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다음 세상에서 함께 고향가세!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하나쯤은 비밀을 가지고 있으며 그 비밀은 누구에게도 발설을 하기 싫어한다.
고향을 말하길 꺼려한 사란이 하나 있었으나 그 사람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 마누라이자 이도 정확하게 말한다면 나보다 2살 연상인 나의 친누나였다.
난 나의 친누나와 살을 섞고 살았으며 그 결과로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낳아 지금까지 잘 길렀고 그리고 지금은 아들과 며느리에게 얹혀사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이나 며느리 그리고 사위들이 몰라서 그렇지 아이들과 며느리 그리고 사위에 대한 인척관계를 굳이 따진다면 엄청 복잡한 사이가 될 것이다.
지금 내 나이 일흔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친누나 아니 내 마누라가 살아생전에는 물론이고 죽고 나만 남은 지금까지도 난 교향에 가 보지도 못 하고 지내는 형편이다.
보통 사람들은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심지어는 경남북 전남북은 물론이고 제주도에서도 서울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것이 보통이다.
옛말처럼 사람이 태어나면 한양으로 보내고 말이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란 말처럼 말이다.
그런데 난 지금 서울이 아니라 남쪽의 작은 군 소재지의 장터 근처에 터전을 잡고 살고 있는 것이다.
몰론 친누나와 처음 야반도주를 하였을 때는 서울에서 살았다.
그럼 내가 친누나였던 마누라와 야반도주를 하게 된 경위의 이야기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풀어보기로 하겠다.
내 고향은 서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아니한 경기도의 좀 깊은 곳에 위치한 곳이다.
얼마나 오지였던지는 내 나이 9살 때 터진 6.25사변 때의 일이 이를 증명을 해 줄 것이다.
물론 나중에 서울에서 만난 고향 사람들에게 끌려갔던 먼 친척뻘 되는 형들과 아저씨들의 안위를 물은 결과 몇 명은 살아서 돌아왔고 몇 명은 소식이 없다는 말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런 산골오지마을이었지만 그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앞에서도 잠시 언급을 하였지만 얽히고설켜 일가친척이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심한 경우 어떤 사람 가정하여 A 라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서 모일 경우 모일 주체 즉 제사나 혼사의 경우 제주나 혼주와 가까운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즉 A란 사람 집에서 제사나 혼사가 있을 경우 C란 사람은 사돈 입장에서 참례를 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나의 친누나를 마누라로 데리고 산 것처럼 우리 고향마을 전체가 근친상간의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니 누구 집에서 제사를 지넬 날이 가까워오면 제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이었다.
평소에는 공부하라 나무 해 오라 밭에 김매러 가자고 부모님들이 말하였지만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도 제사 전날부터는 일손을 놓고 제사를 지넬 집에서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고등학생도래 정도의 형들이나 아저씨뻘들은 북괴 괴뢰도당들에게 끌려갔고 여자들만 남자 그 누나 내지는 아주머니뻘들이 중학생 또래들과 어울려야만 하였다.
또 하나 특이하게 변한 것이라면 초등학교 아니 정확하게 말하여 국민 학생 또래라도 덩치만 크면 중학생 또래들과 어울리게 된 것이다.
즉 중학생 또래 내지는 그 이상의 남자들이 태부족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는 나와 2살 터울의 우리 누나 그늘도 있었지만 누나하고 같은 나이였던 재종누나의 힘이 컸다.
그런데 그 눕는 자리도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거의 지정이 된 것 같았다.
나의 경우 오른쪽은 나의 친누나가 누웠고 왼쪽은 재종누나 자리였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난 내 양 옆에 친누나와 재종누나를 나란히 하고 누워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누나와는 아무런 일이 없었지만 재종누나와는 이불호청 안에서 은밀한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친누나와 재종누나 덕에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중학생 이상의 또래들이 모이는 방으로 간 첫 날 일이다.
이야기를 한참 경청하는데 나의 허벅지 뒤쪽 살에 뭔가가 닿았다.
친누나를 봤으나 친누나는 이야기를 듣느라고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반면 다른 내 옆에 누운 재종누나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은밀하게 자신의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슬며시 웃고는 이내 이야기를 듣는 척 하면서 계속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점점 손을 위로 올라왔고 그리고는 엉덩이를 쓰다듬었고 점점 밤이 깊어가면서는 손은 밑으로 내려왔고 비록 바지 위이지만 좆을 주무르기에 까지 이르렀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몇 날 아니 몇 달을 태연하게 넘어갔다.
그리고는 다시 눈치를 살피더니 그 손을 당겨 자기 치마 위이지만 보지 둔덕의 금의 갈라진 느낌을 느끼도록 까지 해 주며 얼굴을 붉혔다.
“상근아 나무하러 안 가니?”그로부터 몇 칠 후 마당에 앉은 나를 발견한 재종누나가 먼저 말을 걸었다.
“왜 누난 나물 캐게?”재종누나 손에 바구니가 들린 것을 보고는 지게를 짊어지며 물었다.
당시에도 도시에서는 연탄이란 것을 사용하고 일부는 나무를 해서 연료로 사용하였지만 우리처럼 깊은 산골오지마을에서는 나무가 연료의 전부였다.
초가을부터 시작되는 겨울나기 장작의 경우 어른들의 몫이었지만 봄이나 여름 가을에 정지에서(부엌을 말함)밥이나 꾹 그리고 숭늉을 끓이는데 사용하는 땔감은 거의 아이들의 몫이었다.
그날도 같이 올라갈 형들이나 친구들이 오면 함께 가려고 미리 지게까지 옆에 두고 놀던 참에 재종누나가 나물을 캔다며 함께 가자고 하기에 따라 나선 것이다.
“상근아 전번에 거기 만졌더니 많이 컸더라.”한참을 산길에 앞장서서 오르더니 재종누나가 오르다 말고 서더니 내가 올라가자 나의 바지 중앙을 매려다보며 손을 잡고 말하였다.
“..........”난 재종누나의 말뜻을 알기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만져보면 아니 직접 보여주면 안 되겠니?”재종누나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시선을 거기에서 때지를 못 하였다.
“아니야 여기엔 언제 사람들이 지나 갈지 모르잖아? 저기 안으로 가자”하고는 나의 손을 잡은 체 산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향하였다.
그러자 재종누나는 소리를 내지 말라는 투로 손가락 하나로 자기 입을 막았다.
거기에는 누구의 무덤인지 모르지만 두 봉의 무덤이 나란히 있었고 그 사이에 사람이 있었다.
“오빠 좋았어?”밑에 깔린 누나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몰라 하지만 오빠만 좋다면 난 그냥 좋아”하고 말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누나는 좆 맛도 모르면서 그냥 그 형이 좋다고 하니 대어 준 것으로 사료가 된다.
“!”그리고 그 형이 일어나자 난 그 형의 좆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그 형의 좆에는 오줌이 아닌 하얀 물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금방 본 것 누구에게도 말 하면 안 돼 알았지?”재종누나가 입을 연 것은 거의 십 분 이상이 지난 후였다.
“경수 형하고 미숙이 누나가 한 게 뭐야?”난 호기심에서 물었다.
요즘이야 아이들이나 어른들도 섹스니 조금 난잡한 표현을 쓴다면 빠구리라는 말을 쓰며 더 험한 경우라면 씹이란 단어를 쓰지만 당시에는 헐레란 단어를 썼었다.
“누나처럼 만지는 것도 좋아하면 하는 거야?”다시 물었다.
“누나 그런 우리도 그렇게 해 보자”사건의 발단은 그 말에서부터 시작이 된 것이었다.
“비밀 지키지?”한참을 나의 좆을 노려보던 재종누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응 지켜”난 그때까지도 엎드려 있다가는 일어나던 재종누나의 손을 잡고는 나의 발기가 된 좆을 쥐어주며 말하였다.
“많이 아파? 피도 많이 나와?”아프다는 말에도 놀랐지만 피가 나온다는 말에는 더 놀랐다.
“아니 참을 만 하대 피도 조금 나오다 말고”재종누나가 오히려 날 안심을 시켰다.
“얜? 처음엔 남자가 여자 치마 정도는 벗겨줘야 한 대”난 누나가 가만있자 바지를 내렸고 그러자 재종누나가 눈을 흘기며 말하였다.
재종누나는 미숙이 누나가 하였던 것처럼 치마를 먼저 풀밭에 깔고는 사리마다를 치마 위에 덧깔았다.
그리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부끄러웠던지 막 부풀며 형태를 보이기 시작한 젖가슴을 한쪽 팔과 손으로 가렸고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보지를 가렸다.
“상근아 천천히 박아”재종누나가 나의 발기되 좆을 잡더니 보지 제일 밑 부분에 닿게 하여 금 안으로 조금 넣게 하고는 말하였다.
“응”난 대답을 하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낮추었다.
“으~~~천천히 으~~~~천천히”좆이 조금씩 들어가자 재종누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 천천히 라고 나직하게 말하였다.
“어! 누나 아까 경수 형 좆은 미숙이 누나 보지에 완전하게 들어갔는데 왜 난 들어가다 말아?”좆이 더 전진을 못 하자 재종누나 얼굴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그렇지? 힘껏 눌러”하고 말을 마치기 무섭게 재종누나는 자신의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상근아 가만있다가 하라고 하면 해”재종누나가 내가 엉덩이를 움직이지 못 하게 두 발로 엉덩이를 감으며 말하였다.
그리고 내 나이 12살이 되던 해 말에 난 재종누나 보지 안에 경수 형처럼 하얀 좆 물을 뿌리는데 성공을 하였다.
재종누나와 난 내 나이 13살이 되던 해까지도 아무 일이 없이 그 짓은 반복이 되었다.
“그냥 난 나무하고 누나는 나물 뜯었어.”시치미를 때고 거짓말을 하였다.
“아닌데 누가 그러던데 너랑 종숙이 연애 한다며?”누나가 핵심을 찔렀다.
남자 애들 사이에서는 그런 소문이 나지 않아 몰랐지만 계집애들 사이에서는 나와 재종누나가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난 생태란 것을 그때서야 난 알았다.
그리고 그 소문의 진원지가 바로 경수 형하고 연애질을 하던 미숙이 누나라는 것도 말이다.
우리가 그들이 연애질 하는 모습을 훔쳐 본 것처럼 그들도 우리가 연애질을 하는 것을 훔쳐봤던 것이었다.
“...............”소문의 진원지까지 말하는 데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했지? 바른말 해”누나는 나의 입으로 확인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전쟁이 끝나고 늦게나마 재종누나는 중학교에 다녔고 먼 길이기에 자전거까지 타고 다니는 그 모습은 우리 누나의 질투심을 더 부추기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까지 재종누나하고 연애질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우리 누나는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
시쳇말로 문 불이 안 가려진 상태까지 가고 만 것이었다.
“어서 말 안 해!”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대고는 마치 때릴 기세를 하며 재촉하였다.
하지만 내가 완력으로 누나를 물리친다면 그 후환이 두려웠다.
분명히 엄마아버지에게 고자질을 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다리몽둥이가 성할 리가 없을 것이란 것은 짐작을 하고도 남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해......했어”하는 수 없이 실토를 하여야 하였다.
“여.....열.......두.......살”겨우 대답을 하였다.
같은 나이인 종숙이도 했는데 나라고 못 할 리가 없는 것이 누나의 말이었고 마침 집에는 아무도 없던 터라 장소 좋고 시간 좋은 것이었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면 지금처럼의 내가 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거의 1년을 난 재종누나인 종숙이 누나하고 친누나 사이를 오고가며 수시로 즐기며 살았다.
“상근아 큰일 났다”15살이 되었고 누나는 17살이 되던 해 봄에 문제가 발생을 하고 만 것이었다.
“왜? 무슨 일이야?”누나의 숨넘어가는 소리에 차분하게 물었다.
“종숙이가 임신을 한 모양이야 월경이 없대”천지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근데 나도 이번 달에 지났는데 없어”누나의 풀죽은 목소리는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너 조용히 있어”누나가 무언가 작심을 한 듯이 말하고는 엄마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
“너 간단하게 입을 옷 몇 개만 보퉁이에 싸서 나와”하고는 누나는 급하게 자기 방으로 갔다.
난 연유도 모르면서 누나가 시키는 대로 방으로 들어가 옷가지 몇 개만 주섬주섬 보퉁이에 쌌다.
“됐어”보퉁이를 들고 마당으로 나가자 이미 누나는 나보다 더 큰 보퉁이를 들고 발을 동동 굴리고 있었다.
누나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산길로 굽이굽이 돌며 걸었다.
몇 칠전 아버지가 돼지 한 마리를 장에 내다 팔아서 숨겨 둔 돈을 훔친 것이고 그 돈으로 여비를 하여 서울로 가서 둘이서 살자는 것이었다.
여비를 하고 남은 돈이라고는 쥐꼬리 정도가 전부였기에 그 돈으로 방을 얻기에는 태부족이었다.
요행이 누나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지금 생각하면)숙식만 제공하는 봉제공장에 취직을 하였지만 문제는 나였다.
나이 15살에 불과한 시골뜨기였지만 등치는 고등학생보다 좋았고 힘도 아주 좋은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누나와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는 누나를 봉제공장으로 들여보내고 난 누나가 안심을 하도록 호기에 찬 걸음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날 반겨 주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밑천도 거의 안 들고 손쉽게 돈을 버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15살이란 어린 나이에 난 일약 왕초의 친위대가 되어 왕초 곁을 따라다녔다.
그러면서도 난 누나와 수시로 만났고 만나면 제일 먼저 씹을 하고 그 다음에서야 우리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
참 눈치 빠른 사람들이라면 지금까지의 이야기 중에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하였을 것이다.
서울에 와서 비싼 돈을 들여 진찰을 받은 결과 누나는 임신이 맞았다.
어쩜 누나의 임신 때문에 내가 구두닦이 왕초 휘하로 들어가기로 작정을 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난 왕초 휘하로 들어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누나를 당시 엄청 성행하던 돌팔이 의사에게 데리고 가 이이를 지웠다.
누나는 안정된 마음으로 봉제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나 역시 왕초 밑에서 열심히 꼬봉(부하)노릇을 하였다.
내 나이 23살이 되어서는 그 세계의 우리 조직에서는 당당하게 이 인자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깡패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나와 방을 얻어놓고 본격적인 동거를 하기 시작한 누나였다.
누나는 나에게 전과가 생기기 전에 군대에 입대하여 조직에서 떠나기를 간절하게 애원하였다.
주먹세계에서는 알아주는 건달이었지만 누나 앞에서는 남들이 아는 동거인이 아닌 나약한 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난 왕초에게 조직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였고 군대에 자원입대를 하겠다고 하였다.
참 결정적으로 내가 군대에 입대를 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 해야겠다.
누나와 함께 야반도주 하다시피 고향을 떠나온 후 난 우연히 고향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 사람은 서울에 무슨 일인가 일을 보러왔다가 소매치기를 당하였는데 그 소매치기가 우리 조직원의 일원이었고 그 소매치기는 우악스런 손에 잡혀 있다는 급보를 받고 달려간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조직원인 소매치기를 잡고 있던 사람이 바로 고향사람이었다.
그 덕에 조직원은 경찰에 넘기지 않고 무사히 구출을 하였으나 문제는 그 사람이 나와 누나에 대하여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었다.
후방으로 배치를 받자 누나도 서울 살림을 접고 내가 군대생활을 하던 부대 근처로 이사를 하였다.
요즘이야 부모님이 면회를 가야만이 외박이 가능하였지만 당시에는 외박을 간다고 하면 상사들이 좋아하였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인지라 사병 하나가 외박을 가면 하사관은 그 사병이 먹을 양의 쌀과 보리쌀을 빼돌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난 토요일이면 외박을 나왔고 나오면 밤이 새는지도 모르고 누나와 뒹굴었다.
그리고 제대 말년에는 누나가 나의 아이를 임신하였고 그 애가 지금은 자라서 나의 뒤를 이어서 자동차 경정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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