적은 있다.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도 있나.”

수준 높은 연금술에, 9써클이라는 경이로운 경지를 이룬 마법... 고작 칠 팔 십년을 
살아가는 인간이 이룬 것치고는 실로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라
치부해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긴 하지.
  
“그 양반이 가끔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 이 말씀이야. 말을 듣기론 네 흉측한 
물건에 관심이 아주 지대한 모양이던데?”

“그야 애초에 나라는 녀석을 실험 재료로 쓰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으니 당연한 게 
아닌가. 그때 아르케가 선수를 치지 않았다면 상황은 달라졌겠지만...”

“글쎄... 내가 보기엔 그런 심리랑은 조금 틀려. 뭔가 집착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런 게 보인단 말이지.”

이 녀석이 지금 나를 걱정해주는 건가? 의외로 진지하게 나를 설득하는 카이런의
태도에 조금은 놀라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원래 이런 섬세한 성향의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을 했는데...

“아르케를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해주는 거다. 자신의 애완견이 죽는 것을 바라는
소녀는 없을 테니까.” 

“.....”

아주 제대로 한 방 먹었군. 그러면 그렇지, 좀 이상하긴 했다. 신전에서 있었던 일의 
복수라면 정말 완벽하게도 치룬 셈이다. 카이런은 스트라이킹 피스트를 착용하지도 않은 채
양 주먹을 마주 부딪친 후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내게 도발을 해왔다.
“잔소리는 여기까지, 닥치고 이리 와라! 난 맨주먹으로 하지.”

“바라던 바. 다시 입원시켜주마.”

옥상 한가운데에서 그와 대치하며 섰다. 대련이라는 명목을 띄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엔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듯 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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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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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대면(對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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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고요하게 흐르던 적막을 먼저 깬 것은 나였다. 둘 사이에 존재하던 3m 정도의 간격을 
순식간에 좁히며 치달린다. 아무리 그가 이룬 성취가 대단하다지만 드래곤인 나의 순수한 
스피드와 힘은 그리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리라.

“차앗.”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다싶은 찰나에 양 손에 쥔 빙룡을 휘둘렀다. 약간의 거짓이나
기교도 없는 정직한 일 검이다. 사실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라, 첫 번째의 공격은 나도
모르게 몸이 반응해서 나온 셈이었다.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카이런의 가슴팍을 향해 쇄도하는 빙룡.

“오오.”

자신의 생각보다 검의 속도가 빨랐는지 그의 눈빛이 달라진다. 사이드 스텝으로 빙룡을
간신히 피해내는 카이런의 육중한 거체. 피하는 도중에 스치며 잘려나간 그의 옷깃이 
순간적으로 허공에 떴으며, 그 작은 천 조각이 바람에 밀려 채 한 바퀴를 돌기도 전에 
카이런의 정권이 가공할만한 속도로 날아왔다.

“크읏.”

오른손으로 빙룡을 바꿔 잡아 자세를 고치며 마치 대포알 같은 펀치를 피해냈다. 
그 짧은 순간에 얼마나 강하게 끊어 쳤는지, 빗맞은 대기에는 ‘우우웅’ 하며 파문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의 동체시력과 순발력이 조금만 떨어졌다면 절대로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거센 반격을 어렵사리 회피한 나는 일단 몇 걸음 물러서서 태세를 정비한 후에 
카이런을 보았다. 다행히 쫓아와서 두 번째 공격을 하지는 않는 그였다. 그래도 조금은 
사정을 봐주는 건가.

“장난이 아닌데?”

“손에 칼을 든 놈이 하는 것 치고는 너무 겸손한 말이군.”

말은 그렇지만 자신의 두 주먹은 잘 다듬어진 견고한 철퇴와 같지 않은가. 스피드라는
측면을 따져보면 오히려 어지간한 검사가 휘두르는 진검보다 훨씬 위력적이다.

“이번엔 내 차례다.”

  입이 다물어지기가 무섭게 달려 들어온다. 기묘한 자세로 첫 걸음을 내딛는 카이런.

-콰지직.

헌데 그의 발이 옥상의 바닥을 딛을 때마다 굉장한 타격음과 함께 견고한 돌바닥에 족적이 
푹푹 패이며 돌가루가 사방으로 날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근거리에서 돌 폭풍을 
생성시키며 다가오는 모습이란 실로 위압적이었다. 상당히 기가 막히는 광경이라 나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리고 말았다. 게다가 그 보폭이라는 것이 이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넓다!

-콰득!

정확히 네 번 발을 울려 바로 앞까지 거리를 맞춘 카이런은 자신이 일으킨 돌가루와 
분진들이 바닥에 채 한 줌도 떨어지기 전에 묵직한 주먹을 뻗어왔다. 느릿느릿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스피드다.

“사보호멸권(四步虎滅拳).”

일단 허리가 돌아가며 어깨가 움직이고 주먹이 나오는데, 그 기세가 얼마나 강맹한지
회오리와 비슷한 작은 돌풍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저런 것을 맞았다가는 바로 죽는다!

“크읏...!”

몸을 반 바퀴나 회전하며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냈다. ‘쐐애액 ’ 하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모골이 다 송연해진다. 하지만 나의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난 게 아니었다.

-콰아앙.

세상에, 한참이나 뒤에 있던 멀쩡한 옥상의 대리석 난간이 허물어진 것이다. 단지 
풍압만으로 이런 결과를 빚어낸 거란 말인가? 가히 경악할만한 위력이었다.
게다가 깨끗하게 피한 줄만 알았던 어깨 부분의 살갗이 뒤늦게 화악 찢어지며 피가 
쏟아진다. 이래가지고서는 피했다는 보람도 없잖아!

“미친!” 

피하고 나서의 거리가 가까웠기에 검의 자루 부분으로 카이런의 턱을 냅다 올려쳤다. 
졸지에 공격을 당한 그는 공격자인 나의 자세가 불안정했던지 턱을 한번 올리는 것으로 
가볍게 데미지를 줄일 수 있었다. 

“...음.”

물론 데미지를 줄였다고는 하지만 이미 인간의 파워를 한참이나 초월한 내가 아니던가. 
턱 부분에 상처를 입은 카이런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굳어졌다.

“좋은 공격이다.”

종전의 공격으로 입가에 흐르는 피를 혀로 핥으며, 카이런은 이번에는 툭툭 끊어 치는 
잽을 날려 오기 시작했다. 말이 잽이지... 이건 남들이 치는 스트레이트나 다름이 없을 
정도의 파괴력이다.
이렇게 가까우면 아무래도 긴 검을 사용하는 내 쪽이 불리하다. 위급함을 느낀 나로서는 
뒤로 물러나 간격을 넓히고 싶었지만, 실전 격투로 평생 잔뼈가 굵은 그가 그것을 허용할리 
만무했다.

“내 주먹을 잘 보는 게 좋을 걸.” 

끊임없이 따라붙으며 가벼운 주먹을 던지는 카이런이었다. 하지만 그 가벼운 주먹에도
피부가 찢어지며 혈액이 튄다. 가드를 했지만 무용지물! 내가 가드를 하려 팔을 올리면 
기다렸다는 듯 그 부분을 두들겨 부수니 이건 뭐 대책이 없을 뿐이다.

“큭...!”

그렇게 잠시 동안 펀치 세례를 당하니 정신이 멍해진다. 내가 맥이 풀려 순간적으로 
가드를 내린 찰나, 카이런은 다시 한 번 자세를 바꾸었다.

“용견고(龍肩拷).”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양쪽 주먹을 번갈아 두 번을 휘두른다. ‘퍼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으며, 복부를 당한 나는 꼼짝없이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마지막 주먹을 거두며 오른쪽 발을 축으로 반쯤 고속회전을 하는 카이런. 그의 강철과 같은
어깨가 곧바로 클로즈업되는 모습은 나의 멍한 정신에도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퍼어억!

눈앞이 번쩍이며 발끝이 지면에서 떨어지는 느낌은 참으로 더러웠다. 카이런의 어깨에
상반신 전체를 가격당한 나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며 허공을 날았다. 내 날개가 아닌
타의로 인해 난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쯤, 벽면에 호되게 부딪치고
말았다.

“카아악...!”

전신이 으깨어지는 듯한 통증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기둥이 흔들리며 작은 분진을 
일으켰다. 그의 공격 때문인지 벽에 등을 부딪쳐서인지 몰라도 잠시 호흡곤란까지 일으킨 
나였다. 

“쿨럭, 우으윽...”

바닥에 구토 물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서야 기도가 뚫려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생리적인
작용으로 눈물이 생성되어 앞을 가린다.

“우욱...”

“이것 참, 초심자를 상대로 내가 너무 했나?”

카이런이 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다가온다. 난 부어올라서 반쯤 감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졌다.”

“당연하지! 애완견에게 당할 주인은 이 세상에 없다는 진리를 모르냐.” 

카이런은 자신의 상처부위를 매만지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행히도 패자의 비참한 
몰골을 곁에서 감상하는 취미는 없는 모양이었다. 난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가 띵하다. 온 몸이 욱신거리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지.

“후우...”

요상한 기술에 당해서 날아갈 때 놓쳐 떨어뜨린 빙룡을 찾았다. 빙룡은 옥상 돌바닥에
자신의 검신이 반쯤이나 박혀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힘겹게 뽑아낸다.

-사아악.

칼집에 넣으면서도 왠지 이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약한 주인을 만나게 해서
죄스럽달까.

“.....”

옥상에서 아래층으로 향하는 얼마 안 되는 거리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고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쇠몽둥이로 전신을 마사지 받으면 이런 상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심하게 다리를 절뚝거리며 실험실로 돌아왔더니, 아르케가 나를 반긴다. 나는 그녀에게
몸을 맡기듯 쓰러졌다.

“얼마나 맞았어?”

“...나중에 맞을 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세어보지.”

과연 반기는 게 맞나 의심이 가는 아르케의 질문이었다. 어쨌든 그날은 그렇게 아르케의
간호를 받으며 푹 쉴 수 있었다.
오늘의 패배는 잊지 않겠다. 망할 인간 수컷...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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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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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대면(對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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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속담 중에, 얻어맞은 놈은 두 다리를 쭉 펴고 잘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나는 몸소 그것을 실천하며 10시간 이상을 푸욱 잤다. 촉수의 불가사의한 힘 덕분에 
육체가 크긴 하지만, 실제 나이로는 아직 헤츨링에 불과한 나로서는 하루에 일정 
시간동안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 생활하기가 굉장히 괴로운 것이다.

“.....”

아르케의 정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카이런에게 두들겨 맞아 부어오르거나 찢어진 
수많은 상처들은 상당히 양호해진 상태였다. 포션이라는 게 효력이 좋긴 좋구나.
피를 많이 쏟아서 그런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갈증이 심하게 밀려왔다. 갈증 때문에
눈이 떠졌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아르케는 여전히 푸근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났어?”

“음. 물 좀 주겠나.”

그녀가 가져다주는 차가운 냉수를 한 컵 마시니 그제서야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르케는 오늘따라 생기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네가 자는 동안 리델씨가 돌아왔어.”

“호오.”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면 거의 밖에서 생활하는 늙은 수컷.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카이런이나 아르케와 같은 측근들도 모른다. 이번엔 열흘만의 귀환인가? 평소에 하던 그의
습관에 비하면 매우 짧은 편이다. 보통 두 달 이상은 밖에서 머물다가 돌아온다 했으니까.
아르케는 막 일어나서 적당히 헝클어진 나의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할말이 있다고 깨어나면 함께 응접실로 오라는데... 마침 잘 됐구나.”

“그가 나까지 불렀나?”

“응. 굉장히 진지해보였어. 뭔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흐음...”

지금까지 그와는 별 교류나 연관이 없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리델이 나를 특별히 
지명했다는 말에는 약간의 의아함마저 느껴졌다. 그런 나의 얼굴을 보며, 아르케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가리켰다.

“대충 끼니라도 때우고 가자. 어차피 리델씨도 카이런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테니까.”

과격한 운동을 한 다음날이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허기가 지는 게 사실이다. 아침은
돼지 뒷다리를 훈제로 만든 것 하나와 야채스프가 준비되어 있었다. 허겁지겁 먹고 나니
상당한 포만감이 느껴진다. 

“그럼 가지.”

식사를 끝낸 나와 아르케는 복도를 지나서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엔 그녀의 예상대로
카이런과 리델이 조용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리델은 카이런과의 대화를 일단 멈추었다.

“왔구먼.” 

“밥을 먹이느라 좀 늦었네요. 호홋.”

푹신한 의자에 깊숙하게 앉은 늙은 마법사. 폴리모프를 한 나의 모습을 그는 매우 음울한 
표정으로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주름살과 허연 수염이 가득한 늙은 수컷의 입이 움직인다.

“...매우 닮았구나.”

“음?”

분명히 나를 향한 말이었지만 그 뜻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뜬금없이 누구랑 닮았다는
거야?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을 하려는데, 리델이 이번에는 아르케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뭐냐고, 대체.

“아르케양.”

“예...?”

느닷없이 리델의 부름을 받은 아르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리델의 
관심 대상이 변화무쌍하니 그녀로서도 좀 얼떨떨할 것이다. 자신에게로 아르케의 시선을
돌려놓은 늙은 수컷은 약간의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내가 이곳에서 거의 자리를 비우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나?”

“...비밀이란 언제나 궁금한 법이거든요.”

‘비밀’이라는 단어에 특히나 억양을 주며, 그제야 빙긋 미소를 짓는 그녀였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그런 말이 오고 갔었지. 기억이 날 것 같다. 
리델은 마치 자폐증 환자라도 되는 듯 무표정하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드디어 일생의 목표를 이루었다네. 그리고 목표를 이루었으니, 일전에 약속한대로 
나의 비밀이라는 것을 지금 밝히려 하네.”

일생의 목표를 이루었다는 남자의 얼굴 치고는 어둡기 짝이 없다. 때문에 아르케
역시 축하하는 마음을 크게 드러내기가 곤란한 듯 보였다. 당사자가 암울한데 주변의
사람들이 즐거울 리는 없는 게 아닌가.

“...아, 정말요? 무척이나 기대가 되는군요.”

“그 전에...”

리델은 말끝을 흐리며, 앉은 자세 그대로 자신의 비쩍 마른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주름진 입술이 묘하게 달싹거린다.

“스피어(Spear).”
내 머리가 그의 손가락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고 느끼는 순간, 뭔가가 굉장한 기세로 
날아와 손목에 부딪치는 것이 아닌가?

“캬악!”

긴장을 푼 채로 의자에 앉아있던 나는 의자와 함께 꼼짝없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어떠한 
날카로운 창 모양의 빛이 내 손목을 꿰뚫는 것으로 모자라, 벽에다 박아놓은 것이다.
볼썽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벽에 고정된 왼쪽 팔을 감싸 쥐었다. 조금씩이지만 출혈이
시작된다.

“...!”

내가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마법사의 주문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스피어.”

이번에는 오른쪽 손목 부분에 뜨겁게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듯한 화끈한 통증이 느껴진다.
그것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봐서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카앙!

손목을 반쯤 관통하며 바닥에 꽂히는 빛의 창. 덕분에 난 방 한구석에 처박혀 오도가도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크아아악...!”

고통보다는 이 급박한 상황에 대한 불신이 더욱 크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아르케와 
카이런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당황한 기색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그들.

“에엑...”

“리, 리델씨?”  

아르케의 불신과 카이런의 당혹스러움이 섞인 시선에도 리델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단지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나만을 바라보는 늙은 수컷.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어떠한 
회한(悔恨)과 괴로움이 깃들여져 있었다.
참다못한 카이런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리델에게 손짓을 한다.

“...미, 미친 거 아니유?”

“동고동락 한지도 어언 10년인데... 잘 알면서 뭘 물어보나, 카이런 군.”

“영감님 정신상태가 좀 특이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난 벽에 양 팔이 고정된 꼬치구이가 된 채, 그러한 리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 늙은 수컷이 나라는 존재를 억세게 증오하고 있다는 느낌이 뼈 속 깊이 전해져온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간에 상대는 9써클에 도달한 마법사.
이 상태로는 위험하다!

“무슨 짓이냐, 인간!!”

거의 발악하듯 허공에 대고 거세게 외쳤다. 아르케도 나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는 이를
악물며 리델에게 항의를 했다.

“리델씨! 다짜고짜 이게 도대체 무슨...!”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라네.”

아르케의 항변을 끊으며 들려오는 아주 조용하고 메마른 수컷의 음성.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것 같은 존재감 없는 노인의 그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나지막한 목소리는 좌중의 입을 전부 다물게 만들었다. 응접실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리델을 제외한 셋 전부가 그의 주름진 입가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어 동공을 최대한으로 연 채 눈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양쪽 손목에서는 새빨간 선혈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크으으...”

늙은 마법사는 푹신한 가죽의자에 자신의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입가를 움직이며 말을
내뱉는 도중에도 그의 음울한 시선은 벽에 고정된 나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니 다들 편히 앉아서 듣게.”

그가 편안하게 내던진 한마디에 카이런과 아르케는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감히 거역 못할 압도적인 기운이 리델의 주변에 흐르는 듯 했다.
마법 따위가 아닌 순수한 인간의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쯤을 거슬러 올라가, 한 청년이 있었지...”

늙은 마법사의 낮은 음성이 적막한 실내에 울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 청년의 이야기라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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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5. 대면 편 끝났습니다.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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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대마법사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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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카스 산맥. 코르서스 대륙 전체에서도 험준하기로 손에 꼽히는 장소. 당연히
인적이 몹시도 드문 곳이다. 대륙의 최북단에 위치한 이 대자연의 모체는, 아직 
자신의 몸이 인간들의 손에 더럽혀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몇 되지 않는 
희귀 종족들을 스스로 보호하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이 산맥을 통 털어 지배하는 자가 있다면, 역시 드래곤이었다. '케네지아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이 암컷 화이트 드래곤은 1500년이라는 세월을 넘게 살면서 
에카스 산맥을 지배해왔다. 수령 2000 이상인 웜(Worm)급의 바로 아래 단계에 
머무르는 그녀의 지배력은 실로 대단했다.

성격이 매우 괴팍하다고 알려져 있는 그녀에게는 수많은 설화가 붙어있었다.
단 한 번의 브레스를 뿜은 것으로 자신을 토벌하러 온 왕국의 병사 1개 대대를 흔적도 
없이 녹여버린 일. 길 잃은 나그네의 앞에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나 길을 인도 해준 일 
등이 그것들이다. 물론 이것은 그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에카스 산맥의 백색 설경(雪景)은 황홀할 만큼 아름답다. 일 년의 반 
이상이 눈으로 덮여있는 이 고지대에는, 간혹 학술 차 산행에 오르는 무리들을 제외하면 
인간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 드물다는 인적들이 무리지어 힘겹게 산을 오르는 모습이 눈에 띈다.

“후우... 이거, 보통일이 아니군.”

두터운 털옷을 껴입은 네 명의 인간들은 서로의 몸에 바짝 붙어서 걷고 있었다. 모두 
바닥 면이 넓은 눈 신을 신고 있었지만 그들의 걸음은 그리 편치 않아 보였다. 새하얀
눈밭에 기다란 그림자가 선명하게 생긴다.

“누가 아니래나. 이 산에 오른 지도 벌써 5일 째... 지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곤란할 노릇이겠지. 그래도 목표지점이 아직 멀었으니 엄살은 그만 부리시게.”

“과연... 국가로부터 300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한다는 천재 소리를 듣는 남자가 
할 말다워.”

덩치 큰 남자의 비꼬는 태도에, 그에 비하면 약간 작은 체구의 남자가 자신의 두꺼운 
후드 모자를 뒤로 넘긴다. 후드 안에 남아있던 체열은 곧바로 수증기가 되어 증발하는
듯 보였다. 그의 거친 숨결이 그대로 김이 되어 공기 중에 퍼진다.

“장난은 그만 두지 않겠나? 쥬마르, 자네가 비록 귀족가의 자식이라지만... 지금
학술의원단의 리더는 바로 나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예, 예. 알아 모십죠. 그 젊은 나이에 3써클의 마법과 이 나라 최고의 연금술을 
이룩하신 분께 제가 감히 거스르겠습니까?”

덩치 큰 사내는 여전히 유들거리며 그를 놀려댔다. 장난인지 정말 배알이 꼴려서 그러는
건 지 모를 태도였다. 놀림의 대상이 된 마른 체형의 남자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 다시금 
후드를 푹 눌러썼다.

“아무리 나의 주장으로 이곳에 왔다지만, ‘혈룡초(血龍草)’는 결국 우리 연금술사 
모두의 목표라는 걸 상기해주게.”

쥬마르와 더 이상의 실랑이를 벌이는 게 귀찮았던 그는 바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간 낭비에, 체력 낭비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그들을 움츠려들게 한다.

“이봐요, 리델! 해가 지기 전에 오늘 안으로 제 2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겠어요? 
아직 해는 높지만... 바람이 너무 심하군요!”

가장 뒤쪽에 처져서 걸어오던 자가 앞을 보며 외치듯 말했다. 선두인 리델과는 얼마 되지 
않는 간격이었지만 바람소리가 너무 강했던 것이다. 크게 말하지 않고는 입 모양을 봐야
하는데, 다들 후드를 코까지 내려쓰고 있으니 앞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게다가 짙은 
밤색의 후드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틀림없이 여성의 그것이었다.
리델은 역시 목청을 돋우어 외치며 답변을 했다.

“지도에는 진작부터 제 3목적지 이후의 곳은 표기되어 있지 않았소! 아무래도 협회로부터 
제대로 엿을 먹은 것 같군!”

“그럴 수가...” 

추위에 붉게 변한 얼굴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는... 아니, 그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리델을 따라 걸었다. 쥬마르 역시 아무 말 없이 걷는 것을 보면 배알이 
꼴리기는 해도 그만큼 리더에 대한 신뢰가 큰 듯싶었다.

“후우...”

살이 얼어붙는 추위와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일행의 속도는 너무도 느렸다. 그들이 하나의 
작은 봉우리를 넘었을 뿐인데 희미하게 설원을 비추던 태양은 벌써 산 너머로 떨어지고 있
었다. 어둑어둑해진 날씨에 이제 더 이상은 걷기가 위험해질 정도가 되고 나서야 연금술사
일행은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합시다.”

휴식을 알리는 말을 하면서도 리델은 남들이 보지 못할 정도의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갈 길은 먼데 속도가 나질 않는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식량마저 슬슬 떨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애초에 이 산맥을 우습게 본 것이 실수라고 생각했다.

“훼이니아, 당신은 배낭에서 육포를 꺼내 적당히 4등분을 해주시오.”

“그러죠.”

적지 않은 호감이 있었기에, 리델은 훼이니아라는 여성의 눈도 쳐다보지 못한 채 지시를
내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훼이니아의 표정에는 기묘한 빛이 
서려있었다. 곧 자신의 배낭 덮개를 여는 그녀.

“이곳을 팝시다.”

리델이 포인트를 지정하자 남자들은 두말없이 휴대용 삽을 꺼냈다. 살갗을 찢는 차디찬
추위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설원에서, 하룻밤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후우.”

해가 완전히 떨어져 칠흑 같은 어두움이 내리고 나서야 구덩이가 완성됐다. 겨우 4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지만, 그런대로 모양새는 잡혀있었다. 이런 일회용 숙소는
무엇보다 안전함이 첫 째니까.

“훼이니아 양 먼저 들어가시오.”

그들은 암묵적인 순서에 맞춰 구덩이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입구는 나중에라도 
막히지 않게 배낭으로 틀어막는다. 이 눈밭을 파서 만들어낸 굴은 체감온도가 바깥보다는
훨씬 높았다. 약간의 아늑함마저 느끼며, 일행들은 육포를 씹기 시작했다.

“해가 뜨면 바로 출발해야할 테니 어서들 자둡시다.”

리델이 피곤함에 지친 자신의 육체에 긴장을 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잘 자라고.” 

이것은 갈락의 그나마 쾌활한 음성. 갈색의 곱슬머리를 멋대로 기른 이 사내는 리델을 
특히나 신뢰하고 있었다. 23살이라는 한참이나 어린 나이에 자신보다 훨씬 앞선 연금술을
가졌으며, 거기에 3써클의 마법 마스터라는 타이틀. 
자신보다 미약한 차이로 나으면 박살내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압도적인 경우엔 아예
무릎을 꿇고 그 편에 합류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긴 하다.

“.....”

리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일 걷기 위해선 싫어도 잠을 자야만 한다. 그리고 
리델에게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으로 잠이 들어야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리 와, 훼이니아.”

마치 속삭이는 듯한 쥬마르의 목소리가 아직 선잠이 든 리델의 귓가에 들려왔다.

“또...?”

그리고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훼이니아의 깜짝 놀라는 듯 한 음성. 거의 잠드는데
성공했던 리델은 이 부분에서 정신이 드는 것을 느꼈다.
잠이 달아나는 순간, 그는 다시금 깊은 절망감에 빠지고 말았다.

“후딱 끝내자고. 자, 대충 바지 좀 내려봐.”

혈룡초를 찾는 여행이 시작 된지 5일 내내 그들이 하던 그 짓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으, 으음...”

“크읏...”

리델은 오늘도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한
자신을 저주해야만 했다. 자신이 남몰래 좋아하는 훼이니아가 타인의 물건에 의하여
교태로운 신음소리를 내는 상황이 그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두 남녀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리델은 크나큰 정신적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염병할...’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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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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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대마법사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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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델은 몇 분간에 걸친 그들의 정사가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안의 악마가 훼이니아의 형상으로 나타나 색정적인 고문을 가한 것이다.
계속 이러다가는 신경쇠약에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벌써 리델에게는 신경쇠약의
증세가 이따금씩 보이고 있었다.
악몽과도 같은 긴 밤을 거의 뜬 눈으로 지샌 그는 앞이 밝아지며 서서히 동이 터오는 
것을 느꼈다.

“아침이군. 다들 일어나게.”

그는 훼이니아와 쥬마르가 엉켜있는 쪽을 애써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일행들을 흔들어
깨웠다. 다들 피곤한 게 사실이었지만 아직 원래의 목적을 잊지는 않았는지 잘도 눈을 
뜬다. 체력의 회복과는 별개의 문제로.
가장 먼저 눈구덩이를 빠져나오며 리델은 약간의 어지러움 증을 느꼈다. 잠을 뒤척인 지도
벌써 5일 째... 이것은 약간 다른 의미로서의 불면증과 같았다. 그의 현기증에 별 관심이
없는 태양은 평소에 잘 하지 않던 짓을 했다. 눈부신 빛을 대지에 쏟은 것이다.

“으윽, 방광이 터지겠다.”

쥬마르는 자신의 몸 위에서 아직 잠이 덜 깬 훼이니아를 밀쳐내며 리델을 따라 나왔다.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보며 눈밭에 오줌을 갈기는 그의 뒷모습. 뭇 여인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만큼 멋진 연출이었지만 리델의 눈에는 너무도 증오스럽기만 했다.

“.....”

그는 문득, 눈 굴 안의 훼이니아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 역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보통의 경우라면 간밤의 일에 대해 부끄러워할 만도 하건만, 그녀는
오히려 당돌한 얼굴로 리델을 주시하고 있었다.

‘병신새끼.’

분명히 둘 사이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러나 리델은 그녀가 자신에게 그렇게 외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갑자기 무슨 충동심이 들었는지, 그는 훼이니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훼이니...”

“자, 그럼 출발 합시다.”

리델은 자신의 말을 도중에 끊은 남자에게 속으로 감사를 했다. 아늑한 굴을 빠져나오며 
갈락이 재촉을 한 것이다. 그에게는 이번 혈룡초 수집 프로젝트가 너무도 중요했다. 
찾아내기만 한다면 연금술사로서 한 단계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찬스가 거의 확실하게 
오는 셈이니까.
빠트림 없이 여장을 챙긴 일행은 다시 끝없는 도보 여행를 시작했다. 

“.....”

걸음을 옮기는 내내, 극심한 피로와 수면부족이 리델을 괴롭혔다. 그는 심하게
충혈 되어 당장이라도 빠질 것만 같은 자신의 눈을 매만지며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미칠 노릇이군.’

두 다리는 주인의 의지대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이미 반쯤은 
망가진 상태였다.
태양의 위치를 확인하며 걷는 것도 이제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스스로의 이 정신적
공황에 대해 막연한 공포심을 느꼈다. 차라리 리더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쉬었으면
좋겠다는 유혹이 그를 더욱 나태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리더가 반쯤 풀린 허깨비 같은 모습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두꺼운 후드가 그것을 완벽하게 차단했으니까.

“후우...”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걸음을 걷던 일행은 조금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아까부터 드넓은
설원에 어떠한 미약한 진동이 느껴지는 것이다. 의아함을 가장 먼저 표출한 사람은 
아무래도 남자들보다는 섬세한 구석이 있는 훼이니아였다.

“혹시 아까부터 무슨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아요?”

“...신들끼리 모여서 떡이라도 치는 모양이지. 키킥.”

저질스러운 농담을 하며 혼자 웃어대는 쥬마르. 키가 크고 외모가 출중했지만 그는
인간 자체가 가벼웠다. 불안해하는 자신의 애인에게 하는 말치고는 너무 경망스럽다고 
리델은 생각했다.
하지만 훼이니아에게 ‘저런 자식과는 그만 만나고, 나랑 사귀자.’라는 말을 내던질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자위하며, 그는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쿵.

쥬마르의 저질스러운 농담에도 불구하고 진동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거센 바람
소리를 뚫고 ‘쿵’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올 정도였다. 이쯤 되니 학술원단의 4인 모두의
안색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뭐, 뭐야...?”

“눈사태라도 나려나?”

갈락의 터무니없는 예측이었고, 리델은 차라리 갈락의 말이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따로 짚이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쿵.

진동이 가까워지며 쭈욱 펼쳐진 설원에 작은 파문이 일어난다. 바닥에 깔린 미세한 눈의
알갱이들은 자신이 마치 뭐라도 되는 양, 뿌옇게 분진을 만들며 허공으로 올랐다. 일정한
타이밍으로 울리는 진동. 
너무나 불길한 예감에, 학술원단의 리더는 졸음이 화악 가시는 것을 느꼈다. 

-쿵!

일행 중에서 리델만이 유일하게 이것의 정체를 예측 할 수 있었다. 갈락과 쥬마르가
사방을 주의 깊게 두리번거렸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씨발, 대체 뭐야?”

동료들의 불안 속에서 눈밭 위 허공의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는 리델. 그제서야 그 
진동음의 주인공을 확실하게 발견한 그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뇌까렸다. 

“프로스트 자이언트(Frost giant)다.”

몸 전체가 하얀 색이라 눈밭에서 완벽한 위장을 한 채로 다가오는 신장 7m의 거인.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검은색을 띄는 하나의 커다란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리델조차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망쳐!”

불안감의 근원지를 몰라 헤매던 일행은, 리델의 외침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반대쪽으로 냅다 치달리기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 도망을 치며 리델은 낭패감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어째서...!”

안 그래도 몬스터가 드물다는 지형만을 고르고 골라서 만든 탐험코스였다. 헌데 보통의
몬스터도 아닌 저런 대형 몬스터가 나타나다니... 리델은 헐레벌떡 달리면서도 심한
허탈함과 절망을 느꼈다. 

“쿠르륵.”

인간들이 갑자기 달리기 시작하자, 프로스트 자이언트는 그제서야 사냥꾼인 자신이 
들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전력으로 사냥감 추적에 들어가야 한다. 그는 안 그래도 
큰 자신의 보폭을 더욱 넓게 하며 인간들을 본격적으로 쫓기 시작했다.
달리는 프로스트 자이언트에게서는 마치 고목나무가 차례대로 쓰러지는 듯한 육중한 
소리가 났다. 소리만 듣는다면 아마 산사태가 난 것으로 착각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꺄아악!”

고개를 돌려 그 끔찍한 모습을 확인한 훼이니아가 비명을 지른다.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거대한 괴물이 흉포한 기세로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인간과 다리 길이의 
차원이 다른 자이언트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씨팔! 리델, 이 새끼야 어떻게 좀 해봐!”

이곳은 오직 넒은 눈밭. 몸을 숨길만한 곳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이 난리에 쥬마르는 잘생긴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리델을 닦달했다.
그러자 리델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쥬마르를 돌아보았다.

“나라고 무슨...!”

안 그래도 뭔가 대책이 없을지를 끊임없이 생각해본 리델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저 괴물 같은 프로스트 자이언트를 상대할 마법이란 그의 수준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매직 미사일(Magic missle)은 수 십 발을 쏴야 저 놈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고 파이어 볼(Fire ball)을 사용하기엔 시전 시간이 너무 길다. 

“염병할!” 
홀드 퍼슨(Hold person)을 캐스팅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 마법의 족쇄를 채우기엔 
자이언트의 몸집이 너무도 거대했던 것이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리델은 역시 별다른 
방도가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이런 그의 성향은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될 때가 많았다. 자신의 
머리를 너무 믿으니 뭐든 금방 생각해버리고 답이 나오질 않으면 바로 포기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었다.

“으아아아...!”

그러는 사이에 프로스트 자이언트는 바로 일행의 뒤까지 따라붙었다. 당황한 사냥감들이 
미처 돌아볼 시간도 주지 않고 거대한 곤봉을 휘두르는 자이언트.

-퍼헉!

재수 없게 첫 번째로 곤봉에 찍힌 갈락의 몸은 그대로 찌브러들었다. 전신의 뼈가
순식간에 박살나 아예 흐믈 거리는 연체동물이 된 것이다. 고층의 건물 옥상에서 떨어지는
철근을 맞으면 이렇게 될까?
끔찍한 피 보라와 함께 인간의 시뻘건 내부기관들이 사방으로 튄다. 자이언트의 단 한방에, 
건강했던 갈락의 육체는 푸줏간에서 해머로 수십 차례 두들겨서 으깨놓은 고깃덩어리로 
화(化)하고 말았다.

“꺄아아아악!”

자신의 바로 눈앞에서 동료가 산산이 박살나는 장면을 본 훼이니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약한 신경으로서는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패닉에 
빠진 것이다. 
한 인간을 박살낸 자이언트는 이번에는 자신의 외눈을 바닥에 쓰러진 훼이니아에게
향했다.

“훼이니아!”

이것은 그녀의 남자친구인 쥬마르가 아닌 리델의 입에서 나온 외침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남의 여자가 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은 리델은 쥬마르를 돌아보았고, 쥬마르가 
여전히 달리고 있다는 사실에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리델이 쥬마르를 향해 욕설을 퍼부을 시간도 없었다. 그녀는 넋이 나간 기색으로 리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리델...”

그것이 리델이 마지막으로 들은 훼이니아의 음성이었다. 프로스트 자이언트가
훼이니아의 양쪽 팔을 잡은 채로 번쩍 들어올린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그녀는 공중으로 올라가면서도 처연한 눈으로 오직 리델이라는 남자를 보았다.

“안돼에!!!”

리델이 비명처럼 악을 쓰며 외쳤지만 프로스트 자이언트에게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거대한 외눈 거인은 자신의 거대한 성기를, 그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훼이니아의 사타구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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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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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대마법사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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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자이언트가 미약한 호기심으로 인해서 기대했던 상황이 벌어질 리는 없었다. 
애초에 사이즈가 너무도 달랐으니까. 다만 훼이니아의 연약한 육체는 자이언트의 강철과
같은 성기에 가랑이부터 목뼈까지 ‘우두둑’하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압축이 되고 말았다. 
그녀의 눈알이 너무도 쉽게 빠지며 대량의 피와 함께 내장이 입으로 요동을 치며 
튀어나온다. 

“이 개에새끼야!!!”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훼이니아의 참극을 본 리델은 거의 
돌아버린 정신으로 자이언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머리만 좋았지 육체를 써본 적은 
전무하다시피 한 그였다. 남을 때릴 줄도, 공격을 피할 줄도 몰랐다.

울부짖음과 함께 달려드는 리델에게, 자이언트는 그 거대한 외눈을 부라리며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마치 가소로운 파리를 내치는 것 같은 행동이다.

-퍼억!

몬스터가 대충 휘두른 팔뚝에 맞은 리델은 그대로 4m 정도나 부웅 날아가 눈밭에 
처박혔다. 낙하시의 충격은 심하지 않았을 테지만, 자이언트의 공격을 당한 순간 리델의 
늑골은 거의 대부분이 부러져나갔다.
그는 자신의 전신을 파묻는 차가운 눈의 입자를 느끼며 경련을 일으켰다.

“크르륵.”

오늘의 식량 정도는 충분히 마련했다고 생각했는지, 프로스트 자이언트는 굳이 리델을
잡아 죽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리델로서는 참 다행스러운 현상이었다. 물론 앞서 죽어간
두 명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겠지만... 
자이언트는 끔찍한 핏덩이가 된 두 명 분의 고깃덩어리를 한 쪽 팔에 껴들었다. 그의
흉악해 뵈는 얼굴엔 만족감이 깃들여져 있었다.

벌써 먼 곳까지 도망친 쥬마르와 눈밭에서 나뒹굴고 있는 리델의 모습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이언트는 홀연히 그 거대한 모습을 감추었다. 
숨을 죽이고 있던 리델은 거인의 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입을 벌려서 가득 고인 피를 
뱉어낼 수 있었다.

“카아악...”

몸 안에 날카로운 바늘 수 십 개를 집어넣어놓고 꿰매놓은 것 같은 고통이다. 리델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통증에 숨을 헐떡였다. 마치 남의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통’은 매우 객관적인 수치로 다가왔다. 

‘조금만 더 세게 맞았으면 내장이 전부 터졌을지도...’

망가진 자신의 몸에 대해 그렇게 평가를 내린 그는, 멀어져만 가는 쥬마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보아선 녀석이 다시 돌아와서 자신을 구해준다는 확률은
단 2%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판단한 리델은 죽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계속 누워있다가는 죽음을
피할 길이란 절대로 없을 테니까. 

“우우욱.”

겨우 반쯤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리델은 자신의 흉부가 박살이 나는 기분을 느꼈다.
입가에서는 시뻘건 선혈이 질질 흐른다. 그는 부러진 늑골이 폐를 찌르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주 느릿느릿한 속도로...

“.....”

비록 느리긴 했지만 다행히도 걷는 것 정도의 행위는 가능했다. 만약 이 상태에서 
달리기를 한다면 날카롭게 부러진 뼈들이 자신의 폐를 찌르고 들어갈 것이다.
눈밭에 여기저기 뿌려진 살 조각과 피로 물든 눈밭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신의 
배낭에서 최소한의 식량과 물을 꺼내는 리델이었다. 이제는 무거운 배낭 전체를 등에 
짊어질 수가 없으니까. 

“우우우.”

잠깐 사이에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여기던 동료들을 전부 잃었다. 그 중에는 나름대로 
좋아하던 여자도 있고, 나이가 많은 주제에 자신을 마치 신처럼 떠받들던 사내도 있었다.    
자신의 애인을 버리고 도망쳐버린 쥬마르 같은 개자식이야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으니
별 상관은 없다. 
양 손으로 가슴을 감싼 채 힘겹게 걷던 리델은 자신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크흑.”

남들의 죽음으로 눈물이 흐르는 것은 처음이라 그는 크게 당황을 했다. 자신의 머리를
너무 과신한 나머지 다른 누구의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던 그가 아니던가. 그러다보니 사실
자기가 아닌 타인을 가장 벌레처럼 취급한 인간은 쥬마르가 아닌 나였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악마는... 바로 나였던가.”

누구 하나 자신의 말을 듣는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스스로에 대한 이 거대한 자괴감은 그를 심리적으로 거의 파멸시키고 있었다. 리델은 
통한과 참회의 눈물을 구슬프게도 흘렸다.
그가 흘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얼어서 살갗에 달라붙는다. 그는 고해성사를 하기엔
너무도 가혹한 날씨라고 생각했다.

무작정 걸었다. 해가 저물고 캄캄한 밤이 되었건만...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어둠도 
무시한 채, 리델은 걸었다. 거의 죽어가는 자신에게 이러한 근성이나 체력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리라.

“하아아...!”

게다가 다행히도 끝없이 펼쳐진 눈밭에는 그의 발목을 위협할만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끌어당기는 어떠한 힘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예기치 못한 구덩이나 
낭떨어지만 없다면 이대로 숨이 끊어질 때까지 걸을 마음을 먹은 그였다.

눈물을 얼리는 추위와 폐부를 찢는 고통을 참으며, 그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12시간
가량을 쉬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타고난 공부벌레였던 그가 이런 강행군을 감행할 수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자연의 순리에 따라... 길던 밤이 지나고 다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동이 트며 시야가 확보된 리델의 입에서 외마디 탄성이 튀어나왔다.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어느 커다란 봉우리가 하나 있었으며, 아래쪽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이 시커먼 입을
벌린 채 존재했던 것이다.
리델은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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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헤헤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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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대마법사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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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리델의 몸을 감싸는 희미한 온기. 단지 바람을 피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러한 따뜻함이 느껴질 리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커다란 환상에 젖은 
소년의 마음이 되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는 리델.

어느 정도를 걷다보니 이건 마치 죽어서 천국에 온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늑골이 부러져나간 고통마저 실제로 상당량이 감소했던 것이다. 물론 부러진 늑골들이
알아서 붙을 수는 없다.
어쨌든 리델은 이 몽환적인 느낌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꿈인가...?’

동굴 밖에서 세차게 부는 바람소리가 이 상황이 꿈이 아님을 증명하는 듯싶었다. 그는 
자신의 볼을 꼬집으며 동굴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깊은 동굴이었지만 습한 곰팡이의
냄새 따위가 전혀 나지 않으니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앗.”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리델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의외로 깊고 넓은 동굴
안에 웬 자그마한 나무집 한 채가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라, 그의 입에서 짤막한 탄성이 새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도대체...”

혼란에 빠진 그였지만 호기심이 그것을 눌렀는지, 자신도 모르게 나무집으로 걸어가 
노크를 하려는 듯 손등을 뒤집는다.

“열려있으니, 들어오세요.”

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사이에 두고, 리델은 새가 지저귀는 듯한 미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를 환영하는 그것은 분명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어떤 여자가 이런 오지에 집을 짓고 
살아간다는 말인가?

“...!”

문 앞에 서서 잠시 동안 망설인다. 잠시 후에 마음의 결정을 내린 리델은 천천히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여기까지 온 이상 될 대로 되라는 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역시 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마찰음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그는 숨이 막힐 듯한 기분을 느꼈다. 새하얀 피부의 어느 
여자가 실버 블론드를 길게도 늘어뜨린 채 그를 맞이하듯 바른 자세로 앉아있던 것이다.
리델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다소곳하게 입을 열었다.

“이곳까지 온... 그대는 누구신가요?”

원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세상의 미인들을 접할 기회가 많은 그였다. 물론 그녀들과의
연애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완벽한 여성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찌 보면 귀엽고, 어찌 보면 섹시했다. 잠시 그녀의 얼굴에 할말을 잃은 리델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꾸벅 숙여 목례를 했다.

“아아. 시, 실례하겠소. 여행하던 도중 길을 잃어서... 헤매던 차에 이곳을 발견하게
되었소만.”

윤기 나는 백금발이 그녀의 단아한 턱 선을 따라 움직인다. 오똑한 콧날과 단정한 눈썹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 초면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여행자시군요. 헌데 몸 상태가 과히 정상은 아니신 듯한데...?”

“이건 몬스터에게 당한 거요. 아무래도 뼈가 부러진 것 같군.”

리델은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미녀가 놀라길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 골짜기의 어느 몬스터를 만났든 목숨을 건졌다면 그걸로 충분히 다행인 거예요.
심한 것 같은데... 어쨌든 제가 상처를 좀 봐드리죠.”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서랍을 열었다. 작은 약상자와 알 수 없는 용액이 든 유리병을 
찾아낸 후 리델에게로 다가온다. 하얀색의 깨끗한 원피스를 걸친 그녀의 모습은 마치
여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리델은 사람에게서 후광을 느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아아, 그럴 필요는...”

직접 리델의 피에 젖은 상의를 찢어내는 그녀. 근접한 그녀로부터 정신이 아득해지는 
향기가 느껴졌다. 원래 부끄러움증이 심하던 그는 자신의 아픈 상처조차 잊고 그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에 이르렀다. 책을 볼 줄만 알았지, 여성과 접촉하는 법은
모르는 그인지라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드러난 리델의 상체는 멍으로 인해 온통 푸르죽죽하게 변색되어 있었으며, 곳곳이 크게
부어올라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거기에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끈적이는
액체를 바르기 시작했다.
매우 능숙한 손놀림이라 오히려 리델이 놀랄 지경이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크으. 리, 리델... 리델 로디악이라고 하오. 당신은...?”

“네이지라고 부르면 되요.”

망가진 흉부 곳곳에 포션을 바른 그녀는 리델에게 또 다른 약병을 내밀었다. 기묘한
색의 반투명한 액체가 가득 담겨있는 병이었다.

“이걸 전부 마셔요. 안쪽에서 부러진 뼈들이 몇 개월이면 붙을 거예요.”

“굉장히 비싼 물건일 텐데... 호의는 고맙지만 받을 염치가 없소.”

바르는 포션은 그렇다 쳐도, 직접 구강으로 복용하는 포션은 효과가 큰 대신 그 값이 
장난이 아니다. 때문에 아직 양심이란 것이 남아있던 리델은 정중히 사양을 했다.
하지만 애초에 그의 거부권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네이지는 억지로 리델의 손에
약병을 쥐어 주었다.

“어차피 따로 쓸 곳도 없는 걸요. 그냥 받으세요. 사람을 보는 것이 몇 년 만에 처음이라
아깝지도 않아요.”

이 이상 성의를 거절하면 그건 실례가 된다. 리델은 약병의 뚜껑을 열고 쭈욱 들이켰다. 
그 맛은 쓰디 쓴 약초를 날로 씹어 먹는 것과 같았다. 25살의 젊은 청년은 정말 오랜만에
아주 당도가 높은 사탕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후우.”

효과가 좋은 약을 바르는 것으로 모자라 또 마시고나니, 몸 상태가 전체적으로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의 부러진 늑골은 아직 그대로였다. 아마 3개월은 지나야 완치가 될
것이다.

“후우... 네이지 양.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신은 혹시 여신이 아니십니까?”

“제가 여신이라면 이런 재미없는 곳에서 십 수 년을 홀로 지내진 않았겠지요. 방랑벽이
심한 아버지를 둔 딸의 비애랄까요.”

잠시 뜸을 들인 후,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인적이 거의 전무한 이곳에서 대화상대를 
찾았다는 게 여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속 쌍꺼풀의 큰 눈을 빛내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예뻤다. 

“탐험가인 아버지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저를 키우셨어요. 코르서스 대륙 어디든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말이지요. 그러던 도중 자연스럽게 에카스 산맥으로 오게 되었고, 
아버지는 이 동굴에 터를 잡고 집을 지었지요.”

“그렇다면 아버님께서는...?”

“오 년 전에 사냥을 하러 집을 나가신 뒤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아무래도
몬스터에게 당했을 확률이 크지요.”
부친의 죽음을 입에 담으면서도, 네이지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심기가 매우 강해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리델은 연금술사 협회
동료들의 참혹한 죽음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유감이군요.”

평소 극도의 냉정함을 자랑하던 리델의 두뇌는 이 동굴안의 몽환적인 기운 때문인지, 
네이지의 이야기에서 나타난 허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무 열매나 그 외의 식용이
가능한 식물들이 자라지 못하는 이 가혹한 지형.
유일하게 사냥을 할 줄 아는 아버지가 죽었다면, 지금까지는 도대체 무엇을 먹고 생명을
연장해왔단 말인가? 어째서인지 너무도 당연한 의아함마저 느끼지 못하는 그의 두뇌였다.
리델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네이지는 어조를 밝게 바꾸었다.  

“괜찮아요. 다 옛일이니... 그리고 리델 씨라고 했던가요?”

멍한 기분이 된 리델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부드러운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마치
지독한 마리화나를 피우고 난 것 같은 상태인 스스로를 느끼며... 
리델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하지요.”

“...무슨?” 
“상처가 낫고 기운을 되찾을 때까지는 이곳에서 편하게 지내도록 하세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사실 저도 사람들이 그리웠거든요. 혼자 지내는 게 무섭기도 하고...”

그렇지 않아도 요정처럼 아름답고 연약한 그녀가 혼자서 산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던
리델이었다.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 보호본능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것을 느끼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에게 폐를 끼치진 않도록 노력하겠소.”

그들의 동거는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 누구도 이 느닷없는 동거가 1년 이상을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둘 모두 피가 끓어오르는 이십대 중반. 함께 붙어 지내다 보니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네이지는 리델의 침착함과 대범하진 않지만 자신의 해야 할 말 정도는 할 줄 아는 그 
모습에서 매력을 느꼈다. 물론 리델 역시도 그녀의 완벽한 외모와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지 오래였다.

같은 집에 살게 된 지 일주일 만에, 타고난 신사였던 리델은 참지 못하고 네이지의 작은
어깨를 껴안고 말았다.

“아.”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는 그녀를 보며 리델은 커다란 낭패감을 느꼈다. 지켜주진 못할망정 
스스로가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그는 이 짧은 순간 동안, 미안한 감정에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까지 했다.
리델은 인내심 부족한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네이지에게 송구스러움을 표출했다.

“나도 모르게 무례한 행동을 해서 미안하오. 그대에게 큰 실수를 한 것 같...”

사과를 하려는 찰나, 리델은 자신의 입술을 덮는 촉촉한 기운을 느꼈다. 이번에는 반대로
네이지가 그에게 키스를 해온 것이다. 하긴... 어찌 보면 이십 평생을 거의 홀로 살며 
인간에게 목말라있던 그녀였다. 리델이 저지른 작은 실수가 마른 장작개비에 불을 붙여놓는 
것과 비슷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리라.
입술을 뗀 네이지는 리델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았다.

“어차피 인간이 만들어놓은 사회적 통념에서 멀리 벗어나있는 우리예요. 그대는 무엇을 
망설이나요?”

격정에 휩싸인 리델은 그녀를 강하게 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입술이 일렁이며
두 조각의 혀가 뱀처럼 뒤섞인다. 한동안 서로를 애무하던 그들은 자연스럽게 침대로 
향했다. 그동안은 결코 침대 쪽으로 눈도 돌리지 않던 리델이었지만 오늘은 상황이 전혀
다른 것이다.

“하아...”

네이지의 따뜻한 입김이 리델의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닭살이 올라올 정도로 간지러웠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의복들을 거칠게 벗기기 시작했다. 한 번 흥분이 되자, 얼음처럼
도도했던 네이지가 이제는 오히려 그을 리드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델이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깜박 잊고 있던 것이 있었으니...

“리델, 이제...!”

“.....”

한껏 달아오른 네이지가 침대에 누운 채로 리델을 향해 팔을 벌렸지만, 그녀의 상대방은
갑자기 흥이 사라진 것 마냥 몸이 굳어져있었다. 

“리델?”

강렬한 흥분 속에서도 한줄기 의아함을 느낀 그녀는 리델의 몸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리델은 자신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당신, 불능이었군요...?”

넋이 나간 네이지의 허탈한 듯한 음성은 그의 귓가에 공명이 되어 울려 퍼지는 듯 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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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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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대마법사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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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절망감과 함께 참혹할 정도의 수치심이 리델의 머릿속에 침투했다. 그의
치부가 타인에게 처음으로 낱낱이 드러난 것이다. 
서로 어느 정도는 호감이 있었던 훼이니아에게 고백을 못한 이유, 그녀가 바람둥이인 
쥬마르에게로 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그것을 막지 못했던 이유. 이 모든 것이 바로 
그의 생식기가 선천적으로 굳어있는 탓이었다. 

“.....”

순간적으로 싸늘해진 공기에 리델은 현기증마저 느꼈다. 신은 그에게 명석한 두뇌와 
천재적인 재능을 주는 대신 성기능을 앗아간 것이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그만의 고통이었던 이것이 이런 오지에서 밝혀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리델은 허탈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죄스러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미안하오.”

인간 이하의 시선이 쏟아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네이지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는 정 
반대의 것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네이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바보로군요, 리델. 연애에 있어 섹스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에요.”

그녀는 축 늘어진 리델의 성기에 입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비록 생리적인 쾌감은 
다가오지 않았지만, 리델은 그녀가 저지른 이 돌발적인 행동에 대해 약간의 성스러움마저
느꼈다.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

리델의 치명적인 콤플렉스를 아무것도 아닌 듯 감싸주는 네이지. 난생 처음 느껴보는 이 
짜릿한 기분에 그는 적지 않은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25년 만에 최초로 삶에 대해
만족을 하는 리델이었다.
그의 눈가가 붉게 충혈이 되며 어조가 흔들린다.

“그대는... 정말 신비한 여자요.”

“내가 보기엔 당신이야말로 그런 걸요.”

네이지는 리델의 손을 잡아끌어 함께 침대에 누웠다. 의복을 반쯤 벗은 남녀 둘이
모든 사심을 버리고 함께 몸을 마주 댄 것이다. 여느 일반적인 커플들이라면 또 이럴 
수가 있을까?
리델은 한쪽 팔을 뻗어 그녀의 작은 두상에 팔베개를 해주었다. 

“난... 사실 이곳에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용무로 찾아온 것이오. 연금술사 협회에는
여러 가지 지원을 얻으려고 거짓말을 했지.”

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여자에게는 왠지 자신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리델이 먼저
운을 띄우자, 네이지는 눈망울을 총명하게 빛내며 호응을 보였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이 불모지(不毛地)에 와서 그대가 찾으려는 것은 무엇인가요?”

“네지 양은 잘 모르겠지만, 이 에카스 산맥에는 혈룡초라는 것이 있다오.”

“혈룡... 초?”

그야말로 리델의 평생에 걸친 기원. 

“동료들에게는 그 즙을 짜내어 바르면 어떠한 금속이든 잠시 동안 무르게 변해 자유로운
변형이 가능해진다고 허황된 꿈을 심어놓았소.”

그 동료들은 지금 모두 죽고 없었다. 자신의 비열한 감언이설 때문에... 
얼마 전의 끔찍한 참상을 떠올린 그는 구슬픈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하지만... 혈룡초의 실제 용도는 바로 나와 같은 불능 자들을 치료하는데 있었소. 
나만이 애초에 그것을 알고 있었지. 결국엔 나의 개인적인 욕심이 동료들을 사지로 내몬
셈이 되고 만 거요. 지금 당장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할말이 없다오.”

“그대는 그 혈룡초라는 것을 실제로 본적이 있나요?”

너무나 생소한 이름이었기에 네이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하지만 리델은 
자신 없는 태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대의 문헌에 스치듯이 언급된 정도로만 보았소.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지만... 나에겐
절실한 물건이라 그때는 가능성 따윈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 같소.”

“...신이 그대를 도울 거예요, 리델. 그리고 나는 당신이 불능이든 뭐든 상관없어요.
그냥 그대와 함께 있는 것 자체로 좋을 뿐이에요.”

남성으로서, 그것도 대단히 아름다운 여성에게 이런 달콤한 말을 듣는 것보다 기분 좋은
일이 또 있을까?
그녀의 핑크색 입술이 귀엽게 움직이며 붕 뜬 리델의 가슴을 진탕시키는 듯 했다.

“우리 그냥... 이곳에서 평생 동안 함께 살아요.”

세상에는 기절할 것만 같은 행복감도 있다는 것을 리델은 처음 알았다. 

“...고맙소. 내 평생 당신만을 보며 살아가리라.”

  리델은 그 사건 이후로 신비로운 여인인 네이지에게 자신의 마음을 모두 열었다. 25 평생
직접 낳아주신 생부모에게도 이렇게 편히 대했던 적이 없는 그였다. 신기한 현상이라고... 리델은 스스로 생각했다. 
낮에는 그녀와 즐거운 이야기들을 나누고, 밤에는 함께 알몸으로 누워 서로를 애무했다. 
비록 삽입이라는 절차는 없었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줄을 알았다. 리델은
지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중이라고 느꼈다.
그렇게 또 5개월이라는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들은 서로를 평생을 함께할 연인이라
여기며 하루하루를 마치 꿈결처럼 보냈다. 리델의 원래 목적인 혈룡초나 동료들의 죽음 
따위는 이미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모든 것을 제처 두고 한 사람만을 위한 삶. 리델에
게는 충분히 마음에 드는 선물이기도 했다.

하루는 동굴 안에서 횃불을 달고 있는 리델에게 네이지가 다가왔다.

“여보.”

“으응?”

그녀의 태도는 평소와는 약간 달랐다. 조심성과 함께 약간의 두려움, 혹은 기대감이 
보이기도 했다. 다소곳한 자세로 걸어온 네이지는 입술을 삐죽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나, 임신을 한 것 같아요.”

그녀의 청천벽력 같은 대사에, 리델은 자신의 미간을 씰룩였다.

“...그런 장난은 재미없어, 네이지.”

씨 없는 수박이 어찌 후세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시덥잖은 농담 정도로 여긴 그는
네이지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하지만 농담이라 치부하기엔 네이지의 얼굴은 너무도 진지했다.

“정말이에요. 리델. 이 배를 보면 모르겠어요? 그리고 전 그렇게 한심한 장난을 칠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아요.”

과연 그녀의 말대로 아랫배가 눈에 띄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항상 봐와서 그런 걸까.
리델은 이것을 여태 왜 깨닫지 몰랐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무슨 수로 
임신이 됐다는 말인가? 여태껏 제대로 된 잠자리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그들이었기에
그로서는 쉽사리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하, 하지만... 네이지. 당신도 알다시피...”

“아직도 모르겠어요? 이건 열심히 사는 우리를 위해 신께서 내려주신 아이란 말이에요.”

리델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커다란 기쁨에 눈물까지 흘리며 좋아하는 그녀였다. 
너무나 순수하고 맑은 네이지의 눈물이 리델의 가슴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생각을 그만 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라면 정말 신께서 아이를 내려주실 만도 하지.’

예전의 리델 같았으면 터무니없는 말이라며 반론을 했겠지만, 이 몇 개월 사이에 그의 
판단력은 급속도로 변질된 상태였다. 자신의 아내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의 눈과 귀는
새하얗게 멀어버렸다.
둘은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얼싸안았다. 

“아이는 분명히 당신을 닮았을 거야.”

시간은 흐르고 흘러, 네이지의 배는 점점 남산 만하게 부풀어 올랐다. 날이 다르게
커지는 그녀의 배를 보며, 리델은 흐뭇한 감정을 느꼈다. 아빠가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지금껏 생각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상상이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분명히
아이가 생긴 것이다.

어느 날 밤. 네이지는 아랫배에 극심한 산통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예정일이 지난 것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녀를 보며 리델은 바닥에 쌓인 눈을 끓여서 
만든 깨끗한 물을 그릇에 담아왔다.

“괜찮아, 여보?”

“아아악...!”

괜찮을 리가 없다. 죽을 정도로 괴로워하는 네이지. 그녀의 전신에서 흐르는 땀이 
침대를 적신다. 그녀는 침대의 기둥을 붙들며 그 지독한 고통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리델은 그 모습을 보며 차라리 고통이 자신에게 느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아내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네이지. 조금만 참아!”

그간 네이지가 산통에 시달린 적은 많았다. 하지만 이번의 것은 분명히 뭔가 달랐다.
그녀의 배가 거칠게 오르락내리락 하며 지금이라도 당장 아이가 빠져나올 것만 같은
기색을 띄는 것이다.
급기야, 고통을 감당할 수가 없던 네이지는 입에 문 천 조각을 뱉어내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아악!”

그와 동시에 그녀의 좁은 골반이 벌어지며, 자궁이 열린다. 그리고 곧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조그마한 아기의 머리.

“네이지, 아이가... 아이가 나오고 있어! 조금만 더...!”

리델은 그 엄숙한 광경에 속으로 경건한 탄성을 질렀다. 세상을 살며 천재로 추앙받던
그는 처음으로 신께 기도를 올린 것이다. 그녀와 아기의 안전만을 보장할 수 있다면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치리라고 다짐을 하는 그였다.

“하악...!”

약 20분간 끔찍한 비명을 지르던 네이지의 자궁으로부터 아기가 빠져나왔다. 리델은
그 모습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긴장되는 마음으로 갓난아기를 품에 안아들었다. 

“아가야, 이제 괜찮...”

그제서야 아기의 모습을 확인한 리델의 동공은 순간적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그의 아내인 네이지가 낳은 것은 인간의 아이가 아니라, 백색의 작은 도마뱀이었던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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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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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대마법사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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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

리델은 손끝에 닿는 혐오스러운 감촉에 화들짝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도마뱀을 내던졌다.
인간의 자궁에서 비늘로 덮인 파충류가 튀어나오다니! 앞뒤가 맞질 않는다.
사실 생식능력이 없는 리델과 그녀 사이에서 아기가 잉태된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지만,
급박한 상황에 처한 인간은 항상 지금 당장만을 생각하니까.

발리스타로 머리통을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리델.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신의 
사랑하는 연인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네, 네이지...?”

그녀는 분명 네이지였지만 이미 네이지가 아니기도 했다. 눈빛과 분위기 모두가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다. 아예 인간이 그것이 아닌 것만 같은 표정을 짓는 그녀. 더 이상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산통에 절절매던 산모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뭔가 굉장히 날카로워진 인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의 아이를... 함부로 던지면 쓰나. 인간 사회에서 그렇게 배웠나요, 리델?” 

네이지의 품에는 어느새 리델이 집어던졌던 작고 하얀 도마뱀이 소중하게 안겨져 있었다. 
언제 그것을 받아냈는지 기척조자 없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리델은 
아직도 그녀를 자신의 사랑하는 연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네이지에게 심리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그의 두 눈은 참으로 딱해 보였다.
그는 거의 혼이 빠져나간 창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기에 이르렀다.

“네이지... 우, 우리 아이가...”

“‘우리’가 아니라 내 아이죠.”

그녀의 눈동자가 뱀의 그것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한다. 은색의 동공이 점차 확장되더니
흰자를 없애며 눈을 꽈악 채우는 그 그로테스크한 광경. 하지만 리델에게는 그런 괴이한
모습조차 보이질 않았다. 그는 오직 ‘내 아이죠’하고 말하는 네이지의 음성에만 반응을
했다.

“그게 무, 무슨...” 

“똑똑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영 아니었네.”

“네이지. 여보, 도대체...?”

말투에 있어서도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 그녀. 그에 불길함을 느낀 리델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그녀에게 한걸음 다가선다. 하지만 네이지는 그것을 용납지 않았다.

“그 이상 다가오면 내 아기에게 균이 옮겠어.”

전신을 덜덜 떨며 다가오는 리델에게, 네이지는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휘둘렀다.

-퍼억!

뭐가 날아오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리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로 쭈욱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크학...!”

바닥에서 솟아오른 몇 개의 종유석을 등짝으로 깨부수며 나동그라진 리델.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건 내장으로부터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비릿한 피 내음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뒤바뀐 후였다.

“아...?”

리델은 갑자기 동굴 안의 온도가 엄청나게 내려간 것을 느꼈다. 작던 바람소리가 다시
커지고, 입과 코에서 김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한 기분이 든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네이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

그와 그의 연인이 1년 5개월 동안 즐겁게 지내온 아늑하고 따뜻하던 나무집이 보이질 않았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텅 빈 공간만이 그의 시선을 반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엔 대신...

“아아아.”

넓은 동굴을 가득 채울 만한 크기의 드래곤이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목선과 유려한
콧잔등. 거대한 두장의 날개와 날카로운 발톱들이 달린 팔다리가 리델의 시야 한가득
들어온다. 

“역시... 인간을 가지고 노는 것은 재미가 있어.”

그가 사랑하던 여인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차원이 다른 목소리. 거의 천장에서부터 
들려오는 그 음성에 리델은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는 뭔가가 크게 잘못됐음을
느꼈다.
드래곤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희노애락의 감정이 그만큼 빠르게 급변하는 생물이 또 있을까? 덕분에 잘 놀았다.
인간의 수컷아. 아니, 사랑하는 리델 씨인가? 크르륵.”

“네이지...?” 

  네이지... 아니, 거대한 화이트 드래곤 키네지아르는 작고 나약한 한 인간을 경멸하듯
내려다보았다. 마치 1년이 넘는 시간동안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을 팽개치는 듯한 악동의
모습이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드래곤은 자신이 힘겹게 낳은 자식을 눈빛만으로 허공에 띄웠다. 
마법과는 다른... 드래곤이라는 종족만의 어떤 특수한 힘이었다.

“혈룡초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멍청한 인간이여. 이 지구상에서 고자를 
사랑해줄 암컷이 있다고 생각을 했나? 병신 같은 놈...”  

그녀는 허공에 뜬 채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 헤츨링에게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 아이는 다른 드래곤과 미리 정을 통해서 잉태한 거야. 너처럼 더러운 인간을
아비로 삼기엔 너무 특별한 태생이지? 크르륵.”

충격적인 대사를 늘어놓은 채 킬킬거리며 웃어대는 키네지아르였다.

“.....”

리델은 그제서야 이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 악질적인 ‘드래곤의 유희’에 자신이 걸려든 
것이다. 그의 모든 삶과 사랑하는 연인과 살아가는 의미와 기대하던 아기... 리델을 
지탱하던 모든 것들은 바로 이 순간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동시에 그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이 상황에 대해 대응할 방법이 있을까?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 영혼마저 박살이
날 정도의 끔찍한 충격이리라.

한 인간의 정신을 붕괴시킨 키네지아르는 이제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독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임신 도중에 쌓인 자신의 스트레스를 이렇게라도 푸는 것처럼.

“크르륵. 재미있군. 재미있어. 이제 저 자그마한 녀석이 미쳐서 날뛰겠지? 그러면 나는
그걸 가볍게 밟아주는 거야.”

그녀의 말대로, 드래곤이 저지르는 유희의 희생자가 되는 애꿎은 인간들은 백이면 백
정신적인 붕괴현상을 일으키곤 한다. 단순히 미치는 것을 넘어 아예 영혼까지 박살나는
나약한 심기를 가진 인간들.
키네지아르는 리델에게서 바로 그것을 기대했다. 그렇지 않으면 1년을 공들인 유희의 
마무리치고는 너무 싱거울 테니까.

하지만 리델의 경우는 그들과 약간 달랐다.

“.....”

충격으로 인해 미쳐 버리기는 커녕, 오히려 일년 오 개월 전의 냉철했던 그로 돌아온 
것이다. 리델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책장을 넘기듯 정리가 되었다. 그의 절망과 안타까움,
슬픔과 비참함이라는 감정은 모두 날아가고... 오직 키네지아르에 대한 분노만이 리델의 
가슴을 장악했다.

“크르륵.”

인간의 수컷이 아무런 말도 없이 땅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자, 키네지아르는 약간의 착각을 
했다. 주체할 수 없는 정신적 타격에 정신이 붕괴되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인간의 비참하고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을 관람하기 위해 드래곤은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언제나 그렇지만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녀의 기대를 박살내며, 리델이 입을 열었다.

“헤이스트(Haste).”

너무나 오랜만에 사용하는 마법이라 걱정이 앞섰지만 제대로 발동이 되었다. 녹색의 빛이
그의 전신을 감싸며 맴돌기 시작한 것이다.
리델은 깜짝 놀란 키네지아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엄청난 속도로 점프를 했다. 

“...!”

리델이 노린 것은 바로 그녀의 자식이었다. 알 수 없는 힘으로 인해 허공에 부유하던 
헤츨링을 낚아채는데 성공한 그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마법이 걸린 그의 
몸이 얼마나 빨랐던지, 움직이는 길을 따라 녹색의 잔상이 남은 정도였다.

“이놈!”

이 뜻밖의 사태에 키네지아르는 그만 당황을 하고야 말았다. 드래곤의 모습이라는 건
생각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몸을 펄쩍 띄운 것이다. 천장에 머리를 부딪친 드래곤은
돌가루들이 떨어지며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것에 가슴이 철렁 뛰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하나뿐인 헤츨링이 납치를 당한 것이다. 그것도 유희의 희생자에게!

“크아아아아!!!”

잠깐 시간 동안에 먼 거리를 달려 동굴을 거의 빠져나온 리델은 뒤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엄청난 드래곤의 포효에 기겁을 했다. 하지만 드래곤 피어(Dragon fear)조차 그의 속도를
멈출 수는 없었다. 마법의 효과가 풀리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리를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허억...!”

결국 무사히 동굴을 빠져나와 희디흰 눈밭을 밟을 수 있었다. 그러던 도중 리델은 뭔가가
근거리에서 자신을 쫓는 것 같은 기척을 느꼈다.

-쿵.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적이 있는 진동음. 바로 프로스트 자이언트의 그것이었다. 그가
힐끗 고개를 돌려보니, 거인은 바로 뒤에서 리델을 굉장한 속도로 따라오고 있었다. 
헤이스트의 위력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잡혀서 피 곤죽이 됐으리라. 

“.....”

그리고 리델은 예전에 이 거인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 놔둔 채 떠난 이유를 깨달았다. 
바로 화이트 드래곤 키네지아르의 명령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몬스터가 적다는 코스로
갔는데도 불구하고 자이언트가 나타난 것도 어귀가 딱딱 맞아 떨어진다. 모든 의문점이 
사라지며 오히려 머리가 개운해지는 것을 느낀 리델이었다.
그리고 일년 오 개월 만에 그를 찾아온 복수심.

“...개자식.”

헤이스트가 거의 끝나가기 직전 그는 최대한 속도를 내서 자이언트와 거리를 벌려놓았다.
그럼으로 해서 약간의 시간을 버는데 성공한 리델은 곧바로 마법의 언어를 읇조리기 
시작했다.

“디그(Dig)."

눈밭이 푸욱 패이며 상당한 크기의 구멍이 생겼고, 정신없이 달리던 프로스트 자이언트의 
오른쪽 다리가 거기에 빠졌다. 거인의 엄청난 무게 덕분인지, 아예 다리 한쪽이 전부 
들어가고 만다. 졸지에 바닥에 낀 자이언트는 우스꽝스럽게 몸을 비비 틀기 시작했다.

“...쌤통이군.”

자이언트를 무력화시킨 그가 안도감을 느끼려는 찰나, 동굴 입구에서 하얀색의 거대한
드래곤이 튀어나온다. 키네지아르가 자신의 거체를 어찌나 거칠게 움직이는지, 살짝 스친
것만으로 동굴 입구의 암반이 죄다 박살나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르르릉’하며
마치 천둥이 치는 것 같은 굉음이 설원을 뒤흔들었다.

“...크윽!”

그 질릴 정도로 스펙터클한 광경이 리델의 다리를 재촉한다. 이미 다리에 힘이 전부
풀린 그였지만, 이를 악물고 뛰는 그였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새하얀 눈밭이
끝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설원의 가장자리에는 그 끝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절벽이 존재했던 것이다.

“멍청한 인간 놈!”

대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날개 짓. 가히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가르며 리델에게로 쇄도하는
키네지아르의 모습은 마치 작은 병아리를 노리고 저공비행을 하는 솔개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물론 솔개 따위보다 훨씬 강하고, 크고, 공포스럽다는 데에는 조금의 이견조차 
없을 것이다.

“...우오오!”

그녀의 앞발에 채이기 직전, 리델은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자신의 몸을 날렸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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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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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대마법사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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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네지아르의 억센 발톱은 리델의 뒷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허공을 갈랐다.
그 바람에 생긴 그녀의 날개 짓에 엄청난 양의 눈보라가 생성된다. 그녀는 리델을 따라
바로 절벽 아래로 비행할까 생각을 해봤지만 그러기엔 절벽은 너무도 험난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조금이라도 신경을 놓으면 절벽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극심한 
상승기류에 휘말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캬아아아악!”

분노에 가득 찬 포효를 하며, 그녀는 절벽 위를 몇 바퀴나 맴돌았다. 처음으로 잉태를 한
친자식을 낳자마자 잃게 된 것이다. 인과응보라지만 이것은 너무나 크나 큰 죄 값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프로스트 자이언트의 모습이었다. 리델의 
간단한 마법에 당해서 새하얀 눈밭에 몸의 반쪽을 묻고 버둥대는 얼음의 거인.

“쿠오오오...!”

그 우스꽝스런 행태에 드래곤은 자신의 분노가 폭발함을 느꼈다. 머저리 같은 자식!
고작 인간 따위를 놓치다니!
아이를 잃은 것을 실제로 남편에게 들켰다가는 모르긴 몰라도 그녀 역시 무사히 넘어갈 순
없다. 극단적인 경우라면, 부부지간에 목숨을 건 전투를 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네놈 때문에!”

주인의 명령에 꼬박꼬박 잘 따르던 죄밖에 없는 프로스트 자이언트는, 자신을 향해서 
낮게 활공해 들어오는 키네지아르를 보며 절망에 빠졌다. 화이트 드래곤의 거대한 앞발이
자이언트의 눈에 순간적으로 클로즈업된다.

-우지직!

신장이 7m나 되는 프로스트 자이언트를 단숨에 낚아채서 하늘로 오른 그녀는 발톱에 힘을
주어 거인의 육신을 찢어발겼다. 10년 동안이나 그녀의 아래에서 지배를 당하던 마치 하인 
같은 몬스터를 가차 없이 분쇄한 것이다.
뜨끈뜨끈한 피와 함께 끈적거리는 육체의 구성물들이 마치 비처럼 설원에 흩뿌려지기 
시작한다.

“캬아아아악!!!”

케네지아르가 자식을 잃은 분노를 애꿎은 곳에 풀고 있을 때, 리델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중이었다.  

“크으으...!”

이렇게 높고 험난한 곳에서 타의가 아닌 자의로 뛰어내려보는 것은 처음이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단 한 번이면 충분할 듯한 경험을 하면서도, 그는 정신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쪽 
팔에는 자신의 자식이 아닌 키네지아르의 새끼가 여전히 꽈악 안겨있었다. 주변 사물들이 
쉴 새 없이 휙휙 지나가는 모습은 사뭇 두렵게만 보인다.

-철썩.

낙하 도중 절벽에서부터 길게 뻗어 나온 나뭇가지에 뺨을 스친 그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슬쩍 스친 것인데도 불구하고 눈알이 빠져나올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맞은
자리로부터는 곧 핏방울들이 나와 그의 얼굴을 역행하며 흐르기 시작한다.
나뭇가지가 조금만 더 두꺼웠다면 목뼈가 부러졌든지, 최소한 기절은 했을 거라고 리델은
생각했다.

“카학...!”

이 무저갱으로 뛰어 내린지 10초 이상은 된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그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절벽. 사정없이 눈가를 때리는 바람 때문에 시야가 아예 제대로 들어오질
않았지만 그래도 바닥이 멀었다는 것쯤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제엔... 장!”

그래도 이름값은 하는지, 위기에 처한 그의 두뇌는 한 가지 묘책(妙策)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 해낸다고 일이 끝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이런 일 초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라면 그건 따로 말할 것도 없다.

“.....”

고속으로 떨어지면서도 정신을 집중한 채 바로 캐스팅에 들어가는 그. 여느 평범한 
마법사가 보았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일이다. 그의 말도 안 되는 집중력과 삶을
향한 의지가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모습이었다.

근거리를 순간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마법. 그가 갑작스레 떠올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리델은 이 마법에 모든 것을 걸기로 마음을 먹었다. 레비테이트(Levitate)를 쓸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 비행의 마법은 수직이동 도중에 자칫 강풍에 말려들 우려가 있었다.

“블링크(Blink).”

불안하긴 했지만, 마법은 이루어졌다. 리델의 전신이 순간적으로 번쩍이며 공간이동을 해, 
3m 쯤 위에서 나타난 것이다. 마법이 발동된 직후에 생기는 약간의 ‘멈칫’하는 딜레이가
잠깐이지만 분명히 낙하속도를 늦추었다.
단순 계산을 하더라도, 100m에서 떨어지는 것과 10m에서 떨어지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블링크(Blink)!”

리델은 언제 바닥에 닿아 몸이 부서질지를 걱정하면서도 일정한 간격으로 블링크를 
발동시켰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참으로 경이로운 집중력이 아닐 수 없다. 
순식간에 두 번의 마법을 시전 한 그는 다시금 영창에 들어갔다.

“블링...”

-퍼억!

세 번째 마법을 마악 발동시키려던 리델은 갑자기 뭔가에 부딪히며 눈앞이 번쩍 빛나는 
것을 느꼈다. 

“커허억...!”

드디어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블링크 덕분에 계산상으론 대략 4m 높이에서 떨어진
셈이 된 그의 육체였다. 물론 아무리 4m라지만 무방비로 떨어졌다간 내장파열로 인해
바로 즉사하는 수가 있다. 
리델의 목숨이 붙어있는 것은 바로 바닥에 깔린 눈이 쿠션 역할을 해준 덕분이었다.

“크아아악...”

그는 엎드린 채로 연신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혈액의 색이 검은색을 띄는 걸로 보아서는 
내장을 크게 다친 모양이었다. 오른쪽 다리와 오른쪽 팔뼈에도 금이 간 느낌이다. 물론
블링크가 없었다면 지금쯤 리델의 육신은 옥상에서 떨어진 수박과 비슷한 정도의 모습이 
됐을 것이다.

“하아...?”

한바탕 피를 쏟아낸 후에야 리델은, 충돌과 동시에 자신의 품에서 헤츨링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깜짝 놀라 사방을 휘휘 돌아보는 그의 눈에 어딘가를 긁혔는지 사타구니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작은 새끼용이 들어온다. 기절을 했는지 숨이 끊어졌는지 작은 생물체는
별다른 미동을 보이지 않았다.

“크으윽...”

다리가 정상이 아닌지라, 리델은 눈 바닥을 낮은 포복으로 기어서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턱과 상체에 닿는 눈은 비록 차가웠지만, 그의 분노를 녹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낮아진 시선 덕분에, 리델은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

흰색의 헤츨링 바로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검은색의 작고 부드러운 무언가를...
‘그것’을 본 리델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광채를 낸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전신을 휘감도는 고통조차 잊은 채, 그는 입을 쩌억 벌리고 말았다.

“혀, 혈룡초...?”

온통 새카만 컬러에 마치 인간의 성기처럼 휘어지며 뻗은 줄기. 줄기 위에 바로 붙어있는
꽃은 이파리가 툭 불거진 것이 꼭 귀두 부분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척 보기에 식물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땅속에 그 뿌리를 깊게 박아
넣고 목숨을 이어가는 식물이었다.

“아아...”

이따금씩 그 작은 몸을 징그럽게도 꿈틀대는 녀석은 리델이 문헌에서 본 낡은 그림과 거의
일치하는 듯 보였다.

“하... 하하하.”

리델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토록 갈망하고 원하던... 자신의 일생의
목표가 되던 혈룡초를 너무나도 우연하게 찾은 것이다. 전진하는 속도를 좀 더 높이는
그였다.

그러는 동안 헤츨링의 사타구니에서 나오는 피는 눈밭을 타고서 이제 혈룡초의 뿌리가
있는 방향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그 광경에 불길한 느낌을 받은 리델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혈룡초를 잡으려 했다.

“...!”

리델은 그만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그 작은 식물이, 꿈틀거리며 그의 손을 피한 것이다.
게다가 식물의 포자가 씨를 뱉어내듯이... 줄기가 허리를 비틀어 열매와도 같은 꽃을 
쏘아내는 것이 아닌가!
리델의 염원이 가득 담긴 손길을 분명히 느꼈지만, 헤츨링의 피에 더욱 반응을 한 
것이었다.

흉측한 모양의 열매는 곧 새끼용이 흘려놓은 피에 몸을 적시게 되었다. 꽃잎을 움직이며
아주 조금씩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는 혈룡초의 열매.
스스로 더 나은 숙주(宿主)를 선택하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기생식물. 그것은 바로 
혈룡초의 독특한 특성이기도 했다.

“...아, 안돼!”

자기도 모르게 악다구니를 쓰는 리델. 하지만 혈룡초의 열매는 자신이 선택한 작은 화이트 
드래곤의 찢어진 사타구니에 기어이 몸을 처박고야 말았다. 

“으아아아!!”

리델의 절규에도 하늘은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숙주에게 기생을 시작한 혈룡초의 
열매는 곧 어떠한 변이(變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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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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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비극(悲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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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델의 목소리는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마치 70년 전으로 직접 여행을 다녀오기라도
한 것 마냥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다. 

“그, 그럼... 레이지와 리델 씨 사이에 애초부터 큰 연관이 있었던 거였군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아르케의 얼굴에는 혼돈과 경악의 빛이 반반씩 섞여있었다. 당사자인 
나에게도 리델의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가 나를 낳아준 부모와 그런 커다란 업을 
쌓은 사이였다니... 
그녀의 질문에 리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케 양. 세상에 100% 우연한 만남이란 그리 흔하지 않는 법이라네.”

“어째 그 동굴에 있다던 샘플이 레이지였다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말씀처럼 
들리는군요.”

아르케의 말대로라면 내가 동굴에서 암컷을 겁탈할 때, 느닷없이 그들이 들이닥친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리델이 70년 전에 이런 감정을 느꼈듯이 나 역시 사건의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리델은 이제 거의 허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론이라네. 그의 위치를 계속 추적하고 있었으니 나로서는 모를 리가 없는 노릇이지.
자네와 했던 약속 때문에 고이 넘기기는 했지만...”  

-쿵!

리델의 독백과도 같은 대답을 끊으며, 카이런이 갑자기 테이블을 쿵 소리가 나도록 주먹으로 두들기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좌중의 시선이 일순간에 집중됐으며, 그는 말도 안 된다는 기색으로 외쳤다.

“맙소사, 영감님이 고자였을 줄이야!”

“...딱히 자네에게 비밀로 했던 적은 없네만.”

리델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아르케와 카이런은 각각의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를 마음껏 
표출하기 시작했다. 나의 경우엔 분명 혼란스럽긴 했지만, 평소 궁금했던 점들을 모두 
알게 됐으니 오히려 개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서 아예 두뇌가 멍해지기라도 한 걸까?

“레이지.”

“.....”

무표정한 얼굴로 나의 이름을 입에 담는 늙은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양쪽 손목에
박힌 마법의 창이 아프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성 기능 불능자의 신세 한탄 말인가.”

그는 매우 음울한 눈빛으로 나의 하반신을 보았다. 

“너와, 네 어미가 나의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 지금 네 사타구니에 달려있는 그것 역시 
원래대로라면 나의 물건을 대용하고 있었겠지.” 

그 말을 들은 카이런이 또 한 번 놀랍다는 표정으로 대화에 끼어든다. 도무지 대화의
중요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해 분간을 하지 못하는 그였다. 

“아니, 영감님. 그 연세에 아직도 욕구 불만에 시달리는 거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현실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 카이런? 난 매일 잠자리에 들 때마다 차라리 몽정이라도 했으면 
시원하겠다는 생각을 아직도 갖곤 한다네.”

리델의 말에서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기라도 한 듯, 카이런의 표정이 바짝 굳어진다. 
생명체에게 있어 욕구를 풀 수 있다는 것은 신의 축복이자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다. 그런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를 평생 억압당한 채로 살아야만 한다니, 미치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을 만도 했다.
그의 비뚤어진 정신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한다.

“물론 내가 남들처럼 정상적인 성(性)생활이 가능했다면 마나를 다루는 이로서 이런 높은
경지까지는 이룰 수가 없었겠지. 하지만...”

말 중간에 약간의 뜸을 들이는 리델. 

“...내가 원하는 것은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는 호칭이 아닌, 고작 단 한 번의 
사정(射精)에 불과할 따름이라네.”

허탈한 표정의 마법사는 다시금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생기 없던 리델의 주름살 
그득한 눈이 미약한 빛을 발하는 듯 했다.

“그리고 이틀 전의 늦은 밤... 나는 네 어미의 목숨을 끊는데 성공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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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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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비극(悲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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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그에게 반문을 했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을 잇는 리델.

“에카스 산맥의 지배자, 키네지아르를 살해했단 말이다. 70년 동안 품고 살았던 염원이 
드디어 이루어진 셈이지.”

그의 얼굴은 7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이나 다짐한 복수를 끝낸 사람치고는 매우 담담해 
보였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자신의 친모를 죽였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마음의 동요가 없는 내 모습이었다.
인간중의 누가 그랬던가. 나아준 부모보다는 키워준 부모가 낫다고.

“그리고...”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보아하니 마법으로 날 공격할 셈인 듯
싶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리델의 시선이 이번에는 나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그 ‘스피어’라는 것으로 심장을 뚫리면 드래곤의 생명력이고 뭐고 없을 것이다. 
단 한 방에 절명하고 말겠지.

“도망쳐, 레이지!”

이것은 다급한 아르케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 하지만 양 손목을 리델의 마법해 당해
꼼짝도 할 수 없는 나였다. 이리저리 손목을 비틀어보았지만 도무지 뽑아낼 수가 없었다.
헛된 몸부림에, 거의 말라가던 상처에서는 피가 주욱 새어나온다.

“크윽...!”

“...이제 네 차례다, 아이야.” 

리델의 동공은 점점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복수가 거의 끝나가자,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역시 마찬가지로 희미해진 듯 보였다. 이 정도면 단순한 정신 이상자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리델은 여전히 9써클을 다루는 무시무시한 마법사였다.

천천히 마법의 언어를 읊조리기 시작하는 리델. 나는 그 사형 선고와도 같은 모습을 
보면서 ‘100세가 다 되어가는 인간 치고는 참 정정 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만둬요, 리델!”

아르케는 급기야 그들의 리더에게 테이블 위에 있던 꽃병을 집어 던지기에 이르렀다. 
리델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며 사기로 만들어진 그것을 피해냈다. 다만 꽃병을 피하느라 
생기는 충격에, 리델의 마법 영창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불쾌해진 심기를 겉으로 드러냈다.

“...방해할 생각인가, 아르케 양?”

“물론이죠! 이런 어리석은 살해는 용납할 수 없어요.”

아예 나의 앞을 가로막고 서는 아르케. 나보다도 작은 그녀의 한없이 가녀린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어떤 뭉클한 감정이 피어남을 느꼈다. 저 작은 
체구로서... 누군가를 지키려 목숨을 걸 수 있다니. 게다가 그 대상이 바로 나라는 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하늘의 축복이 아닐까?
아르케는 허공에다 손가락으로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大群

알 수 없는 문자가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새겨지며, 다섯 가지 빛깔의 찬란한 섬광을 
뿌려댄다. 이번에 시도하는 소환은 평소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리델은 깊게 패인 눈을 가늘게 떴다.

“오색소환(五色召喚)이라... 정말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로구만.”

형형색색의 문자가 사라지며, 곧 그녀의 소환물들이 넓은 응접실 안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전에 봤던 뱀파이어의 암컷과 트롤, 거대한 오우거와 어느 흉폭한 이빨을 길게도 드러낸 
채 붉은 색의 눈을 번뜩이는 황소만한 늑대 한 마리. 어느 누구 하나 약하게 보이는 것들이
없었다.

“크르르륵.”

아르케의 염원과 부름을 받고 도착한 그것들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며 리델과 대치를 
이루었다.

[오랜만이군, 꼬마.]

바로 옆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귀에 익은 음성에 고개를 돌려 보니, 초창기의 나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쳤던 블렉 헤드라는 녀석이 씨익 웃고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 놀랐잖아! 녀석은 자신의 커다란 이빨로 나의 손목을 꿰뚫은 빛의 창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블랙 헤드의 이빨이 보통의 것은 아니었는지... 내가 그렇게 용을 쓸 땐 꿈쩍도 안하던  
빛의 송곳들이 힘겹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레이지를 넘겼을 때부터 언젠가는 이것과 비슷한 상황이 오리라 예상은 하고 있었네.
그렇다고는 하지만...”

리델은 자신의 로브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비쩍 마르고 주름살 가득한 팔목이 드러났을
뿐이지만 그 모습은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지는 않나, 아르케 양?”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알고 보니 정신 나간 미치광이에, 욕구불만으로 가득 찬 수컷에 
불과했군요.”

“원래 마법사 중에서 정상인 인간은 몇 되지 않는다지... 후회할 걸세.”

  아르케와 리델이 서로 가시가 박힌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블랙 헤드는 빛의 창을 
모두 뽑아낼 수 있었다. 나는 덕분에 자유로워진 손목을 주무르며 몸을 일으켰다.
가까스로 일어설 수는 있었지만 역시 그동안의 출혈이 만만치 않았는지 머리가 띵하게
울린다.

“...고맙군.”

[선생으로서 제자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천연덕스러운 기색으로 아직도 자신이 나의 스승임을 강조하는 블랙 헤드였다.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 이건가? 하긴... 그가 아니었더라면 아직도 인간의 언어를 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중일 수도 있겠지. 

“스피어.”

눈앞이 순간적으로 번쩍였다. 리델이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마법을 날린 것이다. 흠칫
하며 눈을 부릅떴지만, 그의 목표는 내가 아니었다. 

“하악...!”

아르케가 호리호리한 전신을 크게도 휘청거리며 쓰러진 것이다. 리델을 제외한 전부가
크게 놀라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옆구리에는 어린아이의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상처로부터 검붉은 피가 
왈칵 올라오는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아르케!”

“영감님, 왜 그녀까지...!”

카이런이 허둥대는 자신을 감추지 못한 채 두 눈을 송아지처럼 치켜뜨고 리델을 쳐다본다.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니니 너무 호들갑 떨지 말게. 내가 아무렴 그녀를 죽이기까지야
하겠나?  그리고 자네도 이제 슬슬 내 곁에서 떨어지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걸세.”

그런 리델의 말에 설명이라도 하듯, 아르케가 쓰러진 채로 외쳤다.

“크윽... 공격해! 타겟은 저 마법사야.”

그녀의 신호에, 안 그래도 마스터의 상체에 분노하던 거대한 몬스터들이 기다렸다는 듯
리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응접실이 거의 모든 가구와 바닥에 균열이 가며 
테이블이 박살나며 날린다.
  다 죽어가는 자그마한 노인을 사방에서 덮치는 그들의 위용은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었다. 
그에 반해 상대적으로 심한 위화감을 띄는 리델의 모습. 지나가던 누가 본다면 다음 장면에
대해 눈을 가릴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포스 필드(Force field)."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의 장막이 생기며 그를 둘러쌌다. 장방형의 투명한 막은
마법사 주변의 모든 것을 밀쳐내기에 이르렀다.

“크워억!”

뱀파이어의 날카로운 검도, 트롤과 오우거의 압도적인 힘도, 거대한 늑대의 이빨도 
무력하게 튕겨져 나갈 뿐이었다. 집 채 만한 몬스터들의 산사태와 같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계속 여유 있는 표정으로 일관하는 리델 로디악의 무심한 모습. 가히 장관이라 
할만 했다.

“아무리 키네지아르에게 기력을 소비한 후라지만... 이건 너무 우습군.”

이대로는 앞이 안 보인다. 저 패밀리어들이 아무리 고르고 고른 몬스터들이라지만 역시
9써클의 마법사를 상대하기엔 한참 역부족인 듯싶었다.

“폴리모프.”

순식간에 변형을 일으켜 본래의 모습인 드래곤으로 돌아온 나는 일단 아르케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심한 출혈 때문에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심하게 창백해져 있었다.

“크악!”

그녀를 안은 채로 크게 홰를 치며 날아오른다.

-챙그랑.

커다란 창문을 박살내며 저택을 탈출한 나의 시야에는 시원한 공기와 함께 슬슬 노을이 
져가는 아름다운 밖의 풍경이 들어왔다. 응접실 안의 살기등등한 분위기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고요한 적막감.
절로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하아.”

창문을 형성하던 유리와 나무 조각들은 바닥으로 하염없이 떨어지며 소음을 일으켰다. 
다행히 근처엔 아무런 인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건물 안에서는 마법사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임 스톱(Time stop).”

그 순간, 시끄럽게 울리던 몬스터들의 괴성이나 소음들이 싸악 멈췄다. 리델이 밖과 안의
분위기를 일부러 맞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이다.

“크으으...”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이곳까지는 마법의 여파가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으니 말이다. 
나는 아르케를 품에 안은 채로 죽을힘을 다해 날개를 펄럭이며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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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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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비극(悲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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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한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아픈 건 아니지만 좀 따끔거리기는 하다. 아르케의 풍성한 
머리카락은 마구 휘날리며 시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잔인한 바람은 그녀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혈액들을 허공에 방울방울 흩뿌리는 중이었다.

“하악...”

한 번의 날개 짓이 있을 때마다 아르케의 깊은 상처에서는 간헐적으로 피거품이
일어난다. 피를 가득 머금은 스펀지에 일정한 압력을 가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면 될 것이다.
벌써 눈이 반쯤 감긴 아르케는 자신의 작고 갸름한 얼굴을 내 가슴에 파묻은 채 힘겨운
호흡을 했다.

“...추워, 레이지.”

미약한 음성이었지만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상당량의 피가 신체로부터 빠져나가니 
오한이 오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날개 짓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 
그랬다가는 당장 미친 마법사에게 붙들릴 것이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왕성을 모두 지나, 거대한 도시 하나를 건넜다. 다음에 나오는 넓게 굽이지는 강을 넘으니
상당히 생소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작은 오솔길과 마찬가지로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산골 마을의 변두리. 그냥 척 보기만 해도 평화로움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었다.
뜬금없는 몬스터와의 조우 따위는 없을 듯 하군.

아르케가 소환한 패밀리어들 덕분에 리델의 공격을 받지 않고서 꽤나 먼 곳까지 날아올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의 생사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리델의 성격 상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가진 분노의 창은 이제 그 날카로운 끝을 나에게로만 향하고 있을 테니까.
그의 음울한 눈빛을 생각하니 갑자기 분노와 함께 약간의 두려움이 느껴진다.

“크하악.”

전력으로 한참동안이나 비행을 했더니, 어깨부터 등을 지나 날갯죽지 부근까지 죄다 
뻐근하게 아파온다. 게다가 나의 양쪽 손목에서 흐르는 출혈량도 상당했다. 이제 더 이상의
비행이란 불가능할 정도로... 
리델의 추적이 느껴지지 않자 갑자기 긴장이 풀린 것처럼, 날개와 다리의 근육들에 힘이 
쭈욱 빠진다.

“크윽...”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여기까지가 한계. 급기야 맥이 빠진 나의 몸은 아르케를 안은 채로
추락하기에 이르렀다. 억지로 날개를 움직이려고 발버둥을 쳐봤지만 아직 어려 덜 여문 
나의 날개는 요지부동이었다. 지면의 풍경이 급속도로 커지며 눈 가까이 들어온다.

“카아악!”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몸을 한바퀴 돌리며 등을 바닥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짜낸
최후의 힘이었다. 다 죽어가는 아르케를 바닥에 깔 순 없지 않은가.

-쿠웅.

등짝이 화악 쓸리며 잠시 동안을 미끄러졌다. 그나마 무성하게 자라난 풀숲에 착륙을 
한 것이 다행이라고 할 만 했다. 우거진 풀들이 완충 작용을 해줬기에 떨어질 때의 충격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던 것이다. 정신이 드니, 순간적으로 향긋한 풀의 냄새가
코로 들이마셔졌다.

“...아파, 레이지.”

부드러운 나의 배 위에 엎드린 아르케의 몸이 움찔하며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아주 미약한 떨림과도 같았다.

“상처는 괜찮은가?”

“네 눈에는 괜찮아 보이니? 이 어린 주제에 발랑 까지기나 한 드래곤아...”

“농담을 할 정도면 괜찮은 것 같군.”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의 상태는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일단은 상처가 너무 깊은
데다가 거친 비행 도중에 출혈마저 너무 심해진 것이다. 물론 당장 죽을 정도의 출혈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계속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
머리가 복잡해진 나는 그대로 누운 채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후우... 젠장, 온몸이 쑤신다.”

“나 팔다리에 이상하게 힘이 하나도 없어... 역시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걸까.”

“혹시 달거리라도 하는 건가?”

평소 같았으면 나의 실없는 농담에 쿡쿡 웃었을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인 것 같다. 대신 그녀는 한심하다는 웃음을
자신에게 짓고 있는 듯 보였다.

“쿠쿡, 역시 넌 망할 변태 드래곤이라니까... 내가 이런 남자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한 
이유가 대체 뭔지 궁금해질 정도네... 크윽.”

생기라는 것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아르케의 얼굴. 나의 품에 시체처럼 엎드린 그녀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워진다.

“말을 아껴. 그러다가 진짜 죽는다.”

바보 같은 인간의 암컷...! 그러기에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거냐. 나 같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괴물 녀석이 뭐가 그리 좋다고.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억지로 붉은색의 하늘을 뚫어지게 올려다보는 나였다.

“레이지...”

문득, 나의 이름을 부르는 아르케의 힘없는 목소리. 

“음?”

“너, 촉수가 지금 내 다리를 더듬고 있어.”

“...!”

그녀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가만히 잠을 자고 있던 촉수가 언제부터인지 약해진 
아르케의 육체에 반응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젠장!”

미처 스스로 억제할 시간도 없이, 촉수는 크게 발기해 아르케의 작은 몸뚱이를 휘감아서
들어올리고 말았다. 평소부터 그녀를 향한 촉수의 갈망이 얼마나 심했던지, 나의 억압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촉수의 엄청난 반발력에 당황한 나는 크게 치켜떠진 눈으로 
아르케를 쳐다보았다.

“아르케!”

비록 불가사의한 힘에 의하여 공중으로 들어올려졌지만, 그녀의 얼굴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다만 아르케는 나를 내려다보며 서글프게도 아름다운 
미소를 한 번 지어보일 뿐이었다.
난 그 묘한 미소에 홀리기라도 한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을 때는 언제고, 이제야 내가 여자로 보이나보구나. 하지만 이렇게
운치가 없는 곳에서라니... 너무 무드가 없다고 생각은 안 해? 이래 보여도...”

심각한 출혈 때문에 눈이 반쯤 풀린 그녀가 도대체 무슨 기운으로 이야기를 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나. 아직 처녀란 말이야.”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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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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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비극(悲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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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약한 사냥감 앞에서 비열해질 정도로 강력해진 촉수. 아르케의 충격적인 발언에 놀란
내가 뭔가 다른 방도를 찾을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사냥감의 부드러운 신체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세 가닥의 그것들은 거의 광분을 한 듯한 
몸놀림으로 움직여댔다. 지금까지 내가 직접 여러 암컷에게 해왔던 일이지만... 아르케의
몸에 휘감기는 촉수의 모습은 정말 흉물스러워 보였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억압을 시도했으나 역시 먹혀들지 않는다. 촉수가 벌써 완벽하게 나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아악...!”

그렇게 그녀의 처녀성은 처참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나에게... 아니, 나의 몸을 숙주로 
삼아 잠식하고 있는 촉수에게! 공중에 매달린 그녀의 옆구리 상처에서는 다시 한 번 대량의
피가 뿜어져 나온다.
상처 때문일까, 아니면 고이 간직해온 순결의 파괴 때문일까. 생전 처음으로 맛보는 이
까무러칠 정도의 통증에 아르케는 이슬과도 같은 눈물을 흘렸다.

“크아아아!!”

내 신체에 달린 이것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분노가 머리를 하얗게 태운다. 이성을 잃은 
나는 급기야, 허리춤에 찬 빙룡을 거칠게 꺼내어 촉수에게 휘둘렀다.

-카앙!

나의 무시무시한 힘과 빙룡의 날카로움에도 불구하고, 촉수에는 작은 생채기만이 날
뿐이었다. 평소에 단단하다는 것쯤은 느끼고 있었지만 그 강도가 이정도일 줄이야!
게다가 촉수는 자신을 방해하는 나를 적으로까지 인식했는지, 가장 왼쪽의 한 녀석이 
공격을 해오는 게 아닌가?
설마 그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하고야 말았다.

“크윽!”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괴력과 단단함으로 후두부를 얻어맞은 나는 순간적으로
시야가 흐릿해짐을 느꼈다. 일부러 노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필이면 급소를 가격당한
것이다. 다리가 풀리며 몸의 균형 감각이 사라진다.

단 한 방으로 나를 그로기에 빠트린 촉수는 이제 내 목을 단단하게 고정한 채 억압하기 
시작했다. 숨통을 조일 듯 말 듯 힘의 조절을 섬세하게도 하는 촉수였다.
힘들게 기생에 성공한 숙주를... 차마 죽일 수는 없다는 듯이.

“레이지...!”

자신은 훨씬 심한 상황에 처해있으면서도, 아르케는 이런 나를 보며 걱정의 눈빛을 
보내왔다. 그 눈빛을 보니 뇌신경이 박살나버릴 지경이었지만... 촉수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어서 도저히 풀어낼 수가 없었다. 

“이 개자식아...!”

정신이 혼미해진 나는 흐릿해진 시야를 좌우로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런 
우리에게 도움을 줄만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 뿐...
차라리 어디에선가 몬스터라도 튀어나와서 공격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쯧쯧.]

내가 절망감에 빠질 무렵. 갑자기 인간의 그것과는 상당한 동떨어짐이 느껴지는 어떠한
음성이 들려왔다.

[통제할 수 없는 무기란 때로는 사용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법이지.]

“브, 블랙 헤드...?”

가물가물한 눈으로 보니, 어느새 나를 쫓아왔는지 블랙 헤드라는 녀석이 공중에 자신의
동그란 몸을 고정하고 있었다.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나와 촉수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아르케의 패밀리어. 
구세주라고 하기엔 믿음직스러움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를 제외하고서는 다른 
어디에도 기대할만한 대상이 없었다.

[도망치는 법은 제대로 배웠더구나. 마스터의 기운이 아니었다면 찾지 못할 뻔했다.
나의 사랑스러운 제자여.]
  
“아르케를... 아르케를 구해줘...”

나는 거의 심장까지 꺼내줄 듯한 기분으로 블랙 헤드에게 말을 남겼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남에게 부탁을 하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리라. 

[당연히 그럴 생각이다. 나 역시 마스터에게 빚을 진 것이 많거든.]

“아아악...!” 

그러는 도중에도 아르케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빨리
가라, 이 자식아...!
고개를 끄덕여 보인 블랙 헤드는 자신의 동그란 육체를 날려 아르케의 얼굴 앞으로
이동을 했다. 

[마스터. 이젠 어쩔 수가 없습니다요.]

그제야 자신과 계약을 맺은 패밀리어의 모습을 확인한 아르케였다. 

“흐윽...! 따라 왔... 구나, 수다쟁이야.” 

[미약한 저에게는 이 괴물을 떼어낼 힘이 존재하지 않는구만요. 게다가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사옵니다. 마스터, 더 늦기 전에 결정을...!]

“그, 그래...”

아르케는 고통에 절은 표정을 하면서도 나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깊은 보라색의 
눈동자가 한없이 떨리며 생기를 잃어간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은 작게 움직이며 뭔가를 말하는 듯 했다.

‘언젠가는 다시...’

다시 시선을 블랙 헤드에게로 돌리는 아르케. 그녀의 얼굴에는 확고한 다짐이 서려있었다.
고통스러운 촉수의 공격을 속으로 삭히며, 그녀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나는 계약을...! 그대와의 계약을 원한다, ‘블랙 헤드’.”

불행 중 다행이라면, 촉수 중에서 원래 표적의 입을 틀어막는 역할을 하는 촉수가 대신
나를 포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르케는 블랙 헤드의 이름을 자신의 
입에 담아 계약을 시도할 수 없었을 테지.
블랙 헤드는 자신의 커다란 눈을 잠시 감았다가 도로 떴다.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그대의 순수한 영혼은 저 블랙 헤드의 소유 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검고 불길한 연기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생성되며, 아르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유황(硫黃)의 냄새가 화악 풍기는 것이... 지옥에서부터 올라오는 죽음의
먹구름을 떠올리게 했다.
검은 연기에 흐릿하게 내비치는 아르케의 모습은 마치 타락한 천사처럼 보였다. 퇴폐적인
아름다움과 동시에 일말의 순결을 간직한 젊은 처녀의 모습.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였다.

그것을 끝으로... 블랙 헤드는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더욱 강해져라, 제자여.]

시커먼 안개가 사라지며, 아르케와 블랙 헤드의 모습도 자취를 감추었다. 마족들이 사는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이동을 한 것임이 분명했다. 음욕시인이라 불리어지던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허무한 달빛만이 그 슬픔을 흐드러지게 내릴 뿐이었다.

“.....”

그들이 사라지자 갑자기 찾아오는 적막감. 거세게 사냥감을 탐닉하던 촉수는 느닷없이
그녀가 없어지자, 목표물을 잃은 화살처럼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허둥대는
꼴이란... 못된 장난을 치다 부모에게 들킨 어린아이와도 비슷해 보였다. 목을 압박하던 
촉수 역시도 급속도로 느슨해지며 풀어진다.

그 바람에 맥이 탁 풀린 나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이 병신아.”

촉수에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욕지기였다. 확실한 것은
둘 다 욕을 들어먹어도 싸다는 점이었다.
풀숲에 엎드린 채 점점 커져가는 날개와 신체의 변화를 느끼며...

“크... 흐으윽...!”

난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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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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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비극(悲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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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델의 추적이나 주위의 인적들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한참동안이나 목을 놓아
울었다. 서커스단에서 그 모진 고통을 당했을 적에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나이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비통함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듯싶었다.
쌀쌀한 기온 때문일까, 아니면 텅 비어버린 심장 때문일까. 커다란 오한이 잠시간
비늘 끝을 어루만지며 스쳐간다.

“.....”

정신이 든 후의 내 신체는 몰라보게 강대해져 있었다. 약간 몸에 비해서 크다싶던
머리는 젖살이 빠져서인지, 혹은 몸이 커져서인지는 몰라도 날카로운 황금비율을 이루게 
되었다. 드래곤의 모습일 때에도 두 다리로 잘 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손목의 깊은 상처도 말끔하게 사라졌으며, 여러모로 심하던 피로와 고통이 전부 그 자취를
감추었다. 원기가 왕성해지는 느낌이다. 이번의 변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화악
달라진 날개였다. 크기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날개의 마디마다 각이 눈에 보일 정도로
다부진 성장을 이룬 것이다.

나의 몸은 이제 전체적으로 어렴풋하게나마 성룡의 자태가 나오기 시작하는 듯 보였다. 
마치 그녀가 내게 마지막으로 주고 간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길.”

그래도 일단은 그녀가 최소한 목숨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을 하기로 했다. 실제로
아르케는 죽지 않았으니까. 블랙 헤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 괴롭다. 때문에 끓어오르는 이 분노를 해소할 상대가 필요했다.
난 더욱 크고 날카로워진 손아귀로 촉수를 잡아 조르기 시작했다.

“...죽어.”

하지만 촉수는 이제 자신이 순한 강아지라도 되는 듯, 부드럽게 내 손을 피할 뿐이었다.
이쯤 되면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게다가 마치 스스로 수음(手淫)이라도 하는 모양새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허탈하고 바보 같은 마음이 들어 결국엔 그만 두기로 했다.

“폴리모프.”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몸이 커지며 다른 능력도 생긴 것 같다. 의복을 창조하는
영역까지 도달한 것이다. 나는 아르케가 나에게 선물했던 하얀색의 옷을 떠올리며 그것을
창조해냈다.
적당히 맞아 떨어지는 옷의 사이즈를 확인한 후 바닥에 떨어진 빙룡을 집어 들어 검집에
채운다. 이것으로 그를 떨어뜨린 것이 두 번째... 둘 모두 내 힘을 벗어난 상대들이었기에
어쩔 수는 없지만 거듭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변함이 없다.

“후우.”

한나절 사이에 온갖 고초를 겪어서 그런지 굉장히 허기가 진다. 아직 헤츨링인 나에게는
적당한 수면과 적당한 식사가 그야말로 필수요소였으니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나는 비행을 하며 봐두었던 중간 규모의 마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우선 그곳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일단은 당장에 내가 
살아야지만 훗날이란 것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기분이 들뜬 나는 바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지금 나의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딱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르케의 안위요, 또
하나는 리델에 대한 복수심이다. 물론 나를 낳은 어미를 그가 죽였다고 해서 복수를
다짐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드래곤으로 자랄 수 있었던 내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린 그였으며, 결정적으로는
아르케를 거의 죽일 뻔 한 소지를 제공한 장본인이었으니까.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키네지아르에게는 호불호의 아무런 감정이 없을 뿐이다.

나는 복수심에 불타는 심정으로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날아가면 지금보다 몇 십 배는 
빠르겠지만, 그랬다가는 마을 주민에게 들킬 염려가 있다.
다행히도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오솔길과 이정표가 나를 그곳으로 인도해주었다. 

얼마간을 빠른 걸음으로 이동한 나는 중간 규모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꽤나 늦은 
밤 시간이었지만 여행자들로 보이는 인간들이 마을의 거리 곳곳에서 노닥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눈에 띄는 나의 모습을 힐끔 쳐다본 수컷 하나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르피안 공주가 요번 왕실 파티에는 직접 참석했다면서?”

“그렇다고는 하는데, 어디 높은 것들의 사정을 내가 알 리가 있나.”

쓸데없는 가십거리에 불과한 대화. 한 무리의 수컷들은 내가 보기엔 전혀 영양가 없는 
잡담을 나누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난 그들을 무심히 지나치며 마을 중앙에 있는 술집 겸 
여관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콧수염을 얄쌍하게도 기른 주인이 나를 맞이한다. 그의 생김새가 서커스단의 단장과
너무도 흡사했기에, 나도 모르게 잠시 동안 그를 노려보고 말았다.
처음 보는 손님의 지독한 살기를 눈빛에 크게 당황한 중년의 수컷.

“엑,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니오.”

실수를 했군. 고개를 가로저은 후 한쪽 구석의 테이블로 향했다. 난생 처음으로 와보는 
인간들의 마을이요, 처음으로 대하는 인간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역시 드래곤이라는 종족의 커다란 이점 때문이 아닌가 싶다. 
테이블을 잡고 의자에 앉은 나는 종업원에게 손짓을 했다. 메뉴판이 있지만 글을
배우지 못했으니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거나 허기를 채울 수 있을 만한 걸로 가져와.”

이런 주문을 평소에도 많이 받아 왔는지, 착실하게 생긴 여급은 겉으로는 자신과 동년배로
보이는 나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막상 주문을 하긴 했지만 사실 나의 수중엔 음식값을 치룰 돈이 단 한 푼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은 배를 채우고 보자는 심보였다. 그 다음엔 도망을 치든 뭘 하든 어떻게든 
되겠지. 여차하면 위험을 감수하고 드래곤으로 폴리모프해서 날아가면 될 것이다. 평범한
인간의 생활이라는 것을 실제로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그게 좀 걸리긴 한다.

“.....”

가만히 앉아서 음식을 기다리는데, 이곳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누군가가 날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끈끈하고 집요한... 뭔가 노리는 구석이 있는 시선이.
게다가 그 시선의 주인공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게로 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기... 실례지만, 제가 합석을 해도 될까요?”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어느 늘씬한 체형의 암컷이었다. 어두운 실내라 그녀의 얼굴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새카만 가죽 재질의 옷이 암컷의 몸매를 유실하게 드러낸다.
이 갑작스러운 접근에... 나로서는 일단의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자리도 많은데, 왜 굳이.”

“저는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초면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변명치고는 너무나 낯 뜨거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괴상한 암컷으로군.  괜히 거절을 하기도 좀 그런 상황이었기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좋으실 대로.”

“와아, 고마워요.”

허락이라는 것을 받자마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 곁에 의자를 바짝 붙이며 앉는 
암컷이었다. 그 바람에 여성의 달콤한 체취가 민감한 나의 후각을 자극했다.
미약한 렌턴의 빛은 그제서야 이 대담한 성격을 가진 암컷의 얼굴을 비추었다.

“...아아.”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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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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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비극(悲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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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긴 갈색의 단발머리를 한 그녀는 바로, 일전에 아르케가 내게로 데려왔던 사형수가
분명했던 것이다. 
그 동안 영양공급이 잘 이루어졌는지 초췌했던 얼굴과 몸에는 적당한 생기가 보였다. 그저
비쩍 마른 범죄자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때보다 훨씬 나은 모습이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보지요?”

“.....”

내가 놀란 이유가 자신의 미모에 있다고 혼자서 판단이라도 한 듯. 그녀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예쁜 척을 하는 것을 보니 모를 수가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실제로 미색이 짙은 얼굴이긴 했다. 작은 얼굴에 전체적으로 시원시원한 눈코입이 
똑바르게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왼쪽 뺨의 흐릿한 검상은 살벌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와일드한 분위기를 한 층 부각시키는 듯 했다.
내 표정을 살핀 그녀는 은근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어디서 오신 분이죠? 차림새를 보아하니 이 시골에서 뭔가를 얻으실 분은 아닐 듯
해서요. 혹시 귀족가문의 자제분?”

자신의 암갈색 눈동자를 반짝 빛내는 암컷. 드래곤이라고 솔직하게 밝힐 수도 없었으며,
따로 뭐라고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기도 해서 그냥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히 그렇다고
했다가 무슨 지방의 어느 영지를 다스리냐고 묻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니까.
침묵으로 일관하는 나의 태도에, 암컷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 자신의 머리를 
툭 친다.

“흐음. 제가 초면에 너무 귀찮게 굴었네요. 미안해요.”

배시시 웃으며 이번에는 악수를 청해오는 그녀였다. 난 혹시 촉수가 발동 되진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저는 폴리아라고 해요. 풀 네임은 폴리아 슬레이워커.”

“...레이지.”

상대방이 풀 네임을 말하지 않자, 그녀는 좀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아미가 찌푸려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성이 따로 없는 것을 난들 어쩌겠어. ‘레이지
페르버시온’이라고 들러댈 수도 없고...
그러는 동안 식사가 만들어진 모양이다. 예쁘장하게 생긴 점원은 입가에 깔끔한 미소를 
띠며 커다란 쟁반을 손에 받치고 걸어왔다.

“즐거운 식사되시길.”

“고맙소.”

베이컨과 토스트, 샐러드와 와인 한 잔이 식사의 전부였다. 거의 매일을 사슴고기만  
먹어온 나로서는 식단이 형편없게 느껴질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었지만, 허기진 위장은 
그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저런 얇디얇은 베이컨도 두터운 스테이크
보다 화려하게 보이는 것이다.

“먼저 실례.”

포크로 베이컨을 찍어 드는데, 암컷의 어깨부분이 움찔하며 테이블 아래에서는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슬쩍 눈을 돌려서 보니, 자신의 이름을 폴리아라고 밝힌 암컷이 역시 상당한 속도로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미소를 지은 얼굴과는 달리 테이블 아래에서 뭔가 모종의
행위를 시작하는 그녀였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속담은 바로 이런 것을 뜻하는 말일 테지.
아마 대놓고서 소매치기를 하려는 듯싶다.

아무것도 없는 나의 바지 주머니로 향하는 그녀의 재빠른 손놀림. 이것은 생각 외로 빠른 
것이어서... 평범한 인간의 눈이라면 잘 보이지도 않았을 테지만 상대가 너무 안 좋았다. 
나라는 녀석은 바로 용안(龍眼)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흠.”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잡아서 행동을 멈추게 했다. 이 뜻밖의 상황에 폴리아의 예쁘장한 
얼굴이 순간적으로 대폭 굳어진다. 나는 단단히 움켜쥔 팔을 들어 그녀의 손목을 테이블에
올리고 가볍게 눌러보였다.

“...너, 뭐냐.”

“어떻게...!”

이런 경우가 거의 없었는지, 폴리아는 거의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었다는 말씀이렸다. 한 번 사형에 처해질 뻔 하고서도 다시 범죄를 
감행하는 그녀의 용기와 배짱에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나는 평소에도 무표정한 얼굴을 더욱 냉막하게 굳히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식사비를 대신 내면 죽이는 건 생각해보지.”

“미, 미친놈.”

일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깨달은 폴리아는 욕지기를 뱉어냈다. 지금까지의 사근사근한 
모습은 당연하지만 연기였던 것이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자신의 뒤쪽에다 대고 손짓을 해
보이는 그녀.
자신의 프라이드가 박살난 폴리아로서는 아무래도 심기가 상당히 불편한 듯 했다.

“너야말로 살려달라고 빌어야할 걸?”

과연 그녀의 말대로 맞은편에 앉아있던 덩치 큰 수컷 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들은 자신의 고개며 손가락 등을 꺾으며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보스?”

“아, 이 미치신 분 좀 적당히 주물러 드려라.”

카이런보다 조금 작은 신장과 덩치를 가진 그들. 그래도 일반적인 인간 성인의 사이즈를
가볍게 초월하는 몸집이다. 카이런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몸을 구성하는 대부분이 
물렁한 지방이라는 것이었다. 
짜증을 느끼는 나는 여전히 폴리아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로 자유로운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휙’하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난다.

“...욱.”

그래도 적당히 친 건데, 아직 힘 조절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나의 손등으로 복부를 
얻어맞은 거한은 순간적으로 호흡곤란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눈동자가 완전히 뒤로 
돌아가며 풀썩 쓰러지는 수컷. 그 바람에 의자 몇 개가 나동그라진다.
자신의 동료가 일거에 실신하니 나머지 녀석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이 개새...!”

더 이상 볼 것 없다고 판단한 나는 주저 없이 주먹을 뻗었다. 인간 이상의 스피드에 
대응할 생각조차 못하는 덩치.

-퍼억.

그의 두터운 뱃살에 내 팔은 거의 손목까지 파묻혔다. 내장기관을 부순 감촉이 손끝에서
부터 전해져온다.

“커어억...”

이름모를 수컷은 그렇게 입에서 게거품을 흘리며 나무 바닥에 드러누웠다. 두 명의
덩치가 나란히 포개어져 실신해있는 장면이란,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죽이진
않았지만 그들의 내부는 아마 크게 망가졌을 것이다.
실내의 공기가 싸해지며 인간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로 쏠리는 것이 느껴진다.

“식사할 땐 개도 안 건드리는 법이라지.”

난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빈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물론 폴리아의 가느다란 손목을 꽉
움켜쥐고 말이다.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여성의 손목. 잠깐사이에 벌어진 참극은 그녀의 
표정에도 큰 변화를 주었다. 폴리아의 얼굴에 ‘잘못 걸렸다’라는 속마음이 완연히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의 시간동안 음식을 남김없이 먹은 나는 주저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폴리아는
그런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다 먹은 것 같은데... 그만 놔주면 안 될까?”

“넌 따로 할일이 있잖아.”

그녀를 끌고 카운터로 향했다.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여관 주인에게 한 마디를
던진다.

“이 여성분이 계산할 겁니다.”

“...아.”

정신이 퍼뜩 든 그는 바로 계산서를 꺼내 폴리아에게 내밀었다. 투철한 프로페셔널이라
칭찬받을 만 하군.
잠시 생각을 해보면 그녀 덕분에 폴리모프도 습득하고 이만큼 강해진 셈인데 말이지. 
식사까지 반쯤 강제로 얻어먹으려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다만 수중에 돈이
없었기에 저지른 행동일 뿐이라고 스스로 자위하며 폴리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

여관을 빠져나오는 나의 발걸음은 스스로가 놀랄 만큼 가벼웠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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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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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비극(悲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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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진 배를 채웠으니 일단은 마을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혹시나 리델이 추적자를
뿌려놓았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 인간들의 눈길이 많은 곳은 어쩔 수 없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아까 여관에서 일어난 싸움에 대해서는 스스로 반성. 

평범한 걸음걸이로 마을을 빠져나왔다. 간혹 깔끔하게 차려입은 인간 암컷들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가볍게 무시를 해준다. 혹시라도 촉수가 발동하면 큰일이 날 테니까.
마을 어귀를 빠져나오자 산뜻한 자연의 향기가 코를 찌른다. 인간들의 체취가 섞이지 않은
맑은 대기.

“흐음.”

생애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완벽한 자유.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다. 한 편으로는
아르케의 일이 굉장히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블랙 헤드라는 녀석의 충성심은 실로 
대단했으니까. 결코 그녀에게 위해가 가는 행동은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언젠가는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사실 이런 식으로라도 자위를 하지 않으면 당장에 미쳐버릴 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순물이 빠진 청량한 밤공기가 가라앉은 나의 기분을 그런대로 
달래주는 듯 했다. 
하룻밤 사이에 그야말로 정처 없는 나그네 신세가 된 나였다.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걷고 있으려니 예전에 아르케와 함께 거닐던 왕성 근처의 대로가 생각난다.


“.....”

나 원 참, 그녀가 이미 죽어서 땅속에 묻힌 사람도 아닌데 자꾸 회상하는 식이 되어버리는
군. 계속 이러다가는 드래곤 주제에 우울증에 걸릴지도 모르겠어. 주기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들을 애써 고개를 저으며 지우려 노력했다. 
그러는 동안 오솔길이 끝나고 한적한 숲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나무들이 빽빽이
자라나있는 건강한 숲.

마침 잘됐다. 나로서는 왕성에서 멀어질 수만 있다면 어디든 좋으니까. 오늘밤은 잠이 올 
때까지 무작정 걷기로 마음을 먹었다. 잠이 오면 아무데서나 쓰러져 피곤에 지친 몸을
달래면 된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인간의 모습으로 걷는 행위에는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 
드래곤의 모습으로 비행을 하는 건 속도가 무척 빠르기는 하지만, 그렇게 정신없이 
비행하는 도중에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걸음으로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여러 가지 생각들과 낭만이랄까 정취랄까... 
그런 것으로 인해 나라는 인격 자체가 조금씩 다듬어지는 느낌이 들곤 한다. 사색에 잠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괜찮은 일이다.

“음...?”

나무와 거친 수풀을 뚫고 계속 걷는데, 뒤에서부터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드래곤인 나의 청력에도 그다지 이질적이지 않은 소음. 바람이 부는 방향에
맞춰서 수풀을 건드리는 것이 보통의 여행자는 아닌 듯싶었다. 
리델에게서 도망을 친 게 언제라고... 벌써 추적자라도 붙은 것일까?

모르는 척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던 나는 옆에 있던 고목에 붙은 커다란 딱정벌레를 조용히
잡았다. 거의 어른의 손바닥만한 크기에, 얇은 날개를 감싼 등껍질은 마치 철갑이라도 두른 
듯 강인해보였다. 아마 이것의 이름이 ‘철갑딱정벌레’라지. 곤충 주제에 엄청난 괴력을
발휘해 손아귀를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는 그였지만 물론 나를 이길 수는 없다.

그리고 추적자의 움직임이 나를 따라서 막 시작되려는 찰나. 허리를 리드미컬하게 틀어
철갑딱정벌레를 던진다. 대기를 가르고 앞에 걸리적 거리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이 작은
사출형의 흉기(?)가 위력적인 기세를 내뿜는다.

-슈악.

엄청난 파공음을 내며 10m정도의 거리를 직선 운동한 철갑딱정벌레는 표적으로 삼았던
추적자의 신체에 정확하게 충돌한 후 튕겨져 나갔다. 

“악...!” 

자지러지는 추적자의 비명. 조금 의외인 것이... 추적자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으로 
미루어봐서, 그는 여성임이 분명했던 것이다. 어쨌든 단 한 방으로 그자를 거꾸러뜨린 
나는 빠른 걸음으로 정체불명의 추적자에게 다가갔다.

“...또 너냐.”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문의 추적자의 정체가 바로 폴리아 슬레이워커라는 긴 이름을
가진 암컷이었기 때문이다. 김이 팍 새며 한숨이 나온다.

“아아악, 제길...!”

허벅지를 이루는 뼈에 금이라도 갔는지,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몸을 일으킬 줄을 
몰랐다. 자세를 보니 아마 자신에게 날아오는 그것을 피하려고 움직이다가 스쳐 맞은 것 
같은 느낌 든다. 의외로 동체시력이 있다는 말씀.

약간 긴 갈색의 단발을 깔끔하게 포니테일로 묶은 폴리아의 눈동자가 나를 죽일 듯
노려본다. 방귀뀐 놈이 성낸다는 인간의 속담이 생각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살기를 품고 쏘아보는데...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최조를 하기 위해서 그녀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리려다 이빨로 깨무는 바람에 겨우 
피해냈다.

“아까부터 왜 자꾸 따라오는 거지?”

“내 마음이야.” 

나의 차분한 물음에 폴리아는 고개를 획 돌리며 짧은 답변을 했다. 물론 그것은 내가 
납득을 할만한 대답이 아니었다.

“리델이 보냈나?”

“그따위 이름은 몰라.”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지만 ‘리델’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일단 리델이 보낸 암살자 따위는 아닌 듯싶다. 그라면 이렇게 약한 인간을 보내진
않았을 테지.
나는 인내심을 갖고 그녀에게 다시 묻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날 미행한 이유가...”

“아파 죽겠어! 뼈가 부러진 사람을 앞에다 두고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고 싶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폴리아. 이제 거의 황당할 지경이 된 나는 손을 움직여 그녀의 
허벅지를 만져보았다. 

“무슨 짓이야!”

무슨 오해라도 했는지, 그녀가 나의 손을 쳐내며 외쳤다. 아무렴... 명색이 드래곤이라는
녀석이 무방비 상태가 된 인간을 상대로 성희롱을 할까? 게다가 직접 만져본 폴리아의
허벅지는 확실히 부러진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주제에 그렇게 엄살을 피우다니.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다리는 살짝 부어올랐을 뿐이다.”

“엿 먹어! 개자식아.”

이 암컷과의 대화를 더 이상 끌어봐야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리델이 보낸 밀정(密偵)이 아니라면 
머리 아프게 신경 쓸 가치도 없지.
자신에게서 관심이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폴리아가 허둥대기 시작한다.

“자, 잠깐!” 

귓전에 들리는 앙칼진 목소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멈춰서긴 했지만 그녀는 사람을 정말 
귀찮게 하는 타입임에 틀림이 없었다.

“...또 뭐냐?”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릿발이 날리도록 사납게 굴던 폴리아의 
태도는 180도로 뒤바뀐 상태였다.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로 심한
감정의 변화였기에 보는 내가 다 놀랄 지경이다.        

“도저히 일어서지를 못하겠어. 도와줘...”

거의 울어버리기 직전의 얼굴로 내게 애원하는 그녀였다.

“.....”

미칠 노릇이군.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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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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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비극(悲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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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련한 얼굴을 보니 차마 길바닥에 버려두고 떠날 마음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생각을 해보니 이 암컷이 자신도 모르게 나에게 끼친 도움이 이만저만이 아닌지라, 결국 
도움을 주기로 했다. 그녀 스스로는 전혀 모를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큰 이익을 받은 건
사실이 아닌가.
이런 걸 보면 나에게도 양심이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런 방식으로 이동을 하는 건 바로 다음 마을까지 뿐이다. 마을에
도착하면 그 즉시 의료시설에 처박아두고 떠날 거야.”

“흥, 좋으실 대로.”

난 그녀의 겨드랑이에 어깨를 끼워 넣고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에서 오는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는 폴리아. 부러진 정도는 아니지만 그 통증은 상당히 심할 것이다. 허벅지
전체에 시퍼런 피멍이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폴리아는 억지로 고통을 참으면서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크으... 아까 마을에서도 느꼈지만, 당신 힘 좀 쓰는데? 대단할 정도야. 내 부하 녀석들
도 어딜 가서 맞고 다니는 실력은 아닌데... 그걸 단 한 방씩에 실신시키다니.”

“네 부하들이 약한 거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들은 어디에 있지?”

난 문득 아까의 비계 덩어리들에 생각이 미처 그녀에게 물었다. 일행이 분명할진데 
여태껏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의아했던 것이다.
내 어깨에 기대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폴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기절한 걸 그냥 놔두고 당신을 쫓아온 거야. 정신이 들면 알아서들 행동하겠지.”

“.....”

이 암컷과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호기심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고작
인간들 따위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일 필요는 없지.
보조를 맞추며 천천히 몇 걸음을 걷는데 폴리아가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당신... 여자에게 하는 행동은 그다지 능숙하지 않은데 말이야.”

뜬금없이 은근한 기색으로 말을 잇는 그녀였다. 눈매가 가늘어지며 장난기어린 미소가
입가에 지어지는 모습이 사뭇 귀엽긴 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폴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서는 꽤 많은 여자들의 체취가 느껴져. 어떻게 된 거지?”

“...남이 사, 신경 쓰지 마라.”

대충 얼버무렸다. 그녀의 질문에‘그 꽤 많은 여자들 중의 하나가 바로 너다!’라고 
솔직히 밝힐 수는 없는 입장이 아닌가. 폴리아가 끈질기게 내 눈을 쳐다봤지만 나는
그것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뜨끔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계속 걸음을 옮긴다.

“...흥.”  

대답이 시원치 않자 바로 굳어지는 폴리아의 안색.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내 등을
툭 친다.

“이봐요, 다음 마을에 도착하려면 하루는 족히 걸어야 할 걸?”

“그래서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러니까 지금 어두울 때 미리 눈을 붙여두자는, 그런 의미야. 지금 내가 상당히 
피곤한 상태거든.”

기가 막힌다는 생각을 한 나는 그녀에게 눈을 부라리며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나이도 많지 않아 보이는 암컷이 어찌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걸까? 나의 
짧은 기간동안 내린 판단으로, 폴리아라는 여성은 요부(妖婦)는 될지언정 창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너는 내가 무섭지도 않은가?”

폴리아는 잠시 끔찍한 과거를 되새기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이를 악물었다.

“교도소에서 생활할 때 당신보다 더한 괴물한테 당한 적이 있거든. 후우... 요즘도
가끔 꿈에서 나올 때가 있을 정도야. 그에 비하면 당신은 그다지, 귀여울 정도야.
게다가 잘생겼잖아?” 

“.....”

‘그 괴물이 바로 나다!’라고 밝히기엔 또 너무 늦은 타이밍이라,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척 했다. 
왠지 이 암컷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죄책감이 우후죽순(雨後竹筍) 늘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폴리아라는 여자가 나에게서 원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마른 나뭇가지들 좀 모아다 줘. 나에게 부싯돌이 있으니까.”

결국 그녀의 주장대로 노숙을 하게 되었다. 폴리아를 적당한 자리에 누인 후 숲의 
여기저기에서 마른 나뭇가지며 낙엽들을 긁어모은다. 혼자라면 불의 필요성은 제로가 
되지만, 그녀는 인간에다 환자니까 어쩔 수 없다.

“.....” 

내가 비록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 암컷에게 이렇게 잘해줄 필요까지는 
없다. 어차피 100년도 살지 못하는 하찮은 인간에 불과할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부탁을 피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아르케의 기억 때문인 것 같았다.
아르케덕분에 인간에 대한, 특히 여성에 대한 증오심은 거의 사그라 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잠시 동안 모은 땔감들을 폴리아의 앞에 고스란히 늘어놓았다.

“고마워. 여자들한테 괜한 인기가 있는 건 아니었네?”

“시끄러워, 불이나 지피시지.”

그녀는 실실 웃으며 부싯돌을 부딪쳐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솜씨가 괜찮았던지
금방 불씨가 만들어진다. 작게 피어난 불씨를 얇은 솜조각에 옮기는 폴리아. 
미약하던 불씨가 잠깐 사이에 모닥불로 변하는 광경은 나의 왕성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불을 피운 후 배낭에 부싯돌을 집어넣은 그녀가 이번에는 육포를 꺼내서 내민다.

“당신, 레이지라고 했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조용히 받았다. 원래 성장기엔 아무리 음식을 먹어대도 부족한 
법이기 때문이다. 처음 먹어보는 육포의 맛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넙죽 받아먹는 나의 모습을 보며, 폴리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생긴 걸로 보나 차림새로 보나 어디 지방에 있는 귀족가의 아들이라도 되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돈이 없는 거지?”

“...글쎄, 어쨌든 소매치기에게 그따위 평가를 받고 싶지는 않군.”

수중에 돈 한 푼이 없어도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지장이 없는 나였기 때문에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는 본인은 나의 주머니를 털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 주제에
내가 돈이 없다고 불평을 하다니... 굉장한 사고방식이라 할만 했다.

“소매치기라니...! 이 몸은 엄연히 다음 세대의 도적 길드 마스터가 될 몸이라고.”

그런 거였나. 이제 아까의 그 덩치들과 그녀의 관계가 머릿속에 정립될 것 같다. 길드에서
힘 좀 쓰는 녀석들이었나 보군.
폴리아는 나를 노려보며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여자라고 우습게보지 마셔. 아깐 방심하다가 당했을 뿐이니까.”

“그러지.”

나에게 생식기에 관련된 모욕을 질펀하게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르겠지. 대신에 그 행동을 그대로 리델에게 하는 인간이 있다면 어떻게 될지 볼만 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성별(性別)이 뒤바뀌는 것쯤은 감수를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폴리아의 옆에 턱을 괴고 앉은 채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저기, 이봐.” 

혼자서 마악 상념에 들려면 꼭 그 타이밍을 노려 나에게 말을 시키는 폴리아. 이번엔 또 
어떤 성질 긁는 이야기를 할 생각인가. 귀찮은 단계를 초월해, 이제는 그녀의 부름에 반사
적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지경에 이른 나였다. 
하지만 모포를 두른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조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잠이 들더라도 혼자 도망치면 안돼요, 알았지?”

“.....”

그녀의 얼굴에서조차 흐릿하게나마 아르케의 모습을 발견한 나는 넋을 잃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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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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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비극(悲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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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여름의 하늘. 구름 한점 없이 맑다는 표현은 바로 이런 날씨를 말하는 듯싶었다.
이 좋은 날에, 나는 자칭 도적 길드의 차기 마스터감이라는 여자를 등에 업은 채로 
터덜터덜 걷고 있는 중이다.
새벽부터 다리가 아파서 죽겠다고 설치는데... 뭔가 속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폴리아의
알 수 없는 기운에 밀려버린 것이다.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다. 분명 머리는 이런 인간 
따위 내버려두고 떠나라 외치지만, 몸이 벌써 움직이는데 어쩌겠는가. 혹시 촉수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등에 업힌 폴리아는 아직도 잠이 덜 깬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당신, 어떻게 이런 미녀를 두고서 그냥 잘 수 있는 거지?” 

그녀로서는 다른 의미로 말한 거겠지만, 그러고 보니 촉수가 잠잠하다. 지난번의 마을에
들렀을 때도 많은 인간 암컷들을 접했으나 전혀 움직이질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나약하고 
평범한 인간들의 체액을 흡수해봐야 이제는 성장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하듯이.

“뭐야... 신사라는 점은 마음에 들지만 은근히 기분 나쁘네 이거.”

“후우, 더 이상 시끄럽게 떠들면 그 다음부터는 네 손으로 매달려야 할 거다.”

겨우 폴리아의 입을 다물게 만든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나라는 녀석은 왜 이 쓸모없는 여자를 등에 업으면서까지 동행을 허락한 것일까. 단지 
아르케가 떠올라서?

“.....”

지난 밤 동안 잠에 들기 전까지 생각을 해봤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이 세상에서 다시 외톨이가 되어버렸다는... 그런 불안감을 느낀 게 아닐까? 
항상 아르케와 카이런, 최소한 이따금씩 나의 대화 상대가 되어줄 수 있는 그들을 모두 
잃었다는 소외감과도 비슷한 감정 말이다.

“...으음.”

자신의 두 팔로 나의 등에 매달려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체적으로 입이 봉해진 
폴리아는 어느 샌가 또 잠이 든 것 같았다. 정말 혼자서 속 편한 암컷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체력적인 문제가 없으니 얄밉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때부터 전혀 쉬는 법 없이 한나절을 빠른 속도로 걸었다. 길가에 핀 이름모를 들꽃들과
맑은 시내가 나의 복잡한 마음을 정화시키는 듯싶었다. 세상을 사는 기쁨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간단하게 다가오는 것임을. 
오솔길과 팻말을 살피며 따라가니 곧 작다싶은 규모의 마을이 하나 나왔다. 그녀의 예상은 
꼬박 하루였지만, 나의 걸음이 그것을 절반으로 단축시킨 것이다.

“흐음.”

스스로 약간의 뿌듯함을 느끼며 마을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마을로 통하는 입구랄 건
따로 없고, 그냥 듬성듬성 세워져있는 울타리를 피해 진입하면 그만이다.
입구 근처의 강아지들이 이리저리 날뛰며 꼬리를 치는 모습은 신기하기도 하고 꽤나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짐승들뿐만 아니라 대낮이어서 그런지 눈에 띄는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은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빨래를 걷는 젊은 암컷, 소에게 줄 여물을 서걱서걱 써는 대머리의 뚱뚱한 수컷. 작은 
계집아이의 치마를 들추며 도망치는 소년과 그 소년에게 돌을 집어던져 이마를 깨뜨리는 
계집아이. 어느 것 하나 다채롭지 않은 장면이 없었다. 이런 작은 마을의 소박한 풍경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구경거리가 된다.

“.....”

한동안 동그랗게 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낮부터 여자를 업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그들에게도 역시 신기하게 비추어졌나보다. 주민들은 하나같이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
보다 허리춤의 빙룡에까지 시선이 가면 바로 고개를 돌리곤 했다. 참 소심한 인간들일세. 
아니, 환경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지도...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나는 마을 중앙쯤에 자리를 잡은 식당 겸 주점 겸 여관을 찾을 수 
있었다. 낡은 스윙도어를 가슴으로 밀며 들어선다.

-끼익.

“어서 오시지요.”

삐걱 하는 문소리를 들은 주인이 거의 반사적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멘트를 날려 온다. 
실내에는 동그란 테이블이 몇 개 있었으며, 시간이 시간이어서 그런지 나를 제외한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웬 젊은 남자가 여자를 업고 들어오자 그것을 본 주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화색이 돈다.

“방 하나만 주시오.”

“2층의 가장 끝 방입니다. 세 개밖에 없지만 말이지요. 허헛."

주인에게서 열쇠를 받은 나는 숙박부에 이름을 기입하라는 말에 도망치듯 계단을 
올라왔다. 글을 모르는 걸 어쩌란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따로 배워두는 건데... 
아무래도 인간의 세상에 적응을 확실히 하려면 언어뿐만 아니라 문자도 배워야하겠다는
다짐이 생긴다.
열쇠로 열고 들어온 여관방엔 큰 창문과 하얀색 침대보로 덮여있는 작은 침대, 마지막으로
낡은 화장대가 적당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직까지 잠에서 깨어나질 못하는 폴리아를 
일단 침대에 눕혔다.

“...후우.”

무거운 건 아니지만 하루 종일 같은 자세로 있었더니 근육에 약간의 마비증세가 오는
것이 사실이다. 몸을 쭉쭉 펴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나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

여전히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폴리아. 이걸 깨우고 가야 하나? 아니면 차라리 정신을 
차리기 전에 가버릴까? 그냥 갈지 말이라도 하고 갈지 고민하던 찰나에, 그녀가 눈을 뜨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헌데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치고는 동공이 너무 말똥말똥하게 열려있다.

“아, 편하게 왔다.”

“...윽.”

알고 보니 폴리아는 거의 반나절 동안을 내내 자는 척을 해온 것이었다. 역시 당했군.  
어느 정도 예상은 한 상태였지만 역시 달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분이 나빠진 나는 벌떡 일어나서 문 쪽으로 향했다.

“기, 기다려!”

돌발적인 나의 행동에 흠칫 놀란 듯한 그녀가 황망히 몸을 일으키며 나의 손목을 잡는다.
이쯤 되면 도대체 그녀가 내게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한 고찰을
해볼 필요가 있다.
손목을 잡은 폴리아의 작은 손아귀를 거칠게 뿌리쳤다.

“도대체 자꾸 막는 이유가 뭐지? 암컷, 네 상처는 그리 깊지 않다고 말했을 텐데.
그냥 놔둬도 붓기가 빠질 거다. 게다가 나는 갈 길이 바쁜 몸이란 말이다.”

“...나한테는 당신 같은 인재가 필요하단 말이야!”

지금까지와는 다른 나의 굳건한 태도에, 그녀는 거의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하지만
갑자기 인재가 필요하다는 건 뭐란 말인가?

“뭐?”

“아버지가 그랬어. 길드의 마스터를 평가하는 잣대는 실력이 전부가 아니라고. 오히려 
마스터를 곁에서 보좌하며 쓴 소리도 해줄 수 있는 든든한 No.2가 필요하다고 했단 
말이야. 정작 스스로는 그게 없어서 길드를 부흥시키지 못했다고...”

간절한 얼굴의 폴리아. 확실히 그녀의 태도로 보아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고작 부친의 충고 한마디에 처음 보는 나를 -나는 그녀를 본적이 있지만-
무턱대고 따라왔다는 건 충분히 어리석은 짓이다. 그만큼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폴리아는 이제 매우 진중한 눈빛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와 손을 잡자. 레이지, 당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진작 보고 알았어.
하지만 길드의 서열 2위라는 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단 말이야. 당신도 알겠지만...”

순간적으로 그녀의 말에 흔들린 게 사실이었다. 길드 내의 위치와 조건에 흔들린 게 
아니라, 다른 인간들과 새로운 인연을 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나를 잠시나마 
혹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제 2의 아르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나의 
순간적으로 흐릿해진 두뇌를 일깨웠다.

“어리석구나, 인간.”

“...어어?”

결국 마음을 먹었다. 

“폴리모프.”

그녀의 눈 바로 앞에서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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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수 드래곤.. 

                          [ Feeler Dragon ]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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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비극(悲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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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아가 동그래진 눈을 한 번 깜박 하는 찰나에 폴리모프는 이루어졌다. 천장의
높이가 급속도로 낮아지며 시각과 청각, 후각 등의 감각이 무서울 정도로 예민해진다.
나는 긴 목에서 ‘그르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거의 천장에 닿을 듯한 거대한 몸집을 한 드래곤의 모습. 특히 폴리아에게는 예전의 
악몽과 같은 기억을 선사해준 바로 그 모습이 아니던가.

“...아!”

그녀는 예상했던 대로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팔다리가
덜덜 떨리며 신경질적인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내 모습을 보자마자 굵은 식은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하는 애처로운 암컷의 모습.
오금이 저리다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리라.

“세상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멍청아.”

“으아아. 괴, 괴물...!”

마치 꿈이나 환상을 보는 것처럼 손을 휘저으며 자신을 방어하는 동작을 하는 폴리아.
씁쓸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이런 모습의 나인데도, 너의 길드에 받아들일 수 있겠나?”

나의 뜬금없는 물음에도 폴리아는 허우적거리며 연신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호흡이
불규칙해지며 숨소리마저 가빠오는 게 상당히 불안정한 모양이다. 아마 지금 내가 하는
말 따위는 전혀 들리지 않는 상태일 것이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회는 사라졌다.”

몸을 돌리며 순식간에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굉장히 비좁게만 느껴지던 실내에
여유가 생겼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방을 빠져나온다. 문을 닫기 전,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가 눈동자가 풀려있는 그녀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괴물인 나에게도 세상은 어렵더군.”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내내 입맛이 무척이나 쓰다. 마지막 층계를 내려오는데,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폴리아의 ‘꺄아악’ 하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자지러지는 비명에는 카운터에 앉아서 사타구니를 북북 긁고 있던 주인이 다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럴줄 알았으면 아예 기절이라도 시키고 올 걸 그랬나?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채로 중년의 수컷은 나를 바라보았다. 

“음...”

그리고 또 하나의 관문이 있다는 사실은 나를 괴롭게만 했다. 참을 수 없는 쑥스러움에
머리를 긁적이며 주인에게 입을 연다.

“숙박비는 저 아가씨가 지불할 겁니다.”

“.....”

어쨌든 그렇게 여관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얀색 바지의 주머니 안에는 
폴리아에게서 슬쩍 한 육포가 들어있다. 공짜로 이동을 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무엇을 
하던 이 세상에 공짜란 없다... 바로 인간인 그들의 지론이 아니던가?

내가 한 번의 업보를 쌓았던 그녀를 고이 놔둔 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서쪽으로 기운 태양은 강렬하게 이글거리며 마치 나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겠지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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