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3년생의 사랑 17부
"잘봤어요 민형군. 웨이브 쪽은 까다로운데 힘껏 해봐."
"고맙습니다."
격려하며 콘티를 넘겨주는 김선민을 흘끔 쳐다보며 가볍게 인사를 한 민
형이 서류철에 챙긴 원고를 옆구리에 끼고 지영을 흘끔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가야 할 때가 되었다는 신호. 지영이 눈치 빠르게 싱긋 웃으며 선민
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저 그럼 우린 이만 가봐야 되겠네요. 약속이 있거든요."
"아,그러세요? 그럼 일어 나시죠. 저도 들어가 봐야 하니까."
"네."
한꺼번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3사람. 지영이 괜찮다는 데도 불구하고 굳이
자신이 차값을 내어준 선민이 커피 을 나서다 말고 민형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으며 친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소질있어. 웨이브에서 안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해. 원래
잡지용 원고는 쉽게 통과되지 않으니까."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격려하는 건가? 아직 민형은 이 김선민 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자세히 알
지 못하는데다 예전에 지영과의 관계도 있고해서 그가 하는 말이 백이면
백 다 진실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내보내는 진실한 표정은 만점짜
리였다. 민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에서 일하고 게신다니 언젠가 또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
인사차례로 건넨 민형에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선민.
"우리 언젠가 또 만나자고."
선민이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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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7시경. 이곳은 지혜의 원룸 오피스텔. 보통때 이곳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지만 민형과 지영이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던 지혜는 일찍 집에
들어와 민형과 지영을 맞이했다.
"어머어머, 60페이지 콘티로 가자고 했다고? 마음에 드는가 보네?"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아요."
출판사에서 있었던 일을 민형에게서 전해들은 지혜가 용하다는 듯이 손
뼉을 쳤고 민형이 쑥쓰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일단 콘티 분량이
늘었다는 것은 희망적인 이야기다. 지면을 더 할애해 줄 가치가 있다는 이
야기인 것이다. 지혜가 신통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 그림으로는 조금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어쨋든 열심히 해봐 민형씨.
혹시 안되더라도 실망하지는 말고."
"실망안해요! 경험이지요 뭐."
끝까지 만약의 가능성을 버리지 않는 지혜에게 민형이 걱정말라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혜는 민형이 기대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민
형도 그런 지혜의 씀씀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매우 고마웠다.
- 딩동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지훈씨?"
"나야!"
문밖에서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자리에서 일어난 지혜가 현관문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반가운 표정의 지훈
이 포장피자를 들고 허겁지겁 신발을 벗었다.
"지영아! 왔구나?"
"아,오빠. 안녕하셨어요~"
피자를 식탁위에 던져놓고 냉큼 지영의 앞자리에 앉는 지훈. 그가 반가
운 얼굴로 하하 웃었다.
"야,잘왔다 잘왔어. 저녁 먹었냐? 피자 사왔는데."
"아니 안 먹었어 형."
웃는 지영대신 대답한 것은 민형. 그 뚱한 표정의 민형에게 역시 뚱한
표정으로 지훈이 고개를 돌렸고 두 사람의 뚱- 한 눈이 마주쳤다.
"아, 너도 왔구나. 하긴 세트라는 걸 깜빡했군."
"기왕이면 지영씨의 반만큼이라도 반가워 해주면 안돼? 형이 잘해야 지영
씨가 대접받는 법이야."
"닥쳐......! 지영이한테 조금이라도 불쾌한 짓을 하면 죽여버릴테니
까!"
"......"
할말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는 민형. 그런 민형과 지훈의 옆으로 걸오
온 지혜가 팔짱을 끼고 한심하다는 듯이 웃었다.
"동생사랑 국가사랑 끔찍하게도 실천한다니까. 지훈씨 민형씨한테 자꾸
까불지마. 지영이가 구박받으면 어쩔래?"
"그,그럴리가 없어......!"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떠는 지훈. 지영이
쓴 웃음을 지으며 삐죽 식은땀을 흘렸다. 오빠...... 농담이잖아......
"근데 배고파 죽겠다. 지혜씨 지훈형이 사온거 뭐예요?"
"아, 피자예요."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만지작 거리며 식탁위로 쭈욱 목을 빼는 민
형. 지혜가 식탁으로 다가가 피자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거대한 불고
기 라지 피자. 민형이 반가운 얼굴로 손을 마주잡았다.
"이야~ 불고기 피자. 그런데 한판밖에 없어? 두판 사오지."
"지영이는 한판만으로 충분해......"
침을 꿀꺽 삼키는 민형을 얄미운 얼굴로 바라보며 지훈이 눈을 내리깔
꼬 쏘아 보았다. 하지만 민형은 그런 지훈에게 보라는 듯이 피자 판을
열고 피자 한 조각을 냉큼 집어들었다.
"야,이거 너무 적어. 나 혼자 다 먹어도 모자라겠는데......?"
"......!"
지훈을 스윽 쳐다보며 눈웃음 치는 민형. 지훈이 주먹을 불끈 쥐고 몸
을 부르르 떨었다.
"지혜씨는 안먹어요?"
피자를 씹으며 묻는 민형. 지혜가 대답했다.
"아, 난 피자는 됐어요. 살쪄요."
"지금도 충분히 잘 빠졌는데 뭘."
실실 웃으며 혼자서 와구와구 피자를 집어 먹는 민형. 갑자기 지훈이 충
혈된 눈으로 피자를 붙잡은 민형의 손을 덥썩 움켜 잡았다. 지훈이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애처롭게 중얼 거렸다.
"너...... 너무 빨라...... 천천히 먹어."
"됐어! 난 원래 이 속도야!"
"......!"
울컥, 지훈의 손을 뿌리치며 더욱 먹는 속도를 빨리하는 민형. 지훈은
참다못하고 얼른 피자 한쪽을 집어들어 지영에게 넘겨주었다.
"지영아 너 안먹어?"
"아,예예......"
쓴웃음 짓는 지영. 그리고 지영이 피자를 넘겨받자 민형의 두눈이 그쪽
으로 쏠렸다. 민형이 씨익- 웃으며 가증스러운 표정으로 지영에게 말했
다.
"그거 큰데. 맛있게 생겼는데 내가 먹으면 안될까?"
"아,네 민형씨 먹어요 자."
"......!?"
의도적인 민형의 행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영이 얼른 쥐고 있던 피자를
민형에 입에 내밀었고 지훈의 분노 폭발 지훈이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며
민형의 멱살을 잡았다.
"이자식 정말!"
"어라......?"
피자를 입에 물고 씨익- 눈을 올려뜨는 민형. 민형이 말했다.
"이거 왜이래 형? 지영씨가 나 먹으래잖아......?"
"너,너,너는 다른거 먹으면 되잖아! 왜 내가 먹으라고 준걸 뺐어 먹는
거야 이 나쁜놈아......!"
"아하 그래? 그런데 어떡하지 내가 그게 먹고 싶은데 어쩌라고?"
"이,이 이 자식이......!"
욹그락 붉으락 한 지훈에게 실실 웃으며 중얼거리는 민형. 지영이 상관
하지 않아야 겠다는 얼굴로 살짝 뒤로 물러났고 보다못한 지혜가 지훈의
머리를 후려쳤다.
"어휴 그만해 정말 애도 아니고!"
"......!?"
갑작스럽게 머리를 얻어 맞은 지훈이 번쩍 고개를 들었고 무서운 표정의
지혜가 가슴앞으로 팔짱을 끼고 이렇게 말했다.
"민형씨가 장난하는거 몰라? 그렇게 동생이 좋으면 동생하고 살아."
"아,아니 나는 그게 아니라......"
싸늘한 얼굴의 지혜. 그러 지혜 앞에서 꼼짝 못하는 지훈을 보며 민형이
피자를 입에 문채 킥킥 거렸다.
"이제 지영씨는 지훈형 동생이 아니라 내 애인이라는 걸 아셔야지."
야금야금 피자를 씹어 먹으며 결정타를 날리는 민형. 지훈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바닥에 쿵 주먹을 내리 꽂았고 지혜가 못말리겠다는 듯이 한숨
을 내쉬었다.
"겨우 피자 한조각 가지고......."
지영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억지로 웃고 있었다.
PART-97
작열하는 태양 속에 환하게 들어나 보이는 여자들의 세미 누드. 기다리
고 기다리던 여름 방학의 시기가 돌아왔다. 그리고 방학식 조례를 맞친 아
이들은 모두 긴장된 분위기로 담임 선생님인 송미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이 울리고 자그만치 10분이나 늦게 교실에 입실한 송미라. 그녀가 긴장
된 아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교탁에 섰다.
"모두들 기다렸지?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즐거운 방학식~"
"네!"
어쨋든 방학식이란 기쁘고 즐거운 것. 좋아하는 아이들의 앞에서 송미라
가 생긋 웃으며 들고 있던 서류봉투 안에서 흰색의 꾸러미를 우르르 쏟아
내렸다.
"그리고 기다리던 기말고사 성적표~"
"......"
일시에 교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민형은 제일 뒷 자리인 자
신의 자리에 앉아 흥미 있는 얼굴로 자신의 성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시험은 사나이 정민형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최고로 잘 보았다는 예감
이 팍팍 들었던 시험. 아마 평균도 엄청 올랐을 것이다. 참고로 예전 민형
의 평균점수는 30점 이하. 등수로 따지면 즉 꼴찌였었다.
<< 이번엔 혹시 꼴지를......!? >>
면하는 것이 아닐까! 민형은 두근 거리는 심장으로 주먹을 불끈 움켜쥐
었다. 저번 학교에서는 보스라는 이미지 덕분으로 시험에서 꼴찌를 해도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다들 민형이란 존재에 대해서 색안경을 끼고 있었
던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학교에서는 다르다. 반 아이들과 그저 친
구인 이 분위기에서 꼴지라는 것은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말 그
대로 꼴지란 말이다! 그 이상의 설명이 필요해?
"강석희"
"네......"
"최영훈"
"네에......"
"오수지"
"네에에......"
"봉지훈"
"네에에에......"
차차 이름이 불리울 때 마다 대답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늘어지기만 했
고 이내 담임은 언제나 이 시간의 주인공이 되는 한 여자아이의 이름을 불
렀다.
"반장"
"네."
또렷한 목소리. 그녀는 특별히 이름이아닌 반장이란 호칭으로 불리운
다. 그녀의 이름은 신의연. 바로 전체 학급에서 언제나 1등을 차지하는 공
포의 미소녀였다. 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학우들의 모든 시선이 부러
운 듯이 그녀의 뒷통수로 쏠렸다.
"잘했어 반장. 또 일등이네."
"고맙습니다. 선생님."
의연에게 성적표를 건네주는 송미라가 조금은 못 마땅한 얼굴로 씨익-
웃었고 의연 역시 씨익- 웃으며 성적표를 건네 받았다. 태연하게 성 표
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오는 의연.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모든 학우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민형도 자리에 앉는 의연의 찰랑거리는 뒷 모
습을 바라보며 연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정민형."
"네!?!?"
순간 화들짝 놀란 민형이 벌떡 일어나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아이들이
일제히 민형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라가 성적표를 팔랑팔랑 흔들며 어깨
를 으쓱해 보였다.
"나와."
"아,네......"
잠시 딴생각 하다가 이게 무슨 망신. 민형이 머리를 긁적 거리며 미라
에게 다가가 성적표를 건네받자 그녀가 못마땅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성적이 이게 뭐냐. 게다가 아무리 과목이 틀리다고 해도 시험 날짜마
다 이 엄청난 점수 차이는 뭐야? "
"......"
역시 점수가 그저 그랬던 것인가. 민형은 뜨끔한 얼굴로 성적표를 받아
쥐죽은 듯이 자리로 돌아왔다. 아, 성적표를 펼쳐보기가 두렵다. 민형은
두근 거리는 얼굴로 성적표를 펼쳐 보았다.
"......"
"......"
잠시 침묵이 흘렀고 민형은 반 석차가 표시된 란에 멈추어 있었다.
- 21/51명
민형은 다시한번 뚫어지게 성적표를 바라보았다.
- 21/51명
51명중의 21번째. 51명중의 21번째. 게다가 평균.
"68~~~!?!?!?!?"
민형이 벌떡 일어나며 비명을 질렀고 아이들이 일제히 민형에게 고개를
돌렸다. 민형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마구 소리 질렀다.
"68점!? 21등!? 평균 68점이라고!? 내가 21등 이라고!?내가!?"
아이들이 모두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망각한채 연신 고개를 흔들며 외
쳐대는 민형. 그런 민형을 보며 반 아이들이 수근 거렸다.
"어머 민형이 쟤 시험 망쳤나 보다......"
"그러게 68점이라니 안됐다....... 영어도 100점 받았는데......"
모두들 민형의 본심을 모른채 민형을 향해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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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 나21등 했어요!! 21등 했다고요!? 내가 21등을 했어요---
--------------------!!!!!!"
학교가 끝나자 마자 공중전화로 달려가 집에다 전화를 때리는 민형. 주
위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는 가운데 수화기 저쪽에서 어이없는 희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희반이 모두 21명이냐? >>
"51명이예요 51명!! 평균도 68점이라고요!! 아시겠어요!? 68점!!"
<< 뭐야!? 그 말 믿어도 되는거야!? >>
"네 믿으셔도 되요!! 성적표가 나왔거든요 크흐흑!!"
너무 감격해서 정말로 눈물이 날 것 같은 민형. 민형은 태어나서 처음으
로 성적표를 받은후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금까진 언제나와
다름 없는 차가운 성적표에 도장을 받고 학교에 반환했는데. 21등이란 석
차가 적힌 이번의 성적표는 민형에겐 꿈과 같은 너무나 엄청난 대 사건이
었다.
<< 정민형! 너 시험지 같은거 훔치면 안돼!! 요즘에 대학도 부정 입학이
다 뭐다 해서 떠들썩한거 모르지? >>
"......"
하긴 갑자기 부모님에게 21등이라는 점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도 무리
지. 고교 3년 동안을 꼴지에서 맴돌았던 아들이 갑자기 21등을 했다면 믿
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누구보다도 민형 자신이 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화를 끊고 민형은 주먹을 불끈 쥐면서 하늘을 바라 보았
다.
<< 햐...... 공부란거 진짜 쉽구나. >>
겨우 그정도 노력을 기울였는데 단번에 석차가 20등이나 올라가다니. 민
형은 어렴풋이 벽으로만 느껴졌던 공부라는 것에 대해 일종의 요령이 생기
는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이번 시험 전의 벼락치기로 얻은 것도 많았다.
의연과 지영씨를 잘 이용하면 또다시 이런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만도 같
았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전혀 하지 않았던 공부라는 것을 해서 최초로 올
린 점수였으니까.
'그래 맞아...... 난 지금까지 공부를 전혀 안했어. 조금 하니까 이렇게
실력이 나오는 거야. 맞아 난 싸움뿐만이 아니라 공부에도 천재야. 맞아
이 천재성을 일깨워줄 스승이 필요했던 것 뿐이라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라자민 인간 정면형은 결코 그런 타잎
이 아니었다. 어쨋든 그는 21등이라는 엄청난 점수에 치어 당장 죽어도 여
한이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야, 그렇게 좋냐 21등이."
"......!!"
한순간 등뒤에서 들려오는 뜨끔한 목소리. 민형이 오싹한 표정으로 고래
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등뒤에는 뚱한 표정의 의연이 서 있었다. 그녀가
한심하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3점이나 되는 영어를 100점 맞고 21등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너
시험을 보긴 본거냐?"
"무슨 소리야! 21등이나 했잖아!"
그래! 21등이다! 이거 엄청 대단한 거다!
"21등......? 그거 가지고 서울에 있는 대학도 못가. 어차피 21등이나 꼴
등이나 대학에 못가면 마찬가지야. 몰라?"
"......"
상판 깨기는...... 민형은 갑자기 달아 올랐던 기분이 싹 가셔 의연을
째려 보았다. 어떻게 쟤는 저렇게 무드 깨는 소리만 살살 골라서 잘 하
지? 민형은 기분이 상해 삼백안으로 의연을 가만히 노려 보았다. 하지만
의연은 의연대로 기분이 나쁜 듯 했다.
"나도 이번에 시험 망쳤어."
"너도?"
"응 두문제 더 틀렸거든."
제길, 뭐 이런게 다 있다냐. 민형은 정말 풀이 죽어버렸다.
PART-98
"어머! 민형씨 평균이 68점! 21등이나 했어요? 정말 축하해요!"
집에 돌아온 민형은 지영의 집중적인 비행기 태움을 당하며 콧대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어때요 지영씨. 제자를 잘두니까 가르치는 보람이 있지
요! 난생처음 받아본 등수. 민형은 정말 하늘로 날아 오를 것만 같았다.
"민형씨 정말 잘했어요. 자 뽀뽀~"
"하핫, 뭐 기본실력......"
기분이 좋아서 연싱 싱글 거리는 민형. 지영은 민형이 21등이 갖는 의미
가 대단히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민형은 공부를 전혀 할 생각을 하
지 않아서 그렇지 머리가 좋고 이해력이 높다. 지영은 충분히 민형을 띄워
주어 앞으로도 공부에 흥미를 잃지 않도록 해줄 생각이었다.
"오늘은 즐거운 방학식. 성적도 이렇게 불쑥 올랐으니 축하파티라도 할
까요?"
"네! 해요 해!"
솔직히 21등이 그리 대단한 등수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기분을 맞춰주려
는 지영의 태도에 기분이 좋아진 민형이 맞장구를 쳤다.
"그럼 오늘 저녁은 기대 해주세요! 아주 멋들어지게 차려드릴테니까
요!"
"OK!! 기대100%예요!!"
지영이 팔뚝을 걷어 붙치며 신이나서 외쳤고 민형역시 즐겁게 맞장구를
쳤다. 즐거운 저녁 식사~ 방학도 시작하고 민형은 마구 행복할 뿐이었다.
...................................... . . . . . . . . . .
그날 저녁 민형은 지영과 함께 들뜬 기분으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
다. 오늘은 특별히 지영씨가 한턱을 내기로 하고 민형이 좋아하는 돼지고
기 불고기와 수입품 튀김용 감자를 잔뜩 사왔다. 그리고 오는 길에 비디오
가게에 들려 비디오도 빌리고 성적이 오른 기념으로 지영에게 사고 싶었던
게임 시디도 선물 받았다. 아, 정말 성적이 오르니까 여러모로 좋은 점이
너무 많구나. 민형은 싱글 싱글 웃으며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아,배고파! 빨리 먹고 싶다 불고기! 지영씨 오늘 감자 한통 다 튀겨
요!"
"질려서 못 먹어요."
"아니요! 나는 감자는 얼마든지 들어가요! 모자르면 모자르지 절대 많아
서 남기지는 않는다구요!"
으쓱하며 고개를 드는 민형을 향해 쿡 웃음 짓는 지영.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결코 감자를 모두 튀겨주지는 않는다. 민형이 남길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민형은 기분파라서 앞 뒤 가리지 않고 기분에 따라 일을
벌이고 지영은 그 기분을 맞춰 주면서 앞뒤를 재가며 실속을 차리는 타잎
이었다. 어쨋든 두 사람은 장바구니를 든채 팔짱을 끼고 싱글거리며 집
앞의 대문으로 들어섰다.
"!?"
그리고 집앞에 들어선 순간 민형의 발걸음이 딱 멈추었다. 동시에 마
당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남녀 두명이 두눈이 휘둥그래져서 멍하니 지영
과 민형을 쳐다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지영에게서 화들짝 손을 빼내며 민
형이 당혹한 얼굴로 외쳤다.
"어,엄마! 아버지!?"
"정민형?"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 서로를 반문하며 눈을 크게 떴다.
............................................ . . . . . . . .
저녁 시간. 민형의 집은 긴장된 침묵으로 가득했다.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민형과 지영을 앞에 놓고 희연과 성욱. 즉 민형의 부모님이 역시 긴
장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아들이 평균 68점을 받았다길레 좋아하는 불고기감을 사서 내려왔
더니......"
주먹을 쥐고 눈썹을 꿈틀꿈틀 떠는 어머니 강희연. 지영은 왠지 죽을
죄를 지은 것 같아 숨도 못쉬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머니 희연이
모든 상황을 단번에 눈치챘는지 짜증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자식이 서울에 잘 안 올라올 때부터 대충 짐작했다니까......"
이렇게 말하며 휙- 하고 지영에게 고개를 돌리는 희연. 지영이 식은땀
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팔짱을 끼고 싱글 거리며 들어오는 것
을 들켰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아니 변명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테지만 민형의 어머니 희연 역시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논리적이고
장황한 상황 설명으로 이미 민형과 지영에게 변명한 요만큼의 틈도 남녀
놓지 않은 후 였다. 민형이 이미 들통난거 할 수 없다는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천연덕 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사실은 이 여자랑 사귀고 있었어요. 하지만 좋은
신부감이라구요. 이번에 특별과외로 점수가 오른 것도 지영씨 덕분이예
요."
"이건 동거지 연애가 아니잖아 임마!"
퍽 소리와 함께 국물도 없는 주먹이 민형의 얼굴을 향해 날라왔고
민형이 숨도 못쉬고 반대쪽으로 나가 떨어졌다. 희연이 주먹을 거두며
지영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그 무시무시한 눈빛에 지영은 앉은채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희연이 물었다.
"난 아가씨를 알고 있어. 아가씨...... 민형이 다니던 학원에 강사였
지?"
"예!? 아, 예......"
치명적인 물음에 반박할 여지도 없이 지영이 순순히 고개를 떨구었고 민
형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내두르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
게 알았지? 아무리 눈치가 빠르다지만 이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지 않는
가! 민형은 새삼스럽게 자신의 어머니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
하고 치를 떨었다.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눈치군. 예전에 아가씨가 우리집에 전화
를 건적이 있었지? 그때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지."
"예에......"
완전히 질려 기가 팍 꺽인 지영. 어이가 없어 하하 실소를 흘리는 민
형. 그래, 우리 엄마는 보통 인간의 상식으로 판단해서는 안될 여자였던
거야. 민형은 자신의 어설픈 소꿉장난이 산산 조각 나는 느낌을 받았다.
맞어. 우리 엄마에게 요령을 통하지 않는 법. 그때 희연이 스윽 민형에
게 고개를 돌리며 이를 갈았다.
"정민형."
"왜요."
긴장된 상황에서 묘하게 침착해 지는 것은 민형의 성격. 뭐 이미 다 들
통났으니 별수있나. 천역덕스럽게 대답하는 민형을 향해 희연이 부르르 떨
며 입을 열었다.
"이 아가씨 덕분에 성적이 올랐다고?"
"그래요."
"......"
왠지 못마땅하게 지영을 쳐다보며 묻는 희연에게 민형이 대답하자 희연
이 한숨을 쉬며 지긋이 지영을 쳐다 보았다. 품행은 단정하고 어디로 봐도
빠지진 않는 아가씨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이가 많다는 것이 걸렸다.
희연이 물었다.
"아가씨 몇살이지?"
"스,스믈 넷입니다 어머니."
"스,스믈 넷!?!?"
"......"
기겁을 하는 희연과 안경을 빛내는 민형의 아버지 성욱. 희연이 잠시 지
끈한 이마를 손으로 누르며 핏발을 세웠다.
"여,여섯살 차이라 이거지......"
"엄마 그 정도는 요즘 기본이예요 하하."
콱- 소리와 함께 민형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지영이 숨소리도 못내고
얼굴을 새하얗게 띄웠다. 희연히 하아 하아 숨을 내쉬며 번쩍 날카로운 눈
빛을 빛냈다.
"아가씨 집안의 부모님은 다 계신가."
"저,저는 부모님이 안 계십니다......"
부모님 문제가 나오자 얼굴이 쑥 들어가는 지영. 어디에 가도 이 문제에
있어선 할말이 없다. 지영의 대답과 함께 희연의 얼굴이 굳었다. 민형이
참다 못해 외쳤다.
"엄마 그런게 무슨 상관이예요! 부모님이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냐
구요!"
"넌 닥치고 있어 정민형 이 십*새꺄!"
"......"
무시무시한 얼굴에 민형이 주춤거리며 입을 다물었고 지영이 괴로운 얼
굴로 입술을 떨었다. 이런식으로 민형씨의 부모님과 마주치게 될 줄은 몰
랐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런 식으로 만나뵙게 될줄은 전혀 몰랐
던 것이다. 지영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건 그렇고......"
그때 문득 안경을 번쩐 빛내며 엄숙하게 고개를 드는 민형의 아버지 정
성욱. 지영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고 성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정말 미인인데? 우리 아들이 여자보는 눈은 있는 가 보군."
"그,그렇죠 아빠!?"
"그래 그래, 야 정말 예쁘구나. 내 언제라도 며느리로 데려 가도록 하
지! 아가씨 가슴도 정말 크군? 사이즈가 몇인가?"
"C컵이예요 아빠."
"오오, 훌륭하군. 민형아 이 아빠는 너를 믿는다."
퍽 퍽 퍽 소리와 함께 두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희연이 뻗었던
손을 거두며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내 아들의 며느리를 외모로만 판단 할 수는 없어. 무엇보다 가정환경
과 가족사항! 그리고 나이! 학벌! 성격! 특기! 직업! 이런게 중요하단 말
이야!!"
"학벌은 서울대학 영문과 졸업이고요. 성격은 얌전 착실 요조숙녀 맞 며
느리감이고요. 특기는 요리,영어회화 일본어 회화 과외, 등수 올리기 시험
문제 찍어주기고요. 직업은 학원 대입 강사예요."
"음! 정말 멋지군! 3개국어가 가능하다니!? 게다가 나도 포기한 내 아들
의 시험점수가 한꺼번에 20등이나 오른걸 보면 실속도 꽉 찬거 같군!! 그
리고 여자는 무엇보다 외모가 중요하지! 가슴도 말이야!"
- 칵
- 푸악
- 콰앙
민형과 성욱이 쓰러졌고 희연이 숨을 몰아쉬며 휙- 지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초조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번뜩였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많아...... 6살 차이는 너무 심해!"
무엇이 그리도 걱정인지 끝까지 부정하려는 희연. 성욱과 민형이 손가락
을 하나씩 세워 실실 흔들었다.
"질.투"
처절한 살상곡이 일었다.
PART-99
그날 저녁 지영은 오랜만에 자기 방에 이불을 깔았다. 이곳에 이사온 후
로 계속 민형의 방에서 잤기 때문에 밤에 이방에 건너온 기억이 거의 없었
다.
"......"
왠지 혼자서 이불을 깔고 있자니 측은한 기분도 들고 민형의 부모님들에
대한 불안도 밀려와 지영은 바보처럼 눈물이 나왔다.
'난 정말......'
지영은 주루룩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이부자리를 다듬었다. 오
늘밤은 여름이지만 매우 추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 . . .
"어쩌면 좋죠."
나란히 이부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중에 희연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들 민형은 덥다면서 마루로 이불을 가지고 나갔고 지금 이방에는 희연
과 성욱부부 두명 뿐이었다. 남편은 잠자코 누워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하
더니 이내 이렇게 대답했다.
"어쩌긴. 이제 돌이킬 수 있나 어디. 다행이 좋은 아가씨 같아서 다행
이라고 생각하는거지 뭐......"
"뭐가 좋은 아가씨예요 당신은? 6살이나 많다는데."
"당신도 나보다 2살 많치않아."
"2살이랑 6살 차이는 큰거라구요."
나이가 계속 마음에 걸리는지 좀처럼 느긋해지지 못하는 희연. 희연도
민형과 지영의 앞에서는 매우 완고한 태도를 보였지만 가능하면 자신의 아
들을 이해하고 싶은 쪽이었다. 남편의 말대로 지영이라는 아가씨는 조신하
고 씀씀이도 헤퍼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족관계와 용납하기 힘든 많은
나이는 외동 아들을 둔 어머니의 불안을 쉽게 해소시키지는 못했다.
"저희들끼리 잘 알아서 하는걸 보면 나이는 그다지 관계 없는 거라고.
봐, 민형이랑 잘 살고 있잖아."
"당신은 아버지로서의 자각이 있으십니까?"
희연이 비꼬는 말투로 묻자 성욱이 대답했다.
"물론 없지요."
퍽- 소리와 함께 희연이 돌아 누웠고 성욱이 코를 움켜 잡으며 신음소리
를 냈다. 희연은 옆으로 돌아 누운채 아직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
었다.
"난 민형이를 너무 빨리 결혼시키고 싶지 않아요."
"부모 마음은 그런거지. 하지만 우리도 제법 빨리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았잖소."
"그래도 우리는 공인된 사이였어요. 동거부터 시작하다니 하옇튼 요즘
애들은......"
생활능력이 좋은건지 되바라진건지...... 한숨을 쉬는 희연의 뒷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성욱이 빙긋이 웃었다.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 마음은
모두 같을 것이다. 조금 걱정되는 관계라고 해서 민형에게 사랑하는 여자
를 버리라고 말할 정도로 성욱 부부는 비정하지 못했다. 희연이 문득 성욱
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그 여자 정말 이상하죠? 어떻게 고등학생이 좋아졌을까요?"
"글세, 아마도 내 아들이 너무 잘났기 때문이 아닐까."
"얼굴만."
"그래, 얼굴만. 하하."
소리가 맞아 하하 웃는 두 사람. 잠시후 푸우- 풀이 죽어 한숨을 쉬며
희연이 천장을 보고 누웠다. 그녀가 하염없이 허무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말대로 좋은 아가씨인 것 같기는 해요. 민형이 성적도 올랐고 이
곳에 와서 싸움했다는 말도 들어본적 없어요. 솔직히 약이 올라요. 엄마인
내가 18년동안 보살피면서 고치지 못했던 점들을 그 아가씨가 반년만에 다
고쳐 버리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예요......"
"당신은 좋은 엄마야."
다정한 눈길로 희연의 어깨를 감싸는 성욱. 희연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
다.
"당신은 나쁜 아빠예요."
-------------------------------------------------------------------
다음날 잔뜩 긴장하여 마루에 모인 민형과 지영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형이 정말 의외라는 얼굴로 입을 크게 벌리고 말했다.
"네? 지금 돌아가신다고요?"
"!"
민형에 못지 않게 놀란 것은 지영이었다. 민형의 부모님은 민형에게 아
무런 토도 달지 않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서
울에 올라가는데 특별한 조건이 달리거나 한 것도 아니고 민형을 데리고
가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지영이 계속 이집에 사는 것
을 불가 시킨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한집에 사는 남녀가 눈이 맞았다는데 우리가 막을 권리는 없으
니까. 조금 걱정되지만 내 아들이니까 잘 알아서 하리라 믿는다."
조금은 험악한 표정으로 이렇게 입을 여는 희연. 민형은 그만 감격해서
눈물을 글썽 거렸다.
"어,엄마......"
"단!"
"!?"
순간 번쩍 고개를 들며 희번덕 거리는 눈을 빛내는 희연. 민형이 움찔해
서 침을 꿀꺽 삼키가 희연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내가 아직 할머니가 되기엔 젊다는 것을 알지?"
"아,알고 말고요....... 하하......"
그런 부끄러운 말씀을~ 민형는 잔뜩 긴장해서 하하 웃었고 지영도 손으
로 두 볼을 가리며 빨개진 얼굴로 추스렸다. 희연이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후 그녀는 잔뜩 긴장해 앉아 있는 지영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영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지영이라고 했지. 아가씨."
"아,예, 어머님."
민망해서 고개를 돌지 못하는 지영. 희연은 그런 지영의 손을 붙잡고 자
상하게 웃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민형이가 이곳에 혼자 떨어져서 사고라도 치면 어쩔까 항상 걱정했는데
의외로 조용하더라구...... 모두 아가씨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
"아,아니예요 어머님. 저는 단지......"
"아무말 말아요."
지영의 손을 잡은 희연의 손 끝에 힘이 들어가고 희연이 조금은 쓸쓸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앞으로도 민형이를 잘 부탁해요. 우리는 그렇게 꽉막힌 아줌마 아저씨
가 아니니까."
그말을 듣는 순간 지영은 그만 눈물이 왈칵 눈앞을 가렸다. 어쩌면 이런
분들이...... 지금까지 받아보지 못했던 부모의 사랑을 민형의 부모님에게
서 한꺼번에 받는 느낌이 들어 지영은 그만 어깨를 들썩 거리며 눈물을 흘
리기 시작했다. 민형도 너무나 예상외의 결과가 나와서 그런지 멍하니 서
서 그런 지영과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희연이 손가락으로 지영
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대신 지킬 건 지키면서 사귀어 줘요. 뭐 어련히 잘 알아서 하리라 믿
지만."
"어,어머님 저는......"
"됐어요."
울음을 삼키며 입을 열려는 지영을 가로막으며 잡았던 손을 놓는 희연.
그녀가 가지고 온 가방을 들고 성욱과 함께 대청마루 밑에 신발을 신었
다. 그녀가 성욱과 함께 일어나며 뒤를 돌아 보았다. 그 모습이 왠지 모
르게 섭섭하게 느껴져 민형은 가슴이 찡했다. 심한 불효를 하는 느낌. 지
금까지 부모님께 효도라고 이름붙힐만한 짓을 해본 적은 없지만 이번은
왠지 대단히 마음이 아팠다.
"그럼 우린 간다. 돈 떨어지면 연락해라."
평상시와 다름 없는 희연의 목소리. 그리고 두 사람은 잠자코 서 있
는 지영과 민형을 놔두고 대문을 나서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저,어머니 저희가 터미널 까지......!"
한순간 그런 지영의 손을 붙잡는 민형. 지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민형이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민형은 그런 지영을 뒤로 하
고 골목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자신의 부모님을 바라보며 한쪽 눈에 눈
물을 맺었다.
"정말 못 말리는 분들이시라니까......"
민형이 찡한 얼굴을 추스리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PART-100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압---------------------------!!!!!!!!!!"
쨍한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기지개를 펴는 민형. 오늘은 여름방학이 시
작된지 몇일 지나지 않은 수요일. 있는 힘껏 기지개를 편 후 방을 나선 민
형의 앞에는 주방에서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지영의 모습이 보였다.
민형이 주방안 식탁 앞에 앉으며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배고파."
"잘잤어요 민형씨?"
앞치마를 두르고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지영. 민형은 그런 지영의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서 헤벌쭉 웃었다. 방학도 해서 시간
도 많고, 괜히 이리저리 들뜨는 분위기의 아침. 민형은 문득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지영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영씨 학원은 휴가가 언제예요?"
"휴가요? 토요일부터 일주일간 방학인데 왜요?"
오호라! 학원은 1주일 씩이나 방학을 하는군! 민형은 옳커니 이때다 하
는 심정으로 기세 좋게 외쳤다.
"그럼 우리 어디 놀러갈까요!? 100회 특집으로 원작자가 바다에 보내준
다는데요!!!!"
"어머나 정말요? 다시 봐야겠네 그 사람."
바다 이야기가 나오자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더 기뻐하는 지영. 그녀가
끓이고 있던 찌개를 뒤로하고 냉큼 식탁으로 다가와 의자에 앉으며 말했
다.
"바캉스 가는거예요? 해수욕장으로 가는거죠?"
"예, 지영씨 휴가만 시작되면 바로 떠나면 어때요?"
민형도 싱글벙글 좋아서 어쩔줄 모르는 얼굴로 대답했고 지영이 꿈만같
다는 얼굴로 두손을 꼭 잡고 감격한 듯 말했다.
"좋아라~ 나 해수욕장 가보는건 이번이 처음이예요~"
"예?"
바다에 한번도 못 가봤다고? 헉...... 아무리 가난해도 그렇지. 민형이
썰렁하고 측은한 표정으로 지영을 가만히 쳐다보자 지영이 쓴 웃음 지으며
대꾸했다.
"무,물론 수학 여행때 바다에 가본적은 없지만 수영할 수는 없잖아요.
바다에서 수영하는건 이번이 처음이예요."
"너무 각박한 청년기를 보냈네요 지영씨."
"뭐,바다에 안간거 가지고 각박한 청년기 라고 까지 할 수 있을라나..
.... 하하......"
안됐다는 듯이 한마디 하는 민형에게 지영이 쑥쓰럽게 웃었고 민형은 아
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바캉스 계획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번에
첫 해수욕장행이라면 더욱더 뜻 깊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테고 무엇보다
수영장에 선생님처럼 쫙 빠진 여자랑 걷는다는건 남자의 훈장이니까!!!!
아아 사는 보람이 느껴진다!
"근데 나 수영복 없는데......"
"어, 그러고 보니 나도 없네."
결국 두 사람은 수영복을 사러 가기로 합의했다.
....................................... . . . . . . . . .
버스를 타고 3정거장 정도의 가까운 시내로 나온 민형과 지영. 거리
는 벌써 물씬한 여름 냄세가 나고 있었다. 길가던 남자들이 짧은 상위
를 입은 지영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을 봐서라도 여름은 확연하게 다
가와 있었다. 우, 이런 우월감. 남자의 보람!!!!
"시장으로 갈까요?"
"에, 민형씨도 참. 시장으로 갈꺼면 동네도 있는데 왜 여기까지 나왔
겠어요."
"그럼요?"
그럼 마땅히 수영복을 살만한데가 어디지? 그러고 보니 민형은 수영복
이나 옷같은걸 사본적이 없어서 이런 것에 대해서는 문외한 이었다. 어억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참 불행한 현실을 살았구나. 옷도 맨날 아빠,엄
마꺼 물려입고!(엄마껀 왜 물려 입었냐?) 해수욕도 애인이랑 가는건 이번
이 처음이잖아! 민형은 스스로의 과거의 동정했다. 불쌍한 녀석.
"이럴땐 조금 비싸도 백화점으로 가는게 좋아요. 수영복은 싸구려를 사
면 해수욕장 가서 고민되거든요."
"좋아요!"
오오 역시 이럴 때 경륜이 들어나는 지영씨. 민형은 싱글벙글 웃으며 지
영의 손을 잡고 엄마를 따라 가는 어린애 처럼 종종 걸음으로 백화점에
들어갔다.
"어머, 참 사이좋은 오누이네."
"저건 시스터 콤플렉스라고 그러는거야."
지나가는 사람들이 쿡쿡 거리며 비웃었지만 민형은 들리지도 않았다.
........................................... . . . . . . . . .
- 쿠궁!
"아니......!?"
"너......?"
수영복 코너에 들어가자 마자 대치하고만 두 사람. 운명이라면 운명일
까? 코너로 들어서자 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백화점 판매점원이
아닌 사복차림의 의연이었다. 의연이 수영복이 진열된 코너 앞에서 이것
저것 구경하며 서 있었던 것이다. 사복 차림에 머리를 푸른 의연은 학교
에서와는 다르게 훨씬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머, 정민형! 왠일이야 너를 이런곳에서 다 만나다니?"
"나 역시 매우 두려운 순간이다......."
매우 반가와 하는 의연에 앞에서 후줄근 하게 식은 땀을 흘리는 민형.
그도 그럴것이 등뒤에 서 있는 지영의 존재가 의연에 앞에서 너무나 껄끄
러웠던 것이다. 얘는 정말 어디가도 눈에 띈다니까...... 의연이 지영을
알아보고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언니~"
"어머, 의연학생. 잘 있었어요."
"네, 덕분에~"
뭐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나누는 두사람. 민형은 이런 페이스로 이곳
을 빨리 빠져나가야 겠다는 생각에 지영에게 눈치를 주었다. 지영도 민
형의 낌세를 알아채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의연이 웃으며 물었
다.
"누나랑 해수욕장 가려고~?"
"응~"
쿠와아아악!!!!!! 대답해 버렸잖아!!!! 저렇게 노련한 질문을 해오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대답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민형은 등뒤에서 후줄
근하게 땀을 흘리며 민형을 쏘아 보는 지영의 시선을 느끼며 손가락 다
섯개를 몽땅 입에 물었다. 어,어쩌지 어쩌지!? 의연이한테 한번 걸리면
빠져 나오기 힘든데!! 그때 어쩔줄 모르는 민형의 등을 탁탁 때리며 의
연이 웃었다.
"어머, 너도 참~ 그 나이에 누님이랑 둘이서 해수욕장이라니~ 너 정말
누나랑 사이가 좋구나~"
"아, 으응...... 응."
대충 넘어가자...... 그래, 우리는 사이 좋은 오누이...... 오누이. 그
때 억지로 웃고 있는 민형의 귀에 대고 의연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건
냈다.
"아니면 혹시 위험한 관계 아니야......?"
"!!!!"
커어억!!!! 나, 얘랑 이야기 하기 싫다! 너무 무서워! 민형이 난생처음
두렵다고 생각한 여자. 바로 서의연. 대전에 이 여자가 있기 때문에 민형
은 벌써 계속되는 수모와 고통을 겪어야 했다. 모처럼 100회 특집으로 바
다에 가는데 벌써부터 꼬일 것 같은 예감. 민형은 가슴이 마구 쿵쾅쿵쾅
띄었다. 의연이 웃으며 민형의 손을 잡아 끌었다.
"너도 수영복 사러왔지? 같이 고르자. 마침 봐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아, 나 이거 입어 봐야지. 잠깐만 기다려."
붉은 원피스 수영복을 하나 들고 쪼르르 칸막이 안으로 사라지는 의연.
민형은 도무지 뭐가 어떻게 된건지 모르는 얼굴로 지영을 돌아보았다. 지
영은 묵묵히 수영복을 고르고 있었다. 화났다 화났어. 난 다 알지. 민형
은 갑차기 추워졌다.
"야,봐봐. 어때 어울려?"
"엉?"
그때 칸만이 안에서 나오며 민형의 앞에 수영복 차림을 내보이는 의
연. 한순간 민형은 사타구니에서 강렬한 자극을 느끼며 얼굴이 빨개졌
다. 귀,귀엽다! 강렬한 원색이 의연의 고교생 답지 않은 몸매에 착 달
라 붙어 잘록한 굴곡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머리를
풀러 한층 성숙해 보이는 모습. 민형은 얼떨결에 한마디 했다.
"열나 이상해."
"뭐야!? 너 말 다했냐!"
우오오! 나의 이성은 그래도 제자리를 찾고 있구나. 화내는 의연의 앞
에서 태연한 표정으로 비웃음을 띄우는 민형. 그때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민형이 진열장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민형은
옷걸이에 걸린 비키니 수영복을 가리켰다.
"너한테는 저게 어울린다구."
우와아아앗!!!! 내가 지금 뭔소리 하는겨!? 정말 진심을 말해 버리면
어떡해! 나의 이성은 정말 최저라니까!! 한순간 등뒤에서 강렬한 자극을
느끼며 민형이 뻘뻘 식은땀을 흘렸다. 의연이 빨개진 얼굴로 민형이 가리
킨 비키니를 들고 말했다.
"이게 어울린다구......? 비키니 잖아."
조금 쑥쓰러운 얼굴로 민형을 쳐다보는 의연. 민형은 울고 싶은 심정으
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내뱉은 말이니 주어 담을 수도 없고. 우우 죽고
싶다 이거.
"알았어 그럼 한번 입어 볼게~"
활짝 웃으며 비키니 수영복을 들고 칸만이 안으로 들어가는 의연. 아이
구, 이래 가지고는 코디해 준 꼴이 되잖아. 그때 민형의 등뒤에서 누군가
의 손가락이 콕콕 등을 두드렸고 민형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는 순
간 민형은 얼어 버렸다.
"저, 나도 봐줄래요 민형씨......"
크어어어...... 한 여름인데도 쌩쌩 한기를 내뿜는 유지영 선생님! 그
녀가 방금 의연이 가지고 들어간 비키니 수영복과 똑같은 것을 들고 웃
으며 서 있었다. 아아...... 여름이여! 푸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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