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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3 03:01

어느 누드모델과의 사랑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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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모두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남은 건 다림이와 원장 아줌마, 그리고 나네요.
"여기 미술인데요. 짱개 둘하고 삼짜하나요."
헤헤. 점심을 얻어 먹었으니 저녁은 제가 대접해야죠. 배가 고픕니다.
삼선짜장은 다림이 꺼구요. 짱개는 저하고 원장샘이죠.
다림이는 주머니 사정 어렵다면서 비싼거 먹는다고 원장샘한테 구박을 약간 먹었지만 내가 계산할 것인데 상관없죠.
원장샘도 삼선짜장 시켜 먹어요.
삼선짜장은 예전에 내가 권했던 것이란 말이에요. 원장샘. 근데 다림이가 요즘 어렵나요.
하기야 일이 없으면 어려울 수도 있겠죠.
역시 신참이라 늦군요.
저 같으면 벌써 도착을 했겠구만 배용준씨는 상당히 늦습니다.
이제야 배용준씨가 도착을 했습니다. 숨을 상당히 헐떡이는군요.
"어. 용준씨."
"어! 여기 계시네."
"놀러 왔어요."
용준씨가 제 옆에서 그릇을 받는 다림이를 쳐다보며 눈짓과 함께 고개짓을 했습니다.
나는 그렇다고 '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지요.
부러울거다 이놈아.
"배달의 아저씨 이름이 용준이야?"
"네."
"성이 혹시 배씨야?"
"네."
"배용준이 쌈 잘한데."
"네?"
"옆에 가서 이름 똑같다고 그러지 말라고."
원장아줌마가 심오하게 철가방 배용준이를 놀렸습니다.
애인이 언제쯤 고무신 바로 신고 돌아 올까요.
가뿐하게 계산을 했습니다. 전 부자니까요.
내 이름의 통장에 돈이 있으니까 참 든든한거 있죠.
"정말. 원이 학생이 사주는 거야? 쪼금 미안한데."
전 짱개가 싫어요. 너무 자주 먹었거든요.
그래도 이렇게 배달 시켜서 좋아하는 사람 옆에서 먹으니 맛이 색다르네요.
"그릇 꼭 밖에다 내 놓으세요. 그래야 철가방이 편하거든요."
"훔쳐간다며?"
"괜찮습니다. 그걸 그대로 믿으셨군요."
다림이를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더니 그녀가 웃습니다.

다림이는 오늘 일찍 집으로 갔습니다. 친구가 기다린다나요.
옷도 흙이 튀여 좀 지저분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친구와 자취생활을 합니다. 언제 한 번 놀러 갈 수 있을까요.
오늘 밤이 깊으면 조용히 내 맘을 드러내 보이고도 싶었는데 아쉽군요.

일주일이 지나버린 꽃은 다소 시들었지만 괜찮지요.
내 마음은 저꽃이 너무나 생생한 빛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받아 들이니까요.
마음 속 한 여인이 모든 사물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네요.
"형아야 이제 내 꽃 꼽자."
"다리미 한송이라도 뽑으면 너 아주 아작 내 버릴겨."
"저게 다리미냐?"
"잔말 말고 그냥 자."

팔월이 다가고 있습니다. 요즘 계속 학교를 나왔어요.
요즘은 도서관 앞에서 여학생들 훔쳐 보지 않지요. 볼 필요가 없으니까요.
선배들이 취직걱정 같은 걸 하고 있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내 맘에 별로 걱정이 없으니까요.
어떻게 가을을 꾸밀까,하는 생각만 하고 있지요.
요즘 다리미가 힘이 없어 보이는데 보약이라도 지어 먹일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참 잘 어울리겠다,싶은 가을 모자도 사 주고 싶구요.
요즘 집으로 갈때면 괜히 선물의 집이 눈에 자꾸 들어와요.
예쁜 옷차림으로 가는 아가씨를 보면 예전엔 '헤, 예쁘다.' 이 생각이었는데 요즘은 저게 누구한테 어울릴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가을이 시작되는 구월 초하루에 다림에게 삐삐를 쳤습니다. 내 번호로요. 에. 현대는 커뮤니케이션 시대가 아니겠습니까? 핸드폰을 구입했지요.
패밀리로 말이죠. 물론 나한테 부담이 되지만 이정도야 뭐.
다림이는 이 번호를 모르기 때문에 음성을 남겼습니다.
요즘은 다림이가 미술 학원을 자주 안가요.
거기에 너무 신세지는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내 헨드폰이 처음으로 울렸습니다.
"핸드폰 샀어요?"
"응. 에. 네것도 있거든?"
"흠. 난 삐삐가 좋은데. 나한테 너무 잘해 주지 마세요."
"좋아 할 줄 알았는데. 섭섭하다."
"기분 좋아요. 정말 내 것도 있는 거에요?"
다림이의 음성이 그렇게 밝지를 못했습니다. 이러면 선물하는 사람이 좀 무안하죠.
"언제쯤 받으러 올래?"
"오늘 내일은 시간이 없구요. 모레 쯤 받을게요. 그래도 되겠어요?"
"그래. 뭐 안좋은 일 있니?"
"아니요."
마지막 아니요,라는 말은 참 밝았습니다.
바로 받아가면 좋을텐데 아쉽군요.
그 헨드폰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 말입니다.
안테나 있죠. 그거 길다고 전파가 잘 잡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처음 붙어 있는게 제일 좋은거에요.
그것도 일종의 반파장 다이폴 안테나거든요. 뭐 그런게 있나봐요.
뽑은 길이만큼 헨드폰의 길이가 길어야 되요. 내 헨드폰 이쁩니다.

밤에 잠이 들기전 다림이 생각으로 전화를 했지요. 울리는 군요.
이번엔 다림이 헨드폰으로 전화를 해 보았지요. 역시 울리네요.
"형아야 잠 좀 자자."
"너 헨드폰 있어?"
"없어."
"없는 놈은 그냥 이불 뒤집어 쓰고 자."
"그럼 진동으로 해 놓고 가지고 놀아 씨."
그렇군요. 진동으로 맞추어 놓고 또 시험을 해 봐야 겠습니다.
"우웅..."
꼭 소 울음 같이 울리네요. 신기합니다.
전자 공학도도 신기한데 다른 사람들 많이 신기 하겠군요.
이게 다림이에게 전해 지면 내가 전화 할때마다 이렇게 몸부림 치겠네요. 동생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다시 벨로 맞추어 놓고 내 것을 이불속에다 넣고 다림이 헨드폰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뻬레 베레레. 뻬레 베레레."
"제발 잠 좀 자자."
"너 헨드폰 있어?"
"우이쒸."
이번엔 다시 진동으로 해 볼까요? 그냥 자야 겠네요.
이게 그녀의 손으로 빨리 가려면 자야지요.

여기도 괜찮네요. 사갈의 눈 내리는 동네요.
나무 무늬가 실내분위기를 묘하게 들뜨게 만듭니다.
지금 내 앞에 다림이가 앉아 있습니다.
어제 봤어야 했는데 다림이가 바쁘다고 했기 때문에 오늘 봤습니다.
그녀의 헨드폰이 사흘동안 나에게 있었습니다.
"이거 부담 안 되요?"
"괜찮어."
"내가 전화 많이 하면 오빠가 다 물어야 되잖아요."
"응. 나 부자여."
"국제 전화하면 바로 몇만원씩인데?"
"너 외국에 아는 사람 있니?"
"없어요. 이거 오빠랑 통화하는 것은 요금 안물죠?"
"그럴걸."
"많이 해야 겠네요."
"그럼."
"고마워요."
"뭘. 근데 바빴니?"
"네. 많이. 근데 이제는 또 안 바쁠거에요."
다림이 얘가 또 표정이 별로 안 좋군요.
다림이가 예쁘게 포장된 작은 선물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뭐야?"
"제가 이번에 돈을 조금 벌었어요. 뭐 마땅히 살 게 없어서 담배 피니까 라이터 하나 샀어요."
"정말?"
라이터 참 이쁜네요. 지포 라이터입니다.
금장식 까지 되어 있는 걸로 봐서 상당히 비싼 것 같아 보입니다.
"담배 많이 피지 마세요."
"고마워."
공유한 차한잔의 시간은 잠시 침묵했습니다.
가을이기에 이런 침묵의 시간이 참 좋습니다.
그냥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이 앞에 있다면 그 시간이 너무나 아름답죠.
"저..."
"왜?"
"나 좋아하죠?"
그러고 보니 그동안 서로 좋아한다는 말이 오고 간적이 없군요.
하지만 좋아하니까 만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물어 보는 그녀가 그녀의 모습처럼 사랑스럽네요.
그런데 저런 질문 받아 본 적이 없기에 다소 머뭇거려 지네요.
"음."
"그냥 만나는 거 아니죠?"
"그래. 근데 갑자기 그걸 왜 묻냐?"
"묻고 싶을 때가 있어요. 자기 마음때문이겠죠."
"에..."
"오빠가 참 좋아요. 철가방 하면서 날 보고 웃을때도 그랬고,나 누드모델 했다고 말했을때도 그랬고
오빠는 사람만을 보고 좋아 할 수 있는 사람 같아요."
그럼 사람이 사람을 보고 좋아하지 뭐 딴 거 보고 좋아하나요.
"나 한때 모델을 짝사랑 했었다. 하하."
"고마워요."
"자꾸 고맙다고 그러지마. 부담되잖아."
헨드폰은 그녀에게로 갔습니다. 나에겐 라이터가 왔구요.
내 가을은 이 라이터 처럼 뜨거울 거구요.
저 헨드폰에서의 그녀의 음성처럼 감미로울 겁니다.


요즘 가끔씩 전화해주는 다림이 때문에 학교에 자꾸 가고 싶습니다.
공돌이 새끼들한테 자랑해야죠.
가을이 물드는 하늘은 진짜 높았구요.
지가 누드모델인 양 벌써 잎을 다 떨구어 버리고 빳빳하게 서 있는 나무들도 나름데로 운치가 있습니다.
구월이 좋은 건 단지 가을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지요.

밤이 곱게 더 짙은 어둠으로 장식되고 있습니다.
창밖의 검은 하늘도 오늘은 맑아 보입니다.
잿빛이 끼지 않는 고운 남빛입니다.
동생은 지 애인한테 전화하러 갔어요.
부모님 몰래 하느라 힘이 좀 들겁니다.
내 헨드폰 빌려달라고 했지만 이걸 왜 줍니까.
저녀석이요. 아직 내가 여자친구 생긴 걸 안 믿어요.
저 번에 헨드폰을 두개 들고 왔으면 짐작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친구끼리 돈 아낄려고 패밀리 했지? 그러네요.
"잠깐만."
다림이하고 전화를 하며 서로의 하루를 얘기하고 있는데 동생이 들어 왔습니다.
"받아봐."
"뭘?"
동생에게 헨드폰을 주었습니다.
"여보세요?... 아니 주원이 동생인데요... 예 그렇군요. ...
진짜 우리 형 애인이에요? ...
돈 먹고 시켜서 그러는 거 아네요? 예. 형 받어."
진짜 의심 많은 녀석이네요. 애인이라... 그렇게 물어 볼 줄은 몰랐네요. 그냥 나도 여자친구 있다는 것만 확인 시켜 주려고 그랬는데.
"음. 그래 잘자."
동생이 동그란 눈을 맑게 뜨고는 날 쳐다 보고 있습니다.
"왜 그래 임마?"
동생이 갑자기 나를 와락 껴 안았습니다.
무슨 감격의 눈물 같은 것을 흘리는 모양으로 말입니다.
"드디어 형도 애인이 생겼구나."
"제법 됐어 임마. 근데 다림이가 뭐라 그래?"
"형수가 이름이 다리미야? 세탁소 한대?"
"형수가 될 지는 모르지 임마. 뭐라 그래?"
"뭘? 형 애인 맞냐 그러니까. 맞다고 그러고 돈먹었냐 그러니까 웃으며 아니라고 그러고 내가 별 말 했냐?"
이럴수가 그녀가 날 애인으로 인정을 했단 말이지요.
아직 키스 한 번 안했는데 말입니다.
한 번 작전을 구상해 봐야 겠습니다.
멋있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는 젖은 눈으로 키스를 하는 겁니다.
말은 쉽지만 잘 될까요? 동생한테 물어 볼 수도 없고.
하기야 저녀석은 자기 잘난 맛에 살지요.
내일은 오랜만에 중국집에나 놀러를 가야 겠습니다.
동윤이 녀석이 보고 싶군요. 이녀석이 지금은 일을 하고 있겠네요.
쿠쿠. 다림이 조금만 기다려.
내가 잘 배워서 카사블랑카의 보가트처럼 키스를 해 줄테니까 말이야. 음.

중국집은 향기가 있었습니다.
예전의 모습이었지요.
이제는 왠만큼 익숙해 보이는 두 신참들의 모습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동윤이도 예전처럼 거기에 있었습니다.
"어! 주원이 왔구나."
어깨가 더 벌어진 듯한 주인 아줌마는 부드러운 한국의 어머니 같네요.
근데 왜 중국집에 있는 거여.
"네. 짜장면이 먹고 싶어서요. 동윤아 안녕."
손을 흔들어 주었지요. 동윤이 한테 귀엽게 말입니다.
짜장면은 먹었지만 동윤이 녀석이 바쁘니까 할 일이 없네요.
홀에서 이것저것 도와 주었습니다.
저녁 문 닫을 시간 때 까지 말입니다.
아줌마가 저왔다고 또 탕수육을 서비스로 주었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탕수육을 들고 월세방으로 갔지요.
승언이 아저씨는 어디를 급히 가 버렸습니다.
월세방은 배용준이하고 동윤이만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지요. 꼬불쳐논 빼갈도 한 잔씩 하구요.
기분이 좋네요. 저 둘이는 반말을 하네요.
뭐 한살차이야 친구죠.
"너 요새 뭐하냐? 조기 복학 했냐?"
"복학 안했지 임마. 이 좋은 때 학교를 왜 다니냐."
"좋은때 맞냐? 씨 이상하다."
머리를 긁적이는 동윤이를 보았습니다.
하기야 니가 아임에프밖에 더 생각해 내 겠냐.
"윤경씨는 잘 있냐?"
"참. 헤어질 마음도 없으면서 이별 편지는 왜 주는 지 모르겠다.
내가 싹싹 빌기라도 바랬나 보지."
"싸웠냐?"
"싸우긴 요즘 잘 토라지잖아."
"헤어지자는 편지 받았어?"
"응. 내가 야한 책 보는 거 들켰거든."
"그래서 어떻게 됐냐?"
"싹싹 빌었지 새꺄! 넌 요즘도 미친짓 계속하냐?"
"응."
"좋겠다."
배용준 저녀석도 밝히는 녀석이었군요.
우리야 대화를 하던 말던 저 옆구석에서 동윤이가 사다논 그 잡지책을 보고 있습니다.
"같이 봐 임마. 그거 어제 산 거란 말이여."
동윤이 녀석도 예전처럼 저에게 눈길을 조금 준 후에는 금방 자기 책으로 가는 군요.
칠구가 그립네요. 순정만화 보면서 웃고 울던 놈인데...
"나도 보자."

시월달 것이네요. 신간입니다.
"이 여자 이쁘다."
"근데 이 여자는 가슴을 안 보여 주잖아."
"한국게 다 그렇지 뭐."
책장을 한장 한장 넘겼습니다.
"오 이여자 진짜 예쁘다."
"어디? 나도 좀 보자."
"이 여자 본 것 같은데..."
"삼용이 넌 항상 이쁜 여자만 보면 어디서 본 것 같지?"
결국은 용준씨 삼용이로 불려지고 말았군요.
"나도 좀 봐."
그 둘의 머리사이로 헤집고 들어갔습니다.
"야 섹시한데. 몸매 죽인다. 히히."
"손만 떼면 가슴이 보이겠는데. 찍는 사람은 그래도 봤겠지?"
"어디?"

갑자기 떨려오는 내 가슴은 왜 이리 주체를 못합니까.
뭔가 한대 맞은 기분입니다. 퍽 뒤로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그네들은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책속의 한 여인을 보고 있습니다. 그 한 여인이 나를 지금 많이 혼란케 만들고 있습니다.
"34 25 35. 괜찮네."
"야. 이름이 손다림이다야."
 


사진은 모두 석장이었지요.
그 책의 여느 다른 사진들과 별반 다를게 없지만 그 석장은 내 사랑의 모습입니다.
저 놈들이 저렇게 웃으면서 가볍게 볼 수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그림처럼 풋풋한 그리움의 색깔이 아닌 성(性)적 빛이 나는 그 사진은
첫번째는 수영복 차림이었고 두번째는 손으로 가렸으나 나는 아직 그 모습을
기대하지 못한 서러운 그녀의 가슴이 반 이상 드러낸 것이며
세번째는 돌아 섰으나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습니다.
수줍은 듯 피하는 시선이 아니라 유혹하는 뇌쇄적인 눈 빛의 그녀는
내가 어제까지 보아온 다림이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왜 저걸 찍었을까,하는 생각은 그녀를 보며 웃는 녀석들의 모습이 너무나 싫기에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에게 기억되어 있는 다림이의 모습을 애써 상기시켜 보지만 또한 저렇게 이상한 눈빛으로
웃고 있는 저 놈들의 모습이 그 것을 퇴색시켜 버립니다.
다림이가 찍은 사진들 보다 수많은 남정네들의 손에서, 눈에서, 입에서 싫은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화나게 합니다.
나에게는 여전히 너무나 곱고 순수하고 귀여운 다림이는 지금 초라하게 희롱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끼워 넣고 싶지 않던 내 사랑은 싫은 웃음소리가 군데 군데 들어와 금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싫습니다.

"헤헤. 넘겨봐 임마."
"이 여자 진짜 어디서 본 것 같단 말이야."
그 여자가 나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들킬가봐 두렵습니다.
동윤이와 용준씨가 보고 있는 잡지에게로 달려가 "북!" 다림이가 있는 그 페이지를 찢어 버렸습니다.
"야. 강 주원! 지금 뭐하는 짓이야?"
대답을 할 필요가 없지요. 하기도 싫습니다.
"나 간다. 이딴 거 보지마 새꺄."
하룻밤 자고 가려고 했던 나는 찢어 낸 그녀의 사진을 들고 일어 섰습니다.
다소 화가 난 표정의 동윤이는 나에게 이제 더 이상 그 표정을 유지하지 못하고서는 실실 또 웃습니다.
내 모습은 자기 보다 훨씬 무섭게 화가 난 표정임을 읽었나 봅니다.
"에이 그래. 선심 썼다. 너 가져."
나는 지 애인에게 저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저놈의 그녀에게 저렇게 싫은 웃음 짓지 않았습니다.
네 놈의 애인 사진을 저 용준이에게 던져 주며 '너 해라.' 그러면 너는 화가 나겠지?
발로 한 대 찼습니다. 표정이 굳어진 동윤이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저 놈보다 쌈을 잘 합니다. 함부로 덤비진 못 할 겁니다.
"왜 그래 임마!"
"잘 있어라."
그냥 그 말만 하고 나왔습니다.
나와서 사진을 보니 다림이가 너무 안타가와 보입니다.
자기는 그 사실을 알까요?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사내들이 자기의 모습을 보며 냉소한다는 사실을...
조롱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묘한 생각으로 흥분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생각들이 다림이의 모습보다 내 머리속을 점점 지배하여 갑니다.
다림이를 생각할 때 아까 동윤이와 용준씨의 웃음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 웃음들이 떠 오를때 다림이의 아름다운 기억은 지워지고 있습니다.
찢은 종이를 구기며 한 손에 쥐었습니다.
그리고 복잡한 마음으로 집으로 왔습니다.

"형아야 무슨 안 좋은 일 있냐?"
"밥은?"
"먹었지? 표정이 별로 안 좋다?"
"니 애인은?"
"잘 있어. 형 애인도 잘 있냐?"
"자 자."

자려고 누웠는데 헨드폰이 울렸습니다. 그냥 꺼 버렸습니다.
또 울릴까봐 아예 밧데리를 뽑아 버렸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잊혀질거야. 생각하지 않으면 되지 뭐.'
잠이 올리가 없지요.
다림이는 내게 이런 사진 찍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자신도 이 사진들이 나를 기분나쁘게 하는 것을 알 것입니다.
부끄럽기도 하겠지요. 그래서 말 안했을 것입니다.
그 사실에 기분이 더 나쁩니다. 태연한 표정으로 날 만났다는 사실도 기분이 더럽구요.
왜 저런 걸 찍었을까?
모른척 하고 그냥 넘어 가려고 했던 내 마음은 잠이 안 들고 정신이 점점 뚜렷해지면서
한 여인을 지워 버리자,하는 선까지 와 버렸습니다.
'그래 둘 중 하나를 잊자.'
싫은 웃음과 아름다운 기억의 다림이 중에 지금 압도적으로 내 머리를 지배하는 것은 싫은 웃음들이었습니다.
해 뜰 무렵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든 나는 엄마의 밥 먹어,라는 소리에 일어 났습니다.
내 머리맡의 헨드폰은 지금 마비되어 있습니다. 풀어 주어야 겠지요.
'[호출]: 다리미.'
"훗!"

오전 햇살이 그 다지 좋지 않습니다.
답답한 가슴으로 가을 하늘 또한 별로 높지 않습니다.
많이도 설레이고 많이도 기대했던 내 사랑은 왜 하필 다림이였을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림이로 인해서 잊고 살려던 사랑을 생각해 내고는 미소 지은 예전의 오전이 아닙니다.
전화를 했습니다.
"나야."
"응. 오빠구나. 잘 잤어요?"
"이제 일어 났어."
"늦잠 잤구나. 흠 일찍 일어 나셔야죠. 어제 밤에는 전화가 안 되더라."
언제나 맑은 음악처럼 들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오늘은 가식적으로 들립니다.
"오후에 좀 보자."
"학교 안 가세요? 참! 기쁜 소식. 나 일자리 구했어요."
그 일자리가 삼류 잡지책의 모델 일이 겠지요.
그게 기쁜 소식인가요.
싫네요.
"두시쯤 여우사이로 와라."
"두시에요? 알았어요."

다림이와 약속이 잡힌 시간까지 또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싫은 웃음과 눈빛들은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외출을 했습니다. 어제 구겨 뭉쳤던 그녀의 나신이 지금 내 호주머니에 있습니다.
햇살은 어느 날 보다 여웁고 하늘은 어느 날 보다 파랗게 높았지만 지금 내 마음은
금방 질 것 같은 초로(草露)같으며 그 모습처럼 비장합니다.
오늘 그녀를 잊겠습니다. 풀잎은 이슬을 머금었을때가 가장 아름다와 보이지만
그 이슬이 떨어져 나가도 푸르를 수 있습니다.
먹물이 튄 것 보다는 낫지요.

그녀가 먼저 와 앉아 있군요. 오늘따라 왜 저렇게 밝은 모습일까요.
그것도 싫습니다.
손 흔들지 마란 말이야.
앉았습니다.
내 마음은 다짐을 했지만 앞에 앉은 그녀는 그래도 사랑스럽습니다.
하지만 금새 나쁜 상념들이 끼어 듭니다.
"뭐 마실래요? 오늘은 내가 사 드릴께요. 나 직장 구했어요.
예전에 오빠가 한 번 말했던 직업이에요."
어색한 미소를 한 번 지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미소를 띠우기가 버겁습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올 때까지만 앉아 있겠습니다.
그녀는 커피잔과 입맞춤하며 무엇이 즐거운지 보조개를 드리우고는 밝은 표정입니다.
"무엇때문이었냐?"
"뭐가요?"
"무엇 때문에 그런 사진 찍었냐고?"
그녀는 지금 나를 쳐다 보고 있습니다.
꼬마가 아빠의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훔치다 들킨 표정의 두눈을 크게 뜨고는 입술을 깨 뭅니다.
"무슨 사진..."
"이유야 있겠지. 하지만 이젠 상관하지 않을게. 뭐 내가 상관한 적도 없었지만..."
아까의 밝은 표정은 어디로 갔습니까? 다림씨.
"저도 몰랐어요."
몰랐다고 말하면서 표정엔 뭔가 안다는 것을 역력히 읽을 수 있습니다.
"흠."
웃음 한 줌 지어주고 일어 섰습니다.
그녀는 표정없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 봅니다.
"왜 일어 서는..."
때마침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그녀의 나신이 잡히는 군요.
테이블 위에다 던졌습니다.
그녀는 한 때는 저보다 예쁜 손이 있을까,했던 작은 손으로 그 뭉치를 잡는군요.
펴 보지 않아도 알겠죠.
펴 봤으면 자신이 더 초라해 진다는 사실을 알았나 봅니다.
그냥 고개만 떨구었습니다.
"잘 있어."

그녀는 그냥 앉아 있군요. 한 숨을 내 쉬어 봅니다.

나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냥 걸어서 집까지 가렵니다.
길가에 서서 내 헨드폰 서비스 회사를 광고하는 나레이터 모델들을 보았습니다.
손에 쥔 헨드폰의 감촉이 예전에는 저 여인들 보다 훨씬 감미로웠는데 이제는 아니군요.
서러우니까 입술이 떨리고 눈물까지 납니다.
괜히 그랬나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까짓 사진 몇 장 찍었다고 내가 너무 과민반응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차라리 나 혼자서 잡지를 사가지고 보았다면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내 친구는 내 사랑을 보며 아주 천한 어투로 아무렇지도 않게 싫은 말, 싫은 웃음을 내 뱉었습니다.

오늘 나는 사랑을 잠시 잊겠습니다.
다시 설레이지 않고 예전의 나로 돌아가겠습니다.
도서관 앞에 가면 이쁜 여학생들이 많을거야.
그네들 보며 대충 꿈꾸며 대충 흉보며 그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죠.
또 아나요. 인연이 생길지...
하지만 오늘 밤 나는 헨드폰이 울리기를 참 많이도 바랐습니다.
하지만 울리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헨드폰은 울리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헨드폰은 울리지 않았습니다. 화가 납니다.

오늘 드디어 헨드폰이 울렸습니다.
어제의 화 때문에 받지 않았습니다.
호출,다리미라고 써 있습니다.
그 후 세 번이 더 울렸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기다렸던 그녀의 소식이었지만 받기가 어색했습니다.
싫은 웃음이 또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헨드폰이 울렸습니다.
하지만 또 못받겠습니다.
오늘은 내 기분이 그리움인지 뭔가하는 가을 느낌 때문에 받기가 싫었습니다.
어제 보다 한 번이 덜 울렸습니다.

오늘은 헨드폰이 한 번만 울렸습니다.
받으려다가 헨드폰에서 손을 떼었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호출,다리미라고 적히기를 기대하며 받지를 않았습니다.
내 기대대로 그렇게 적혔습니다.
하지만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헨드폰이 한 번 울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메세지는 없었습니다.
단지 부재중 전화 한통이라는 메세지만 떠 있습니다.

오늘은 다림이가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싫은 웃음도 많이 지워 졌구요.
오늘은 헨드폰이 세번이 울렸습니다.
음성도 들어왔군요.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받지도 않았을 뿐더러 음성을 듣지도 않은채 지워 버렸습니다.
혹시나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변명이라도 하면 다시 그 싫은 기분이 들까봐 외면 했습니다.
내일 전화가 오면 새로운 기분으로 사과를 하고 다시 만날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은 참 기대했지만 헨드폰이 울리지 않았습니다.

오늗도 헨드폰은 울리지 않습니다.
핸드폰이 고장이 났을까,하여 내가 전화를 해 봅니다.
잘 울리는 군요.
내 헨드폰은 좋은 것이기 때문에 고장이 잘 안납니다.

오늘도 헨드폰은 울리지 않았습니다.
가을은 너무나 깊어 이제 더 이상 높아 질 수 없는 하늘은 낮아지기 시작합니다.
그 하늘 보다 훨씬 낮은 구름이 끼더니 십일월의 비가 내렸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영상에 끼어 들어왔던 기분 더럽던 다른 것들은 이미 지워져 버렸습니다.
그녀를 참 많이도 가렸던 동윤이의 웃음도 이제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단지 이제는 예전에 나를 설레이게 만들었던 다림이의 모습만 뚜렷하게
기억되어 나를 그리움으로 아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전화기에 몇 번이고 손을 대었다 떼었습니다.
늦었나 봅니다.
전화하기가 껄끄럽습니다.
내일은 더 못하겠지요.

오늘 헨드폰이 울렸습니다.
"거기 짱개 집이죠?"
이런 개같은 경우가 헨드폰에다 전화를 해놓고 짱개 집이죠?
이거 미친놈 아녀?
문득 문득 생각나면 지워 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다림이가 하루 종일 생각이 났습니다.
 

11월이 가면서 설레이지 않으니까 그녀의 모습도 잊혀지더군요.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은 잊혀진 거 맞죠?
하지만 어디선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학교는 차분히 가을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만날 것이기에 슬픈 표정은 아닙니다.
여기 저기 벗은 나무들이 겨울이 옴을 두려워 하는 듯 옅은 바람에도
잔가지들을 떨고 있습니다.
학교 도서관에 공부를 하러 나오긴 합니다.
그래도 다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릴 찾아 봐야 겠습니다.
예전의 팜플렛 돌리는 일이나 할 까 합니다.

오늘은 학교 근처를 배회하다가 예전의 미술학원이 있는 곳까지 걸어 봤습니다.
혹시나 우연히 다림이를 만날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만난다면 그냥 아는 체 할 수가 있을 것도 같았습니다.
그런 기대대로 만났습니다.
"어! 주원이 학생."
원장 아줌마를 만났습니다. 다림이 만큼은 아니겠지만 반가웠습니다.
"예. 어떻게 학원에 안 계시고."
"잠깐 나왔다가 지금 들어가는 길이야. 주원이 학생은 웬일이야?"
"네. 그냥."
"다림이와는 잘되어 가?"
"네?"
"뭘 숨길려고 그래. 학생이 다림이 좋아하는 거야 예전에 들켰는데."
"네. 그냥 뭐."
"다림이가 요즘 바쁜가 봐. 통 찾아오지도 않고 연락도 뜸하네."
"네. 뭐 바쁜가 보죠."
"주원이 학생. 안 바쁘면 들어가서 차 한잔 하고 가."
들어 갈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림이 소식을 들을까해서 학원으로 들어갔습니다.
학원은 내 기억 속의 모습과 전혀 바뀐게 없습니다.

늦가을 진한 다방식 커피의 향내가 오늘 하루를 옛 기억 속으로 몰고 갑니다.
원장 아줌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원장 아줌마는 다림이가 누드 모델을 했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듯 말을 꺼냈다가 이내 얼버무렸습니다.
그것이 자주 되었지요.
"원장 샘. 저도 다림이가 누드모델 했다는 거 알거든요. 그렇게 숨기실 필요 없어요."
"정말? 학생이 물어 본 거야?"
"아뇨. 얘기해 주더라구요."
"다림이가 학생을 많이 좋아하나 보다. 그거 잘 얘기 하지 않거든. 다림이는 그렇게 모델 서는 걸 부끄러워 하더라구. 내가 처음에 권유 했었는데 자기한테 잘 해 준 사람들이 부탁을 하니까 거절을 못하고 몇 번 했었지. 하지만 걔 누드모델이 직업은 아니야."
"그것도 알아요."
"그것 때문에 다림이와 안 좋은 일 없었지?"
"네."
"다행이네. 괜한 생각해 가지고 다림이를 안 좋게 볼까봐 다소 걱정을 했는데."
원장 아줌마가 다림이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 이야기들이 아직 남 이야기 같지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가식적으로 앉아 있는 내 자신이 싫기도 합니다.
옛 기억은 날 미소짓게 하지만 이젠 남처럼 연락도 되지 않는 그녀를
이렇게 둘이서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 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저. 다림이하고 이제 연락 안해요."
커피잔이 다 비워졌을 무렵, 이제는 일어서 집으로 갈 요량으로 사실을 말했습니다.
"뭐? 연락을 왜 안해?"
연락하지 않는 다는 말이 헤어졌다는 말로 알아 듣는 것이 원장 아줌마한테는 어렵습니까?
무식하네요.
"그냥."
"싸웠어? 일주일 전에도 괜찮은 것 같더니. 뭐 싸울 수도 있지. 연락해봐."
"일주일 전이라뇨?"
"일주일 전에 전화가 왔길래, 학생 얘기 꺼내었더니 잘 사귀고 있다며 학생이 자기한테 잘해 준다고 하던데."
다림이가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같군요.
하기야 나같은 녀석한테 차였으니 그렇게 말 할만도 합니다.
"연락 안 할거에요. 가 볼게요."
나는 그냥 다림이를 만난지 오래되고 해서 생각없이 꺼낸 말인데 원장 아줌마의 반응은 컸습니다.
나를 다소 못 마땅한 눈으로 보더니 일어서는 나를 다시 앉으라 합니다.
"잠깐 더 얘기하고 가. 연락 안 한다니? 말 참 쉽게 한다."
"왜 그래요."
"뭐 때문에 그러는지 잘 몰라도 학생이 먼저 좋아했으니까 다림이가 싫다고 그럴 때 까지는 책임을 저야지. 뭐 때문에 그러는지 말해 봐."
무슨 저런 전 근대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면서도 아직 아줌마가 못 되었지.
"저 가야 겠습니다."
"말해보라니까. 혹시?"
"혹시 뭐요. 그냥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연락하기 싫어요."
원장 아줌마가 머리를 굴렸습니다. 뭔가 입을 오물거리는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봅니다.
일어 서려다 다시 앉았습니다.
"제법 오래 전부터 다림이가 이상하게 학생 얘기 나오니까 말을 돌리는 것 같았거든. 혹시 연락 끊은지 오래 된 것 아냐?"
분위기 파악이 좀 됐나 봅니다.
"한달 훨씬 넘었어요."
"요즘 젊은 것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더니 가까운 곳에도 있었네. 왜 헤어졌는데?"
"쉽게 안 만났어요. 그리고 깊이 사귄 것도 아닌데요."
"사귀는 거에 정도가 어딨어. 서로 좋아하면 사귀는 거지. 학생이 사랑한다고 말했다며."
살 열 받네요. 왜 저리 신경을 쓸까요.
"담배 한 대 필께요."
"펴."
"원장 샘이 뭐 때문에 열을 내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내가 언제 그런말 했다고 그래요?"
"저번에 야외 스케치하러 갔을 때 얘기 했다는데. 다림이가 얼마나 자랑했는데."
그걸 들었단 말입니까.
여자도 남자들처럼 간혹 내 뱉는 짧은 말 한마디를 가지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하는군요.
못 들은 줄 알았는데 기분이 괜찮습니다.
담배를 꺼내 물었습니다.
담배를 피면서 원장 아줌마의 말을 들었습니다.
"다림이는 내 친동생 같은 애야. 상처 받는 걸 원하지 않아. 다림이도 학생 좋아한 지 꽤 되었어. 학생이 다림이 좋아하는 거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 딱 눈빛만 보면 모르겠냐? 철가방이라 전혀 무시할 줄 알았는데 다림이가 점점 철가방 얘기를 많이 하더라. 걔가 학생을 좋아하는 것 같길래 내가 시험을 해 봤지. 한동안 짜장면을 안시키고 피자다. 김밥이다 다른 걸 먹었거든. 내가 이제 짜장면은 질려서 먹기 싫다 그랬지. 한 오일은 내색을 안하더니 나중엔 자기는 꼭 중국음식 먹어야 겠으니 언니는 먹고 싶은거 먹어,그러더라. 그래서 물어봤지. 너 철가방 때문에 그러지,라고 말이야. 그랬더니 대뜸 하는 말이 철가방이 자길 좋아하는 것 같대. 나 좋아하는 사람 싫지는 않지 뭐. 장미도 아마 그 사람이 갖다 놓은 것 같더라.라고 말했어. 참 순진하고 일단 사람이 좋아지면 한 없이 좋아 해버리는 애야. 그렇기 때문에 학생이 먼저 좋아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돼. 걔 정을 좀 못받고 자랐거든 정 준 사람한테 상처받으면 이겨내는데 상당한 기간과 힘이 들거야."
다림이가 가엽고 귀엽게 느껴지는 말입니다.
하지만 연락을 않고 지낸 기간이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한다거나 예전처럼 설레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림이를 생각하면 떠 오르는 사진들 때문에 싫습니다.
비록 사진들 속의 싫은 웃음은 잊혀졌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헤어진 이상
그것이 힘들게 할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앗! 뜨거.
담배를 끈다는 것을 잊었군요. 가야겠습니다.
"다림이가 연락을 안하는데요 뭘. 원장 샘이 모르는 일 때문에 그런거니까 너무 간섭이나 신경 써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학생. 다림이 좋아했던 것 아냐?"
"좋아 했지요."
"뭐 때문이야? 혹시 그거 본 것 아니야?"
"또 뭐요?"
"잡지사 사진."
"예?"
"표정을 보니 맞구나. 진짜 미안하게 되었네. 어쩌지."
"뭘요?"
원장 아줌마의 얼굴엔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입니다.
내 얼굴도 살피는 모습이 말할 까 말까 합니다.
"사진..."
"맞아요. 이상한 사진 봤어요."
"그렇구나. 난 이해할 줄 알았는데. 학생이 다림이가 누드모델했다는 것도 안다고 해서 그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 때문이었구나."
"원장 아줌마도 알고 있었어요?"
"아줌마 아니라니까. 사진들 그렇게 싫게 나왔어? 난 보진 안했거든 미안해서."
잠시 원장 아줌마를 바라 보다가 말을 이었습니다.
"누드 모델 선 것 하고 그거 하고는 많이 다르죠. 그런데 왜 미안한데요?"
"내가 소개 시켜 주었거든."
이 아줌마가 진짜. 친동생 같다면서 완전히 팔아 먹은 거 아녀? 화가 살 납니다.
"그 사진이 어떤 사진인 줄 아세요?"
"안 봤다니까. 볼 자신이 없었어. 내가 아는 사람중에 작품 사진 찍는 사람이 있거든. 모델을 찾더라구. 마침 다림이가 금전적으로 어려웠어. 친구랑 같이 사는 자취방 월세도 두달이나 밀렸다구 말하는 걸 들었거든. 그래서 일단 물어나 봤지. 솔직히 권유 했어. 작품사진인 줄 알았으니까. 근데 그게 아니었어. 다림이도 모르고 계약했다가 할 수 없이 찍었지. 그거 찍고 와서 나한테 많이도 하소연하며 울더라. 그 자식 나한테는 그런 말 안했거든. 하기야 그 사람도 먹고 살기가 어려워 잡지사 쪽으로 갔겠지만..."
맘이 아팠습니다.
내가 다림이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 같습니다.
다림이의 말을 들어나 볼 걸,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전화를 받지 않은 것도 후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난 사진보다 다른 것에 화가 났었기에 나를 변명했습니다.
"그랬군요. 다소 오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이에요."
"미안해. 다림이 한번 만나봐. 오해가 풀렸으면 만나야지. 다림이가 학생을 진짜 좋아 했다면 아직 못 잊었을거야. 걔 짝사랑 하던 오빠가 결혼했을 때도 한참 동안 못잊고 혹시나 이혼하고 그사람이 외롭다고 느낄 때 자기가 짜잔! 하고 나타날 거라 말했던 애야."
"알았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용기는 서지 않습니다.
학원을 나와서 한 동안 헨드폰을 만지작 거리긴 했으나 전화를 하진 못했습니다.
원장 아줌마는 그 사진을 못 봤다고 했습니다.
그 사진이 얼마나 뇌쇄적이고 상업적인 사진인지 모를 겁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모를 것이고 내가 그 사진을 다림이에게 던져 주었을 때의 표정을
못 봤기에 다림이의 마음도 모를 것입니다.
그렇게 전화를 했는데 모른 체한 나를 다림이가 웃으며 받아 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될 지라도 제 기분이 좋을 리 없습니다.
더 천박한 여자로 보일테니까요.
싫은 사내들의 웃음속에 천박한 이미지까지 들어 간다면 다림이는 더 이상
내 기억속에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지요. 지금은 추억이 아름다워 다림이가 그립거든요.
그 그리움을 뺏기긴 싫습니다.
 

마지막편.

잊혀지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어제처럼 살다가 오늘 생각이 나지 않으면 잊혀지는 것인지,
기분좋게 언젠가는 만나겠지 하면서 모르게 모르게 잊혀져 가는 것인지,
아니면 참 보고 싶은데 외면하며 잊어 가는게 잊혀지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먼 훗날 어떤 사람이 문득 보고 싶은데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이 진정 잊혀 진 것인지...

"형아야. 고 년이 말이다."
"누구?"
이불 속에 누워 잠이 막 들려고 하는데 옆에서 끙끙 거리던 동생이 말을 걸었습니다.
"내 애인 은정이 말이다."
"고년이 뭐?"
"내가 고 년이라고 말 한다고 형까지 그러면 안돼지."
"그래 걔가 뭐?"
"걔가 날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잊기 싫은 사람이라고 말했거든? 그게 무슨 뜻일까?"
"너 걔하고 원수 진 일 있냐? 원래 원수는 못 잊어."
"역시 형하고는 대화가 안되는구나. 우린 이런 사이다,라는 걸 자랑 할 려고 했던 건데...
쯧쯧."
"잠이나 자 임마."
"형 요즘은 헨드폰이 통 안 울린다?"
"진동으로 해 놔서 그래. 나만 느낄 수 있는 진동."
"잘 해 봐라. 으이그 불쌍한 우리 형아."
"넌 잘 되어가나 보다?"
"그럼. 형 보다 먼저 장가간다고 뭐라 그러지 마."
"뱃살이나 빼 임마. 그것도 이혼 사유 돼."

잠이 들었으면 그냥 잊고 넘겼을텐데 오늘 밤은 원장 아줌마와 동생 때문에
다림이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도서관 앞은 기말고사관계로 학생들이 많습니다.
제법 입 속에서 더운 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오고 있는 걸로 봐서
사람들 마음이 현실보다는 따뜻한 가 봅니다.
도서관 자리 잡기가 점점 힘들어 지지요.
이럴때는 아르바이트나 하는 게 제일입니다.
모레부터 며칠 정도 일 할 건수가 생겼습니다.
코엑스 가구 전시회 팜플렛 돌리는 일이요.
전시 기간이 한 오일 되니까 그 기간 열심히 전단을 돌리다 보면 십여만원 거뜬히 벌겠습니다.
"오빠!"
우리과 그녀군요.
요즘 도서관에서 통 못봤는데 오늘은 시험이 다가 와서 그런지 모습을 나타내었네요.
많이 예뻐졌군요. 오빠,라는 소리가 그렇게 어색하지 않습니다.
"어. 오랜만이다."
"아직도 여학생 쳐다보며 담배 피냐?"
"넌 왜 엉덩이 안 치냐?"
"성희롱 죄 벌금이 쎄다며."
"그게 희롱인 건 아는구나. 안보이더니 어쩐 일이냐?"
"안 보인건 이 몸이 공부를 잘해서 6학점만 들어서 그런거고 오늘은 레포트 쓸 게 있어서 도서관에 나와 봤지. 오빠는 복학 안 했지?"
"응. 뭐 애인 생겼다더니 잘 돼가?"
"모르겠어."
"니 생긴게 예전하고 많이 달라진 걸 보면 잘 되어 가는 것도 같은데?"
"흠. 나는 이만 갈란다. 열심히 하고 오빠 150은 너무 짜니까 200 놓고 다음에 당구 한 번 치자?"
"그려. 잘 가라."

우리과 그녀가 대학원생 누구하고 사귄다고 그러는 것 같았는데 오늘
그녀의 얼굴은 그렇게 밝지 못했습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당구장에서 보낸 것 같습니다.
도서관 자리를 못 잡았거든요.
공부하는 놈들 갖은 유혹으로 당구장에 데리고 갔지요.
몇 판 이겨주니까 갈 생각을 안 하더군요.
우리과 그녀 얘기도 나왔습니다. 말 그렇게 하면 안되지요.
그런 머슴애 같은 여자는 애인이 있으면 안 됩니까?
"우리 과 그녀도 애인이 있는데 여기 애인 없는 놈들 다 죽어라."
아무리 지가 애인이 있고 세 판을 내리 졌다해도 저런 말 하면 안되지요. 그 놈은 그 말만 남기고 계산을 하고는 나가 버렸습니다.
"한 게임 더?"
"오케바리."
남아 있는 놈들끼리 계속 당구를 쳤습니다.
어제는 그렇게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늘 눈을 떠니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아침이 서둘러 졌습니다.
아무리 전단지 돌리는 일이지만 전시회장 근처서 많은 사람들을 대하는 일입니다.
전시회 주최측의 입장도 있고 해서 추리닝을 입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머리도 빗어야 겠지요.
겨울 외투가 오늘은 어색하지 않습니다.

코 엑스 삼층이군요.
전시회장이 문을 열려면 아직 한시간 이상 있어야 합니다.
코엑스를 찾은 사람도 아직은 많지 않습니다.
전시회장에 도착하니 나를 고용한 형이 이상한 방으로 날 끌고 갔습니다.
창고 비슷한 방이지요. 전에도 와 봤습니다.
전단지가 왜 저리 많대요?.
전단지 돌리려고 부른 애가 나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내 참 연인끼리 아르바이트 하러 온 건 처음 봤습니다.
눈꼴 시럽다 진짜. '자기 꺼 나 좀 줘. 너무 많다.'
'아니 괜찮아. 자기 힘든 것 보다는 나아.'
저 두 년놈들 오늘 둘이 붙어서 같은 장소서 전단지 돌리기 만 해 봐.
내 일당 일 인분만 계산해서 주라고 그럴거여.
난 왜 이렇게 많이 주는겨? 행사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레레 예쁜 옷의 처녀도 있었군요.
이상한 방에서 전단지를 배분 받고 있는데 나레이터 모델이 뭘 물어 보러 들어 왔습니다.
아는 형 참 친절히 대답해 주네요.
"형 이거 지금부터 돌려요?"
"니 알아서 해 임마. 네. 실장님 찾아 가시면 됩니다. 아마 전시회장 문앞이 될 것 같은데요."
미소가 아름다운 여인이군요.
벌써 유니폼으로 갈아 입은 그녀의 모습은 전시회장을 밝게 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전단지 뿌리고 점심 먹을 때 같이 먹을 수도 있겠군요.
나는 나가 볼랍니다.
지하철 출구에서부터 시작하면 오전 중으로 반 이상 돌릴 수 있을 겁니다.
어느 정도 노하우가 쌓였죠.
전시회장은 관계자들이 제법 모였군요.
나레이터 모델이 둘이 더 있었습니다.
뒷 모습이 참 예쁜 여인과 옆 모습이 섹쉬한 여인이 관계자 중 한명의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아까 본 여인도 이제 저기 보이는 군요.
제가 잘하는 짓이 있지요.
괜히 여인들 한 번 쳐다 보려고 그 무거운 전단지들 들고 괜히 돌아서 그녀들이 있는 근처로 가 보았지요.
꼭 스튜어디스 같습니다.

비록 양복입은 관계자들이 눈치를 주는 것 같아 여인들하고 눈은 마주치지 못했지만
근처까지 갔다는게 어딥니까. 전단지 다 들고 갈 필요는 없지요.
내 분량의 반은 입구 데스크 밑에다 놓아 두고 갔습니다.

지하철 입구 쪽으로 나갔습니다.
제법 날씨가 쌀쌀합니다.
고개를 들어 무역센터 빌딩을 올려다 봤습니다.
'졸라 높다! 이런 곳에나 취직하면 좋겠다.'

저 년놈들 전단지를 남자만 든게 수상쩍습니다.
둘이서 웃으며 오는 꼴도 수상쩍습니다.
"이 봐요. 그 붙어 있지 말고. 한사람은 지하철 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코엑스 실내로 가요. 그 에스컬레이터 앞이 좋더구먼."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신경쓰지 마세요."
"별꼴이야 정말. 가자 자기."
열 받네요. 너 몇살이야 이뇬아?
이러고 싶었지만 저 무거운 전단지들을 한 손으로 들고 게다가 웃으면서
말까지 하는 남자 녀석이 힘이 세어 보여서 참았습니다.
"그럼 알아서 하세요."

"지금 코엑스 삼층에서 전시 중입니다. 한 번 들러 주세요."
전단지 줄 때 양손 호주머니에 떡 끼고 째려 보는 사람들 정말 싫어요.
웃으며 받아 주는 사람은 너무 좋구요. 생각보다 사람이 많이 나왔습니다.
점심 먹으러 오라고 한 시간이 되기 전에 들고온 전단지를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더 가지고 올까, 여기서 그냥 놀다가 점심 시간 되면 들어 갈까. 고민을 하다가
에... 고민하다 보니까 시간이 그럭저럭 점심시간 근처까지 흘러 갔습니다.
결정을 봤지요. 가자.

전시회장으로 사람들이 제법 많이 들어 갑니다.
모두들 내가 숨은 공로자란 걸 알까요?
"어서 오십시오."
안내겸 인사를 올리는 전시회장 문 앞의 나레이터 모델 둘의 목소리가 아름답습니다.
한 여인보다 많이 예쁜 다른 한 여인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입니다.
아까 이상한 방에서 본 여인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안에서 안내를 맡고 있나 봅니다.
두 나레이터 근처에 데스크가 있습니다.
그 데스크 밑에는 내 전단지가 있지요.
그 걸 가지러 가는 핑계로 나레이터 모델들이나 구경하고 와야 겠습니다.
왜 째려 봐요? 예쁘면 답니까?
한 여인은 그냥 손님을 맞이하며 인사하고 있는데 더 예쁜 한 여인이 나를 보고 표정이 굳었습니다.
참 눈에 익다 했더니 모자를 쓰고 단정한 머리에 화장이 좀 짙어서 얼른 못 알아 봤을까요.
참 낯설어야 되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말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다림이 네가 여기 왠일이냐?"
나레이터 모델 중 한명은 다림이 그녀 였습니다.
물었으면 답을 해야지. 한 동안 나를 보며 표정이 굳었던 다림이는 다시
환한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 합니다. 나를 외면하고 말입니다.
이 번엔 내가 표정이 굳어 그녀를 쳐다 봤습니다.
그녀 옆에 멍하니 서서 말입니다.
더 이상 나를 쳐다 보지 않으려나 봅니다.
그냥 자기 일에 열중이군요.
잊었다 생각을 했는데 기분이 묘 합니다.
한 참 쳐다 보고 있다가 전시회장에서 관계자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전단지만 꺼내어 그 곳을 떴습니다.
괜히 꺼내 왔습니다. 전단지를 들고 밥 먹으러 가야 되겠군요.

날 고용한 형하고 다른 어떤 놈 하나하고 나레이터 모델 둘하고 하나는 자릴 비울 수 없었나 보지요.
아까 그 년놈들 하고 밥을 같이 먹게 되었어요.
참내 그 뻔히 아는 여자가 저렇게 바로 내 앞에서 모른 척 하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네요.
슬픈 웃음이요.
지가 아는 척 하지 않는데 내가 굳이 아는 척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이 먹어라.
그런데 오랜만에 본 다림이의 모습이 왜 저리 예쁩니까? 사랑스럽구요.
가끔씩 나를 쳐다보다가 내 눈과 마주치자 눈동자를 돌리는 다림이를 보았습니다.
다시 아는 체 해 볼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만 그녀가 답을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라? 저건 내가 준 헨드폰 아녀? 아직 들고 다녔단 말이여?
내 통장 정리를 한 번 해 봐야겠습니다.
이동 통신비로 한달에 얼마씩 나가고 있는 지 말입니다.
난 거의 헨드폰 사용을 하지 않습니다.
어쭈, 내가 뻔히 보는 앞에서 딴 곳에다 전화를 한 단 말이여?
그거 내 돈 나간단 말이여.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이 기쁩니다.
아직 내가 그녀와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네요.
어짜피 의무가입기간 끝날려면 많이 남았는데 잘 쓰쇼.
누구에게 저렇게 웃음을 띠고 있을까요?
전에 난 저 웃음을 잠시 소유했던 적이 있습니다.
다림이한테 말 거는 남자 둘이가 밉게 보이지만 상관할 일은 아니겠지요. 전단지나 돌리러 가겠습니다.
내가 일어서는데도 그녀는 날 쳐다 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연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어쩌다 마주친 우연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오늘 오후의 노을이 다른 날 보다 붉은 건 내 마음에 그리움이 홍조를 띠었기 때문이고
저 가로등이 너무나 초라하게 일찍 불을 밝힌 건 내 서글픔을 달래기 위해서 인가.
다림이는 다리가 아프겠습니다.
저렇게 하루 종일 서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뭐 꼼짝도 않고 몇 시간씩 모델도 섰었는데요.
내일도 보겠네요. 어짜피 이 일 끝날 때 까지는 보기 싫어도 만나 질겁니다.

오늘은 다른 나레이터 모델들 보다 다림이가 먼저 나왔네요.
전단지를 들고 나가다 아직 옷을 갈아 입지 않은 평복 차림의 다림이를 보았습니다.
아직 열지 않은 전시회장 문에 기대어 나를 쳐다 봅니다.
복수다. 시선은 물론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잘 해 봐라.

"코엑스 삼층에서 전시중입니다. 예쁜 나레이터 모델도 있어요."
만만하게 보이는 대학생 같은 놈들이 지나가길래 한 뭉치 안겨 주었습니다.
'그녀가 한 때 날 좋아 했었단다, 얘들아.'

오늘 점심때도 다림이와 마주하며 밥을 먹었으나 역시 모른 척 하는 군요.
다림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한 척 웃어도 주고 답도 해 줍니다.
예쁘다고 말 거는 놈들 싫네요.
나도 아는 척 하고 싶어 죽겠는데 그 놈의 자존심과 어색함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어떻게 어제 생각지 못하고 만났을 때는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내 마음속의 그녀가 어색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녀는 잊혀지지 않고 내 마음 속에 있었나 봅니다.
큰일입니다.
그럼 이 일이 끝나고 다림이를 다시 못 보게 될 때 힘들어 지겠지요.
내일 부터는 연습을 해야 겠습니다.
다림이를 내 시선에서 사라지게 하는 연습 말입니다.
그 생각이 날 서글퍼게 만들긴 하지만 말입니다.
어라? 오늘도 전화질이여?
오늘은 전화기에다 대고 웃는 다림이의 모습이 싫습니다.
헨드폰은 내 것인데 저 웃음은 다른 사람에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다림이가 전화하는 모습을 보며 일어 섰습니다.
내가 밥을 제일 빨리 먹었네요.
저 새끼 덩치는 큰 새끼가 자기 애인하고 보조 맞추어 먹는다고 숟가락 질 하는 꼴이 맘에 안 듭니다.
저 둘이가 뿌린 전단지가 나 혼자 뿌린 양보다 적습니다.
저런 애들을 왜 고용한 지 모르겠습니다.
다림이를 한 번 째려 보고는 그 자릴 떴습니다.
'뭘 봐? 전화질이나 계속 하지.'

오늘 아르바이트 한지 삼 일째고  다림이를 다시 보게 된 지도 삼일째입니다.
아르바이트는 삼일째가 되겠지만 다림이를 다시 보는 것은 그렇지 못할 겁니다.
어제 밤에 다짐을 했습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일찍 전시회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더 일찍 나와 있는 날 고용한 형에게 부탁해 오늘 분량의 전단지를 꺼내어 왔습니다.
오늘은 아예 점심도 먹지 않을 겁니다. 다림이를 보지 않겠습니다.
하. 그 참. 다림이 저거는 왜 저렇게 일찍 나오는 겁니까.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다 올라오는 다림이를 보았습니다.
날 바로 쳐다 보는 군요.
날 보고 어색하지만 웃음도 보이네요.
이제 그녀가 나보다 높아지려 합니다.
그 순간 바로 옆으로 다가온 다림이가 어색하여 들고 있는 전단지 몇장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녀는 저기 위로 올라 갔습니다.
돌아 봤습니다.
그냥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올라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 당신은 그렇게 나보다 위에 있을 때 그리고 나를 그렇게 어색하지 않게
몰랐던 예전의 모습이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점심도 안 먹고 전단지 뿌리니까 어제 보다 훨씬 빨리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배가 고프네요.
날 고용한 형에게 오늘 일은 다 하고 간다는 말을 하고 가야 했지만
뭐 예전에 믿음을 준 사람이기 때문에 날 믿을 것입니다.
일당을 받아야 하는데 일이 끝나고 오일 치를 한꺼번에 준다는 게 석연치 않지만
그 형도 나에게 믿음을 주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아직 해가 저렇게 떠 있는데 집으로 들어가기가 싫었습니다.
괜히 학교를 갔었지요.
도서관 앞에는 여전히 학생들이 많습니다.
당구나 한게임 치려고 온 것인데 마침 잘 되었습니다.
우리과 그녀를 보았습니다.
그녀 이름을 불렀는데 못 들은 척 그냥 힘없이 걷고 있습니다.
확 가서 나도 엉덩이나 쳐 버릴까보다.
"야!"
뒤 쫓아 가서 그녀 바로 귀에다 대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응? 형이구나."
"어. 왜 또 형이야."
"응. 그냥..."
"당구 한 게임하자?"
"당구? 오늘은 그냥 집에 갈래."
"시험 떡 쳤냐? 힘이 없어 보인다."
"아니야. 나 갈게."
"으이씨. 그래 잘 가라. 이제 누굴 꼬시지?"
우리과 그녀가 힘이 많이 없어 보입니다.
지나치는 그녀를 뒤로 하고 내 기분을 풀어 줄 누군가를 찾으러 고개를 돌릴 때였습니다.
"형!"
우리과 그녀가 가다가 돌아서 나를 부르는 군요.
"왜? 한게임 할래?"
"아니. 술한잔 할래?"
"술?"
"좀 사주라. 선배 좋다는게 뭐냐."
"못 사줄 이유는 없지만 너 술 진짜 세잖아."
"오늘은 조금만 마실게."
"그럴까? 진짜 쫌만 마셔. 그래 가자."

다소 슬픈 얼굴의 우리과 그녀와 나 사이에 소주가 두병이 놓였습니다.
한 병은 빈 병입니다.
그냥 별 말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한 잔씩 한 잔씩 들이켰습니다.
사람들의 소리가 그 소리가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이 번져 있는
주점의 어두운 등불 밑에서 우리과 그녀는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 하소연 속에 나는 그리움이 커져 가고 있습니다.
"내가 여자로서 그렇게 매력이 없어? 응 형."
"왜. 귀여운데."
솔직히 조금...
남자들은 말이지 연약하고 자기가 품을 수 있는 여자를 대체로 원하지.
넌 조금 터프한 게 사실이야. 외모도 별로 신경안쓰고 말이야.
지금은 예전보다 좀 볼만하다.
"나 솔직히 이 학교 때려 치우고 재수 할까도 생각을 했었어.
나 혼자만 여자인 것이 그렇게 외로움을 줄 줄은 몰랐거든."
"일학년때 얘기냐?"
"나보고 선 머슴애 같다고 그러는데 난 어울리고 싶었다고 그것 때문이었는데..."
"갑자기 그 말은 왜 하냐?"
"형은 남학생들이 무심결에 던지는 말들 하나 하나가 얼마나 날 아프게 했는지 모를거야. 하지만 난 이겨냈다고 생각해. 이제는 괜찮거든. 그래서 좋았어. 나도 그네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
우리과 그녀는 홍조를 띠면서 또 술을 한 잔 들이켰습니다.
안 좋은 일이 있나 봅니다.
"내숭도 떨기 싫었어. 동기들과 또는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나는 여자가 아니라 너네들과 같은 과 학생으로서 친구이고 싶었기에 날 꾸미는 것에 소홀 했다면 변명일까?"
"무슨 안 좋은 일 있니?"
"싫대. 나하고 같이 다니기 부끄럽대."
"누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왜? 싸웠냐?"
"싸우긴 끝났어 차였지."
"뭐 땜에?"
"여자 안 같대. 한 동안 지금까지 어울리던 친구들을 외면한 채. 난 여자이고 싶었고 내 딴에는 노력했어. 그 사람 하나를 위해서 이제는 어색하고 낯 간지러운 저 가정대의 예쁘고 내숭 많은 여학생이 하는 것처럼 하려고 노력 했어. 안하던 색조 화장도 그래서 했어. 나 여름 방학때 신입생 여자들이 받는 차밍 스쿨 다닌거 모르지?"
술이 떨어졌습니다.
한 병을 더 시켰습니다.
세병째입니다.
난 반병 정도 밖에는 먹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여자가, 이 말을 너무 자주 들었어. 말도 함부로 한다고 그러고 내숭도 지을 줄 모르고 그렇게 화장하려면 차라리 말아라. 넌 치마 입을 줄 모르냐? 그런 말 많이 들었어. 형?"
"왜."
"나 진짜 여자 안 같지? 남자 엉덩이도 툭툭 치고 다니고 말이야. 울학교 여학생 중에 나만큼 당구 잘 치는 여학생 없을 걸."
"맞아. 흔히 생각하는 여학생과는 좀 다르지. 그래도 귀여워."
"흠. 나도 여자 같지 않다는 걸 알아. 남자들 틈에서 남자들 하는 거 보면서 사년을 보냈어. 근데 있잖아. 나 말이야. 마음 속은 아주 여자다."
우리과 그녀의 눈망울에 물기가 고였습니다.
"나 그 사람 진짜 사랑했어. 슬픈 영화를 봤거든 극장에서 울면 그 사람이 생긴 것 같지 않게 눈물 흘린다고 할까봐.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람 표정에 맞추었지만  내방에서 혼자가 되었을 때 밤새 그 영화를 떠올리며 그 사람이 그 영화의 주인공이라 생각하며 울었다. 답장도 별로 없었지만 그에게 보낸 편지도 꽤 많아. 내 글씨는 여자 글씨거든... 그 사람이 날 보며 넌 꽃하고 인형은 별로 안좋아하겠다,말하며 사준 생일 선물은 공학용 전자 계산기였어. 계산기는 나한테 많아. 난 인형과 꽃을 참 좋아하거든. 내 방 침대는 인형으로 장식 되어 있고 내 책상과 거실의 화병엔 내가 항상 꽃을 사다 꽂지. 그래도 나는 그가 사준 계산기가 좋았어. 그런데 내가 여자 같지 못해서 싫대."
"진짜 차였나?"
"응."
"네 성격에 그 놈을 가만히 나두냐?"
"형도 내 성격을 그렇게 보는 구나. 그렇나 보네. 내가 정말 여자같지 않나 보구나."
"야. 왜 울어 임마."
우리과 그녀가 우는 모습은 내가 제대후 그녀를 본 이후로 첨입니다.
너도 울 줄 아는구나. 넌 그랬잖아.
너네 동기놈이 슬퍼서 술 먹고 울면
'사내자식이 그깟 일로 눈물을 보이냐. 한잔 해.'
그랬던 니가 내 앞에서 울면 안되지.
나도 하소연 할게 많단 말이여.

어색한 미소의 우리과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이 한 방울 떨구어 졌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어느 소설책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그 눈물속에서 다림이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과 그녀가 이제 술은 더 이상 마시지 않으려나 봅니다.
술이 세긴 세군요. 아직 말짷해 보입니다.
"한가지만 물어 봐도 되겠냐?"
"뭘."
"만약에 널 차 버린 그 사람고 우연히 마주친다면 웃어 줄 수 있겠니?"
"흠. 모르겠어. 힘들겠지."
"그럼 반갑게 먼저 아는 척은 할 수 있겠어?"
"그것도 힘들겠네."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아는척 하며 접근하면 싫겠니?"
"싫긴. 우연히 마주친다면 그 사람이 날 아는체 해 주기를 바라며 그냥 바라만 보겠지."

밤은 가로등 니깟 놈들이 아무리 밝혀봐라.
낮이 되는지,그러며 어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말짱한 줄 알았던 우리과 그녀는 걸음걸이가 영 불안합니다.
자기는 그냥 집까지 걸어 간댑니다.
"니네집 어디야?"
"우리집? 우리집이 어디냐 하면...어. 우리 아빠가 사는 집이 우리 집 맞아?"
"너 가출했냐?"
"면목동이다. 무슨 전문대가 하나 있는데..."
"혼자 갈 수 있겠냐?"
"내가 소주 두병 마셨다고 취하는 거 봤어? 걸어가면 돼."
할 수 없습니다. 데려다 주어야 겠네요.
에구 아까운 내 돈. 택시비가 4000원이나 나왔습니다.
이런 거리를 어떻게 걸어 갈 생각을 했을까요.
진짜 여자가 말이야. 그래 그녀는 여자가 맞습니다.
"니가 말한 전문대 앞이야. 어디로 가면 돼?"
"벌써 왔어. 진짜 우리집 가깝다. 저 골목을 돌면 돼."
그냥 똑바로 걸으면 빠를텐데 걸을 걸이가 삐뚤삐뚤합니다.
그녀의 팔을 잡았지요. 어라. 우리과 그녀가 내 팔장을 끼네요.
"내가 팔장 낀다고 싫어? 나도 여자야 이 사람아."
"누가 뭐라 그래? 너 여자 맞어."
"고마워 오빠."
"또 오빠네."
"어. 저기가 우리집이다. 잘가라."
참 내. 기껏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더니 '잘 가라.' 꼴랑 그 말만 남기고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초인종을 누르더니 집 안으로 사라집니다.
"야. 이년아. 또 술 먹었냐? 한 동안 잠잠하더니... "
집에도 년으로 불리는 걸 봐서 여자가 맞습니다.
다림이도 여자지요. 그녀도 그랬을까요.
내가 그녀를 찼습니다.
오늘 우리과 그녀의 태도는 어쩌면 다림이의 하소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웃음이 무엇이기에. 그 종이위에 비쳤던 과거의 그녀의 모습이 무엇이기에
그 동안 헤어졌던 어색함이 무엇이기에, 오늘 내가 그녀를 외면한단 말입니까.

오늘 우리과 그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다림이도 울었을 까요. 나란 존재와의 헤어짐이 슬퍼서 울었을까요.
괜히 내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담배 연기에 약하시나 봐요. 아까 내가 담배를 피웠거든요. 답답하시면 창 여세요."
"네?"
"눈물을 흘리시길래 혹시나 아까 내 담배 연기 때문에 그러는가 싶어서요.
문 열면 춥고 해서 그냥 피웠거든요."
이 택시 기사는 분위기를 영 파악을 못 하는 군요.
괜히 창을 열어 찬 바람을 느꼈습니다.
상쾌하군요. 내일은 다림이를 다시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여니까 훨씬 낫죠. 근데 좀 춥거든요. 이제 닫으세요."
기사 새끼 진짜. 나이도 별로 안들어 보이는게 말이 졸라 많네.

오늘 아침은 많이 떨립니다.
오늘 다림이에게 아는 척을 할 것입니다.
그녀가 답을 해주면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다시 만나자 그럴 겁니다.
다림이의 마음을 모르기에 떨립니다.

오늘도 좀 일찍 갔었지요.
다림이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항상 다른 나레이터 보다 훨신 일찍 나왔습니다.
내가 나오는 시각과 비슷한 시간입니다.
전단지를 들고 나오며 다림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오늘 다짐한 것이 있기에 시선을 피하지 않고 씩 웃어 주었습니다.
다림이는 표정에 변화가 없군요.
그렇지만 나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습니다.
입을 꼼지락 거리는게 할 말이 있는 것도 같았습니다만 그냥 밝은 표정으로 지나쳤습니다.
그녀는 옷을 갈아 입으러 이상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아까 본 다림이가 내 사랑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기분이 좋아지는 군요.
다림이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데스크 밑에 전단지의 반을 넣었습니다.
나레이터 모델의 옷을 입은 그녀가 아름답네요.
나와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다소곳이 서 있습니다.
아직 문 열려면 시간이 꽤 남아 있습니다.
점심때가 좋겠네요.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 말입니다.
나는 밝은 표정으로 미소띤 얼굴을 그녀에게 주고 지나쳤습니다.
다림이가 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습니다. 다소 쌀쌀한 어투였습니다.
"놀리지 마세요."
밝은 모습으로 웃음지어주면 그것은 놀린 겁니까?
세상이 그렇게 변한 것입니까.
그냥 다시 침묵으로 웃어 주고 내 할 일을 하러 떠났습니다.
오늘 기분이 좋은 건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 때문입니다.
오늘 따라 전단지를 받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외면하지 않네요.
전단지를 돌리며 어떻게 다림이에게 접근할 까 생각을 해 봅니다.
아까 다림이가 말을 걸었을 때 그냥 대답을 해주고 아는 척 해버리는 건데
그랬습니다.
아침의 분위기는 아직 이르지요.
그리고 내가 먼저 말을 걸고 싶었습니다.
"우우웅....""으으으..."
"여보시오."
"주원이 오빠야?"
"어. 니가 어쩐 일이냐?"
"어제 고맙다는 말 못해서... 내가 말 많이 했지?"
"조금."
"들어주어서 고마워."
"기분은 어떻냐?"
"괜찮아. 오빠는 뭐해?"
"아르바이트 중이지."
"언제 당구나 한 게임 멋지게 치자."
"그래. 전화해 줘서 고맙다."
"응. 안녕"
우리과 그녀군요.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혹시 그녀가 날 좋아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 맞다. 우리 과 전용 게시판에는 이런 게 붙어 있습니다.
'공고. 92학번 주원이가 헨드폰을 샀다. 번호. ****-**** 내 헨드폰이 죽어가고 있어요.
불쌍한 선배 살려 주는 셈 치고 전화해 주세요.'
근데 쌔가 빠질 놈들이 그렇게 쪽팔리는 문구를 붙여 놓았는데도 전화 한 통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 때 내 별명이 죽은 헨드폰. 심지어 내 헨드폰 번호를 별명으로 부르는 놈도 있습니다.
헨드폰을 보고 씩 웃었습니다.
그래 헨드폰이 있었구나.
근데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나레이터 모델 그 옷을 입고 있습니다. 에이씨...
전단지는 점심 먹을 시간 훨씬 전에 다 팔려 나갔습니다.
공짜가 좋긴 좋구나.

짤래 짤래 빠른 걸음으로 전시회장으로 갔습니다.
정문 옆에 마주 보며 서 있는 두 명의 모델 아가씨. 그 중에 한 명은 다림이입니다.
"어서 오세요."
인사 올리는 모습이 참 예쁘네요.
데스크가 놓인 곳은 그녀를 보기 참 좋은 장소이군요.
전단지를 깔고 앉았습니다.
관계자 놈들이 뭐라 그러든 괜찮습니다.
오늘 보고 있는 저 모습을 잊기가 너무 아까울 것 같습니다.
다림이는 나를 의식하는 듯 인사를 마치고 나면 고개를 한 번씩 이쪽으로 돌렸습니다.
혹시나 해서 헨드폰을 꺼내었습니다.
그리고 다림이 번호를 눌렀지요.
그녀가 이쪽을 쳐다 봅니다.
어떻게 지금 전화하고 있는 걸 알았을까요.
허허. 일을 하면서 헨드폰은 왜 끼고 있지요?
다림이가 허리춤 작은 주머니에서 헨드폰을 꺼내었습니다.
전화기를 꺼내었으면 받으면 되지 이쪽은 왜 쳐다 보고 있습니까.
나를 쳐다 보던 얼굴은 맞은 편 모델에게 뭐라 중얼거리기 위해 잠시 돌려 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발걸음을 옮기는 군요. 확 끊어 버릴까보다.
재밌네요. 빤히 쳐다 보면서 전화하면 참 재밌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저 쪽 편 그러니까 바로 나를 보면 내가 있는 데스크에서 바로 정면쪽에 섰습니다.
"여보세요."
대답을 할까요. 말까요. 참 망설여지네요.
난 줄 알면 끊을 것도 같았지만 말을 했습니다.
"여보시오."
"말씀하세요."
"어..."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네요."
왜 짜증을 냅니까. 그렇게 오래 머뭇거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난데. 주원이..."
"말씀 하세요."
난 줄 알면 고개를 돌려주면 좋을텐데 그러지 않네요.
뭐 나도 고개를 숙였습니다.
"오랜만이지?"
"그렇네요."
"딱 한가지만 물을게."
"뭔데요."
"저기 안 가봐도 되니?"
"그게 묻고 싶은 한가지에요?"
"아..아니."
"괜찮아요."
"그 있잖아. 나랑 헤어 졌을 때 혹시 너도 눈물 흘렸냐?"
"왜 그렇게 묻는데요?"
"억울하잖아. 나같은 녀석한테 별말 못하고 차인 것 같은 느낌이 들거 아냐."
"저 차인거 아니에요."
"쩝. 그래. 그때는 진짜 미안했다."
"뭘요?"
"다른 것 제쳐두고 네가 그리울 줄은 모르고 짧은 생각으로 널 잊으려 했던 거."
"내가 그런 사진 찍었던 게 그렇게 나빴던 거에요?"
"그때는... 그때는 모르는 사내들의 웃음이 싫었어."
"지금은요?"
"원장 아줌마한테 들었어. 물론 벌써 그 전에 그 사진속의 넌 잊혀졌지만."
"왜 전화 한 거에요?"
"가 봐야 돼냐?"
"조금 더 얘기 할 수 있어요."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나 부자라고 했잖아. 하하."
"무슨 얘기 하는 거에요?"
"나한테 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 찍으면서 받았던 돈 정도는 그냥 줄 수도 있었는데..."
"돈 얘기 하려고 전화 한거에요?"
"그건 아니지만 근데 왜 그리 쌀쌀하냐?"
"오빠가 나에게 얼마나 쌀쌀했던 것은 모르죠."
"미안해. 근데 말이야. 너 지금 유니폼 입은 모습이 너무 예쁘다. 패션 모델해도 되겠다."
"팜플렛 돌리는 아르바이트는 왜 하는 거에요?"
"그냥 문득 하고 싶어서. 널 만나고 싶었나 보지 뭐."
"흠. 왜 전화 했냐니까요?"
"왜 자꾸 묻냐. 모른척 하기 힘들어서 했다."
"그 동안 왜 장난으로도 전화 한 번 없었어요?"
"그건 무슨 말이냐?"
"그런게 있어요. 이 헨드폰 언제 찾아 가실 거에요."
"뭘 찾아가냐. 근데 왜 대답 안 해줘."
"뭘요."
"나랑 헤어졌을 때 눈물 흘렸었냐구?"
"그건 왜 묻는데요."
"그냥. 어떤 여자가 흘리는 눈물을 보았지. 참 아름답더라.
나 때문에 그 아름다운 눈물을 네가 흘렸다면 내가 그 여자에게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지른 거 같아서..."
"흘렸으면요."
"빌려고. 아직 날 안 잊었다면 단지 빌려고.
그리고 널 알게 된 지금까지 그때 며칠을 빼고는 계속 마음 속에 품고
사랑했었다는 것만 알려 주려고."
"날 계속 생각했던 거에요?"
"계속 생각했었다고는 자신있게 말 못하겠어.
하지만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는 말할 수 있어."
"흘렸어요. 아주 많이. 지금처럼요."
"흘렸었구나. 미안하다. 근데 지금처럼이라니?"
고개를 들어 보았습니다.
다림이가 나를 마주보고 있었네요.
언제 이쪽으로 얼굴을 돌렸을까요.
화장 지워 지겠다. 진짜 울고 있었네요. 목소리는 별로 떨리지 않았었는데...
"지금 우는 거냐?"
"그래요. 너무나 기다렸었는데. 그래서 항상 들고 다녔었는데.
오늘 두달만에 헨드폰이 울려서 그래서 따라 우는거에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헨드폰이 운다고 따라 울다니 그녀는 매우 감성적인가 봅니다.
에이 씨.
다림이에게로 갔습니다. 날 보는 눈이 젖어 있습니다.
"이리 와."
또박 몇걸음 나에게로 다가오는 구두 발자국 소리. 예전의 기분 좋은 그 소리.
다림이를 안고 싶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녀의 가는 목을 잡고 살며시 내 품으로 안았습니다.
뭘 봐. 이사람들아.
젊은 연인이 포옹할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래.
이 눈물은 나 때문에 흘리는 거여.
다른 사람이 보면 안되지.
그녀의 눈물은 내 가슴에서 닦여 저야 된다 말이여.

오늘 점심은 밥 안 먹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녀와 다시 만난 것 같습니다.
배가 고플리 없지요.
오늘 저녁은 그녀와 저녁을 먹고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냉커피로 입가심을 할까요.
다림이는 내 가슴에 머리를 묻고 있습니다.
내 가슴이 지금 너무나 따뜻하거든요.
그걸 그녀가 느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
남들이 뭐라 그래도 그녀는 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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