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3년생의 사랑 14부
민형은 유흥가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진담을 빼고 있었다. 설마 지영씨가
이런 곳에서 얼쩡거리고 있을거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민형은 구석구석을 다 돌아 보며 열심히 뛰어 다녔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 민형은 자포자기 하여 대로에 버티고 선채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오해를 안고 나갔으니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
는 민형. 그는 1초라도 빨리 지영을 눈앞에 데려다 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제기랄!! 도대체 어디있는 거야!!!!"
짜증이 날대로 난 민형이 유흥가 한 복판에서 허공을 향해 꽥 소리를 질
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 수근 거리며 민형을 쳐다 보았다. 하지
만 짜증이 난 민형은 수치심 같은 것은 무시하고 있었다. 지영씨...... 지
영씨 도대체 어디있는거야!! 빨리 나오란 말이야 해명할테니까!!
"야, 너 목소리 큰거 자랑하냐?"
"웃기는 자식이네. 공공질서도 몰라?"
"......!?"
화가 날대로 난 민형의 뒤에서 순간 다가오는 몇몇의 사내 녀석들. 그들
은 보기에도 눈꼴시리게 차려입은 의상을 건들거리며 민형의 앞으로 다가왔
다. 흔히 이런 거리에서 삐끼를 하거나 고리를 하는 중고교 중퇴생들이 민
형의 행동에 비위가 거슬려 시비를 걸로 온 모양이었다. 그들을 보자 마자
민형의 이마에 삐죽 핏발이 섰다.
"짜샤. 뭘 아려봐......? 짜식....... 푸웩!"
한순간 민형의 앞에서 건들거리던 삐끼중 한명이 그대로 면상을 정통으
로 얻어 맞고 나가 떨어졌다. 코피가 터져 쓰러지는 자신의 친구를 보며
놀란 삐끼들이 주먹에 피를 묻힌 민형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이자식!!"
"미친 자식을 다 보겠네!! 야 밟어!!!"
"......!!!!"
흥분한 삐끼들이 민형을 향해달려 들었고 민형은 그대로 몸 싸움에 뛰
어들며 치고 터트리는 자신의 주먹을 휘둘렀다. 주위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흠칫흠칫 거리를 두고 피해갔고 여자들이 끔찍하다는 듯이 수근 거렸다.
몇몇의 구경꾼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고 바닥에는 민형에게 시비를 걸었던
삐끼들이 하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 . . . . . . .
"응? 왜 또 시끄럽지......?"
호프를 나오던 지영과 김 선민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터에서 왁자지껄
들려 오는 웅성거림을 눈치채고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 쌓인 가운데 툭탁 툭탁 주먹이 오고가는 소리가 지영에 귀에 들어왔
다.
"저런, 또 싸움인가......? 하옇튼 이런 거리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
다니까......"
"......"
혀를 차는 김선민의 말을 들으며 지영은 물끄러미 시끄러운 곳을 쳐다
보았다. 대충 보니 싸움은 끝난 것 같고 당사자 들과 경찰들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듯 했다.
"......"
싸움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관심이 가는 가 싶더니...
... 지영은 자신이 혹시 잘못 보지 않은 것이 아닌가하여 눈을 한 번 문질
렀다.
"......!?"
그리고 지영은 가슴이 철렁하여 얼굴색이 하얘지고 말았다. 구경하는 사
람들에게 둘러쌓여 경찰관과 말다툼을 하고 있는 당사자는 다름아닌......
'미,민형씨!?'
다름아닌 애물단지 정민형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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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참 뭔 헛소리예요!! 이 자식들이 먼저 시비 걸었다니까!?"
"그러니까 서에 가서 얘기 하자니까!!"
"아 씨팔! 진짜 우리 민주경찰 말 안통하네!? 멀쩡한 시민의 자유 시간
을 뺏을 권리가 있어 니들이!? 야 이 짭새 자식아. 나 지금 짜증나서 미칠
지경이니까 이 깡패 자식들이나 잡아 가란 말이야!!!!"
얼굴이 시뻘개져서 외치는 민형. 보기만 해도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를 알수 있을 것 같았다. 지영과 사귀는 동안은 별로 보여주지 않은 모습
이지만 성질 급하고 난폭한 습성은 아직도 민형의 몸 깊숙한 것에 배어 있
었다.
"난 시비에 걸린 것 뿐이라니까 말귀 못알아 들어 이 짭새야!?"
"뭐,짭새......!? 이, 이 학생이 정말......"
거친 말을 내뱉는 민형에게 젊은 경찰관 두명이 흥분하여 얼굴이 빨개
졌고 쓰러져 있던 삐끼 세명도 얼른 분위기를 파악하고 변명을 하기 시작
했다.
"경찰 아저씨 그 자식 깡패 새끼예요!! 저희는 피해자예요 치해자!"
"그 자식 전문적인 깡패 녀석인지도 몰라요 잘 조사해 주세요!"
얻어 맞은 상처를 만지자 거리면서도 열심히 지껄이는 삐끼들. 그들을
보고 있는 민형의 흥분은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일단 서까지 가서 얘기 하자니까요!!"
"정말 말 안 통하네! 이거 안놔!!"
"잠깐만요!!"
"!?!?"
한참동안 흥분해서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민형. 그때 익숙한 목
소리가 경찰과 민형 사이에 끼어 들었고 깜짝 놀란 민형이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렇게 찾아 해매던 지영. 바로 그녀
가 와 있었다.
"지,지영씨!"
민형이 지영의 이름을 외쳤으나 지영은 민형은 아랑곳 하지 않고 경찰
들에게 다가가 머리를 굽신거리며 사과하기 시작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경찰 아저씨. 그런데 무슨 큰일이라도 저질렀나요?"
지영이 사근사근하게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경찰도 조금 말이 통하
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는지 지영에게 물었다.
"누구시죠?"
"아,예 저는......"
문득 대답을 하다가 말문을 멈춘 지영. 그녀가 멍한 얼굴의 민형을 흘끔
쳐다보고 무엇이 생각났는지 뾰루퉁한 표정으로 경찰관에게 고개를 돌렸
다. 뭐지 저 표정은......? 갑자기 나타난 것도 황당한데 말도 안걸다니?
민형은 악에 받치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지영을 노려보았다. 그때 지영
이 난처하게 웃으며 경찰들에게 입을 열었다.
"제 동생입니다만......"
"아, 그래요? 그럼 이쪽과 이야기 하는게 빠르겠군."
지영의 한마디. 경찰관의 대답. 그리고 민형은 얼굴이 새빨개 져서 뎃으
락 뎃으란 한 표정으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주먹을 움켜 쥔
채 입을 떠억 벌렸다. 동생? 동생이라고......? 어떻게 저런 말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가 있지!?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사건의 진의를 조사하기 위해 잠깐 서에 가주셔
야 하는데요. 당사자가 저렇게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아, 죄송합니다! 제가 데려 갈께요. 죄송 합니다 경찰 아저씨. 민형
......!?"
민형의 이름을 부르며 그제서야 고개를 돌린 지영의 앞에서 화가나서 시
뻘개진 민형의 얼굴이 있었다. 하지만 지영은 약간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얼굴을 내려깔고 이렇게 말했다.
"아."
"......"
좋아 갈때까지 같다. 민형은 화산이 머리 끝까지 올라갔다가 그 주위에
서 맴도는 느낌을 받았다. 민형아! 민형아라고!? 동생도 부족해서!? 이거
정말 미치겠네!!!! 민형은 자칫 이성을 잃었다간 경찰이고 뭐고 다 때려
돕히고만 싶은 심정을 참으며 화가 나서 씩씩 꺼렸다.
"......"
지영은 그런 민형이 화를 내는 이유를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른척 하고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니? 네가 먼저 때린거 아니지!?"
아마도 먼저 때렸을 확률이 너무너무 크다고 생각하면서 지영은 조바심
을 내며 물었다. 지금 이렇게 말하면서도 지영은 솔직히 후환이 두려웠
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민형씨가 이해해야 한다는 구실을 만들기
엔 나쁘지만은 않았다. 솔직히 누나라고 불린데에 대한 복수도 조금 있긴
하지만...... 아주 조금.
"저...... 무슨 일 있습니까?"
"......?"
그때 구경꾼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 긴선민. 그를 보자 마자
지영의 얼굴이 파래 졌다. 아니 저 남자가 왜 따라왔지!?
"지영씨? 여기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네......!? 아, 그게......"
큰일났다!! 어떡해!! 말을 거는 김선민에게 대답하는 순간 지영은 가슴
이 싸늘하게 식어서 천천히 민형의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
아니나 다를까 민형은 마치 저승사자 같은 표정으로 우두커니 지영을
바라보고 있었고 지영은 눈물이 찔끔 솟았다. 난 몰라 어떡해~
PART-79
"뭐예요? 친동생도 아니잖습니까?"
"아, 그게요...... 같은 집에서 자취해서 잘 아는 사이거든요. 어차피
보증인만 되면 되는거니까 제가 보증을 서겠습니다 경찰 아저씨."
파출소에서 연신 담당 경찰관에게 고개를 숙이며 지영이 일을 해결하고
있는 동안 민형은 욹그락 뎃으락 뚱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고개를 돌리
고 있었다. 민형은 지금은 헤어지고 없는 김선민이라는 남자를 생각하며
끓는 속을 잠재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서 처음 보는 남자랑 술을 마셨다 이거지...... 후우......"
용납할 수 없어. 용납이 안돼!!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 아는 사람도 아
니고! 처음보는 사람이랑! 그것도 남자랑!! 콜라도 아니고 술을 마실 수
있냔 말이야!! 민형은 지영의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자기 모르게 외간 남자와 함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열이 뻗쳤다.
"그럼 여기에 지장 찍으시고 먼저 시비를 건 녀석들은 저 녀석들 이니까
보내드리는 겁니다. 보호자도 있으니까 믿고 보내 드리겠습니다. 괜찮겠
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경찰 아저씨."
다행스러운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는 지영에 뒤에서 못마땅한 표정의
삐끼들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에이씨! 먼저 시비 건 사람은 저 사람 이라니까요!"
"맞아요! 우린 피해자 라니까요!"
건들거리며 이렇게 외치는 삐끼들을 향해 경찰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시끄러 이 자식들아! 너희들 벌써 몇번째야! 확 집어 넣어 버린다!"
"......"
경찰의 이야기를 듣자니 녀석들은 꽤 이 근방에서 유명한 녀석들인 모
양이었다. 민형은 데리고 왔던 경찰관 한명이 지영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
서는 민형을 향해 쓴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했다.
"거 젊은 사람이 성질 좀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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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출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면서 민형은 연신 화가 난 채였다. 지영
은 앞장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는 민형의 뒤를 따르며 자
신의 경솔했던 행동을 후회했다. 사실은 화가 날 사람은 바로 나인데...
...! 라고 생각해 보았자 이제 와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
다. 지영은 불안한 마음으로 민형의 뒤를 따르며 숨을 죽였다.
"......"
민형은 민형대로 꽤 화가 나 있었다. 분명 집을 나와 지영을 찾아 다닐
때만해도 지영을 만나면 해명하고 잘 풀어갈 심산이었다. 하지만 거리에서
지영과 김선민이라는 남자를 본 후 기분이 싹 가셔버렸다. 시시하게 길거
리에서 만난 남자랑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니 민형은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풀리지 않아 우뚝 멈춰섰다. 반사적으로 뒤 따라 오던 지영도 멈춰섰고 민
형이 뒤를 돌아보았다. 민형은 굳은 얼굴로 지영에게 먼저 한마디 했다.
"삐져서 뛰어 나가길래 어디갔나 했더니 결국 술집이예요?"
"......"
민형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지영은 한 번도 민형이 자신에
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겁이 나서 잠자코 있었
다. 민형은 답답한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채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민형이 말했다.
"그럼 내가 어떻게 말했으면 좋겠어요? 친구도 아니고. 학교 담임 이었
잖아요! 네, 제 애인입니다! 한 집에서 함께 삽니다. 그렇게 얘기 하란 말
입니까?!"
그,그런게 아니잖아요! 지영은 냉큼 대꾸하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나
온 대사를 꿀꺽 삼켜 버렸다. 지영이 화가 난 것은 자신을 누나라고 변명
한것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좀 화가 나긴 하지만 진정 지영
을 화가 나게 한 것은 송미라 라는 젊은 여선생의 존재였다. 그것을 민형
에게 납득시키는 것 자체가 조금 유치한 것 같아 지영은 입을 다문 것이
다. 물론 민형의 말을 들어주고 화해하려는 의사가 더 강했다. 지영이 그
런 생각으로 아무말 않고 있자 자신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는
지 민형이 덧붙혀 말했다.
"뭐, 좋아요. 여자들이 다 그렇죠 뭐. 삐져서 나간 것 까지는 좋았다 이
거예요. 그러니까 나도 찾으러 나온거고. 그런데......"
문득 낮아지는 민형의 목소리 한순간 민형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부릅 뜨고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술집이라니!! 그것도 처음 보는 남자랑!! 지영씨 그 정도 밖에 안돼
요!?"
"......!"
엄청 큰 목소리. 그것은 지영을 놀라게 했고 민형이 내뱉은 말은 지영에
게 상처를 주었다. 그정도 밖에 안되다니. 마치 싸구려 여자 취급하는 민
형의 말. 지영은 민형의 심한 말에 그만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지영이 변
명도 하기 전에 성난 민형은 계속해서 지영을 윽박질렀다.
"전에 지훈형이 왜 그렇게 지영씨를 구속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애! 아
무하거나 헤헤 거리며 술을 마실 정도니 걱정이 되지 않겠어요!? 나는 안
그래요! 적어도 나는 처음 보는 여자를 따라가는 그런 짓은 안해요!"
엄청 심한 말. 지영은 자기도 모르게 두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저렇
게...... 저렇게 말할 수가...... 그래도 남은 화해할 생각으로 화가나는
것도 접어두고 잠자코 있었는데...... 저렇게 싸구려 여자 취급을 하다니
...... 지영은 무엇보다 민형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허무함을 느끼고 큰 실망에 빠졌다. 지영이 아무말 안고 주루룩 눈
물을 흘리자 민형은 자신이 좀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잠깐이나마 말을 멈추
었다. 하지만 민형의 얼굴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은 채였다. 오히려 눈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태도가 마음에 안든다는 얼굴로 가혹하게 인상을 찡
그리고 있었다.
"울면 뭐가 해결되요? 울지 말아요! 뭐 잘했다고 울어요!? 진짜 짜증나
는 사람은 바로 나예요 나!!"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하소연 하듯이 외치는 민형. 하지만 지
영은 더 이상 민형에게 아무런 할말도 없었다. 변명할것도 없고 하고 싶지
도 않았다. 지영은 그대로 두주먹을 꽉 쥔채 눈물을 참기 위해 욱욱 거리
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휴......"
민형이 짜증나고 답답한 얼굴로 돌리며 크게 탄식했다.
........................................... . . . . . . . . .
"에이 씨팔!!"
민형은 방문을 주먹을 크게 후려치며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뿌렸다. 짜
증나고 성질나서 더는 못해 먹겠다! 민형은 속도 상하고 자신의 행동에 회
의도 느껴 머리속에 터질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온 지영은 방에 틀어 박혀
아직도 울고 있는 듯 했다.
"질질 짜서 뭐 어쩌겠다고!! 에이!!"
민형의 진심은 지영과 화해하는 것이었다. 조금 심하게 말하기 했지만
그것도 다 지영을 독점하고 싶은 투정에 속할 뿐이었다. 지영을 좋아하는
마음이 강해서 말도 험하게 나온것이고 자신이 좀 심하게 말한다 해도 지
영은 자신의 마음을 아니 받아 줄 것이라 생각했던 터였다. 하지만 정작
지영은 단단히 마음이 상한 모양이고 그런 모습을 보니 민형의 속은 두배
로상해 버렸던 것이다. 민형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방에 털썩 주저 앉았
다.
"크으......"
기분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며 호흡을 가다 듬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지영
의 크게 마음 상한 얼굴이 떠올라 민형을 못 견디게 만들었다.
"엄마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젠장! 젠장 젠장 젠장!!!!!!"
민형은 애꿎은 배게만 열심히 패대기 치기 시작했다.
.................................................... . . . . . .
지영은 이불에 얼굴을 묻고 큰 소리로 소리내어 울었다. 지금까지 많은
슬픈일이 있고 괴로운 일이 있었지만 오늘 민형에게 들은 말만큼 지영을
서럽게 만든 일은 드물었다. 누구보다도 민형씨를 좋아하고 그를 따르는
데 당사자인 민형은 지영 자신을 마구 몰아 붙히고 조금의 이해도 해주지
않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게다가 여자로서의 지영의 입장을 조금도 생각
해 주지 않는 가혹한 말로 그녀를 몰아 붙혔다. 오빠에게 어떤 욕을 들은
것 보다도 민형의 냉혹한 한마디가 훨씬 더 지영의 가슴을 찢었다.
"흑흑...... 흐흐흑"
얼굴은 묻은 이불이 축축하게 젖고 눈이 빨갛게 충혈될 정도가 됐는데도
지영의 울음을 그칠줄 몰랐다. 지영은 자신이 한 모든 행동이 너무나 후회
스러웠다. 애초에 힘든 연애라는 지혜의 말도 떠올랐다. 모든 것을 노력해
서 열심히 해보려고 하던 지영의 마음은 아픔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흐으윽...... 으흐흐흑......."
연신 이불에 고개를 파묻은채 지영은 울고 또 울었다. 이 밤이 다 가도
록 눈물을 흘려도 그녀의 눈물샘은 마르지 않을 듯 했다.
........................................................ . . . . .
'요 녀석이 들어 왔나?'
샤워를 마친 송미라는 쇼파에 앉아 민형의 집 전화 번호를 돌렸다. 한
참동안 기다려도 민형이 돌아오지 않아 일단 집으로 돌아온 그녀였다. 돌
아와 곧장 전화를 걸었는데도 받지 않고 해서 일단 샤워를 끝맞치고 다시
걸어보는 참이었다.
- 뚜우우우우우
- 뚜우우우우우
"......"
몇초동안 신호음이 울리고 저쪽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 딸칵
"!"
<< 여보세요? >>
왠지 모르게 잔뜩 날카로워진 민형의 목소리. 송미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민형이니?"
PART-80
"......?!"
수화기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것은 모든 사건의 시초자이자 악의
원흉. 송미라 선생이 분명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챈 민형이 착 가라
앉은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안녕하세요......"
<< 얘는 무슨 안녕하세요니? 웃기게. 바로 얼마전에 헤어 졌는데. 근데
누나는 찾았니? >>
짓궂게 묻는 송미라의 질문. 민형은 뚱해서 대답했다.
"찾았어요."
<< 그래, 사이좋게 지내렴. 부부 싸움은 칼로 물배기라는데 너무 다투지
말고~ >>
"......"
으으......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사람을 열받게 만드는 대사. 자기가 뭐
얼마나 나이를 먹었다고 '사이좋게 지내렴~' 지랄!! 민형은 욕이라도 한마
디 던져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용건 없으면 빨리 끊으란 말이야. 민형의 퉁명스런 음성은 그런 뜻을 내
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송미라는 이미 민형의 기분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
다. 그녀는 민형을 약올려 주기 위해 일부러 아픈 곳을 긁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시치미를 뚝때고 대답했다.
<< 어머, 내 정신좀 봐. 할말이 있는데 깜빡했네. >>
"할말이요?"
뭐 종례때 전달사항을 빼먹어서 직접 접화로 알려주려는 것은 아닐테고
또 무슨 할말이 남았다는 거지? 왠지 요즘 따라 송미라 선생님의 말 한마
디 한마디에 뜨끔함을 느끼는 민형이었다. 그때 미라가 말했다.
<< 아까 너 없을 때 전화가 왔는데 말이야. 지혜라는 여자가 너를 찾더구
나. >>
"지혜씨요?"
지혜씨? 이런 발칙한 것...... 미라는 왠지 약이 올랐으나 꾹참고 태연
스럽게 대답했다.
<< 그래 지혜씨인지 지혜양인지가 어쨋든 너를 찾더라. 전화해달래. >>
"그래요? 그말 전해 주시려고 일부러 전화 거셨어요? 고맙습니다."
<< 뭐 고맙긴 얘. 메모로 남기려다가 이게 나을 것 같아서. >>
"어쨋든요."
지혜에게 전화가 왔다면 만화건에 대해 얘기해 줄것이 있어서 일 것이
다. 민형은 갑자기 기대감에 부풀어 뚱한던 목소리가 사라졌고 그 태연함
이 미라에게 묘한 약오름을 선사해 주었다. 자식이 왜 갑자기 태연해 졌
지? 역시 숨겨둔 여자 친구 였던 것인가!! 미라는 되려 약이 올라 약간 목
소리가 가라 앉았다.
<< 그럼 끊는다. 내일 학교에서 보자. >>
"얘 고맙습니다."
- 딸칵
민형의 조금 흥분한 듯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미라는 수화기를 내려 놓
았다.
"......"
미라는 잠시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모르지만
속이 상했다. 왜지? 왜지? 왜지?
"쳇, 내일 학교에서 괴롭혀야 되겠어......"
미라는 손톱을 깨물며 괜시리 아무죄 없는 민형을 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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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리리리리
- 피리리리리
서울에 있는 지혜의 원룸 오피스텔. 주위는 어둡고 희미하게 보조등이
들어와 그나 침대 주위만을 희미하게 비추이고 있었다. 침대위에 알몸인
채 옆으로 드러누워 있는 지혜의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전화기가 울리
고 지혜가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누구야......?"
<< 아, 지혜씨 저예요. 민형이예요. >>
"어, 민형씨구나...... 아까 전화했는데."
<< 네, 그래서 전화 건 거예요. 무슨 일로 전화 했어요? >>
사뭇 기대가 서려 있는 민형의 목소리. 전화를 받은 지혜의 말을 들은
지훈이 지혜에 옆 자리에 누워 있다가 기지개를 펴며 고개를 돌렸다.
"민형이야?"
묻는 지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혜가 머리 맡에 있는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지훈에게 담배를 빼앗겨 버렸다.
"또 피냐?"
"왜그래?"
"나도 하루에 두갑밖에 안피는데 넌 3갑째다 3갑째."
"이리줘. 유치하게?"
"빨리 전화나 받아."
"......"
지훈이 담배를 뚝 분질러 쓰레기 통에 집어 넣자 지혜가 눈을 부라렸으나
일단 전화를 받아야 하겠기에 그녀는 다시 수화기에 입을 갔다.
"민형씨?"
<< 아, 예. 무슨 일 있어요? >>
"아니 뭐 잠깐. 그보다 아까 전화 말인데."
<< 예. >>
무슨 말이 나올까? 두근 두근. 민형은 자못 긴장하여 지혜의 말을 기다
렸다. 지혜의 대사가 떨어지는 몇초간이 몇시간 처럼만 느껴졌다. 이윽고
지혜가 입을 열었다.
"민형씨 만화를 격주 웨이브에 팀장한테 넣어 봤는데 일단 민형씨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해서."
<< 저,저를요? 저를 보고 싶다고요? >>
"응, 일단 한 번 뭔가 만들어 보고 싶은거 같애. 확실한건 아니고."
<< 그,그래요? >>
지혜의 말을 들은 민형의 심장이 두근 두근 덜렸다. 잡지사 팀장이 자신
의 그림을 보고 자신을 만나보고 싶어한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그리 대단
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때의 민형에게는 너무나 긴장되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토요일 쯤에 시간이 있나 해서......"
<< 있어요 있어! 토요일날 서울로 올라가면 되지요? >>
"응, 그렇긴 한데 너무 큰 기대는 같지 않도록 해. 원래 잡지사 라는게
말이야......"
<< 알아요 괜찮아요! 그보다 고마워요 지혜씨 수고해줘서 >>
"뭘, 그럼 궁금한 점 있으면 연락하고. 그때 보도록 해요."
<< 네! 고맙습니다! >>
신이 난 민형이 크게 외치고 전화를 끊었고 지혜도 수화기를 내려 놓고
침대에 털썩 들어 누웠다. 그런 지혜에게 지훈이 닥달했다.
"야, 지영이는 잘 있는지 좀 물어보지!"
"출가외인 신경끄셔. 본지 몇일이나 됐다고."
"뭐 출가외인? 내 동생이야!"
"됐어. 빨리 담배 내놔."
"......"
지혜의 무시무시한 눈. 지훈은 더 이상 얘기 했다간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아 조용히 담배 한 개피를 지혜에게 건넸다. 지혜는 라이터로 담배 끝에
불을 붙히며 깊게 연기를 빨아 들였다.
"그런데 그 잡지사 팀장이 민형이 그림을 보고 좋다냐?"
"뭘, 신인 그림이야 다 그렇지. 그런데 민형씨는 그림이 너무 약해. 요
즘 잘 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기자 한명 붙혀서 만들어 보려고 시
도는 하겠지만 잘될 생각은 말아야지. 일단은 경험이란게 중요한 거니
까."
"그러냐......"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군. 엄청 기대하고 있는 민형에 비해 지혜의 대
답은 냉혹하고 현실적이라 지훈은 조금 실망했다. 민형이 지영과 사귀고
있는 만큼은 적어도 민형이 녀석이 잘 되야 할텐데...... 지훈은 골치아
픈 얼굴로 지혜의 옆에 같이 털썩 드러누웠다.
'잘 있겠지......'
지훈은 민형이 어련히 잘 해줄것이라 생각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PART-81
민형은 지영과 어서 화해하고 싶었으나 지영의 상처는 꽤 컸는지 좀처럼
민형에 앞에 얼굴을 내놓지 않았다. 그렇게 서먹서먹 하게 몇일이 지나고
민형은 몇번이나 지영에 방에 놀러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그
녀는 그때마다 피곤하다면서 이불을 뒤집어 쓰거나 반대쪽으로 엎드려 누
웠다. 지영은 생각중이었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 처신해야 하는건지를..
....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토요일이 다가왔고 민형은 지영과 완전히 화해
하지 못한채 오후에 서울로 올라갔다.
"......"
고속버스 안에서 민형은 두근거리는 마음과 함께 지영과 화해하지 못해
씁쓸한 기분을 씹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
면 자연스럽게 화해의 계기도 마련될 수 있겠지...... 이번 기회에 집에도
가보고, 민형은 여러 가지 기대되는 일로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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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용산구에 있는 커피 늄 알레그로. 육교를 끼고 2층에 위치해 있
는 알레그로의 창가 자리에는 먼저 와 있던 지혜가 기다리고 있었다. 민
형은 커피 늄에서 지혜를 보고 반가운 표정으로 얼굴을 밝혔고 지혜도 민
형을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야, 민형씨 앉아요. 나도 방금 왔어. 뭐 마실래요?"
민형이 앉자 마실 것을 권하는 지혜.
"사과 쥬스요."
"여기 사과 쥬스 하나 하고 커피 한잔 더요."
민형의 사과쥬스를 시키면서 지혜는 커피를 한잔 추가했다. 민형은 그녀
의 맞은 편에 앉아 언제나 처럼 세련되게 차려입고 있는 지혜를 훑어 보았
다. 큰키에 동양인 답지않게 바스트가 크고 어깨가 넓은 서양인 체구의 그
녀는 언뜻 보아도 매우 섹시한 글레머였다. 지영씨도 가슴은 크지......
하지만 지혜씨처럼 도발적인 매력은 찾아보기 힘들어. 민형은 어떻게 이미
지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주문한 음료가 도착했고 지혜가 물었다.
"집에는 들렀다 왔어요?
"예? 아니요 곧바로 왔어요."
"하긴 들를 시간은 없었겠구나. 지금이 4시 반이니까. 5시쯤에 잡지사에
서 집적 만나기로 했어요."
커피를 한모금 하면서 말하는 지혜. 민형은 물어볼 것이 산더미 처럼 많
았다.
"지혜씨도 같이 가는 건가요?"
"음, 소개 시켜줘야 되니까. 하지만 그 이후에 일은 아마 민형씨와 일대
일 면담이 될거예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예요."
"예, 고마워요 지혜씨."
"나중에 술한잔 사요."
지혜의 농담을 들으며 민형은 겉으로 빙긋이 웃었다. 그렇군. 지혜씨가
도와주는 것도 소개시켜주는 곳까지...... 그 이후에는 자신이 알아서 해
야하는 것이다. 아직 잡지사 기자들과는 한 번도 만나본적이 없는 민형은
왠지 모르게 잔뜩 긴장이 되었다.
"그런데 왜 지영인 안왔어요? 지훈씨가 꼭 데려오라고 기대를 잔뜩 하고
있었는데?"
"아, 그래요? 그거 타이밍이 않좋네......"
"타이밍? 무슨 소리?"
어깨를 으쓱하며 묻는 지혜에게 민형은 순순히 사실대로 대답했다. 이런
쪽은 왠지 지혜에게 상담 받고 싶기도 하고 지영이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지혜는 잘 알것도 같았다. 사실 잘 화나지 않던 사람이 한 번
화가 나면 상당히 무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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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그건 심했다. 지영이 쇼크 받았겠는데."
"......"
담배 연기를 후우 내 뿜으며 한쪽 눈썹을 찌프리는 지혜. 민형이 자신
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거북한 것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덧붙혀 말했다.
"그렇게까지 삐져 버릴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사실 내가 지영씨
가 싫어서 그랬겠어요? 어디까지나 비유를 한 것 뿐인데 그렇게 상대도
안해주다니...... 지영씨는 원래 화가나면 몇일씩 가나요?"
상당히 궁금했던 점. 여자들 중에 한 번 삐지면 절대로 안 풀어지는 사
람이 있다고 하던데 지영도 그런 타잎이라면 어쩌지? 나는 빨리 화해하고
싶단 말이야! 조바심 내며 묻는 민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지혜가 내
심 재미있다는 듯이 얼굴 가득히 짓궂은 미소를 띄우며 재떨이에 담배재
를 털었다.
"어휴 딱해라. 하지만 그럴만도 하지 왜 하필이면 그런대 비유를 했
다지?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지영이는 그렇게 속좁은 애가 아니니
까."
"그런데 그렇게 몇일씩이나 가나요?"
"그건 삐졌다기 보다는 자신이 얼마나 충격을 먹었는지를 민형씨에게 알
려주고 싶어서일 거예요. 자신이 받은 상처를 알게 해줘서 납득을 시키려
는 거겠죠."
"그런게 삐졌다고 하는 거 아닙니까?"
"뭐...... 하지만 지영이 쪽에서는 화는 이미 풀렸을텐데......"
"화가 벌써 풀렸다고요......?"
왠지 지영에 심리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듯한 지혜의 말을 들으며 민형
이 눈을 깜빡 거렸다. 지혜씨의 이야기는 신빙성이 있단 말이야.
"후후 지영인 그렇게 남을 괴롭게 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있는 성격이 아
니니까. 아마 민형씨가 화해하지 않고 서울로 와버려서 매우 초조해 하고
있겠죠. 거의 틀림없을 거예요."
"그,그래요?"
그게 사실일까? 하지만 왠지 믿고 싶은 이야기였다. 지혜가 담배를 재떨
이에 눌러 끄면서 빙긋이 웃었다.
"확인해 보고 싶다면 전화를 걸어봐요. 그래서 지금 올라오라고 하는 거
예요. 아마 올걸요?"
"음...... 그래도......"
얼마전까지 냉전 상태였는데 태연하게 전화를 건다는 것이 쑥쓰러운 민
형이 머뭇거리자 지혜는 그런 민형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자
리에서 일어섰다.
"자 다섯시입니다. 슬슬 움직여 볼까요?"
"예? 아 예!"
눈웃음 치며 계산대로 걸어가는 지혜를 뒤따라 자리를 뜨며 민형은 긴장
된 나머지 지영의 대한 일을 머리속에서 까맣게 지워버리고 말았다. 잡지
사라...... 민형은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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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림 미디어는 한국 최고의 미디어 산업을 이끌어 가는 기업. 그곳에
선 게임과 만화 그리고 각종 출판과 여러 가지 캐릭터 산업을 벌이는 규
모가 큰 회사였다. 이곳에서 발행하는 주간 웨이브는. 격주간 웨이브 메
거진. 월간 웨이브 세컨드. 격간 웨이브 프레스 등을 비롯하여 이미 한국
잡지 출하량의 40%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높은 인기의 잡지였다. 차례대로
아동용 청소년용 성인용을 비롯하여 격간 주간 월간등으로 나누어져 주간
만 40만부 이상이 팔리는 엄청난 규모의 웨이브는 모든 만화가 지망생들
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
주위는 온통 담배연기가 자욱하고 그 연기 때문에 한치 앞이 보이지 않
을 정도로 뿌옇게 드리워져 있었다. 지금 민형이 서 있는 것은 아트림 미
디어 웨이브 출판사. 그중 3층에 있는 격주간 웨이브의 편집실 이었다.
이곳은 청소년용인 격주간 웨이브를 담당하는 곳이며 격주 35만부의 판매
량을 고수하고 있는 한국 최고의 격간 잡지였다.
"예? 박선생이 잠적해 버렸다고요!? 마감이 4시간 남았는데 그게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립니까!? 댓생도 안뜨고 나갔다고요!? 우와 미치겠네
이거!!"
"어이 안기자! 식자 다 놨어!? 필름 돌기전에 빨리 해야돼!"
"네! 지금 보냈다고요!? 1시간이면 도착한다고요!? 예 감사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같이 술한잔 해요 임선생님!! 네? 네!"
"엘제르나 왜 안와!! 1시간전에 어시가 떠난다고 했잖아!!"
아수라장...... 민형은 난생 처음 보는 잡지사 안을 목격하고 따가운 눈
과 자욱한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얼이 나간 듯 잠자코 서 있었다. 이런 분
위기에서 잡지가 만들어지는 구나. 군대 군대 붙어 있는 유명한 만화들의
포스트. 책꽃이에 가득히 쌓여 있는 단행본들과 잡지.
'바로 이곳에서 잡지들이 만들어지는거야......'
그곳은 동경하던 이상 세계였다.
PART-82
"똑똑"
"?"
연신 담배를 피워 물며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는 중년의 남자에게 지혜가
입으로 노크 소리를 내니 그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 보았다. 그런 그에
게 지혜가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강팀장님."
"아, 안지혜씨? 어서와요! 그렇지 오늘 5시에 오기로 했었지?"
강팀장이라 불린 남자는 깜빡 잊었다는 듯이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치며 지혜의 등뒤에서 우물쭈물 서 있는 민형을 쳐다 보았다.
"이 친구가 '실루엣'의 원작자신가?"
"네. 제 친구니까 잘 부탁해요."
"자, 잘 부탁 드립니다."
실루엣이란 민형의 원고중 단편의 하나. 자신의 만화가 팀장의 입에 올
려지자 민형은 쑥쓰러워서 고개를 푹 수그리며 인사했다. 강팀장은 그런
민형을 향해 괴짜처럼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보시다시피 마감이라서 말이야. 보시다시피 아수라장이지. 정신 없
이 이런때 약속을 잡아 버린게 내 잘못이니 어쩔 수 없지뭐. 아, 최기자!
최기자 잠깐 보지!"
"?"
강팀장이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 하고 있던 기자 한명을 불러내자 최기자
라고 불린 그가 민형과 지혜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넓직하게 살이 있어 약간 뚱뚱한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하지만 눈매가 날
카롭고 키가 커서 비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강팀장에게 다가오자
강팀장은 그에게 민형을 소개 시켰다.
"이 친구가 실루엣인데...... 한 번 얘기 좀 해보라고"
"아, 실루엣이요? 으응......"
만화 제목으로 무언가 이야기가 통했는지 최기자는 고개를 한 번 끄덕
거리더니 민형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최형석 기잡니다. 안녕하세요."
"정민형입니다. 반갑습니다."
민형도 악수를 받으며 인사말을 했고 최기자는 다분히 형식적인 표정으
로 미소짓고 있었다. 잠시후 강팀장이 민형에게 고개를 가딱이며 눈빛을
보냈다.
"그럼 같이 가서 한 번 얘기해봐. 난 지혜씨랑 얘기 하고 있을테니."
"가시죠."
최기자가 먼저 앞장서서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고 민형은 잠시 머뭇
머뭇하다가 강팀장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최기자를 따라갔다. 지혜는 그
런 민형의 뒷모습을 보며 열심히 해보라는 듯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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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게 실루엣인데......"
노란색 사무봉투 안에서 꺼내진 원고는 민형의 원고뭉치. 그중에 실루엣
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따로 정리해 책상위에 올려 놓으며 최기자가 민형을
돌아 보았다.
"자 편하게 가자고요. 작업이라는게 제 선에서 끝나주는게 아니니까.
음...... 일단 지금 이 원고 말인데...... 그림이 너무 약해요."
대뜸 떨어지는 한마디. 민형은 조금 속이 상했다. 그말은 지혜에게도
들은 말이었다. 지혜의 눈도 제법 날카로운 것 같았다.
"이게 웨이브 매거진에 들어갈 거라는걸 전제하에 작업 한다면 매거진
은 대상이 청소년이거든요. 그러니까 스토리랑 그림이 50:50정도. 주간
웨이브는 스토리 30그림 70정도. 성인지는 스토리 70 그림 30정도. 뭐 이
렇게 나눠어지죠. 그런데 매거진에 들어가기엔 지금 그림이 많이 약하거
든요?"
"네......"
예리하게도 찍어내는 최기자의 말. 민형은 왠지 자신이 모르던 세계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만 같아 감히 반박할 생각도 못한채 고개를 끄
덕였다. 잡지라는 것은 철저히 상업성이다.
"그래서 말인데. 우선 지금 이 원고에 대해선 완전히 없는 걸로 하고
요. 콘티부터 다시 들어가 봐야 겠어요."
"코,콘티 부터요?"
"예 콘티. 그래야 같이 작업하기가 편하거든요."
"그런데 콘티라면......?"
"댓생 뜨기 전에 대강의 스토리 라인을 대충 잡아 놓는 거죠. 안해 봤
어요?"
"그러니까 저는 콘티는 안하고 그냥 댓생부터 하는데......"
"그럼 지금부터 콘티도 한 번 해보는 겁니다. 만화는 체계적으로 작업하
는 습관이 몸에 배지 않으면 나중에 프로가 되서도 힘들어요. 일단 1회
분과 2회분 콘티를 짜는데 말이죠. 가장 중요한게 1회고 그 다음으로 중
요한게 2회부터 5회까지예요. 즉 이 1회에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하는거죠.
음...... 실루엣을 보면......"
실루엣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는 최기자. 민형은 지금 까지 누군가에
객관적으로 자신의 만화를 평가받은 적이 없었다. 매우 긴장하여 있는 민
형에게 최기자가 말을 이었다.
"지금 이게 50페이지짜리 단편인데 만약 한다면 이걸 장편으로 늘릴 생
각이거든요. 그리니까 1회가 24페이지 정도로 생각하고 1회분 콘티를 아
주 재밌게! 아주아주 재밌게 짜봐야 하는 겁니다."
"재밌게요......"
"음, 제가 실루엣을 다 읽어 봤는데 소재가 좋아요. 신선하고. 뭐 이런
건 시작부터 먹히느냐 아니면 장악하느냐 두가지 타잎인데 문제는 사건이
나기까지의 공백이 너무 길어요. 잡지물은 스피드가 생명이거든요. 너무
여운을 떠 주는 것 보다 빨리 빨리 사건이 일어나는게 좋으니까. 이 발단
부분을 20페이지에 집약해서 한 번 1회분 콘티를 만들어 보도록 하죠. 우
선 24페이지로 생각 합시다."
수염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청산 유수처럼 말을 이어가는 최기자. 그
엄청난 말발에 민형은 기가 죽어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기자들이란 다들
이렇게 요점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건가. 프로라는 말에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민형이었다.
"될 수 있으면 좀 빨리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오늘이 토요일이니까 다음
주 화요일 정도에 다시 한 번 보는게 어떨까요?"
"화요일이요? 그런데 그때는 학교를 가기 때문에......"
"학교 끝나고 오면 되잖아요. 고등학생이죠?"
"네, 그런데 집이 대전에 있기 때문에......"
"대전이요? 크아......"
이거 너무 먼데? 라는 표정이 얼굴에 확 비추이며 최기자가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바심 내며 기다리고 있는 민형에게 최기자 역시 난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것 참...... 그럼 시간이 있는 것은 토요일하고 일요일 정도라는
말인가......"
"......"
민형은 왠지 미안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잠시 생
각에 잠겨 있던 최기자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일단 콘티는 우편으로 보내주면 제가 그걸 보고 검토
해서 한 페이지씩 댓생을 뜨는걸로. 그래서 댓생이 어느정도 죄면 토요일
날 집약해서 보고 검토하는 걸로 OK?"
"아, 고맙습니다......"
왠지 고마워진 민형 고개를 꾸벅 숙였고 최기자가 웃으며 뼈가 있는 한
마디를 건넸다.
"지방에 있으면 참 힘들어요. 잡지사는 거의 서울에 집결해 있는데. 고
생 좀 하겠어요."
"네,네에......"
제길. 이번처럼 싸움을 벌여 학교를 퇴학당한 것이 억울했던 적은 없다
고 생각하면서 민형은 겉으로는 쑥쓰럽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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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얘기 잘됐어?"
민형이 면담실에서 나오자 강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지혜가 밝은
표정을 이렇게 물었고 민형은 서먹하게 웃으며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일단 우편으로 만납시다. 그리고 다음주 토요일에?"
"네, 감사합니다 최기자님."
"네, 그럼 그때 봅시다."
면담실 앞에서 최기자가 매우 바쁜 인상으로 민형과 악수를 한 번 한후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고 민형은 지혜에게 돌아왔다. 지혜는 대충 짐작
은 하고 있다는 얼굴로 민형에게 물었다.
"그래, 어때?"
"예...... 뭐 그렇지요 뭐."
민형이 손으로 뒷 머리를 긁적 거리며 웃어 보였고 강팀장이 의자를 빙
글 돌려 민형과 지혜에게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하실건가? 나 6시에 퇴근하는데 지혜씨 오랫만에 같
이 나가서 저녁이라도 할까?"
"아니요. 저 가봐야 되요. 오늘 고마웠습니다 강팀장님."
"그래? 이거 섭섭한데. 자 그럼 잘 가도록 하고. 민형군? 다음에 또보
도록 하자고."
"감사합니다. 강팀장님."
사무적으로 웃으며 손을 흔드는 강팀장을 뒤로 하면서 민형과 지혜는 잡
지사를 빠져 나왔다. 콘티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민형은 왠지 이 만
화 작업이라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
다.
PART-83
"어째 좀 시무룩한 표정인데...... 일이 잘 안됐어요?"
잡지사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연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민형에게 지
혜가 이렇게 물었고 민형은 지혜에게 실례인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들었
다.
"아니요 뭐...... 그런건 아니고요. 왠지 좀 싱숭생숭한 느낌이 들어서
......"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말은 지혜에게 하지 않았다. 소개 시켜준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민형의 심정을 대
충 감 잡았는지 지혜가 민형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두드리며 빙긋 웃었
다.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죠?"
"네? 아,아니......"
지혜의 질문에 민형은 변명하려 했지만 빨개지는 얼굴을 감출 수는 없었
다. 지혜는 확실히 민형보다 나이 많은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경륜이나
눈치가 빠른 것이라던가 상담역이 되는 점이 바로 그랬다.
"어떻데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데요?"
"아니 그런건 아니고. 콘티부터 다시 작업해 보는게 어떻겠냐고......"
"흐음 그랬군. 결국은 저번 원고는 마음에 안든다는 소리네. 내가 말했
죠? 그림이 약하다고."
민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자신의 그림을 가지고 험담을 한다면
굉장히 기분이 나쁘게 들렸겠지만 오늘은 왠지 그렇지 않았다. 여기 저기
서그림에 대해 동네 북처럼 터지긴 했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평을 듣기
에 자존심이 상할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심란한지도 몰랐다.
"그래도 다시 작업해 보자고 하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예요."
"그럴까요......"
사실 그것이 궁금했다. 여기서 이대로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고 너무 기대를 해도 실망할지 모르고."
"......"
지혜는 언제나 민형에게 객관적인 설명만을 해주었다. 민형이 생각하고
직접 판단해서 처신할 수 있도록 이야기 해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야박하
게 들릴지 모르지만 민형은 오히려 그편이 편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민형
에게 지혜가 다시 물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부터 어떻게 할꺼예요? 이대로 부모님 만나러 갈꺼예
요?"
"아니요 오늘은 왠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연락하지도 않았으니까."
실제로 민형은 부모님을 만날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이렇게 뒤 숭숭한
기분으로 집에가 보았자 부모님 걱정만 끼쳐 드리게 될 것이다. 그런 민
형에게 지혜가 물었다.
"그럼 일단 저랑 같이 갈까요."
"네? 어딜요?"
"저녁먹으러"
"저녁이요?"
오늘은 하루종일 지혜와 단둘이 행동했기 때문에 민형은 조금 쑥쓰러워
이렇게 물었다. 아까부터 지나가는 사람들이 지혜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함
께 가는 민형을 부럽다는 듯이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쁘진 않은 이런
우월감...... 하지만 민형은 지혜에게 계속 신세를 지는 것이 왠지 미안했
다.
"일단 가요. 오늘 같은 날은 친구들과 함께 있는게 민형씨한테도 좋을 것
같으니까."
"친구요......?"
웃으며 민형의 팔짱을 끼는 지혜에게 쓴 웃음 지은채 민형은 지혜를 따
라 지혜의 자가용이 있는 근처의 유료 주차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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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오랜만 지혜! 어머머 그쪽이 소문의 나이스 가이? 우와 너무 멋
지다 얘~"
"와우~ 이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풋풋한 느낌이냐! 어서 앉아 앉
아!"
지혜를 따라 대학로에 있는 처음 보는 호프집에 끌려온 민형은 입구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가지 각색의 처녀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져서 멍하니 자
리에 멈춰서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지혜와 함께 들어온 민형을 익히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저마다 민형과 악수하고 신이나는 얼굴로 손을 쓰다 듬었
다. 그녀들은 모두 지혜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직장여성인 것 같았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저는 선아라고 해요. 정민형씨죠?"
"저는 미수예요 이미수. 만나서 반가워요 민형씨!"
"저는 최수진이예요. 반가워요~"
저마다 자신을 소개하면서 방긋 방긋 웃는 지혜의 친구들. 민형은 왠지
난처한 느낌이 들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안녕하세요! 정민형입니다."
"어머 그래그래~ 어려워 할 것 없어 귀엽기도 하지!! 누나라고 해.응?"
"야! 너 왜 반말이야!"
"어머 내 실수~! 오랜만에 영계를 보니까 달아 올라서 그만!"
"이런 변태 같은 것. 너 저리가! 민형씨! 민형씨는 제가 지킬께요!"
"그래! 선아 넌 저리 떨어져! 넌 위험해! "
세 여자는 처음 본 민형이 좋아 죽겠다는 듯이 연신 깔깔 거리며 농담
을 지껄였고 그 즐거운 분위기에 취해 민형도 멋적게 웃었다. 지혜씨의
친구들이라 모두 좋은 사람들 같군. 이런 성인 여성들의 모임 자리에 한
번도 나와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민형은 조금 서먹서먹하긴 했지만 옆에 지
혜도 있었기 때문에 금방 적응이 될 것도 같았다.
"우린 말이죠 오늘 지혜가 민형씨를 데리고 온다길래 얼마나 기대 했는
지 몰라요~! 글세 난 밤잠을 설쳤다니까!"
"그래요 그래! 지영인 좋겠네! 이렇게 잘생긴 영계를 꼬시다니!"
"그래! 내가 대학때부터 알아봤는데 그년은 순 내숭이야!! 걔 원래 그러
잖니!"
"맞아 맞아 지영이 걘 보통이 아니야! 우리가 좀 배워야 돼."
"게다가 레즈지! 호호호호!"
엄청나게 쏟아져나오는 속사포 같은 수다. 정말 여자들이란 한 번 달아
오르기 시작하면 끊이지 않고 떠들 수 있구나...... 농담인지 진담이지 헤
깔리는 대화속에서 민형은 초점을 잡지 못하고 그저 억지 웃음을 띄울 뿐
이었다. 그런 민형에게 지혜가 한마디 덧붙혔다.
"모두 대학 동창이예요. 그래서 지영이와도 알고 지내던 사이죠. 오늘
어쩌다 보니 만나게 됐는데 민형씨도 서울에 올라온 김에 애들이 보고 싶
다고 해서요."
"아, 그래요...... 하하."
지혜의 설명을 듣고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 민형. 그때 미수라는 아가씨
가 얼른 민형의 손을 잡더니 반짝반짝하는 눈동자로 이렇게 말했다.
"민형씨. 바보같이 공부만 하는 지영이 보다 나같이 몸매 빵빵한 여자가
더 낫지 않아요? 게다가 나는 지영이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거든~"
"이런 발칙한 년! 너 꺼져!"
"저것이 사돈남말 하고 있네!"
무자비하게 난무하는 웃음과 폭설. 과연 여자들의 대화가 이런것이었을
까 민형에게 의구심을 들게 하는자리. 그때 입구에서 나지막한 한마디가
울렸다.
"공부만 해서 미안하네."
순간 웃음이 딱 멈추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민형이 깜짝 놀라 말문이 턱 막혔다.
"지,지영씨......?"
입구에 서 있는 것은 약간 셀쭉한 표정의 지영과 골치 아프다는 듯이 손
으로 이마를 집고 있는 지훈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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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미안해 지영아 우리가 장난한거 알지~?"
"호호호~ 굶주린 우리 생각도 해주라! 선아야 워낙 밝히니까 말이야."
"......"
애교를 떠는 선아들의 말을 들으며 지영은 말없이 맥주를 홀짝 거렸고
민형은 왠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에 말을 줄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
구들 사이에 갑자기 끼어들 틈이 없다고 생각된 것이다. 누가 말이라도 걸
어주면 혹시 모르겠지만......
"마셔."
"?"
그때 민형의 잔을 채워주는 지훈. 민형은 얼른 잔을 받았다. 그래도 남
자끼리는 생각해 주는군. 고마워 형.
"내 동생을 울렸다니 실컷 마시고 얻어터지는게 좋겠지."
"......"
그런 뜻이었나. 민형은 하마터면 맥주를 몽땅 뱉을뻔 했으나 억지로 참
고 마셨다. 지훈형 모든 일을 다 알고 있구나...... 속으로 얼어버린 민형
을 뒤로 하고 이번엔 화제가 지훈에게 옮겨졌다. 세 여자중 그래도 가장
말수가 적었던 수진이 물었다.
"그나저나 오랜만이예요 지훈씨. 그동안 지혜랑 얼라리 꼴라리 했다
메?"
"음."
과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지훈. 여자들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기 위
해 애쓰는 것 같았다.
"어쩌다가 지혜한테 걸렸어요? 나한테 오지!"
"맞아 나도 있는데!"
질세라 무섭게 선아와 미수가 끼어 들었고 지훈이 맥주 한병을 들이킨
채 과묵하게 대답했다.
"지혜가 가슴이 제일 크니까."
-쿵. 그 한마디와 함께 말이 많던 3세람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야
놀랍다...... 과연 나이 많은 남자는 여자 다루는 법을 알아. 지혜가 의미
심장하게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민형은 3여자의 공격을 여유있게 흘려 넘
기는 지훈을 대단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존경스럽군.
"헹~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하는 동안 동생은 영계한테 빼앗기셨군~"
"맞아 맞아! 에고 쌤통~"
그리고 곧이어 이어지는 반격에 지훈의 이마에는 핏발이 발끈.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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