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3년생의 사랑 10부
민형은 그날 곧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조금 큰 길로 나갔다. 서점에
들릴일도 있고 또 가는 길에 의연이를 버스 정류장 까지 바래다 주기 위해
서였다.
"서점엔 왜 가니?"
함께 걷던 의연이 묻자 민형이 별 의미 없이 대답했다.
"만화잡지 사러."
"만화? 너 만화 좋아하니?"
"응, 왜 이상해?"
"흐응......"
민형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묻자 의연이 두눈을 똘방똘방 굴리며 민
형을 한참 올려다 보았다. 민형은 뭔가 쑥스러워져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
었다.
"뭘 그렇게 봐?"
"글세...... 왠지 그런거 하고는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말이야......
만화 보는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게 추상적으로 살거든......"
"난 보기도 하지만 그리는 쪽이야."
"뭐!? 정말이야!? 너도 만화 그리니!?"
민형이 대답하자 의연이 새삼 놀랍다는 듯이 큰소리로 외쳤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민형은 주위에 누가 쳐다보지는 않을까 살펴 봐야만 했
다. 민형인 쉬쉬 하며 의연을 돌아보았다.
"야..... 야...... 넌 무슨 목소리가 그렇게 크냐?"
"하지만 만화 좋아하는 애들은 대부분 변태......"
"뭐?"
알아 들을 수 없는 의연에 말에 민형이 순간 멈칫했다. 방금 뭐라고 했
냐? 변태? 너 그게 얼마나 엄청난 말인줄 알고......?
"무,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거야!?"
"만화 그리는 애들은 주로 야한 만화 가져다 놓고 밤마다 보지 않니?
또 학교에 가져와서 여러애들이랑 돌려 보고. 또 하루종일 똑같이 그리려
고 연습하잖아. 게다가 동성연애자도 많데."
의연이 하도 진지하게 얘기하는 터에 민형은 숨이 막혔다. 야,야한 만화
라니 그건 맞다. 할말 없다. 그런데 동성연애라니!? 야, 그건 좀 몹시 추
상적이지 않냐? 민형은 말문이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묵묵히 걸
었다. 그러자 의연이 뒤를 이어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주로 여자를 변태적으로 생각하잖아."
"......"
얘 이대로 둬선 안되겠군. 이거 무슨 만화를 음란 3류 포르노 잡지의
대명사인줄 알고 있나. 민형은 애써 진지한채 눈빛을 빛내며 의연에게 고
개를 돌렸다.
"너, 너 말이야 조금 상식에 벗어난 추리를 하고 있는데 말이야......
실제로 만화 그리는 사람들은 그렇게 그렇지 않어......"
"뭐가 그렇지 않아?"
의연이 당찬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고 민형은 전점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
다. 우우...... 난 왜이렇게 얘 앞에선 힘을 못쓴다냐......
"시,실제론 매우 착하고 마음씨 고운 아이들이 많아...... 게다가 만화
좋아하는 사람들 중엔 결코 난폭한 사람이 없다고 하잖아......'
이렇게 말하면서 스스로 쿡쿡 찔리는 자신을 민형은 애써 달랬다. 예외
도 있는 법이니 이해하라 따식아. 민형은 점점 할말이 없어졌다.
PART-54
지영은 싱글벙글 웃으며 박스에 옷을 집어넣고 물건들을 포장해서 잘 쌌
다. 이제 조금후면 대전으로 이사를 간다. 민형씨가 있는 대전, 지영은 민
형을 생각하니 마치 꿈속에 있는 사람처럼 마냥 행복했다. 지영의 오빠 지
훈도 어찌된 일인지 지영의 대전행을 순순히 허락했고 이제 고민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는 내일 떠날 생각이었지만 한 시간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오빠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어차피 오빠는 이집에 오지 않으니까......'
지훈은 어딘가에 빌라를 얻어 여자와 동거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 민형이 마음에 들었는지 지영이 대전으로 가
는 것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사실 지훈에게는 대전에 있는 학원으로 옮
기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한 지영이었지만 오빠가 그렇게 순순히 믿어줄 것
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지영이 처녀 이사가나?"
"아,아주머니."
근처에 볼일이 있어 언던을 올라가던 구멍가게 주인 아줌마가 마루에 쌓
여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이삿짐 상자를 알아채고 이렇게 물었다. 지영은
왠지 섭섭해 하는 얼굴의 아주머니에게 미안해 쓴 웃음을 지었다.
"네, 오늘 이사가게 됐어요. 그동안 잘 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에구, 섭섭해서 어떡해. 그래도 외상도 없는 최고의 단골은 지영이 처
녀뿐이었는데."
"헤헤...... 대전으로 이사가도 아주머니 같은 가게를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대전으로 가나 보지?"
"네."
지영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고 아주머니는 뭔가 대단히 좋은 일이 있는가
보다 라고 짐작했다. 지영은 항상 웃고 있었지만 오늘같이 마음속에서 부
터 밝아져 오는 웃음은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대전에 애인이라도 있나?"
"네~"
"엥?"
농담삼아 물어본 것이었는데 뜻밖에 대답이라 아주머니는 눈이 동그래졌
다. 정말 애인이 있단 말이야?
"아니, 지영 처녀도 애인 있었어?"
"그럼요. 제가 뭐 바보인줄 아세요~?"
지영이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고 주인 아주머니는 시원
섭섭한 표정으로 웃으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참 아깝다, 나한테도 고만 또래의 아들이 있었으면 당장 데려다 며
느리 삼았을텐데......"
"헤헤......"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며 지영은 쑥쓰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 거렸다. 아,
오늘은 아무래도 웃음이 멈춰질 것 같지 않고...... 지영은 어서 빨리 민
형을 만나게 되길 기다리며 하늘을 쳐다 보았다.
'설마 비가 오진 않겠지?'
하늘은 지영의 마음과도 같이 푸르고 화창했다.
..................................................... . . . . . . .
민형은 의연과 함쎄 서점에 들어가 잡지를 뒤적거렸다. 버스 정류장이
바로 앞인데도 의연은 버스를 타지 않고 민형을 따라 서점에 들어왔다. 민
형은 그것이 심히 신경 쓰였으나 싫지는 않았다. 의연인 매우 예뻤고 또
서점에서 여자와 함께 책을 고르는 모양은 결코 나쁘지 않으니까. 이런거
꼭 한 번 해보고 싶었어...... 비록 만화라지만 말이야.
"......"
하지만 의연은 민형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제1철학,철학의 세계,인간과
철학의 관계등등, 이상 야릇한 제목이 있는 코너에 가서 책을 훑어보고 있
었다. 민형은 저런 제목만 봐도 머리가 아팠다. 어떻게 저런걸 보지? 그건
고등학생한테는 금기서라고.
"다 골랐니?"
책을 훑어보는 일이 끝났는지 의연이 민형에게 다가와 물었다. 민형은
들고 있던 잡지들을 탁탁 챙겨 손에 들고 카운터로 가려고 했다. 그때 의
연이 대단하다는 듯이 되 물었다.
"그걸 다 사? 5권이나 된다."
"2권은 격주간, 3권은 주간이야. 내용도 다 틀린거니까."
"어차피 만화는 다 똑같은거 아니야?"
"...... 아니야......"
도대체 이애는 만화를 뭐라고 생각 하는거야? 그럼 사람은 밥만 먹고 산
다고 생각하냐. 빵도 먹고 회도 먹잖아. 너 반장이 그렇게 융통성이 없으
면 나중에 세상을 험악하게 살게돼...... 민형은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지
만 꾹 참았다. 무엇보다 의연에겐 말발로 밀리니까. 무슨 말이든지 들어
주고 져주는 유지영 선생님과는 레벨이 틀리다. 얜 강적이거든.
"넌 아까 뭘 본거니?"
서점에서 나온 민형이 의연이 돌아보고 있던 코너를 의식하며 묻자 의연
이 짧게 대답했다.
"한국 고전문학 단편 모음집."
"철학 어쩌고 있던데?"
"그 코너랑 함께 있더라고."
"......"
그랬군...... 너도 사상철학 하고는 관계 없는 애로구나. 어쨋든 안심했
다. 사상철학에 익숙해진 애들은 대학가서 꼭 데모한다고 누가 그러더라.
그런데 한국 고전 문학은 왜 봤니? 민형이 의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보다니? 본고사에서 논술 나오잖냐. 미리미리 많이 봐둬야돼."
보,본고사? 논술? 민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본 고사라면 적어도 서
울에서 열손가락 안에 드는 짜라라한 대학에서 보는 것이다. 게다가 논술
대비라면 1류대에서 보는 본고사 과목 아닌가? 그런데 그걸 왜 네가 보
냐?
"너...... 논술 대비하니......?"
"응."
의연이 짧게 대답했고 민형은 조금 놀라웠다. 어...... 너 대학갈려고
그러는구나. 내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의연은 공부는 잘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실업계 왔니?
"어느대학...... 갈건데......"
"서울대? 아니면 연대. 그 이하는 생각해 본적이 없어."
쿠궁, 이거 완전히 충격. 너 그런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단 말이야!? 민
형은 엄청난 쇼크를 먹고 한참동안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서울대라니
...... 서울대가 아무나 가는덴줄 아나. 게다가 유지영 선생님이 졸업한
서울대를 가겠다니 괜히 건방져 보이는군...... 민형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물었다.
"그,그런데 왜 인문계에 안갔어......?"
"거긴 내신등급 떨어지잖아. 덕분에 여기선 1등급이야."
쿠구궁X2. 야, TV에서나 보는 대학 3년 계획의 실행자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있구나 너같은 애가? 민형은 갑자기 놀라움과 함께 자
신이 초라해 지기 시작했다. 누구는 공부못해 싸움만 하도 퇴학당하고 간
신히 지방으로 좌천되서 졸업을 위해 뛰고 있는데...... 누구는 1류대 가
기위해 내신 조절 프러스의 실업계를 지향해? 이거 정말...... 갑자기 한
국의 교육 현실이 다분히 우울해진 민형이었다. 내가 이런 걱정한다고 뭐
가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누구도 만화 볼 시간에 책 좀 읽으면 어때."
"......"
뜨끔한 의연에 시선. 원래는 건방진 것~ 이라고 외치며 한 대 쥐어 박아
쥐야 하지만 그녀의 박력에 압도당해 민형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내신
1등급은 아무나 만나볼 수 있는게 아니다. 게다가 같이 걷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중압감을 느끼게 한단 말이야. 민형은 의연에 곁에 있는 자신이 갑
자기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긴...... 남자는 공부 못해도 돼. 얼굴만 잘생기면 돼지 뭐."
야, 그거 혹시 반대 아니냐?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여유있는 대
사를 뿌리는 의연을 째려보며 민형이 초라하게 눈을 내리 깔았다. 너 시집
가면 분명히 이혼할거다...... 두고봐라......
"야,근데"
문득 의연이 낙심하며 길을 걷는 의연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오늘 너네집 놀러가도 돼?"
"뭐!?"
충격X3! 야, 얘 정말 대담하네. 그게 여자애 입에서 함부로 나와도 되는
소리냐!? 남자애네 집에 놀러 오겠다니, 민형은 갑자기 전신이 떨렸다.
"우,우리집에는 말이야......"
"왜,부모님이 친구 데려오는거 싫어하시니? 괜찮아~이렇게 예쁜 애가 가
면 분명히 좋아하실거야."
놀고있네, 네가 아무리 예뻐도 유지영 선생님의 발밑이나 따라오는 줄
아냐. 민형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마구 고민했다. 여자
애가 집에 오겠다고 한 것은 처음인데...... 게다가 집에 가서 뭐하지?
당혹스러움에 민형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그냥 놀러가는거야! 뭘 그렇게 한참 고민하니?"
아아! 이러다가는 쫀쫀한 남자라는 소릴 듣고 말겠어! 어쩌지!! 민형은
현실과 마음 속의 바램을 서로 교차시며 다분히 엄청난 고민을 하기 시작
했다. 의연이 너 정말 너무하구나.
PART-55
"안녕하세요~"
결국 와버렸군...... 민형은 쭈삣쭈삣한 몸짓으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의연이 뒤따라오며 집안을 향해 인사했지만 안은 조용했다. 아
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민형이 신발을 벗고 방밖에 마루에 작은 마루에 올
라서며 의연에게 말했다.
"아무도 없어, 나 혼자 산다고 말 안했나?"
"어머, 진짜야? 맞아! 그랬지!"
너...... 정말 몰랐던 거냐...... 민형은 수상함이 가득한 눈으로 몰랐
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는 의연을 지긋이 내려다 보았다. 믿을까, 말까?
"그,그럼 나 갈까? 너 혼자 있는데......"
들어가기도 그렇고...... 뭐 이런 말 하려고 하는거지? 다 안다 알아.
난 이미 여자에 대해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히 관찰한 몸이야. 고등
생한테 관심없으니 안심하도록 해. 민형은 망설이는 의연에게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자신이 의연이 보다 월등히 우월
해 보였다. 유지영 선생님 몸매에 의연이 비할대냐.
"뭐,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좀 들어와. 별로 볼것도 없지만."
"음, 그럴까?"
약간 새침한 표정으로 의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민형을 따라 신발을 벗
고 안으로 들어왔다. 안마루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민형이 방문을 열
었다. 남자방 치고는 제법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의연은 풋 웃었다.
"너 깨끗하게 하고 사는구나? 성격이 꼼꼼한 모양이지?"
"뭐...... 좀....."
사실은 유지영 선생님이 청소 해준 후 별로 건드린 것이 없기 때문에
이나마 깨끗한 것이다. 보통때에는 상상에 맡길게. 민형은 교복을 옷걸이
에 걸고 마루로 나가며 의연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마실거라도 줄까?"
"쥬스 있니?"
"콜라는 있어."
"콜라는 카페인이 들어 있잖아."
"그럼 가서 사올까?"
민형이 사심없이 말했으나 의연은 조금 감동했는지 수수하게 웃으며 고
개를 저었다.
"그럴 것 까지 있니. 그냥 물줘. 목마르다."
"그래."
별로 귀찮은 애는 아니군, 유지영 선생님과 만나면서 여자 시중드는 것
에 전혀 익숙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민형은 내심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지영 선생님은 정말 편하다. 뭘 해도 다 받아 준다. 때문에 같은 또래에
의연에게는 뭔가 행동에 부담을 느끼게 되는 민형이었다. 그래도 의연이가
허울없는 성격이라 민형은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민형은 방을 빠져
나가 마루 주방쪽에 있는 냉장고로 가 물통을 꺼냈다. 그때 마당 저쪽에서
커다란 1t 트럭 한 대가 대문앞에 멈추어 섰다. 뭐지? 민형은 깜짝 놀라
마당쪽으로 목을 길게 뺐다.
"......?"
푸른색의 트럭에는 몇가지 살림 가구가 실려 있었다. 저것은 이삿짐?
아, 누가 이사라도 오나보지? 근처에 누군가 새로 이사오는 사람이 있는
가 보다 하고 민형은 무시하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민형씨~!"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민형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야? 여기서
날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민형은 반사적으로 대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
다.
" 뎬!?"
고개를 돌린 민형은 순간적으로 숨이 콱 막혔다. 유,유,유지영 선생님
이다!? 아니 저 여자가 왜 여기 와 있지!? 반가움과 놀라움, 그리고 당혹
스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민형은 얼굴이 굳어 버렸다. 예쁘장한, 그러면
서 간편한 셔츠와 치마를 입은 지영이 싱글벙글 웃으며 마루로 뛰어 들어
온 것은 그때였다. 지영이 마루에 서 있는 민형을 향해 기쁜 얼굴로 외쳤
다.
"민형씨 와 있었구나! 저 지금 왔어요. 내방 어디예요?"
지영은 민형이 대단히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물었다. 원래
는 내일 오려고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지만 시간은 그리 상관없다는 민형
에 말도 있고해서 그냥 오늘 내려와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민형은 내일
모래라는 지영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터였다.
"서,선생님......? 어떻게 오늘......?"
"그냥 마무리 지을 일들이 빨리 끝나서 오늘 내려왔어요. 잘했죠?"
"아, 그러셨어요? 잘 오셨네요!"
민형이 그제서야 하하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고 지영도 웃었다. 하지만
웃음뒤에 있는 민형의 속 마음은 최악이었다. 큰일이다! 방안에 의연이가
있는데 이거 워쩌냐!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눈앞이 캄캄했다. 진퇴양난!
이거야 말로 원수는 외나무 다리다! ...... 아닌가?
"짐 어디다 옮길까요!"
"아, 저기 왼쪽 방에 옮겨 주세요. 옮겨만 주세요."
이삿짐 센터 직원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민형은 얼떨떨한 얼굴로 지
영이 살게된 옆방을 가리켰다. 직원들이 이삿짐을 나르기 시작했고 시끌벅
적 이사날 분위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방에 있던 의연은 물가지로 간 민
형이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고 또 마당쪽에서 인기척이 많아진 것 같아 슬
쩍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어?"
누가 이사오나? 갑자기 마당에 사람이 많아지고 가구들이 옮겨지는 것을
보고 의연은 놀랐다. 게다가 민형은 왠 여성 앞에서 어색한 듯이 엉거주춤
서 있었던 것이다. 의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형아?"
"......!?"
"......?"
아뿔싸!! 시마따! 방을 나온 의연이 슬쩍 민형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와
지영의 얼굴이 마주쳤다. 이거 사상최악 극악무도의 대면! 민형의 혼이 몸
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하늘하늘 사라졌다. 멀리 멀리......
"민형아...... 누구야?"
민형의 앞에서 매우 친한얼굴로 빙글빙글 웃고 있었던 지영을 보며 의연
이 낮선 듯이 묻자 지영역시 아무런 말 없이 민형을 돌아 보았다. 저 여자
는 누구예요? 라고 지영의 눈이 묻고 있었다. 민형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좔좔 흘러 나왔다.
"아,저..... 그러니까..... 그......"
그때 불현 듯 스치는 생각! 맞아! 터미널에서 유지영 선생님을 민형은
누나라고 소개했던 것이다! 제길! 역시 그때 솔직히 말했어야 했는데! 의
연이 기억할까? 그녀와 유지영 선생님의 얼굴이 같다는 것을 기억할까? 민
형은 정신이 없었다. 뭐라고 하지?
"그때 그 누님......?"
"아, 그래 우리 누나야! 인사해!"
우와아아아악!!! 넌 왜 질문을 해도 그렇게 유도적으로 하는거야!? 얼떨
결에 대답하고 말았잖아!! 허를 찌르는 의연에 질문에 민형은 그만 얼떨결
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거 터미널에서의 얼굴을 기억하는 모양이잖
아! 이거 큰일났다. 의연 넌 변호사 하면 성공할거다...... 서울대 가서
법대 가라. 민형은 아주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그대로 얼굴로 들어내며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지영을 돌아보았다. 유지영 선생님은 뭐든지 잘 이해
해 주시니까 뭔가 사연이 있음을 아실꺼야. 분명히 아실꺼야. 민형은 그렇
게 속으로 되뇌이며 지영을 쳐다보았다.
"......"
사상최악. 용서고 뭐고 없는 표정. 지영의 짜- 하게 내려깔린 눈빛을 민
형은 그녀를 만나고 처음 보았다. 유지영 선생님과 화나니까 무섭네. 그녀
는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한 듯한 표정으로 살기가 도는 눈을 하고 민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형은 눈물이 나올것만 같았다. 유지영 선생님 화나면
아주 무서울까?
"안녕하세요, 전 민형이와 같은 반 친구 신의연이라고 해요~ 서울에 사
신다는 누님이죠? 이번에 내려오셨나 보네요."
그때 의연이 불시에 인사를 건넸다. 그거야 말로 결정타. 민형은 가슴
을 쥐어뜯고 싶었다. 지영이 가만히 의연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
며 대답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것은 민형에게는 사형 선고였다. 마치 애들 장단은 일단 맞춰주고 진
짜 간은 나중에 본론에서 빼어 먹겠다...... 뭐 이런식으로 느껴졌다. 유
지영 선생님 알고보면 교묘하게 무서운 여자일지도 몰라......
"이삿짐 다 옮겼는데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민형은 사색이 된 얼굴로 트럭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가능하면 오늘 좀 휴업하지 그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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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중에 뵈요~ 라는 인사말과 함께 생글생글 웃으며 떠난 의연을
보내고 민형의 집은 차가운 냉이가 감돌았다. 이삿짐이 모두 옮겨지고 이
제 집안에는 지영과 민형 둘만이 남았다. 민형은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열
심히 짐을 정리하는 척 했다.
"......"
민형은 정말 열심히 짐 정리를 했다.
"......"
정말 열심히, 혼자서 그 많은 짐을 다 챙겼다.
"......"
그러나 유지영 선생님은 전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런 민형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거 완전히 말려 죽일 작정아냐!? 제길!!"
"선생님!!"
한순간 민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뒤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영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외쳤다. 민형은 매우 진지했다.
"오늘 온 그 아이는 우리반 반장일 뿐이예요! 저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
는 아이예요! 집에 놀러오고 싶다고 해서 잠깐 왔을 뿐이라고요! 그러니까
아무런 오해도 하지 마세요!!!!"
민형은 이렇게 외치고 나서 남자다운 자신의 태도에 반했다. 유지영 선
생님도 분명히 이해해 주실거야. 그래 선생님은 원래 이해심 빼면 시체잖
아? 이렇게 생각하며 민형은 끝까지 심각한 페이스로 지영을 빤히 바라보
았다. 눈 싸움에 이기자. 이기자. 이기자......! 그때 지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민형씨는 내가 그렇게 어리다고 생각해요? 민형씨가 집에 여자 친구를
데려온다고 해서 내가 당황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남자가 대외적인 교
류활동을 펼치려면 그까짓 여자친구 한둘쯤 맘대로 만나는걸 난 허락할 수
있다고요!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예요. 왜 나를 누나라고 소개하느냔 말
이예요! 내가 민형씨 누나예요? 아니잖아요? 논리적으로 따져도 애인한테
누나라는 말을 듣는데 기분 좋을 여자 있겠어요? 내가 친구한테 민형씨를
내 동생이야 라고 소개하면 민형씨는 기분이 아무렇지도 않아요!?"
할말없다. 유지영 선생님 화나면 말발도 죽이는구나...... 민형은 갑자
기 여자가 무서워졌다.
PART-56
지영이 민형의 옆방으로 이사온 뜻깊은 날. 지영은 저녁이 되고 TV에
심야 드라마가 시작될 때 까지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지영의 방이 모두
정리되지 않았기에 현재 민형의 방에 함께 있긴 했지만 별로 함께 있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한 마디로 삐진거야 삐진거.
민형은 이 일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까 고민하느라 저녁밥도 아직 먹지
못하고 있었다.
"......"
한편 지영은 지영대로 분하고 분하고 또 분했다. 여자들은 이기분 잘
아실거예요. 서럽다 정말. 그녀는 생각끝마다 때때로 서러워서 눈에 찡
하니 눈물이 맺힐 정도였으나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자신은 몇분이라도
더 빨리 민형이 보고 싶은 마음에 부리나케 정리하고 내려왔는데, 막상 집
에 와보니 예쁘장한 여자 친구랑 한방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
히는 여자 친구는 방에 있었고 민형은 냉장고 앞에 나와 있었으나 전후 사
정 볼것없이 한방에 있었을 것이고 또 한방에 있게 될 상황이었다. 지영은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구에게 하소연 하면서 울고 싶었지만 그럴수도 없었
다. 이럴 때 지영은 자신이 민형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뼈저리게 억울했
다. 남자 친구한테 누나라고 소개 되는 기분...... 흔한 케이스는 아니지
만 과장 조금 보태서 죽고 싶었다.
"......"
지영은 세운 무릎을 이불속에 묻고 그 무릎 사이로 얼굴을 기댄채 허망
한 눈동자로 TV 브라운관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TV에선 미니 시리
즈가 한창 방영되고 있는 중이었다.
'으음......'
책상위에서 책을 보는 척 하면서 흘끔흘끔 지영의 태도를 훔쳐보는 민형
은 민형 나름대로 다분히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저렇게 태연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별로 화가 난 것 같지 않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렇게 벌
써 3시간인 것이다. 3시간! 아시겠어요? 3시간이라고! 한자리에 앉아서 3
시간동안 같은 채널만 바라보고 있는데 무섭지 않을 남자 있으면 나와보라
고 그래...... 무엇보다 보고 싶은 채널로 바꿀 수도 없고 정신적인 부담
감이 엄청나다. 민형은 입술이 바짝바짝 타 들어 갔다.
"저...... 선생님......?"
"......"
대답이 없다. 속된 말로 씹는군. 민형은 등줄기에서 서늘하게 오한이 돋
았다. 평소에 절대로 안씹던 여자가 씹으면 엄청 공포다. 그런 여자 못 만
나 봐서 모르겠다고? 만나봐 한 번......
"선생님...... 배고프지 않아요?"
뭐라고 말을 트이고 싶어 민형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대답해요 선생
님....... 겁나요.
"우리 중국요리 먹을까요? 벌써 문닫았을라나......?"
그러나 아무리 말을 걸어도 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좀 해! 이 기
집애야. 초조하잖아! 민형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돼지!! 이건 내
가 잘못한거야! 민형은 애써 이렇게 마음먹으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선생님...... 나 배고파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민형이 이렇게 속삭였다. 거짓말 아니고 정말
배고프다. 입맛은 없지만 배는 고프군. 난 짐승일까? 그순간 지영이 마치
시체처럼 스윽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민형은 깜짝 놀라 일어나서 방을
빠져 나가는 지영의 뒷 모습을 지켜 보았다. 그녀는 아무말 없이 주방에
나가서 싱크대를 뒤적 거렸다. 잠시후 가스 오르는 소리가 나고 후라이팬
에 무엇인가가 지지고 볶아지기 시작했다. 토요일날 와서 주방 실습을 한
번 하더니 우리집 주방에 대해 나보다 더 잘아네...... 민형은 흐믓한 듯
이 고개를 슬쩍빼고 요리하는 지영을 살펴 보았다. 음, 그런데...... 여전
히 한마디도 안하는군.
"......"
말없이 요리를 하는 지영은 후라이팬 위에서 지져지는 햄과 달걀 후라이
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 마디로 허무했다. 지영은 허무하거나 화
가나면 말이 없어지는 타잎이었다. 그녀는 계속 말없이 요리를 계속했다.
그때 방에서 슬쩍 빠져나온 민형이 그녀의 등뒤로 바싹붙어 어깨에 두손을
얹었다. 지영은 확- 뿌리치려고 생각하다가 감히 그런 오버 액션은 못하고
지금까지처럼 죽은 듯이 조용히 있었다.
"미안해요."
민형이 이렇게 지영의 귓속에 대고 사과하면서 두손을 가슴속으로 슬며
시 밀어 넣었다. 민형의 손이 지영의 브레지어 속으로 파고 들었고 따듯한
젖가슴의 온기가 민형의 손 끝에 닿았다. 말로 해결이 안된다면 육탄공세
다. 민형은 천천히 지영의 가슴알 위 아래로 주무르며 애무했다. 지금 요
리중이라는거 알아?
"선생님, 난 선생님 밖에 없어요. 아시죠? 제가 한 번 실수한걸 가지고
화내지 마세요. 나중에 언제라도 기회 있으면 내 애인이다! 라도 당당히
소개 할 수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민형의 입이 지영의 목을 훑고 어깨 쪽으로 내려갔다. 풀
려라, 풀려라 기분! 풀려라!
"흑......"
"!"
순간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민형이 깜짝 놀라 지영의 가슴에서 손을 빼
고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자신의 앞으로 돌려 세웠다. 지영은 울고 있었
다. 설마 기뻐서 우는거야!? ...... 저질 농담은 치우자......
"서,선생님......"
눈물이 글썽글썽 맺혀서 서러운 듯이 흐느끼는 지영을 앞에 놓고 민형은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였다. 아, 정말 그렇게 가슴이 아팠던 건가......
여자의 마음은 유리 같구나. 한 번 깨지면 복구하기 힘들다...... 민형은
예전에 어디선가 읽은 연애소설의 한 문귀가 생각났다.
"난...... 나는......"
지영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민형은 그런 지영을
내려다 보며 그녀가 나이답지 않게 참 순수하는 것을 느꼈다. 그게 그렇게
가슴이 아팠던가...... 갑자기 민형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영에게 무언가
심하게 대한 것이 없었을까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정말......"
"알아요 선생님."
지영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자꾸 울음속에 삼켰고 보다 못한 민형은 지
영의 얼굴을 가슴에 꽉 끌어 앉았다. 정말 미안하네...... 친구야 그렇게
울지마. 민형은 씁쓸하기도 하고 또 흐느끼는 지영이 예뻐보이기도 해서
그녀를 껴안고 잠시동안 숨을 죽였다.
"다음부터 절대로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을께요. 절대로. 믿는거죠?"
민형은 웃으며 지영의 등을 토닥 거렸다.
"미, 믿을께요...... "
지영이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햐
...... 애 한 번 달래기 힘드네. 민형은 그런 지영이 너무 예뻐서 다시 한
번 꽉 끌어 안아 주었다. 그녀의 머리에서는 향긋한 샴프향이 풍겨나고 있
었다.
.............................................. . . . . . . . . .
"크억!!"
"컥!"
강변을 낀 고수부지에서 한패의 고등학생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동그라
졌다. '삼목'이라는 마크가 새겨진 녹색의 교복. 십여명이 넘는 삼목 공고
의 학생들은 다리 밑에 쓰러진채 피를 흘렸고 그들의 우두머리인 허지원의
머리를 짓밟으며 중영실고의 서한형이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우리 에어리에서 싸움을 걸었으니 이정도 피해는 각오했겠지......?"
"크...... 유택천 이놈......"
"아직도 할말이 남아 있냐!!"
칵- 소리와 함께 서한영의 발길질에 가격당한 허지원이 실신하듯 쓰러졌
고 서한영의 등뒤에서 씁쓸한 듯이 담배를 피워 물고 있던 유택천이 꽁초
를 내버리고 발로 밟았다. 그의 옷은 세어지고 어지럽혀져 있었으며 무스
를 바른 머리도 이가 나가 있었다. 아마도 한바탕 사투를 즐긴 뒤의 모습
인 것 같았다.
"이 녀석들 하나씩 도로에 버리고 가는건 어떨까."
"후훗,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
중영의 패거리들이 싸움에 이겨 기고만장한 듯 이렇게 중얼거렸고 서한
영은 그들을 쭈욱 둘러 본후 유택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쩔까 대장. 이대로 돌아갈까? 아니면 돈있는 애들 좀 모아서......"
"......"
한영이 은근히 유흥가로 뜰 것을 비춰 보이자 택천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뜨자. 내일은 재낀다."
"좋았어."
택천의 말과 함께 서한영이 씨익 웃었고 패거리들은 일제히 오토바이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
같은시각 김기현의 집에서는 요란한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기현은
아직도 퉁퉁 부운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 짜증섞인 얼굴로 전화를 받았
다.
<< 기현이냐? 나다 한영. >>
"!?"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한영의 목소리를 들은 기현은 깜짝놀라 수화기를
떨어 트릴뻔 했다. 기현은 주춤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너냐. 어쩐일이냐......"
<< 오늘 삼목이랑 튕겼다. 조졌으니까 한탕하러 가려고 하는데 너도 와
라. 택천이 애들 한명도 빠지지 말고 다 오라고 했어. 빨리와. >>
"그,그래......?"
기현은 곤란한 표정으로 얼굴을 만지작 거리며 고민했다. 이대로 나가면
상처를 추궁당할 것이다. 하지만 택천이 모처럼 기분을 낸다는데 빠질수도
없고...... 기현은 머리가 복잡했다.
<< 그럼 빨리와라! 장소는 항상 모이는 일레븐! 그럼! >>
"야,야! 한영!! 기다려......!!"
한영이 기현이 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수화기를 끊었고 기현은 뒤
늦게 수화기에 대고 한영의 이름을 불렀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허무
하게 울리는 신호음을 뒤로 하고 기현의 얼굴이 난처하게 일그러졌다.
PART-57
부릉 부릉-
시내에 있는 락카페 일레븐에는 이미 수대의 오토바이가 정차해 있었
다. 택천의 패가 아닌 다른 학교의 아이들도 몇몇 눈에 띄었기에 기현은
최대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깊숙히 눌러쓰고 일레븐으로 들어갔
다. 홀안에 들어가자 후끈한 열기가 상처를 더욱 쓰리게 만들었다.
"......"
모자를 쓴 기현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자기패를 찾았다. 그때 중앙에
한 자리에서 한영이 기현을 알아보고 손을 번쩍 들었다.
"기현아! 여기다!"
"어? 어."
한영이 손을 흔들며 기현의 이름을 불렀고 기현은 엉거주춤 패가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20명이 넘은 친구들이 자리에 삥 둘러앉아 술을 마
시고 있었다. 그 중앙에 있는 택천을 본 기현의 얼굴이 푹 숙여졌다. 기현
이 자리에 앉자 한영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밝게 웃었다.
"야, 너 왜 학교 안 나왔냐? 오늘 끝내줬어. 너가 있었다면 좋았을텐
데."
한영이 기쁜 듯이 택천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보스 부활전. 죽여줬다고!"
"그,그래......?"
한영의 신나하는 모습을 본 기현이 두눈을 물끄러미 떠 앞에 있는 택천
을 흘끔 보았다. 택천은 태연하게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지만 한영의 말이
기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렇군, 오늘 삼목 공고와 싸움이 있기로
한 날이었는데 이겼구나. 게다가 한영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택천이 가세
하여 압승한 것이 분명하다. 한동안 직접 나서지 않아 매우 답답해 하고
있었는데...... 기현은 어쨋든 자신 패의 승리 소식을 들이니 마음이 뿌듯
했다. 그때 문득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기현의 얼굴을 본 한영이 말을 끊었
다.
"어......?"
한영의 눈이 커졌고 기현은 황급히 모자를 푹 눌러썼다. 큰일이군, 반창
고도 모두 때고 왔는데...... 어두워서 상처가 보이지 않을거라 생각했지
만 눈 좋은 한영이 발견한 모양이었다. 한영이 갑자기 기현의 모자를 확
벗겼다.
"너 얼굴이 왜 이러냐?"
"그,그게......!!"
당황한 기현이 어쩔줄 모르며 환영과 택천 그리고 친구들을 번갈아 보
았다. 덕분에 모든 이들이 기현의 얼굴에 부어오른 상처를 볼 수 있었
다. 한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상당히 당했는데......? 어느 솜씨좋은 놈의 짓이지?"
"아,아니야 이건 넘어져서 다친거야!"
제길, 이럴때는 안속을 줄 뻔히 알면서도 넘어서져 다쳤다는 거짓말을
하게 된단 말이야. 기현은 속으로 뜨끔하면서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했
다. 그때 택천이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동시에 패거리들
사이에서 침묵이 잃었다.
"그래, 넘어져서 다쳤구나......"
한영이 이렇게 말하며 담배연기를 후우 내 뱉었다. 믿어주는거야? 믿
어주면 좋겠는데...... 그런 기현의 앞에 고개를 들며 택천이 살기어린 눈
빛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어느 놈이 넘어 뜨렸지?"
제길! 그럼 그렇지! 이거 누구에게 당했다고 불지 않으면 흥분이 더해갈
분위기였다. 적어도 택천은 자기 패거리가 당하고 오면 절대로 그냥 넘어
가지 못했다. 택천은 유별나게 친구들을 아끼는 의리있는 깡패였던 것이
다.
"오른쪽 아구를 두발, 왼쪽 1발, 모두가 치명타야. 대단한데...... 네가
3방 맞고 뻗을 정도라면 숙달된 싸움꾼이다. 너 어디에서 당했냐?"
한영이 예리하게 상처 부위를 집어가며 기현을 몰아 붙혔다. 제길, 이렇
게 되면 절대로 같은 학교 녀석한테 당했다고 이야기 할 수 없어! 하지만
다른 학교를 걸고 넘어지면 택천은 반드시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이러지
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현의 마음은 초조하기만 했다.
"기현아...... 우린 친구야."
잠자코 있던 택천이 입을 열었다.
"누구한테 당했는지 말하란 말이야------!!!"
"우,우리학교의 전학생에게!!"
엄청난 박력. 기현은 자기도 모르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불고 말았다.
프라이드와, 민형의 경고 보다는 눈앞에 있는 택천의 분노가 훨씬 두려웠
다. 락카페의 시끄러운 음악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돌아볼
만큼 택천의 목소리는 크고 살벌했다.
"전학생......? 그것도 우리 학교라고......?"
한영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기현을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기현은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길, 쪽팔려...... 어쩌다가 이런꼴
이 됐는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했다. 역시 친구속이고 살기는 힘
들다니까.
"사실이야...... 우리반에 전학온 전학생 자식...... 조금 건방져서 손
을 봐주려고 했는데......"
"나참, 너 몸이 좀 안좋았나 보구나? 전학생 한테 당하다니."
"그,그것이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말이야!"
기현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택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택천은 조
용히 아무말도 없었다. 제길, 그런게 더 기분 나쁘단 말이야......
"전학생이라고......"
조용하던 택천이 입을 열었을 때 모두는 긴장하고 있었다.
"전학생이 설치게 놔둘 수는 없지......"
택천이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
"민형씨! 민형씨 일어나요."
아...... 졸립다. 너무 졸립다. 민형은 온몸이 푹 녹아 들어가는 노곤함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목소리는 자신을 깨우고 있었다.
"민형씨? 벌써 6시반이예요. 빨리 일어나세요."
"6시반!?"
한순간 민형이 눈을 반짝 떴다. 눈을 뜬 민형의 위에서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지영의 얼굴이 일었다. 민형은 눈을 비비며 지영의 볼을 손으로 쓰
다 듬었다.
"나참...... 6시반이라니 아직 더 잘 수 있어요. 7시40분까지 등교란
말이예요......"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죠. 빨리 일어나서 씻으세요. 밥 다했어요."
아침? 그렇군......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유지영 선생님이 집에 있으
니 아침에 일어나면 식사가 만들어져 있구나. 민형은 갑자기 형용할 수 없
는 찡한 감동이 밀려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엌으로 나가니 이미 식
탁위에 먹음직 스러운 잔찬들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흰쌀밥이 놓여져 있었
다. 우와! 이제 아침을 굶는건 여기서 끝!
"어서 씻고 나오세요. 안 씻으면 못 먹어요."
지영이 싱긋 웃으며 싱크대를 향해 몸을 돌렸고 민형은 흐믓해서 헤헤
웃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아, 기분 최고다. 이럴줄 알았으면 진작 유지영
선생님을 불러 들이는 건데. 민형은 헤벌레 한 표정으로 욕실에 들어가 급
히 세수를 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식탁에 앉으니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간결하게 차려 있었다.
"어서 드세요.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잘 먹겠습니다."
민형은 지영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막 일어나
서 씻었는데도 불구하고 최고의 맛. 아, 유지영 선생님의 사랑이 똘똘 뭉
친 아침 식사 정말 최고야! 민형은 얼굴이 하트가 되서 신나게 한 그릇을
다 비워 버렸다. 사람은 아침 식사를 든든히 해야 하루가 든든한 법이라고
누가 말했지. 명언이야! 물론 이런 맛있는 아침을 얻어 먹을 수 있는 선택
받은 자에게만 하하......
"저 오늘 일자리를 알아보러 나갔다 올거예요. 민형씨가 학교에서 돌아
오기 전에는 돌아와 있을께요."
"일자리요?"
밥을 먹으며 말을 꺼낸 지영에게 고개를 들며 민형이 두눈을 깜빡 거렸
다. 그렇군. 지영은 서울에서 다니던 일본어 학원을 그만 뒀으니 이곳에서
도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민형은 미처 그것까지는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조금 당황했다.
"어떤 일자리를 구할려고요?"
"역시 학원 강사자리가 좋겠죠. 강사라면 뭐든지 다 할수 있으니까..
...."
그말이 무언가 엄청나게 존경스럽게 들려 민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
치는 거라면 뭐든지 문제 없단 말이군. 역시 수재라서 편하긴 하구나. 공
부가 인생 사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민형은 유지영 선생님을 보면서 실
감했다. 일단 먹고사는덴 기본적으로 잘 이용되는구만.
"꼭 강사자리만 구하는 거예요?"
"그게 가장 수월하고요. 또 토요일이나 일요일날 할 수 있는 파트타임제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좋아요."
그렇군, 민형은 파트 타임은 자신이 알아봐 줘야 겠구나...... 라고 생
각하며 식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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