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3년생의 사랑 16부
민형은 난생처음 시험 전날 밤이라는 걸 세워보고 학교에 갔다. 옆에 달라
붙어 감시하는 지영의 닥달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녀가 찍어준 문제를 들고
저녁부터 새벽 4시가 넘는 시간까지 꼬박 연습장에 쓰고 옮기는 작업에 반
복이었다.
"하아암......!""
자기도 모르게 엄청나게 큰 하품을 하며 부은 눈을 문지르는 민형. 어쨋
든 오늘 시험 시간에는 두배로 푹 잘 수 있겠다, 고 민형은 생각했다.
"......"
앞자리에서 그런 민형을 흘끔 본 의연이 민형의 앞자리로 자리를 옮겨
앉으며 물었다. 아마도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는 민형이 열심히 공부한 후
후유증으로 고생하는가 보다 라고 의연은 생각했을 것이다.
"너 어제 밤샜나 보구나?"
"응......? 응......"
"공부 많이 했니?"
"엉? 아니 그저......"
민형은 공부했냐는 의연에 질문을 그저 막연히 넘겨버렸다. 난생처음 시
험 전날에 무엇인가를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민형이 생각하기엔 공
부가 아니었다. 단순히 쓰고 적고 외운 것 뿐. 적어도 공부라면 이것보다
훨씬 어렵고 무엇인가 있어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민형의 생각이었
다. 연신 하품을 하는 민형에게 의연이 씩 웃으며 한마디 했다.
"더 밤새는거 처음인가 보지?"
"응, 너도 밤샜니?"
"난 시험땐 3시간 밖에 안자."
"헤? 그런데 그렇게 멀쩡해?"
3시간 밖에 안잔다고? 시험기간 동안 주욱? 어떻게 그러고도 몸이 견디
냐...... 민형은 의연의 호리호리하고 잘빠진 몸을 슬쩍 어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자들도 하옇튼 무섭다니까......
"익숙해지면 괜찮아. 3시간만 자도 푹자기만 하면."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말. 어떻게 3시간을 자는
게 익숙해 질 수가 있지? 민형은 아무리 적게 자도 7시간을 넘기지 못하면
다음날 활동에 심한 지장이 있다고 믿는 녀석이었다. 그런 민형에게 자는
시간을 할해하며 공부에 열중하는 의연은 신기하다 못해 위대해 보였다.
"어쨋든 시험 잘봐라. 공부한 보람이 있길 바래."
"응, 고마워. 너도 잘봐."
졸린 나머지 건성으로 웃어보인 민형은 의연이 자리로 돌아간 후 어
제 밤새껏 쓰고 적었던 문제들을 떠올려 보았다.
"......"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 . . . .
"자 영어는 오래 붙잡고 있는다고 답이 나오는게 아니라는거 알지? 모르
면 얼른 찍고 빨리빨리내라. 시력 좋은 애들은 시력 마이너스 시키고."
교탁에서 시험지를 모아 두손에 들도 탁탁- 정리하며 감독하는 선생님이
익숙하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민형은 턱에 손을 괜채 아무런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너무 빨리 찍고 누우면 애들이 흉볼텐데...... 그런데 어제잠을 못자서
너무 졸린데 이거......'
빨리 찍고 자 버릴 것이냐. 아니면 체면을 위해 억지로라도 시험지를 붙
잡고 있을 것이냐...... 민형은 이 중요한 기로에서 몇분동안이나 고민했
다. 하지만 인간의 생리현상이란 체면 위에 있는 것. 민형은 결국 자연의
위대한 법칙을 따르기로 했다.
-슥
시험지가 앞자리에 학생을 통해 민형에게 넘어왔고 민형은 부은 눈에서
찔끔 거리는 눈물을 닦으며 시험지 1번 문제를 쳐다보았다. 역시나 민형이
알만한 문제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때 문득 1번 문제를 읽어 내리면
민형이 솔깃해서 눈을 반짝였다.
'밑줄친 부분에 들어갈 만한 적당한 단어를 찾아 쓰시오......? 핫, 이
거 의연이 찍어준 문제가 그대로 나왔네. 2점 벌었다.'
운좋게도 알고 있는 문제가 그대로 출제된 민형. 아무리 건성으로 외웠
다고 한들 눈썰미는 있는 지라 손쉽게 1번 문제에 답을 적었다. 민형은 2
번으로 넘어갔다.
'네모칸 안에 문장을 읽고 다음 문제에 답하시오...... 아니 이럴수
가!?'
2번부터 이어지는 문제를 본 민형은 그만 경악을 하고 말았다. 2번부터
6번까지는 하나의 영작을 해석해서 문제에 해당하는 답을 풀이하는 문제.
10줄 남짓되는 이 문장은 어제 지영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공책에 쓰며
외웠던 3개의 영작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을 해석해 외워
놓은 민형은 2번부터 6번까지 손쉽게 답을 쓸 수 있었다.
'맞았는지 틀렸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확률이 있는 답이 보이는데 이거
......? 신기하군......'
민형은 연필 뒷 부분을 잘근잘근 씹으며 계속해서 문제를 읽어내려갔
다. 하지만 하늘이 도운 것인지...... 아니면 의연과 지영의 천재성이 민
형을 살린 것인지. 다음 문제들도 모두 지영이 찍어 놓은 문장이 아니면
의연이 족집게 처럼 집어 놓은 문제와 보기들 이었다. 민형은 잠이 싹
달아났다. 그렇게 민형은 22문제를 푸는 50분 동안 한숨도 졸지 못하고
뚫어지게 시험지를 노려 보았다.
................................................ . . . . . . .
"으아!! 밑줄 그은 부분에 들어가지 않는 말이었냐!? 난 들어가는 말
인줄 알았지!!! 크아아아!!"
"어떡해!! B를 E로 잘못 봤어 흑흑!!"
"우오오오!! 나 두 개 맞았다! 크하하하~!!"
영어 시험이 끝나고 쉬는 시간. 부리나케 친구들과 답을 맞혀본 아이
들의 함성과 신음이 교실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이번 시간에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실력으로 문제라는 것을 풀어본 민형은 아직 실감이 가
지 않는 상태에서 잠자코 아이들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문제에
저렇게 목숨을 걸고 슬퍼할 수 있다니...... 백지도 내본 경험이 많은 민
형은 그런 녀석들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잘하면 이번 영어 시험도 50점은
넘지 않을까? 조금 욕심인가...... 어쨋든 공부라는게 효과가 있는 것
같기는 하군? 민형은 조금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혼자서 히죽 웃었다.
"그래 16번 문제는 OR 가 맞아. 결국 한문제 틀렸군."
"으아, 의연이 너 한문제 밖에 안틀렸어!? 너 또 일등이다."
"모르지 다 맞은 사람이 있을지도."
놀라는 친구의 앞에서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의연. 민형은 멀찌감치서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새삼스럽게 놀랬다. 22문제중에서 한문제가 틀리
다니. 역시 찍어도 많이 맞는다던데 수재들은 틀리군.
"......"
잠시 앉아 있던 민형. 그가 이내 시험지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참으려
고 했지만 너무너무 궁금했다. 과연 몇점이나 맞았을까! 30점만 넘어도 열
심히 공부해 보겠다!! 민형은 시험지를 들고 의연에게 다가갔다.
"의연아 나 이것좀 채점해줘. 너 한문제 밖에 안 틀렸지?"
"응, 이리줘봐."
대수롭지 않게 민형의 시험지를 받아드는 의연. 의연이 샤프를 들고 1번
문제의 답을 체크했다.
"1번의 2번 맞았네. 이거 틀리면 죽여 버릴생각 이었는데......"
"고,고마워......"
역시 보길 잘했군...... 아니 만약에 보지 않았다면 죽었을지도 모르겠
군. 왠지 찍지 않은 문제가 맞았다는 소리를 들으니 민형은 거짓말 같았
다. 의연은 계속해서 채점을 해 나갔다.
"2번부터 영작 풀이 문제. 어라? 2번도 맞았군. 너 이거 해석 할줄알
아?"
"엉......? 아니......"
제대로 안다고 확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형인 쓴웃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의연이 히죽 웃으며 게속해서 채점을 해 나갔다.
"3번의 1, 4번의1, 5번의 4....... 맞았네."
연속해서 5번까지의 동그라미, 민형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
다. 그중 찍은거 하나 합해서 다섯문제가 모두 맞은 것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속으로 이렇게나 렐리가 계속된 적은 없었다. 민형은 긴장했
다.
"6번의2,7번의 3,8번의3....... 맞았......다......"
계속해서 샤프로 동그라미를 치는 의연. 그녀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사라졌고 민형의 눈앞에는 현실이 아닌 것 같은 현실이 펼쳐졌다. 슬금슬
금 아이들이 몰려들어 의연이 채점하는 민형의 시험지를 뚫어지게 쳐다보
기 시작했다.
"17번의 주관식 OPTION 18번의 2,19번의 3,20번의 2......"
동그라미는 게속쳐졌고 의연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모여드는 아이
들은 점점 많아지고 민형은 망연자실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22번 문제까
지 체크한 의연이 시험지를 내려놓고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22번 EVENT OF FALL. 다 맞았네."
"우와아아아아앗!!! 다 맞았데!!!"
"야! 민형이 영어 100점이래!!!"
갑작스럽게 교실안에 떠들썩하게 달아 오르고 민형은 그저 한자리에 우
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PART-89
- 수근 수근
- 수근 수근 수근
민형은 책상에 머리를 푹 숙이고 앉아 현재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만행
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100점. 국민학교때 이후로 처음 받아보는 시
험 점수였다. 그것도 3단위나 되는 영어 과목에서 100점을 맞은 것이다.
교실에 모든 아이들이 민형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수근거렸고 민형은 뒷통
수가 따가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이건 완전히 컨닝이라도 한 기분이잖아.
"......"
자신에게 문제를 찍어준 의연이 역시도 한 문제가 틀렸다. 의연이 틀린
문제는 지영이 얘기해준 포인트 영작에서 나온 문제였다. 의연이 찍어준
문제들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의해서고 그것이 고교생의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확률이 30%정도 웃 돌았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수준. 하지만 진
짜 왕건이는 지영의 어드바이스였다. 의연이 요약해 놓은 범위 문제를
가지고 완벽하게 영어 시험범위를 파악하고 선생의 문제 제출 범위까지도
파악해 버린 것이다. 즉 민형은 지영이 하라는 대로 외우고 써서 100점을
맞은 것이다. 갑자기 국사도 독일어도 마구 마구머리속에서 떠올랐다. 어
제 공부한 문제들을 조금이라도 더 떠올려 보기 위해 민형은 애를 썼다.
"선생님 오신다!"
"......?!"
한 급우의 목소리와 함께 숙덕 거리던 아이들이 일제히 자기 자리에 앉
았고 곧이어 교실 앞문을 통해 근엄한 표정으로 안경을 쓴 영어 선생님이
시험지를 가지고 들어오셨다. 영어 선생은 대뜸 들어오자 마자 시험지를
교탁에 올려 놓고 한마디했다.
"오늘 이 반에서 100점 맞은 사람이 누구지?"
뜨끔. 죄지은 것도 아니었지만 근엄한 영어 선생의 말은 들은 민형은 컨
닝이라도한 사람처럼 심장을 움켜 쥐었다. 벌써 소문이 돌았단 말이야?
"오늘 이 반에서 영어 100점 맞은 사람이 있다며?"
"예~!"
아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영어 선생은 안경을 한 번 치켜 올리며 대
답했다.
"아직 채점은 안했지만 채점을 하면 틀릴 수도 있으니까 잘은 모르겠
다. 만약 진짜 100점을 맞았다면 내가 하루종일 껴안고 예뻐해 주마."
'크에에......?'
이거 100점도 함부로 맞으면 안되겠군. 저 나이드신 선생니께 안기는 자
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민형은 몸서리를 쳤다. 싫어, 나는 여선생이 아니면
......! 부들부들 떠는 민형을 알아보지 못한 영어 선생은 시험지를 돌리
기 시작했다.
"자 2교시 국사다. 난 너희들을 믿는다. 너희들이 나를 믿듯이. 컨닝하
고 싶은 사람은 해라. 단 걸리지만 마라. 명부흑명왕의 길로 들어서고 싶
지 않으니까."
"......"
태연하게 입을 열며 시험지를 돌리는 영어 선생. 아이들은 모두 쥐죽은
듯이 조용하게 시험지를 뒤로 넘겼다.
.................................. . . . . . . . . . . .
국사는 더 쉬웠다. 아니 진짜 쉬웠다. 세상이 이렇게 모든 문제가 아는
문제로 출제된 적은 처음이었다. 마치 찍어 놓은 문제가 모두 나온 것 처
럼 한문제 한문제가 마법과 같이 펼쳐졌다.
"19번의 3...... 20번에......"
채점을 하는 의연의 손이 떨렸다.
"4...... 95점."
"우와아........!?"
아이들의 입에 일제히 벌어졌다. 20점 중에 한문제가 틀린 95점. 민형은
이번 국사 시험에서도 95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대단하다는
듯이 수근되는 아이들의 앞에서 민형은 얼떨떨했다. 의연도 조금 긴장한
듯이 그런 민형에게 물었다.
"너......? 이거 내가 정리해준 걸로만 공부한 것은 아니지?"
"어......? 아,아니?"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조차 민형은 분간할 수 없었다.
국사 95점 이라고? 물론 100점을 맞은 의연에 비하면 한문제 틀린 것이지
만 의연은 전교 1등이 아닌가. 3점짜리 영어에서 100점을 맞은 민형은 현
제 의연보다 스코어가 위인 것이다.
"너, 정말 대단하다...... 혹시 천재 아니니?"
두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묻는 의연. 하지만 민형은 그런 의연에게 뭐라
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글세, 잘 외우는 것이 천재라면 천재겠지 하하
......?
'정말 황당하네......'
말 그대로 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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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례시간에 들어온 담임은 모두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학급일지를
든채 인사를 받았다. 아이들 모두 지친 얼굴로 개방을 매고 교실을 빠져
나가고 어슬렁 어슬렁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는 민형을 담임인 미라가 불러
세웠다.
"정민형......?"
"?"
고개를 돌리자 송미라 선생님이 팔짱을 끼고 웃고 있었다. 왠지 개인적
인 부름에 있어서 그녀를 마주하는 것은 민형에게는 껄끄러운 일이었다.
미라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민형에게 가까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영어100, 국사95, 독일어는 35. 어쨋든 오늘 시험 만으로 봐서는 학급
석차 5위안에는 들겠는데?"
"아,그,그런가요......? 저는 잘....... 그럼 안녕히 계세요!"
얼른 등을 돌리고 빠져 나가려는 민형. 그런 민형의 뒷깃을 붙잡으며 미
리가 가늘게 웃었다.
"정말 나하고 공부하면서 단어하나 해석하지 못하던 민형씨가 맞아? 그
리고 1,2교시의 폭발적인 점수에 부흥하지 못한 3교시 독일어 점수는 뭐
지?"
"그,그거야 못볼수도 있지요! 안 그래요!?"
독일어는 지영이 찍어주지 않은 독일어 작문 문제가 무더기로 출제 되었
다. 미리 담당교사가 시험에 출제하기로 하고 문제 범위를 알려 주었다고
하지만 수업시간에 듣지를 않는 민형은 알 리가 없었다. 결국 민형의 찍기
한계는 35점이라는 소리였다.
"1,2교시 시험중 민형과 비슷하게 본 사람은 의연이 정도일테니까 컨닝
은 아닐테고...... 무슨 마법을 부린거야?"
"학생이 시험을 잘보면 담임은 기쁜게 아닌가요?"
더 이상 심문 당하다가 끝이 없을 것 같아서 민형은 이렇게 말했다. 그
러자 그런 민형을 바라보고 있던 미라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물론 기쁘지. 너무 너무 기뻐."
"......?"
갑자기 불길한 예감. 민형은 기분이 나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
민형에게 바짝 다가서며 미리가 씨익 웃었다.
"남편감이 공부를 잘하면 장래가 밝다는 거지. 도대체 어떤 마법을 부렸
는지 모르지만 우리 가문에 어울리는 신랑감이 되기로 작정한거지?"
"네? 선생님 죠크가 심하시군요......?"
무슨 헛 소리야 이 여자? 누가 데릴 사위인줄 아나. 황당해서 쓴웃음 짓
는 민형에게 얼굴을 더욱 바짝 가져다 대며 미라가 우후후 음흉하게 웃었
다.
"귀여워......"
"!!!@#$$"
한순간 엄청난 한기를 느낀 민형. 온몸에서 식은땀이 쭈욱 배어 나왔
다. 그때였다. 민형과 의연의 뒤에서 낮게 깔린 누군가의 목소리가 두사
람의 미묘한 분위기를 갈라 놓았다.
"담임이 자기반 학생이 귀엽다는 걸 어떻게 해석하면 되지요?"
"!?"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민형. 미라 역시 잠시 실수 했다는 듯이 얼른 고
개를 들었다. 둘의 앞에는 태연하게 웃고 있는 의연의 모습이 있었다. 미
라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어머, 반장? 시험은 잘 봤겠지?"
"네, 잘봤어요. 그런데 선생님 교사의 신분으로 학생과 너무 미묘한 분
위기를 연출하시는거 아닌가요?"
"무슨 소리야 너? 학생이 교사한테 따지는 건가? 버릇없이."
갑자기 강경한 선생의 모습으로 돌아간 미라. 그녀의 말을 들은 의연이
푸욱 한숨을 쉬며 한손을 들어 교실 창문을 가리켰다.
"전 괜찮지만......"
그리고 숨어 있던 수없이 많은 학급 아이들의 모습. 민형과 미리가 황당
한 얼굴로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커다란 눈동자들이 교실 창문뒤에서
반짝이며 민형과 미라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들이 너무 기대를 해서 말이죠......"
한숨을 쉬는 의연. 미라는 당했다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쥐며 쓴 웃음을
지었다.
PART-90
"담임이 이상하게 너한테 신경쓰는 것 같지 않니?"
"으,응......?"
조금 짜증섞인 얼굴로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수상하다는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미는 의연. 민형은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 내리는 것을 느끼며 하늘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날씨가 참 덥다......
"내가 옛날부터 자꾸 걸리는게 있어서 그러는데 말이야. 너한테 대하는
게 확실히 틀려."
"뭐,뭐가 틀리다는 거야? 전학생이니까 신경을 써주시는 거겠지."
의연의 매우매우 귀찮은 점은 다른 사람의 3배 이상으로 눈치가 빠르
다는 것. 보통 사람은 그냥 넘어갈 만한 일도 의연의 야에 걸리면 날
카로운 추리와 여러가지 사건으로 종합되어 수많은 예를 만들어 낸다. 확
실히 수재들의 두뇌회전 패턴은 정상인의 몇배는 되나보군.
"아니야. 나는 여자잖아.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어."
"뭐......? 담임의 표정이 어땠는데?"
정말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을까? 민형은 궁금해서 고개를 돌리고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의연이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담임은 널 사랑하고 있어!"
- 쿵. 민형은 어의가 없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정상인의 3배이상의
두뇌를 가지고 추리하면 그런 결과가 나오는구나? 정말 미라가 나를 사랑
하고 있다고? 그건 민형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때 멍하니 충격
적인 표정으로 서 있는 민형에게 피식 미소 지으며 의연이 민형의 등을 두
드렸다.
"농담이야. 그말을 믿었니?"
"......"
그러면 그렇지...... 예전부터 생각하는 건데 이 여자애는 나를 놀리면
서 즐거워 하고 있는 것 같애. 나한테 잘해주는 것도 가지고 놀기 좋기 때
문이 아닐까. 하고 민형은 순간 생각했다. 민형이 뚱하니 고개를 돌리자
의연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민형을 따라왔다.
"화났어~?"
"아니."
퉁명스러운 대답. 화가난 티를 팍팍 내는 민형의 대답에 의연이 킥킥 거
리며 웃었다. 민형은 의연하게 행동하려 해도 자꾸 얼굴이 붉어지는 자신
을 원망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순간 의연이 민형의 팔을 붙잡았다.
"민형아."
"!?"
갑자기 진지한 의연의 얼굴. 민형은 또 무슨 흉계를 꾸미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연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다.
"너 어제 너희 누나한테 공부 배운거니......?"
"!?@?$!?$?"
충겨어어억!! 울트라 눈치칼! 민형은 완전히 얼이 나가 입을 떠억 벌리
고 두눈을 희번덕 거렸다. 그렇군 의연은 애초에 미라와 자신의 일에 대해
서는 추리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의연의 진짜 목적. 그것은 민형
과 지영의 관계에 대해서였던 것이다. 불시에 질문 받은 민형은 당황하여
어쩔줄 모르자 대충 상황을 알았다는 듯이 의연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역시 그렇군...... 날 속일 생각이었겠지만......"
어쩌지!? 어떻하지!? 들켜 버리는 건가!? 그렇게 되면 우스운 놈이 되고
마는데! 고민하는 민형에게 갑자기 의연이 이렇게 외쳤다.
"혹시 너희 누가 직업이 학원 강사 아니니!!"
"어떻게 알았어!!"
- 쿠구궁
강렬하게 묻는 의연에게 강렬하게 대답하고 만 민형. 엥......? 그런데
이거 왠지 핀트가 어긋나잖아? 잠시 감을 잡지 못한 민형이 얼떨떨해 하고
있는 동안 의연은 턱을 만지작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나이 또래에 여자가 할만한 일과 분위기를 종합해 볼 때 그
런 쪽에서 일할거라는 예감은 들었지만...... 과연, 정말 그렇다면 너희
누나야 말로 전국에서 3%안에 드는 쪽집게 강사라는 것이군."
"......!?"
얘가 지금 무슨 소리는 하고 있는 거야? 그럼 유지영 선생님과 내 사이
에 대해서 눈치챈게 아니라 학원강사 여부를 가지고 추리했던 것인가? 괜
히 놀랐네...... 민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한숨을 쉬는 민형
에게 의연이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다.
"나도 들은 얘긴데 전국에서 아주 특출한 학원강사 소수는 아주 약간의
자료를 가지고서 그 학교 선생의 문제출제범위와 스타일. 그리고 나올문제
를 거의 90%이상 찍어낼 수 있다더군. 하지만 학원에서는 50% 정도 밖에는
찍어주지 않는데 너희 누나가 그런 스타일이라면 네가 오늘 받은 점수도
너무 신기할 것은 없지. 친동생한테 100%찍어준 건 당연할 테니까 말이
야. 게다가 내가 준 자료로 3과목에 대한 완벽한 데이터를 뽑아 냈겠지.
....."
"......"
의연에 입에서 흘러나오는 황당하리만치 황당한 대사들. 아니 그럼 유지
영 선생님이 그 3%안에 드는 천재적인 학원 강사란 말이야? 분명이 예전에
고3을 가리킨 적도 있다고 했지만...... 도대체 문제를 그렇게 찍어낼 수
있다는게 민형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너는 이해가 되지 않겠지. 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말이야.
하지만 네가 맞은 점수를 보면 분명히 사실일거야. 좋아."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는 의연. 민형은 왠지 뜨끔하여 뒤로 한발짝 물
러났다. 의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부탁이야! 나도 너희 누나한테 수업받게 해 줘!! 수업료는 얼마든지 낼
께!"
"뭐----!?!?"
쇼크를 자주 먹으면 빨리 늙는다는데...... 민형은 갑자기 늙어가는 자
신이 느껴졌다.
.......................................... . . . . . . . . .
- 쿠궁
- 쿠구궁
의연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민형.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지영은
의연을 보자마자 한 자리에 멈춰서서 장엄하 분위기를 연출했다. 당연히
민형의 심장은 쿵쾅쿵쾅 떨리고...... 지영을 알아본 의연이 얼른 마루로
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언니~"
"안녕하세요......"
인사를 받으면서도 지영의 시선은 민형을 향해 있었다. 왜 이 애를 또
데려왔죠? 라는 강렬한 항의의 눈빛이었다. 민형은 이불이라도 있으면 들
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사이는 어찌 되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의연이 조르르 지영에게 다가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저 민형과 같은 반 친구인 신의연이라고 합니다~ 저번에 한 번 보셨
죠~?"
"아, 네......"
억지로 웃어 보이는 지영. 의연은 계속 물고 늘어졌다.
"저기요, 민형이한테 들었는데요 언니가 학원 강사시라고 해서요~"
"네......?"
의연의 얘기를 듣자마자 지영의 얼굴이 무섭게 변모하며 그 불꽃이 민형
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헉, 유지영 선생님이 저렇게 무서운 표정도 지을
수 있다니...... 민형은 오늘의 3번째 대쇼크를 먹고 실신하고 싶은 심정
이었다. 그런 민형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연이 계속해서 지영에게
조르듯 말을 건넸다.
"저 민형의 친구된 입장에서 뻔뻔스럽지만 부탁드리는 건데요."
너 그건 뻔뻔한 걸 아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잖아...... 민형은 이미 온
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천재적인 문제 요약의 능력이 있으신 언니의 수업을 받고 싶어요! 시
험때만 봐주셔도 좋아요! 수강료는 얼마든지 낼께요!"
"안되겠네요."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빙긋 웃으며 대답하는 지영. 한순간 민형은 그런
지영의 표정에서 하늘이 무너질 정도의 무시무시한 대 충격을 받았다. 저
렇게 딱잘라서 아무 망설임 없이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는 지영씨의 모습
을 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웃으면서!?
"저는 개인과외는 하지 않아요 의연학생. 저의 수업이 듣고 싶으시면
학원으로 오세요. 여기서 버스로 3정거장 떨어져 있는 청림학원 입니
다."
"아,언니!"
일단 조급해진 것은 의연. 의연은 쉽지는 않을것이라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는지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많이 바라지도 않아요! 문제만 찍어주시면 되요! 수강료는 충분히 드릴
께요! 저는 민형의 가장 친한 여자 친구라고요!"
".....!!!!"
그순간 민형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마루로 올라서던 지영이 우뚝 정
지했다. 그리고 수초간의 침묵...... 지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정말이예요......?"
먹혀 들어가는건가! 라고 생각한 의연이 환해진 얼굴로 큰소리로 외쳤
다.
"그럼요 민형에게 물어보세요!! 야,민형아!! 이제 너랑 나랑 사귈거잖
아!? 그렇지!?"
"뭐!? 아,아니야!! 그건!"
동시의 의연의 얼굴이 귀신처럼 살벌하게 변했다. 게다가 그 얼굴은
웃고 있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나를 차버리겠단 말이야!?!?"
"그,그건 아니지만 어쨋든......!! 이,이건 아니잖아!!"
"그만!"
한순간 당황하는 민형의 입을 막은 단밞의 목소리. 의연과 민형은 그
섬 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둘의 앞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지
영. 그녀가 딱딱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개인과외는 안해요. 동생의 여자친구라도 예외는 없어
요. 민형아 여자친구나 바래다 주고 와."
푸하하! 민형은 조각조각 흩어지고 싶었다. 푸하하하!! 푸하하하하!!
PART-91
"야, 너희 누나 생긴건 착하게 생겼는데 되게 깐깐하다. 조금도 망설이
지 않고 면전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니."
그건 깐깐한게 아니고 화가 난거라고...... 민형은 수업을 거절당해 궁
시렁 되는 의연을 푹 쳐진 눈으로 힘없이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
고해도 조금전 사태에 대해서 변명할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난 절대 포기할 수 없어! 이번 기말고사는 그렇다치고라도 반드
시 너희 누나 수업을 들어야지!"
"그렇게 듣고 싶으면 차라리 학원에 가지 그래......"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민형. 주먹을 불 쥐며 결의를
다지는 의연에게 뭐라고 해줄 말이 없었다. 그래, 멋대로 해봐라......
원래 순한 사람이 화나면 무섭다고 단단히 삐진 지영씨 마음에 네가 들 수
있을까...... 더 이상 고민하기 싫어 머리를 긁적 거리는 민형의 앞에서
의연이 신발을 신고 벌떡 일어났다.
"나 간다."
"아? 바래다 줄께."
의연의 뒤를 따라 일어나는 민형. 어찌 되었던 저녁이니까 버스 정류장
까지는 바래다 주어야지. 그러나 의연이 대답했다.
"나 독서실로 갈거야."
"그래.....? 어쨋든 가자."
샌들을 신고 앞장서 나가는 민형. 역시 조금 시간을 허비했다고 그대로
집에 돌아가거나 하지는 않는군 역시 수재는...... 민형은 왠지 공부라는
것에 대해 몸에 습관이 되어버린 듯 보이는 의연이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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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연이 공부하는 독서실은 저번에 민형도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곳으로
민형의 학교와 얼마 멀지 않았다. 터벅터벅 골목을 걸으면서 민형이 의연
에게 물었다.
"그런데 넌 굳이 우리 누나한테 수업받지 않아도 가고 싶은 대학에 갈
수 있잖아......?"
"응, 글세. 그건 아무도 모르지. 너희 누나는 어느 대학 나왔니?"
왠지 답을 아는 얼굴로 물어보는 의연. 민형은 쭈삣쭈삣 대답했다.
"서울대."
"그렇겠지. 그 실력이면 그 대학 아니면 가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역시
서울대는 그 정도의 레벨은 되는 사람들이 도전해야 하는건가......"
자못 고민스러운 얼굴의 의연. 민형은 그런 의연을 보며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내신 일등급에 전교 일등이 도대체 뭘 고민 하는거야?
"우리 누나 레벨이나 네 레벨이나 뭐가 틀리다는 거야? 너도 내신 1등급
에 전교 1등이잖아!"
"바보야. 우리 학교만 따지면 되냐? 퍼센테이지를 따져야지! 서울대에
들어가는건 우리 학교 학생만이 아니라고! 전국에 수재들이 몰린다는거 몰
라?"
"그,그런가......?"
한심하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는 의연. 민형은 왠지 자신이 한
질문이 바보같이 생각되어 머리를 긁적 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의연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한문제라도 더 건져내는 것이 대입의 포인트란 말이
야. 게다가 쪽집게 강사가 문제를 찍어주는게 얼마나 큰 포인튼데."
"그렇군......"
잘 모르겠다. 어차피 서울대 같은거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민형은 자기도 모르게 초라한 모습으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걸
어갔다. 독서실을 향해 가는 길이라 그런지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
리고 잠시후 독서실 근처에 도착하자 의연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 이제 들어가봐."
"응? 끝까지 가줄게."
"너 독서실 싫어 하잖아?"
어떻게 알았지...... 눈치칼하고 대화하면 대화량이 반으로 줄어든다니
까. 민형은 머쓱해서 억지로로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그,그럴까...... 그럼 가라......"
"그래. 내일 봐?"
의연이 싱긋 웃으며 민형에게서 등을 돌리는 순간. 그순간 독서실 입구
쪽에서 한 남자 아이의 목소리가 두 사람을 멈추게 했다.
"연아 누나?"
"......?"
입구에 서 있던 한 남학생. 그가 의연을 알아보고 반가운 얼굴로 주머니
에 손을 넣은채 타박타박 뛰어왔다. 누구지? 민형은 어색한 표정으로 처음
보는 남학생에게 시선을 옮겼다. 의연과 아는 사인가? 그리고 남학생을 본
의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니, 진명아~?!"
"야, 기다렸다 기다렸어. 독서실에 있다더니만 땡땡이치고 뭐해?"
의연이 반가운 사람을 만난 듯 놀란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불렀고 민형은
왠지 어색한 포즈로 멀뚱히 서 있었다. 의연이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이 놀람+반가움을 섞은 얼굴로 남학생에게 외쳤다.
"어떻게 된거야? 너가 왜 여기 있어? 평일이잖아?"
"내일이 개교기념일이야. 아까 도착했는데 고모님이 독서실에 있을거라
고 가보라고 해서. 지금 시험 기간이라며?"
"그래......? 우와 6개월 만인데...... 너 키컸다?"
"2센티."
아주 친숙하게 말을 주고 받는 두 사람. 아주 친한 사이인 것 같았지만
민형은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수가 없었다. 의연을 누나
라고 부른 것을 보니 동생인 것 같은데 의연에게 친동생이 있다는 말은 듣
지 못했다. 그럼 남자친군가......? 그때 멍하니 서 있는 민형을 흘끔 본
진명이라는 남학생이 눈치로 의연에게 물었다.
"누구야?"
조금 경계하는 표정. 아마도 의연과 함께 걸어 왔기 때문이겠지. 민형은
가능한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의연이 냉큼 민형을 진명에게
소개했다.
"응, 얘는 우리반 친구야. 얘네 누나가 학원 강산데 쪽집개야! 그래서
같이 누나 좀 만나고 왔어."
"그래? 아직도 공부에 목숨거는건 변하지 않았군. 어차피 누나 실력이면
서울대 쯤은 무난히 간다니까."
의연의 말을 듣고나서야 피식 웃으며 부담없이 입을 여는 진명. 왠지 나
이에 맞지않게 상당히 어른스러운 느낌이 나는 녀석이었다. 아니 언제나
도도한 분위기가 연출되던 의연이 녀석의 앞에선 왠지 귀여운 여자 아이로
돌아간 느낌 때문인지도 몰랐다. 의연이 진명에게 고개를 돌리며 그를 소
개시켰다.
"인사해 민형아. 얘는 진명이라고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서울에 살았을 때
부터 옆집에 살았는데 아직도 우리집 옆에서 사는 애야."
"강진명이라고 합니다."
능숙하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진명. 민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악
수를 받았다. 그래, 의연은 원래 서울에서 살았다고 했지. 그렇다면 소꿉
친구?
"16살이예요."
슬쩍 웃으며 대답하는 진명. 그렇다면 고1이군. 고1치곤 표정이 영 노티
나는데? 민형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고 인사를
받았다.
"아,그래 난 정민형이라고 한다."
"야, 넌 건방지게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반말이냐!"
순간 의연이 손바닥으로 민형의 엉덩이를 철썩 때렸고 깜짝 놀란 민형이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크게 떴다. 동생인데 어때!? 그러자 진명이 하하 웃
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누나. 형인데 어때. 민형형 이라고 불러도 되죠?"
"아,그래."
제법 의젓한 자식이군. 민형은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강력하게 얻어맞
은 엉덩이가 욱신거려 손으로 엉덩이를 주물럭 거리며 억지로 웃어 보였
다.
"근데 누나는 남자같은 성미를 아직도 못 고쳤군? 여자가 무슨 남자 엉
덩이를 때리고 그래?"
"그,그래......?"
얼씨구? 얼굴이 빨개지는 의연. 민형의 안좋은 머리도 이럴 때 만큼은
부리나케 돌아갔다. 진명이라는 녀석은 빙긋이 웃으면서도 어찌 들으면 무
안한 말을 골라서 뱉고 있었다.
"그러다간 시집 못가지. 좀 나긋나긋 해야지......?"
"그,그렇겠지......"
우와 신기하다. 의연이 남자한테 저런말을 듣고 얼굴이 빨개지다니. 민
형은 이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쾌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대신
진명이라는 녀석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빙글빙글 웃으면서도 할말 다하
는 노련한 놈. 어떻게 여자를 저렇게 잘 다루지? 민형은 갑자기 녀석이 존
경스러워 보였다. 그때 진명이 대뜸 물었다.
"연아 누나 지금부터 독서실 갈꺼야?"
"아? 응......"
고개를 끄덕이는 의연. 진명이 그럴 수는 없다는 듯이 의연의 머리에 손
을 턱 올려 놓았다.
"어치피 오늘 공부 안해도 시험은 똑같이 잘 보잖아? 나는 수험생의 스
트레스를 풀어주러 왔다고. 마침 친구도 함께 있는데 노래방이라도 가
지?"
"그럴까?"
반짝 떠오르는 환한 표정. 진명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약산 묘
한 것을 찾아내고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저녀석 의연이를 부르는 호칭이
좀 이상한데? 참다 못한 민형이 은근슬쩍 물었다.
"저 의연아?"
"응?"
고개를 돌리는 의연. 민형이 어수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쟤가 널 부를때는 이름이 다르냐?"
"아~!"
멀뚱히 묻는 민형. 의연이 그제서야 실수 했다는 듯이 쓴웃음 지으며 하하
웃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사실 나 이름이 두개야. 호적에 올라가 있는 이름하고 개명한 이름. 원
래 연아였는데 사주상 연자가 뒤로 들어가면 좋다고 해서 대전에서 의연이
라고 불러."
"그,그래......?"
아하, 그래서 저 녀석은 원래 이름대로 연아라고 부르는 거로군? 참 시
험 잘보려고 이름도 두 개고...... 복잡하겠다. 민형은 그 정성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수 밖에 없었다.
PART-92
"멈춰진 진리! 또 용기~! 모든 것을~ 앗아간 양심~ 인간은~ 돌아가는 룰
렛속에 멈춰버린 작은 고옹~!!"
"실루엣~ 생각속에~ 그대안에 들어간 푸른 눈망울~"
템버린을 두드리고 캐스터네츠를 딱딱 거리며 민형과 의연은 노래방에서
열창했다. 노래방에 들어온지 10분쯤 지났으나 벌써 광란어린 노래방의 열
기는 의연과 민형에 의해 한껏 끓어올랐다.
"이번에도 97점? 의연이 너 노래 솜씨 죽이는데!"
"흥,그러는 너도 만만치 않군!"
"내가 가수를 하지 않은 이유는 그 직업으로 먹고살기 위한 많은 사람
들을 위해서거든."
서로 칭찬을 하면서도 두 사람의 사이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 다
보기 드문 명창이라 의연의 친구인 진명쪽도 듣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하
지만 두 사람의 열혈적인 분위기는 진명으로 하여금 쓴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있었다. 그때 마이크를 잡고 막 선택 단추를 누르려던 의연이 깜빡
있었다는 듯이 민형에게 휙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있잖아! 너네 누나도 부르자! "
"엉?"
지영씨를 부르자고? 민형은 한순간 꺼름직한 표정으로 입술을 쭈그려트
렸다. 그러고 보니 지영씨랑 노래방 같은데 온적은 한 번도 없네. 사실 지
영의 노래가 들어 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문득 민형의 머리속을 번쩍 스치고 지나가는 좋은 생각. 지금 지영씨를
데리고 오면 의연과 저 동생이라는 녀석의 관계를 빌미로 자신과 의연의
사이가 오해였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의연이 녀석 저
녀석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래 그거야! 한건 해결!
"전화할까?"
솔깃해서 묻는 민형. 그런 민형에게 의연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그래 빨리 전화해! 여기 까지 5분도 안 걸리잖아!"
"좋아 기다려! 내가 금방 불러올게! 넷이서 광란의 밤을 보내자고!"
"OK!"
의연이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고 민형 역시 주먹을 불끈 쥐며
노래방 문을 열고 카운터에 공중 전화로 걸어갔다. 그래, 의연이 녀석한테
저런 숨겨둔 남자가 있었는지 의외였지만 어쨋든 좋아. 지영씨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좋은 타이밍이 아닌가! 게다가 노래방은 오락의 공간! 분명히 화
기애애한 분위기로 오해는 풀릴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영이 노래방같은
곳을 좋아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민형은 전화기 옆에 돼지 저금통에 100원
짜리 하나를 집어 넣고 수화기를 들었다.
- 뚜우우우
- 뚜우우우
몇초간의 긴장된 시간. 그리고 수화기 저편에서 지영이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선생님!?"
<< ...... >>
순간 등줄기를 흐르는 싸늘한 침묵. 민형은 오싹하며 억지로 웃어 보였
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저절로 미소가 흘러 나왔다. 나도 알고보면 비
굴한 녀석인지도 모르겠다......
<< 왜 그러지 동생 민형? >>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차가우면서도 냉철한 목소리. 화났다. 아니
아주 화났다! 유지영 선생님이 저렇게 나오는 것은 드문일이지만 매우 화
났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를 풀리게 만들 비장의 아이템을 준비해 놓았
으니까 걱정 없지!
"선생님 여기는 근처 노래방인데요! 지금 친구랑 있거든요! 그래서 선생
님도 같이 놀자고 전화했어요! 이리 오세요!"
<< 또 그 여자애랑 같이 있는 거예요? 싫어요 동생군. 둘이 노세요. >>
도,동생군...... 왠지 썰렁하지만 비장의 아이템이 있으니까. 민형은 한
껏 가슴을 힘을 집어 넣고 억지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금 의연이랑 의연이 남자 친구랑 같이 있는데 저만 짝이 없단 말이예
요! 아시겠어요? 전 지금 궁상이라고요!"
<< 의연이라면 아까 그 여자애 말인가요? >>
그럼 그렇지. 솔깃한 지영의 목소리에 민형은 씨익- 미소를 흘리며 대답
했다.
"그려요. 지금 그 의연의란 여자애의 애인이 서울에서 면회 와서 노래방
에 와 있는 상태여요. 그러니까 궁상인 날 구하러 빨리 와요."
<< 민형씨랑 사귀는 것이 아니었나? >>
조금은 퉁명스런 목소리. 민형은 킥킥 거리며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겠죠? 확 사귀어 버릴까?"
<< 맘대로 해요...... >>
쳇, 빼긴. 민형은 약간 성질이 났으나 어쨋든 원인 제공이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참았다. 하지만 수화기 저쪽의 지영은 확실히 처음보다 많
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민형이 재차 물었다.
"빨리 올거예요 안 올거예요?"
<< 어느...... 노래방인데요. >>
그럼 그렇지! 사귄지 반년이 가까워 오니까 이제 이여자 다루는 법을 좀
알겠군. 민형은 속으로 YES!!를 외치며 겉으로는 침착하게 노래방의 장소
를 설명했다.
"학교 맞은편에 있는 25시간 노래방이예요. 정문 앞에 있으니까 찾기도
쉬울거예요. 지금 바로 나오면 3분도 안 걸릴껄요."
<< 민형씨도 노래해요? >>
크하하 풀렸어 풀렸어! 민형은 속으로 쾌소를 외치며 YES!!를 한 번 더
외쳤다.
"그럼 노래방 와서 노래하지 뭐해요? 마이크 씹어 먹을까?"
<< 난 민형씨 노래하는거 한 번도 들은 적 없는데...... >>
"가수 뺨치는 나의 노래 솜씨를 보여줄테니 빨리와요! 지영씨가 노래
못해도 듀엣으로 다 커버해 줄 수 있다니까!"
<< 쿡...... >>
웃었다!? 지금 웃었지!? 하아...... 인간 정민형. 진짜 많이 초라해 졌
구나. 여자가 슬쩍 웃은 것 만으로 이렇게 기뻐해야 하다니. 하지만 지금
은 체면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쨋든 풀어졌으니 다행 아니겠냐! 민형은
속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제촉했다.
"지금 올꺼죠?"
<< 알았어요. 그럼 좀 기다리세요. 옷 좀 있고...... >>
"그냥 나와요! 슬리퍼만 신고 나와도 되니까!"
<< 어떻게 그냥 나가요. 처음 보는 남자도 있는데 >>
"다른 남자한테 못나 보여도 된다니까."
<< 그래도 싫어요. 어쨋든 금방 갈께요. >>
"ok."
수화기를 끊고 민형은 흡족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좋아~ 이것으로
일단락! 이제 사이좋게 노래를 부르면서 애정을 돈독히 하는 일만 남았
군. 민형은 휘파람을 불며 다시 룸안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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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넌 전화로 누나랑 연애했냐? 뭔 전화를 그렇게 하루종일 해?"
뜨끔, 별 생각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의연의 한마디는 민형에게 엄청난
데미지 였다. 의연이 이것이 워낙 눈치가 칼이라서...... 민형은 애써 태
연하게 하하 웃으며 의연하게 흘려 넘겼다.
"아, 누가 쓰고 있길레 잠깐 요 앞에 나갔다 왔어."
"그랬어? 온데?"
"온데!"
"좋아!"
의연과 민형이 마주보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순간 민형은 뭔가 수
상한 것을 느꼈다. 자신은 지영과 화해를 하기 위해 이 상황을 기뻐한다고
하지만...... 의연이는...... 의연이는......?
"근데 넌 우리 누나가 온다는게 뭐가 그렇게 좋냐?"
"뭐가 좋다니!? 친해지면 좋잖아!"
"친해져......?"
"그래! 빨리 너네 누나랑 친해져야 수업받지! 수업!!"
카...... 그럼 그렇지. 노래방에서 노래부르는 순간까지도 공부밖에는
생각하는게 없군. 민형은 그 의연의 불타는 학구열에 높은 존경과 감탄을
보냈다. 그 경의의 표시로 민형은 지영이 오기전까지 이 노래를 열창했
다.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너 그거 무슨 의미로 부르는거냐?"
"무슨 의미라니. 쉬어 가자는 의미지."
"......"
불쾌한 듯이 묻는 의연에게 민형이 실쭉한 얼굴로 대답했고 의연은 이
마에 핏발을 세웠다. 하지만 지가 어쩔껴. 증거가 없는데 증거. 왠지 가장
연하인 진명은 그런 민형와 의연을 잘 논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으며 쳐다
만 보고 있었다.
- 똑똑
그때 누군가가 입구에 문을 두드렸고 민형이 휙- 고개를 돌렸다.
"실례해요?"
그녀는 바로 지영. 예쁘게 윈피스를 차려입고 헤어 밴드까지 하고 나온
보기만 해도 껴안아 주고 싶은 귀여운 모습이었다. 민형이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어서오세요 선......!!"
헙, 한순간 엄청나게 긴장하는 지영. 그리고 민형이 얼굴이 시커매 져서
푸하아아 숨을 내쉬며 식은땀이 맺힌채 입을 열었다.
"선수 교대야 누나......"
에고, 돌겠군 정말...... 민형은 등줄기에 싸아- 맺힌 식은땀을 느끼며
웃어 보였다.
PART-93
"안녕하세요. 지영이라고 해요."
싱긋 웃으며 인사하는 지영. 그런 그녀에게 찰싹 달라 붙은 의연이 넉살
좋게 빙글빙글 웃으며 씨익 입을 벌렸다.
"언니, 그냥 말놔요! 어차피 우리보다 나이도 많잖아요."
"그래도......"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짓는 지영. 그런 그녀에게 의연이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마이크를 지영게 불쑥 건넸다.
"자요, 말 트자는 뜻으로 한곡 부르세요."
"아,그래 고마워......"
지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마이크를 넘겨 받으며 쓰게 웃었고 민형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잘 어울리고 있는 두사람을 바라보았다. 의연이한테
다른 흑심이 없고 오직 공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지영에게 알려주면 결정
타일텐데. 민형은 심심치 않게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근데...... 저쪽에 친구는 누구지?"
지영이 문득 반대쪽 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 진명을 보고 빙긋 웃으며 의
연에게 물었고 의연이 깜빡 했다는 듯이 진명을 지영에게 소개했다.
"아,얘는 진명이라고 해요. 저보다 두 살어린 소꿉동생이예요."
"소꿉동생? 연하야......?"
그말을 들은 지영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마도 동지애를 느껴서였지 않
을까? 순간 민형은 이 분위기에서 저런 대사가 오고가는 것에 대해 본능적
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순간 묻는 지영에게 얼굴이 빨개진 의연이 머슥하
게 대답했다.
"여,연하요......?"
"애인 아니야?"
- 쿵. 한순간 민형은 심장이 얼어 붙었다. 그럼 그렇지 일이 이렇게 쉽
게 풀릴리가 있나! 어딘가에서 계산이 잘못 되었는가 했더니 바로 이 부
분이었구나! 바로 그렇다! 비록 의연이 이 녀석을 좋아하고 있다고 해도
지영씨 앞에서 순순히 인정할지 안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묻는 지영의
앞에 욹으락 으락 얼굴을 붉히는 의연을 보며 민형은 섬 하 기운을 느
꼈다. 누가 나좀 살려줘.
"애인은 아니고요."
그때 문득 구세주 같은 목소리. 민형이 눈물을 찔금 거리며 고개를 돌리
자 조용하던 진명이 빙그레 웃으며 얼굴이 빨깨진 의연의 어깨의 자신의
손을 올리며 말했다.
"지금 제가 대쉬중이예요."
"아,그래......?"
좋을때라는 얼굴로 빙긋이 웃음 짓는 지영. 하느님...... 민형은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쭈욱 빠지며 긴장이 풀어지고 말았다. 지,지,지,지,진명 이자
식! 넌 정말 좋은놈이야! 얼굴이 빨개져 아무말 못하는 의연의 어깨에 손
을 얹은 진명이 의연을 보고 씨익 웃었고 의연도 순간적으로 할말이 없었
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씨익 웃어 버렸다.
............................................... . . . . . . .
"오늘 즐거웠어요 언니. 민형이도~"
"지영누님, 민형형 안녕히 가세요."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흔드는 의연과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진명. 둘의
앞에서 지영과 민형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연아 내일 학교에서 보자~"
"잘가요~"
길건너 편에서 손을 흔들다 이내 사라지는 의연과 진명을 확인한 후
민형과 지영은 나란히 등을 돌려 집을 향한 골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
다. 잠시 걷다 말고 지영이 물었다.
"민형씨 노래 잘하네요."
"지영씨 역시 미성이던데요?"
"그래도 노래방에 단련된 세대하고는 차이가 나지요~"
"하하 무슨 노래방 세대가 따로 있다고~"
자신들도 모르게 주섬주섬 주고 받는 잡담. 잠시후 지영이 민형에게 스
윽 팔짱을 껴왔다.
"미안해요 민형씨 오해해서."
그녀의 솔직한 사과에 민형은 갑자기 기분이 풀렸다. 민형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할 건 없어요 지영씨. 사실 의연이 걔는 지영씨 한테 시험문제 찍
어 달라는게 목표였으니까."
"어머, 함부로 가르켜 줄 수 없어요~"
그말에 민형은 가슴이 뿌듯했다. 역시...... 나만이 유지영 선생님께 문
제를 찍어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말이군~ 이거 나쁜 기분은 아닌
데. 기분이 좋아 싱글벙글 웃는 민형에게 지영이 물었다.
"내일도 시험이죠?"
"네?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내일 역시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무엇이 두려우랴. 유지영 선생님이 있는 한 빵점을 맞아도 행복하
다.
"오늘 특별 서비스 할께요."
그렇게 말하며 볼에 살짝 입을 맞추는 지영. 민형은 짜릿한 기분에 힘
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난 마마보이였나봐.
--------------------------------------------------------------------
"아 이번주 토요일 3시요? 물론 시간은 있지요. 네, 그럼 그때 뵙겠습니
다! 네, 수고하세요!"
금요일 마지막 시험을 하루 앞둔 목요일 저녁. 민형은 최기자에게 콘티
에 대해서 의논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연락하지도 않았는데 잡지사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는 것은 민형에게 있어서 꽤 두근두근한 사건이었
다.
"어제 보낸 콘티를 보고 전화한거래요?"
방에 걸래질을 하다 말고 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민형은 의
기양양하여 부푼 가슴을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보다 내용이 괜찮은 것 같다고 토요일날 직접 와서 이야기 해
보자고 해요. 괜찮으면 곧바로 댓생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어머 축하해요 민형씨! 하지만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예요?"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지영. 하지만 지영은 민형이 아직 확실하지 않을
일로 큰 기대를 품을까봐 걱정이 되어 자신의 표정을 조심할 수 밖에 없었
다. 민형도 그런 지영의 마음을 아는지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예, 그쪽에서도 제 그림아 약하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큰 기대는 안하
고 있어요. 하지만 뭐 일단 보낸 콘티라도 반응이 좋다니까 그냥 좋은 것
뿐이죠."
싱글벙글 웃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민형. 그런 민형을 보자 지영은
괜히 자신도 기분이 좋아져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만화가 좋아요?"
"네, 만화로 밥먹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항상 생각해 왔거든
요."
"부러워요. 그런 꿈이 있다는게......"
"지영씨 꿈은 뭔데요?"
"......?"
문득 묻는 민형. 그런 민형의 앞에서 지영은 잠시 망설이는 표정으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민형씨랑 결혼하는거~"
"하하, 그럼 내가 프로가 되면 어시스던트로 써줄테니까. 심심할 때 나
한테 그림이라도 배워요."
"응, 가르쳐만 주면 잘 할 수 있어요~"
"지영씨, 이건 공부하고는 틀려서 고도의 손재주가 요구되는 작업이예
요."
"그러니까 가르쳐 주면 되잖아요~"
잡지사의 전화를 받은 목요일 저녁. 내일 시험은 안중에도 없어진 민형
과 지영은 그렇게 들뜬 하룻 밤을 보냈다. 토요일...... 토요일엔 드디어
잡지사와의 제2차전이 벌어지게 되는 것인가. 그날밤 잠자리에 들어서도
민형은 보낸 콘티에 문제점이 어떤 것일까를 밤새 생각하며 잠을 뒤척였
다.
.......................................................... . . . .
"응,그래 지혜야. 토요일날 올라가게 되면 잘때가 마땅히 없으니까 너희
집에 가려고. 응, 잡지사에서 얘기해 보자고 했데."
이곳은 지영의 학원. 잠깐 비는 시간을 이용해서 지혜에게 전화를 거는
지영의 마음은 행복하기만 했다.
<<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그래. 10개가 좋아도 하나가 안되면 그냥 미끄
럼틀이야. >>
"알아 알아. 민형씨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뭐."
<<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데 성질대로 해버리면 안되는거 알지? 민형씬
그걸 조심해야 돼. >>
"걱정마 얘. 민형씨가 뭐 바본줄 아니."
지혜 역시 이 일이 잘 성사되기를 바라고 걱정해서 하는 말. 지영은 통
화를 하면서도 친구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걱정해 주는 지혜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PART-94
민형은 토요일 수업을 2교시에 조퇴하고 지영과 같이 서울로 올라갔
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번번히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
당히 조퇴를 하고 서울로 올라간 민형. 그가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
한 것은 아직 약속 시간보다 2시간이 이른 오후 1시 경 이었다.
"음, 여기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1시간 이면 도착하니까 일단 점심이라도
먹으러 갈까요?"
"그래요 그럼. 그런데 이 근처에 마땅히 먹을 만한 곳이 없을텐데?"
"구내매점에서 우동이라도 먹어야죠 뭐."
"그럴까요."
일단 끼니를 때우기로 합의를 본 두 사람은 터미널의 구내 매점에서 간
단하게 우동을 한그릇씩 먹고 터미널을 나왔다. 이제 얼마남지 않은 방학
을 앞둔 여름은 제법 무더웠다. 간편한 반팔 T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민
형. 가슴의 볼륨이 들어나는 타이트한 흰색 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캐쥬얼
한 지영은 남들이 보기에도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물론 나이는 잘 들어
나지 않으니까.
"같이 출판사로 갔다가 갈까요. 아니면 지영씨가 먼저 지혜씨 집에 가
있을래요."
지영의 의견을 묻는 민형에게 지영이 대답했다.
"같이가요. 커피 같은데서 기다리고 있지요 뭐. 면담이 길어질까요?"
"아니요. 길어 봤자 1시간 정도. 보통 2,30분이면 끝나요."
"그래요 그럼."
다시 지금부터의 일정에 대해 합의를 본 두 사람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철 역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입구 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이 두근두근한 마음의 민형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 . . . . . . . .
"이곳에서 조금 기다리고 계세요. 금방 같다 올께요."
지혜와 만났었던 커피숍 알레그로의 창가 자리에 지영을 앉히고 민형이
두근두근 한 얼굴로 지영에게 말하자 지영이 두손을 쥐어 열심히 라는 뜻
으로 흔들어 한 번 어깨를 으쓱했다.
"힘내요 민형씨."
"OK"
찡긋 윙크를 하고 잔뜩 긴장한 얼굴로 커피 을 나서는 민형. 지영은 그
런 민형의 뒷 모습을 보며 속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기원했다.
"네,그러니까 이쪽 캐릭터는 말이죠 조연이라고 개성이 너무 없는 것도
문제가 있거든요. 주인공을 조연처럼 조연을 주인공처럼, 이게 요즘 추세
기도 하니까요."
그때 지영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또다른 테이블에서 손님과 열심히 대화
에 열을 올리고 있는 남자. 그는 창가에 있는 지영과 반대편 창가에서 자
신의 손님과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만화가의 원고인 듯한 몇페이
지를 손에 들고 한창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남자. 그는 다름 아닌 얼마
전 지영이 대전에서 만났던 김선민 이었다.
"여자 캐릭터가 예뻐야 됩니다. 그러니까 테크닉으로 아무리 예쁜 것은
소용 없어요. 선은 거칠더라도 테크닉은 떨어지더라도 독자에게 '예쁘다'
라는 느낌을 줄 수 있는 캐릭터가 중요해요. 설정을 다시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손님인 상대는 아직 프로가 아닌 지망생인 듯 김선민과의 대화에서 계
속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때 문득 점원
에게 물을 주문하려고 고개를 돌리던 김선민이 문득 창가에 앉아 있는 낮
익은 아가씨를 알아보고 시선을 멈추었다.
"아니......?"
그리고 김선민의 얼굴이 반가운 표정으로 환하게 밝아졌다.
-------------------------------------------------------------------
"음, 스토리 쪽에 감각은 아주 좋은 것 같아요. 아마츄어 치고는 컷 배
분도 매우 뛰어나고. 재미도 느껴져요."
"네......"
두근두근 쿵쿵. 최기자와 이야기 하는 민형의 가슴은 요란하게 벌렁 거
렸다. 자신의 콘티를 촤악 펼치고 여기 저기 오목조목 지적을 해 주는 최
기자는 꽤 민형의 콘티에 대해 연구를 한 것 같았다. 민형은 일단 나쁜쪽
보다는 좋다는 쪽의 이야기가 많이 나와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약간 페이지에 기는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30페이지 단편보
다는 20페이지 3부작으로 콘티를 짜보는게 어떨까 생각해 봤거든요? 민형
씨 생각은 어때요?"
"2,20페이지 3부작이요!?"
뜻밖에 권유에 놀라는 민형. 3부작이라면 그만큼 더 많은 기회를 준다는
것이 아닌가! 민형은 가슴이 두배로 뛰기 시작했다. 최기자는 씨익 웃으면
서 펼쳤던 콘티를 탁탁 모아서 정리했다.
"네, 20페이지로 3부작이면 전부 60페이지니까 좀 더 하고 싶은 이야기
를 많이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죠. 머리속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모여 있지요?"
"아,네, 네...... 그거야 뭐."
스토리에 기대를 많이 한다는 뜻인가? 어쨋든 민형은 흥분해 있는 상태
였기 때문에 그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럼 60페이지 콘티를 완성해서 연락합시다."
"고맙습니다 최기자님!"
대답하는 민형의 표정은 밝았다.
.................................................. . . . . . .
"아,이거 정말 오랜만 입니다?"
"......?"
턱에 손을 얹고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민형이 건물에서 나올때만을
기다리며 건물을 주시하고 있던 지영. 그녀의 테이블 앞으로 다가온 누군
각 그녀에게 아는 척을 했고 지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앞
에는 낮익은 얼굴의 누군가가 반갑다는 듯이 웃으며 서 있었다.
"당신은......?"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지영 역시 김선민을 알아보고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하하, 기억해 주시는 군요. 예, 저 김선민 입니다. 지영씨."
"어머, 어떻게 이런곳에서. 정말 반가워요. 앉으세요."
얼떨결에 자리를 권한 지영. 김선민은 사양도 하지 않고 웃으며 앉았
다. 민형은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 안면이 있는 사람을 이런곳에서 만난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지영도 웃었다.
"이곳엔 어쩐 일이세요? 대전에서 서울까지 올라오신걸 보니 누구 중요
한 사람이라도 만나러 오셨나요?"
인사 차례로 묻는 김선민. 그에게 지영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아는 사람이 이 근처에 있는 잡지사에 볼일이 있어서요."
"예? 어딘데요?"
출판사라는 말이 나오자 매우 놀라는 김선민. 지영이 대수롭지 않게 대
답했다.
"저앞에 보이는 (주) 원진미디어 라고......"
"그럼 웨이브지? 아는 사람이 웨이브 지랑 관련이 있어요?"
의외로 그쪽에 밝은 김선민. 지영은 자신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던 웨이
브 라는 잡지 이름이 선민에 입에서 쉽게 튀어나오자 조금 의외라는 얼굴
로 대답했다.
"아,예. 거기서 데뷔 하려고 하거든요."
"웨이브 에서요? 거긴 지금 신인 안쓸텐데...... 신인이라고 해도 몇 달
괴롭히기만 하고 실어주질 않아요. 기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요즘 판
매 부수도 계속 떨어지고 있지요."
이 세계에 사리에 대해 매우 밝은 말투. 지영은 본능적으로 선민이 이쪽
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혹시 선민씨도?"
그러고 보니 그의 직업을 들은 적이 없다. 지영이 혹시나 해서 묻자 선
민이 싱긋 웃으며 쑥쓰러운 듯이 대답했다.
"아,예. 사실 저도 아트림 미디어에서 발행하는 격주간 시디 스페셜에
있거든요."
"헤에......? 김선민씨도 잡지사 기자였어요?"
그것은 정말 의외. 지영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정말 의외라는 듯이 동그
란 눈을 크게 떴다. 지영이 매우 놀라자 선민은 조금 쑥쓰러웠는지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지영에게 말을 건넸다.
"신인이 웨이브에 원고를 넣다니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보죠?"
"아,예. 제 친구가 그쪽에 팀자님과 아는 사이라고 해서요."
"그렇군요. 누군지 몰라도 운이 좋은 사람이네."
- 칙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히며 예의상 입을 여는 선민. 그때 였다.
- 딸랑.
입구에 문이 열리며 검은 색의 큰 서류철을 손에 든 민형이 커피 안
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지영이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 민형씨? 금방 끝났네요?"
"아,예! 어......?"
반가운 표정으로 커피 을 들어서다가 문득 지영의 앞자리에 앉아 있는
김선민을 보고 우뚝 멈춰선 지영. 민형과 선민의 눈이 마주쳤고 자신을 보
고 굳은 얼굴의 민형에게 선민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러고 보니 구면이네요?"
선민이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며 씨익 웃었다.
PART-95
"다,당신은......?"
민형의 앞에서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며 인사를 건네오는 남자. 그는
바로 김선민. 얼마전 대전에서 지영과 함께 술을 마셨다는 바로 그 남자였
던 것이다. 민형이 자리에 앉지도 않고 우두커니 선 채 선민을 향해 어이
없다는 듯이 다짜고짜 한마디 했다.
"다,당신이 왜 여기있어?"
"아아, 흥분하지 말아요. 나는 단지 우연히 이곳에서 지영씨를 만난 것
뿐이니까."
"우연히!? 우연히 이 까페에서 지영씨를 만났다고?! 우연히 말이야!?"
이것이 우연이라면 정말 기막힌 우연! 그렇지 않다면 이건 계획적인거
지! 아무리 생각해도 민형의 머리속에는 우연보다는 계획성이 짙게 느껴졌
다. 하지만 계획이라고 해도 이곳에서 이렇게 지영과 만나게 되는 계획을
짜려면 참 힘들었겠군...... 그때 민형이 지영에게 씨 자를 붙힌 것을 듣
고 선민이 잘못들은 것처럼 지영에게 흘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지영씨......? 동생 아니예요?"
"아,예 그게."
묻는 선민에게 지영이 조금은 쑥쓰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사실은 제 애인이예요."
"네!?"
지영의 대답을 듣고 못 들은 것을 들은 것 처럼 사색이 되는 김선민.
그가 당황한 얼굴로 다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이 되 물었다.
"애,애인이요......?"
"그래."
묻는 선민에게 지영 대신 대답하며 민형이 지영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
의기양양하게 팔로 지영의 어깨를 감싸 앉았다. 그리고 보라는 듯이 거만
하게 자신의 옆으로 지영의 몸 전체를 끌어 당겼다.
"그때는 경찰앞에서 요령껏 거짓말 했던 거 뿐이야. 그러니까 남에 여자
한테 추근대지 말라고 당신."
불끈 미간에 힘을 주며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말하는 민형. 하지만 선민
은 그런 민형에 태도에는 별로 당황하지 않고 지영을 향해 제차 물었다.
"저,저 말이 사실입니까 지영씨? 내가 알기로 이 친구는 고등학생?"
"6살 차이 쯤 나는걸 가지고 뭘 그래? 요즘엔 그런 건 흔한건데."
예전 그 사건 이후로 선민이라는 자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민형. 그
는 선민이 자신과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로 모난 말
만 골라하며 예의라를 것을 한수 접은 대사를 건네고 있었다. 선민이 잠시
상황 판단을 하려는 듯이 민형과 지영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어
이없다는 듯이 하하 싱거운 웃음을 털어 놓으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이거 걸작이네. 역시 만화가 지망생답게 연애도 특이한 연애를 하는
군요. 근데 이름이......?"
"정민형."
"하하, 그래요 민형군."
선민이 흔쾌히 민형의 이름을 부르며 재떨이에 담배재를 털었다. 그때
지영이 여전히 선민에게 모난 태도를 보이는 민형에게 나무라듯 한마디 했
다.
"민형씨. 선민씨는 민형씨 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분이예요. 경어를 써
야죠 경어를."
"......"
못마땅하게 입술을 삐죽 내미는 민형. 선민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나한테 안좋은 감정이 있는 모양인데 막말이라도 해
서 풀어지면 다행이지 뭐. 그리고 난 애인 있는 여자한테 추근대는 취미는
없어요 민형군."
어쭈, 제법 뒤끝이 산뜻한 남자 김선민. 저렇게 까지 나오는데 사나이
정민형 안 무안할 수가 없지. 민형이 쭈삣쭈삣 불편한 얼굴로 냉큼 한마
디 했다.
"버릇없이 굴어서 죄송. 김선민씨."
"하하, 그 참 엎드려 절 받기네~"
선민이 사심 없는 표정으로 밝게 웃었고 민형도 그런 선민에 태도에 지
금까지 가지고 있던 그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 조금 사드라드는 느낌이었
다. 어쨋든 우리의 관계를 확실히 밝혔으니 더 이상 그런 문제로 걱정할
필요도 없고. 그때 멀뚱- 앉아 있는 민형에게 대뜸 선민이 물었다.
"그런데 민형군은 웨이브에 원고를 보이고 있다면서?"
"아, 그래요."
지영씨가 벌써 이 남자한테 그런말을 했나? 민형은 왠지 자신이 만화를
그린다는게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자 쑥쓰러워 조금 얼굴이 붉어졌다. 선민
이 능숙한 태도로 담배를 빨며 민형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디 그 원고좀 볼 수 있을까?"
"......?"
그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워 민형은 위압감 까지 느꼈다. 음, 마치 최기자
아니 강팀장 정도의 원고를 다룬 경륜이 있는 자의 손짓이었다 아니나 다를
까 지영이 한마디 거들었다.
"선민씨가 글세 잡지사 기자래요? 그것도 아트림 미디어에 시디 스페셜이
라는 잡지에."
"에에!?"
눈이 번쩍 뜨이는 민형. 시디 스페셜이라면 웨이브지와 판매부수를 나란히
하며 1,2위를 다투는 굉장한 출판사인 아트림 미디어에서 발행하는 만화 잡
지다. 게다가 아트림 미디어는 말 그대로 출판뿐이 아닌 완구,팬시,애니메이
션 영상사업,게임 분야에서까지 각광받고 있는 엄청난 대기업 이었다.
"다,당신...... 아니 김선민씨가 시디 스페셜에 기자였다고요......?"
갑자기 위대해 보이는 김선민. 벙찐 민형의 앞에서 그가 긍정인지 부정
인지 싱긋 웃으며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손을 내밀었다.
"원고 안 보여 줄꺼야?"
"아, 네."
왠지 기선제압당한 민형. 그는 얼른 서류철에서 가지고 있던 그림 몇장
을 꺼냈다. 오늘은 콘티 단계였기 때문에 원고는 없고 캐릭터 설정과 몇가
지 그림들만 가지고 왔던 것이다.
"아,그거 콘티야?"
민형의 서류철안에 들어 있는 콘티들을 본 선민이 흘끔 손가락으로 그것
을 가리켰고 민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도 줘봐."
"......"
콘티까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쨋든 이 부분에 전문가라면 한 번
보여 줘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민형은 콘티를 꺼내 선민에게 건네
주었다. 무엇보다 최기자와 다른 눈으로 보는 자신의 그림과 콘티가 어떤
식으로 평가될지 매우 궁금했기 때문이다.
"......"
한 5분정도 선민은 민형의 캐릭터와 콘티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가끔씩
보면서 미소 짓기도 하고 20페이지의 짧은 콘티에셔 여러 가지 다양한 표
정을 보여 주었다. 콘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선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림 좋은데?"
"네?"
그림이 좋다는 말에 민형은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그림이 약하다는 소
리는 많이 들었어도 그림이 좋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한 것이다. 선
민이 담배 연기를 한 번 내뿜고 재떨이에 남은 꽁초를 찍어 누르며 말했
다.
"응, 뭐 퀄리티 쪽은 약간의 보강이 필요 하겠지만 말이야. 캐릭터가 살
아 있어서 좋아. 이 캐릭터에 들어가 있는 감정 이입이 확실하거든. 아,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 캐릭터가 아주 괜찮은데 아까 지망생 한명 만났었는
데 여자가 영 꽝이야. 그림은 잘 그리는데 말이야."
"그,그렇습니까......?"
자신의 그림에 잘그렸다는 평을 해주는 김선민. 민형은 갑자기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워져 찡한 얼굴로 선민을 주시했다.
"근데 말이야."
"?"
문득 콘티를 집어 드는 선민. 민형은 움찔 놀라는 얼굴로 선민을 보자
선민이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민형군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스토리 쪽에 더 강한 것 같군? 문예반에
라도 들었었어?"
스토리. 그 말은 민형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한가지 자존심 이었다. 이
선민 기자 역시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보아주니 민형은 가슴이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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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원물(선생/선후배/여대생) | 노선생χ | 5871 | 0 | |
| 학원물(선생/선후배/여대생) | 노선생χ | 5752 | 0 | |
| 학원물(선생/선후배/여대생) | 노선생χ | 5881 | 0 | |
| 학원물(선생/선후배/여대생) | 노선생χ | 5862 | 0 | |
| 학원물(선생/선후배/여대생) | 노선생χ | 5779 | 0 | |
| 학원물(선생/선후배/여대생) | 노선생χ | 6029 | 0 | |
| 학원물(선생/선후배/여대생) | 노선생χ | 6150 | 0 | |
| 학원물(선생/선후배/여대생) | 노선생χ | 5593 | 0 | |
| 학원물(선생/선후배/여대생) | 노선생χ | 5421 | 0 | |
| 학원물(선생/선후배/여대생) | 노선생χ | 6720 | 0 | |
| 학원물(선생/선후배/여대생) | 노선생χ | 7508 | 0 | |
| 학원물(선생/선후배/여대생) | 노선생χ | 7395 | 0 | |
| 학원물(선생/선후배/여대생) | 노선생χ | 8898 | 0 | |
| 학원물(선생/선후배/여대생) | 노선생χ | 16304 | 0 | |
| 학원물(선생/선후배/여대생) | 노선생χ | 5987 | 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