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3년생의 사랑 15부
"자,그럼 우린 이만 들어갈께요. 민형씨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나중에 또 만나요~"
선아, 수진들과 술집 앞에서 악수를 나누며 민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
다. 좀 짓궂다 싶어서 그렇지 악의는 없는 그녀들에게 소홀히 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꺼야?"
친구들과 헤어지고 남은 것은 지훈과 지혜, 그리고 민형과 지영 뿐이
었다. 술집에서 조금 떨어진 도로 한복판으로 나와 묻는 지혜에게 민형
은 언뜻 대답하지 못하고 물끄러미 지영의 눈치를 살폈다. 지영은 술집
안에서부터 별다른 말을 걸어 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지영씨와 할 얘기가 있으니까."
"......"
민형이 지혜와 지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고 지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은 말이 없었다.
"그래요 그럼. 그럼 이따가 어디로 갈꺼에요? 지금 대전으로 내려갈 수
는 없을 테니까."
"지혜 너네 집으로 갈게."
문득 대답하는 지영. 지혜는 잘 생각했다는 히죽 웃어 보였다.
"그래. 대신 지훈씨랑 한침대 쓰는 내 모습을 보고 참아야 할텐데."
"알았어 여관으로 가겠어."
"농담이야......"
지혜가 쓴웃음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줄곧 3사람의 이야기를 듣
고만 있던 지훈이 지혜의 팔을 붙잡고 등을 돌렸다.
"그럼 너무 늦지 않도록 해. 두사람."
"알았어요."
지훈에 충고에 민형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끝으로 두 커플은 갈라 졌
다. 지훈들은 버스 정류장이 있는 도로변으로 걸어갔고 민형과 지영은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잠시동안 그 자리에 서먹서먹하게 서 있었
다. 계속 이렇게 서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민형이 먼저 말을 꺼냈
다.
"저기......"
"민형씨 우리 어디 들어가요."
"네?"
갑자기 의견을 내놓는 지영. 민형은 얼떨떨해서 잠시동안 그녀의 얼굴
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영이 새침해서 민형의 손을 잡아 끌었다.
"먹을 수 있는 곳이 좋겠어요."
"네에....."
또 음식점엘? 방금 술집에서 나왔는데...... 하지만 민형은 배가 고팠
다. 그러고 보니 술집에서는 사람들의 수다와 떠들썩한 분위기 때문에 거
의 먹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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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룩"
"후룩"
민형은 눈앞에 놓인 우동 면발을 신나게 빨아 들였다. 이곳은 1시까지
영업하는 심야 분식점. 만두나 우동같은 간단한 요리로 허기를 달랠수 있
는 곳이었다. 은 크기의 식당안에는 의자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늦게까
지 일을 보고 허기를 면하려는 사람들의 드문드문 이용하고 있었다.
"......"
지영은 민형이 우동을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민형은 우동 한그릇을 너끈히 해치웠다. 민형이 우동을 모두 비
우고 물 한잔을 마실 때 쯤 지영이 넌즈시 말을 건넸다.
"민형씨 술집에선 거의 먹지 않았죠."
"네......? 아...... 그렇죠 뭐."
그럼 그것을 알고 일부러 먹으러 가자고 한건가? 왠지 그런 분위기에서
는 편하게 음식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민형은 별로 먹지 않았
었다. 지영씨는 그걸 신경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영은 아마도 이미 풀려 있을거야.'
지혜의 말이 떠올랐다. 이쯤에서 화해한다면 좋은 타이밍이겠는데...
... 민형은 물컵을 내려 놓고 입을 열었다.
"저 지영씨...... 어제 일은 미안했어요."
"......"
민형은 방금 물을 마셨는데도 입술이 바싹 타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지
영씨가 아직 화나 있을까. 아니면 지혜씨의 말대로 이미 다 풀어져 있을
까? 민형은 속이 탔다. 그러자 갑자기 지영이 동문서답을 했다.
"출판사에 간 일은 잘 됐어요?"
"네? 아, 그건 뭐......!"
갑자기 빤히 바라보며 묻는 지영에게 민형은 특별히 할말이 없어 머리
를 긁적 거렸다. 아직 확실히 결정난 것도 없고 이렇다할 잘된 일도 없었
기 때문이다. 지영이 두손으로 물컵을 돌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든지 천천히 정진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예요. 조급해 하
지 말고......"
"네...... 그렇죠 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지영은. 사과를 받을 마음이 없다는 뜻인
가......? 민형은 조금 긴장된 심정으로 지영의 다음 대사를 기다렸다.
하지만 지영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다 먹었으며 나갈까요?"
"네? 네......"
식당에서 한 그녀의 마지막 대사는 이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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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보조등이 환하게 밝아져 있는 가로수변 도로를 걷고 있었다.
이대로 주욱 걸어 간다면 버스 정류장이 나올 것이다. 민형은 지영과 함
께 걷고는 있었지만 왠지 함께 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식당을 나와 여
기 까지 꽤 걸었지만 지영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고 민형도 특별히 먼
저 말을 꺼낼 입장이 아닌 것 처럼 느껴졌다.
'이대로는 나만 초조하잖아......'
사과한게 바보가 되버리는 건가. 민형은 빨리 지영에게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어차피 모든 일은 오해에서 시작되었고 자신의 잘못이라면
말을 조금 심하게 한 것 뿐이지 않은가. 민형은 한 자리에서 멈춰섰다.
"......?"
민형이 멈춰서자 지영이 뒤를 돌아 보았다. 민형은 주먹을 꾹 쥔채 지
영을 향해 조금은 강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지,지영씨 뭐라고 말 좀 해요!"
".......?"
왜 아무말도 안하는 거야. 그렇게 혼자서 아무말도 안하고 있으면 나
보고 어떡하란 말이야!
"내가 사과하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풀어져도 괜찮지 않아요!? 다 오해
였고 내가 심한말 한 것은 사과할께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화해해요 우리! 이제 더 이상 혼자서만 고민하는 것
은 싫단 말이예요! 민형은 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지영씨는 나쁘
다! 왜 나만 고민하게 만드는거야! 삐지는 것은 여자만의 특권은 아니란
말이야! 남자도 삐질 수 있어! 여기서 화해하지 않으면 난 삐져 버릴테
다! 민형은 거의 반쯤 원망이 섞인 얼굴로 지영을 쳐다보며 이렇게 되뇌
었고 한순간 지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뭐가요......?"
"네?"
갑자기 긴장이 쫙악 풀어지는 한마디. 뭐라니?
"뭘 화해하자는 거예요 민형씨?"
"뭐라니요! 나는 어제 있을던 일을......!"
아니 지금 누굴 놀리나! 지금 까지 삐져서 꽁해 있었던게 누군데! 아니
면 이것도 화해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강압인가!? 하지만 마구 오해하려
고 하는 민형의 비해 지영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
고 입을 열었다.
"그건 아까 화해 했잖아요? 그리고 나 이미 다 풀어졌어요. 또 뭐가
남았나요?"
"예에?"
아까 화해 했다고? 언제!?
"아,아까라고요.......?"
한순간 스쳐지나가는 한 장면. 그렇다면 설마 분식집에서 출판사에
대해서 물었을때가 화해의 대한 대답이었다는 건가? 민형은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지,지영씬 지금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무언의 강압을 주고선!"
"그거야 민형씨가 아무말도 안하니까 나도 뭐라고 꺼낼말이 없어서 그랬
죠...... 화 났어요?"
이번엔 나보고 화 났냐고? 아아..... 여심이란 뭐가 이렇게 복잡해! 난
심리학 전공도 아닌데. 민형은 그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그
런 민형을 바라보고 있던 지영도 히죽 웃었다.
"나 다 풀렸어요. 그러니까 이제 평소처럼 지내요."
"어휴......"
금세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자신의 팔짱을 끼는 지영을 내려다보며 민형
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지영 역시 서먹한 감정을 이런식으로 풀
어내려고 했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생님 지금 수쓰는거 아니예요?"
"예?"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말똥말똥한 눈을 깜빡이는 지영. 민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네요......"
세상에는 굳이 형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아도 이해되는 것이 있는
법. 지금 두 사람의 무언의 제스츄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PART-85
"자, 내일부터 기말고사가 시작된다. 각자 시험 범위 확실히 체크해
서 고3의 1학기 마지막 시험을 망치지 않기 바란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학생들에게 종례사항을 전달하는 송미라 선생의 얼굴
을 책상위에서 턱을 괜채 바라보며 민형은 한쪽 눈썹을 찔끔거렸다. 나에
게 그런 수모를 주고도 학교에서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저 이중성. 역시
교편을 잡은 교사의 저력은 놀라워.
"아아~ 내일 부터 또 시험이냐~ 1주일 동안 죽겠구나!"
"싫어 싫어~ 나 공부 못했단 말이야~ 싫어 싫어~"
여기 저기서 한탄섞인 한마디가 새어 나오고 민형은 주섬주섬 가방을 챙
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몇칸 앞자리에서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의연이 보였다. 민형은 별 생각없이 의연에게 다가가 인사말로 한마디 했
다.
"의연아 시험공부 많이 했니?"
"응? 아, 항상 하던대로 했지 뭐."
항상 하던대로라면 몇등일까? 민형은 이 학교에 전학와서 처음 보는 시
험이었기 때문에 각 학생들의 등수를 어림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의연이 물었다.
"넌 공부 많이 했니?"
"응? 나? 아 말나온 김에 시험범위 좀 적어줘라."
시험기간은 민형에게는 일찍 끝나서 좋은 날일 뿐이었다. 하지만 전학
도 왔겠다. 새로운 기분으로 조금 공부해볼 심산으로 민형은 의연에게
그렇게 부탁했다.
"넌 공부시간에 범위도 안적고 뭐하냐?"
"어, 미안."
자신이 상당히 뻔뻔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민형은 전혀 몰랐
다. 시험 범위가 수험생들에게 얼마나 민감한 부분인지 민형은 전혀 느끼
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 의연은 시험 범위 정도로 쪼잔하게 구는
그런 속좁은 여자는 아니었다. 의연이 노트를 찢어 시험 범위를 적어주면
서 한마디 했다.
"공부좀 해."
척 들어도 공부 지지리도 안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는 듯한 대사. 민형
은 범위가 적힌 쪽지를 건네 받으며 씩 웃었다. 애초에 공부와는 거리가
먼 남자인데다가 이번주에는 만화 콘티 작업 때문에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려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민형에게 시험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때 어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민형에게 의연이 말을 건넸다.
"야, 나 오늘 독서실 가서 밤샐건데 너도 같이 갈래?"
"뭐!?"
갑자기 왠 청천날벼락. 민형은 깜짝 놀라 설래 설래 고개를 흔들었다.
독서실이라니! 그런곳은 금기된 곳이야! 게다가 밤을 세다니! 밤을 세는
게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알기는 아니!?
"아,아니 난 됐어! 난 밤새는 대는 그렇게 익숙하지 못해서 말이야..
...."
"풀이를 못하면 한자라도 더 외워야 될거 아니야. 자습도 잘 못 풀면
서."
사나이 자존심을 콱콱 짓누르는 말. 하지만 의연에게는 항상 도움을
받아왔기 때문에 민형은 할말이 없었다. 하지만 독서실 만은 정말 싫
다고...... 싫어......
"!?"
그때 문득 민형의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가지 생각. 그렇다!
독서실에 가면 송미라 선생님과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민형
은 솔깃해서 의연에게 물었다.
"나,나는 독서실 한 번도 가본적이 없는데 아무나 가도 되는거니?"
"유료이긴 한데. 내가 다니는데는 되게 싸. 하루에 300원이야."
"그것도 돈내는 거야!?"
독서실도 돈낸단 말인가!? 민형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러
나 의연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당연하지! 보통 한달에 4,5만원 하는데 나는 시험때만 이용하걸랑.
하루에 3000원 정도 짜리가 보통이고 비싼데는 5000원 짜리도 있어."
"그렇게 돈을 들여서 까지 그런데 가서 공부할 필요가 있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 공부야 아무데서나 하면 되지 꼭 독서실
에서 해야 공부가 잘 되다니?
"아무래도 공부하는 분위기가 되야만 나도 휩쓸려서 공부가 잘 되거든.
그리고 좀 비싼데는 방음도 되고 매점에 자판기 시설이 엄청 좋걸랑. 근데
내가 가는 300원 짜리는 그런거 없어. 그래서 좀 불편할거야."
"음..... 그러냐......"
머뭇 머뭇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돈을 내고 독서실을 이용한다는게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 민형. 하지만 독서실이라 하루쯤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형은 독서실에서 콘티를 구상할 생각을 하고 있
었다.
"그럼 가자. 어디서 만나면 되지?"
"어디서 만나다니? 난 바로 갈꺼야."
"엉? 그래? 난 집에서 좀 가져올게 있는데......"
"그럼 가서 가져와. 요 앞에 골목 건너에 있는 산정 독서실이야."
"알았어. 그럼 얼른 집에 갔다 올게."
의연은 바로 독서실로 가기로 하고 민형은 콘티 재료를 챙기기 위
해 집에 다녀 오기로 결정했다. 그때 문득 의연과 함께 복도로 나가는
민형을 알아본 송미라 담임이 민형을 불러세웠다.
"정민형? 시험 기간인데 집에서 얌전히 공부해야지?"
그말은 갈테니 기다리고 있으란 말. 하지만 어림없지. 민형은 왠만하
만 지영과 담임을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민형이 씨익 웃으며 능청
맞게 대꾸했다.
"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의연이랑 독서실 가는거예요! 거기서 공부 하
려구요."
"독서실?"
민형의 말을 들은 담임의 눈꼬리가 짙게 내리 깔렸다. 민형이 셈통이라
는 얼굴로 의연의 어깨 동무를 하고 빙글 등을 돌렸다.
"그럼 내일 뵈요 선생님~!"
"......"
갑자기 친한척 하는 민형에게 영문을 모르는 의연이 눈을 깜빡 였고 송
미라는 그런 의연과 민형의 등뒤에서 이마에 핏발이 맺힌채 웃고 있었다.
"제법인데 정민형...... 벌써 반장을 꼬시다니...... 역시 여자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
................................................. . . . . . . .
"그 선생 유난히 너한테 친한척 하는거 아냐?"
"뭐?"
교문을 나서며 의연이 물은 한마디. 민형은 뜨끔하여 모르는채 어깨를
으쓱했다. 의연이 이녀석은 눈치가 빨라서 위험하단 말이야.
"그렇잖아? 보통 학생 개인한테 그렇게 물어보는건 이상하잖아? 게다가
넌 전학와서 너에대해 잘 모를텐데."
"담임이 반 학생한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거잖아."
이렇게 말하면서도 왠지 뜨끔한 민형. 그때 의연이 민형을 빤히 바라보
며 물었다.
"어떤식으로 관심을......?"
"음......?"
지긋한 눈으로 민형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의연. 갑자기 민형은 숨이 막
힐듯한 기분이 들어 등뒤로 주루룩 식은땀이 흘렀다. 너...... 벌써 뭔가
감잡은거냐. 긴장한 민형의 앞에서 의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마디 했다.
"어쨋든 빨리 집에 갔다와."
"그,그래! 그럼 좀 있다 보자!"
위기를 모면할 기회를 주는 의연. 민형은 이때를 놓칠세라 부리나케 가
방을 휘날리며 교문밖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의연은 팔짱을 낀채 그런
민형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쟤가 어디가 그렇게 좋지......?"
사돈남말하는 의연이었다.
PART-86
조용했다.
"......"
집에들러 옷을 갈아 입고 나온 독서실은 그야말로 침묵 그 자체였다. 민
형은 엄청나게 긴장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입구 앞에서 발을 구르며
망설였다. 들어가도 되나? 아무나 들어가도 되는걸까? 의연이는 저 안에서
공부하고 있을까? 이거 아무래도 못올곳을 온게 아닐까?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을 하며 민형은 상기된 얼굴로 입구 앞에 우두커니 멈춰서 있었다.
"야, 너 뭐해?"
"엉?"
그때 문득 등뒤에서 들려오는 의연의 목소리. 민형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 보았다. 민형의 등뒤에는 교복 차림으로 자판기 커피 한잔을 들고 서
있는 의연의 모습이 있었다. 의연이 입구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
던 민형에게 히죽 웃으며 물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어,어...... 너 어디 있었니?"
"나 요 옆에 있는 휴게실에서 너 기다리고 있었지. 너도 커피한잔 할
래?"
빙긋 웃으며 들고 있는 자판기 커피를 슬쩍 들어보이는 의연. 민형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독서실에 자주 출입하는 사
람들은 민형의 눈에는 모두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
조용하고 정체된 분위기. 칸막이는 그리 높지 않아 옆 사람의 숙인 머
리가 모두 보일 정도의 책상이 연달아 늘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책앞에
얼굴을 파묻은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그리 열심히 보는지 숨소리도 내
지 않고 연필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는 과자를 가득 쌓아 놓고 연
신 먹어대는 사람. 할 일 없이 책앞에서 음료수만 마셔대는 사람도 더러
눈에 띄었다.
"......"
오는게 아니었는데. 다시는 이런데 발도 들여놓지 말아야지. 민형은 속
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연습장을 펼치고 연필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알수
없는 위화감에 좀처럼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 괜히 왔
어! 어차피 공부도 안 할건데!
- 톡톡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의연이 손가락으로 민형의 어깨를 두드렸고 민
형이 고개를 들어 옆을 돌아 보았다. 의연이 민형에게 쪽지를 한 장 건네
주었다.
"그거 내일 볼 국사,영어,독일어시험 문제 간추린건데 너도 보고 싶으면
한 번 봐. 말해두는데 그거 외우고 시험에 안 나왔다고 나한테 뭐라 그러
면 안돼."
"어? 아, 고마워."
의연이 건네준 한 장의 종이 쪽지. 그 안에는 작은 볼펜 글씨로 빽빽하
게 무엇인가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걸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민형
은 막상 자료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자료의 사용법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
했다. 쪽지 안에는 민형이 모르는 말만 가득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 . . . . . . . . . .
30분이 지나고 이제 1시간. 민형은 좀이 쑤셔 미칠 지경이었다. 답답한
공기 엄청난 위화감. 스토리도 전혀 떠오르지 않고 몸은 근질 거렸다. 정
말 공부 잘하는 녀석들은 대단해. 어떻게 이런 분위기에서 몇시간은 물론
이고 밤을 새울 생각을 다 할 수 있을까? 민형은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가?"
그때 번개같이 묻는 사감선생 신의연. 민형은 땀을 삐쭉 흘리며 억지로
웃었다.
"응, 화,화장실......"
"독서실에서 화장실 들락날락 하는 사람은 실속없는 사람으로 보여. 그
거 알지?"
"...... 몰랐다."
정곡을 찌르는 대사. 의연이 넌 너무 똑똑해서 미운 여자야. 민형은 조
금 뾰루퉁 해서 힘없는 몸짓으로 책상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바깥에 나가
서 숨쉬기 운동이라도 하고 들어와야지 이대로는 머리가 터질것만 같았
다.
"......?"
그때 문득 민형이 지나가는 자리 옆에 익숙한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이
고 민형은 혹시나 해서 자리에 멈춰섰다. 어라 이녀석?
"......?"
민형은 설마하는 표정으로 슬쩍 목을 빼 고개를 파묻고 무엇인가를 열
심히 적고 있는 한 학생의 얼굴을 확인했다. 크헉? 그리고 민형은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이,이,이 자식이......? 이,이렇게 충격적일 수가......!'
민형은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는 입을 크게 벌린채 그대로 그학생
의 등뒤에 멈춰서 있었다.그때 등쪽에서 인기척을 느꼈는지 공부에 열중
하고 있던 학생 역시 이상한 듯이 뒤를 돌아 보았다. 그순간 학생과 민형
의 얼굴이 딱 마주쳤고 학생의 눈이 2배로 커졌다.
"어...... 어......?"
"자식 놀라긴......"
민형의 얼굴을 알아보고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학생. 민형은 자기 역시
의외였다는 듯이 피식 웃어 주었다. 그는 바로 유택천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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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네가 독서실에 다닐줄은 정말 몰랐는데...... 어,어쨋든 반갑다.
야......"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줄 모르는 유택천. 민형은 유택천과 나란히 휴게실
벽에 기대서 음료수 한잔씩을 나누고 있었다. 민형이 대꾸했다.
"난 오늘 친구따라 처음 왔는데 넌 여기 항상 오냐?"
"아니, 나도 고3때부터 시험때만......"
고3때 부터라...... 그래도 너는 나보다 낫구나. 자발적으로 독서실에
다닐 생각도 하고 민형은 왠지 우울해져서 음료수를 주욱 들이마셨다. 이
런 놈도 독서실에 다녀가면서 까지 시험 공부를 하고 있다니. 그때 택천이
민형에게 물었다.
"친구랑 왔다고? 누구랑 왔냐......?"
"어? 우리반 반장 있어 의연이라고. 아,참. 너 이거 볼래? 의연이가 나
보라고 준건데......"
대수롭지 않게 택천에게 건넨 의연이 준 시험문제 요약 쪽지. 순간 그
것을 받은 택천이 눈이 휘둥그래 졌다.
"어, 이거 신의연이가 요점정리 해준거라고......?"
"엉, 내일시험문제 요약이라던데. 틀려도 자기 책임 아니래. 근데 난 그
거 어떻게 시험에 써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어떻게 써먹다니!? 통채로 외워야지!?"
"뭐?"
생각보다 흥분하는 택천. 민형이 갑자기 오버 페이스인 텍천에게 눈썹을
실룩거렸고 택천이 말했다.
"신의연이면 우리 학교 전교1등이잖아! 그런거 절대 다른 학생한테 요약
해주지 않을텐데 너 재주 좋다!?"
"뭐어?"
저,전교 1등!? 전교 1등이라고 했냐 너? 민형은 갑자기 두눈이 휘둥그래
지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공부를 좀 할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전교 1
등일 줄이야! 여,역시 서울대지망은 차원이 다르구나 이거!
"그런데 그걸 통채로 어떻게 외워? 넌 외울 수 있어?"
묻는 민형에게 택천이 대답했다.
"밤새서라도 외워야지! 야 정리도 잘 됐는데......!? 그래봤자 연습장
한 장이잖아! 글씨는 작지만...... 내가 몇일동안 준비한거 때려치고 이
거만 외워도 평소보단 잘보겠다!"
"그,그 정도냐......?"
이것만 외워도 평소보다 잘 볼 정도란 말이지? 하지만 민형은 연습장
한장 분량의 요약을 통째로 외울 자신도 없었다. 지겹게 그걸 언제 외우
고 있어!
"그럼 그거 너 가져."
"뭐 진짜? 넌 안봐?"
"야, 난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
"그,그럼 이거 친구들이랑 돌려봐도 되나?"
의외로 순수하게 나오는 택천. 민형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피식 웃으
며 대답했다. 자식 그래도 의리는 있네?
"야, 그걸 뭐 나한테 물어보냐. 내가 너 줬으니까 네 맘대로 하는거지.
돌려보든 말든 사이좋게 잘보던 사이좋게 망치던."
"고,고맙다."
"훗......"
별게 다 고맙네. 이 녀석 생긴건 그렇게 안 생겨 먹었는데 시험에 신경
쓰고 있었단 말이지? 민형은 갑자기 택천이 귀엽게 느껴졌다.
......................................... . . . . . . . . . .
잠시후 자리에 돌아와 앉은 민형을 흘끔 바라본 의연이 다시 민형의 어
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민형이 고개를 돌리자 의연이 물었다.
"너 내가 준 쪽지 외우고 있니?"
"아,그거......?"
자식 틀려도 책임 안진다고 하더니 외우냐고 확인하는거 보니까 자신은
있는 모양이군. 역시 전교 일등. 민형은 별 생각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말이야 좀전에 택천이 만났는데 빌려줬어."
"뭐?"
민형은 정말 사심없이 내뱉은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의
연의 얼굴이 노래 지면서 갑자기 붉으락 으락 하게 눈썹이 떨리기 시작
했다. 그때 까지만 해도 민형은 별 생각 없이 연습장을 펼치고 있는 중이
었다.
## 고교 3년생의 사랑 ##
- 번외편 -
- 강희연 20세. 현재 서울 서장대학 문예 창작학과 2학년에 재학중.
꼭 이것 말고도 성욱이 알고 있는 희연에 관한 정보는 너무 많아 일일
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성욱은 지갑에 꽂혀 있는 예쁘장하지
만 조금은 도도한 표정의 희연의 사진을 쳐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
었다.
"그거 너네 옆집 누나지?"
"뭐,뭐야 너!"
갑자기 성욱의 옆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아는채를 하는 정호에게 깜
짝놀란 성욱이 붉어진 불을 붉히며 당황한 듯 외쳤다. 서정호. 그는 성욱
의 중학교때 부터의 친구이며 성욱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단짝이기도
했다. 정호는 재빨리 지갑을 주머니 안으로 집어 넣는 성욱을 향해 딱하다
는 듯이 혀를 차며 물었다.
"정말...... 그 여자는 네가 그런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걸 알고는 있
냐? 이른 저녁부터 사진이나 쳐다보면서 궁상떠는 꼴이라니......"
"시끄러, 이건 직접 받은거야."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흔드는 정호에게 성욱이 조금은 셀쭉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쏘아 붙혔다. 그말을 들은 정호가 의외라는 듯이 되 물었다.
"그래? 직접 준거란 말이야? 아마 소꿉친구이기 때문이겠지."
"사실은 예쁜 얼굴 두고두고 감상하라고 주더라."
"어련하겠냐......그 여자."
농담조로 중얼거린 성욱의 말을 가볍게 흘려 버리며 정호가 혀를 쯧쯧
찼다. 정성욱 18세. 현재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그는 어렸을 때 부터 이
웃집에서 함께 살아온 정희연이라는 여성을 좋아한다. 정호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성욱과 같은 학교에 들어오게 된 중학교 때 부터였다.
"그보다 안갈래? 엔진 다 식었지?"
정호는 이렇게 말하며 성욱이 걸터 앉아 있는 스즈끼 1500CC의 배기통을
손바닥으로 만져보았다. 조금은 뜨겁지만 훈훈해진 철통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현재 둘은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달리는 중 엔진의 열이 과해 근
처 놀이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다 18세의 고등학
생. 면허를 따고 한창 폭주로 신을 내기에 한창인 나이다. 정호의 말에 성
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토바이 의자에 다리를 걸쳐 매었다.
"OK, 새로 뽑은 1500의 감촉은 좀더 느껴 봐야지. 넌 못 타봐서 모르겠
지만 이건 550이랑은 승차감이 틀리다 이거야."
"시끄러, 이건 자가용이 아니라 오토바이야."
히죽 웃으며 은근한 자랑을 흘려 보내는 성욱에게 뾰로퉁한 정호의 시선
이 꽂혔다. 성욱은 그런 정호의 시선을 뒤편으로 받으며 천천히 오토바이
의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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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르르릉
크고 넓은 배기통에서 호쾌한 엔진 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느덧 시간은
지나 늦은 저녁, 성욱이 집에 돌아가는 지금은 이미 10시가 넘어 있었
다. 거대한 1500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으로 질주하던 성욱의
눈에 낮익은 여성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 성욱아!?"
마침 여성 쪽에서 성욱을 알아보고 신이나서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성
욱은 골목으로 들어가려던 오토바이를 멈추고 그 자리에 멈춰서 그녀가 오
토바이쪽으로 달려오기를 기다렸다. 흰 원피스에 두권의 책을 들고 있는
그녀는 다름 아닌 이웃 사촌이자 소꿉 친구인 강희연이였다.
"이거야 말로 운이 좋네! 나 집까지 태워줘."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냉큼 뒷 좌에 올라타며 희연이 외쳤다. 그 당당
한 태도는 어렸을 때 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그녀의 성품이었다. 성욱은
잠시 그런 희연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오토바이의 핸들을 붙
잡았다.
"대학생은 원래 이렇게 늦게 다녀?"
흰 원피스를 입은 희연은 예뻤다. 그런 그녀가 이른 늦은 시간까지 시내
를 돌아다니다 왔다고 생각하니 괜시리 마음이 착찹하고 꺼름직해 성욱이
물었다. 대학에서 미팅이니 소개팅이나 잔뜩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리
하면 더욱 비참했다.
"뭐야 임마? 야, 그러는 너는 고등학생이 밤 10시까지 오토바이 타고 폭
주냐? 거기다 수험생이."
"으, 그런 소리는 치워......"
한방 먹이려다가 거뜬히 반격당한 성욱이 싫은 소리를 하며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었다. 희연은 그런 성욱의 등뒤에서 잠시 성욱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다가 두꺼운 책 모서리로 성욱의 머리를 툭툭 쳤다.
"너 삐졌니? 이건 다 네가 걱정되서 하는 소리야. 이제 곧 대입이 다가
오잖아."
"삐지긴 왜 삐져. 네 잘 빠진 다리 감상중이야."
자신이 조금 죽어들어가는 것 같자 기분을 풀어 주려는 희연에게 얼른
반격하며 성욱이 중얼 거렸다. 동시에 둔탁한 책보가 성욱의 머리를 강타
하고 부어오른 희연이 손가락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누나라고 해."
"......"
새침한 표정으로 정색하는 희연을 바라보며 성욱은 잠자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누나라고 부르라는 말은 희연의 입버릇이다. 그러나 둘중 누
구도 그렇게 부르거나 불리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희연이 뭔가 기선을 잡
으려 할 때 자주 쓰는 수법일 뿐이다. 성욱은 관심 뚝 끊은 표정으로 오토
바이의 시동을 걸고 천천히 운전하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집
까지 들어가는 골목은 걸어서는 10분 씩이나 걸리는 긴 골목을 걸어 들어
가야했다. 오토바이만 있다면 큰 도로를 빠져나가 단숨에 집에 도달 할 수
있기 때문에 성욱은 희연을 만나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
다 요즘 어두운 밤 골목에는 치한이나 기타 등등이 자주 출몰하니까.
"오토바이 좋다. 크니까 타기고 편하고."
뒷 좌석에서 성욱의 허리를 껴안은채 희연이 중얼 거렸다. 성욱은 말이
별로 많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잠자코 그 소리를 듣고 있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2,3분 남짓의 시간동안 희연은
뭐가 그리고 궁금했는지 성욱에게 계속 말을 꺼냈다.
"공부는 잘돼?"
그 물음은 형식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성욱은 일단 대답했다.
"이 오토바이는 공부할 시간을 충분히 할애해서 산거야."
"오라, 날 태워주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
별 의미없는 말장난이 몇번 오가고 희연은 뾰루퉁해서 말문을 닫았다.
성욱은 언제나 특별히 속을 들여다 보이지 않는 과묵한 편이지만 불쑥불쑥
농담도 잘하고 어둡지 않은 성격에 좋은 아이다. 어렸을 때 부터 함께 자
라온 희연은 성욱의 그런 점을 잘알고 있었다. 물론 공부도 전혀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중학교에 올라와서 부터 공부에 흥미를 잃고
여러 가지 색다른 취미를 옮겨 다니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때
는 사진, 2학년때는 축구, 3학년때는 만화, 또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소
설,시, 등등 해서 지금은 이렇게 오토바이에 빠져있다. 무언가 열중하면
푸욱 빠졌다가 가볍게 흘려버리는 조금은 경솔한 성격일 수도 있었다.
"조금은 공부에 신경써도 좋을텐데. 넌 뭐든지 다 잘하잖니?"
"글쎄,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게 하고 싶을 뿐이야."
오토바이 뒤에서 희연은 조금은 재미 없는 대화를 꺼내고 말았다. 성욱
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정작 그녀의 이야기를 성욱은
흘려듣기 일쑤다. '누나' 라던가 권위 있는 사람의 대화가 아닌 친구의 걱
정 따위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
"뭐든지 다 잘해도 대학에 못가면 재미 없을걸."
"난, 대학에 안가도 괜찮아. 내가 갖고 싶은거만 가지면 돼."
"그게 뭔데?"
불쑥 본심이 나와 버린 성욱에게 희연이 의외라는 듯이 다그쳐 물었
다. 가지고 싶은 거라니? 성욱이 이런 식으로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
한 것은 드문 일이다. 성욱의 조바심을 나타내 듯 오토바이가 가속하자 희
연의 갈색머리고 휘날렸다.
"오토바이 말고 또 바뀌었니?"
"아니야, 이건 예전부터 가지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아직 손에 넣지 못
했거든."
"비싼가 보지?"
아무것도 모르는 희연은 성욱의 얼굴이 벌개진 것도 모르고 멋대로 중얼
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성욱의 얼굴은 뒷 좌석에 앉아 있는
희연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뭐,그다지 비싼건 아니야. 단지 남자들은 손에 넣기 좀 힘든거거든"
"알았다. 여자지."
한순간 성욱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고 말았다. 끼이이익- 큰 소리와 함
께 오토바이가 멈추었고 갑잡스럽게 규형을 잡은 성욱와 희연이 헉헉 거
리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놀라서 사색이 된 희연이 책으로 성욱의
얼굴을 내리치며 외쳤다.
"야 미쳤어!? 갑자기 서면 어떡해!!"
"그,그러니까......!"
희연은 희여대로 성욱은 성욱대로 어쩔줄 모르며 숨을 몰아 쉬웠다. 물
론 희연은 놀란 나머지 돌발적인 행동이었지만 성욱 쪽은 매우 당황한 듯
희연을 반히 쳐다보며 두눈을 희번덕 거렸다.
"어,어떻게 알았어?"
"뭘 어떻게 알아? 여자?"
정신을 딴데 두고 있던 희연이 문득 성욱의 말을 듣고 제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이 놀란게 그것 때문이었군. 에고 놀래라......
"뭐긴 뭐야! 남자가 돈주고 살 수 없으면 그거 밖에 더 있어!? 그러니까
난 너보다 나이가 많은 거라구."
"그,그럼......"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줄 모르는 성욱을 바라보며 희연이 재미있어 죽을
것 같은 속마음을 억지로 참으며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귀여운 녀석.
어느덧 성욱이도 연애를 할만한 나이가 되서 여자 때문에 고민을 하는구
나. 이렇게 생각을하니 한편으로는 재미있지만 한편으로는 괜시리 쓸쓸한
기분도 없지 않았다. 그때 의기양양한 얼굴의 희연을 향해 성욱이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여자가 강희연이라는 것도 아냐?"
그 한순간은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던 희연 역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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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있잖아. 성욱이 같은 남자는 어떻다고 생각해?"
"뭐? 옆집 성욱이 말이냐?"
식탁앞에서 문득 성욱의 이야기를 꺼내는 딸에 말에 놀란 희연의 어머니
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희연을 빤히 쳐다 보았다.
"글쎄, 특별히 나쁜 점은 없지만 여자로서 미래를 걸기엔 고민되는 남자
지. 현 시점에선 말이야."
"흐음, 그런가......"
희연은 수저를 코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의자에 기댔다. 희연의 어머
니가 얌전하지 못한 딸의 콧등에서 수저를 빼앗으며 한마디 했다.
"근데 왜 그런건 물어. 성욱이가 너보고 뭐라고 했니?"
"응, 아니 그냥. 가장 가까이 있는 남자니까."
"그 녀석이 딴생각 하기전에 누나라고 부르라고 해라. 모름지기 남자란
말이야......"
"엄마 그 얘긴 벌써 틀렸어. 성욱인 나보가 '야'라고 한단 말이야. 내
친구들까지 모조리 도매금으로 넘어가 버리는데 더 이상 강요해봤자 소용
없다니까."
"에구, 그녀석 커서 뭐가 되려는지. 야, 너 성욱이한테 기죽으면 안
돼. "
희연의 말을 들은 희연의 어머니가 혀를 쯧쯧차며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
를 계속 했다. 희연은 그런 엄마의 뒷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천정을 멀뚱멀뚱 쳐다 보았다. 성욱이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순간 가
슴이 뛸 듯이 두근거렸다. 아니 좋아한다고 말한게 아니고 갖고 싶다고 말
한 것이었지만...... 하옇튼 뭐든지 자기 중심적으로 표현한단 말이야 그
녀석은. 오죽하면 감정 고백까지 '누구누구를 갖고 싶다' 라고 얘기 하겠
는가. 한편으로 그런 성욱이 괘씸한 희연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오늘 저
녁은 도저히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아, 여심은 복잡해.
'그애가 나를 좋아한다니 후훗. 기분 좋다.'
대학에서 만난 남자가 어떤 멋들어진 프로포즈를 해온다고 해도 성욱의
말보다 멋질 것 같지 않았다. 무뚝뚝한 것 같지만 알고보면 재치있는 성욱
이 희연은 좋았다.
'녀석, 그래도 그렇지 내가 물건인가. 가지고 싶다니. 완전히 소유하고
말고를 따지는 것 같네.'
흥, 하고 콧바람을 일으키며 희연은 자기도 모르게 히죽히죽 웃었다. 성
욱 녀석은 지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
부터 같이 자라온 성욱과 새삼스럽게 사귀게 된다고 해도 무언가 크게 달
라지는 것 같은 느낌은 없었다.
'내일 만나면 뭐라고 얘기해 줄까.'
희연은 이것저것 복잡한 생각을 꿰어 맞추면서 허공을 응시한채 한참동
안 잠자코 앉아 있었다.
................................................... . . . . . .
"뭐? 나보고 서장대에 들어가라고?"
일요일 아침 성욱은 뜻밖에 희연의 요구를 받고 얼떨떨한 얼굴로 한자
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서장대? 서장대라니...... 얘가 지금 내 성적
을 알고 하는 말인가? 하지만 성욱의 앞에 서 있는 희연은 제법 진지 했
다.
"못들었어? 서장대 시험쳐. 거기 붙으면 우린 캠퍼스 커플이야. 그전엔
안 사귈꺼야. 내가 유치하게 고교생이랑 연애해야 되겠어?"
"흐,흐응...... 그러니까 대학만 들어가면 너는 내거다 이거야?"
"이봐,이봐...... 그런식으로 해석하지마 임마. 난 단지 사귀어 준다고
했을 뿐이야. 연하인 주제에 밝히기는......"
"엉덩이든 방뎅이든."
"너 중요한걸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태평하게 지껄이고 있는 성욱은 향해 상기라도 시켜줄려는 듯이 희연이
냉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네가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면 엉덩이고 방뎅이고 없는거야. 알아?"
"으음."
희연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성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쨋든 그날부터
성욱은 조금은 더 공부에 신경을 쓰게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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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성욱이가 대학에 들어왔다 이 말씀이지. 다 이 누님이 각
성제가 되어 준 덕분이라니까~ 호호호"
대학 친구들과 모인 술자리에서 희연은 기분좋은 얼굴로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녀의 옆에는 멋적은 표정의 성욱이 앉아 있었고 주위
에 친구들은 모두 재미있다는 듯이 희연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
다.
"대단해, 대단해 그렇게 금방 학과 공부를 따라 잡다니 사랑의 힘은 정
말 위대하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어쨋든 희연이 영계를 유독 밝히긴 하나 말이야."
친구들은 희연보다 두 살이나 어린 성욱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저
마다 부러움 반 당혹함 반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강희연 서장대 문예창작
학과 3학년. 정성욱 서장대 문예창작학과 1학년. 둘은 과 까지도 꼭같은 알
짜 커플이었다.
"어쨋든 폭주족도 대입 반개월 전에 마음잡고 공부하면 대학갈 수 있다
라는 명어를 남기고 만거라니까~ 귀여워 귀여워. 굉장히 누나랑 같이 공부
하고 싶었던 거지? 그렇지? 응?"
"상품이 좋았으니까."
"으와 대담하다~"
성욱의 머리를 토닥거리는 희연에게 성욱이 폭탄선언을 하자 주위에 있
던 친구들은 모두 엄청난 발언에 놀란 듯이 환성을 자아 내었다. 어쨋든
내신 최하의 정성욱. 대입 6개월 전부터 공부에 돌입. 서울 서강대에 재수
없이 합격했다는 신화를 이룩한 인물이다. 강한자만이 미인을 얻는다고 했
던가. 공부 잘해서 여자를 얻은 보기드문 케이스의 남자가 바로 정 모씨의
아들 모 성욱 군인 것이다.
"모름지기 좋은 상품은 남자를 강하게 만든다 이거지."
맥주를 한잔 들이키면서 성욱이 희연을 힐끔 바라 보았다.
"그렇지?"
이렇게 묻는 성욱의 엉뚱함에 희연과 친구들은 한바탕 웃어 버릴 수 밖
에 없었다.
.................................................... . . . . . . .
술자리를 끝내고 바깥으로 나온 희연과 성욱의 볼을 차디찬 겨울 바람이
가혹하게 감쌌다. 이곳은 네온이 번쩍이는 서울의 도심. 젊은 이들은 오늘
과 같은 추운 날씨 마저도 포근하고 향기로운 겨울 내음으로 느껴졌다.
"오토바이 안 가져오길 잘했지. 이렇게 추울 때 오토방이를 타면 그 바
람이 살을 에이고 남거든."
목도리 안으로 몸을 움츠리며 희연이 엄살을 부렸다. 반년전 자신이 말
한 대로 정말 대학에 합격 해 버린 성욱. 그는 지금 자신의 캠퍼스 컴플로
서 동생이 아닌 남자로서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그때 말이야."
"응?"
문득 성욱이 희연에게 말을 꺼내자 희연이 고개를 돌렸다. 성욱은 조금
은 멋적은 듯한 얼굴로 희연에게 물었다.
"그때 내가 대학에서 떨어졌으면 정말 우린 사귀지 못하는 거였어? 난
그게 굉장히 궁금해."
얼굴이 빨개져서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적거리며 성욱이 이렇게 물었다.
그와 함께 희연의 얼굴에 그 천진한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희연은 자기
도 모르게 빙긋이 웃었다.
"당연한거 아니야?"
"뭐?"
희연은 깔깔깔 웃으며 앞질러 뛰기 시작했다. 주위엔 행인들이 많았지만
아무도 달리는 희연을 가로 막지는 않았다. 한참을 뛰다가 희연은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뒤따라 오는 성욱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사귀었을거야."
"?"
아리송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성욱, 성욱이 무슨 소리냐는 듯 희연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후후 웃으며 두손을 입술에 가져간채 빙긋
이 웃었다. 그리고 성욱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히 속삭였다.
"우린 소꿉놀이 할때부터 사귀었잖아."
"뭐야?"
어이 없다는 듯이 피식 웃는 성욱을 살짝 밀어내고 희연은 웃으며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아 춥다. 우리 이대로 집에 갈꺼야?"
"글세......"
"멋없긴......"
흥, 콧방귀를 뀌며 희연은 천천히 걸었다.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을 걸으
며 그녀는 생각했다. 성욱을 만난 것. 그리고 앞으로 생길 여러 가지 삶.
한해를 끝내는 12월의 겨울, 올해 희연은 성욱이라는 좋은 친구를 잃은 것
이다.
"하지만 괜찮아."
혼자말로 중얼 거리는 희연을 바라보며 성욱이 고개를 갸웃 거리자 그녀
는 얼른 성욱의 팔을 붙잡고 팔짱을 끼며 활짝 웃어 보였다.
"대신 괜찮은 남자가 생겼잖아~"
그것은 앞으로 있을 많은 삶중에 하나로 속할 희연의 기쁨. 앞으로도 앞
으로도 크고 작은 만남이 희연을 기쁘게 할것이고 또 작은 기쁨의 연속으
로 인간은 살아 가게 될 것이다.
"근데 너 누나라고 불러야 돼."
그녀가 새침한 표정으로 성욱을 돌아보며 이렇게 한마디 했다. 한해가
지나가는 12월의 밤. 그날밤은 유난히 포근하기만 했다.
- FIN -
PART-87
"너 심하다 정말!"
"뭐,뭐가......?"
갑자기 민형을 독서실 밖으로 끌고나와 다짜고짜 이렇게 외치는 의연.
민형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 영문을 모른채 당황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 거렸다. 아니 도대체 왜 화를 내는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민형에게
의연이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냅다 외쳤다.
"누가 그 쪽지를 다른 사람 보여주라고 했니!? 너 보라고 준거잖아!
너만 보란 말이야 너만!"
"뭐,뭐......? 다른 사람 좀 보여주면 어때서......?"
"어떻다니! 너 내 성의를 무시하는 거냐!?"
"내,내가 언제 네 성의를 무시했다고 그래!!"
완전히 핀트가 맞지 않는 두사람. 의연이 주장하려는 것과 민형이 받아
들일 수 있는 범위는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 무엇보다 민형은 시험을 그다
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며 의연은 목숨과 뒤바꿀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
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얘기가 안된다.
"게다가 그걸 택천이 같은 깡패 자식한테 넘겨 줬다고? 그럼 넌 그거 다
외웠단 말이지!?"
아차! 민형은 한순간 뜨끔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미처 그걸 생각지
못했군. 연습장에 적힌 내용을 하나도 외우지 않은 민형은 더욱 당황되었
다. 이래서는 전혀 외울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잖아......
"자,잠깐 빌려준 것 뿐이야. 곧 받을꺼야 하하."
"빨리 찾아와! 당장!"
"아,알았어......"
정말 화가 났는지 이마에 핏발까지 세우는 의연. 민형은 왠지 더 이상
의여을 자극해 보았자 좋을 것이 없을 것 같아 슬금슬금 독서실로 돌아갔
다. 민형의 등뒤에선 화가 치밀어 어쩔줄 모르는 의연이 씩씩 거리며 민
형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 . . . . . .
"야."
민형이 택천의 등뒤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자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던 택천이 고개를 돌렸다.
"어, 너냐? 왜?"
묻는 택천에게 민형은 왠지 말하기가 쑥쓰럽고 짜증이나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까 그 쪽지 다시 줘."
"엉?"
"아까 그거 다시 달라고."
"넌 필요 없다며?"
"필요하니까 다시 줘...... 너 볼거면 얼른 배껴......"
왠지 의연이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에 민형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조급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택천은 대충 사정을 알았
다는 듯이 히죽 웃으며 민형에게 연습장을 넘겼다.
"자,사실은 나 벌써 3번이나 배꼈어. 적으면서 외웠거든."
"그래? 잘됐다. 줬다가 다시 뺏어가서 미안한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서 그러니까 이해해라."
"신경꺼. 그 정도로 무슨......"
생각보다 마음이 넓은 놈이군. 민형은 히죽 웃으며 연습장을 챙겨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의연이 차가운 눈으로 민형을 흘겨 보았고 민형은
고개를 숙이고 연습장에 있는 내용을 공책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제서
야 의연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자기 공책에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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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에 갔다 왔다고요?"
집에 돌아오자 지영은 매우 의외라는 듯이 민형을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
다. 민형은 매우 지친 듯이 의자에 털썩 주저 앉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
들었다.
"지겨워서 죽는줄 알았어요. 숨막히기도 하고......"
"민형씨는 독서실에 어울리는 타잎이 아니예요. 그래도 시험을 잘 볼 생
각은 있군요?"
웃으며 묻는 지영. 민형은 하소연 하듯 대꾸했다.
"물론 생각은 있지요. 머리가 안따라 주니까 그렇지."
"그래요? 어디봐요 시험 범위."
시험범위를 보자는 지영에게 범위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고 민형은 바닥
에 주욱 엎드렸다. 아...... 역시 집이 편하긴 편하다. 지영씨의 무릎을
배고 누우니 그대로 스르륵 잠이 들것만 같아 민형은 눈을 감았다. 그때
지영이 손가락으로 민형의 볼을 꼬집었다.
"아직 자지 말아요."
"예? 왜요......?"
약간 불만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 민형. 그의 위에서는 풍만한 가슴
위로 범위를 살펴보는 지영의 턱이 보였다. 지영이 물었다.
"여기 이 연습장 가득 적혀 있는건 뭐예요?"
"아,그건 우리반 반장이 나 보라고 요점 정리 해 준거예요."
"그래요......?"
지영이 흐응 고개를 끄덕이며 범위를 내려 놓고 의연이 준 연습장을
잠시동안 살펴 보았다. 지영이 차분하게 연습장에 있는 내용을 다 살펴
본후 민형의 교과서와 비교해 보았다. 민형은 관심을 뚝 끊고 지영의 허
벅지에 얼굴을 옆으로 힌채 조금이라도 더 붙어 보려고 애교(?)를 부리
는 중이었다. 그때 지영이 다리를 살짝 빼냈다.
"민형씨 우리 공부 하죠."
"네!?"
갑자기 왠 봉창 두드리는 소리! 공부라면 지금까지 독서실에서 지겹게
하고 왔는데! 집에까지 와서 공부하잔 소리를 듣게 생겼어요! 민형은 붉으
락 으락 한 얼굴로 못마땅한 듯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영이 웃으며
말했다.
"영어와 독일어는 여기 요점 정리된걸 위주로 하면 되겠어요. 정리가 아
주 잘됐네요. 문제를 내는 선생의 유형도 이 정도면 파악할 수 있고요. 공
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군요."
"......?"
그런 것을 한 번 보고 그렇게나 알 수 있단 말이야? 민형은 조금 신기하
긴했지만 어쨋든 더 이상 골치아픈 문장을 들여다 보고 싶지 않았다. 민형
이 귀찮다는 듯이 돌아 누웠다.
"어휴 난 머리 아파요. 그리고 그런거 외우지도 못해요."
"외우는건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제가 찍어 주는 대로 외우기
만 하면 틀림없이 성적이 오를 거예요."
보통때와는 다르게 조금 끈질기게 권유하는 지영. 민형은 벌떡 일어나
앉아 지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음흉하게 웃었다.
"지금 난 공부 보다는 지영씨 예쁜 몸에 관심이 더 가는 중이예요."
"안됐지만 안되겠네요."
지영을 슬쩍 안아 보려는 민형. 그런 민형에게서 살짝 빠져나가며 지
영이 빙그레 웃었다.
"학생의 정신상태가 교사의 몸매에 향해 있으면 공부가 되겠어요? 청소
년 탈선의 주범이예요."
"이것봐요 지영양......"
갑자기 왠 선생 놀음이야? 그런건 지겹게 했으니까 이제 그만 하자구
요! 민형은 머리를 긁적 거리며 짜증섞인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다고요......"
"공부하는 학생은 누구나 다 피곤해요."
"어휴 도대체 뭘 하자는 거예요?"
참다 못한 민형이 짜증을 터트렸으나 지영은 역시 능숙한 강사 타잎이
었다. 절대 화를 내지 않고 유순하게 웃으면서 민형의 머리 위에서 민형
을 리드했다.
"시간을 조금만 투자해서 내가 외우라는 것만 외우면 되는 거예요. 그것
도 못해요?"
"난 지금 졸려요! 그리고 콘티도 짜야 한단 말이예요! 영감을 위해서 차라
리 한 번 안아주는게 어때요?"
"학생은 공부가 우선."
부담없이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흔드는 지영. 영락없는 여교사 타잎이었
다. 민형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비척비척 지영의 옆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
였다. 그래요 돌도 깍으면 다이아몬드가 된다고 하던데요. 한 번 해보자고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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