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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각색
2015.10.20 22:13
귀농일기 31부
조회 수 13296 추천 수 3 댓글 7
귀농 일기 - 31부.
아침을 알리는 알림이 올리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오늘은 분주한 하루가 될 것이다. 깨끗하게 몸을 씻고 안방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장롱 깊숙한 곳에 두었던 양복을 찾았다. 귀농한 이후 양복을 입을 일이 많지 않아 서울에서 입던 양복뿐이지만 스타일 자체가 워낙 무난하여 누구한테 손가락질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와이셔츠와 양발까지 챙기고 있으니 연변댁이 와서 아침을 준비한다.
“연변댁 왔어요?”
인사를 했는데도 대답도 없다. 어제 일로 삐진 것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싱크대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연변댁을 포근히 안아주려는데, 팔을 쳐내고 저만큼 도망가서 씩씩거리며 바라본다.
“아직도 삐진 거예요?”
“삐지긴 누가 삐졌다고 그래요?”
“그럼 왜 도망가는 겁니까?”
“흥~ 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 그 여우같은 년하고 실컷 놀고 나서 왜 또 저한테 집적거리는 건데요?”
“아니 밥한 끼 같이 먹은 건데, 놀긴 누가 놀았다는 겁니까?”
“누가 모를 줄 알아요. 그 여우같은 년이 꼬리치는데, 그걸 그냥 보고만 계실 이장님이 아니잖아요?”
“쩝~ 할 말 없게 만드네. 그래요. 그 여우한테 홀려서 간이고 쓸게고 다 빼주고 왔어요.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속이 후련해요.”
“에이 씨~ 나 갈레. 이장님 혼자 밥을 차려먹던 말던 마음대로 하세요.”
연변댁이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진짜로 집으로 가려한다. 얼른 연변댁의 손을 잡으니 힘을 주며 버틴다. 하지만 가얄뿐 연변댁이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던지 조금 힘을 주어 당기자 힘없이 품으로 안겨온다. 연변댁의 손목을 풀어주고, 좁은 어깨를 감싸며 포근히 안아준다.
“미안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이거 풀어........빨리 안 놔~”
“아이~ 내가 이렇게 사과하고 있잖아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연변댁이 힘을 풀고 길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본다.
“정말이죠. 또 그러면 정말 화낼 거예요.”
“알았어요. 다시는 연변댁 마음 상하게 안 할게요.”
“알았어요. 이제 풀어줘요. 아침 준비해야죠.”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며 풀어주니 연변댁이 피식 웃으며 다시 아침을 준비한다. 아무래도 주변여자들 정리 좀 해야지 이렇게 계속 외줄타기를 하다가는 언젠가 칼이라도 맞을 것 같다. 식사가 끝나자 미리 준비한 양복으로 갈아 있었다.
“오늘은 손님 없을 거예요. 제가 휴무라고 공지 올리고, 예약을 받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펜션 정리되면 연변댁에 행사에 참석하세요.”
“알았어요. 5시까지 가면 되는 거죠?”
“예! 그렇게 하세요.”
차를 끌고, 행사장으로 가보니 기획사 김대리일행이 벌써 도착하여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무대설치가 끝나고 음향설비와 의자들을 설치하고 있다. 이곳은 특별히 챙기지 않아도 김대리가 알아서 할 것이다. 차를 끌고 일본댁 집으로 가보니 막바지 포장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포장작업은 잘 되고 있어요.”
“이장님 오셨어요. 3시 전까지는 끝날 것 같아요.”
“선물 포장 끝나면 5시 전까지 행사장으로 가져오세요. 1시간 정도면 행사가 끝나고 바로 가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니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선물은 누님이 직접 챙기세요. 절대 다른 분한테 맡기면 안 됩니다.”
“아우~ 우리 이장님 걱정도 많으셔. 제가 알아서 잘 할게요.”
“그럼 잘 부탁합니다.”
다음으로 부녀회장을 찾아보니, 마을회관에서 회원들과 함께 음식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부녀회장을 만나 준비상황을 체크한 다음 6시까지 음식들을 행사장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정신없이 돌다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펜션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하고 다시 행사장으로 향했다. 3시쯤에 연선이 감사를 모시고 온다고 했으니 그전에 사전점검을 마쳐야 한다. 행사장에 의자가 모두 깔리고, 현수막을 비롯한 풍성장식 등의 설치도 모두 끝나 사전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김대리와 행사 순서를 점검하고 있는데, 차연선이 도착했다.
“오셨어요.”
“예! 먼저 인사부터 하세요. 제가 말씀드린 감사님이세요.”
차에서 60대 노신사가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손을 내밀었고, 얼른 다가가 악수를 나누었다.
“차비서를 통해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연창문이라고 합니다.”
“아직 걸음마 단계인 우리 법인의 감사직을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차연선과 감사를 모시고, 미리 마련된 자리로 안내하니 연선이 가방에서 행사진행 시나리오와 법인 연혁을 정리한 서류를 내밀었다.
“감사님께서는 연역을 한번 검토해 주세요. 그리고 이건 제가 나름대로 정리한 행사 시나리오입니다. 이장님께서 검토해 주세요.”
“어차피 차비선님께서 사회를 맡으셨는데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죠.”
“그래도 검토는 한번 해 주셔야죠.”
시나리오를 받아 읽어보니 꼼꼼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향상 느끼는 거지만 일처리하나는 깔끔하다. 검토를 끝내고 감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마을 어르신들이 오시고, 이웃마을들에서도 많은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초대장도 보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온 것일까?
“제가 각 마을 이장님들께 통신문을 보냈어요.”
“그래서 모두 아시고 오시는 거구나?”
“도지사님까지 오시는데, 그 정도 성의는 보여드려야 하잖아요.”
“잘 하셨어요.”
4시가 되자 검정색 관용차편으로 군수가 도착했다. 간단한 악수로 인사를 대신한 군수는 참석하신 마을 어르신들을 돌며 담소를 나눈다. 이런 행사가 흔치 않으니 다음 선거를 위해서 얼굴도장이라도 찍어둘 심산인 모양이다. 구씨아저씨가 트럭으로 선물용 막걸리를 가져와 행사장 입구에 마련된 테이블에 샘플을 올리고, 그 뒤쪽으로 막걸리를 쌓아 두었다. 다음으로 정장을 차려입은 일본댁이 자리했다. 예정시간보다 10분정도 빠르게 도지사가 도착했고, 군수를 비롯한 참석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부녀회장과 청년회장이 음식들을 가져와 이제 참석해야 할 사람은 모두 참석한 것 같다. 연선이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자리산 바른 먹거린」창립총회 사회를 맡은 차연선입니다.”
연선이 인사를 하자 모두들 힘차게 박수를 친다. 연선이 다시 마이크를 잡고 내빈들을 소개한다. 가장 먼저 도지사를 소개하고, 군수를 소개한 다음 도지사와 군수를 수행해서 함께 온 공무원들도 소개한다. 다음으로 각 마을의 이장들을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법인의 이사진과 감사를 소개했다.
“국민의례는 생략하고, 법인 연역을 법인 대표이사님께서 발표해 주시겠습니다.”
단상 앞으로 나가 연선이 준비한 연역을 읽고 내려오니, 각 마을 이장들이 웅성거린다. 도와 군의 적극적인 협조아래 농촌발전기금에서 지원까지 받아서 법인이 설립되었다고 하니 각자 느끼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본래 인간이란 동물은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는가? 연혁발표가 끝나자 도지사의 치사가 이어지는데, 말이 너무 많다보니 참석자들이 하품을 한다. 다음으로 군수의 축사가 끝나고 마지막 순서로 법인 선포식이 진행되었다. 미리 마련된 케이크와 샴페인이 들어오고, 내빈들과 함께 커팅을 하니 행사장 곳곳에 설치해 두었던 폭죽이 터지고 오색 풍선이 날아오른다.
“축하합니다.”
내빈들의 축하를 인사에 일일이 답례하고 손님들을 모시고 음식들이 마련된 장소로 이동하며 연선을 부른다.
“손님들 접대 부탁합니다. 저는 이사, 감사님들과 잠깐 회의 좀 하고 올게요.”
“그렇게 하세요.”
이사인 부녀회장과 청년회장 그리고 새로 선임된 감사를 모시고 행사장 한쪽에 마련된 회의실로 이동했다. 세 사람이 자리에 착석하자 미리 준비한 회의자료를 배포했다.
“회의를 할 분위기는 아니지만 요식행사라고 생각해 주세요. 자세한 사항은 다음 회의에서 다시 하는 것으로 하죠.”
“그렇게 합시다. 이번 회의에서는 정관승인, 사업계획 및 예산안 심의가 전부겠죠.”
“감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차비서를 통해 미리 회의 자료를 받았어요. 검토해 보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더군요.”
“그럼~ 모두 생략하고 제1안 정관승인의 건, 제2안 감사선임의 건, 제3안 사업계획 및 예산안 심의 건을 한 번에 상정하겠습니다. 의견 주세요.”
“원안대로 찬성 합니다.”
“제청합니다.”
“그럼 원안대로 승인되었음을 의결합니다. 이것으로 제1차 총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회의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보다 더 빠르게 끝났고,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무대에는 초대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손님들은 미리 준비한 술과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손님들을 찾아다니며 인사하고, 주는 술을 사양하지 못하고 마시다보니 밥을 먹지 않았음에도 배가 부르다. 7시가 되어 군수와 도지사가 작별인사를 고하고 먼저 떠났다.
“이장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차비서님께서 더 수고하셨죠. 아마 차비서님 안 계셨으면 저 혼자서 쩔쩔 맸을 겁니다.”
“호호호~ 말씀만이라도 고맙네요.”
“참~ 이제 총회 회의록까지 준비되었으니 정식 등록절차에 들어가야겠죠.”
“예! 월요일에 서류준비해서 군청으로 오세요. 마무리 지어야죠.”
“알겠습니다. 오전에 건축업자 면담하고, 3시까지 찾아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제 우리도 일 이야기는 그만하고 좀 먹죠.”
“아직 식사도 못 하셨어요.”
“다른 분들 챙겨 주다보니 먹을 정신이나 있었나요.”
“이쪽으로 오세요.”
연선을 감사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고, 함께 앉아 음식을 먹는다. 감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느낀 것이지만 연선의 말대로 애향심도 깊고, 성격도 있어 보인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가자 부녀회장과 청년회장도 함께 불려 정담을 나누었다. 앞으로 법인을 이끌어가야 사람들이니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8시가 넘어가니 다른 손님들도 서서히 빠져나가고, 이젠 동네 어르신들만 남았다.
“이제 저도 가야겠네요. 감사님~ 가시죠.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그렇게 하지.”
감사와 연선이 떠나는 것을 배웅하니 정말 이제는 모든 행사가 끝났다. 남아계신 동네 어르신들께 남은 음식들을 정성스럽게 포장해 드렸다. 무대를 철거하던 김대리가 달려왔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행사가 잘 끝났어요.”
“별말씀을 다 하세요. 오히려 저희가 감사드려야 하죠.”
“이제 철수하셔도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철수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사장을 빠져나가자 철수작업이 시작되었다. 대충 보아도 2시간 이상은 걸릴 것 같다. 김대리에게 먼저 작별인사를 고하고 펜션으로 향했다. 손님 접대를 위해 많은 술을 마셔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해 답답한 양복을 벗어던지니 속이다 후련하다. 이놈의 넥타이가 지겨워서 서울 생활을 접은 것인데, 여기까지 와서 다시 매게 될 줄은 몰랐다. 샤워를 끝내고 침대에 쓰려졌다. 피곤하다.
다음날 아침 어김없이 연변댁이 왔고,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한 휴식을 빠져 있는데 11시쯤에 핸드폰이 울린다. 누가 또 편안한 휴식을 방해하는 것일까?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경미다. 설마~ 아내가 전화를 했단 말인가? 하지만 전화번호를 확인해 보니 아내가 아니라 김경미였다. 성을 안 쓰고 저장을 했더니 잠시 착각한 모양이다.
“예보세요. 경미학생이에요.”
“예! 저에요. 이장님.”
“CI작업은 잘 되고 있죠.”
“이제 디자인 작업 끝나고 색 보정 작업을 하고 있어요. 참~ 어제 창립총회 하셨다면서요?”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할아버지께서 전화로 알려주셨어요. 그러면서 CI은 어떻게 됐냐고 호통을 치시는 거예요?”
“작업은 순서대로 잘 되고 있잖아요! 근데 왜 그걸로 호통을 치세요.”
“할아버지께 차근차근 설명해 드렸죠. 근데 이해을 못하시고, 창립총회까지 했으니 당장 만들어서 갖고 오라는 겁니다.”
“하하하~ 제가 찾아뵙고 말씀드릴게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제가 오늘 내려갈 거예요! 기본적인 상표하고 캐릭터 디자인은 끝났어요. 그걸로 우선 상표등록을 진행하시면 될 것 같아요.”
“조금 전에 보정작업을 하신다고 했는데, 그건 뭐죠.”
“차량, 박스, 문패, 포장지 기타 등등이에요. 그런 건 상표등록하실 필요 없잖아요.”
“그렇죠. 부수적인 것까지 할 필요는 없죠.”
“자세한 것은 내려가서 말씀드릴게요.”
“몇 시쯤에 오세요.”
“5시 도착예정인데, 먼저 할아버지 집으로 가야하니까, 저녁 먹고 7시 30분쯤에 펜션으로 갈게요.”
“혼자 오시는 거죠?”
“예! 오늘은 혼자예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바쁘다고 하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뵙죠!”
본래 스케줄은 11월 말이나 끝날 작업이 중순인데 벌써 기본디자인인 끝났다고 한다. 아무래도 경미 할아버지께서 빨리 끝내라고 보채신 모양이다. 경미 이야기를 들어보아야겠지만 기본상표 디자인이 끝났다면 상표등록을 해야 한다. 인터넷으로 변리사 사무실 전화번호를 검색해서 기본적인 상담을 진행했다.
오랜만에 집안에서 컴퓨터 작업에 매달렸다. 이제 법인도 설립되었으니 공동판매사이트를 오픈해야 한다. 저녁시간이 되자 주말이라 그런지 손님들이 많다. 손님들을 안내하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7시가 넘어 연변댁을 보냈다. 아직 예약한 손님 일부가 도착하지 않아 거실 컴퓨터에 앉아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누구세요?”
“이장님! 저 경미에요.”
시계를 보니 7시 30분이 넘었다. 문을 열어주니 몸에 달라붙은 스킨이진에 하얀 티와 붉은색 점퍼차림의 경미가 있었다. 경미는 어깨에 걸친 원통을 들고 반갑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밖에 춥죠. 어서 들어와요.”
경미가 신발을 벗고 들어와 주변을 살펴본다.
“저기 소파에 앉으세요. 뭐~ 마실 거라도 줄까요?”
“음료수 있으면 주세요. 근데 오늘은 그 언니가 안 보이네요.”
“연변댁 말하는 거예요. 이 시간이면 집에 갔죠.”
“아~ 그래요.”
부엌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경미에게 전해 주고 의자를 빼서 바로 앞에 앉았다.
“뭐하고 계셨어요?”
“컴퓨터 작업 좀 하고 있었어요. 이제 법인이 설립되었으니 사이트도 오픈해야죠.”
“여전히 바쁘시네요.”
“어제 행사 끝났으니 이젠 조금 한가해 지겠죠. 그나저나 경미학생은 잘 지냈어요.”
“요즘 취업준비에 바쁘죠. 졸업반이잖아요.”
“아~ 그렇겠구나. 어디로 취업할 생각이에요?”
“요즘 같은 시기에 오라는 곳만 있어도 감지덕지(感之德之)죠. 특히 우리 같은 지방대는 취업하기 더 힘들잖아요.”
“대학이 무슨 상관이에요. 실력만 있으면 되죠?”
“저 같은 사회 초년병이 실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요. 또 사실 회사입장에서도 같은 조건이면 서울 명문대 출신을 먼저 뽑지 지방대 출신을 뽑겠어요.”
“쩝~ 듣고 보니 씁쓸하네요.”
“그 이야기는 그만하죠. 일단 이거부터 보세요.”
경미가 원통에서 컬러로 인쇄된 3장의 그림을 꺼냈다. 첫 번째 것은 저번에 3가지 시안 중에서 선택한 디자인을 다듬어서 완성한 그림이고, 나머지는 기본디자인을 바탕으로 남자와 여자아이를 형상화한 캐릭터였다.
“기본 디자인은 이미 보셨으니 따로 설명하지 않을게요. 캐릭터는 남자아이는 ‘지산’, 여자아이는 ‘지수’라고 지었어요. 합치면 지산지수가 되고 굳이 한자로 표현하자면 지혜로운 산과 지혜로운 물이 되요.”
“지산지수 좋은데요. 푸른 버섯머리는 산을 형상화 한 것 같은데, 가슴에 두른 하얀 띠는 뭐죠?”
“물, 계곡을 표현한 건데, 때에 따라서는 간단한 표어도 삽입할 수 있도록 디자인 한 겁니다.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아주 좋아요. 디자인에 들어간 색들에 대해서 고유번호가 있다고 하셨죠. 그것도 정해진 건가요?”
“예! 밑에 박스에 전체 사이즈, 색깔 고유번호 등이 표시되어 있어요.”
“음~ 여기 있었네요. 이게 파일로 받을 수 있어요.”
“제가 USB에 담아 왔어요. 마침 컴퓨터가 커져 있으니 복사해 드릴게요.”
경미가 컴퓨터에 USB를 연결하고 폴더를 만든 다음 파일들을 복사했다.
“나머지 디자인이 완성되면 메일로 웹하드 ID하고 PW를 알려드릴게요. 우리 학과에서 공통으로 쓰는 웹하드가 있거든요.”
“알았어요. 그럼 나머지 디자인이 모두 완성되면 책자와 CD로 제작하시는 거죠.”
“예! 그렇게 해야죠.”
“저기 부탁이 있는데, 다른 것보다 깃발하고 간판, 명패, 명함, 푯말을 먼저 디자인 해주세요. 다음주 부터 창고 수리에 들어가는데, 수리 끝나고 정식으로 사무실 개소하면 당장 필요한 것들입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 게요. 디자인에 대해 또 하실 말씀 있나요.”
“다 이야기 한 것 같아요. 나머지는 경미학생이 알아서 잘 해주시겠죠.”
“그럼 이제 업무적인 이야기는 끝내고........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개인적인 이야기?........무슨 이야기요?”
경미가 답답한지 입고 있던 점퍼를 벗고 주스를 조금 마신다.
“이장님! 저에게 주실 것 있지 않나요?”
“저한테 맡겨놓은 물건이라도 있었나요. 아니면 재료비가 부족한 겁니까?”
경미는 말없이 바라보다가 손을 벌린다. 도대체 무엇을 달라는 건지 모르겠다.
“뭘 달라는 건지 말을 해야 알죠?”
“제 속옷!”
“엉? 속옷이요? 무슨 속옷?”
“저번에 제가 입고 있던 속옷 훔쳐가셨잖아요.”
갑자기 머리가 띵하다. 아무래도 그때 사건을 말하는 것 같다. 당시 술에 취해 쓰려져 자고 있는데, 수정이가 경미를 올딱 벗겨서 옆에 눕혀 두었다. 대행이 중간에 깨서 경미가 깨지 않도록 겉옷만 입히고 도망(?)쳤다. 그런데 지금 와서 속옷을 달라고 한다. 다시 말해 경미도 당시 상황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수정학생이 이야기 했어요?”
“물어보나마나 답이 뻔한데 뭐하려 물어봐요.”
“답이 뻔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장님 방이었어요. 그런데 뭐가 허전한 거예요. 알고 보니 입고 있던 속옷이 없더군요. 그날 밤, 저하고 이장님, 수정이 밖에 없었어요. 같은 여자인 수정이가 훔쳐갈 일은 없으니 그럼 범인이 누구겠어요?”
“끄응~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아니 수정학생이 정말 아무 말도 안했어요.”
“했죠. 그 나쁜 년이 그날 상황을 아주 세세하게 설명해 주더군요. 하지만 속옷 이야기는 없었어요.”
“아~ 그래요. 그날 저도 정신이 없어서 속옷을 깜박했어요.”
“일이야 어찌 되었던 이장님이 제 속옷을 가지고 계신 것은 확실하잖아요. 그러니까 주세요.”
“그냥 제가 돈으로 드리면 안 될까요. 새 옷으로 사면되잖아요.”
“설마 제가 그만한 돈이 없어서 달라고 하겠어요.”
“환장하겠네. 아니 없는 걸 어떻게 줍니까?”
“주시기 싫으니까 없다고 하시는 거죠?”
“아니 내가 무슨 변태니까? 여자 속옷이나 감추고 있게........!!”
“그럼 왜 없어요. 분명 그날 저녁까지 입고 있던 속옷이 어디로 갔단 말이에요.”
“버렸어요.”
“버려요?.........왜 남의 물건을 함부로 버려요. 최소한 주인한테 물어보고 버려야 정상 아닌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제가 어떻게 그걸 경미학생한테 물어보겠어요?”
“못 믿겠어요. 분명히 감춰두시고 안 주시는 거죠.”
“미치겠네! 정말.........!!”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대체 이제 와서 왜 그걸 다라는 것일까? 경미는 실눈을 뜨고 째려보다가 내가 한숨만 쉬고 있자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향한다.
“지금 어디가요?”
“제가 직접 찾아보게요.”
“아니 이 사람이.........없다니까! 버렸다니까!”
“제가 찾아보고 없으면 포기할게요.”
“속고만 살았어요. 왜 사람 말을 못 믿어요.”
“방금 버렸다고 하셨죠. 그럼 어차피 없는데 제가 찾아봐도 상관없잖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결단이 서질 않아 지켜보고 있으니 경미가 성큼성큼 안방으로 들어간다. 당시 속옷을 침대 밑에 쑤셔 박았다. 매일 청소하는 연변댁이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다면 안쪽 깊숙한 곳에 있을 공산이 크다.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안방으로 가보니, 이건 또 무슨 황당한 경우란 말인가? 경미학생이 바닥에 엎드려 침대 밑을 살펴보더니 손을 틈새에 집어넣고 낑낑거린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찾았어요. 혹시 기다란 막대기 없어요. 손이 닫지 않네요.”
“잠깐 일어나 봐요. 이야기 좀 합시다.”
경미학생이 고개를 들어 힐끗 보더니 손을 털고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왜 거짓말 하셨어요. 말씀해 보세요.”
“그러니까? 이거 참~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여튼 그날 일은 수정학생의 장난으로 시작됐고, 어떻게 진행되다보니 일이 그렇게 됐어요. 그리고 그 속옷들이 거기 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잃어먹고 있었어요. 미안해요. 제가 기억을 못해서........어차피 그 옷, 경미학생이 다시 입을 것도 아니니 제가 꺼내서 버릴게요. 그럼 되지 않을까요?”
경미는 말없이 지켜보더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제가 그날 일을 기억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무리 취했어도 옷을 벗기는데, 벌거벗은 이장님이랑 함께 있는데, 이장님께서 깨어나 훔쳐보는데, 이장님이 옷을 입혀주는데, 그것도 모르고 잠이나 쿨쿨 자는 한심한 년인 줄 아셨어요?”
“미안합니다. 저는 경미학생이 자고 있는 줄 알았어요. 만일 알았다면 그때 사과했을 겁니다.”
“왜 자꾸만 미안하다고만 하시는 거죠. 이장님은 저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 있어요. 제가 왜 그랬는지, 제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제가 이장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지금 왜 이러고 있는지.........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 있어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최근 들어 이런 경험(?)을 몇 번 해봤기에 온몸의 세포들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젠 싫다. 더 이상 휩쓸리고 싶지 않다. 아내를 비롯한 주변 여자들 문제만으로도 대가리가 빠개질 것 같은데, 경미학생 하고까지 문제를 만들고 싶진 않다. 이런 경우 미적거리다가는 또 분위기에 휩쓸려 사고를 칠지 모른다. 하지만 순수한 경미에게 모진 말은 할 수 있으니 알아듣게 설명해야 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환경적인 요인이나 심리적인 요인도 있으며 상대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안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걸 끝까지 고집하다보면 일차적으로 내가 힘들고 상대까지 힘들게 만듭니다.”
“말 돌리지 마시고, 이장님의 솔직한 마음을 말씀하세요.”
침대 앞에 서서 일장연설을 떠들고 있는데, 경미가 눈을 치켜뜨고 올려다보며 앙칼질 목소리로 말한다. 그냥 적당히 넘어갈 분위기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굳이 7시가 넘어서, 그것도 펜션으로 찾아온 것도 그렇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연변댁이 없는지부터 확인한 것으로 보아 단단히 벼르고 온 모양이다. 그렇다면 보다 분명한 의사를 밝혀야 한다.
“휴~~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경미학생은 동네 어르신의 손녀이며, 제가 CI를 부탁한 학생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미학생에 대해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이장님은 제가 여자로 안 보이시는 모양이죠.”
“그건 아닙니다. 경미학생은 아름답고 순수한 여성입니다. 다만 멀 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꽃이기에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지금은요. 지금 이장님 앞에 있잖아요. 손만 내밀면 꺾을 수 있는 꽃이잖아요.”
“꽃은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나만의 욕심 때문에 꺾어버리면 금방 시들어버리죠.”
경미는 입술을 깨물고 바라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런 선문답. 정말 싫어. 이장님! 제가 싫어요. 왜 제 마음을 몰라주시는 거죠.”
“순간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입니다. 혼자만 생각하지 마시고 주위를 둘려보세요. 나로 인해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마세요.”
“제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건가요. 이장님이 저 때문에 힘들어 하고 계시는 건가요?”
“저는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놈입니다. 하지만 경미학생은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분입니다. 앞으로 살아가며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중에서 경미학생이 진정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분을 만나게 될 겁니다.”
경미는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은 말씀이네요. 그런데 수정이는 되고, 저는 안 된다. 그 해괴망측한 논리는 어떻게 설명하실 거죠?”
수정과의 일까지 알고 있다. 수정이가 떠벌렸단 말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떠벌렸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사차원(?)인 수정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이건 또 어떻게 변명해야 할까? 답답하다. 안 돌아가는 대가리 굴리기보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수정학생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일은 서로가 서로를 원하고, 사랑해서 이루어진 행위가 아닙니다.”
“누가 사랑해 달라고 했나요. 그냥 수정이처럼 편하게 생각하시면 되잖아요.”
“난 경미학생이 건강하고 행복한 사랑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전부터 이야기했죠. 경미학생, 우리 와이프하고 이름도 같고 젊었을 때 분위기도 비슷해요. 그래서 더욱 경미학생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그 잘못된 선택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이장님은 제가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하세요. 수정이와 다녀간 다음날부터 고민하고 고민했어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곤 했어요. 스스로 최면을 결어보기도 하고, 미쳤다고 자책도 해 봤어요.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감정이 사라지기는커녕 깊어만 갔어요. 그리고 오늘 힘들게 용기를 내서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주변에 경미학생을 사랑하는 분들을 돌아보세요. 그리고 과연 그 선택이 올바른 선택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해 보세요.”
“그래도 변하지 않음 어떻게 하죠.”
“그때 다시 이야기해요. 그리고 오늘은 그만 돌아가세요.”
경미는 입술을 깨물고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장님 말씀대로 다시 고민해 볼게요. 대신 이장님도 저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 밑에 있는 속옷들은 제가 꺼내서 버릴게요.”
“알았어요.”
경미는 거실로 나와 소파에 벗어두었던 점퍼를 걸치고 돌아갔다. 세상에는 꺾고 싶은 꽃도 많지만 지켜주고 싶은 꽃도 있다.
<< 다음 편에 계속 >>
아침을 알리는 알림이 올리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오늘은 분주한 하루가 될 것이다. 깨끗하게 몸을 씻고 안방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장롱 깊숙한 곳에 두었던 양복을 찾았다. 귀농한 이후 양복을 입을 일이 많지 않아 서울에서 입던 양복뿐이지만 스타일 자체가 워낙 무난하여 누구한테 손가락질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와이셔츠와 양발까지 챙기고 있으니 연변댁이 와서 아침을 준비한다.
“연변댁 왔어요?”
인사를 했는데도 대답도 없다. 어제 일로 삐진 것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싱크대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연변댁을 포근히 안아주려는데, 팔을 쳐내고 저만큼 도망가서 씩씩거리며 바라본다.
“아직도 삐진 거예요?”
“삐지긴 누가 삐졌다고 그래요?”
“그럼 왜 도망가는 겁니까?”
“흥~ 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 그 여우같은 년하고 실컷 놀고 나서 왜 또 저한테 집적거리는 건데요?”
“아니 밥한 끼 같이 먹은 건데, 놀긴 누가 놀았다는 겁니까?”
“누가 모를 줄 알아요. 그 여우같은 년이 꼬리치는데, 그걸 그냥 보고만 계실 이장님이 아니잖아요?”
“쩝~ 할 말 없게 만드네. 그래요. 그 여우한테 홀려서 간이고 쓸게고 다 빼주고 왔어요.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속이 후련해요.”
“에이 씨~ 나 갈레. 이장님 혼자 밥을 차려먹던 말던 마음대로 하세요.”
연변댁이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진짜로 집으로 가려한다. 얼른 연변댁의 손을 잡으니 힘을 주며 버틴다. 하지만 가얄뿐 연변댁이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던지 조금 힘을 주어 당기자 힘없이 품으로 안겨온다. 연변댁의 손목을 풀어주고, 좁은 어깨를 감싸며 포근히 안아준다.
“미안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이거 풀어........빨리 안 놔~”
“아이~ 내가 이렇게 사과하고 있잖아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연변댁이 힘을 풀고 길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본다.
“정말이죠. 또 그러면 정말 화낼 거예요.”
“알았어요. 다시는 연변댁 마음 상하게 안 할게요.”
“알았어요. 이제 풀어줘요. 아침 준비해야죠.”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며 풀어주니 연변댁이 피식 웃으며 다시 아침을 준비한다. 아무래도 주변여자들 정리 좀 해야지 이렇게 계속 외줄타기를 하다가는 언젠가 칼이라도 맞을 것 같다. 식사가 끝나자 미리 준비한 양복으로 갈아 있었다.
“오늘은 손님 없을 거예요. 제가 휴무라고 공지 올리고, 예약을 받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펜션 정리되면 연변댁에 행사에 참석하세요.”
“알았어요. 5시까지 가면 되는 거죠?”
“예! 그렇게 하세요.”
차를 끌고, 행사장으로 가보니 기획사 김대리일행이 벌써 도착하여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무대설치가 끝나고 음향설비와 의자들을 설치하고 있다. 이곳은 특별히 챙기지 않아도 김대리가 알아서 할 것이다. 차를 끌고 일본댁 집으로 가보니 막바지 포장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포장작업은 잘 되고 있어요.”
“이장님 오셨어요. 3시 전까지는 끝날 것 같아요.”
“선물 포장 끝나면 5시 전까지 행사장으로 가져오세요. 1시간 정도면 행사가 끝나고 바로 가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니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선물은 누님이 직접 챙기세요. 절대 다른 분한테 맡기면 안 됩니다.”
“아우~ 우리 이장님 걱정도 많으셔. 제가 알아서 잘 할게요.”
“그럼 잘 부탁합니다.”
다음으로 부녀회장을 찾아보니, 마을회관에서 회원들과 함께 음식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부녀회장을 만나 준비상황을 체크한 다음 6시까지 음식들을 행사장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정신없이 돌다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펜션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하고 다시 행사장으로 향했다. 3시쯤에 연선이 감사를 모시고 온다고 했으니 그전에 사전점검을 마쳐야 한다. 행사장에 의자가 모두 깔리고, 현수막을 비롯한 풍성장식 등의 설치도 모두 끝나 사전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김대리와 행사 순서를 점검하고 있는데, 차연선이 도착했다.
“오셨어요.”
“예! 먼저 인사부터 하세요. 제가 말씀드린 감사님이세요.”
차에서 60대 노신사가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손을 내밀었고, 얼른 다가가 악수를 나누었다.
“차비서를 통해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연창문이라고 합니다.”
“아직 걸음마 단계인 우리 법인의 감사직을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차연선과 감사를 모시고, 미리 마련된 자리로 안내하니 연선이 가방에서 행사진행 시나리오와 법인 연혁을 정리한 서류를 내밀었다.
“감사님께서는 연역을 한번 검토해 주세요. 그리고 이건 제가 나름대로 정리한 행사 시나리오입니다. 이장님께서 검토해 주세요.”
“어차피 차비선님께서 사회를 맡으셨는데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죠.”
“그래도 검토는 한번 해 주셔야죠.”
시나리오를 받아 읽어보니 꼼꼼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향상 느끼는 거지만 일처리하나는 깔끔하다. 검토를 끝내고 감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마을 어르신들이 오시고, 이웃마을들에서도 많은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초대장도 보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온 것일까?
“제가 각 마을 이장님들께 통신문을 보냈어요.”
“그래서 모두 아시고 오시는 거구나?”
“도지사님까지 오시는데, 그 정도 성의는 보여드려야 하잖아요.”
“잘 하셨어요.”
4시가 되자 검정색 관용차편으로 군수가 도착했다. 간단한 악수로 인사를 대신한 군수는 참석하신 마을 어르신들을 돌며 담소를 나눈다. 이런 행사가 흔치 않으니 다음 선거를 위해서 얼굴도장이라도 찍어둘 심산인 모양이다. 구씨아저씨가 트럭으로 선물용 막걸리를 가져와 행사장 입구에 마련된 테이블에 샘플을 올리고, 그 뒤쪽으로 막걸리를 쌓아 두었다. 다음으로 정장을 차려입은 일본댁이 자리했다. 예정시간보다 10분정도 빠르게 도지사가 도착했고, 군수를 비롯한 참석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부녀회장과 청년회장이 음식들을 가져와 이제 참석해야 할 사람은 모두 참석한 것 같다. 연선이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자리산 바른 먹거린」창립총회 사회를 맡은 차연선입니다.”
연선이 인사를 하자 모두들 힘차게 박수를 친다. 연선이 다시 마이크를 잡고 내빈들을 소개한다. 가장 먼저 도지사를 소개하고, 군수를 소개한 다음 도지사와 군수를 수행해서 함께 온 공무원들도 소개한다. 다음으로 각 마을의 이장들을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법인의 이사진과 감사를 소개했다.
“국민의례는 생략하고, 법인 연역을 법인 대표이사님께서 발표해 주시겠습니다.”
단상 앞으로 나가 연선이 준비한 연역을 읽고 내려오니, 각 마을 이장들이 웅성거린다. 도와 군의 적극적인 협조아래 농촌발전기금에서 지원까지 받아서 법인이 설립되었다고 하니 각자 느끼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본래 인간이란 동물은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는가? 연혁발표가 끝나자 도지사의 치사가 이어지는데, 말이 너무 많다보니 참석자들이 하품을 한다. 다음으로 군수의 축사가 끝나고 마지막 순서로 법인 선포식이 진행되었다. 미리 마련된 케이크와 샴페인이 들어오고, 내빈들과 함께 커팅을 하니 행사장 곳곳에 설치해 두었던 폭죽이 터지고 오색 풍선이 날아오른다.
“축하합니다.”
내빈들의 축하를 인사에 일일이 답례하고 손님들을 모시고 음식들이 마련된 장소로 이동하며 연선을 부른다.
“손님들 접대 부탁합니다. 저는 이사, 감사님들과 잠깐 회의 좀 하고 올게요.”
“그렇게 하세요.”
이사인 부녀회장과 청년회장 그리고 새로 선임된 감사를 모시고 행사장 한쪽에 마련된 회의실로 이동했다. 세 사람이 자리에 착석하자 미리 준비한 회의자료를 배포했다.
“회의를 할 분위기는 아니지만 요식행사라고 생각해 주세요. 자세한 사항은 다음 회의에서 다시 하는 것으로 하죠.”
“그렇게 합시다. 이번 회의에서는 정관승인, 사업계획 및 예산안 심의가 전부겠죠.”
“감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차비서를 통해 미리 회의 자료를 받았어요. 검토해 보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더군요.”
“그럼~ 모두 생략하고 제1안 정관승인의 건, 제2안 감사선임의 건, 제3안 사업계획 및 예산안 심의 건을 한 번에 상정하겠습니다. 의견 주세요.”
“원안대로 찬성 합니다.”
“제청합니다.”
“그럼 원안대로 승인되었음을 의결합니다. 이것으로 제1차 총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회의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보다 더 빠르게 끝났고,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무대에는 초대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손님들은 미리 준비한 술과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손님들을 찾아다니며 인사하고, 주는 술을 사양하지 못하고 마시다보니 밥을 먹지 않았음에도 배가 부르다. 7시가 되어 군수와 도지사가 작별인사를 고하고 먼저 떠났다.
“이장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차비서님께서 더 수고하셨죠. 아마 차비서님 안 계셨으면 저 혼자서 쩔쩔 맸을 겁니다.”
“호호호~ 말씀만이라도 고맙네요.”
“참~ 이제 총회 회의록까지 준비되었으니 정식 등록절차에 들어가야겠죠.”
“예! 월요일에 서류준비해서 군청으로 오세요. 마무리 지어야죠.”
“알겠습니다. 오전에 건축업자 면담하고, 3시까지 찾아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제 우리도 일 이야기는 그만하고 좀 먹죠.”
“아직 식사도 못 하셨어요.”
“다른 분들 챙겨 주다보니 먹을 정신이나 있었나요.”
“이쪽으로 오세요.”
연선을 감사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고, 함께 앉아 음식을 먹는다. 감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느낀 것이지만 연선의 말대로 애향심도 깊고, 성격도 있어 보인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가자 부녀회장과 청년회장도 함께 불려 정담을 나누었다. 앞으로 법인을 이끌어가야 사람들이니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8시가 넘어가니 다른 손님들도 서서히 빠져나가고, 이젠 동네 어르신들만 남았다.
“이제 저도 가야겠네요. 감사님~ 가시죠.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그렇게 하지.”
감사와 연선이 떠나는 것을 배웅하니 정말 이제는 모든 행사가 끝났다. 남아계신 동네 어르신들께 남은 음식들을 정성스럽게 포장해 드렸다. 무대를 철거하던 김대리가 달려왔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행사가 잘 끝났어요.”
“별말씀을 다 하세요. 오히려 저희가 감사드려야 하죠.”
“이제 철수하셔도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철수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사장을 빠져나가자 철수작업이 시작되었다. 대충 보아도 2시간 이상은 걸릴 것 같다. 김대리에게 먼저 작별인사를 고하고 펜션으로 향했다. 손님 접대를 위해 많은 술을 마셔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해 답답한 양복을 벗어던지니 속이다 후련하다. 이놈의 넥타이가 지겨워서 서울 생활을 접은 것인데, 여기까지 와서 다시 매게 될 줄은 몰랐다. 샤워를 끝내고 침대에 쓰려졌다. 피곤하다.
다음날 아침 어김없이 연변댁이 왔고,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한 휴식을 빠져 있는데 11시쯤에 핸드폰이 울린다. 누가 또 편안한 휴식을 방해하는 것일까?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경미다. 설마~ 아내가 전화를 했단 말인가? 하지만 전화번호를 확인해 보니 아내가 아니라 김경미였다. 성을 안 쓰고 저장을 했더니 잠시 착각한 모양이다.
“예보세요. 경미학생이에요.”
“예! 저에요. 이장님.”
“CI작업은 잘 되고 있죠.”
“이제 디자인 작업 끝나고 색 보정 작업을 하고 있어요. 참~ 어제 창립총회 하셨다면서요?”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할아버지께서 전화로 알려주셨어요. 그러면서 CI은 어떻게 됐냐고 호통을 치시는 거예요?”
“작업은 순서대로 잘 되고 있잖아요! 근데 왜 그걸로 호통을 치세요.”
“할아버지께 차근차근 설명해 드렸죠. 근데 이해을 못하시고, 창립총회까지 했으니 당장 만들어서 갖고 오라는 겁니다.”
“하하하~ 제가 찾아뵙고 말씀드릴게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제가 오늘 내려갈 거예요! 기본적인 상표하고 캐릭터 디자인은 끝났어요. 그걸로 우선 상표등록을 진행하시면 될 것 같아요.”
“조금 전에 보정작업을 하신다고 했는데, 그건 뭐죠.”
“차량, 박스, 문패, 포장지 기타 등등이에요. 그런 건 상표등록하실 필요 없잖아요.”
“그렇죠. 부수적인 것까지 할 필요는 없죠.”
“자세한 것은 내려가서 말씀드릴게요.”
“몇 시쯤에 오세요.”
“5시 도착예정인데, 먼저 할아버지 집으로 가야하니까, 저녁 먹고 7시 30분쯤에 펜션으로 갈게요.”
“혼자 오시는 거죠?”
“예! 오늘은 혼자예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바쁘다고 하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뵙죠!”
본래 스케줄은 11월 말이나 끝날 작업이 중순인데 벌써 기본디자인인 끝났다고 한다. 아무래도 경미 할아버지께서 빨리 끝내라고 보채신 모양이다. 경미 이야기를 들어보아야겠지만 기본상표 디자인이 끝났다면 상표등록을 해야 한다. 인터넷으로 변리사 사무실 전화번호를 검색해서 기본적인 상담을 진행했다.
오랜만에 집안에서 컴퓨터 작업에 매달렸다. 이제 법인도 설립되었으니 공동판매사이트를 오픈해야 한다. 저녁시간이 되자 주말이라 그런지 손님들이 많다. 손님들을 안내하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7시가 넘어 연변댁을 보냈다. 아직 예약한 손님 일부가 도착하지 않아 거실 컴퓨터에 앉아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누구세요?”
“이장님! 저 경미에요.”
시계를 보니 7시 30분이 넘었다. 문을 열어주니 몸에 달라붙은 스킨이진에 하얀 티와 붉은색 점퍼차림의 경미가 있었다. 경미는 어깨에 걸친 원통을 들고 반갑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밖에 춥죠. 어서 들어와요.”
경미가 신발을 벗고 들어와 주변을 살펴본다.
“저기 소파에 앉으세요. 뭐~ 마실 거라도 줄까요?”
“음료수 있으면 주세요. 근데 오늘은 그 언니가 안 보이네요.”
“연변댁 말하는 거예요. 이 시간이면 집에 갔죠.”
“아~ 그래요.”
부엌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경미에게 전해 주고 의자를 빼서 바로 앞에 앉았다.
“뭐하고 계셨어요?”
“컴퓨터 작업 좀 하고 있었어요. 이제 법인이 설립되었으니 사이트도 오픈해야죠.”
“여전히 바쁘시네요.”
“어제 행사 끝났으니 이젠 조금 한가해 지겠죠. 그나저나 경미학생은 잘 지냈어요.”
“요즘 취업준비에 바쁘죠. 졸업반이잖아요.”
“아~ 그렇겠구나. 어디로 취업할 생각이에요?”
“요즘 같은 시기에 오라는 곳만 있어도 감지덕지(感之德之)죠. 특히 우리 같은 지방대는 취업하기 더 힘들잖아요.”
“대학이 무슨 상관이에요. 실력만 있으면 되죠?”
“저 같은 사회 초년병이 실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요. 또 사실 회사입장에서도 같은 조건이면 서울 명문대 출신을 먼저 뽑지 지방대 출신을 뽑겠어요.”
“쩝~ 듣고 보니 씁쓸하네요.”
“그 이야기는 그만하죠. 일단 이거부터 보세요.”
경미가 원통에서 컬러로 인쇄된 3장의 그림을 꺼냈다. 첫 번째 것은 저번에 3가지 시안 중에서 선택한 디자인을 다듬어서 완성한 그림이고, 나머지는 기본디자인을 바탕으로 남자와 여자아이를 형상화한 캐릭터였다.
“기본 디자인은 이미 보셨으니 따로 설명하지 않을게요. 캐릭터는 남자아이는 ‘지산’, 여자아이는 ‘지수’라고 지었어요. 합치면 지산지수가 되고 굳이 한자로 표현하자면 지혜로운 산과 지혜로운 물이 되요.”
“지산지수 좋은데요. 푸른 버섯머리는 산을 형상화 한 것 같은데, 가슴에 두른 하얀 띠는 뭐죠?”
“물, 계곡을 표현한 건데, 때에 따라서는 간단한 표어도 삽입할 수 있도록 디자인 한 겁니다.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아주 좋아요. 디자인에 들어간 색들에 대해서 고유번호가 있다고 하셨죠. 그것도 정해진 건가요?”
“예! 밑에 박스에 전체 사이즈, 색깔 고유번호 등이 표시되어 있어요.”
“음~ 여기 있었네요. 이게 파일로 받을 수 있어요.”
“제가 USB에 담아 왔어요. 마침 컴퓨터가 커져 있으니 복사해 드릴게요.”
경미가 컴퓨터에 USB를 연결하고 폴더를 만든 다음 파일들을 복사했다.
“나머지 디자인이 완성되면 메일로 웹하드 ID하고 PW를 알려드릴게요. 우리 학과에서 공통으로 쓰는 웹하드가 있거든요.”
“알았어요. 그럼 나머지 디자인이 모두 완성되면 책자와 CD로 제작하시는 거죠.”
“예! 그렇게 해야죠.”
“저기 부탁이 있는데, 다른 것보다 깃발하고 간판, 명패, 명함, 푯말을 먼저 디자인 해주세요. 다음주 부터 창고 수리에 들어가는데, 수리 끝나고 정식으로 사무실 개소하면 당장 필요한 것들입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 게요. 디자인에 대해 또 하실 말씀 있나요.”
“다 이야기 한 것 같아요. 나머지는 경미학생이 알아서 잘 해주시겠죠.”
“그럼 이제 업무적인 이야기는 끝내고........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개인적인 이야기?........무슨 이야기요?”
경미가 답답한지 입고 있던 점퍼를 벗고 주스를 조금 마신다.
“이장님! 저에게 주실 것 있지 않나요?”
“저한테 맡겨놓은 물건이라도 있었나요. 아니면 재료비가 부족한 겁니까?”
경미는 말없이 바라보다가 손을 벌린다. 도대체 무엇을 달라는 건지 모르겠다.
“뭘 달라는 건지 말을 해야 알죠?”
“제 속옷!”
“엉? 속옷이요? 무슨 속옷?”
“저번에 제가 입고 있던 속옷 훔쳐가셨잖아요.”
갑자기 머리가 띵하다. 아무래도 그때 사건을 말하는 것 같다. 당시 술에 취해 쓰려져 자고 있는데, 수정이가 경미를 올딱 벗겨서 옆에 눕혀 두었다. 대행이 중간에 깨서 경미가 깨지 않도록 겉옷만 입히고 도망(?)쳤다. 그런데 지금 와서 속옷을 달라고 한다. 다시 말해 경미도 당시 상황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수정학생이 이야기 했어요?”
“물어보나마나 답이 뻔한데 뭐하려 물어봐요.”
“답이 뻔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장님 방이었어요. 그런데 뭐가 허전한 거예요. 알고 보니 입고 있던 속옷이 없더군요. 그날 밤, 저하고 이장님, 수정이 밖에 없었어요. 같은 여자인 수정이가 훔쳐갈 일은 없으니 그럼 범인이 누구겠어요?”
“끄응~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아니 수정학생이 정말 아무 말도 안했어요.”
“했죠. 그 나쁜 년이 그날 상황을 아주 세세하게 설명해 주더군요. 하지만 속옷 이야기는 없었어요.”
“아~ 그래요. 그날 저도 정신이 없어서 속옷을 깜박했어요.”
“일이야 어찌 되었던 이장님이 제 속옷을 가지고 계신 것은 확실하잖아요. 그러니까 주세요.”
“그냥 제가 돈으로 드리면 안 될까요. 새 옷으로 사면되잖아요.”
“설마 제가 그만한 돈이 없어서 달라고 하겠어요.”
“환장하겠네. 아니 없는 걸 어떻게 줍니까?”
“주시기 싫으니까 없다고 하시는 거죠?”
“아니 내가 무슨 변태니까? 여자 속옷이나 감추고 있게........!!”
“그럼 왜 없어요. 분명 그날 저녁까지 입고 있던 속옷이 어디로 갔단 말이에요.”
“버렸어요.”
“버려요?.........왜 남의 물건을 함부로 버려요. 최소한 주인한테 물어보고 버려야 정상 아닌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제가 어떻게 그걸 경미학생한테 물어보겠어요?”
“못 믿겠어요. 분명히 감춰두시고 안 주시는 거죠.”
“미치겠네! 정말.........!!”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대체 이제 와서 왜 그걸 다라는 것일까? 경미는 실눈을 뜨고 째려보다가 내가 한숨만 쉬고 있자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향한다.
“지금 어디가요?”
“제가 직접 찾아보게요.”
“아니 이 사람이.........없다니까! 버렸다니까!”
“제가 찾아보고 없으면 포기할게요.”
“속고만 살았어요. 왜 사람 말을 못 믿어요.”
“방금 버렸다고 하셨죠. 그럼 어차피 없는데 제가 찾아봐도 상관없잖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결단이 서질 않아 지켜보고 있으니 경미가 성큼성큼 안방으로 들어간다. 당시 속옷을 침대 밑에 쑤셔 박았다. 매일 청소하는 연변댁이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다면 안쪽 깊숙한 곳에 있을 공산이 크다.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안방으로 가보니, 이건 또 무슨 황당한 경우란 말인가? 경미학생이 바닥에 엎드려 침대 밑을 살펴보더니 손을 틈새에 집어넣고 낑낑거린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찾았어요. 혹시 기다란 막대기 없어요. 손이 닫지 않네요.”
“잠깐 일어나 봐요. 이야기 좀 합시다.”
경미학생이 고개를 들어 힐끗 보더니 손을 털고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왜 거짓말 하셨어요. 말씀해 보세요.”
“그러니까? 이거 참~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여튼 그날 일은 수정학생의 장난으로 시작됐고, 어떻게 진행되다보니 일이 그렇게 됐어요. 그리고 그 속옷들이 거기 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잃어먹고 있었어요. 미안해요. 제가 기억을 못해서........어차피 그 옷, 경미학생이 다시 입을 것도 아니니 제가 꺼내서 버릴게요. 그럼 되지 않을까요?”
경미는 말없이 지켜보더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제가 그날 일을 기억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무리 취했어도 옷을 벗기는데, 벌거벗은 이장님이랑 함께 있는데, 이장님께서 깨어나 훔쳐보는데, 이장님이 옷을 입혀주는데, 그것도 모르고 잠이나 쿨쿨 자는 한심한 년인 줄 아셨어요?”
“미안합니다. 저는 경미학생이 자고 있는 줄 알았어요. 만일 알았다면 그때 사과했을 겁니다.”
“왜 자꾸만 미안하다고만 하시는 거죠. 이장님은 저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 있어요. 제가 왜 그랬는지, 제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제가 이장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지금 왜 이러고 있는지.........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 있어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최근 들어 이런 경험(?)을 몇 번 해봤기에 온몸의 세포들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젠 싫다. 더 이상 휩쓸리고 싶지 않다. 아내를 비롯한 주변 여자들 문제만으로도 대가리가 빠개질 것 같은데, 경미학생 하고까지 문제를 만들고 싶진 않다. 이런 경우 미적거리다가는 또 분위기에 휩쓸려 사고를 칠지 모른다. 하지만 순수한 경미에게 모진 말은 할 수 있으니 알아듣게 설명해야 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환경적인 요인이나 심리적인 요인도 있으며 상대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안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걸 끝까지 고집하다보면 일차적으로 내가 힘들고 상대까지 힘들게 만듭니다.”
“말 돌리지 마시고, 이장님의 솔직한 마음을 말씀하세요.”
침대 앞에 서서 일장연설을 떠들고 있는데, 경미가 눈을 치켜뜨고 올려다보며 앙칼질 목소리로 말한다. 그냥 적당히 넘어갈 분위기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굳이 7시가 넘어서, 그것도 펜션으로 찾아온 것도 그렇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연변댁이 없는지부터 확인한 것으로 보아 단단히 벼르고 온 모양이다. 그렇다면 보다 분명한 의사를 밝혀야 한다.
“휴~~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경미학생은 동네 어르신의 손녀이며, 제가 CI를 부탁한 학생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미학생에 대해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이장님은 제가 여자로 안 보이시는 모양이죠.”
“그건 아닙니다. 경미학생은 아름답고 순수한 여성입니다. 다만 멀 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꽃이기에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지금은요. 지금 이장님 앞에 있잖아요. 손만 내밀면 꺾을 수 있는 꽃이잖아요.”
“꽃은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나만의 욕심 때문에 꺾어버리면 금방 시들어버리죠.”
경미는 입술을 깨물고 바라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런 선문답. 정말 싫어. 이장님! 제가 싫어요. 왜 제 마음을 몰라주시는 거죠.”
“순간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입니다. 혼자만 생각하지 마시고 주위를 둘려보세요. 나로 인해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마세요.”
“제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건가요. 이장님이 저 때문에 힘들어 하고 계시는 건가요?”
“저는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놈입니다. 하지만 경미학생은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분입니다. 앞으로 살아가며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중에서 경미학생이 진정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분을 만나게 될 겁니다.”
경미는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은 말씀이네요. 그런데 수정이는 되고, 저는 안 된다. 그 해괴망측한 논리는 어떻게 설명하실 거죠?”
수정과의 일까지 알고 있다. 수정이가 떠벌렸단 말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떠벌렸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사차원(?)인 수정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이건 또 어떻게 변명해야 할까? 답답하다. 안 돌아가는 대가리 굴리기보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수정학생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일은 서로가 서로를 원하고, 사랑해서 이루어진 행위가 아닙니다.”
“누가 사랑해 달라고 했나요. 그냥 수정이처럼 편하게 생각하시면 되잖아요.”
“난 경미학생이 건강하고 행복한 사랑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전부터 이야기했죠. 경미학생, 우리 와이프하고 이름도 같고 젊었을 때 분위기도 비슷해요. 그래서 더욱 경미학생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그 잘못된 선택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이장님은 제가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하세요. 수정이와 다녀간 다음날부터 고민하고 고민했어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곤 했어요. 스스로 최면을 결어보기도 하고, 미쳤다고 자책도 해 봤어요.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감정이 사라지기는커녕 깊어만 갔어요. 그리고 오늘 힘들게 용기를 내서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주변에 경미학생을 사랑하는 분들을 돌아보세요. 그리고 과연 그 선택이 올바른 선택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해 보세요.”
“그래도 변하지 않음 어떻게 하죠.”
“그때 다시 이야기해요. 그리고 오늘은 그만 돌아가세요.”
경미는 입술을 깨물고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장님 말씀대로 다시 고민해 볼게요. 대신 이장님도 저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 밑에 있는 속옷들은 제가 꺼내서 버릴게요.”
“알았어요.”
경미는 거실로 나와 소파에 벗어두었던 점퍼를 걸치고 돌아갔다. 세상에는 꺾고 싶은 꽃도 많지만 지켜주고 싶은 꽃도 있다.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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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이 참았네 ...... 잘한일 조금은 내용에서 벗어나는듯 해도 잘한일은 잘힐일이죠 잘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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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문제는 글쎄요 어차피 사람들이 퍼와서 연재하는것 아닌가요?
그러면 누구든 할수 있다는 소리인데....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법적으로야 무슨일이 생기겠어요?? ^^ 큰 마음 ^^가지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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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소설은 소라에 붉은미르 라는 작가님이 집필하셨네요...
현재 작가님에게 쪽지 보냈는데....답장이 올까요?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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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용이 아닌 커뮤니티에서의 무상 공유면..... 원작자 님도 이해해주시지 않을까요?
연락도 드렸는데....^^
아무튼 이번글도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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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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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랑의 시작인가요? 잘 보고 갑니다^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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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연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작은마음 ^^